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낭만인 리부트
직장인들이 막 칼퇴근을 시도할 시각, 의주는 이미 집이었다.
정시 퇴근보다는 야근이 더 익숙했으나 오늘만은 달랐다. 부지런히 손을 씻고 부엌으로 들어간 그는 냉장고부터 열었다. 두툼한 고깃덩어리와 각종 채소를 꺼내는 동작이 빨랐다.
조금은 특별한 의미를 담아 저녁을 마련하려는 참이다. 시종일관 입가에 미소를 건 의주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재료들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메인요리인 안심 스테이크부터 가니쉬, 곁들일 파스타와 샐러드, 후식으로 먹을 과일까지. 준비할 게 많았는데도 의주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척척 조리해 어울리는 그릇에다가 플레이팅까지 멋들어지게 했다.
접시 귀퉁이에 묻은 소스 한 방울마저도 꼼꼼히 닦아내 식탁으로 옮긴 그는 다시 찬장 앞으로 다가갔다. 깨끗하게 마른 와인 잔 두 개를 꺼내는 모습이 꼭 비장의 검을 꺼내 드는 용사 같았다. 잔을 빙그르르 돌려 살피는 눈빛이 예리했다.
의주는 지문 하나 없이 투명한 잔을 확인한 뒤에야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러고는 이미 화려하게 세팅해놓은 테이블 위에 세심하게 각을 재 올려놨다.
마지막으로는 며칠 전 심혈을 기울여 고른 와인을 꺼내려는데, 때마침 도어록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린다.
“형, 나 왔는데.”
이어 들리는 목소리는 당연하게도 재광의 것이었다. 의주는 와인을 뒤로하고 당장 거실로 걸어 나갔다.
“왔어?”
막 신발을 벗고 들어오던 재광이 부엌에서 나온 의주를 보고 빙긋 웃었다. 마주 웃던 의주는 그의 손에 들린 쇼핑백을 흘긋 보며 재차 입을 열었다.
“그게 다야?”
“아… 어. 며칠 동안 조금씩 챙겨 나왔더니 이거 남더라고.”
“그래도 3년을 다녔는데 간소하네.”
맞다. 재광은 오늘 3년 꼬박 다닌 회사를 그만뒀다.
최대한 퇴직금을 끌어모을 거라던 포부에 비하면 이른 퇴사였지만 이만하면 오래 견딘 축이었다. 경영 승계를 놓고 연일 언론이 시끄러웠고, 회사 주가는 요동을 쳐 사내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거기까지는 재광도 저와 다른 세계의 일이라 여겨 묵묵히 자리를 지켰는데….
그 난리 끝에 기업 후계자가 정해지고 나자 피바람이 불었다. 효율적 기업 운영을 위한 구조 조정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줄 잘못 선 인사들을 숙청하기 위함이란 걸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때 재광이 속한 팀도 한바탕 갈려 나갔다. 재광은 그제야 다른 세계라고만 생각했던 일을 실감했다.
입사 3년 차, 그러잖아도 한창 싱숭생숭하던 시기에 맥없이 잘려나가는 직원들을 보며 환멸을 느꼈고, 지난한 고민 끝에 결국 퇴사를 결심했다.
퇴직 의사를 밝히고 나서도 한동안은 “이게 과연 잘하는 짓일까” 하며 막막해하더니만, 이제는 마음 정리가 다 된 듯싶었다. 회사에 몸담은 지난 시간을 언급하는 말에도 무덤덤하게 대꾸하는 걸 보면.
“원래 이거저거 갖다 놓는 편은 아니라서.”
아쉬움은커녕 후련한 목소리였다. 대답을 들은 의주는 낭만인 입사 초, 회사에서 제공한 기본 물품 외에 아무것도 없던 재광의 책상을 떠올려내고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그래, 뭐. 아무튼 고생 많았어. 퇴사 축하해.”
덧붙여 말하며 팔을 벌리자 쇼핑백을 바닥에 내려놓은 재광이 순순히 다가와 안긴다. 의주는 장난스럽게 재광의 뒷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웃었다.
잠시간 얌전히 안겨 있던 재광은 별안간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품 안에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근데 집에서 맛있는 냄새 나는데?”
의주는 그제야 꽉 끌어안은 몸을 놓아줬다. 마지막 퇴근을 마친 애인에게 정신이 팔려 정성 들여 한 요리는 깜빡한 차였다. “맞다” 하며 한 발자국 물러선 그는 재광의 손을 잡고 부엌 쪽으로 향했다.
“기념할 만한 날이라 신경 좀 썼지.”
자랑스럽게 하는 말에는 재광이 피식 웃었다. 그러나 신경 좀 썼다는 저녁상을 맞닥뜨리고 나서는 눈이 휘둥그레지고 만다.
“뭐야? 사 왔어?”
“재료는 사 왔지. 요리는 내가 하고.”
“그럴 시간이 있었어?”
아무리 서둘러도 정시 퇴근일 텐데, 그렇다면 의주는 재광과 비슷한 타이밍에 도착했어야 했다. 그런데 퇴근 직후 이 음식들을 다 만들었다니. 재광의 머릿속에서는 도무지 타임라인이 정리가 안 된다.
그런 낌새를 알아차린 의주는 이번에야말로 뿌듯해했다. 어깨를 넓게 펴고 윗가슴을 탕탕 치며 입을 여는 것이다.
“광아, 나는 CTO잖아. 원래 윗사람들은 늦게 출근하고 일찍 퇴근하는 게 미덕이야.”
꼭 닮은 눈매를 선명하게 깜빡거리는 모습에서 더할 나위 없는 만족감이 풍겼다.
더 이상은 이름뿐인 CTO가 아니기 때문이다. 재광의 회사가 떠들썩하던 지난 시간 동안 낭만인 또한 화제의 주인공이었다.
나이팅의 성공적인 론칭 후 흐름을 잘 탔다. 각종 업체와 협업한 패키지의 반응이 좋았고, 점차 독점 서비스를 늘려가며 동종 업계에서 낭만인만의 영역을 구축했다.
유저가 늘어나면서는 그 밖의 것들이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거액의 투자와 사업 확장, 그에 따른 인력 보충 같은 것들 말이다. 비슷한 계열의 앱 중에 기능은 뛰어나지만 주목받지 못하던 몇몇 개발사를 아예 인수하기도 했다.
그뿐일까. 이전에는 말로만 오가던 TV 광고도 요새는 심심찮게 송출됐다. 비록 유연우는 아니지만 꽤 인지도 좋은 연예인과 전속 계약을 맺었더랬다.
상황이 그렇게 달라지다 보니 영세한 회사에서 직함만 그럴싸하게 달고 있던 의주도 점차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물론 직접 해야 성이 풀리는 위인이라 아직도 많은 영역에 손을 대고는 있지만, 이전에 비하면 훨씬 사정이 나아진 셈이었다.
이 정도면 의주가 아닌 그 누구라도 뿌듯해할 만한 성과였다. 지금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본 재광은 눈을 흘기거나 헛웃음 치지 않고 성의 있게 대꾸했다.
“멋있네, CTO 그거.”
“응, 그게 네 애인이야.”
의주는 한술 더 떠 거들먹거렸다. 그러고 난 다음에는 얼른 먹자며 자리를 권했다.
그들의 저녁 식사는 의주가 꺼내려다 만 와인을 내어 오고서야 시작됐다. 매의 눈으로 골라낸 잔에 적당량을 채워 부딪치자 공명음이 영롱하게 울린다. 두 사람은 사이좋게 한 모금씩 음미한 뒤, 잘 차린 음식을 맛보기 시작했다.
분위기를 내는 건 이쯤이면 충분했다. 두툼한 안심을 썰며 이어지는 대화는 지극히 일상적이었다.
“짐은 내일 다 도착하나?”
“아까 수거했다고 연락받았으니까, 아마도?”
하지만 재광의 퇴사만큼이나 중요한 얘기다. 2년가량 독립생활을 하던 재광이 살림을 정리하고 의주의 집에 들어오기로 했으니까.
오늘의 거창한 식사도 재광의 퇴사와 두 사람의 동거 모두를 기념하기 위한 자리였다. 3년 전, 선호의 결혼식에 다녀와 불시에 던진 의주의 프러포즈가 반쯤 성공한 격이다.
- 재광아, 우리 결혼할까?
- 광아, 결혼이 별거야? 믿고 터놓을 수 있는 주변사람 몇몇만 같이 모여서 축하하고 축하받으면 그거로 된 거지.
- 아, 근데 같이 살아야 돼. 이건 별거야. 중요해.
호텔 욕조에 몸을 겹쳐 앉아서 얘기했을 때, 모호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본 재광은 답했었다.
- 그러고 싶을 만큼 내가 좋다는 거 같아서 설레긴 하는데….
- ….
- 나는 연애를 좀 더 하고 싶어요. 연애 같은 결혼이랑 지금 하는 연애가 같진 않을 거 같아서.
그게 ‘언제 헤어질지 모르니 더 만나보고 얘기하자’는 뉘앙스였다면 의주도 퍽 서운했을 테지만 재광의 말뜻은 그렇지 않았다. 앞으로도 이어질 관계를 확신하고 기일을 늦추는 정도에 불과했다.
정확히 1년이다, 2년이다 시간을 정해놓지는 않았으나 기약 없이 길어지는 연애는 무탈했다. 바쁜 중에도 짬을 내서, 한가할 때면 작정하고 철석 붙어 지냈다. 그러다가 재광의 퇴사를 계기로 동거까지 결심하게 된 것이다.
엄청난 고심은 아니었다. 당분간 수입 없이 월세와 관리비를 감당해야 하는 현실적인 문제에서 출발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동거로 흘러갔다.
의주가 프러포즈를 한 지 햇수로 3년, 사귄 기간으로만 치면 4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이었다. 이만하면 같이 살아도 되겠다 싶었는지 재광은 큰 갈등 없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오늘은 의주가 그리도 염원하던 동거의 첫날이고.
그러니 감회가 색다를 수밖에 없었다. 큼직하게 썬 스테이크 조각으로 볼 한쪽을 불룩하게 채운 재광의 모습을 보던 의주가 기분 좋게 웃었다. 깨물 때마다 육즙이 흐르는 살점을 꼭꼭 씹던 재광은 조금 뒤에야 입가를 가리고서 말을 건넸다.
“좋아 죽겠어?”
이제는 익숙하게 반말을 하는 거로도 모자라 꽤 뻔뻔한 언사까지 쓸 줄을 안다. 내심 대견하게 여긴 의주는 곧이곧대로 수긍했다.
“당연하지, 내가 몇 년을 조른 건데. 역시 끈기의 여의주. 해내고 만다.”
부지런히 씹던 고기를 삼키고 와인으로 입가심을 하던 재광은 별 뜻 없이 웃었다.
“좋아할 때 아닌 거 같은데.”
“왜 아니야? 너랑 나 사이에 2막이라고, 이건.”
“내가 계속 백수로 있으면서 평생 먹여살리라고 하면 어떡해.”
재광은 꽤 심각한 목소리를 냈지만 어디까지나 장난이었다. 퇴사 전 이후의 행보를 결정짓고 두 달간 백수 생활을 보내기로 했기에 가벼이 던질 수 있는 농담인 거다.
그러나 장난인 걸 모를 리 없는 의주의 반응은 진지했다. 자못 놀란 표정을 지으며 입을 가리고 “와” 한다.
“진짜? 감동. 나 그거 할 수 있어. 자신 있어, 자기야.”
진심으로 시켜만 달라고 얘기하는 듯한 대꾸에는 결국 재광이 졌다. 당장이라도 재광을 집 안에만 가둬두고 저만 보겠다는 욕구가 득실거리는 눈을 보며 차마 받아칠 말이 없었던 것이다.
재광은 커트러리까지 내려놓으며 항복의 뜻으로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아냐, 취소. 그래도 내 밥벌이는 할 줄 알아야지.”
금세 번복하자 의주는 대놓고 아쉬운 내색을 했다. 그러나 오래가지는 않았다. 재광이 내민 고기 조각을 쏠랑 받아먹는 의주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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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얘기한 대로 재광의 짐이 도착했다. 의주가 출근하고 세 시간 정도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택배를 받아둔 재광은 느적느적 점심을 차려 먹고 나서야 박스를 열었다.
짐이라고 해 봐야 몇 없었다. 어지간한 물건은 이미 의주의 집에 있는 터라 가진 걸 다 옮길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원룸에 있던 가구들은 모두 처분했다. 그중 침대와 책상은 재광이 사수하고자 하는 뜻을 밝혔으나 의주의 고집이 이겼다.
집안에 침대는 꼭 하나 뿐이어야 한다나 뭐라나. 책상 또한 서재 인테리어에 맞는 디자인으로 동거 기념 선물을 해주겠다며 재광을 말렸다. 그 결과, 의주 혼자 사용하던 서재는 2인용 공간으로 완벽히 탈바꿈을 했다.
그런 식으로 부피가 큰 가구들이 모조리 사라지다 보니 전문 인력의 도움을 빌리기도 모호한 상황이었다.
- 온 김에 이거 먼저 가져갈까?
그래서 깨작깨작 이사를 하게 됐다. 재광의 집에 놀러 온 의주가 당장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을 조금씩 가져다 놓은 것이다.
처음에는 본인이 독립 선물로 사준 식기 세트처럼 파손 위험이 있는 물건들 위주였다. 그러더니 이후에는 좀만 눈에 들어온다 싶으면 일단 챙기고 봤다.
꼭, 재광이 동거 결정을 무를까 봐 인질 삼듯이.
그래도 덕분에 편해진 건 사실이었다. 의주가 부지런히 짐을 싣고 날라준 덕분에 정작 집을 합칠 즈음에는 옷이나 자잘한 소지품들만 남아 택배로 이사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나보다 더 바빴겠네.”
묵묵히 짐을 정리하던 재광은 문득 중얼거렸다.
이제는 2인실이 된 서재에서 옷 방으로 막 자리를 옮긴 차였다. 얼마 전만 해도 의주의 것들로 가득 찼던 공간이 군데군데 비어 있었다. 행거는 물론이고 시계나 넥타이를 보관하는 수납장까지도.
그렇다는 건 곧, 의주도 재광의 입주를 위해 미리 자신의 물건들을 정리했다는 뜻이었다.
말로는 늦게 출근하고 일찍 퇴근하는 게 윗사람의 미덕이라고 능청을 떨긴 했지만, 실제로 의주는 야근이 생활인 사람이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재광은 괜히 맘이 찡해 목덜미를 매만졌다.
하지만 새삼 감동에 젖을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열린 방문 너머로 현관문을 여는 소리가 들린 까닭이다. 남는 게 시간이라 여유를 부렸더니만 벌써 의주의 퇴근 시간이 다 된 모양이었다.
“빨리 왔네?”
옷 정리를 미룬 재광은 곧장 밖으로 나갔다. 옷 방이 현관에서 가장 가까운 방이라 문턱을 넘자마자 의주를 마주할 수 있었다.
“집에 꿀 발라놨다고 튀어 나왔지.”
의주는 신발도 안 벗고 현관에 서서 냅다 재광을 끌어안았다. “짐 정리하고 있었어?” 하고 물어놓고는 대답할 새도 주지 않고 온 얼굴에 입술을 붙인다.
간신히 대꾸할 수 있게 된 건 조금 뒤였다. 의주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던 재광은 인사치고 조금은 진한 키스가 끝난 다음에야 슬며시 어깨를 밀었다. 그러고는 미소가 걸린 얼굴로 물었다.
“이제 맨날 볼 건데 그렇게 좋아?”
“좋지. 안 좋아?”
“아니, 좋아.”
이제는 누가 보면 눈꼴시다고 질색할 대화도 척척이었다. 얼굴색 하나 안 변한 재광은 자석처럼 제게 붙은 의주를 달고 거실로 들어갔다.
“정리는 많이 했어?”
“아니. 시간 많다고 너무 게으름 피웠나 봐. 아직 옷 한 벌도 안 꺼냈어.”
소파에 풀썩 앉으며 얘기하자 의주가 “천천히 해, 천천히” 하며 재광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흐트러뜨린다.
재광은 자연스럽게 손길을 받아들였다. 간질간질한 감촉 때문인지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조금은 나른했다.
“그래도 짐 풀기 시작하니까 이제 좀 실감 나.”
“뭐가? 같이 사는 거?”
“어. 아침에 일어날 때만 해도 그냥 놀러 와서 자고 가는 거 같았거든. 근데 내 물건 좀 늘어나니까 진짜 여기 사는 거구나 싶고?”
솔직하게 터놓는 얘기에는 의주가 곧바로 “나도 그래” 하며 맞장구를 쳤다.
“너 집에 있는 거 맞는지 확인하려고 퇴근 시간 되자마자 달려왔잖아. 차 안 막혔으면 벌써 딱지 몇 개는 끊었을걸.”
다분히 과장이 섞인 대꾸였으나 듣기에 나쁘지는 않았다. 재광은 푸스스 웃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퍼뜩 무언가를 떠올려내고는 눈을 동그랗게 뜬다.
“아, 근데 저녁 어떻게 해? 차려놓고 싶었는데 시간이 이렇게 된지를 몰랐어.”
그래도 명색이 백수인데 회사에서 일하고 온 애인을 빈손으로 맞은 게 맘에 걸리는 뉘앙스였다.
하지만 의주가 이 정도에 서운해할 리가. 그는 부러 거만하게 고개를 비스듬히 틀었다.
“광아, 이 집에는 먹을 게 끊겨본 적이 없어. 있는 거 대충 꺼내서 차리면 금방이야. 뭐 먹을래, 보리굴비 구울까?”
애초에 재광이 차린 밥상을 기대한 적 없어 보이는 태도였다. 의주는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부엌으로 걸어갔다. 재광 또한 밑반찬이라도 꺼내 손을 거들 요량으로 금방 그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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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잘 맞는 연인(혹은 친구)끼리도 같이 살기 시작하면 싸우기 마련이라지만, 두 사람의 동거는 의외로 순탄했다.
이전부터 서로의 집을 오가며 같이 살다시피 해 생활 방식을 이미 잘 알고 있던 덕이 컸다.
그렇다 해도 살다시피 하는 것과 진짜로 사는 게 같을 수는 없겠지만, 이만하면 평화로웠다. 문제를 제기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 평탄했던 것이다.
- 광아, 그래도 우리가 같이 사는데 적어도 침대에는 같이 누워야 그 의미가 있는 거 아닐까.
동거 생활 최초의 트러블은 각기 다른 취침 시각 때문에 발발했다.
한쪽은 직장인, 다른 한쪽은 백수 생활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생긴 문제였다. 조금씩 기상이 늦어지던 재광이 종래에는 동이 틀 무렵에야 잠자리에 누웠고, 그러다 보니 의주는 애인을 두고 홀로 침대에 눕는 날들이 많아졌다.
격한 몸의 대화를 나누고 지쳐 꼭 껴안고 잠드는 일도 다 옛 이야기였다. 재광의 스케줄로는 대낮에 섹스를 한 격이라 조금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는 남은 일과를 보내러 갔다.
그게 서운해 터놓은 의주의 말에 ‘다 큰 성인이 혼자 잠드는 게 뭐가 어떻냐’고 받아쳤다면 더 큰 갈등이 되었겠지만 재광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 당분간 형 잠들 때까지 같이 있으면? 같이 자면 좋긴 한데, 하루아침에 사이클 돌리는 건 좀 어렵잖아.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고 아침까지 누워 있기도 좀….
솔직한 맘으로는 ‘어차피 두 달이면 끝날 자유인데 뭐 어떤가’ 하면서도 ‘여의주랑 사니까 이런 소리도 들어보지’ 하고 넘긴 거다. 의주 또한 재광이 제시한 타협점에 흔쾌히 수긍했다.
참으로 기가 막히는 상황이기는 했다. 꼭 어린아이 재우고 나오는 부모님처럼 서른셋 남정네의 곁을 지키다가 살금살금 빠져나와야 했으니 말이다. 그 때문에 재광은 종종 현타 아닌 현타도 겪었더랬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도 다 지난 일이었다. 두 달이란 시간은 왜 이렇게 짧은지. 재광은 새 회사에 출근할 날짜가 다가오자 일주일의 기간을 두고 그간 비틀렸던 낮밤을 바로잡았다.
그리하여 출근이 당장 내일로 다가왔다. 재광은 첫 출근인 만큼 최상의 컨디션을 만들려 일찌감치 침대에 누웠다. 당연히 의주도 함께.
“다시 회사 가려니까 어때? 떨려?”
재광에게 팔을 내준 의주가 다정한 말투로 물었다. 팔꿈치를 접어 손끝으로는 재광의 뺨을 간질이면서.
재광은 저를 만지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지만 뭐, 떨린다기보다는… 설레는 쪽에 가까운 거 같기도 하고.”
“설레? 진짜?”
“전 회사랑은 많이 다르잖아. 일단 젊은 기업이고, 핫하고.”
두 달간의 백수 생활을 마치고 하는 출근이 설렌다니. 일 좋아하는 의주에게도 이런 반응은 신선한 듯싶었다. “오…” 하는 어정쩡한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재광은 장난스럽게 의주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뭐야? ‘출근하기 싫다’, ‘계속 백수 하고 싶다’ 이런 대답 나올 줄 알았어?”
“아, 나는 그쪽이 더 좋긴 한데.”
“참 나.”
“그래도 뭐, 네가 좋으면 나도 좋아. 한 집에서 같이 출근하는 것도 재밌긴 하겠다.”
마치 여의주 님의 아량이 넓어 상대방의 감정까지 흔쾌하게 수긍해준다는 듯한 대꾸였다. 그에 재광이 어이없다는 양 헛웃음을 치는데, 무어라 받아칠 틈 없이 의주가 재차 말을 잇는다.
“와. 근데 진짜 재밌겠다. 나도 설레, 이제.”
대충 던졌다가 같이 출근길에 나설 상황을 상상해보니 구미가 돈 모양이었다. 불을 모두 끈 방 안에서도 그의 번쩍이는 눈빛이 다 보이는 것만 같았다. 재광은 이번에도 하릴없이 웃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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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는 두 개의 알람이 울렸다. 어제 일찌감치 잠든 덕에 무리 없이 일어난 두 사람은 일사불란하게 출근 준비를 했다.
동거를 한 뒤로는 처음이지만, 사실 같이 출근을 준비하는 것 자체가 생소한 일은 아니었다. 서로의 집에서 잘 때면 으레 있었던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의주는 몹시 들떠 보였다. 재광을 조수석에 태우고 대화를 나누면서도 간간이 콧노래를 흥얼거릴 정도로. 꽉 막힌 강남 한복판에서도 해끔한 얼굴에 그늘 하나 지지 않는다.
재광은 그게 참 유난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솔직한 맘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오히려 유난인 의주를 내심 흥미로워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꽉 막힌 도로에 서 있던 의주의 차가 부드럽게 우회전해 고층 빌딩 지하로 들어간다. 지정된 구역에 주차를 마친 의주는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곁을 돌아봤다.
“내리시죠, 대리님.”
기사 노릇을 자처하듯 깍듯한 말투였다. 슬며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장단을 맞춘 재광은 가뿐한 동작으로 차에서 내렸다.
의주의 에스코트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한 발자국 앞서 걷나 싶더니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주고, 문이 열릴 때는 재광이 먼저 탈 수 있도록 비켜 서주기까지 했다.
그뿐일까, 올라가는 층수마저도 솔선수범해 누른다.
13층. 의주가 누른 엘리베이터 버튼 옆에는 층별 안내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빨간색을 메인 컬러로 사용한 회사 로고다.
낭만인.
익숙한 세 글자를 확인한 재광이 슬며시 미소 지었다.
지난 3년간 급격한 성장을 이룬 낭만인은 더 이상 스타트업 기업이 밀집한 오피스 단지에 있지 않았다. 강남 한복판의 고층 빌딩 3개 층을 모두 사용할 만큼 덩치가 커진 것이다.
사원이 많아진 만큼 필요한 부서들이 신설되었고, 재광은 그중 서버 보안팀 소속으로 출근을 하게 됐다.
- 낭만인 잘 키워놓을 테니까 바람은 적당히 쐬고 돌아와.
언젠가 의주가 했던 말대로 된 셈이었다. 당연하게도 재광이 단박에 제의를 받아들인 건 아니었지만.
퇴사가 확정되고 처음 의주가 얘기를 꺼냈을 때만 해도 재광은 거절했었다. 인턴 3개월 만에 다른 기업으로 이직한 게 조금 민망하기도 했고, 의주의 사심이 가득 담긴 스카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호가 믿고 맡길 만한 사람이 필요하다며 직접 설득하고 나서자 마음이 흔들렸다.
어찌나 말발이 좋은지 몰랐다. 어떤 역할을 할 사람이 필요한지, 왜 재광이 거기에 적합한지 몇 마디 더 얹을 즈음에는 이미 맘이 홀라당 넘어갔더랬다.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그리하여 낭만인에 재입사 절차를 밟게 된 재광은 앞장선 의주의 뒤를 따랐다.
“들어가시죠.”
스피드 게이트에 사원증을 가져다 댄 의주가 먼저 들어가라며 정중히 손짓한다. 감사의 의미로 미소 지은 재광은 흔쾌히 안으로 들어섰다. 의주는 곧바로 뒤따라 들어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첫 출근인 만큼 선호에게 먼저 인사를 하러 가기로 한 참이었다. 대표실로 향하려 복도를 지나치는데, 의주를 알아본 누군가가 고개를 꾸벅 숙이다 말고 화들짝 놀란다.
“이사님, 안녕하세… 어? 어….”
“아, 처음 보죠? 이쪽은 오늘부터 서버 보안팀으로 출근하는 김재광 대리.”
갈 곳을 못 찾고 흔들리는 눈동자를 본 의주는 천연덕스럽게 재광을 소개했다. 재광에게도 상대방을 소개해주는 말투는 놀라울 만치 태연했다.
“안녕하세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재광도 뒤지지 않았다. 아주 미덥고 점잖은 태도로 인사를 한다.
그 덕에 똑 닮은 두 사람을 마주친 직원만 어색하게 됐다. 그는 “아, 아 예…” 하며 얼떨떨한 소리를 내더니 이내 저도 잘 부탁드린다며 말하고는 쏜살같이 꽁무니를 뺐다.
익히 예상한 반응이었다. 재광이 낭만인에 처음 입사했을 때도, 심지어 이직을 했을 때도 이와 같은 반응이 한동안 지속되지 않았던가.
재광은 이런 분위기가 더는 민망하거나 면구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오래간만에 겪는 상황이라, 혹은 예상한 그대로의 반응이라 재미있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아마 의주도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무심코 돌아본 얼굴에 웃음이 한가득이다. 꼭 닮은 눈을 마주한 두 사람은 별말 없이 장난기 어린 눈길을 주고받았다.
“마저 가실까요, 대리님?”
“네, 이사님.”
대표실을 향해 걷는 두 사람의 걸음이 가벼웠다. 복도를 걸을 때도, 대표실에 노크를 하고 들어설 때까지도.
사내 연애, 그것도 비밀 연애가 시작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Geek&Hot(긱앤핫)』외전 마침
Geek&Hot(긱앤핫)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