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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경축! 독립! (15/21)

2. 경축! 독립!

“이 가격에 이런 방 또 없어요.”

기운 넘치는 목소리를 듣는 재광의 얼굴에 얼핏 피로가 스친다. 그도 그럴 게, 또 없다는 방만 벌써 다섯 군데 째였다. 다소 지친 안색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공인중개사는 쉼 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입지도 좋잖아요. 역에서도 안 멀고 주변에 마트나 은행, 병원도 다 있고.”

재광이 혼자 지낼 방을 구하는 중이었다. 형에게 난생처음 크게 대들고 나서 결심했던 독립이 목전으로 다가왔다.

당초 목표로 세웠던 6개월보다는 시일이 조금 더 걸렸으나 이만하면 순조로운 편이었다. 어지간한 월세 매물에는 비벼볼 수 있는 보증금을 모았고, 지금까지 민광은 어떤 낌새도 알아차리지 못했으니 말이다.

다만 기대만큼 마음에 꼭 드는 방을 찾기가 어려울 뿐.

“이전까지 보여드린 신축에 비하면 지어진 지가 좀 되긴 했는데, 그래서 평수도 잘 나왔어요. 방음도 더 잘 되고.”

그래도 체력을 축내가며 종일 돌아다닌 보람이 없진 않았다. 여태 침대 하나 들어가면 남는 공간이 없는 대여섯 평짜리 원룸을 보다가 드디어 숨통 좀 트이는 방을 발견한 것이다.

뻑뻑한 눈을 비빈 재광은 더 유심히 내부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방이 또 살던 사람들 다 잘 됐거든요. 직전에 살던 아가씨도 준비하던 시험 붙고 발령 받아서 급하게 나가느라 공실 됐잖아요. 이사 날짜 맞추기도 딱 좋지, 여기가.”

“여기 주차는 어떻게 해요?”

최선을 다해 매물을 어필하는 공인중개사에게 질문한 이는 의주였다. 개수대 물을 틀어보던 재광은 흘끔 뒤를 돌아봤다가 도로 저 할 일에 집중했다.

사실 의주는 재광의 독립을 누구보다 반기면서도 동시에 언짢아했었다.

재광이 성질 나쁜 형에게서 벗어나는 건 기쁘지만, 몸만 들어오면 되는 자신의 집을 거절하고 굳이 1인 가구의 길을 걷겠다 선언해 적잖이 실망했던 거다.

그렇다고 해서 결사반대를 하고 나서지는 않았다. 재광이 이직할 때 그랬던 것처럼 ‘적당히 살아보고 합치자’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오늘도 고민 없이 따라 나서놓고 정작 방을 보면서는 별말이 없더라니.

뒤늦게 말문이 트인 것으로 보아 이제야 좀 매물에 만족한 듯싶었다.

“차량 등록하시면 되는데, 세대당 한 대씩은 얼마 안 해요. 그리고 건물 뒤로 돌아가면 갓길에 자리가 꽤 나서 거기다 대는 분들도 많고요.”

충분한 답이 되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인 의주는 이내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까지 부엌 가구들을 들여다보던 재광도 뒤따라 들어갔다.

원룸에 딸린 평범한 욕실 구조였다. 방 자체는 여태 봐온 곳들에 비해 크지만 욕실 사이즈는 비슷했다. 세면대와 변기, 그리고 딱 샤워기가 들어가는 크기.

차별점이 있다면 그나마 샤워 부스로 공간이 분리되어 있어 더 신경 쓴 느낌을 주는 정도였다.

“아, 나는 욕조 있는 게 더 좋은데.”

좁은 내부를 둘러본 의주는 고개를 비스듬히 틀었다. 아쉬움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음성이었다.

그러면서도 손으로는 부지런히 변기 물 내림 버튼을 누른다. 곁에서 시원스레 내려가는 물을 보던 재광이 코웃음을 쳤다.

“내가 살 데거든요. 형 말고.”

치기에 눈이 멀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겨우 내뱉었던 ‘형’ 소리가 이젠 제법 자연스러웠다. 의주는 재광의 볼을 검지 끝으로 가볍게 건드리며 “맨날 올 거거든요” 하고 받아쳤다.

“형제끼리 사이가 진짜 좋으신가 봐요.”

그 모습을 지켜보는 공인중개사는 두 사람이 형제라 믿어 의심치 않는 눈치였다. 살갑게 한마디 얹자 문가를 돌아본 의주가 보란 듯이 재광의 어깨 위로 팔을 얹는다.

“그럼요. 제가 또 동생을 무지막지하게 사랑하죠.”

천연덕스럽게 이마를 콩 부딪칠 때는 재광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바쁘게 굴러다니는 눈동자에서 ‘지금 뿌리치면 더 수상하겠지’ 하는 생각이 훤히 읽혔다.

의주는 한바탕 둘러본 욕실을 나설 때가 되어서야 재광을 놓아줬다. 그마저도 성인 남성 둘이 나란히 통과할 수 없는 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놓아준 격이었다. 홀로 가슴 졸이던 재광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공인중개사의 낌새를 살폈다.

“곰팡이 문제 같은 건 없는 거죠?”

“그럼요. 벽지 보시면 아실 거예요. 자국 하나도 없잖아요, 그죠?”

이젠 거의 의주가 살 곳을 찾으러 다니는 모양새였다. 여태껏 떨떠름하게 따라만 다니던 의주는 적극적으로 대화를 이끌며 꼼꼼히 내부를 뜯어보기 시작했다.

재광은 조금 어이없어하면서도 굳이 뜯어말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의주가 조목조목 따질 때마다 돌아오는 대답을 주의 깊게 들었다.

????

의주가 관심을 보이던 방을 본 뒤로도 다른 부동산에 방문해 세 군데를 더 돌았다.

직장인 신분으로 시간을 빼기가 어려워 한 번에 해결하려는 의도였다. 종일 부지런히 발품을 판 두 사람은 고깃집에 마주 앉아서야 숨을 돌렸다.

“소 먹자니까.”

“이거면 돼. 뭐든 기름칠만 하면 됐지.”

재광이 사는 자리였다. 자신의 일로 주말 하루를 몽땅 썼으니 식사 대접 정도는 해야 면이 설 것 같았다.

그렇기에 거금이라도 감수할 의사가 있었는데, 뭐든 고급으로 해결하는 여의주 님께서 몸소 말리고 들었다.

“광아, 너 이제 다 돈이야. 아무리 집에 있는 거 다 빼온다고 해도 샴푸, 그릇 이런 건 다 사야될 거 아냐. 그거 하나씩 담다 보면 은근 목돈 든다?”

그러니 괜한 데 돈 쓰지 말고 아낄 수 있을 때 아끼라는 뜻일 테다. 꽤 진지하게 하는 조언이었으나 재광은 푸스스 웃어버리고 말았다.

평소 행동으로만 봤을 때 의주는 누구보다도 세상 물정 모를 듯한 사람이지 않나. 이사 문제만 해도 무조건 비싼 물건으로만 집을 채운대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 의주에게서 제법 인생 선배의 태가 나자 괜히 웃음부터 샌다.

“그래, 지금 웃어라. 그때 가면 정신없고 피곤해서 울지.”

“도와줄 거면서.”

‘어쭈’ 하는 반응에는 되레 뻔뻔하게 받아쳤다. 성격도 옮는지 요즘 재광은 부쩍 낯짝이 두꺼워진 차였다. 그리고 재광이 이처럼 당당하게 굴 때마다 의주는,

“응. 맞아. 전폭적으로.”

좋아 죽었다.

재광의 낯이 암만 두꺼워졌대도 매일 같이 보이는 태도는 아니다 보니 이런 희귀한 반응이 나올 때마다 새로워하는 것이다.

이번에도 함박웃음을 짓는 의주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테이블 위로 팔을 얹어 상체를 기울인 그는 잔뜩 신이 난 목소리를 냈다.

“그릇은 내가 해줄게. 저기 이천에 명인 있는데, 인터넷으로도 안 팔아서 무조건 가서 사야 되거든? 이사 시기 맞춰서 한번 가자.”

“이천까지요?”

“왜, 좋잖아. 차 타고 가면 생각보다 얼마 안 걸려. 언제 가지? 이사 언제쯤 할 거 같애?”

“계약해도 이거저거 준비할 시간 필요하니까… 9월 초 정도 되지 않을까요? 빠르면 첫째 주?”

의주의 맘은 이미 이천에 가 있지 싶었다. 재빨리 휴대전화를 집어 든 그는 캘린더 앱을 켜고 일정을 가늠해보는 중이었다. 그러더니 이내 정면으로 시선을 돌리고 묻는다.

“그러고 보니까 계약은? 맘 정했어? 어디로?”

콩고물에 정신이 팔려 정작 중요한 사안은 꺼내 볼 생각도 못 하던 차였다. ‘계약’이란 말을 꺼내며 자세를 바로 세운 의주가 눈을 크게 껌뻑거렸다. 재광은 의미 없이 볼을 긁으며 답했다.

“다섯 번짼가 여섯 번짼가. 큰 방 있었잖아요. 거기가 제일 낫지 않나?”

모호한 설명이었으나 알아먹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오늘 열심히 돌아다니며 구경한 곳 중 크다고 표현할 수 있을 만한 방은 단 한 군데뿐이었기 때문이다.

의주가 그나마 긍정적으로 봤던 그 오피스텔.

“그치, 거기가 제일 나았지.”

“오늘은 늦었으니까 월요일에 바로 연락해보게요.”

“되도록 빨리 해. 딴 사람들 눈에도 거기가 괜찮아 보일 테니까.”

재광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몇 마디 대화가 오가는 사이, 불판 위에 놓인 삼겹살은 아주 잘 익어가고 있었다. 표면에는 기름기가 올라와 윤기가 흐르고, 살코기는 가운데 부위에만 붉은 기가 남았다.

무심결에 불판을 확인한 재광은 한쪽에 놓아둔 집게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의주가 더 빨랐다. 그는 재빨리 집게를 들고 기다랗게 손질된 고깃덩어리를 뒤집었다. 치익, 하며 재차 불판에 들러붙은 삼겹살 표면이 군데군데 진한 빛깔을 띠어 맛깔스러운 비주얼을 자랑했다.

한발 빠른 의주 덕에 할 일을 잃은 재광은 먹음직스러운 고기만 보다가 도로 입을 열었다.

“방만 비울 거라서 짐은 용달 정도만 부르면 될 거 같은데, 또 뭐 해야 되지?”

“입주 청소 해야지.”

“근데 공실에 그 정도면 깨끗하지 않았어요? 불러야 되나.”

“집 본다고 우리처럼 신발 신고 막 들어간 사람들 얼마나 많았겠어. 그리고 들어가기 전에 여기저기 보수하면 그거 치우는 거 장난 아니다. 원룸이라고 얕볼 거 못 돼.”

줄지어 선 고기들을 모조리 뒤집은 의주는 연이어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르면서 대꾸했다. 그때까지도 두 손 놓고 지켜보기만 하던 재광은 별안간 피식 웃었다.

“왜 또 웃어?”

“아니, 이런 건 전혀 모를 것 같은 사람이 은근히 다 꿰고 있으니까 신기해서요.”

솔직한 대답에는 의주가 어깨를 곧게 펴며 의기양양한 자세를 했다.

“광아, 나 여의주야. 내가 모르는 게 어디 있어.”

말끝에는 퍽 뿌듯한 미소가 따라붙었다.

이 정도 반응이야 얼마든지 예상 가능한 범위였다. 재광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성의 없이 “아, 예” 하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입술 바로 앞까지 내밀어진 고기를 받아먹는 행동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

계약 이후로 재광은 줄곧 바빴다.

갈 곳이 정해지고 나자 연쇄 작용으로 해야 할 일들이 우르르 생겨난 탓이다. 방 한 칸만 똑 떼어내는 격이라 이사, 입주 청소 견적 정도는 수월한 편이었으나 나머지가 문제였다.

재광이 계약한 방은 세가 비슷한 원룸 중에서 가장 넓은 면적인 대신 풀옵션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냉장고, 세탁기 같은 가전을 중고로 알아보느라고 발품깨나 팔아야 했다.

그러면서 틈틈이 짐도 싸야 했다. 굳이 포장 이사를 할 만한 양은 아닌 듯해 자잘한 소지품들은 직접 챙기기로 한 거다.

그런데 일일이 챙기다 보니 은근히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었다. 더군다나 민광이 모르게 하느라고 얼마나 애먹었는지 몰랐다.

다행히 들키지는 않았다. 퇴근 이후라든가 주말만 되면 뻔질나게 밖으로 나도는 통에 민광이 무슨 바람이 들었냐며 흘리듯 말하기는 했지만 설마 독립을 준비하리라곤 생각지 못하는 눈치였다.

덕분에 어느 날 갑자기 예고 없이 이사를 나가겠다는 재광의 목표는 순항 중이었다. 바로 내일이 결전의 날이다.

“작업 다 끝났는데 한번 보세요. 어디 더 봐드릴 데 있으면 말씀하시고요.”

“아… 그럼 저기, 욕실에 샤워 부스 틈 있잖아요. 거기만 좀 부탁드릴게요.”

지금은 이사를 목전에 두고 입주 청소를 진행하는 중이었다. 일정에 맞춰 반차까지 낸 재광은 업체 담당자에게 정중히 말했다.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상대방은 곧장 욕실로 들어갔다.

작업이 다 끝났다던 말대로 마무리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따로 부탁한 샤워 부스 틈새를 확인한 재광은 금방 잔금을 치렀고, 업체 관계자도 서둘러 물품을 챙겨 자리를 떴다.

“와….”

환기를 할 요량으로 창문을 활짝 연 재광은 새삼스럽게 방 안을 둘러봤다.

처음 봤을 때부터 비어 있는 공간이었지만 도배를 새로 하고 청소까지 말끔히 마치자 느낌이 달랐다. 훨씬 깔끔한 모습이라 그런지 더 넓어 보이는 한편, 어딘가 낯설기도 했다.

이사 준비를 하는 동안 통장에서 돈이 줄줄이 새나갈 때와는 또 다른 기분이었다. 그때도 진짜 독립을 하기는 하는가 보다 했었는데, 당장 내일이면 여기가 보금자리의 역할을 한다 생각하니 조금은 설레는 듯도 했다.

그래서 휑한 방 가운데 서서 주변을 쭉 둘러보는데 문득 똑똑, 하는 노크 소리가 빈방에 울린다. 맞바람이 들도록 현관문을 열어놓았던 터라 문틈으로 노크의 주인공이 바로 보였다.

“끝났어?”

의주였다. 재광의 이사 준비에 덩달아 정신이 없던 그는 오늘도 칼같이 퇴근을 하고 와본 차였다.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선 그는 결과물을 확인하듯 꼼꼼히 주변을 살폈다.

“좀 전에. 빨리 왔네요?”

“여섯 시 땡 치자마자 튀어 나왔지. 깨끗하네. 전보다 더 넓어 보인다.”

재광이 “그죠” 하고 받아칠 때 두 사람은 이미 가까이 있었다. 바짝 다가선 의주가 뒤에서 끌어안자 재광이 크게 어깨를 움찔거렸다.

스킨십에 바짝 긴장하는 게 아니었다. 이제는 어디를 물고 주물러도 그러려니 할 수 있는 지경에 다다랐지만, 아직 재광은 남들 이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편은 못 됐다.

그 사실을 잘 아는 의주는 속삭이듯 말했다.

“밖에 개미 한 마리도 없어. 괜찮아.”

그러고는 재광의 어깨에 턱을 얹고 조금씩 걸음을 뗐다. 뒤에서 저를 미는 힘에 순응한 재광도 느린 속도로 발을 움직였다.

뒤뚱거리며 몇 발자국 움직이자 금세 창가였다. 9월에 들어섰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낮이 길어 이제야 해가 뉘엿뉘엿 져간다. 엄청난 뷰를 자랑하는 위치는 아니었으나 오묘한 노을빛이 들자 꽤 그럴싸한 풍경으로 보였다.

두 사람은 잠시 아무런 말 하지 않고 창밖을 내다봤다. 입추가 지나면서부터 제법 선선해진 바람까지 들어와 분위기가 좋았다.

“다 왔어. 응. 아이 씨, 미쳤냐?”

때아닌 낭만은 오래가지 못했다. 복도를 울리는 음성에 둘이 황급히 떨어져 섰다.

같은 층에 사는 사람이 통화를 하며 복도를 지나치는 모양이었다. 건물 특유의 울림에 목소리가 더 쩌렁쩌렁하게 들렸다.

곧 문을 열고 들어서는 소리가 뒤따라 들렸으나 이미 깨진 분위기를 복구하기는 애매했다. 잠시 고민하던 의주는 멋쩍게 웃는 재광의 어깨 위로 턱, 팔을 얹었다.

“환기하는 동안 밥 먹고 오자. 올 때 보니까 근처에 식당 많더라.”

가벼운 제안에는 재광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

의주의 말대로 저녁 식사는 가까운 식당에서 해결했다. 그저 적당히 손님이 있는 곳으로 들어간 것뿐인데 어찌나 음식이 빨리 나오던지. 밥을 먹고 돌아오기까지 겨우 30분이 걸렸다.

그마저도 인근 편의점에 들른 시간까지 포함해서였다. 밀크셰이크 맛 파우치 아이스크림을 입에 문 재광은 “너무 금방이라 환기도 다 안 됐을 거 같은데” 하며 현관문을 넘었다. 그 뒤로 초콜릿 바를 문 의주가 따라 들어온다.

“그래도 막 도착했을 때보다 약품 냄새 많이 빠졌네.”

“그래요? 아까 안에만 있어서 잘 몰라 가지고.”

반쯤 녹은 아이스크림을 주물럭대던 재광은 단숨에 창가로 다가갔다. 열린 창문을 잠자코 들여다보던 그는 별안간 휙, 뒤를 돌았다.

“어차피 내일 짐 들이면서 또 열어놓을 거니까 이만하고 갈까요?”

볼 거라곤 없는 텅 빈 방에서 시간을 죽이기가 멋쩍은 모양이었다. 의견을 구하듯 묻자 마지막 한입을 삼키고 빈 막대를 든 의주가 고개를 비스듬히 튼다.

“금방 다 빠질 거 같은데? 10분 정도 더 있어 보지, 왜.”

“아니, 너무 아무것도 없으니까 심심할 거 같아서….”

재광은 대답하다 말고 말을 줄였다.

심심할 것 같단 자신의 예상과 달리 의주가 이미 분주했기 때문이다. 그는 가구 하나 없는 방을 신중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뭘 그렇게 봐요? 완전 휑한데.”

재광이 의아하게 물을 때가 되어서야 해끔한 얼굴이 이쪽을 본다.

“광아, 배치 어떻게 할지 생각했어?”

여태 뻥 뚫린 이 공간이 어떻게 채워질지가 궁금해서 혼자 가늠해보기라도 한 듯했다. 재광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대충요. 어차피 큰 가구는 침대랑 책상, 옷장 정도라서 생각하고 말 것도 없어요.”

“침대는? 침대는 어디다 놓을 거야?”

“침대요? 그거는 이쪽에. 여기를 머리 쪽으로 해서….”

재광이 가리킨 곳은 창가 바로 옆이었다. 왼쪽 벽을 가리키며 답하자 저만치 떨어져 있던 의주가 긴 다리로 단숨에 다가온다. “이쪽이 머리?” 하고 되물은 그는 냅다 바닥에 누워버렸다.

갑자기 뭐냐고 물을 새도 없었다. 파우치를 입에 물었던 재광은 눈만 동그랗게 뜨고서 아이스크림만 쪽 빨아들였다. 그러자 의주가 재차 묻는다.

“너 침대 사이즈 뭐야?”

그러면서 손으로는 옆자리를 탁탁 친다. 여태 서 있는 재광더러 곁에 누우라 권하는 손짓이었다. 막 빨아들인 아이스크림을 꿀떡 삼킨 재광은 마뜩잖은 표정을 하면서도 이내는 순순하게 몸을 뉘였다.

의주는 자연스럽게 그의 목을 받치며 팔베개를 했다. 재광 또한 머리를 살짝 들었다 놓으며 편한 자세를 잡고 대답했다.

“침대 아마 슈퍼싱글.”

“슈퍼싱글? 그럼 그거 너비가 얼마나 돼?”

이 방을 처음 보러 왔을 때 매일 올 거라며 으름장을 놓더니만 괜히 하는 소리가 아니었지 싶었다. 연달아 던지는 질문이 꽤 꼼꼼하다. 재광은 그에 픽 웃어버리면서도 착실하게 답을 줬다.

“한, 이 정도 되지 않으려나.”

넉넉하게 떨어져 누웠던 몸을 들썩이며 의주 쪽으로 찰싹 붙는 것이다.

답지 않은 애교를 부릴 의도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최대한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려는 쪽에 가까웠다. 보통 체격인 재광이 혼자 쓰기에는 괜찮지만, 남자가 봐도 건장한 의주와 함께 누우려면 어느 정도 끼이는 느낌은 감수해야만 할 터였다.

재광은 쓸데없이 진지했다. 슬며시 상박을 들어 의주가 누운 자리를 살피고는 다시금 거리를 조절하기에 이른다. 그 탓에 두 몸이 더 딱 달라붙었다.

“이 정도? 아무래도 그냥 바닥에 눕는 게 더 낫겠다.”

재광은 작은 상자에 억지로 욱여넣은 인형이 된 심정이었다. 직접 확인할 수는 없으나 보지 않아도 꼴이 우스울 게 뻔해 저절로 웃음이 샌다. 그러자 웃음기라곤 조금도 없는 의주가 몸을 달싹인다.

“이렇게 하면 되지.”

반듯하게 누웠던 몸을 모로 돌려세운 거다. 그는 연이어 곁에 누운 재광 또한 자신을 보도록 잡아끌었다. 그 바람에 아이스크림을 쏟을 뻔한 재광이 서둘러 파우치를 고쳐 잡았다.

다행히 흘리지는 않았으나 의주는 그마저도 적잖이 거슬리는 것 같았다. 냅다 아이스크림을 빼앗아 들더니 머리맡에 대충 놓아둔다. 그러고는 어리둥절해 하는 재광을 끌어와 품에 안았다.

“이만하면 됐지. 딱 좋은 사이즈네.”

분명 침대에 관해 얘기하는 중이었건만 꼭 재광에게 하는 것처럼 들리는 오묘한 말투였다.

그렇다고 해서 재광이 돌연 발끈하거나 불쾌한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하고서 의주의 등 뒤로 팔을 둘렀다.

다분히 협조적인 움직임이었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의주는 흐트러진 앞머리 아래로 드러난 재광의 이마에 가볍게 입 맞췄다.

“아침에 바로 짐 뺀다고 했지.”

“네. 열 시에.”

“설레?”

“아무래도? 혼자 살기는 처음이니까.”

“근데 혼자 아닐걸. 나 진짜 매일매일 올 거야.”

의주는 새삼 확신에 찬 눈길을 보내며 말했다. 가까이서 눈을 마주하고 있던 재광으로서도 그게 진심이라는 걸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괜한 짓 말라며 회유하거나 독립생활 좀 즐기게 해달라고 부탁하지는 않았다. 말은 저렇게 해도 잘나가는 앱 개발사의 CTO지 않나.

지금도 틈만 나면 야근에 잔업인 그가 회사에서 더 먼 재광의 집에 죽치고 눌러앉을 가능성은 적었다.

“예, 뭐. 그러시든가.”

그래서 영혼 없이 수락하는 대꾸를 던지자 재광을 끌어안은 의주의 팔에 더 힘이 들어간다. 이마를 콩 맞댄 그는 장난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진짠데?”

“알아요.”

“알아?”

아무래도 내일 이사가 설레는 건 재광뿐이 아닌 듯했다. 여전히 성의 없는 재광의 대꾸에도 의주는 기분 나빠하긴커녕 푸스스 웃어버리고 말았다.

웃음소리는 금방 잦아들었으나 입가에 걸린 미소는 그대로였다. 의주는 빙긋 호선을 그린 입술을 재광의 눈가에 가져다 댔다.

재광은 간지러운 양 눈을 질끈 감으면서도 피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뽀뽀를 되돌려주며 적극적으로 구는 건 아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의주는 순순히 내어주는 얼굴 곳곳에 입술을 눌렀다.

코끝, 뺨, 이마, 다시 눈가. 부지런히 옮겨 다니던 온기는 끝내 재광의 입술에 안착했다. 아이스크림을 먹듯 쪽 소리 나게 빨았다가 혀끝으로 가볍게 할짝거리기도 하며 꽤 오랜 시간을 머문다.

그렇게까지 하는데도 재광이 꿋꿋하게 버틸 때는 슬며시 아랫입술을 물기에 이르렀다. 반항 없이 열리는 입술 새로 들어가자 달큰한 우유 향을 머금은 혀가 기다렸다는 듯 얽힌다.

재광을 끌어안았던 의주의 손은 더듬더듬 등을 타고 올라가 뒷머리를 받쳤다. 처음에는 깊게 파고드는 움직임에 재광이 밀려나지 않도록 하려는 듯 보였으나, 조금의 시간이 지난 뒤에는 머리칼을 파고든 손가락에 제법 힘이 실렸다.

장난으로 얼굴 곳곳에 입술을 찍던 때와는 한층 달라진 분위기였다. 맞닿은 입술 사이로는 진득하게 엉킨 두 혀가 마찰하며 질척한 소리가 새고, 두 사람의 손은 서로의 몸을 부지런히 지분댔다.

“으, 흐읍…!”

의주가 치열을 훑다 말고 입천장 깊숙한 곳까지 혀끝으로 길게 매만질 때는 재광의 입안에 달뜬 호흡이 가득 찼다. 급히 숨을 삼키느라 긴장한 어깨 위로 손을 옮겨간 의주는 부드럽게 그를 주무르며 여린 점막을 자극했다.

눈을 질끈 감은 재광의 미간이 꿈틀댄다. 의주를 마주 안은 팔에도 힘이 바짝 들어갔다. 팔베개를 하고 있던 터라 저보다 위에 자리 잡은 그의 입술을 좇느라고 고개가 절로 들렸다.

그 바람에 선명히 드러난 재광의 울대가 간헐적으로 일렁였다.

“….”

재광의 뒷머리를 감싼 손이, 그리고 목 아래를 받쳐주던 팔이 빠져나간 것은 잠시 후였다. 옆으로 누워 마주 보고 있던 의주는 눈치채지 못할 만큼 자연스럽게 재광의 위로 올라탔다.

두 사람의 시선이 수직으로 부딪친다. 젖은 입술을 반쯤 벌린 재광은 숨을 가다듬으며 제 위의 의주를 봤다. 이미 판판하게 굳은 의주의 눈에서는 상당히 진한 눈길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할까?”

재광은 긴장한 기색 역력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조금 전의 키스에 몸이 동한 건 사실이나 맨바닥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린 거다. 재광에게는 한 차례 바닥에서 곤혹을 치른 경험이 있으니까.

낭만인에서 송별회를 하던 날 의주를 달래주겠답시고 따라갔다가 등이 배기고 쓸리고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해요.”

그런데도 끝내 수락하고 만 이유는 간단했다. 의주가 금방이라도 재광을 잡아먹을 것 같은 표정을 한 것치고는 용케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꼭, 한결 조심스럽게 자신을 대해줄 거란 기대를 갖게 만드는 음성, 그러한 말투였다.

다행히 헛된 기대는 아니었던 듯했다. 여전히 숨을 고르는 재광의 입술에 닿는 살갗이 몹시도 유했다. 뺨을 타고 목으로 내려가는 숨결은 물론이고, 티셔츠 아래로 들어오는 손길까지도 다정했다.

“아, 형. 흐으….”

매끄럽게 피부를 매만지던 손이 티셔츠를 걷어 올릴 때는 어쩔 수 없이 거친 숨이 터졌다. 드러난 맨살에 곧바로 의주의 입술이 가 닿은 탓이다. 몇 번씩 눅진하게 붙었다가 떨어지는 감각이 반복될 때마다 재광의 눈꺼풀이 반쯤 감겼다.

의주의 입술이 상박을 부지런히 옮겨 다니자 재광의 가슴도 크게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 맨살을 입술 끝으로 훑다가 말고 가볍게 깨물 때는 허리가 얕게 튀어 오르기도 했다.

어느새 숨이 축축해졌다. 이쯤 되자 고집스럽게 재광의 가슴팍에 고개를 묻던 의주도 여유가 없어지는 모양이었다. 대충 걷어 올렸던 옷자락을 쥐고 위로 잡아당긴다.

“광아, 팔.”

재광은 반쯤 풀린 눈으로 홀린 듯이 팔을 들었다. 옷가지가 사라진 몸이 휑하다고 느끼지도 못할 만큼 체온이 달아오른 상태였다.

물론 재광만의 사정은 아니었다. 훤히 드러난 상반신을 눈으로 더듬는 의주도 부쩍 부산스러워졌다. 얇은 재킷을 아무렇게나 팽개치고는 안에 받쳐 입은 티셔츠까지 단박에 벗어던진다.

아래 누운 재광에게 다시 달려들면서는 커다란 손이 자연스럽게 아래로 향했다. 어깻죽지부터 시작해 옆구리를 타고 미끄러지듯 내려가더니 종래에는 재광의 바지 버클을 잡는 것이다.

능숙하게 지퍼를 내릴 즈음에는 재광이 본능처럼 허리 아래를 들어 탈의를 도왔다. 덕분에 수월히 옷을 벗겨낸 의주의 손이 허벅지를 타고 올라와 둔부로 향했다.

“으응, 흣….”

차지게 감겨드는 살덩이를 크게 주무르자 재광이 빠르게 반응한다. 그의 쇄골에 고개를 묻던 의주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목선을 타고 올라갔다. 턱을 지나 뺨에 닿은 입술이 종래에는 귓가에 도달한다.

의주는 발갛게 달아오른 귀에 대고 훅 숨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축 늘어졌던 재광의 몸이 바르르 떨린다. 즉각적인 호응이 만족스러운 양 슬며시 웃은 의주가 장난스럽게 귓바퀴를 깨물었다.

“아…!”

재광이 놀랄 틈도 모자랐다. 불시에 귀를 깨물려 어깨를 움찔거리는 사이, 볼기를 주물럭대던 손가락이 뒤를 파고들었다.

예고 없이 몸 안으로 들어서는 이물감에 재광이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의주의 등을 배회하던 손 또한 그의 어깨를 꽉 붙들기에 이른다.

“아아… 으, 흐으… 읏!”

부드럽게 밀려들어왔다가 빠져나가길 반복하던 손가락이 전립선을 건드리자 참을 수 없는 신음이 샌다. 의주와의 관계가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건만 새삼스럽게 부끄러워진 재광이 눈을 꼭 감았다.

아무것도 없는 방이라 그런지 소리가 유난히 울렸다. 그다지 크지 않은 성량으로 뱉어냈건만 허공에서 웅웅 울리다가 벽에 부딪혀 되돌아오는 느낌이었다.

유독 생생하게 들리는 자신의 목소리를 견디기 어려운 재광은 괜히 의주만 더 꽉 끌어안았다.

“흐, 으응, 읍…!”

의주는 저를 당기는 손길에 순순히 응했다. 상체를 낮게 숙이자 재광의 이마가 곧바로 어깨에 닿는다.

어떻게든 남세스러운 소리를 참아보려는 것 같은데 잘 안 되는 모양이었다. 벌어진 재광의 입술 아래로 턱이 달달 떨리고 있었다.

상당히 애처로운 모습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의주가 뒤를 넓히는 손길을 멈출 생각은 없었고.

그는 부러 소리를 참으려는 재광의 입술을 물었다. 습한 숨과 함께 흘러나오는 신음을 자신이 모조리 빨아들일 것처럼 혀를, 그리고 입술을 집어삼켰다.

덕분에 끙끙대는 호흡만 간간이 새다가 멈췄다. 거칠게 목을 넘어가던 소리 대신 질척한 마찰음이 입안을 채웠다.

고른 치열을 훑은 의주의 혀는 입천장을 미끈하게 지나 안쪽의 점막을 찔렀다. 구멍을 비집고 들어간 손가락이 하나 더 늘어난 것과 동시였다. 재광의 몸에 바짝 힘이 실리며 더 절박하게 의주에게 매달린다.

의주는 그 반응이 퍽 만족스러운 듯했다. 맞물린 입술 끝이 슬며시 올라가는가 싶더니 이내 재광의 입안으로 혀를 깊게 박아 넣었다.

“으읍, 으, 응!”

입맞춤보다는 삽입에 가까운 행위였다. 이 순간에도 뒤를 부지런히 드나드는 손가락처럼 깊숙이 혀를 밀어 넣었다가 빼기를 반복하자 재광이 버거운 내색을 하면서도 제 입안을 채운 살덩이를 받아들였다. 꼭 펠라티오를 하듯 볼 안쪽을 조인다.

뒤도 마찬가지였다. 더 들어갈 수 없을 만큼 손가락을 밀어 넣은 의주가 속도를 높여 안을 찔러댈 때마다 내벽이 움찔거리며 콱 조여든다.

마구잡이로 빠르게만 들쑤시는 손짓은 아니었다. 의주는 빠르게 손을 놀리면서도 재광이 느끼는 부분을 정확히 자극했다.

재광의 몸도 솔직히 호응했다. 바짝 낮춘 의주의 상반신에 반쯤 발기한 재광의 중심부가 닿는다. 뭉툭하게 아랫배를 건드리는 감각을 느낀 의주가 슬며시 눈썹을 까딱였다.

“하아… 하, 흐으….”

끈질기게 입안을 헤집던 의주는 그제야 재광의 입술을 놓아줬다. 그러자 여태 그가 집어삼키던 신음이 선명히 샌다. 그에 피식 웃어버린 의주는 나른하게 늘어진 재광의 머리칼을 가볍게 흐트러뜨렸다.

뒤를 빠르게 드나들며 내벽을 넓히던 손짓도 멈춘 타이밍이었다. 의주가 상박을 세우자 불룩 솟은 바지 앞섶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재빠르게 벨트 클립을 쥐다 말고 문득 재광을 내려다봤다.

“…왜요?”

지긋한 시선을 느낀 재광이 곧장 물었으나 대답은 없었다. 대신 의주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팔을 당겨 재광을 일으켰다.

재광은 쉽게 딸려 올라왔다. 의주가 그의 손을 잡아다가 자신의 벨트 위에 얹어놓는 일련의 과정에도 순응했다. 타의로 벨트 클립을 쥐게 된 재광은 뜻을 알아차렸는지 바람 소리로 웃어버리고 말았다.

- 광아, 밤에는 풀어줘야 돼.

재광의 손에 잡힌 것은 신규 앱 출시일에 본인이 선물한 벨트였다. 직접 채워달랄 땐 언제고 금세 밤에는 풀어달라며 능청을 떨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했다.

그래놓고는 어째 잠잠하더라니, 오늘이 바로 그 밤인가 보다.

의주에게 일으켜 세워진 그대로 어정쩡하게 앉아 있던 재광은 자세를 고쳐 잡았다. 한결 안정적으로 허리를 세우고 앉아서는 반쯤 내린 시선으로 보이는 벨트를 다시 쥔다.

“….”

의주의 요구대로 직접 채워줄 때도 그랬지만, 남의 허리춤에 손을 댄다는 건 참 야릇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실없이 웃던 조금 전과 다르게 긴장한 손끝이 조심조심 클립을 푼다.

작게 허공을 울리는 금속성이 맑았다. 그리고 그 뒤로는 사부작대는 재광의 움직임을 따라 사소한 소음이 이어졌다.

벨트에 이어 바지 버클을 풀어낸 재광은 연이어 지퍼를 내렸다. 그러느라고 비스듬히 내리깐 눈꺼풀 아래로는 단정히 뻗은 속눈썹이 촘촘하게 빗금을 그렸다.

그 모습을 유심히 들여다보던 의주의 목울대가 크게 일렁인다. 보기만 해도 뜨거운 눈을 한 의주는 재광이 바지와 함께 속옷을 내리는 순간 그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아앗…!”

갑작스럽고 다급한 손길이었다. 무방비 상태로 크게 휘청거리던 재광은 곧 의주 위에 앉은 꼴이 됐다.

엉덩이 아래로는 선명한 부피감이 느껴졌다. 눈에 띄게 흠칫거린 재광은 눈동자만 도륵도륵 굴리다 말고 결국 눈앞의 어깨를 답삭 안았다. 그러자 의주가 재광의 허리를 부여잡고 슬며시 몸을 들어 올린다.

의주의 다리 위에서 무릎을 세워 앉은 모양새가 된 재광은 입술을 감쳐물었다가 놨다. 이대로 내려앉았을 때 제 안을 파고들 감각을 알기에 더 긴장하는 듯싶었다.

다행스럽게도 의주는 서두르지 않았다. 이글이글 끓는 눈빛만 보자면 당장이라도 허리를 잡아 끌어 앉힐 것만 같은데, 용케도 재광이 스스로 움직이길 기다려줬다.

조금 뒤, 잇새로 질끈 문 입술을 놓은 재광이 그의 어깨를 고쳐 짚으며 천천히 무릎을 접었다.

“아… 흣!”

의주가 손가락으로 한바탕 헤집어놓은 내벽이 끈적하게 열린다. 단단하게 선 살덩이를 천천히 집어삼키면서도 순간순간 버거운지 움찔움찔 떨렸다.

그러면서도 무르지는 않았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멈칫거리기는 할지언정 도로 빼내지 않고 꾸준하게 내려앉는다. 의주의 어깨를 감싼 손끝이 어느새 하얗게 질렸다.

“하으, 응, 으읏…!”

천천히, 그러면서도 끝내 온전히 다리를 접어 앉았을 때는 의주가 꼭 칭찬하듯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안을 가득 채운 부피감에 잠시 숨을 참던 재광은 그제야 가슴을 크게 부풀리며 호흡했다. 날숨이 떨리고, 그를 따라 내벽이 진동했다.

재광이 이물감에 적응하듯 숨을 가다듬는 동안 의주는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손으로는 제 위에 앉은 몸을 부드럽게 매만지고, 입술로는 곳곳에 입 맞췄다. 눈가, 뺨, 목덜미, 어깨. 가리지 않고 입술을 가져다 댄다.

입맞춤을 받는 당사자에게는 그 입술이 꼭 불덩이처럼 느껴졌다. 닿았다 떨어지는 족족 불에 덴 것처럼 홧홧하다. 재광은 의주의 품에 늘어져 숨을 고르고 있건만, 입술이 살갗을 누를 때마다 아래에 힘이 들어갔다가 풀렸다.

“하, 진짜….”

가만히 앉아서 성기를 꽉 조였다가 풀어대니 의주로서는 그만큼 자극적인 것도 또 없을 터였다. 흐트러진 앞머리를 훅 불어 올린 그는 거친 숨이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움직일 수 있겠어?”

나직하지만 열감이 분명하게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의주가 그만큼 흥분했다는 뜻일 테다. 답지 않은 재촉에 흠칫 놀란 재광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축 늘어뜨렸던 팔이 다시 의주의 어깨 위로 올라온다. 중대한 결심이라도 하는 것처럼 손에 힘을 줘본 재광은 이어 슬며시 몸을 띄웠다.

“아…! 흣, 흐으….”

선명하게 내벽을 긁고 지나가는 느낌에는 절로 앓는 소리가 샜다. 안을 스치는 감각에 뒤가 더 조여들어 잔뜩 성난 성기가 빠듯하게 빠져나갔다.

재광은 아예 의주의 목 뒤로 팔을 둘러 그에게 매달리듯 기댔다. 그러고 나자 한결 몸을 움직이기가 편해진다. 무게중심을 옮기고서 다시금 내려앉는 동작이 이전보다 매끄러웠다.

위아래로 움직이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재광의 움직임이 훨씬 수월해졌다. 그뿐일까. 본인이 느끼는 성감도 커지는지 안이 오그라드는 힘마저 거세진다.

“아, 으, 흐읏! 아아….”

입구부터 내벽 깊은 곳까지를 면면히 조이며 움직일 때는 의주도 슬며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탓에 재광이 덩달아 흔들린다.

오랜 시간 몸을 겹친 덕인지 호흡이 좋았다. 의주가 자신의 것을 찔러 넣을 때마다 재광이 풀썩 내려앉으며 살덩이를 뒤로 꽉 물었다. 그러고 나면 스팟이 제대로 눌려 내벽이 경련하고, 그에 자극을 받은 의주가 더 흥분해 아래를 쳐올렸다.

“하아, 읏…!”

섬세하게 피부를 훑던 입술의 움직임도 달라졌다. 살갗을 가볍게 빨아들이는가 싶더니 이내 이를 세워 재광의 목덜미에 쿡 박는다. 잘근잘근 씹을 때마다 재광의 숨소리가 한층 달떴다.

재광은 잠자코 목을 내어줬다. 의주의 단단한 등이며 결 좋은 머리카락을 헤집으면서 낮게 앓을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굵게 발기한 성기가 밑을 쿡 쑤실 때마다 빠르게 안을 수축했다.

몸을 달싹이던 걸 멈추고 의주의 힘에 의지하던 재광은 곧 무너져내린 상체를 곧추세웠다. 지속적으로 목덜미를 씹던 의주가 유달리 깊게 이를 박아넣은 시점이었다.

강하게 피부를 파고드는 느낌에 화들짝 놀라면서도 밀어내는 손길만은 부드러웠다. 재광은 꼭 의주를 진정시키듯 뺨을 어루만져주고는 자의로 하체를 들어 올렸다.

“….”

의주는 제 위에서 붕 뜨는 재광을 거의 홀린 눈으로 바라봤다. 기껏 밀어낸 이유가 스스로 움직이기 위함이라니, 이 얼마나 앙큼한가.

버거울 때면 으레 그렇듯 푹 수그러든 정수리를 응시하는 눈에 이채가 돌았다.

“잠깐, 광아 잠깐만.”

끙끙 앓으며 오르락내리락하는 재광을 붙든 의주는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러고는 빠르게 주변을 살피더니 제가 내팽개친 재킷을 집어 바닥에 깔았다.

넓게 펼친 옷자락 위로는 재광의 등이 닿았다. 한순간 시선이 뒤집힌 그가 허둥지둥 눈동자를 굴리자 조만간 시야 안으로 들어온 의주가 열이 들끓는 시선으로 재광을 마주한다.

“얼굴, 보고 싶어.”

재광은 낮게 깔린 음성에 흠칫하면서도 그를 말리지는 않았다. 대신 잠시간 떨어졌던 몸이 도로 맞붙을 때 솔직하게 신음할 뿐이었다.

“아아…! 아! 흐읍, 윽…!”

얼굴을 보고 싶다는 건 그저 핑계가 아니었을까. 그런 의심이 드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재광을 눕힌 다음부터 의주가 치받는 힘이 확연히 달라진 탓이다. 그는 몸을 관통할 것처럼 거센 힘으로 아래를 밀어붙였다.

금방이라도 제 아래 누운 몸을 잡아먹을 듯한 눈빛을 하고서.

이렇게 되니 재광으로서도 정신을 차릴 새가 없었다. 어떻게든 의주를 마주하려 눈을 부릅떠 봐도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다가 다시 감기고 만다.

뒤를 들락거리는 행위가 몇 번 더 반복되면서는 고개가 정면을 향할 겨를도 없었다. 깊은 내벽을 자극당할 때마다 찌르르 올라오는 성감을 못 이겨 목이 휙 꺾였다.

“하, 아아… 흣! 으, 으읏…!”

그즈음에는 눈을 질끈 감을 힘도 없었다. 다 풀린 눈동자가 텅 빈 방의 허공만 겨우 쳐다봤다. 가구 하나 없는 휑한 방의 풍경이 간헐적으로 점멸했다.

그나마 시야가 어두워지는 쪽이 나았다는 건 조금 뒤에야 깨달았다. 더 들어갈 수 없을 만큼 아래를 박아 넣은 의주가 깊숙한 내벽, 비좁은 틈을 벌리고 들어올 때는 머릿속에서 플래시가 번쩍 터졌다.

재광이 힘겨워하는 걸 뻔히 알면서도 의주는 무르기는커녕 뭉근하게 안을 헤집었다.

“팀장, 님… 아! 아아…!”

그때는 그냥 혼비백산이었다. 재광은 그간 잘만 하던 ‘형’ 소리도 집어치우고 저도 모르게 ‘팀장님’을 찾아댔다.

무자비하게 속이 벌어지는 재광으로서는 꽤 절박한 부름이었으나 의주에게는 오랜만에 듣는 호칭이 그저 자극으로 다가오는 듯했다. 그는 목을 한껏 꺾고 바닥에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비벼대는 재광을 붙잡더니 냉큼 입술부터 물었다.

“으응, 흐, 윽, …흣!”

의주는 뜨거운 입안을 파고들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아래를 밀어붙이는 힘에 정신이 없는지, 재광은 혀놀림을 채 따라오지도 못하고 헐떡거리기만 했다.

키스할 정신도 없이 흔들리느라 바쁜 재광에게는 가속이 붙는 의주의 아랫도리가 야속하기 그지없었다. 근육이 바짝 선 의주의 팔뚝을 긁어내리던 손이 나가떨어져 잘 닦아놓은 바닥만 박박 긁었다.

“갈 거, 같, 아?”

바닥을 방황하는 손부터 짓무른 눈가까지. 재광의 모든 부분을 살핀 의주가 허리를 쳐올리느라 뚝뚝 끊기는 음성으로 물었다. 이미 잔뜩 짓무른 눈을 한 재광은 간절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의주는 얄궂은 장난을 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잠시간 축축한 눈을 마주 보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손을 내려 재광의 것을 쥐었다.

“아윽! 흣, 아, 아아…!”

정말 순식간이었다. 의주가 발딱 선 성기를 주무르거나 흔들기도 전에, 그저 열 오른 피부를 감싸기만 한 타이밍에 곧장 정액이 터져 나왔다.

여느 때보다도 강렬한 사정이었다. 확 터지는 체액과 함께 안이 수축하는 정도도 남달랐다. 깊게 처박힌 살덩이를 빈틈없이 꽉 조이자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문 의주 또한 연달아 파정했다.

“….”

조금 전까지 천국과 지옥을 오가던 재광으로서는 이쯤에서 끝을 맺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의주가 조금만 더 시간을 끌었더라면 아마 그대로 정신을 놓아버렸을지도 몰랐다.

그만큼 온몸을 관통하는 자극이 거셌다는 뜻이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의주는 축 늘어진 재광의 뺨에, 목에, 그리고 가슴에. 곳곳에 정성 들여 입을 맞추고 있었다. 숨을 고르던 재광이 힘이라곤 들어가지 않은 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슬며시 밀었다.

“힘들어?”

의주는 직전에 재광이 느낀 감각이 어느 정도였는지 전혀 가늠하지 못하는 눈치였으나, 그나마 지쳤다는 사실 정도는 알아차린 듯했다. 재광이 고개만 끄덕이며 간신히 답하자 눈동자를 도르륵 굴리며 고민하는 체를 한다.

여전히 재광의 위에 자리한 의주는 곧 팔을 길게 뻗어 머리맡을 더듬었다. 그러더니 곧 무언가를 가볍게 집어 든다.

“먹을래?”

재광이 반쯤 먹다 남긴 아이스크림이었다. 의주의 손에 들린 물건의 정체를 확인한 재광은 설설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의주가 파우치를 가볍게 흔들어보더니 다시 입을 연다.

“그럼 나 먹어도 돼?”

“그러든가요. 근데 다 녹았을 텐….”

재광이 한마디를 채 마치기도 전이었다. 의주가 망설임 없이 파우치를 거꾸로 들었다. 재광의 말대로 다 녹은 아이스크림이 허여멀건 액체의 형태로 흐른다.

“흣!”

아이스크림의 형태는 사라진 지 오래였으나 냉기만은 아직 남아 있었다. 맨살에 닿는 차가운 온도에 재광의 가슴팍이 짧게 튀어 올랐다.

조금 전까지 잔뜩 달아올라 있던 탓인지 유독 차갑게 느껴졌다. 재광은 급히 숨을 집어삼키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지켜보던 의주가 다시 한번 파우치를 기울였다.

이번에는 조금 전보다 더 적은 양이었다. 똑, 똑. 방울져 떨어진 아이스크림이 몸에 닿을 때마다 재광의 상체가 눈에 띄게 움찔거린다.

“하윽…!”

묘하게 피부를 자극하는 느낌에 앓는 소리가 절로 샜다. 굳은 얼굴을 한 의주는 오로지 재광의 얼굴만 바라보며 녹은 아이스크림을 일정하게 떨어뜨렸다.

“….”

미리 허락을 받은 의주는 조금 뒤에야 맛을 봤다.

재광의 상체에 얼룩진 하얀 액체를 혀를 내어 핥는 것이다. 느릿하게 할짝거릴 때마다 재광의 몸이 얕게 튀어 올라 아이스크림이 멋대로 흘러내렸다.

당연하게도 사방으로 흘러내리는 것쯤은 전혀 방해될 게 없었다. 의주는 눈을 위로 치뜨고 재광을 주시하며 가슴께를 핥았다.

혀끝으로 간질이다가, 슬며시 살갗을 빨았다가, 가끔은 이를 박기도 하며 다채롭게 맛봤다.

“아아… 흐, 으읏!”

입술이 닿을 때마다 재광의 숨이 거칠어졌다. 짧게 움찔대기를 반복하는가 싶더니 의주가 아예 유두를 물고 혀끝으로 굴릴 때는 배가 납작하게 눌렸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갈비뼈가 넓게 벌어졌다 제자리를 찾는 형태가 선명히 보일 정도였다. 덩달아 부풀었던 가슴이 가라앉을 즈음에는 다시금 아랫배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맛있네.”

아이스크림이 흐른 자국을 따라 판판한 아랫배까지 혀로 길게 훑어 내린 의주는 나직이 말했다. 동시에 손은 재광의 다리를 넓게 벌린다. 잠시 눈동자를 떨던 재광은 느릿하게 입술을 뗐다.

“…천천히요.”

인간이란 어쩜 이렇게 간사한 동물인지 몰랐다. 감당하기 버거운 성감에 금방이라도 졸도할 것 같아 힘겨워했으면서, 조금 진정하고 나자 다시금 찾아든 감각이 싫지 않아 그새 또 받아들이게 되고 만다.

재광은 의주의 손을 찾아 잡으면서 살며시 눈을 감았다.

????

자신만의 공간이 생긴 이상 머지않아 거기서 의주와 뒹굴 거라는 건 재광도 익히 예상한 바였다. 그렇지만 짐 하나 없이 휑한 방에서 그렇게 될 줄은 몰랐지.

어제는 결국 한 번 더 했다. 그러고 나서 보니 기껏 돈 들여 청소해놓은 바닥이 난장판이었더랬다. 의주가 의도적으로 흘린 아이스크림과 사이좋게 내지른 체액이 뒤섞여 꼴이 말이 아니었다.

부랴부랴 수습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늦은 밤이었다. 재광은 노곤한 몸을 누일 새도 없이 남은 짐을 마저 싸느라 새벽까지 깨어 있어야 했다.

그 탓에 아침이 몹시도 힘들었다. 온몸이 배기는 느낌. 재광은 어깨를 돌리고 허리를 통통 두드리며 방에서 나왔다. 잔뜩 쌓인 피로를 증명이라도 하듯 기다란 하품이 절로 샌다.

“네가 웬일이냐? 이 시간에 다 일어나고.”

아침 일찍부터 거실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던 민광이 물었다. 재광은 찔끔 나온 눈물을 훔치다 말고 건조한 시선으로 제 형을 봤다.

“그냥.”

그리고 의뭉스러운 대꾸만 하고서 휙, 욕실로 들어갔다.

몇 달 전, 크게 들이받은 이후로 민광과의 사이는 무난했다. 한동안 재광의 눈치를 보던 민광이 의주와의 실랑이를 계기로 본성을 다시 드러내긴 했다만….

이전에 비하면 양호한 편이었다. 기존에 부리던 꼬장의 80퍼센트 수준이라고나 할까.

즉, 전보다는 덜하되 이대로 쭉 같이 살아도 되겠다고 여길 만한 정도까진 아니었단 뜻이다. 그러니 재광의 비밀 이사 계획이 지금까지 이어진 거고.

그래도 오늘이면 해방이었다. 물론 가족 몰래 저지른 일이라 후폭풍은 있겠지만, 뒷일의 두려움보다는 집을 박차고 나간다는 후련함이 더 컸다.

씻는 내내 콧노래가 절로 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유난히 개운한 낯빛을 한 재광은 벽에 걸려 있던 수건을 가벼이 낚아챘다. 그런 뒤 물기를 톡톡 닦아내는데, 문득 문밖이 소란스러워진다.

“뭐야, 누구세요?”

“아, 예. 용달인데요. 여기 짐 뺀다는 방이 어딥니까?”

“짐? 무슨 짐이요.”

아무래도 용달 서비스가 예약한 시간보다 좀 일찍 도착한 모양이었다. 느긋하게 얼굴을 닦던 재광이 서둘러 욕실을 빠져나갔다.

“저 방이에요.”

상황 파악이 안 된 민광은 일단 현관부터 막고 있었다. 그런 그를 대신해 재광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경악한 낯짝이 이쪽을 향한다.

“김재광 너….”

“이쪽으로 오세요.”

민광은 당장이라도 이게 무슨 짓이냐 따지고 들 태세였다. 그러나 오늘만은 재광도 철판을 단단히 깐 참이다.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그는 “나 지금 바빠서, 이따 얘기해” 하고는 제 방으로 쏠랑 들어갔다.

당장 새벽까지 짐을 싼 방은 누가 봐도 이사 준비를 마친 모습이었다. 캐리어부터 큼직한 박스가 문가에 쌓여 있고, 책상 위나 서랍장 등은 자잘한 소지품 하나 없이 말끔히 정리된 상태다.

“다른 짐들은 다 싸놨거든요. 큰 가구들만 좀 정리해서 나가면 될 거 같아요.”

재광은 적당히 사무적인 말투로 얘기했다. 파손 위험이 있는 물건은 맨위 박스에 넣었으니 조심해달라, 캐리어는 직접 챙길 테니 그냥 둬도 된다…. 요구사항을 전하는 그에게서 제법 어른의 태가 났다.

당부하는 말이 끝난 뒤에는 곧바로 작업이 이루어졌다. 큼직한 가구들에 커버가 씌워지고 하나, 둘씩 방 밖으로 옮겨지기 시작했다.

민광은 반쯤 얼이 빠져 입을 떡하니 벌리고서 그 광경을 지켜봤다.

당연했다. 좀 투덜거리긴 해도 이래도 응, 저래도 응 하고 말던 동생이 이런 어마어마한 일을 벌이리라곤 꿈에도 생각 못 했을 테니까.

그는 재광이 캐리어를 끌고 나올 때가 되어서야 정신을 차리고 말을 꺼냈다.

“야, 너 지금 뭐하냐?”

“이사.”

“이사? 이이사아? 너 제정신이냐?”

담담한 대꾸에는 민광의 언성이 곧장 높아졌다. 재광은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로 무던히 답했다.

“내가 뭐.”

“지금 뭐 소리가 나오냐? 로또 맞지 않는 이상 집을 사서 나갈 리도 없고. 끽해야 월세, 좀 잘 돼야 대출 끼고 전세 갈 거 아냐.”

정곡을 찌르는 말에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여기서 보증금만 겨우 모아 월세로 나간다는 걸 알면 한바탕 사달이 날 걸 뻔히 알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묵비권 행사에도 민광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돈 좀 벌기 시작하니까 대단한 부자라도 된 것 같냐? 경제관념이라는 게 없지, 너는?”

“….”

“집에서 괜한 돈 새지 말라고 아파트 구해줬더니 이걸 걷어차고 기어이 헛돈을 쓰겠다고? 그것도 한마디 상의도 없이?”

솔직히 지금의 얘기만 듣는다면 틀린 구석이 없는 소리긴 했다. 하지만 둘 사이엔 유구한 역사가 있지 않나. 동생 못 잡아먹어 안달 난 형의 이야기 말이다.

그 점을 고려하면 재광이 스스로 감당하려는 월세는 결코 헛돈이라 할 수 없었다. 안락한 일상을 사수하는 비용인 셈이니까.

잠자코 듣기만 하던 재광은 그제야 다시 입을 열었다.

“형 돈 새지 말라고 구해준 거 아니고?”

“뭐?”

“나는 형 수발들라고 여기 살게 한 거라며.”

특별히 감정이 실린 목소리는 아니었다. 말투 또한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수더분했다.

아마 그래서 더 정곡을 찌른 듯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열변을 토하던 민광의 표정이 짐짓 굳는다. 그는 머리를 훅 불어 올리더니 답답하다는 양 가슴을 탕탕 쳤다.

“야, 김재광.”

“근데 나 그거 하기 싫어. 이제 내 밥벌이할 정도는 되니까 알아서 할게. 형도 나 신경 쓰지 말고 형 맘대로 하고 살아.”

기죽지 않고 또박또박 받아친 재광은 캐리어를 현관에 세워두고 도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원래도 그랬지만” 하고 덧붙이면서.

“와, 너는 그게 언제 적 얘긴데 아직도 그거 갖고 난리냐? 술 먹고 한 얘기로 언제까지 우려먹을래? 어?”

그러자 민광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진다. 본인 생각에도 심했다 싶어 한동안 눈치까지 보던 언사지 않나. 그간 잘 묻어뒀건만 그게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자 퍽 마뜩잖은 듯싶었다.

재광은 동요하지 않고 자신의 일에 몰두했다. 얼마 안 되는 짐이 빠져나간 방을 점검하고는 현관에 세워둔 캐리어를 다시 챙긴다.

“안 우려먹어. 이대로 나가서 평생 연 끊고 살겠다는 것도 아니니까 걱정 마.”

“저거 저 꼴통 새끼 진짜!”

민광은 할 말이 많이 남은 것 같았으나 재광은 굳이 다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어느 때보다도 굳건히 등을 돌리고 신발을 꿰어 신는다.

그대로 집을 빠져나오는 발걸음이 한없이 가벼웠다. 한 발자국씩 내디딜 때마다 신난 기색이 고스란히 묻어나온다. 돌돌돌 굴러가는 캐리어 바퀴 소리마저 유쾌하게 들렸다.

불쑥 바깥을 내다보는 시선 끝에는 재광의 짐을 실은 트럭이 막 출발하는 게 보였다. 점점 속력을 높이는 트럭을 따라 걸음에 속도를 붙인 그는 서둘러 엘리베이터를 잡아탔다.

“광! 여기.”

1층에 도착해 막 건물을 나설 즈음에는 익숙한 목소리가 재광을 붙들었다.

이사할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흔쾌히 나선 의주다. 저와 꼭 닮은 얼굴을 발견한 재광이 배시시 웃으며 그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하도 안 내려와서 전화할라 그랬더니 딱 오네.”

“아… 형이랑 얘기 좀 하느라고.”

당연하게 캐리어를 받아들고 트렁크에 싣던 의주가 ‘형’이란 단어에 멈칫거린다. 휙, 재광을 돌아보는 얼굴에는 노골적인 불만이 떠올랐다.

“왜, 또 너한테 뭐라 그래?”

“갑자기 나간다니까 당연히 뭐라고 하겠죠. 근데 뭐, 별거 없었어요.”

당장이라도 뛰쳐 올라갈 것 같은 의주를 달래려 둘러대는 소리가 아니었다. 조금 전 민광의 얘기가 듣기 좋았을 리는 없지만,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 하던 모습은 꽤 볼만 했으니까.

그 정도면 재광은 만족할 수 있었다.

“진짜?”

“진짜.”

미심쩍은 눈을 하고서 재차 묻는 의주에게 대꾸하는 어조가 단호했다. 의주 대신 트렁크를 닫은 재광은 후련한 낯으로 걸음을 돌렸다.

“우리도 얼른 가요.”

조수석 문을 열며 채근할 때가 되어서야 의주가 서둘러 차에 올라탔다.

????

물건이 얼마 안 된다고 만만히 볼 일이 아니었다. 짐을 쌀 때도 그랬지만 정리하는 과정은 더 고됐고, 그마저도 진득이 정리정돈에만 몰두할 수 없어 더 정신이 없었다.

하나씩 짐을 풀어놓을라치면 가전이 들어왔고, 다시 정돈을 시작해볼까 하면 인터넷 설치 기사가 방문했다. 심지어는 어제까지 멀쩡하던 욕실 전등까지 말썽이라 그걸 고친다고 사람이 또 드나들었다.

청소는 또 몇 번을 했는지 모른다. 짐을 들여다 놓고 어수선해서 한 번, 가전을 설치한 뒤 주변을 정리한다고 또 한 번. 짐을 풀 때마다 박스 부스러기에 먼지까지 쏟아져 또….

그런 식으로 하다 보니 저녁 즈음에는 완전히 녹초가 되고 말았다. 아직 책상이며 옷장 정리는 손도 못 댄 시점이었다.

“먹어, 먹어. 일단 좀 먹고 하자.”

막 도착한 중국요리를 세팅한 의주가 재광을 끌어다가 식탁 앞에 앉힌다.

분명 여느 때보다도 해끔한 낯으로 집을 나섰던 재광은 반나절 만에 퀭한 안색을 하고 있었다. 그는 삼선짜장에 탕수육까지, 푸짐한 음식을 앞에 두고도 뻑뻑한 눈만 연신 비벼댔다.

하여간 체력 달리는 것 좀 보라고. 의주는 꼭 그렇게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의주는 잘 비빈 짜장면 그릇을 재광의 앞에 놔줬다. 피곤해 죽으려는 그의 손에 나무젓가락까지 쥐여주는 건 서비스였다.

“배고프다며. 시간도 늦었는데 얼른 먹어.”

고맙다는 뜻으로 고개를 꾸벅 숙인 재광은 그제야 젓가락을 면발 사이로 푹 찔러 넣었다. 지쳐서 입맛도 다 떨어진 양 굴던 그는 한입 크게 면발을 집어삼키고부터 전투적으로 식사에 임했다.

일단 음식을 뱃속에 집어넣고 나니 떨어진 식욕도 되돌아오는 듯싶었다. 양 볼을 가득 채워 여느 때보다도 복스럽게 먹는다.

“오구오구 잘 먹네.”

확 돌변하는 모습이 웃긴지 의주가 부러 과장한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의주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재광을 놀리는 것도 잠시, 그 또한 면발 흡입에 열중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긴 했다. 오피스텔에 갓 도착해 김밥으로 대충 끼니를 때운 게 오늘 식사의 마지막이었으니까.

처음부터 이럴 의도였던 건 아니었으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끊임없이 드나드는 사람들 상대하랴, 어수선한 방 수습하랴. 그러다가 저녁이 한정 없이 밀려버리고 만 거다.

그냥 식사만 늦어진 게 아니라 활동량까지 부쩍 늘어난 상황이라 허기가 심하게 지는 것도 당연했다.

“….”

“….”

그 때문에 오가는 말 한마디 없이 식사에만 열중했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은 챙길 건 다 챙겼다.

부지런히 면을 씹으면서도 서로의 그릇에 탕수육이나 단무지 따위를 놓아줬고, 누구 하나 목이 막히는 것 같으면 당장 콜라를 따라 건넸다. 양념 한 방울 묻힐 틈 없이 휴지를 건네는 손길 또한 빨랐다.

그만큼 손발이 잘 맞았다는 뜻이다. 대화 없이도 서로가 원하는 바를 척척 거든 둘은 빠른 속도로 그릇을 비운 뒤에야 느긋하게 눈을 맞췄다.

재광은 멋쩍게 웃었다. 아무래도 종일 굶은 사람처럼 허겁지겁 먹어치운 게 퍽 민망한 모양이었다. 그런 맘을 읽은 의주가 먼저 입술을 뗐다.

“맛도 모르고 먹었다, 그치.”

“그러니까요. 그래도 먹으니까 좀 살 거 같아요.”

대꾸한 재광이 자신의 배를 문지르며 “진짜 배부르다” 하고 덧붙였다.

하지만 포만감에 취해 게으름을 피울 여유는 없었다. 당장 고개만 돌려도 너저분한 방 꼴이 훤히 보였다. 종일 쓸고 닦고 정리했건만 아직도 갈 길이 먼 풍경이었다.

금방이라도 의자에 널브러질 것 같던 재광은 심호흡을 하며 빈 그릇을 척척 쌓았다. 할 일이 태산인지라 먹고 난 자리부터 얼른 치우고 마저 방을 정돈할 요량일 테다.

의주는 그 모습을 멀뚱히 지켜보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광아, 배도 부르고 나른한데 좀만 쉬었다 하자.”

의자 등받이에 푹 기대 얘기하는 의주와 달리 재광은 이미 몸을 일으킨 참이었다. 쌓은 그릇을 개수대로 가져가려다 말고 흘긋 의주를 살핀 그는 별안간 놀란 안색을 했다.

“아… 피곤하죠. 얼른 가서 쉬어요. 어차피 자잘한 거 정리는 내가 해야 되니까. 고생 많았어요, 오늘.”

안 도와줄 거면 집에나 가버리라고 심술을 부리는 태도는 아니었다. 재광은 의주가 온종일 제 곁에서 귀찮은 일을 도맡아 했음을 새삼 깨닫고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있었다.

의주가 그런 속내를 모를 리 없었다. 그는 피식 바람 새는 소리로 웃었다.

“애인한테 어쩜 이렇게 뻣뻣하신지.”

“예?”

“집에 안 갈 거야. 그냥 잠깐만 누워 있으면 되는데.”

아무래도 누적된 피로로 인해 사고가 마비된 모양이었다. 평소라면 눕자는 말을 엉큼한 의도로 해석해 눈을 흘겼을 재광이 “아…” 하고 멍한 소리만 낸다.

이어지는 대답 또한 순수하기 그지없었다.

“누워요, 그럼.”

“….”

“아 맞다, 베개랑 이불 아직 안 내놨는데. 꺼내줄게요.”

재광은 당장이라도 아직 풀지 않은 짐을 뒤져댈 기세였다.

기가 막혀 웃어버린 의주가 더는 안 되겠다 싶었던지 여태 앉아 있던 몸을 성큼 일으켰다. 당장이라도 박스를 향해 달려갈 듯한 재광을 뒤에서 껴안는 동작이 빨랐다.

“이불은 됐고 같이 눕자, 자기야.”

“아직 할 거 많은데….”

“10분만. 어차피 내일도 쉬잖아. 천천히 하자.”

빈약한 설득이 잘 먹혀든 이유는 아마도 이 순간 누구보다 노곤한 사람이 재광이기 때문일 터였다. 잠시간 갈등하던 그는 “응?” 하고 재차 묻는 의주의 목소리에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럼.”

만족의 뜻으로 재광의 허리를 두른 팔에 더 힘을 준 의주는 바로 걸음을 뗐다. 창가에 배치한 침대로 다가가자 품에 갇힌 재광 또한 자연스럽게 그리로 향하게 된다.

2인 3각이라도 하는 것처럼 호흡을 맞춰 걸은 두 사람은 이내 침대 위로 쓰러지듯 누웠다. 성인 남성 둘의 무게에 크게 출렁거리던 매트리스가 점차 잦아들었다.

“진짜 좁긴 좁다.”

천장을 보고 누운 의주의 첫마디였다. 바로 어제, 바닥에서 대략적인 너비를 가늠해보긴 했지만 실제로 누워보니 감회가 또 다른 거다. 다 큰 성인 남자 둘이 나란히 눕기에는 역시나 빠듯한 공간이었다.

“많이 불편해요?”

자연스럽게 의주의 팔뚝 위로 머리를 뉜 재광이 물었다. 그렇다고 하면 금방이라도 제가 바닥으로 내려갈 것 같은 말투였다. 의주는 슬며시 시선을 내려 눈을 맞추고는 씨익 웃었다.

“아니, 좋아서.”

그러고는 어젯밤에 그랬던 것처럼 옆으로 몸을 돌렸다. 재광의 곁에 더 바짝 붙어 그를 끌어안는 것은 덤이었다.

한 사람이 돌아눕는 것만으로도 여유 공간이 충분하게 늘어났다. 둘 중 한 명은 천장을 보고 반듯이 누워도 지장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재광은 가만있지 않았다. 의주의 팔 안에서 꿈틀대며 덩달아 몸을 돌리는 것이다. 덕분에 둘은 마주 보고 누운 자세가 됐다.

“오늘 진짜 고생 많았어요. 아니다, 이전에도. 이사하는 거 도와줘서 고마워요.”

눈을 맞추며 건네는 목소리는 단조롭지만 진심만은 가득했다. 의주는 입꼬리를 슬며시 올리며 재광의 앞머리를 가볍게 쓸어 넘겼다.

“광아, 나 같은 고급 인력을 이렇게 머슴처럼 부릴 수 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다.”

“아….”

“그니까 맘껏 부려먹어. 괜히 등 떠밀어서 보내고 혼자 고생하지 말고.”

그렇게 말하면서는 재광의 몸 위로 두른 팔에 힘을 주어 그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재광 또한 푸스스 웃어버리는가 싶더니 이내 의주를 마주 안았다.

“이러고 있으니까 졸리다.”

이윽고 흘러나오는 재광의 음성이 나른했다.

그럴 만도 했다. 어제도 무리를 한 데다가 오늘은 아침 일찍부터 이사에, 해가 지고도 한참 동안 부산을 떨었으니 피곤하지 않을 리가.

의주는 부드러운 손길로 그의 뒷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잠깐만 눈 좀 붙일래?”

“그럼 못 일어날 거 같아서.”

“내가 깨워줄게.”

같은 일정을 소화해놓고 자신만만하게 하는 소리가 마냥 미더울 리는 없었으나 의주라면 또 몰랐다. 늘 재광이 지쳐서 나가떨어질 때도 체력이 짱짱하던 사람이지 않나.

재광도 아마 그 점을 고려한 듯싶었다. 짧은 고민을 끝마치고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면 딱 10분만요.”

“오케이. 좀 자.”

줄곧 재광의 머리칼을 간질이던 손이 어깻죽지를 타고 내려갔다. 의주는 가벼운 손길로 재광의 등을 도닥였다. 일정한 박자로 닿았다 떨어지는 온기에 재광의 호흡이 금세 느려졌다.

????

10분은 무슨. 열 시간은 족히 잔 것 같았다. 몽롱하게 눈을 뜬 재광은 쏟아지는 볕에 눈살을 찌푸리며 몸을 꿈틀댔다.

그나마 눈을 뜰 수 있었던 것도 요란하게 울리는 메시지 알림음 덕분이었다. 습관적으로 머리맡을 더듬은 재광은 손에 잡히는 게 없자 뭉그적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상 알람 수준으로 울려대던 알림음이 이제는 잠잠했다. 그 탓에 휴대전화를 찾기가 어려워진 재광은 몇 번씩 눈을 크게 끔뻑거리며 뿌연 시야를 또렷하게 되돌리려 애썼다.

“아…!”

집안을 정리하려 짐만 늘어놓고 잠들어버린 터라 바닥이 난장판이었다.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물건을 저도 모르게 걷어찬 재광은 반사적으로 침대를 돌아봤다.

작은 소란이 있었으나 다행히 의주는 깨지 않았다. 재광은 잠기운을 마저 없애려는 듯 제 뺨을 두어 번 두드리고는 한층 조심스러운 발길로 방안을 살폈다.

“….”

기기를 찾아내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젯밤, 늦은 저녁을 먹기 직전 옷장을 채워 넣으려 했던 터라 그 옆에 놓여 있었다.

사뿐사뿐, 그러면서도 빠른 걸음으로 다가간 재광은 가벼운 동작으로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옆면의 버튼을 누르자 홈 화면에 미리 보기 메시지가 좌르륵 뜬다.

액정 화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빛에 눈살을 찌푸리고 메시지를 읽던 재광은 곧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재밌어서 폭소하는 건 아니고,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치는 쪽에 가까웠다.

5분 전

장남 : 야 쓰레기봉투 편의점에 안 판다는데 어디서 사

5분 전

장남 : 집에 쓰레기봉투 다 떨어졌다고

2분 전

장남 : 자는 거야 씹는 거야 뭐야

재광이 형과 같이 살던 아파트 단지에는 슈퍼마켓과 편의점이 둘 다 가까이 있었다. 그리고 쓰레기봉투는 그중 슈퍼마켓에서만 구입 가능한 품목이었다. 그곳 주민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사실이다.

하지만 민광이 누구던가. 쓰레기봉투가 다 떨어졌다고 얘기하면 현금만 냅다 던져주고 신경을 끄던 인간이다. 1년을 넘게 그러고 살았으니 인제 와 그걸 어디서 사야 할지 알 리가 있나.

‘이럴 줄 알았지.’

내심 코웃음을 친 재광은 가뿐하게 휴대전화 화면을 껐다. 슈퍼마켓으로 가라고 답장을 몇 글자 써 보내는 건 금방일 테지만 이토록 손쉽게 알려줄 생각은 없었다.

처음부터 이게 목적이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는 민광을 멋대로 굴게 두고 한순간 발을 쏙 빼버리는 것 말이다.

계획대로였다. 어제는 갑작스러운 이사 소식에 퍽 당황한 꼴도 봤고, 오늘은 예상대로 저 없이 어쩔 줄 몰라 하는 메시지까지 받았다.

아마 이건 시작에 불과할 터였다. 앞으로도 몇 번은 더 집안 살림을 갖고 재광을 들들 볶을 게 뻔했다. 그렇다면 소심하지만 원대하던 복수는 꽤 성공적이라 할 수 있었다.

“누구 연락을 받고 그렇게 웃어?”

그래서 통쾌함을 감추지 못하고 웃어버리는데, 그사이에 일어난 의주가 불쑥 묻는다. 재광은 여전히 웃는 낯을 하고서 침대로 다가갔다.

“형이요. 쓰레기봉투 어디서 사냐고 물어보는데, 답장 안 해주려고.”

“이야, 엄청 무서운 복수네.”

재광 같은 상황에 처했더라면 진작 집안을 뒤집어놨을 의주는 놀리는 투로 말했다. 그러나 재광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얼마나 대단한 일인 줄 아냐며 되레 너스레를 떤다.

진심으로 기분이 좋아 보이는 표정이었다. 거기다 대고 굳이 더 약을 올릴 의사가 없는 의주는 침대 바로 앞까지 다가온 그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그러자 재광의 톤이 문득 달라진다.

“맞다. 어제 10분 있다 깨워준다던 사람이 나보다 더 오래 잔 거 알죠.”

장난스럽게 탓하는 목소리였다. 자신의 과오를 짚는 말에도 의주는 위축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당당하게 받아쳤다.

“일부러 그런 거야. 깨우려고 했는데 너무 깊이 잠들어서 그냥 내버려둔 거라고.”

면피용으로 대는 핑계가 아니었다. 어젯밤에 재광이 눈을 감고 나서 의주는 한참이나 잠든 그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만 더 재울까, 하는 심산으로 시계만 몇 번을 확인했는지 몰랐다. 결국에는 40분을 넘길 무렵이 되어서야 푹 자게 둬야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자신도 함께 눈을 감았더랬다.

홀로 고민하는 시간 동안 재광의 머리칼이며 뺨을 얼마나 다정하게 쓰다듬었는지, 당사자는 절대 모를 거였다.

“그렇다고 믿어줄게요.”

답지 않게 거만을 떠는 언사도 의주의 귀에는 그저 귀엽게만 들렸다. 의주는 재광의 허리를 끌어안고서 판판한 배에 이마를 툭 부딪쳤다. 그러고는 슬그머니 손을 내려 재광의 엉덩이를 찰싹 쳤다.

“야, 광. 우리 이럴 때가 아니야. 이천까지 가려면 얼른 씻고 나가야 돼.”

스케줄 한번 빡빡했다. 무슨 명인의 식기 세트를 사주겠다고 설레발을 치던 의주는 그 약속을 지키려 계획까지 다 짜놓았다.

재광은 너저분한 방안을 둘러보며 난감한 내색을 했으나 오래가지는 않았다. 결국에는 의주의 채근에 못 이겨 서둘러 욕실로 들어간 것이다.

“광아, 같이 씻자.”

그리고 재광이 발을 들인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리기도 전에 의주가 그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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