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남의 결혼식
거울 앞에 선 재광은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간만에 차려입은 정장이 어색해 괜스레 자꾸만 손이 간다.
오랜만에 매본 넥타이는 특히 그랬다. 몇 번을 풀고 엮어 간신히 비뚤어진 정도를 최소화했으나 여전히 어설퍼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성에 찰 때까지 붙들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지금
의주 형 : 출발했어?
막 도착한 메시지처럼 지금 당장 집을 나서야 늦지 않고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는 탓이다.
재광은 “이제 나가요” 하고 간결한 답장을 보냈다. 그러면서 걸음은 자연스럽게 현관으로 향한다. 미리 꺼내놓은 구두를 꿰어 신은 그는 불 꺼진 액정에 얼굴을 한 번 비춰본 뒤 문을 열고 나갔다.
오늘은 의주의 절친한 친구이자 낭만인의 대표, 선호의 결혼식 날이었다.
????
축의금을 받아주기로 했다는 의주는 먼저 출발한 참이었다. 그 때문에 홀로 식장을 찾은 재광은 익숙지 않은 상황에 주변만 이리저리 살폈다.
사업을(그것도 요즘 잘 나가는) 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규모가 상당했다. 듣자 하니 호텔에서 가장 큰 홀을 잡았다던데, 그마저도 하객으로 북적여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하기야 하객보다 결혼식 당사자인 선호가 가장 정신없을 터였다. 쉼 없이 악수를 하고 사람을 상대하는 그를 발견한 재광은 아는 척을 할까, 고민하다가 관뒀다.
축하해주러 와서 인사를 건네는 거야 당연하지만 선호가 너무나도 바빠 보여 붙잡는 게 미안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눈도장은 이따 찍어도 그만이니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을 거란 생각이었다.
“어? 재광 씨!”
그런데 누군가와 얘기 중이던 선호가 먼저 이쪽을 발견하고 알은체를 한다. 한달음에 달려오는 행동에서는 반가움이 물씬 묻어났다.
“오랜만이에요. 주말이라 길도 많이 막혔을 텐데, 오느라 고생했어요.”
“아니에요, 저는 어차피 지하철 타고 와서. 그보다 결혼 축하드려요, 대표님.”
“직접 이렇게 와서 축하까지 해주고. 진짜 고마워요.”
짤막한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얼마나 어수선했는지 몰랐다. 여기저기서 신랑을 찾아대는 말들이 들려와 더 이야기를 나눌 여유도 주어지지 않는다. 어디선가 들리는 ‘민 대표’ 소리에 반사적으로 돌아본 선호는 황급히 재광에게 악수를 청했다.
“제대로 인사도 못 해서 어떡해요.”
“당연한 거죠. 얼른 가보세요. 예식 잘 볼게요.”
“그래요, 밥 많이 먹고요.”
그렇게 말할 때는 이미 자신을 찾는 무리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바쁘게 멀어지던 선호는 곧 “아!” 하며 말을 덧붙였다.
“의주 저쪽에 있어요!”
그러니 가서 만나 보라는 뜻일 테다. 재광은 고개를 살짝 숙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러고는 조금 전 선호가 가리킨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축의금을 내는 곳이었다. 말쑥한 정장 차림을 한 의주가 하객에게 봉투를 받아 정리하고 있었다. 재광은 일부러 걸음을 늘어뜨리다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던 하객이 자리를 뜨자 서둘러 다가갔다.
의주는 아직 재광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한 눈치였다. 조금 전 받아 든 축의금 봉투를 보고 이름을 옮겨 쓰던 그는 불쑥 내밀어지는 봉투에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아, 네. 감사합…. 어!”
고정 멘트를 날리며 봉투를 건네받던 의주의 눈이 한순간 크게 뜨였다. 별안간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선 그는 어느새 헤벌쭉 웃는 얼굴을 해 보였다.
“언제 왔어?”
조금 전만 해도 지극히 사무적이던 말투 또한 친근해졌다. 잽싼 태도 변화에 짧게 웃어버린 재광이 언제나와 같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막 도착했어요.”
간결한 대답을 듣는 의주는 운명의 상대를 만나 첫눈에 반한 소년의 얼굴이었다.
이렇게 각 잡고 차려입은 재광을 처음 보기 때문이다. 늘 단정한 캐주얼 차림이던 그가 와이셔츠에 넥타이, 재킷까지 반듯하게 챙겨 입은 모습은 의주에게 신선한 충격을 줬다.
그저 평소와 달라서가 아니었다. 습관처럼 재광을 귀여워하던 그에게는 완연한 어른의 태가 나는 제 애인이 몹시도 고혹적으로 보였다.
저보다 작은 키를 가지고 심심치 않게 놀려댔지만, 비율이 좋아서인지 몸에 꼭 맞는 수트가 퍽 잘 어울렸다.
“왜 그렇게 봐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섬세하게 살피는 눈길을 알아차린 재광은 멋쩍은 안색을 해 보였다. 그러나 그렇게 얘기하는 본인의 눈빛도 만만치는 않았다.
평소에도 의주는 재광에 비하면 조금 더 성숙한 패션을 고수하는 편이긴 했다. 그래도 와이셔츠에 슬랙스, 심플한 티셔츠에 블레이저 같은 캐주얼한 오피스룩이었는데, 오늘은 비교가 안 됐다.
단정한 수트는 큰 키나 딱 벌어진 어깨 등, 타고난 의주의 체격을 돋보이게 했다. 그뿐일까, 평소처럼 가볍게 컬이 들어간 앞머리마저 깔끔하게 정돈해 이목구비가 훨씬 또렷해 보인다.
격식에 맞춰 옷을 차려입었을 뿐이건만 여파가 거셌다. 사람이 달라 보인다는 게 이럴 때 쓰는 말이라는 걸, 재광은 지금 순간 여실히 깨달았다.
그러느라고 어떤 말도 못 잇고 있던 차였다. 누가 봐도 설렘 가득한 표정을 한 의주가 입술을 뗀다.
“잘 어울린다. 오늘 멋있네.”
나직이 말하며 뻗은 손은 재광의 넥타이로 향했다.
바로 어제, 의주가 직접 골라 선물한 넥타이였다. 수트를 차려입을 일이 별로 없는 재광이기에 이참에 좋은 거로 하나 사주겠다며 하사했더랬다.
다른 때 같았더라면 누구 안목인지 몰라도 예술이라며 거들먹거렸을 의주는 아직도 꿈을 꾸는 표정이었다.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걸치고서 재광이 서툴게 맨 넥타이를 만지작거린다.
정확히는 와이셔츠 카라 바로 아랫부분이었다. 매듭을 헐겁게 끌어내린 의주는 묵묵히 손만 놀리더니 이내 재광을 보며 밝게 웃었다.
“더 멋있다.”
“아….”
재광이 못내 신경 쓰여 하던 매듭을 반듯하게 잡아준 것이다. 저도 모르게 의주의 손이 떠난 자리를 짚어본 재광은 이어 “고마워요” 하고는 어설프게 미소 지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드물게 간질거리는 분위기였다.
금방이라도 꽃가루를 날릴 듯한 기류를 깨뜨린 이는 마케팅 팀장이었다. 의주와 함께 축의금을 받기로 한 그는 반색하며 인사했다.
“어, 재광 씨 왔어요?”
여태 다른 하객을 상대하느라고 옆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르던 참이다. 호의 가득한 미소를 마주한 재광은 서둘러 제 페이스를 찾았다.
“안녕하세요. 고생 많으세요.”
“친군데 뭘요. 재광 씨야 말로 귀한 걸음 했어요.”
자세히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전 회사 대표 결혼식에까지 오고’ 하는 말이 생략됐을 터였다. 재광은 어설프게 웃으며 “저야말로 뭘요…” 했다.
사실, 선호는 전 회사 대표가 결혼 소식을 전하면 부담스러울까 봐 재광에게는 청첩장도 보내지 않았었다.
그러나 의주의 뜻이 완강했다. 그는 재광이 결혼식에 참석하기를 부단히도 원했다. 재광도 처음 몇 번은 초대받지 않은 손님 자리를 거절했으나 결국엔 졌다. 그래서 먼저 선호에게 연락한 게 며칠 전의 일이다.
대단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잘 어울려 다니던 친구 중 하나는 결혼하지, 또 한 놈은 여자친구랑 같이 온다지. 그 틈에 혼자만 끼기 싫다는 게 요지였다. 아예 솔로라면 모를까 버젓이 애인이 있는데 그러기는 싫단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자리에서 정식으로 소개를 하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중요한 날에 주인공 자리를 뺏는 건 예의가 아니라나.
아무튼, 그러니 가벼운 마음으로 와주면 제가 기쁠 거라며 의주가 끈질기게 재광을 설득해 지금의 상황이 된 거였다.
그 과정을 솔직하게 터놓을 수 없는 재광은 어색한 웃음만 지었다. 다행히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장소라 대화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아! 치원 씨 방금 들어갔는데, 가서 인사 나눠요.”
급히 말을 더한 마케팅 팀장은 막 도착한 하객 응대에 나섰다. 더 이상 시간을 뺏으면 안 되겠다고 판단한 재광도 서둘러 인사를 마치고는 돌아섰다.
“이따 봐요” 하는 말은 의주에게만 입 모양으로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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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식은 성대했다. 시작 전에도 각종 생화로 가득 채운 홀이 몹시 화려했으나 본식이 시작되면서는 더했다. 곳곳에 조명이 켜지고 나자 버진로드를 따라 이어지는 온 공간이 휘황찬란하게 빛났다.
“1,000일도 훨씬 넘게 사귀다가 결혼까지 하는 거래요. 대표님 여자친구 있으시다는 건 알았는데 그렇게나 오래 만났는지는 몰랐어요. 대단하지 않아요? 완전 찐 사랑.”
나란히 선 신랑 신부를 바라보는 치원의 눈이 맑았다. 그는 자못 감명 받은 표정을 하고서 작게 박수를 쳤다. 천연덕스러운 반응에 재광이 설핏 웃었다.
재광은 마케팅 팀장이 일러준 대로 치원과 한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본래 낭만인 직원들 몫으로 나온 자리였으나 거기에 한 명 더 낀다고 해도 무리는 없었다.
오히려 재광과 안면을 튼 직원들이 꽤 있어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었다. 초면인 이들도 사내에서 전설처럼 내려오는 재광의 이야기를 익히 전해들은 터라 누구도 어색해하지 않는 눈치였다.
“잘 보고 있어?”
의주는 식이 시작되고 20분가량이 흐른 뒤에야 나타났다. 축의금 정리를 마치고 오느라 그랬을 테다. 낭만인 주요 인사들이 모여 있는 테이블을 마다하고 평사원들 틈에 앉는 동작이 태평했다.
몇몇 직원들이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감상한다. 어딜 가도 쉽게 볼 수 없는 광경이니 신기해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의주는 예상했다는 듯 초연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알아, 알아. 두 배로 잘생겼으니까 볼 맛이 나겠죠. 그치만 오늘은 대표님이 주인공이니까 저쪽에 집중해줍시다.”
말로는 선호 부부를 봐달라고 하지만, 정작 저와 재광을 향한 시선이 싫지는 않은 기색이었다. 테이블 밑으로 슬며시 허벅지를 짚는 손길을 느낀 재광이 형식적인 미소를 띠며 의주의 손을 떼어냈다.
마침 혼인 서약이 끝나고 박수가 터져 나오는 타이밍이라 자연스러웠다. 재광에게 밀려난 의주의 손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테이블 위로 올라와 박수에 동참했다.
주례 없는 결혼식이라 그런지 이후의 식순이 금방이었다. 성혼 선언과 축사, 인사까지 물 흐르듯 이어지고 나자 1부 예식이 끝을 맞는다.
그런 뒤부터는 테이블 위로 본격적인 수다가 오갔다. 예복으로 갈아입은 신랑 신부가 등장하면서 조용해지기는 했으나 잠시뿐이었다. 본격적인 피로연이 시작되고, 부드럽게 깔리는 배경 음악 위로 사람들의 말소리가 자유롭게 섞였다.
의주와 재광이 앉은 테이블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표님 진짜 좋으신 거 같아요. 직원들은 축의금도 내지 말라고 하셨는데 식사 대접은 진짜 호화롭게 받고 가네요.”
치원이 꺼낸 이야기에 갓 나온 스테이크를 썰던 의주가 눈썹을 달싹인다.
“내지 말래요?”
“네. 오기 싫어도 예의상 올 텐데 괜한 돈까지 쓰지 말라고, 절대 내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어요.”
“진짜요?”
“네. 저만 들은 거 아닌데?”
치원은 말을 마치자마자 “아, 참고로 저는 진짜 축하해드리고 싶어서 온 거니까 오해는 마세요” 하고 덧붙였다. 그러나 의주의 얼굴은 어쩐지 떨떠름했다.
“와, 나한테는 악착같이 뜯어가놓고.”
신상 5도어 냉장고를 뜯긴 자의 불평이었다.
물론 온전한 진심으로 들리지는 않았다. 치원은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서 물었다.
“아이, 친구시잖아요. 그래서 뭐 해주셨는데요?”
“아. 그건 대외비.”
그러자 이번에는 의주가 단호하게 잘라낸다.
제 자랑, 돈 자랑, 몸 자랑. 뭐든 가리지 않고 잘하는 의주지만 이 자리에서는 비밀을 엄수하는 게 그 나름의 배려였다.
나이팅이 승승장구하면서 성과급도 섭섭지 않게 나갔고, 이후에 있었던 연봉 협상도 우호적으로 끝났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평사원에게 위화감(혹은 박탈감)을 조성할 만한 얘기는 아끼는 것이다.
“오, 엄청 비싼 거 사주셨나 보다.”
다행히 상대방도 속내를 모르진 않는 모양이었다. 치원은 장난스럽게 가는 눈을 해 보이면서도 더는 캐묻지 않았다. 대신 동그란 안경을 추켜올리며 화제를 돌렸다.
“맞다. 식 끝나고 저희끼리 2차 가기로 했는데 같이 가실래요?”
형식상 묻는 투는 아니었다. 치원은 직장 상사에게 정말로 같이 놀자고 권하는 중이었다. 오히려 그에 기겁한 쪽은 의주였다.
“에헤이, 직원들 노는데 상급자가 끼는 거 아니에요. 더군다나 오늘 같은 주말에 무슨. 에이, 그러는 거 아니야.”
굳이 상급자들이 모여 앉은 테이블을 두고 평사원들 사이에 끼어 앉은 사람이 하는 소리치곤 엄했다. 그 탓에 치원의 안색도 의아해진다.
하지만 오래가지는 않았다. 치원은 곧 얌전히 식사만 하던 재광에게로 화살을 돌렸다.
“그럼 재광 씨는요? 아니, 재광 씨는 얘기를 하도 들어서 그런지 아직도 그냥 우리 회사 사람 같아요.”
회사 모든 이에게 친근한 존재이니 함께 가서 어울려도 좋겠다는 의미였다.
재광에게도 딱히 부담스럽거나 껄끄러운 제안은 아니었다. 적극적으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성격은 아니지만, 반대로 낯을 가리거나 다가오는 사람에게 극도로 벽을 치는 성격도 아니기 때문이다. 맘만 먹으면 가서 몇 시간쯤 보내는 건 그냥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선택권은 재광에게 없었다.
“아니, 안 돼요. 재광이 오늘 끝나고 어디 가야 된다 그랬어요.”
자신도 모르는 본인의 일정에 재광의 눈동자가 바삐 움직인다. 일단은 말을 꺼낸 의주의 의중부터 살피려는데, 그는 고고하게 시선을 내리깔고 스테이크만 썰고 있었다.
대신 테이블 아래로 구두코가 재광의 발목을 콕콕 두드린다. 저도 모르게 움찔거릴 뻔한 재광은 괜히 헛기침만 한 번 하고는 목덜미를 매만졌다.
“아… 맞아요. 잠깐 시간 내서 온 거라 저는 어려울 거 같아요. 재밌게 노세요.”
아무래도 의주와 함께하는 시간이 늘수록 뻔뻔한 성격도 옮는 게 분명했다. 의심의 여지없이 미안해하는 목소리가 술술 나온다.
“아쉽다. 잘 맞는 사람들 많아서 재광 씨 껴도 재밌었을 텐데.”
직설적으로 서운함을 표한 이는 치원이었으나 다른 사람들도 동의하는 듯했다. 안면이 있는 직원들은 물론이고, 아닌 사람들 또한 못내 안타까운 기미를 보인다. 아무래도 구전으로 재광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 호기심이 동했던 것 같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재광은 “다음에 기회 되면요” 하는 말로 저를 향한 관심을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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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고 어디 가야 한다던 재광의 일정은 사실이었다. 사람들과 인사를 마치고 막 헤어질 무렵, 의주가 주차장이 아닌 호텔 로비로 데려간 것이다. 익숙하게 체크인을 한 그는 재광을 데리고 객실로 올라갔다.
그것도 스탠다드, 디럭스 급이 아닌 스위트룸으로.
“아니, 결혼은 대표님이 했는데 왜….”
영문도 모르고 따라 들어온 재광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넓은 객실을 마냥 둘러보기만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재광의 손목을 붙든 의주는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잔뜩 의아해하는 재광에게 대답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응. 민선호가 비행기는 내일 뜨고 오늘은 호텔에서 잔다잖아.”
물론, 대꾸한다고 해서 그게 이해 가능할 거라 한 적은 없고.
재광은 눈을 빠르게 깜빡거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 …아!”
“나도 그렇게 하고 싶어서.”
이전보다 훨씬 확고한 말투로 하는 대답은 침대 위에 쓰러지듯 눕고 나서야 들을 수 있었다.
순식간이었다. 안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재광을 끌고 침대로 간 의주는 망설임 없이 매트리스 위로 몸을 던졌다. 줄곧 한 발자국 뒤에서 걷던 재광을 끌어안고서였다. 눈 깜짝할 새 의주의 아래 깔린 재광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눈동자를 버벅거렸다.
“호텔을 안 와본 것도 아니면서 왜 새삼스럽게 이래요.”
“이렇게 입은 너랑 오는 건 처음이니까?”
침대에 눕히겠다는 목적이라도 있었던 건지, 이제야 의주에게서 여유가 보인다. 그는 급히 쓰러지느라 흐트러진 재광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내리며 웃었다.
“오늘 왜 이렇게 신경 쓰고 왔어?”
“하고 오라고 넥타이까지 사줘놓고 무슨.”
“그건 그냥 내가 너한테 주는 선물이지.”
이런 이벤트를 앞두고 선물이라며 주는 물건이 정말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까. 잠시 머릿속으로 떠올려보던 재광은 이내 “참 나” 하고 말았다.
의주라면 그럴 수도 있다는 결론을 내린 참이다. 그는 평소의 무덤덤한 말투를 내어 재차 답했다.
“뭐, 그래도 격식 차리는 자리잖아요. 어느 정도는 맞춰서 와야죠, 저도.”
그러면서 제 위에서 버티고 있는 의주를 보자 곧바로 눈길을 옭아맨 의주가 씨익 웃는다.
“어느 정도? 그럼 다 맞추면 어떻게 되는 거야?”
“다 맞추면 좋겠어요?”
“아니. 지금도 충분히 예뻐. 멋있어. 너무 잘 어울려.”
눈 하나 깜짝 않고 뱉어내는 팔불출 멘트에 재광이 면역 없는 안색을 한다. 그러나 “근데…” 하고 덧붙이는 말에는 다시금 의아해지고 만다. 되묻는 재광의 목소리가 빨랐다.
“근데?”
“….”
“….”
“그래서 더 벗기고 싶어.”
재광은 기가 찬다는 양 헛웃음을 터뜨렸다. 시트 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뜨렸던 팔을 들어 눈가를 가리는 동작이 빨랐다.
너무 잘 어울린다면서, 충분히 예쁘고 멋지다면서 그래서 더 벗기고 싶다니. 앞뒤가 영 안 맞는 얘기였다. 그 때문에 어이가 없는데….
더 어이없는 사실은, 재광 본인도 그 기분을 알겠다는 거다. 축의금 접수대에서 의주를 처음 마주했을 때 느꼈던 감정을 솔직하게 서술하자면 딱 저런 내용이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뻔뻔함은 기본이고 이제는 변태적인 취향까지 옮는 건가― 고민하는 재광의 가슴이 점차 안정을 찾았다.
그리고 웃느라 들썩이던 가슴팍이 잠잠해졌을 때, 의주가 그의 눈가를 가리던 팔을 조심스럽게 끌어내렸다. 덕분에 두 사람의 시선이 다시 마주친다.
잠시간 둘 사이에는 어떤 말도 오가지 않았다. 하지만 재광은 느낄 수 있었다. 벌써 열이 들끓는 의주의 눈이 자신의 허락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벗기고 싶다는 의견을 어떻게 생각하냔 질문이 초마다 눈에서 새어 나오는 것만 같았다.
“…하고 싶은 대로 해요.”
굳게 다물렸던 입술은 결국 의주가 원하는 답을 줬다.
담담하게 마침표가 찍히자 의주가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웃는다. 그는 재광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의주는 오늘따라 참 새삼스럽게 굴었다. 평소라면 이미 입안을 헤집으며 옷을 벗기고 있어야 마땅한 사람이 웬일로 의사를 묻듯 망설이더니, 이제는 예정된 수락에도 유난히 가슴 벅차하는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지금쯤 신이 나서 온갖 데 쪽쪽 거리며 셔츠를 풀어헤쳐야 할 것 같은데, 넥타이 매듭을 풀어내는 손길은 몹시도 조심스러웠다.
그 모습은 꼭, 섹스를 목전에 두고 흥분한 성인이 아니라 깜짝 선물을 받고 몸 둘 바를 모르는 아이처럼 보였다. 선물상자에 두른 리본처럼 넥타이를 풀어낸 그는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을 와이셔츠 단추로 가져갔다.
“….”
목에서부터 하나, 하나 단추를 풀어 내려가면서도 시선은 줄곧 재광을 향해 있었다.
정확히는 눈이다. 의주는 제 아래 누워 자신을 올려다보는 재광을 곧은 눈길로 바라봤다.
평소답지 않은 의주의 행보 때문인지 재광도 혼란스러운 안색이었다. 조금은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킨다. 단추를 하나씩 풀며 옷자락을 스쳐가는 손길에는 자꾸만 몸이 움찔댔다.
몇 개 되지 않는 단추를 풀어 내리는 시간이 억겁처럼 느껴졌다. 옷 한 꺼풀 벗어내지도 않았건만 진득한 의주의 눈빛만으로도 이미 온몸이 샅샅이 만져진 기분이었다.
이윽고 앞섶이 벌어지고, 맨살 위로 의주의 넥타이가 닿을 때는 벌써 신음이 샐 것만 같았다. 재광은 아랫입술을 질끈 물다 말고 시트 위에 늘어진 팔을 들어 올렸다.
“풀어… 줄까요?”
배 위로 닿는 부드러운 천을 만지작대며 묻자 줄곧 진지하던 의주의 얼굴에 설핏 미소가 어린다. 잠자코 눈을 마주하던 그는 조금 뒤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둘 사이에 오가는 긴장감이 큰 영향을 끼치는 모양이었다. 의주의 넥타이를 풀고 단추를 차근차근 빼내는 재광의 손 또한 의주 못지않게 떨렸다.
재광은 슬며시 시선을 내리고 자신의 손끝에 집중했으나 그러는 중에도 의주의 시선이 몹시도 짙게 느껴졌다. 조금 과장을 더하자면, 단추가 하나씩 풀릴 때마다 의주의 숨이 더 거칠어지는 것만 같았다.
마냥 착각은 아닌 듯했다. 가슴께를 지나 배까지 내려간 재광의 손이 이음새를 완전히 갈라놓자 의주가 곧바로 셔츠를 어깨 뒤로 젖혀 팔을 빼냈다.
“잠깐만 들어 봐.”
그리고는 매트리스에 닿은 등을 받쳐 재광의 와이셔츠 또한 벗겨냈다.
잠시 들렸던 재광의 몸은 금세 다시 침대 위에 놓였다. 조금 더 상체를 낮춰 다가온 의주가 지그시 눈을 맞추다가 이내 입술을 붙였다.
눈빛만 봐서는 꽤 조급해 보였는데도 용케 성급하지 않은 키스였다. 오히려 재광이 애가 탈 만큼 입술을 천천히 훑는다. 마치 손끝으로 만지는 것처럼 살갗만 눌렀다 떼기를 반복했다.
묘하게 흐르는 긴장감 때문일까. 재광은 애가 타는 느낌이 꼭 싫지만은 않았다. 그는 의주가 입 맞출 때마다 가볍게 입술 끝을 물었다 놓을 뿐, 재촉 없이 다음을 기다렸다.
“….”
느긋하게 입술을 맞대던 의주는 조금 뒤 재광의 얼굴을 감쌌다. 한쪽 턱을 오롯이 받치고 엄지로 뺨을 훑는 움직임이 매끄러웠다. 그리고 부드럽게 피부를 훑던 손가락에 지그시 힘을 실을 때, 약속이나 한 것처럼 재광이 입술을 벌렸다.
의주가 열이 고인 입안으로 들어갔다. 혀끝을 가볍게 부딪치다가 진득하게 표면을 맞대고 쓸어내렸다. 유연하게 움직이는 재광의 혀가 아주 매끄럽게 스쳐 지나간다. 의주는 부드럽게 재광의 혀를 옭아맸다.
풀어주려다가 다시, 놓아주려다가 또 한 번. 맞댄 입안에서 만난 혀들이 부지런히 엉켰다. 그러면서도 너무 급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천천히 움직이는 바람에 보다 끈적한 소리가 입술 새로 샜다.
“흣….”
조금 뒤, 눈을 감고 키스에 몰두하던 재광이 급히 숨을 들이켰다. 애틋하게 재광의 뺨을 쥐던 의주의 손이 목을 타고 내려간 시점이었다. 뜨거운 온도를 남기며 미끄러진 손은 윗가슴에 머물렀다가, 곧 온전히 가슴을 지분댔다.
의주의 손은 널찍하게 가슴팍을 배회하다가 점차 범위를 좁혔다. 뾰족하게 세운 혀끝으로 입 안쪽의 민감한 점막을 건드리면서는 손가락으로 정확히 유두를 짚었다.
“으응, 흐….”
꾹 짓누르는 듯 튕기다가 가볍게 비틀자 앓는 소리가 입안에 울린다. 솔직한 반응에 의주의 왼쪽 눈썹이 작게 달싹였다. 그는 멈추지 않고 손을 움직였다.
이전보다 훨씬 선명하게 돋아난 돌기를 손끝으로 굴리더니 이내는 유륜을 살살 긁으며 자극했다. 그때마다 판판한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가 가라앉으며 솔직하게 반응한다.
집요한 손길이 계속될수록 시트가 피부에 스치는 소리가 더 선명히 들렸다. 입이 틀어막혀 마음껏 소리를 낼 수 없는 재광이 뒤척거리느라고 그랬다. 간헐적으로 움찔대며 시트 위에 등을 비빌 때마다 잘 세팅해놓은 침구에 큰 주름이 생겼다.
주름의 개수만큼 체온도 정직하게 올라갔다. 고집스럽게 재광의 가슴께를 맴돌던 손이 조금씩 높아지는 체온을 고스란히 느끼며 점점 아래로 향한다. 흉곽을 지나 옆구리의 여린 피부를 훑고, 매끈한 배를 가로질러 더 아래로 내려갔다.
입안이나 손안에 맴도는 열기로 봐서는 의주도 적잖이 흥분한 게 분명했다. 그러나 온몸을 새롭게 빚어내듯 꼼꼼하게 훑는 손길은 무섭도록 느긋했다. 덕분에 만져지는 재광만 전신에 솜털이 바짝 솟는 기분을 느꼈다.
묘하게 소름이 돋으면서도, 그래서 더 흥분되는 감각이었다.
“우으, 흡…!”
조금 뒤, 의주의 페이스에 맞춰 느릿하게 앓던 재광의 입술 새로 별안간 다급한 숨이 터졌다. 전신의 살갗을 부드럽게 매만지던 의주의 손이 상체를 타고 내려가 불시에 중심부를 잡았다.
그즈음 바지 위로 내려앉은 손은 몹시도 뜨거웠다. 살덩이와 그것을 덮은 손 사이에 옷자락이 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의 열기였다. 그 때문에 반쯤 풀린 눈으로 신체 감각에만 집중하던 재광의 눈이 일순 크게 뜨였다.
끈질기게 입안을 헤집던 의주는 그제야 입술 사이에 거리를 뒀다. 그리고는 잠시간 눈을 맞추더니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직하게 속삭인다.
“…천천히 할게.”
“….”
“너 느끼는 거 보고 싶어.”
아무런 말없이 낮은 목소리를 듣던 재광은 빤한 눈으로 의주를 봤다.
솔직한 맘으로는 지금까지의 접촉이 충분히 여유로웠다는 생각이었다. 몸은 이미 달아올랐으니 이제는 어서 의주를 받고 싶었다. 온몸이 간질거리는 추상적인 감각도 좋지만 확실한 자극을 원한 거다.
이를테면 그런 것들 말이다. 안을 가득 채우는 부피감이라든가, 내벽을 긁으며 들어와 묵직하게 전립선을 누를 때의 짜릿함 같은.
그러나 의주와 마주한 눈은 수긍의 의미로 스르륵 감기고 말았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어필하지 못할 만큼 무른 사람이어서가 아니었다. 의주가 분명히 말하지 않았나. 재광이 느끼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재광은 의주의 그런 표현에 약했다. 더는 자신과 닮은 얼굴이 아니라 오롯이 재광을 원하는 마음이 드러날 때. 그럴 때면 오직 저에게만 쏟아지는 애정에 파묻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기분으로는 의주에게 뭐든 다 해줄 수 있었다.
지금만 해도 그랬다. 닫힌 재광의 눈꺼풀 아래로 입술 끝이 미묘하게 올라갔다.
“으읏, 흐….”
의주는 이제 입술로 온몸을 훑을 작정인 듯했다. 은근하게 올라간 입꼬리에 짧은 키스를 하더니 손이 그랬던 것처럼 목선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간다. 울대 옆에서는 얇은 피부를 강한 힘으로 빨아들였고, 쇄골 아래서는 이를 세워 물기도 했다.
얕은 둔덕을 타고 가슴팍에 다다라서는 보다 집요하게 움직였다. 입술 끝으로 주변을 간질이다가 유두를 물고서 혀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진득하게 핥다가 튕겨내듯 입안에서 굴릴 때는 재광이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공들인 애무는 그만한 성과가 있었다. 재광은 아랫배 부근이 뻐근해지는 느낌을 받았고, 애꿎은 입술을 짓이기거나 깔린 몸을 바르작대는 식으로 흥분감을 여실히 드러냈다.
“읏… 흐응, 아…!”
입술과 혀를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성감을 잔뜩 끌어올리던 의주는 재광의 신음이 짙어질 무렵에야 아랫도리로 손을 옮겼다. 아까 잠시 쥐었다 놓았던 중심부는 이제 슬쩍 봐도 양감이 상당한 처지였다.
“아아!”
불룩하게 솟은 부분을 지그시 누르자 곧바로 달뜬 신음이 터진다. 목을 뒤로 꺾으며 작게 열리는 입술을, 의주는 유심히 바라봤다. 그러고는 원을 그리듯 뭉근하게 재광의 가운데를 매만졌다. 하악, 목을 긁으며 숨이 넘어가는 소리가 생생하게 울렸다.
의주는 그제야 재광의 버클을 풀었다. 여태 살끼리 맞닿으며 축축한 마찰음만 나던 중이라 작은 금속성이 유난히 이질적으로 들렸다. 마치 그 소리를 없애려는 사람처럼, 의주가 빠르게 재광의 하의를 내렸다.
“아, 흐으, 흡…!”
그리고는 잠시 떼었던 입술을 도로 재광의 몸에 붙였다. 뻐근하게 힘이 들어간 아랫배의 긴장을 풀듯 하복부에 입을 맞췄다가 선명하게 솟은 장골, 거기에서 이어지는 허벅지까지 길게 훑어 내렸다.
허벅지 안쪽의 여린 살을 깨물 때는 이대로 사타구니 쪽을 향하는 게 자연스러운 그림처럼 보였다.
맞는 듯 틀린 예상이었다. 반쯤 발기한 재광의 성기를 입에 담을 줄 알았던 의주는 살 기둥 대신 고환을 물었다.
“흣…! 아아, 저기, 형, 으윽….”
생각지 못한 자극에 재광이 몸을 파드득 떤다. 양손은 시트 위를 하릴없이 배회했다. 예민한 부위가 단숨에 먹힌 그는 어쩔 줄을 몰라 허리를 달싹거렸다.
의주는 골반이 뜨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도드라진 뼈 부근을 콱 틀어잡고서 재광의 허리 아래를 되레 더 높이 들어 올린다. 안정적으로 자세를 잡은 뒤에는 음경을 살살 핥아 올리다가 다시 고환을 머금었다. 그리고….
사타구니에 머물던 입술이 더욱 은밀한 곳으로 들어갔다.
“지금, 뭐, 하는! 하, 윽! 으읏…, 형, 아아…!”
보기 좋게 살이 오른 볼기를 벌리고 구멍 주변을 축축하게 적시자 아래에서 난리가 난다.
재광은 말 한마디 제대로 잇지 못하고 연신 거친 숨을 삼켰다. 여태까지 침구 위를 방황하던 손은 이불보를 꽉 틀어쥐고서 발발 떨렸다.
얼마나 놀랐는지 의주가 틀어쥔 엉덩이에도 바짝 힘이 들어갔다. 그 때문에 재광이 잔뜩 긴장했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을 텐데도 의주는 태연하게 행위를 계속했다.
“아…! 읏, 으응, 그만, 요. 하, 읏!”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감각에 재광이 그만하라 이르는데도 들을 생각이 없어 보인다. 의주는 그만두기는커녕 오히려 꼼꼼하게 적셔놓은 구멍 사이로 매끄럽게 혀를 집어넣었다.
“으응, 윽! 아니, 이거 아니… 아! 흐읏, 읍!”
말캉한 살덩이는 끝을 뾰족하게 세우자 제법 단단한 기둥 역할을 했다. 의주의 성기에 비하자면 터무니없는 굵기인데도 뒤를 풀지 않은 탓에 빠듯이 밀려들어간다.
굵기는 물론이고 길이 또한 비할 바는 못 됐다. 그러나 눅진하게 입구 주변을 맴도는 움직임은 재광에게 자극을 주기 충분했다.
“이상해, 요, 아! 아… 그만! 흡, 으읏…!”
재광은 낯선 감각에 몸 둘 바를 모르는 듯했으나 의주가 느끼기에는 나쁘지 않은 반응이었다. 혀끝을 좁혀 안을 찌를 때마다 내벽이 크게 옴쭉댔기 때문이다. 볼기 사이에 고개를 묻은 의주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재광의 아랫배 또한 요동치고 있었다.
“제발 그, 만… 윽! 흐으, 읏….”
재광이 거의 애원할 즈음에야 의주가 기행을 관뒀다. 조심스럽게 재광의 골반을 내려놓은 그는 황급히 제 아래 누운 얼굴부터 살폈다.
조금 전까지 거의 울먹이며 부탁하긴 했지만 다행히 괴로운 표정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흥분을 못 이겨 잔뜩 달뜬 안색이었다.
뺨은 상기됐고, 짓무른 눈가에는 아직도 열감이 가득하다. 얼마나 깨물어댔는지 색이 진해진 입술 사이로는 타액이 비쳤다.
힘겨웠을 재광에게는 미안하지만 그 모습이 의주의 눈엔 몹시도 색정적으로 보였다. 얼굴은 물론이고 가쁘게 들썩이는 가슴, 크게 일렁이는 배까지. 무엇 하나 야하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당장이라도 녹일 것처럼 재광을 내려다보던 의주는 마른침을 삼킨 뒤 입을 열었다.
“지금, 넣어도 돼?”
천천히 하겠다고 얘기했으나 내심 조급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열이 들끓는 목소리로 묻자 재광의 풀린 눈매 안으로 눈동자가 버벅버벅 굴러간다.
재광은 갈등하는 기색이었다. 한 차례 작은 살덩이가 드나들긴 했으나 평소처럼 느긋하게 뒤를 풀지는 않은 터라 지레 겁이 나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끝내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대신, 천천히… 해요.”
당부하는 목소리 끝이 살짝 떨렸다.
명심하듯 굳건한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인 의주는 그제야 자신의 벨트를 풀었다. 버클을 열고 지퍼를 내리는 동안 얌전히 누운 재광의 목울대가 몇 번씩 일렁였다.
“흣…! 으읏, 아, 하아….”
자신 또한 완전한 나신이 된 의주는 예고했다시피 곧바로 귀두를 구멍에 맞췄다. 그대로 천천히 고간을 밀자 단단히 발기한 성기 끝이 입구 주변의 주름을 팽팽하게 벌리며 모습을 감춘다.
그래도 한 번 살덩이가 들어갔다 나온 탓인지 예상보다 수월했다. 바짝 긴장했다가 풀린 구멍은 버거워하면서도 꽤 부드럽게 의주를 받아들였다.
의주는 약속한 대로 천천히 안을 비집고 들어갔다. 성기를 반쯤 걸친 다음에는 심호흡을 하는 재광의 상태를 살피며 잠시 멈추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에는 들어 올린 재광의 허벅지 뒤를 입술로 진득하게 훑어 내리며 자극을 분산시켰다.
무릎을 쥐고서 오금을 엄지로 살살 문지를 때는 아랫배가 잘게 떨리며 내벽이 크게 출렁였다. 그러면서 반쯤 걸쳐 있던 의주의 것을 더 안으로 잡아당긴다. 의주는 버티지 않고 자연스럽게 재광의 안으로 들어갔다.
“아… 흐, 으응…! 아아, 아, 윽!”
재광이 호흡을 내뱉는 타이밍을 따라 조금씩 밀어 넣던 살덩이는 어느새 끝까지 들어갔다.
천천히, 자연스럽게 밀어 넣었으나 마지막에는 조절이 미흡했다. 조금 세게 안을 쿡 쑤시자 기어이 재광이 거친 숨을 먹는다.
의주는 꼭 사과하듯이 재광의 가슴팍에 입술을 묻었다. 이미 붉게 자국이 남은 살결 위로 또다시 입 맞추며 잇자국을 새기자, 끈질기게 이불자락을 쥐던 재광의 손이 올라와 의주의 머리칼을 파고들었다.
“흑…! 으, 으읏…. 깊어요, 아, 아아!”
무리한 삽입을 한 터라 다른 때처럼 온전히 빠져나갔다가 다시 들어가기는 힘들었다. 그 때문에 살짝만 몸을 물린 의주가 도로 안을 찌르자 살덩이가 더 깊게 들어간다. 재광은 습한 음성으로 앓을 수밖에 없었다.
좁은 범위에서 들락거리는 행위는 몇 번이고 반복됐다. 배 속 깊은 곳이 찔릴 때마다 울먹이듯 신음하던 재광의 목소리도 점차 안정을 찾았다.
뒤쪽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점차 부드러워진 내벽은 조금씩 커지는 의주의 움직임을 무리 없이 받아내기 시작했다.
덕분에 의주의 허리가 움직이는 반경도 더 커졌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느릿한 속도를 유지했다. 천천히, 그러나 더 깊숙하게 안을 헤집자 어쩔 줄 모르게 되는 쪽은 재광이었다.
“아흐읏… 흐, 아, 아…! 아아!”
곧추선 아래가 밀고 들어올 때마다 온 내벽의 감각이 살아나 자극이 컸다. 안이 들어찰 때마다, 반대로 비워질 때마다 온몸이 간질거리고 눈앞은 점멸했다.
그냥 온몸이 다 성감대 같았다. 의주가 찌르는 족족 배 속이, 만지는 데마다 모든 살결이 잘게 떨렸다. 머리끝까지 차오른 자극을 견디다 못해 꾹 감아버린 눈 아래 속눈썹까지도.
또, 의주의 팔을 붙든 손마저도.
의주의 팔뚝을 잡은 손끝은 애처로울 만큼 덜덜 떨렸다. 그게 겁을 먹거나 괴로운 게 아니라 극도의 흥분 때문이라는 걸, 의주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눈, 보고 싶어. 나 봐봐.”
전신을 바들바들 떠는 재광에게 굳이 부탁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낮은 음성으로 말하자 파들거리며 내려앉았던 속눈썹이 곧 위로 올라온다. 간신히 들린 눈꺼풀 아래로는 성감에 물든 눈동자가 드러났다.
의주가 뒤를 파고들 때마다, 그리고 빠져나올 때마다 재광의 눈이 빠르게 깜빡거렸다. 쉴 새 없이 앓는 입술 아래로 벌어진 턱도 작게 떨렸다.
그래도 이전보다는 성감에 많이 적응한 듯싶었다. 꿋꿋하게 눈을 맞춘 재광은 의주의 동작에 맞춰 제 허리를 부드럽게 놀렸다. 의주의 무게에 위로 밀렸다가 다시 제자리를 찾는 움직임이 자연스러웠다.
“하윽… 아, 아아! 으읏… 흣!”
거의 한 몸이나 다름없었다. 더 빨리, 혹은 더 천천히. 둘 중 누구도 입 밖으로 요구하지 않았는데도 서로의 속도를 받아주는 합이 좋았다. 이토록 나른한 섹스는 처음인데도 급격히 불이 붙어 몰아치는 관계 못지않게 흥분이 고조됐다.
“할 거, 할 거 같아요. 아…! 아아, 읏!”
느긋한 관계에도 절정은 찾아왔다. 줄곧 팔뚝을 붙잡던 재광의 손이 의주의 등으로 올라온다.
깔끔하게 자른 손톱은 널따란 등을 긁으며 떨어졌다. 의주를 놓치는 게 불안하기라도 한 건지, 금세 다시 등 뒤로 팔을 둘렀으나 그마저도 도로 미끄러지고 만다.
집요하게 재광을 바라보던 의주는 침대 위로 널브러진 손을 따라갔다. 힘없이 구부러진 손가락 틈을 벌리고는 사이사이 제 손을 맞춰 넣는다. 그러자 재광도 힘주어 의주의 손을 잡았다.
서로 옭아맨 손에 힘이 들어갈수록 아래를 치받는 속도가 조금씩 빨라졌다. 다른 때에 비하자면 여전히 여유롭지만 지금의 상황에서는 상당한 속도감이었다. 아래가 부딪치는 소리가 빨라질수록 두 사람의 호흡도 덩달아 가빠졌다.
그리고 흥분을 못 이겨 내내 찌푸리고 있던 재광의 눈두덩이 더 일그러질 즈음, 의주가 다른 손을 내려 아랫배에 바짝 붙은 살덩이를 쥐었다.
“흐읏! 아…! 아, 아아!”
절정에 가까워진 재광의 몸이 급격히 튀어 오른다. 내지르는 신음에도 물기가 어렸다. 의주는 흡사 괴로운 듯한 표정을 짓는 재광을 꼼꼼하게 뜯어보며 손을 움직였다.
“조금, 만…. 으읍! 좀만, 더, 흣, 빨리…!”
더는 견디기가 어려운지 재광이 끝내 보채는 말을 뱉는다. 그런데도 의주의 손짓은 일정했다.
아마 자신과 속도를 맞추려는 셈일 터였다. 그는 뒤를 오가는 속도를 높일 때가 되어서야 재광의 것을 쥔 손에도 힘을 가했다.
“아흐읏, 응, 흣! 아아… 아!”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의주의 손안에서 정액이 터졌다.
재광의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의주는 간발의 차로 내벽 깊은 곳에 사정했다. 한바탕 체액을 쏟아내고도 두어 번 더 깊게 성기를 박아 넣어 자신의 흔적을 새기듯이 굴었다.
“….”
“괜찮아?”
단 한 번의 사정이었으나 체력 소모는 여느 때보다도 큰 느낌이었다. 유난히 지쳐 보이는 재광을 살핀 의주가 자상한 말투로 물었다. 그러자 재광이 아무런 대답 없이 그의 목을 끌어안는다.
의주는 흔쾌히 제 몸을 내줬다. 간신히 “힘들어” 하고 속삭이는 재광의 이마에, 코끝에 입 맞추며 저 또한 그를 세게 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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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한참이나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천장을 보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가, 불현듯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가, 별다른 대화도 없이 손장난만 치다가…. 그야말로 여유로운 시간이었다.
거의 침대에 눌어붙은 것처럼 뒹굴기만 하던 둘은 창밖이 어두워진 뒤에야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슬슬 허기가 질 무렵이었다. 룸서비스와 외식 중에 고민하다가 근처의 식당에 방문하기로 한 두 사람은 함께 욕실로 들어섰다.
값비싼 방이라 그런지 욕조마저 뷰가 좋았다. 도심의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위치였다. 욕조의 크기와 깊이 또한 넉넉해, 커플이 함께 몸을 담그기에도 적격이었다.
풍성한 거품을 풀어놓은 욕조 안, 재광은 의주의 다리 사이에 앉아 온전히 몸을 늘어뜨렸다. 거품으로 미끈거리는 가슴팍에 등을 붙이자 뒤에서 단단한 팔이 허리를 둘러 안는다. 재광은 자신의 배 앞에서 깍지를 낀 커다란 손을 가만히 만지작거렸다.
특별히 오가는 말없이 적막을 즐기던 중이었다. 재광이 쫀쫀한 거품을 손바닥에 얹고 의미 없이 들여다보는데, 문득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린다.
“재광아.”
의주에게서 온전한 이름을 듣는 일은 손에 꼽을 정도여서, 재광은 의아한 표정으로 반쯤 돌아봤다. 잠자코 들여다보던 거품을 수면 위에 섞은 다음이었다.
“네.”
잔뜩 궁금한 안색을 하고 있으면서도 내뱉는 대답만큼은 담담했다.
의주는 감싸 안은 허리를 제 쪽으로 더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재광의 어깨 위로 바짝 고개를 가져다 대고서 말을 이었다.
“아까, 결혼식 보니까 어땠어?”
“어, 뭐…. 잘 됐다? 잘 살면 좋겠다?”
고민하며 뜸을 들인 눈치로 보아 별생각 없이 앉아 있다 온 게 분명했다. 뒤에 흘러나온 대답은 질문에 대꾸하기 위한 최소한의 성의나 다름없었다.
눈치 빠른 의주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었다.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푸스스 웃어버리고는 미끈거리는 재광의 어깨에 턱을 부볐다.
“나는 부러웠는데.”
“예? 어… 아….”
가볍게 대화에 응하던 재광이 그제야 당황한 기색을 했다.
비록 의주는 뒤에 있어 보지 못했지만, 눈을 빠르게 깜빡거리나 싶더니 눈동자를 부자연스럽게 굴리며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그러는 한편으로는 ‘갑자기 이런 얘기를?’ 하는 마음이 드는 것도 같았다.
- 나도 그렇게 하고 싶어서.
하지만 객실에 들어선 지 얼마 안 돼서 꺼낸 말을 떠올리면서부터는 당황한 내색조차 쉽게 할 수가 없었다.
뜻밖이었기 때문이다. 의주로 인해 남자와 처음 연을 맺은 재광도 사귀기 시작한 순간 결혼은 포기할 각오를 했는데, 여태 동성을 만나온 의주가 갑작스럽게 이런 얘기를 꺼내는 의중을 알 수 없었다.
항상 유쾌하게 굴던 모습과는 달리 진지한 목소리라 더 그랬다. 차라리 무게감이라곤 없이 결혼하고 싶다 말했다면 웃어넘기고 말 텐데. 의심의 여지없는 진담이라 쉽사리 반응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어쩔 도리 없이 침묵만 지키자 재광의 어깨 위로 다시 한 번 진중한 목소리가 내려앉는다.
“재광아, 우리 결혼할까?”
장난기라곤 조금도 섞이지 않은 진지한 음성이었다. 이번에야말로 딱딱하게 굳어버린 재광은 간신히 눈알만 굴리며 어떤 대답을 줘야 할지 고민했다.
“아….”
좀처럼 답이 나오질 않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도 의주는 참을성 있게 기다려줬다. 조금의 재촉도 없이, 마치 없는 사람처럼 숨을 죽이고서 재광이 충분히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준 것이다.
물론, 시간을 준다고 해서 쉽게 정리될 생각은 아니었지만.
재광은 한참 동안 다물고 있던 입술을 간신히 떼어냈다.
“형, 그, 저기….”
“응, 얘기해.”
“어… 그러니까 우리가 어떻게 결혼을…. 그게, 아직 우리나라는 법적으로 안, 안 되지 않나?”
당황스러운 와중에도 재광 딴에는 진지하게, 그래서 더 이성적으로 고민해보려 애를 쓴 결과였다.
암만 생각해도 결혼이라는 제도는 둘 사이에 존재할 수가 없는 거다. 그래도 최대한 조심스럽게 얘기해보려 갖은 애를 쓰는 기색이 목소리에 역력히 묻어나왔다.
답지 않게 차분한 태도를 보이던 의주도 결국에는 소리 내 웃고 말았다. 그는 끅, 숨넘어가는 소리까지 내며 한참을 웃었다. 그런 뒤에야 다시금 목소리를 정돈해 부드러운 말투를 냈다.
“광아, 결혼이 별거야? 믿고 터놓을 수 있는 주변 사람 몇 명 같이 모여서 축하하고 축하받으면 그거로 된 거지.”
“….”
“아, 근데 같이 살아야 돼. 이건 별거야. 중요해.”
이 순간 재광은 의주가 자신의 뒤통수만 본다는 사실이 그렇게 다행일 수 없었다. 현실감 없이 “아…” 하고 내뱉는 표정이 머리를 세게 한 방 맞은 듯 멍했다.
이 프러포즈가 제도적인 장벽에 부딪힌 동성 커플의 좌절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건 다행이지만, 그러는 반면 의주가 너무도 진심이라 다시금 진지하게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잖은가. 의주가 조금이라도 장난을 칠 요량이었다면 미국이나 아일랜드로 떠나자는 기약 없는 말을 곁들였을 테다. 그러나 그는 지금 일상을 유지하며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방안을 제시하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진심으로 재광과 미래를 그려보고 싶다는 뜻이었다. 지금 재광이 어떤 답도 주지 못하고 심사숙고하는 이유다.
“….”
의주는 이번에도 진득하게 재광을 기다려줬다. 재광은 수면 위를 두껍게 덮은 거품만 뚫어져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모호한 미소를 지은 재광이 뒤를 돌아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