일러두기
-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지명, 기업, 사건 등은 실제 현실과 관련 없는 허구입니다.
-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표준어문규범을 준용하지 않고 작성된 부분이 있습니다.
1. 특단의 조치
강남 한복판의 고층 빌딩 12층. 낭만인의 보안팀 사무실은 고요했다.
“….”
그냥 고요한 수준이 아니라 숨소리 한 번 내뱉는 것조차도 부담스러울 만큼 완벽한 적막이었다. 조금만 과장을 보태자면 직원들의 눈알 굴러가는 소리마저 또렷하게 들리는 듯했다.
“….”
정자세로 앉아 모니터를 응시하던 재광도 이내 눈알 굴리는 소리에 합류했다. 파티션을 넘어간 시선이 사무실을 어슬렁거리는 인영에게 가 닿는다.
숨 막히는 정적의 원흉, 의주에게로.
재광이 낭만인에 재입사한 지도 벌써 일주일 째였다. 그동안 의주는 하루도 빠짐없이 보안팀 사무실에 출근 도장을 찍었다.
- 이쪽은 보안팀에 새로 합류하게 된 김재광 대리예요.
첫날은 아주 자연스러웠다. 의주가 직접 재광을 데리고 와 직원들에게 소개했고, 그 김에 자리 배정이나 업무 인계가 어떻게 되는지까지 지켜보고 가는 정도로만 보였다.
둘째 날도 그러려니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친분 있는 새 직원이 들어왔으니 적응은 잘하는지, 분위기는 어떤지 살펴보고 가는 것쯤은 이해할 수 있었던 거다.
의문은 사흘 차부터 피어올랐다. 이틀간 업무를 파악하느라 정신없던 재광이 문득 용건 없이 사무실을 산책하는 의주의 여유를 알아차린 시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의주의 방문이 자신 때문이라 무작정 확신한 건 아니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사회생활을 한 지가 어언 3년이지 않던가. 아무리 잘 아는 의주라 해도 회사에서의 습성은 함부로 판단할 수 없었다.
- 저기, 이사님이 원래 이렇게 자주 오시나요?
- 아뇨. 분기에 한 번 오실까 말까죠. 윗사람이 자꾸 들락날락해 봐야 직원들 불편하기만 하다고 회식 때도 잘 안 오시는데. 아, 이번엔 오시려나?
그래서 옆자리 동료에게 넌지시 물었다가 결국엔 확신하고 말았다. 한량처럼 사무실을 드나드는 의주의 목적이 자신에게 있단 사실을.
아마 재광 혼자만의 확신은 아니지 싶었다.
- 김 대리가 이사님 첫 팀원이었다더니 애정이 진짜 각별하신가 봐요.
나흘째부터 동료들이 대뜸 두 사람의 관계를 언급하기 시작했고,
- 어휴, 김 대리 왔으니까 이제 이사님 오시겠네. 얼른 가서 앉아야지.
급기야 닷새째부터는 재광의 동선을 근거 삼아 의주의 등장을 예측하기까지 했다.
농담으로 던지는 말이기는 했으나 재광이 그 안에서 배어 나오는 불편함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둔한 사람은 아니었다. 또, 그들의 불편을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잖은가. 의주는 재광에게나 적당히 기어오를 수 있는 애인이고 동거인이지, 다른 이들에게는 어엿한 상사였다.
회사 분위기가 자유롭다는 점을 고려해도 달라지지 않는 사실이었다. 그가 특별히 누군가의 근태를 지적하거나 업무에 간섭하지는 않았지만 존재만으로도 부담이 되기 충분할 것이다.
실례로, 의주가 올 즈음이면 물을 뜨러 가거나 화장실에 가는 등 자연스럽게 하던 행동들이 모두 중지됐다. 보안팀 사람들은 자유롭게 지내다가도 그가 머무는 시간 동안은 유난히 올곧은 자세로 업무에만 집중했다.
“….”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바짝 긴장한 가운데 눈동자로 의주의 움직임을 좇던 재광은 소리 없는 한숨을 뱉었다. 그리고 의주와 눈이 마주쳤을 때, 상대방만 알아볼 수 있는 눈짓을 해 보였다.
“그럼 전 이만. 다들 오늘도 수고하세요.”
밖에서 따로 보자는 신호였다. 오류 없이 의미를 받아들인 의주가 곧장 인사를 건네고 밖으로 나간다. 장신의 뒷모습이 온전히 사라진 다음에야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있던 직원들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풀어진 자세를 했다.
재광은 한층 긴장이 풀린 동료들을 바라보다가 자신도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모종의 눈길이 오갔으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천연덕스러운 행동이었다. 조금 전 의주가 빠져나간 길을 고대로 밟는 얼굴이 결연했다.
의주에게 단단히 주의를 줄 심산이었다. 그동안은 갓 입사한 자신에게 신경 쓰는 마음을 참작해 이러다 말겠거니 하고 지켜봤지만, 일주일이 넘어가는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도저히 이러다 말 것처럼 보이지 않아 한소리 해야겠다 싶었다.
‘다리가 길어서 그런가. 그새 어디까지 간 거야.’
그런데 적당한 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던 의주가 좀처럼 보이질 않는다. 재광은 미간을 좁히며 신중하게 복도를 살폈다.
다행히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고 짧은 새 코빼기도 안 보이기에 엘리베이터라도 타고 아주 멀리 가버렸나 했더니만. 의주는 복도 끝을 향해 유유히 걸어가는 중이었다.
재광은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하자마자 속도를 높여 그를 따라잡았다. 주변에 아무도 없단 사실을 확인한 뒤에는 냅다 의주의 손목을 낚아채기도 했다.
“왔어? 어, 왜, 뭔데.”
그 탓에 의주의 표정이 다채롭게 변했다. 팀원들 눈을 피한 독대에 달가웠다가, 보기 드문 박력에 의아했다가, 재광이 대답할 새도 없이 그를 비상계단 안으로 밀어 넣을 때는 잔뜩 구미가 도는 안색이 된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당황하기보다는 흥미와 기대에 부푼 모습이었다. 의주는 조금의 반항도 없이 순순하게 재광의 손에 이끌렸다. 이윽고,
쿵.
계단실 문이 반동으로 닫혔다.
묵직한 메아리가 세로로 길게 트인 실내에 웅웅 울리다가 잦아들었다. 그제야 재광이 꽉 붙든 손목을 놓아주자 의주가 자처해 벽에 등을 붙이고 선다.
비스듬히 내린 시선에는 장난기가 그득했다. 당장이라도 재광이 대범하고도 비밀스러운 행위를 해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으레 그렇듯 음흉한 마음을 숨길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 덕분에 쉽사리 낌새를 알아차린 재광이 엷게 미소 띤 의주의 입술을 손끝으로 톡, 건드렸다.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요.”
“말고요?”
“사람들 불편하게 언제까지 사무실에 드나들 거예요?”
“팀원들이 나 불편하대?”
이미 한차례 능청을 쳐낸 재광도 이 뻔뻔함에는 말문이 턱 막힐 뻔했다.
직원들이 상사 불편해하는 것쯤은 진작 알고 이전부터 거리를 유지하던 양반이 난생처음 듣는 소리인 양 반문하니 기가 차서 그랬다. 의도적인 모른 체에 헛웃음이 터진다.
하지만 재광은 그마저도 꾹 눌러 참았다. 그러고는 더욱 강경한 톤으로 받아쳤다.
“그럼 안 불편해요? 매일 한 사무실 쓰는 팀장님이 돌아다녀도 신경 쓰이는 판국에 이사씩이나 되는 분이 자꾸 들여다보는데?”
여기서 의주가 ‘보고 싶은 걸 어떡해’ 라든가, ‘좀 봐줘, 자기야’ 따위의 능글맞은 말을 하며 엉겨들면 물에 씻긴 솜사탕처럼 금세 녹아버릴 걸 알아서였다. 자신의 뜻을 확고히 전하려면 보다 힘을 주는 수밖에 없었다.
의주가 서운해할 것까지 고려한 처사였다. 그런데, 잠자코 듣던 의주가 별안간 푸스스 웃음을 흘린다.
“뭐야, 왜 웃어요?”
예상 밖의 반응에는 재광도 김이 샜다. 한껏 힘을 주던 직전에 비해 한풀 꺾인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그에 의주는 은은한 미소가 어린 얼굴로 재광을 마주했다.
“너 왜 둘이 있는데 존댓말 써?”
“아….”
사무실에서 갓 벗어난 나머지 스위치를 유연하게 바꾸지 못한 거다. 뜻밖의 실수에 페이스를 잃은 재광이 눈만 끔뻑거리자 의주가 별안간 마른세수를 한다. 기다란 손가락 너머로는 숨 같은 웃음이 샜다.
"아 진짜. 옛날 생각나서 벅차다, 광아.”
“….”
“우리 처음 만났을 때는 네가 나 싫어했는데. 그치.”
재광의 머리칼을 가볍게 흐트러뜨리며 맞추는 눈길은 감회에 젖은 빛이었다. 이제는 까마득한 옛이야기에 민망해진 재광이 “아니 그때는…” 하고 입을 열었다가 잽싸게 손길을 피했다.
하마터면 능구렁이한테 휘말려 본론이 흐지부지될 뻔한 타이밍이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재광은 이전보다 더 단단한 목소리를 냈다.
“아, 말 돌리지 말고. 이제부터는 용건 없이 와서 어슬렁거리지 마.”
“와 야박해. 그래도 명색이 사내 연앤데 겨우 들여앉혀 놓고 얼굴도 보지 말라고? 그럼 그 전이랑 뭐가 달라.”
“다르지. 출근도 같이 하고 시간 맞으면 퇴근도 같이 하는데. 가끔 점심도 같이 먹을 수 있고, 근무 시간에 지나가다가 마주치기도 하고.”
재광이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대꾸하자 이번에는 의주가 관자놀이를 짚는다.
“아… 너무 똑똑하게 키웠어. 김재광 옳은 소리만 하는 것 봐.”
“옳은 소린 거 알면 이제 사무실 산책 금지.”
아랑곳하지 않은 재광은 단호하게 결론을 내리며 의주의 가슴팍을 가볍게 두어 번 쳤다. 잠자코 있던 의주가 그새를 못 참고 손목을 당겨 안으려 했으나 그쯤은 손쉽게 피했다.
“잠깐 나온 거라 얼른 가야 돼.”
본능적인 대처였다. 여기서 얌전히 안겼다가는 간단한 포옹으로 끝나지 않으리란 걸 직감한 거다.
“어떻게 된 게 한 회사 다니니까 더 안달이 나냐.”
막연한 김칫국은 아니지 싶었다. 필요 이상으로 아쉬운 내색을 한 의주가 마지못해 재광의 엉덩이만 툭툭 두드렸다. 재광은 그 손을 고스란히 잡아챘다.
연인으로서 최소한의 예의였다. 회사에서 포옹, 혹은 그 이상의 스킨십은 허용 못 하겠지만 잠깐의 손깍지 정도는 흔쾌히 나눌 수 있었다.
“이따 퇴근할 때 봐. 연락할게.”
재광이 손가락 사이사이 맞춰 잡은 손을 흔들며 인사하자 의주도 더는 매달리지 않고 이만 그를 놓아줬다.
????
오후 세 시가 넘어가는 시각. 평소라면 의주가 출몰할 무렵이건만 오늘은 왠지 잠잠했다. 그 때문에 바른 자세로 앉아 이사의 등장을 기다리던 직원들이 한마디씩 얹는다.
“오늘은 이사님 안 오시나 봐요?”
“그러게요. 위에 뭐 회의라도 있나?”
저마다 의문을 표하던 이들의 눈길은 이내 재광에게로 향했다. 파티션 위로 목을 길게 빼고 쳐다보는 시선을 느낀 재광은 어깨만 한번 으쓱거렸다. 그리고 저를 보던 눈동자들이 제자리를 찾은 뒤에야 혼자 피실, 웃음을 흘렸다.
깜빡했던 사실이 문득 떠오른 탓이다. 햇수로 4년 차에 접어든 연애에서는 더 이상 일방적으로 요구할 일이 없어 잊어버렸었는데,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의주는 원래 재광의 말을 잘 들어주는 편이었다.
- 아니, 그니까 저번처럼 괜히 못 가게 방해하지 말라고요!
두 사람이 이런저런 해프닝 끝에 섹스 파트너가 되었을 때도 미리 못 박아놓은 룰은 잘 지켰고,
- 딴 사람들 있는 데서 이러지 마세요.
- 하지 마? 알았어.
회사에서 불필요한 스킨십을 하지 말라는 요구도 흔쾌히 받아들였었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참 한결같은 사람이다 싶어 저절로 웃음이 샜다. 이렇게나 말을 잘 들을 줄 알았다면 비상계단에서 수작을 부릴 때 뽀뽀 정도는 해줬어도 괜찮았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역시 섣부른 판단은 금지인 모양이다. 의주의 부재에 다들 조금씩 풀어지려는 찰나, 문가에서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익숙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나가다가 들렸어요. 딱 당 떨어질 시간인 거 같아서.”
손에 든 쇼핑백에서 잘 포장된 마카롱을 꺼내 들면서.
그의 행동을 지켜보던 재광은 허, 하고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쳤다. 무의식중에 벌어진 입술이 도로 닫히기도 전에 남은 기억들이 마저 떠오른다.
의주가 재광의 요구를 잘 들어줬던 건 맞지만 그게 끝은 아니었던 거다. 다른 직원들 앞에서 턱을 간질이기에 이러지 말랬더니 다음에는 목덜미를 쓸어내리고, 그마저도 금지당한 뒤에는 옆구리를 지분대던 사람이 바로 의주였다.
거기까지 고려하면 정말이지, 이렇게나 대쪽 같은 사람은 또 없을 듯했다. 다만 조금 얄미워서 그렇지.
‘용건 없이 오지 말랬더니 이제 간식 핑계로 오는 거냐고.’
재광은 가늘게 뜬 눈으로 부지런히 움직이는 의주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제 뒤통수에 꽂히는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의주는 그저 마카롱을 나눠주느라 바쁘다.
가장 안쪽에 있는 팀장 자리부터 움직이기 시작한 의주는 머지않아 재광의 자리까지 도착했다. 4구짜리 마카롱 세트를 키보드 옆에 놓아주면서도 시선만은 재광의 얼굴을 향한다. 영 마뜩찮은 표정을 보고도 아랑곳하지 않은 그는 생긋 웃으며 윙크를 날렸다.
“김 대리님, 수고해요.”
목덜미를 은근하게 주무르고 떨어지는 손길은 덤이었다. 재광은 이 인간이 과연 얼마나 뭉개다 갈 것인가를 가늠하느라 깜짝 놀라는 것마저 잊었다.
“그럼 다들 남은 시간 힘내세요.”
그러나 거기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용건 없이 사무실을 어슬렁대지 말라기에 간식을 방패삼아 들고 온 줄 알았던 의주가 배분만 끝마치고 자리를 떴기 때문이다.
이거야말로 의외의 행보였다. 굳이 1층에 있는 카페까지 가서 마카롱을 사 오는 정성까지 들여놓고 딱 전달만 하고 가다니. 하지 말라면 편법으로라도 해내고야 마는 의주치고 퍽 싱거운 반응이 아닐 수 없었다.
좀처럼 의주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 재광은 고개를 작게 갸웃거렸다. 그러고는 사방에서 포장을 뜯는 소리를 배경음 삼아 들으며 메신저를 켰다.
갑자기 웬 마카롱?
이거 주러 온 거야?
오후 3:19
동거인
ㅇㅇ
그동안 불편했을 직원들에게 주는 소소한 사과의 선물.
나는 양심 있는 이사니까
오후 3:20
아…
오후 3:20
동거인
왜
오지 말랬는데 또 갔다고 혼낼 거야?
오후 3:22
아니 그게 아니고
오후 3:22
동거인
오늘은 봐줘♥
오후 3:23
능청스러운 하트를 눈에 담은 재광은 괜스레 목덜미를 문질렀다. 자신의 당부대로 해주겠다는 건 고맙지만, 생각지 못한 선물까지 챙기자 불쑥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거다.
- 그럼 안 불편해요? 매일 한 사무실 쓰는 팀장님이 돌아다녀도 신경 쓰이는 판국에 이사씩이나 되는 분이 자꾸 들여다보는데?
좋게 말해도 충분히 들어줄 사람한테 너무 세게 얘기한 건 아닌가 싶어서였다. 자칫하다간 제가 말릴 듯해 지레 더 강경하게 나가긴 했으나 저쪽에서 너무 순순하게 나오니 민망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다.
하여간 여의주는 사람 맘 들었다 놨다 하는 데 선수였다. 당장의 10분만 놓고 봐도 미더웠다가 못 미더웠다가, 끝내는 생각지 못한 세심함으로 되레 미안하게 만들지 않던가. 심지어는 역시 어제 뽀뽀를 해줄 걸 그랬다는 후회까지 재차 밀려왔다.
덕분에 멋쩍은 기분으로 모니터를 노려보던 재광은 “자기야?” 하는 말풍선이 떠오를 즈음에야 다시 키보드에 손가락을 올렸다.
형 지금 바빠?
오후 3:36
지나간 일은 되돌릴 수 없겠지만, 그렇다고 만회하기에 너무 늦은 시점도 아니었다. 의주가 자신의 방식으로 제게 맞춰주었으니 이제부터는 재광도 제 방식으로 의주에게 맞추면 될 듯했다.
????
의주는 재광의 늦은 답장에 칼같이 ‘ㄴㄴ’ 두 글자를 찍어 보냈다. 그리고 7분 뒤에는 건물 로비에 서 있었다.
바쁘지 않다면 커피를 사러 가자는 재광의 제안에 득달같이 응한 참이다. 의주는 한발 늦은 타이밍에 걸어 나오는 재광을 발견하고 단숨에 다가가 어깨에 팔을 척 얹었다.
“오지 말라고 했어도 막상 금방 가버리니까 아쉽지? 고새를 못 참고 또 보고 싶어서 불러내고 말이야.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건네는 말소리에는 들뜬 기색이 역력했다.
“참 나.”
재광은 장난스럽게 눈을 흘기면서도 적극적으로 부인하지는 않았다. 그저 얌전히 발을 맞춰 걸을 뿐이었다.
인근 카페에 가는 길이었다. 건물 1층에도 넓은 프랜차이즈 카페가 있지만 위치 특성상 회사 사람들이 자주 드나들기에 두 블록 떨어진 곳까지 가기로 했다.
데이트할 때처럼 여유를 부릴 순 없으니 커피만 사서 바로 돌아오는 코스였다. 그러나 둘 중 누구도 불만을 표하지 않는다. 먼저 제안한 재광은 당연하고, 의주 또한 업무 중 둘만의 시간을 갖는다는 사실 자체로 만족하는 눈치였다.
“앞으로 회사에서 보고 싶으면 이렇게 둘이 봐. 괜히 딴 사람들 불편하게 하는 것보단 이게 낫잖아. 우리도 더 편하고.”
재광은 횡단보도를 하나 건넌 다음에야 입을 열었다. 유동인구가 많은 대로변에서 건물 사이의 길목으로 막 접어든 차였다. 정면을 보고 걷던 의주가 곁에서 들리는 말소리에 비스듬히 시선을 내린다.
“진짜? 와, 우리 김 대리 엄청난 결단을 내리셨네. 그럼 나는 하루에 커피 다섯 잔도 거뜬히 마시지.”
무게감 없는 음성으로 너스레를 떨 때는 재광이 팔꿈치로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아 쫌” 하며 서두만 뗐는데도 이어질 말을 훤히 꿰뚫은 의주가 목소리에 장난기를 뺐다.
“근데 진짜 갑자기 왜? 어제까지만 해도 또 찾아가면 소금 뿌릴 기세더니.”
“아니 뭐, 생각해보니까 입사하기로 했을 때부터 형한테는 기대치라는 게 있었을 텐데 너무 일방적으로 내 의견만 앞세운 거 같아서….”
“응, 그래서?”
“어느 정도 선에서는 타협할 수 있는 문제니까 그렇게 하겠다는 거지.”
느린 말투로 대꾸하던 재광은 괜스레 손끝으로 제 볼을 긁었다.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으나 어제 그렇게 쏘아붙인 행위를 미안해하는 티가 역력했다.
의주는 크, 하며 과장된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어 터지려는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꾹 다문다.
재광의 미안함이 어디서 기인했는지를 뻔히 아는 탓이다. 답지 않게 사람을 몰아 세워놓고 정작 일말의 반항 없이 요구에 응하는 모습을 보니 너무했나 싶었겠지.
원래도 눈치가 빠른 데다가 다년간의 연애로 재광을 모조리 파악한 의주로서는 그의 심경 변화 과정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재광에게 내색하지 않은 사실이 있었으니. 꾸준한 사무실 방문도, 하루아침에 발길을 끊기로 한 결정도 모두 재광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거다.
- 이쪽은 보안팀에 새로 합류하게 된 김재광 대리예요.
처음에는 한 회사에서 재광을 본다는 게 신기하고 뿌듯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던 게 맞았다. 하지만 이후부터는 다른 마음이 섞였다.
새 직원. 그것도 이사와 똑 닮은 얼굴에 대학 후배, 심지어 낭만인 초창기 인턴이었다는 사실까지.
재광에게는 남들 이목을 끌 사유가 너무 많았다. 그뿐일까. 묵묵하지만 수더분한 성격인 그는 어딜 가도 잘 섞여들기까지 했다.
그래서 지레 예민하게 레이더를 세웠더랬다. 새로이 합류한 직원에게 한창 타인의 관심이 쏠릴 시기, 누군가 동료 이상의 호기심을 갖고 그를 보진 않을지 면밀하게 관찰했다.
물론 별다른 소득은 없었지만.
- 그럼 안 불편해요? 매일 한 사무실 쓰는 팀장님이 돌아다녀도 신경 쓰이는 판국에 이사씩이나 되는 분이 자꾸 들여다보는데?
재광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애당초 의주의 우려가 기우에 불과하다면 가장 깔끔하겠지만, 만에 하나 재광에게 호감을 갖는 이가 있다 하더라도 ‘이사씩이나 되는 분’ 앞에서 그런 맘을 드러내진 않을 터였다.
그 말인즉슨, 감시하는 방식으로는 앞으로 얼마를 더 지켜봐도 낌새를 잡아내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만둔 거였다. 다른 직원들이 불편했다는 건 변명의 여지없이 인정하는 바라 만회의 선물까지 준비해서 완벽한 마무리를 지은 것이다.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본인의 판단이고 재광의 직언은 거든 것뿐이었는데….
회사에선 딱딱하기 그지없던 애인이 돌연 물러져서는 둘만의 시간을 허락해주겠단다.
의주에게는 내칠 이유가 조금도 없는 제안이었다. 그는 애써 지난 한 주간 품었던 속내를 터놓는 대신 언제나처럼 여유 넘치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역시 김 대리 유능해. 이렇게 빨리 대안을 찾아오고.”
뒷머리를 헤집는 손길에는 재광이 가볍게 웃는다. 슬며시 시선을 내려 미소 짓는 얼굴을 살핀 의주가 별안간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유능한 김 대리님.”
누가 들어도 꿍꿍이가 있는 언사에 재광이 걸음을 늘어뜨렸다.
“뭐야,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사무실에 용건 없이 찾아가는 건 그만하기로 했으니까, 대신 모레 회식에 참석하는 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내 관할 부서라 자연스러운 그림 같은데, 결재 좀.”
“송구하지만 반려요. 여태까지 참석 안 했다면서 갑자기 오는 건 하나도 안 자연스럽거든요.”
단호한 대답 끝에는 잠시 늘어졌던 발길이 도로 빨라졌다. 아쉬운 듯 입맛을 쩝, 다시던 의주는 놓치지 않고 그의 속도를 따라잡았다.
“그럼 데리러 가는 건?”
한발 양보하는 셈 치고 차선책을 내밀어 봤지만 이번에도 여의치 않았다. 다년간의 사회생활에서 비롯된 든든한 목소리가 정중히 제안을 거절한다.
“괜찮아. 뭐 얼마나 마시겠어. 적당히 있다 들어갈 테니까 걱정 마.”
????
애석하게도 재광이 드물게 내보인 자신감은 이틀 만에 무너졌다.
“김 대리님, 괜찮으세요?”
회사 인근의 고깃집. 재광은 다 풀린 눈으로 간신히 몸을 가눴다. 테이블 위로 턱을 괴려다가 삐끗해 과하게 비스듬한 자세였다. 그는 흐물거리는 손짓으로 괜찮다는 답을 대신했다.
아무래도 낭만인의 저주에 걸린 게 틀림없었다. 바야흐로 4년 전, 인사불성이 되어 일생일대의 사고를 친 게 바로 낭만인 첫 회식 때였지 않나. 그 뒤로 이직을 하고 3년간 수없이 많은 회식을 겪었지만 한 번도 만취한 적이 없었다.
데리러 오겠다는 의주의 제안을 덤덤히 거절할 수 있었던 이유도 그래서였다. 회식 자리에서 몸 사리는 방법쯤이야 진작 다 습득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맥없이 취해버릴 줄이야.
“김 대리 누가 이렇게 먹였어?”
정말 취하는 줄도 모르고 취했다. 새로 합류했다 해서 억지로 술을 권하는 이도 없었고, 다들 전투적으로 술을 들이켜는 분위기도 아니었건만 고기를 안주 삼아 한 잔, 두 잔 넘기다 보니 어느새 시야가 뿌옇게 변해버렸다.
침침한 눈을 힘주어 몇 번 끔뻑거린 재광은 얼얼한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제법 힘을 줬는데도 별다른 감각이 느껴지지 않자 본능적으로 휴대전화를 꺼내 들며 일어선다.
취한 정신에도 이대로는 집까지 온전히 갈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참이었다. 조금 모양 빠지긴 해도 의주에게 데리러 오라고 할 요량이었는데, 맘처럼 움직이지 않는 몸이 크게 휘청거리고 만다.
“어어! 조심하세요, 대리님!”
곁에 앉아 있던 황 주임이 서둘러 잡아주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을 터였다. 겨우 의자에 앉은 재광은 핑핑 도는 시야를 가라앉히려 벽에 머리를 기댔다.
벽에 찰싹 붙어서도 자꾸만 몸이 흔들거렸다. 그런 재광의 상태를 유심히 살피던 동료들은 그를 어떻게 수습할지 논의하기에 이르렀다.
“김 대리 집 아는 사람 있어?”
“이사님이랑 친하다면서요. 회사에 이사님 계신지 보고 올까요?”
“그걸 지금 농담이라고 하냐? 그 뭐야, 김 대리 누구랑 같이 산다면서. 폰 한번 봐봐.”
“회사 휴게실에 눕힙시다!”
재광이 유독 많이 취한 것뿐이지, 다들 술기운이 도는 상태라 영양가 없는 의견도 다수였다. 그 틈에서 쓸 만한 해결 방안을 추려낸 황 주임은 “죄송합니다, 대리님” 하고 중얼거리며 재광의 손에 들려있던 휴대전화를 뽑아 들었다.
“근데 본다고 뭐 아냐고….”
이미 잠금이 풀려 있어 연락처에 접근하기는 쉬웠으나 그다음이 난관이었다. 재광이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사실은 알지만 그 인물이 어떤 이름으로 저장되어 있을지는 모르지 않던가. 그 때문에 난감한 표정을 하던 황 주임이 이내 반색했다.
동거인.
누가 봐도 같이 사는 사람일 수밖에 없는 이름을 찾은 것이다. 그는 망설임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응, 광아.
신호가 정상적으로 가는지 확인할 틈도 없었다. 상대방은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되레 당황한 황 주임은 “어?” 하고 실없는 소리를 뱉다가 서둘러 정신을 차렸다.
“아, 안녕하세요. 김재광 대리님이랑 같이 사시는 분 맞으시죠?”
― 뭐야, 누구세요? 어디시죠? 재광이는요. 무슨 일 있습니까?
“저기, 그게. 저는 회사 사람인데, 대리님이 회식 중에 많이 취하셔서요. 혹시 댁이 어딘지 알려주시면….”
택시를 태워서 보내겠다, 직접 데리러 올 수 있다면 위치를 알려주겠다. 그리 얘기하려던 차였다. 상대방은 선택지를 다 듣지도 않고 대뜸 대답부터 했다.
― 이 번호로 주소 남겨주세요. 회사 근처죠? 10분 내로 갑니다.
길지 않은 말이 흘러나오는 내내 기기 너머가 부산스러웠다. 전화를 막 받을 때까지만 해도 평온하던 목소리가 흔들리고 쉼 없이 잡음이 끼어든다.
아마 이리로 올 채비를 하는 모양이었다. 놀라운 스피드에 얼떨떨해진 황 주임이 “네” 하며 숨 같은 대꾸를 흘리고는 통화를 마쳤다.
“같이 사는 사람 맞아? 뭐래?”
귀에서 기기를 떼자마자 팀장이 묻는다. 통화 내역을 보며 자신의 휴대전화에 동거인 번호를 옮겨 찍던 황 주임은 아직도 어리둥절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10분 내로 온다는데, 그게 빨리 오겠다는 소린지 진짜로 10분 안에 온다는 건지는 모르겠어요.”
말을 마친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문자 메시지 전송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조금 뒤.
“이사님, 안녕하세요!”
“어어? 이사님, 여긴 어쩐 일로….”
“김 대리 취했다면서요.”
진짜로 10분 안에 도착한 동거인의 정체에 보안팀 사람들이 기함했다. 아무도 말을 얹지는 않지만 친하다고 듣긴 했어도 같이 살 정도인 줄은 몰랐다는 표정들이었다.
평소의 의주였다면 척 봐도 단짝처럼 보이지 않느냐고 실없는 소리 한마디쯤은 건넸을 상황이었다. 그러나 목적에 충실한 그는 직원들을 둘러볼 여유 없이 재빠르게 재광부터 찾았다.
어렵지는 않았다. 갑작스러운 이사의 등장에 모두가 일어선 터라 홀로 벽에 기대앉은 인영이 단박에 눈에 띄었다. 곤히 잠든 재광의 앞에 무릎을 접어 앉은 의주는 비로소 헛웃음을 쳤다.
- 괜찮아. 뭐 얼마나 마시겠어. 적당히 있다 들어갈 테니까 걱정 마.
불과 이틀 전에 들은 담담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릴 때는 당장이라도 깨워 놀려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얼마나 마시긴, 아주 짝으로 들이부었고만.’
속으로는 그렇게 읊조리면서도 조금 전까지 헛웃음을 짓던 얼굴에는 묘한 안도감이 떠올랐다. 그는 “이사님인 거 몰랐어?”, “전화로 들으니까 몰랐어요” 하는 직원들의 대화 소리를 들은 체 만 체하며 잠든 재광의 얼굴만 유심히 들여다봤다.
지금이야 깨워서 놀려주니 마니 하는 생각을 하지만, 막 전화를 받았을 때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재광의 번호 너머로 들리는 낯선 목소리는 실로 강렬한 불안감을 조성했다.
따지자면 이틀 전 재광이 내보인 자신감을 철석같이 믿은 탓이 컸다. 그가 밖에서 새는 바가지라 여겼더라면 단번에 전화의 의도를 알아차렸을 텐데, 당연히 멀쩡한 모습으로 귀가할 거라 확신하던 중이라 놀랐던 거다.
집에 가다 사고라도 난 건가, 순간 스치던 망상을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이 철렁했다. 그리고 그만큼 허탈함이 크게 밀려왔다.
마음 같아서는 딱밤이라도 한 대 쥐어박고 싶건만 세상모르고 자는 얼굴을 보면 차마 그럴 수도 없었다. 의주는 쯧쯧 혀를 차며 검지 끝으로 톡, 볼만 건드렸다.
“어….”
아주 작은 접촉이었으나 재광에게는 확실한 자극이 된 듯했다. 여태 꿈쩍도 안 하던 재광이 무거운 눈두덩을 천천히 들어 올린다. 겨우 실눈을 떴다가 감기를 반복하던 그는 조금 뒤에야 눈동자를 반쯤 드러냈다.
“아… 집이다.”
눈앞에 보이는 의주의 모습에 착각한 것 같았다. 그 반응에 기어이 웃음을 터뜨린 의주는 “아니다” 하며 재광의 늘어진 말투를 따라 하더니 이내 등을 돌렸다.
“업는 것만 좀 도와줄래요?”
아직도 신기하다는 양 구경하는 직원들에게 도움을 청하자 황 주임이 서둘러 재광을 부축했다. 축축 처지는 몸뚱이를 의주의 등에 싣고 양팔을 목 옆으로 늘어뜨리자 그럴싸한 자세가 나온다.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이만 가게를 나서는 게 자연스러운 그림이었다. 그 전에 직원들에게 마저 즐기다 가라고 인사나 할 심산이었는데. 문득 장난기 어린 음성이 의주의 귓가를 훅 파고든다.
“세희 씨 서운해서 어떡해요?”
“제가 왜요?”
“김 대리님한테 관심 있다면서요. 말도 못 걸어보고 오늘 회식 끝인데?”
그리 큰 목소리가 아닌데도 귀에 꽂히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이럴 줄 알았지, 내가.’
기우이길 바랐던 우려가 결국 현실이었던 거다.
머리 좋아, 체격 좋아, 하다못해 촉까지 좋아버린 의주는 재광의 허벅지를 단단히 옥좼던 팔에 힘을 뺐다. 그러자 등에 매달려 있던 재광이 스르륵 미끄러져 도로 의자 위에 안착한다.
“…이사님?”
조금 전까지 재광을 업도록 도왔던 황 주임이 얼떨떨한 목소리를 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영문을 몰라 의주를 바라보는 표정이 어색했다.
그런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의주는 “잠깐만요” 하고는 괜한 시간을 끌며 서 있었다. 조금 떨어진 테이블에서는 의주의 신경을 거스르는 대화가 눈치 없이 이어졌다.
“관심이라뇨. 그냥 얼굴이 좋아하는 상이라는 거지. 저는 회사 사람한테 사심 안 가져요.”
“진짜요?”
“그럼요. 저희 언니가 그러는데 사내 연애는 하는 거 아니랬어요.”
이만하면 우스갯소리로 넘길 만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똑 부러지게 대답하던 사원이 돌연 짓궂은 말투를 낸다.
“그치만 만약에, 진짜진짜진짜진짜 만약에 밖에서 만나게 되면 또 모르긴 하겠죠?”
말단 사원의 당찬 언사에 일행들이 장난스러운 환호를 보냈다. 괜히 매무새를 다듬고 주머니를 뒤지며 시간을 죽이던 의주의 눈썹이 불만스럽게 들썩거린다.
욕심 같아서는 당장 저 테이블에 합류하고 싶었다. 재광의 이목구비 어떤 부분이 좋아하는 상에 부합하는지, 저를 빼닮았건만 왜 콕 집어 재광인지 따위를 속속들이 캐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당장 내일이면 이사님이 회식 자리에서 어떤 말을 하고 갔는지 소문이 쫙 날 걸 알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재광의 귀에도 들어갈 테고.
그건 하나도 멋지지 않았다. 질투에 눈이 멀어 새파랗게 어린 말단 사원을 상대로 기 싸움이라니. 멋지지 않다 못해 다소 모양이 빠진다.
그래서 지금 당장은 조금 더 성숙한 방법으로 흐름만 끊어놓기로 했다. 저쪽 테이블에서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드는 거냐, 얘기는 좀 나눠 봤냐― 하고 대화를 이어가는 타이밍. 의주는 느긋하게 지갑을 꺼내 들었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 참!”
의도적으로 목소리를 높이자 모두가 이쪽을 돌아본다. 조금 전까지 재광을 두고 떠들던 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벌써 가시게요?”, “조금 더 있다가 가세요” 하는 말들을 흘려보낸 의주는 지갑 속에서 용사의 검처럼 빼든 카드를 높이 치켜올렸다.
“우리, 김 대리 환영 회식이니까 여긴 제가 계산하고 갈게요.”
그러자 더 머물다 가라고 붙잡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환호성이 터진다. 숨김없이 우쭐한 기색을 내보인 의주는 당당히 결제를 마친 뒤 재광을 둘러업고 고깃집을 나섰다.
????
“사람 이렇게 옹졸하게 만들어 놓고 혼자만 편하지, 아주.”
밤늦은 시각, 차들이 빼곡하게 들어선 주차장을 맴돌던 의주가 중얼거렸다. 투덜거림에 가까운 말투였으나 곁을 돌아보며 짓는 미소만은 다정했다.
당연하게도 조수석에는 재광이 있었다. 고깃집에서부터 업어가는 줄도 모르고 자더라니, 그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한 번 뒤척이지도 않고 숙면 중이었다.
재광의 회식을 이유로 회사에 남아 있던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그저 쌓인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던 것뿐이지만 덕분에 취한 재광을 얼른 챙겨올 수 있었잖은가.
이만하면 정말 엄청난 궁합이 아닐 수 없다고. 속으로 되뇐 의주는 꽉 들어찬 주차장을 한 바퀴 돌아 한 층 아래로 내려갔다.
지하 2층 주차장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가벼이 핸들을 쥔 의주는 빽빽하게 들어선 차들을 훑어보며 느릿하게 이동했다.
“역시 여의주. 천운의 사나이.”
빈틈없이 끼워 맞춘 블록처럼 사방이 촘촘했으나 의주는 그 안에서도 틈을 발견했다. 가장 안쪽 모서리에 딱 하나 남은 자리를 발견한 것이다. 흡족한 웃음을 띤 그는 매끄럽게 빈칸 안에 차를 세웠다.
이제는 차에 탈 때 그랬듯 정신없는 재광을 업고 집으로 올라가기만 하면 됐다. 달칵, 안전벨트를 푼 의주는 콘솔 박스를 짚고 조수석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재광의 안전벨트도 마저 풀어놓고 내릴 생각이었다. 그랬는데, 막상 거리를 좁히자 고개를 비스듬히 떨어뜨리고 잠든 재광의 얼굴에 시선이 꽂힌다.
벌써 몇 년째 보지만 새삼스럽게 참 닮았다 싶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금세 의문이 피어오르고 만다.
- 관심이라뇨. 그냥 얼굴이 좋아하는 상이라는 거지.
이렇게나 닮았는데 왜 굳이 재광일까, 싶었다.
높은 싱크로율을 자랑하는 생김새건만 굳이 재광을 이상형으로 꼽아 자존심이 상한 건 아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제 쪽에 관심을 보이는 편이 덜 신경 쓰일 거란 판단이었다.
그렇지 않나. 애당초 게이 외길을 걸어온 의주에게는 어떤 매력적인 여자도 감흥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의주를 만나기 전까지 이성과 사귀었던 재광을 주어로 바꾼다면 달랐다.
그를 못 믿어서가 아니다. 늘 이래도 응, 저래도 응― 하는 재광도 단호할 때는 얼마나 칼 같은지 의주가 가장 잘 알지 않던가.
다만 기분의 문제였다. 재광의 교제 대상 범주에 들어갈 수 있는 누군가가 호감을 보인다? 배알이 꼴려 가만두고 볼 수 없었다. 손톱 옆에 뜯길 듯 뜯기지 않는 거스러미가 돋은 것처럼 거슬린다고나 할까.
“….”
아무 생각 없을 게 분명한 요 미니미를 어떻게 사수해야 하나, 생각하는 의주의 얼굴이 진지했다. 긴 숨을 내쉬며 고민하던 그의 손끝이 재광의 눈가에 가 닿는다.
순하게 내려간 눈매 끝을 짚은 의주는 가볍게 손가락을 위로 밀어 올렸다. 그러면서 ‘이러면 좀 달라 보이나’ 하는 마음으로 감상하던 차였다.
“…집이야?”
여태 숨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자던 재광의 눈이 뜨인다. 곧바로 손을 뗀 의주는 푸스스 웃음을 터뜨렸다.
회식 자리에서도, 지금도 자꾸만 집을 찾는 게 웃겨서 그랬다. 저를 안심시킬 때 적당히 있다 들어오겠다고 했던 말을 무의식중에 대단히 신경 쓰고 있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응, 집이야. 다 왔어.”
의주는 자상하게 대답했다. 여전히 콘솔 박스를 짚고 몸을 숙인 상태로.
그게 문제였던 걸까. 의주가 문득 재광의 얼굴을 감상했던 것처럼 재광의 시선이 의주를 떠날 줄을 모른다. 술기운에 풀려 흐리멍덩한 눈동자를 하고서도 집요하게 의주의 이목구비를 뜯어본다.
가만히 시선을 맞추던 눈동자는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그러고는 잠시 멈춰 있는가 싶더니,
쪽.
소리가 나게 의주에게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귀여운 짓 하네, 김재광.”
불시에 입맞춤을 당한 의주가 만족스러워하는 건 예견된 일이었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가슴을 떨며 웃었다. 그러자 여전히 정신없어 보이는 재광이 새는 발음으로 열심히 대답한다.
“아… 그때 못 해줘가지고….”
“그때? 언제.”
“그때…. 그, 거기. 계단에서.”
“계단? 아, 나 사무실 오지 말라고 했던 날?”
재광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술 냄새가 배어 나왔으나 의주는 꾸준히 성의 있는 답을 줬다. 재광이 고갯짓으로만 대꾸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오지 말라고 그렇게 무섭게 얘기하더니 갑자기 왜.”
“그때는 말을 그렇게 잘 들을지 몰랐으니까. 근데 하루아침에 바뀌니까, 착해서.”
“말 잘 들으니까 뽀뽀라도 해줄걸, 했어?”
“응.”
이번에 의주는 호쾌하게 웃었다. 나이 서른셋에 말 잘 들었다고 뽀뽀를 받다니. 기가 조금 막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꼭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칭찬 스티커야 뭐야.”
“왜, 싫어?”
“광아, 내가 이런 거 싫어할 사람이야? 당연히 좋아서 그러지.”
의주는 좋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쉽사리 웃음을 갈무리하지 못했다. 도톰한 입술 끝이 내려올 줄을 모르고 계속해서 호선을 그린다.
이렇게 되면 심각했던 이전의 고민도 다 소용없게 된다. 부드럽게 휘어진 입술이 이내 다시 재광에게 닿았다. 흐린 눈빛으로 멀뚱히 의주를 보고 있던 재광의 눈이 반사적으로 감겼다.
닮은 얼굴이 겹쳐지고, 두 사람 모두 말을 잃은 차 안에는 정적만 흘렀다. 그런데 별안간 옷깃 스치는 소리가 유난하게 공기 중을 울렸다.
재광이 의주의 목 뒤로 팔을 두르는 소리였다. 가벼운 뽀뽀에는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라, 맞댄 입술을 뗀 의주가 가까이서 재광의 눈을 마주했다.
“….”
“….”
오가는 말은 없었다. 대신 잠시 떨어졌던 입술이 다시 맞물렸다.
의주가 입술 끝을 가볍게 물었다 놓기를 반복하는 동안 재광이 그 움직임을 따라왔다. 그 탓에 빈틈없이 맞닿은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이 섞였다.
몇 번이고 감쳐물던 살갗을 놓은 의주는 자연스럽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었다. 재광의 허벅지를 짚던 손이 슬며시 올라가 뒷머리를 받칠 즈음이었다. 열 오른 입안으로 들어간 의주는 유연하게 살덩이를 움직였다.
오랜만에 느끼는 술기운에 재광이 더딘 움직임을 보였으나 그쯤은 전혀 상관없었다. 의주는 더듬더듬 자신을 따라오는 재광의 혀를 진득하게 쓸어내렸다. 돌기가 다 느껴질 만큼 넓게 마찰한 혀가 이내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간다.
혀끝을 뾰족하게 세워 미끈한 점막을 간질이자 재광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그러나 잠시뿐이었다. 아주 잠깐 굳어있던 재광은 곧 능숙하게 제 입안을 휘젓는 살덩이를 빨았다.
차 안은 어느새 축축한 마찰음으로 가득 찼다. 두 사람이 고개를 비스듬히 틀며 깊게 파고들 때마다 진득하게 혀가 얽히는 소리 사이로 틀어 막힌 신음이 샜다.
“으응… 흐.”
이미 조수석으로 반쯤 넘어간 의주는 그제야 집요하게 물고 있던 입술을 놓아주었다. 빈틈없이 맞닿았던 입술이 탄력 있게 떨어지며 촉, 하고 습한 소리가 난다.
무어라 흘러나오는 말은 없었으나 입술을 뗀 행동의 의미는 분명했다. 이쯤에서 정리하고 이만 집으로 돌아가자는 거다. 재광은 취했고, 시간이 늦었으며, 내일도 출근이니 컨디션을 조절해주려는 의도였다.
“광아, 그렇게 집 찾더니 안 갈 거야?”
그런데 재광이 뜻밖의 태도를 보인다. 평소라면 알아서 몸을 사렸어야 할 그는 아직 여운이 남았는지 입술을 작게 벌리고 있었다. 여전히 의주의 목 뒤로 팔을 두르고서.
목만 끌어안고 있으면 다행이지, 풀린 눈은 노골적으로 의주의 입술을 향했다. 당사자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게 더 이상할 만큼 확고한 시선이었다. 의주는 픽 웃어버리고는 재광의 머리에 이마를 부딪쳤다.
“자기야 여기서 이러면….”
달칵. 뒤늦게 조수석 안전벨트가 풀리고,
“나는 절대 안 빼는 거 알잖아.”
의주가 콘솔 박스를 넘어갔다.
두 입술이 다시 맞물리면서는 조수석 등받이가 점차 뒤로 내려갔다. 덩달아 몸이 기울어지는데도 두 사람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행위에만 집중한 그들은 혀를 섞는 정도로는 성에 안 차는지 부지런히 서로를 더듬었다.
시트가 안정적으로 멈출 무렵 의주의 손은 이미 재광의 상의 안이었다. 허리께를 지분대던 커다란 손이 부드럽게 피부를 훑으며 가슴팍까지 올라간다. 짓궂게 돌기를 비틀 때는 온전히 누운 재광의 상체가 가볍게 들렸다가 떨어졌다.
재광의 입안으로 살덩이를 푹 처박았던 의주는 곧 혀끝으로 입천장을 살살 간질이며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떼어낸 입술을 뺨으로 옮겨간다.
아주 매끄러운 움직임이었다. 살갗을 가볍게 훑은 입술이 턱선을 타고 내려와 목에 안착했다. 감촉에 놀란 재광이 고개를 비튼다. 그 바람에 울대 옆으로 목빗근이 선명하게 돋았다.
의주의 입술은 사선으로 불룩 솟은 근육을 따라 올라갔다. 간간이 흩어지는 거친 숨소리, 빠끔히 드러나는 혀끝 따위가 보다 탐욕스러운 애무를 연출했다.
“아… 흐으….”
재광은 속절없이 앓았다. 온기가 닿는 피부는 물론이고 간헐적인 호흡이 귓가를 간질이니 그럴 수밖에 없을 터였다. 솔직하게 새는 신음에 슬며시 입매를 올려 웃은 의주는 더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가슴팍까지 올라간 손을 도로 내린 그는 티셔츠 밑단을 잡아 거침없이 끌어올렸다. 예고 없이 맨살을 드러낸 재광의 배가 크게 움찔거리다가 잠잠해진다. 그 모습을 들끓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의주의 얼굴에 한 줄기 아쉬움이 스쳤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재광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로 만들고 싶었다. 어디를 만지고 어디를 빨아도 탄탄하고 부드러운 피부가 닿을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나 비좁은 차 안, 갑작스럽게 불이 붙은 관계에서는 그마저도 사치였다. 잠시간 재광을 내려다보던 의주는 목 아래까지 당겨 올린 옷자락 아래로 고개를 가져갔다.
“아…!”
지금껏 손가락으로 유린하던 돌기를 입에 머금자 재광의 고개가 다시 한번 꺾인다. 혀를 이용해 입안에서 유두를 굴릴 때는 재광의 손이 올라와 의주의 뒷머리를 파고들었다. 손끝에 조금씩 힘이 실릴 때마다 의주는 기대에 부응하듯 가슴을 빨았다.
입술이 상체를 배회하며 흔적을 남길 동안 허리춤을 맴돌던 손은 벨트를 쥐었다. 습한 공기에 시린 금속성이 끼어드는 것도 잠깐, 의주는 능숙하게 지퍼를 내렸다.
평소라면 재광도 알아서 허리 아래를 들어 바지를 벗기기 편하도록 도왔을 터였다. 하지만 오래간만에 도는 술기운에 도통 정신이 없는 듯했다. 결국엔 의주가 먼저 그의 엉덩이를 가볍게 두드렸다.
“광아, 잠깐만.”
그래도 말귀를 못 알아먹을 만큼 취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풀린 눈으로 더듬더듬 의주를 찾던 재광이 곧바로 골반을 든다.
의주는 바지와 속옷을 한 번에 잡고 끌어내렸다. 수월하게 흘러내린 옷자락이 금세 발목에 걸렸으나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는 다시금 힘주어 옷을 아래로 당겼다. 그러자 재광의 신발이 툭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바지가 온전히 다리를 빠져나간다.
맨다리는 곧장 의주의 허리에 감겼다. 의주가 의도한 건 아니고, 재광이 자의로 그렇게 했다. 순식간에 휑해진 아랫도리에 한기라도 도는 것 같았다.
의주는 화답하듯 맨다리를 어루만졌다. 살이 통통하게 오른 볼기부터 시작해 허벅지 뒤쪽의 민감한 피부를 지나 오금, 그리고 발목까지를 모두 꼼꼼하게 훑었다.
“하, 아아…!”
혹여 서늘하다면 조금이나마 체온을 끌어 올려줄 심산이었다. 그러나 이미 한 차례 짙은 키스로 흥분했기 때문일까. 재광은 손길이 닿는 족족 온기를 느끼기보다는 앓느라고 바빴다.
의도가 뭐였든 간에 의주에게는 나쁘지 않은 반응이었다. 그는 빙긋 웃으며 흐트러진 앞머리 사이로 드러난 재광의 이마에 입 맞췄다. 그러고는 문득 부산을 떤다.
그는 누운 재광의 위로 잔뜩 낮췄던 상체를 조금 세웠다. 이어 차 내부를 두리번거리나 싶더니 서둘러 콘솔 박스를 열었다. 안으로 쑥 들어갔다 나오는 손에는 개봉한 흔적 없는 젤과 콘돔이 들려있었다.
차 안에 윤활제로 쓸 만한 물건이 하나도 없어 곤혹스러웠던 경험 때문에 구비해둔 것들이었다. 언젠가 쓸 일이 있겠지, 하는 심정으로 마련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개시가 빨랐다.
의주는 빠르게 포장을 뜯어 손 위로 젤을 주욱 짜냈다. 미끈거리는 손을 당장 볼기 사이에 가져다 대고 회음 주변을 더듬자 재광이 곧장 허리를 비튼다.
“흐, 으응… 흣!”
비좁은 장소 탓에 그리 큰 움직임은 아니었다. 움찔대는 허리를 손으로 크게 쓸어내려 진정시킨 의주는 구멍 주변을 더듬던 손가락을 바로 밀어 넣었다.
의주의 어깨를 짚던 재광의 손끝에 힘이 실린다. 셔츠 너머로 붉게 지장이 남을 듯 선명한 압력이었다. 긴장을 읽어낸 의주는 훤히 드러난 재광의 가슴팍에 재차 입술을 붙였다.
판판한 가슴에 가볍게 입맞추다가 불시에 유두를 물자 재광의 아랫배가 움찔거린다. 하지만 분명 효과는 있었다. 유륜을 진득하게 핥아 자극할 즈음에는 바짝 힘이 들어갔던 몸이 이완하며 손가락을 문 뒤도 덩달아 편안해졌다.
덕분에 의주의 손가락이 한결 부드럽게 재광의 안을 드나들었다. 손바닥에 걸릴 때까지 밀어 넣었다가 빼기를 반복하자 꽉 조이던 내벽이 점차 풀리는 게 느껴진다. 의주는 가슴을 지속적으로 애무하며 손가락을 하나씩 늘렸다.
“아, 윽! 흐으, 형…. 아아!”
손가락이 최대치로 들어갈 무렵에는 재광이 버거운 기색을 보였으나 오래가지는 못했다. 재광의 몸이라면 익히 꿰뚫고 있는 의주가 바로 전립선을 누른 탓이다. 손끝을 구부려 정확한 지점을 자극하자 새된 신음이 터진다.
이제는 소리만 들어도 재광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가 눈에 선했다. 반들반들하다 못해 축축한 눈망울, 기다란 눈매 끝은 약간 짓물렀을 테고, 입술은 이미 몇 번이고 물었다 놓아 붉게 부어올랐을 거다. 두 뺨에도 열이 올라 발간빛을 띠겠지.
더군다나 오늘은 술에 취해 나른하게 풀린 눈빛까지 더해졌을 테다. 그 모습을 생각하면 의주의 아랫배도 금방 묵직해졌다. 중심부로 피가 쏠리는 느낌을 받은 그는 뒤를 풀던 손에 속도를 올렸다.
“하, 으읏, 아, 아아! 아…!”
미끄러지듯 안으로 밀려들어갔다가 매끄럽게 빠져나오던 손가락이 푹푹 처박히자 재광의 목소리도 덩달아 자주 끊겼다. 당연하게도 힘겹거나 괴로운 음성이 아닌, 열에 달뜬 신음이었다.
의주의 손가락이 뒤를 드나드는 속도에 비례해 빠르게 녹은 젤은 척척한 소리로 차 안을 울렸다. 구멍 주변으로 물이 흥건하게 고인 듯한 착각이 일 정도였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하의를 벗길 때부터 반쯤 발기 상태던 재광의 성기도 빠르게 경도를 올렸다. 몸을 낮춘 의주의 상박을 툭툭, 아주 선명하게 건드린다.
그 감각에 의주가 흘긋 눈동자를 내렸다. 겹쳐진 두 몸 사이로 언뜻 보이는 중심부의 상태를 확인한 그는 집요하게 빨던 가슴에서 입술을 뗐다.
“….”
후텁지근한 공기 중에 다시 한번 차가운 금속성이 끼어든다. 이번에는 의주의 벨트다. 앞섶만 가볍게 끌어내리자 이미 불룩하게 솟아 있던 중심부가 튕기듯 밖으로 빠져나왔다.
잔뜩 성이 난 살덩이에 콘돔을 씌우고 젤을 펴 바르는 과정이 빨랐다. 의주는 늘어진 재광의 다리를 넓게 벌리고 그새 다물린 입구에 성기 끝을 맞췄다.
“하윽…! 흡!”
조금 전까지 손가락이 부드럽게 드나들었던 길이건만 발기한 물건의 굵기는 비할 바가 안 되는 듯했다. 겨우 귀두를 삽입했을 뿐인데 재광이 황급히 숨을 들이마신다. 불긋한 자국이 가득한 가슴팍도 빠르게 오르내렸다.
그 때문에 의주가 더 바빠진다. 조금이라도 빨리 안을 들쑤시고 싶은 욕구를 미뤄두고서 재광의 뺨을, 그리고 허벅지를 정성스럽게 매만졌다.
재광은 저를 쓰다듬는 손길에 부지런히 반응했다. 손끝이 스칠 때마다 흠칫거리면서도 온기가 닿는 족족 솔직하게 긴장이 풀어진다. 힘이 들어갔던 몸은 물론이고 귀두를 빈틈없이 콱 물던 구멍도 마찬가지였다.
의주는 뒤에 여유가 생긴 틈을 놓치지 않았다. 간신히 끝만 걸치고 있던 성기를 반쯤 더 밀어 넣는다. 묵직하게 안을 비집고 들어가자 재광의 안이 점차 열리는 느낌이 생생하게 전달됐다.
재광은 소리도 내지 못했다. 대신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을 벌리고 간신히 숨만 뱉는다. 의주는 파들거리는 속눈썹 위로 조심스레 입 맞췄다.
“광아, 아파?”
여태껏 차마 눈을 못 뜨던 재광이 그제야 천천히 눈동자를 드러낸다. 잠자코 시선을 마주하던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 좋아.”
호흡이 다량 섞인 목소리는 작았다. 시트에 머리칼을 비비적대는 마찰음까지 섞여 더욱이 묻히기 쉬운 대꾸였다. 그러나 의주는 똑똑히 들었다. 좋다는 그 한마디를.
의주의 눈이 한순간 매서운 빛을 띤다. 그는 더 못 참겠다는 양 갈급하게 재광의 입술을 물었다. 통통한 아랫입술을 세게 빨아들였다가 놓아주자 바로 혀가 빠져 나온다.
의주는 그마저도 놓치지 않고 물었다. 입술 안쪽의 점막으로 부드럽게 혀를 훑자 반사적으로 거친 숨이 넘어왔다.
“흐, 읍! 으응… 읏!”
거친 숨뿐일까. 입술을 틀어막은 의주가 완전히 재광의 안으로 들어간 순간에는 이어진 두 입안에 신음성이 맴돌았다.
위로는 타액이 섞이고 아래로는 녹은 젤이 질척였다. 차 안이 온통 습한 소리로 뒤덮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별안간 뻑뻑한 마찰음이 이질적으로 끼어든다.
온몸을 관통하는 감각을 못 이기고 떨어져 나간 재광의 손이 시트 위를 방황하는 소리였다. 단정하게 깎은 손톱 아래로 하얗게 질린 손끝이 좌석 표면을 누르며 긁어 올렸다.
공기 중을 부유하는 가벼운 마찰음 속에 섞여드는 소음은 의주의 귓가에도 빠르게 닿았다. 거칠게 재광의 입안을 휘젓던 그는 여전히 입술을 맞대고서 손으로만 시트를 더듬어 내려갔다.
이윽고 두 손이 만난다. 의주는 여전히 재광의 입술을 무느라 보지 못했지만, 감각으로 알 수 있었다. 얼마나 힘이 들어갔는지 재광의 손등에 핏줄이 선명하게 돋았다.
괜찮다는 듯 손등을 쓸어준 그는 이내 시트 안을 파고들어 재광의 손을 꽉 쥐었다. 손가락 틈새를 모두 메워 깍지를 낀 손이 곧 재광의 얼굴 옆에 놓인다.
“하아… 하….”
영원히 맞물려 있을 것 같던 입술을 뗀 것도 거의 동시였다. 혼이 쏙 빠져 거친 숨을 몰아쉬는 재광을 내려다보던 의주가 하체에 힘을 실었다.
“윽…! 아흐, 으, 흣…!”
불시에 깊이 치고 들어가는 뭉툭한 감각에 재광의 고개가 뒤로 넘어간다. 깍지를 낀 손은 더 단단하게 얽히고, 의주의 팔뚝을 부여잡은 다른 한 손에도 더욱 강한 악력이 실린다. 안면근육은 볼품없이 구겨졌다.
의주는 그 모습을 빠짐없이 내려다봤다. 일그러지는 눈매나 잇새로 짓이기는 입술, 일렁이는 울대 따위를 모두.
그래서 더 골반을 크게 움직였다. 깊이까지 처박혔던 성기가 쑥 빠져나가 간신히 귀두만 걸치더니, 또다시 끝까지 꿰뚫고 들어갔다.
걷어 올린 티셔츠 아래로 재광의 흉곽이 넓게 벌어졌다 닫히는 움직임이 선명히 보였다. 덩달아 배가 경련하고, 배 속에서는 의주의 것을 감싼 내벽이 잘게 떨렸다.
“아아, 아…. 하, 흐으, 응….”
이번에는 조금 더 여유롭게 성기를 빼내자 안을 천천히 긁는 감각에 재광이 몸서리친다. 바들바들 떨리는 몸을 꽉 끌어안은 의주는 유연하게 허리를 놀려 다시 한번 뒤를 가르고 들어갔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뿌리 끝까지 깊숙하게 밀어 넣은 차였다. 음경의 모든 면적을 내벽이 빠짐없이 감싼다. 의주는 성기를 반쯤 느릿하게 꺼냈다가 도로 박아 넣으며 재광의 배 속 떨림을 뚜렷하게 느꼈다.
목덜미에 코를 묻은 의주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는 행동과 달리 허리 아래를 부지런히 움직였다. 반씩 뺐다 넣기를 반복하자 자연스럽게 속도가 붙는다.
즉, 재광의 안을 들쑤시는 주기 또한 빨라졌다는 뜻이다. 의주의 아래 깔린 재광이 최선을 다해 바르작대며 온몸에 퍼진 자극을 소화해냈다.
“아! 아, 아… 아아! 흐읏, 흡, 아, 읏!”
아래서 질퍽이는 소리가 더 빠르게 울려 퍼질수록 재광의 목소리가 뚝뚝 끊겼다. 종래에는 질끈 감은 눈가로 눈물이 주르륵 흐르고, 벌어진 입술 새로는 뜨거운 숨만 간신히 새어 나왔다.
마냥 괴롭다는 신호는 아니었다. 의주가 뒤를 깊숙이 밀고 들어와 안을 찌를 때마다 재광의 허벅지가 사이에 자리 잡은 의주의 허리를 꽉 조였다. 허벅지 안쪽의 부드러운 살결이 파르르 떨리며 쾌감을 고스란히 내비쳤다.
“…아흣!”
다시금 터진 날카로운 신음은 목덜미에 닿은 이 때문이었다. 집요하게 목선에 코를 묻던 의주가 안을 깊숙하게 찌르며 얇은 살갗을 물었다. 상처가 날 만큼 거세게 깨물지는 않았으나 잘근잘근 씹는 감각이 꼭 온몸을 간질이는 듯했다.
그래서인지 의주의 허리를 조인 재광의 허벅지에도 길게 근육이 선다. 꽉 맞잡은 손 또한 그랬다. 새로이 더해진 자극에 솔직하게 반응하며 뒤를 꽉 조이자 거친 호흡을 뱉은 의주가 안을 더 세게 쿡 찌른다.
이미 발딱 서 아랫배에 붙어있던 재광의 성기에서는 프리컴이 줄줄 새기 시작했다. 감당할 수 없는 흥분감이 도래했는지 어느 곳을 찔러도 재광의 온몸이 반응한다.
“아…! 형, 하아, 형… 아아, 나… 흐읏!”
차마 말을 끝맺지는 못했으나 뜻을 못 알아먹을 얘기는 아니었다. 바짝 붙인 상체 사이로 한계까지 부푼 재광의 중심부가 존재감을 발한 탓이다. 그때까지도 진동하는 울대 옆을 가볍게 씹던 의주는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로 답을 대신했다.
충분히 속력을 올렸다고 생각했던 의주의 허리 짓이 더욱 빨라진다. 곧추선 살덩이를 길게 빼내는 대신 잦고 깊게 찔러대자 재광이 목을 긁으며 하악, 숨을 먹는다.
아래에서는 살끼리 퍽퍽 부딪치는 음란한 마찰음이 지속됐다. 그리고 잘게 치고 빠지던 의주가 성기를 끝까지 빼내 단박에 치고 들어간 순간,
“아…!”
짧은 탄성을 뱉은 재광의 것에서 희끄무레한 점액이 터져 나왔다.
의주의 절정은 그다음이었다. 그는 크게 빠져나왔다가 박아 넣기를 반복했다. 한 번씩 안을 뚫고 들어갈 때마다 예민해진 재광의 배 속이 커질 대로 커진 살 기둥을 콱 물었다.
그러기를 서너 번. 의주는 조금의 틈도 없이 자신을 모조리 밀어 넣은 뒤에 그대로 파정했다. 단단하게 부풀어 올랐던 성기가 액을 쏟아내며 꿈틀대자 이미 사정을 맛본 재광의 몸이 또 한 번 움찔댔다.
의주는 그런 그의 가슴부터 허리까지를 꼼꼼하게 매만지며 눈앞에 보이는 목선에 입술을 묻었다. 살갗을 가볍게 눌렀다 떼는 입맞춤이었으나 이내 고른 치아가 목덜미를 파고든다.
“아!”
이번에는 제법 세게 이를 세워 문 참이었다. 성감에 젖었던 몸을 늘어뜨리고 호흡을 가다듬던 재광이 깜짝 놀라 작은 비명을 지를 정도로. 그러나 의주는 개의치 않고 조금 더 세게 목을 깨물었다.
언젠가 한 번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대범한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재광에게 뜨거운 밤을 보낼 애인이 있단 사실을 마주치는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도록 말이다.
다른 때 같았더라면 기겁하며 떨어져 나갔어야 할 재광이 술기운에 잠잠하니 이 기회에 울혈을 새길까, 하는 갈등이 더 깊어졌다.
하지만 그런 과감한 생각은 빠르게 접었다. 재광의 목에는 잇자국이 남았으나 몇 시간 뒤면 금방 사라질 수준이었다.
“너는 내가 많이 봐줬다, 진짜.”
의주는 붙여놓은 양 깍지를 낀 손을 들어 재광의 손등에 입술을 눌렀다. 침착을 찾은 눈동자가 잠시간 멀끔한 재광의 손에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
“광, 일어나. 광아.”
의식을 깨우는 목소리에 재광이 뒤척인다. 자신을 부른다는 사실은 분명히 알겠는데 무거운 눈두덩이 좀처럼 들리질 않는 모양새였다. 결국 일어나기는커녕 “으응…” 하고 웅얼거리는 게 전부였다.
“자기야 속은 풀고 출근해야지.”
그러자 의주가 필살기 같은 애칭으로 그를 부른다. 아니나 다를까, ‘자기’ 소리에 민감한 재광이 간신히 실눈을 뜬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어버린 의주는 침대 위에 널브러진 두 팔을 잡아 일으켰다. 노곤하게 늘어졌던 몸이 묵직한 반동으로 일어났다.
일단 앉히는 데 성공하고 나자 다음 단계부터는 쉬웠다. 슬며시 등을 밀어 침대 아래로 내려오게 한 뒤 욕실로 밀어 넣는 것이다.
간밤에 물에 적신 수건으로 닦아주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출근길 예절을 유지하려면 아침 샤워는 필수였다.
“씻고 부엌으로 와. 알았지?”
퉁퉁 부은 몰골로 고개를 끄덕인 재광은 순순히 욕실로 들어갔다. 이어 물소리가 문을 넘어오고, 의주는 그제야 방 밖으로 걸음을 돌렸다.
재광이 씻는 동안 아침 식사를 준비할 참이었다. 평소에는 미리 만들어둔 국과 반찬, 혹은 토스트 정도로 간단하게 때우는 편이지만 오늘은 숙취에 시달릴 식구가 있어 더 부지런히 준비해야 했다.
방에서부터 희미하게 울리는 물소리를 배경음 삼은 의주는 재료를 썰고 볶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국물이 한소끔 끓어오를 무렵, 촉촉하게 젖은 재광이 모습을 드러냈다.
“잠깐만 있어 봐. 다 했어.”
비몽사몽 욕실로 들어갈 때와 사뭇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 재광은 조용했다. 의주가 요리를 도맡을 때면 늘 그랬던 것처럼 밑반찬을 꺼내고 수저를 놓으며 손을 거들면서도 유난히 정적인 느낌이었다.
의주의 괜한 짐작은 아니지 싶었다. 막 덜어낸 북엇국을 가지고 와 마주 앉는 순간, 그는 요동치는 재광의 눈동자를 목격하고 웃음을 참았다.
“간만에 떡 됐더니 죽겠지, 지금?”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투로 말을 건네는데도 “으응, 좀” 하는 대답이 어색했다. 그뿐일까. 재광은 숟가락을 들어 국물을 맛보면서도 흘끔흘끔 의주의 눈치를 살폈다.
타고나기를 필름이 안 끊기는 체질이다 보니 어제의 상황을 모두 기억하는 게 틀림없었다. 둘 사이에 섹스야 더는 민망한 일이 아니지만, 회식에서 만취해 데리러 오게 만든 일이 퍽 신경 쓰이는 듯했다.
물론 재광은 의주가 어느 경로로 식당까지 찾아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더 멋쩍을 터였다. 머리끝까지 취기가 돌아 눈 한 번 깜빡였더니 의주가 눈앞에 있었지 않던가.
“…미안.”
밥은 고사하고 국물만 연달아 떠먹던 재광은 오래 걸리지 않아 말을 꺼냈다. 몇 번이고 흘긋거리며 의주의 눈치를 살핀 다음이었다. 의주는 고개를 비스듬히 틀었다.
“뭐가?”
“취해서 정신도 못 차리고 형이 데리러 오게 했잖아.”
군더더기 없이 담백한 사과였다. 슬그머니 수그러든 정수리가 진심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다음부터 안 그럴게” 하는 다짐까지 들은 의주는 끝내 못 참고 웃음을 터뜨렸다.
“광아. 나 화 안 났는데?”
“…어?”
“네 폰으로 모르는 사람이 전화하니까 놀란 건 맞는데, 네가 어디 뻗어서 한참 연락이 안 된 것도 아니고. 괜찮아.”
의외로 쿨한 대답에 수그러들었던 재광의 고개가 다시 들린다. 그는 태연한 반응을 믿지 못하겠는지 눈을 크게 끔뻑거렸다.
그럴 만도 했다. 당장 사흘 전만 해도 의주는 회식 자리에 동석하겠다는 의사까지 내비쳤었지 않나. 그런 그를 극구 못 오게 말려놓고 정작 본인이 술에 절어 불러들였으니 어느 정도의 질책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을 거다.
“나는 너 취한 거 좋아해, 귀여워. 신변에 문제가 생기거나 위험한 상황만 안 만들면 괜찮아.”
“….”
“애초에 네가 그렇게 취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으면 우리 사이가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거고. 나는 네가 취해서 과감해지는 것도 매력이라고 생각해.”
그런데 이렇게까지 얘기한다면 더는 믿지 못할 이유가 없을 터였다. 재광은 민망스러운 한편 안도하는 마음으로 뒤늦게 밥을 한 숟갈 크게 퍼 올렸다.
간밤의 사건을 마무리 짓고 나자 밥상 분위기가 훨씬 편안해졌다.
????
그러니까, 분명히 분위기가 괜찮았는데….
‘화 안 난 거 맞냐고.’
재광은 소파에 앉아 울리지 않는 휴대전화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아침부터 북엇국 끓여주며 너그러이 과오를 덮어주던 의주의 행보가 종일 이상했다. 아침밥을 먹고 함께 출근할 때만 해도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는데, 이후부터 묘하게 재광을 피하는 듯한 기류를 풍긴 거다.
점심 같이 먹겠냐고 먼저 물었는데도 됐다더니, 오후에 커피를 사러 가겠냐는 제안도 거절했다. 업무 시간 중 틈틈이 오가던 메신저가 확연히 줄어든 건 물론이고 퇴근도 따로 해, 이제는 연락조차 제대로 닿지 않았다.
평소라면 둘이 함께 귀가해 저녁을 먹고 뒷정리까지 마친 후 여유롭게 뒹굴뒹굴할 시각이었다. 시계 초침 소리만 공허하게 울리는 거실에 홀로 남은 재광은 암전된 액정화면만 노려보다가 이내 기기를 소파 한쪽에 던져버렸다.
영문 모를 의주의 행보를 짚어보길 포기한 참이다. 의주가 맘에 없는 소릴 할 사람도 아니고, 항상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인물이니 무언가 걸리는 게 있으면 알아서 얘기할 거란 판단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맘이 온전히 편해지는 건 아니었지만.
이 기묘한 태도 변화에 어제의 일이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줬을 것 같아서다. 그렇다면 이 현상에 원인을 제공한 사람은 무조건 재광이 된다.
“….”
멍하니 허공만 쳐다보던 재광은 하릴없이 뒷머리만 헤집었다. 사과가 더 필요하다면 몇 번이고 해줄 수 있지만, 의주의 행방조차 묘연해 답답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심정이었다.
햇수로 4년 차, 큰 갈등 없이 평탄한 연애를 해왔던 터라 이토록 속이 찝찝하기는 처음이었다. 재광은 저도 모르게 다리를 달달 떨기에 이르렀다.
그러고 얼마나 더 있었을까. 시계와 재광만 덩그러니 남겨진 듯하던 거실에 기계음이 울린다.
삑, 삑삑. 일정한 리듬으로 이어지는 소리는 틀림없이 도어록 버튼음이었다. 휙, 고개를 돌려 현관문을 바라보던 재광은 당장 몸을 일으켰다.
빠른 걸음으로 현관 앞에 다다랐을 때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문이 열렸다. 그리고 열린 문 사이로는 재광이 목 빠져라 기다리던 의주가 들어왔다.
“어디 갔다 오는 거야? 종일 연락도 안 되고.”
첫마디는 감정을 억누른 티가 역력한 어조로 흘러나왔다. 괜찮다고 해놓고 종일 자신을 피한 데다가 연락도 없이 늦게 들어오니 화가 나지만, 당장 어제 저지른 일이 있어 편히 다그치지 못하는 말투였다.
게다가 마냥 화가 난 것만도 아니었다. 오히려 의주가 제 처신에 생각보다 많이 실망하고 분노했을까 봐 걱정하는 기색까지 어려 참으로 복잡한 목소리였다.
“자기 나 보고 싶었어?”
그러나 의주는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오만 잡생각을 다 하느라 머리가 복작거렸던 재광의 속내를 알 리 없는 그는 평온하다 못해 설레기까지 하는 안색으로 집안에 발을 들였다.
“아니, 왜 늦었….”
그러더니 왜 늦었냐는 질문을 단숨에 삼켜버린다. 예상 못 한 키스에 재광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벽으로 몰아세웠다.
종일 의문을 품은 입장에서는 아직도 의주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으나 어쩔 수도 없었다. 휘몰아치듯 입안을 헤집는 움직임으로 보아 의주가 화난 게 아닌 것만큼은 확실해 얌전히 응해주는 수밖에.
재광은 반항 없이 입술을 열었다. 그러자 의주가 한 손으로 재광의 뒷머리를 단단히 틀어쥐며 입술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다. 장난스럽게 재광의 혀를 톡, 건드린 살덩이가 곧장 점막을 타고 미끄러져 들어갔다.
출근 이후 얼굴을 못 봤단 사실을 고려하더라도 너무 열렬한 입맞춤이었다. 영문을 몰라 얼떨떨하던 재광도 유려하게 입안을 헤집는 움직임에는 곧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됐다.
의주가 뒤통수를 고쳐 잡고 허공에 늘어진 왼손을 더듬는 감각이 선명했다. 굳이 뿌리칠 이유 없는 손길이라 재광도 피하지 않고 겹친 입술 새로 의주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데만 집중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재광의 팔이 의주의 어깨 위로 넘어간다. 상체를 딱 붙이고 거의 매달리는 자세로 키스에 몰두하던 재광은 조금 뒤에야 가쁜 숨을 토하며 몸을 바로 세웠다.
“…뭔데. 연락도 없이 이 시간에 들어와서.”
때늦은 물음에도 의주는 여전히 미소만 지었다. 몹시 온화하고 다정하지만 그래서 더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 때문에 재광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하자 의주가 서둘러 재광의 왼손을 들어 올린다.
“이게 무슨….”
어쩐지 오늘따라 유독 손을 만지작거리더라니. 키스로 혼이 쏙 빠진 사이 손가락에 못 보던 반지가 끼워졌다.
정확히는 왼손 네 번째 손가락이다. 재광은 의주가 쥔 자신의 손을 꼭 남의 것 마냥 쳐다봤다. 의주와 약지를 번갈아 보느라 긴 눈매 안에서 눈동자가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진작 이랬어야 됐는데 내가 자기를 철석같이 믿어서 너무 안일했어.”
“갑자기?”
재광은 의문을 채 지우지 못한 안색이었으나 의주는 여전히 부드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의주가 하룻밤 새 떠올려낸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었다. 재광의 얼굴을 뜯어고칠 수는 없으니 임자가 있다는 뜻을 공표하는 편이 제일 좋을 듯했다.
그래서 생각한 게 반지였다. 고전적이지만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확실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던가.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많은 부분을 설명하기엔 이만한 게 없었다.
단 하루 고민하긴 했지만 디자인을 고를 때도 얼마나 신중했는지 모른다. 혹여 멋 부릴 의도의 액세서리로 보일까 봐 유명 연예인 부부의 화보로 명성을 떨친 웨딩 밴드로 골랐다. 누가 봐도 연인의 표식으로 보일 수 있도록 말이다.
“4년 차에 커플링이면 갑자기는 아니지.”
조금 더 짓궂은 미소를 띤 의주는 재광에게 자신의 왼손을 보였다. 손등이 보이도록 내밀어 기다란 손가락을 유연하게 흔들자 시종일관 어리둥절하던 재광이 자못 황당한 표정을 했다.
말로는 커플링이라지만 완전히 다른 디자인이었다. 조금의 차이는 있되 한눈에 봐도 세트처럼 보이는 보편적인 커플링과는 달랐다.
재광의 것은 시그니처 문양이 일정 간격으로 새겨진 화이트 골드 모델인 반면, 의주의 것은 단순하게 가로로 라인이 그어진 옐로우 골드 디자인이었다.
“커플링 맞아?”
확연히 다른 생김새에 재광이 되묻자 의주가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이 정도는 돼야 조심성 많은 김 대리도 회사에 끼고 다니지.”
부연을 듣고서야 의도를 이해한 재광이 “그럼 이거 사려고…” 하며 반지 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러고는 별안간 허탈한 낯빛이 되어 얼굴을 천천히 쓸어내린다.
“난 또 화나서 나 피하느라 안 오는 줄 알고, 아 진짜….”
“내가 너를 피해? 광아, 나는 네가 그렇게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인지 지금 알았어.”
부러 능청스럽게 하는 대꾸에는 재광이 기어이 눈을 흘기고 말았다. 혼자 거실에 덩그러니 앉아 맘졸일 때 의주는 이 모든 걸 계획하고 들떠 있었을 걸 생각하니 괜히 약이 오른 거다.
그런 속내를 굳이 감출 생각도 없는 듯했다. 재광이 “그럼 미리 말을 하든가” 하며 꽉 쥔 주먹으로 팔뚝을 내리치자 의주는 고스란히 맞아줬다. 대신 닿았다 떨어지는 손목을 잡아 재광을 품으로 끌어당겼다.
“이런 건 서프라이즈로 하는 재미지.”
“안 그래?” 하고 덧붙여 물은 뒤에는 또 다시 입술이 맞물렸다.
잠깐이나마 심술을 부리던 재광도 어느새 순순히 눈을 감고 의주의 허리를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