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두기
-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지명, 기업, 사건 등은 실제 현실과 관련 없는 허구입니다.
-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표준어문규범을 준용하지 않고 작성된 부분이 있습니다.
1. 팀장님, 팀장님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일의 데이트였다.
재광은 한 시간쯤 초과 근무를 했고, 먼저 퇴근한 의주가 그를 데리러 왔다. 그런 다음에는 예약해둔 식당으로 가 푸짐한 한식 상차림을 받아봤다.
“어제 그래서 많이 마셨어? 통화할 때는 목소리 멀쩡하던데.”
“아뇨. 별로 안 마셨어요.”
오가는 대화도 별다르지 않았다. 바로 전날 있었던 재광의 팀 회식이 화두에 올라 가볍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팀장님이 괜히 못 가게 잡아둬서 그렇지, 술 자체는….”
“광아.”
의문은 뜻밖의 타이밍에 제기됐다.
“근데 너는 언제까지 나한테 팀장님이라고 할 거야?”
의주가 순수하게 내던진 한마디가 재광의 잔잔한 맘속에 물수제비를 띄웠다.
그것도 3단, 4단으로 아주 요란하게.
????
유난한 물음은 아니었다. 두 사람이 사귄 기간만 벌써 4개월이 넘어가고, 재광의 낭만인 퇴사는 그보다도 훨씬 더 된 얘기였으니까.
시간이 그렇게 흐를 동안 재광은 꾸준히 의주를 ‘팀장님’이라 칭했다.
대단한 주관이 있어서는 아니고 그냥 습관이었다. 의주의 존재는 대학 시절부터 알았지만 첫 만남이 회사였던 탓인지 직함이 더 입에 익었다.
‘여의주’ 이름 석 자보다는 ‘여의주 팀장님’이 풀네임처럼 느껴질 만큼.
그러다 보니 호칭과 관련해서는 특별히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가볍게 던지는 의주의 말에 전에 없이 당황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 네? 어, 저 그게… 아….
-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 뭘 그렇게 놀래?
정작 의주는 다른 뜻이 없다는 듯 태연히 굴었으나 재광은 그렇지 못했다. 그간 안중에도 없던 문제가 한 번 수면 위로 떠오르고 나자 몹시도 거슬리기 시작했다.
- 팀장… 아, 저.
평소처럼 부르려다가도 아차 싶어 버벅거렸고,
- 뭐 마실 거예요?
나중에는 늘 부르던 ‘팀장님’ 소리가 이질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해 아예 부르는 말을 생략하기에 이르렀다.
사실, 어지간한 일은 그러려니 여기고 마는 재광의 성격이라면 이마저도 ‘뭐 어때’ 하고 넘겨버리는 쪽이 더 어울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러지 못 하는 이유가 있었다.
재광은 자신이 애칭에 인색한 편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이전의 연애만 해도 그랬다. 선배, 누나 하다가 어느샌가 자기, 여보 소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나왔더랬다. 휴대전화에 불나도록 메시지를 주고받을 때는 물론이고 육성으로도 거리낌 없이 불렀다.
그런데 의주에게는 그게 안 됐다.
호칭이 자유로워선 안 되는 곳에서 처음 만났기 때문일까. 아니면 같은 남자라서 더 살갑게 굴기가 어려운 걸까. ‘팀장님’이 아닌 그는 상상조차 힘들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이제는 재광의 팀장님이 아닌데도.
“의주, 형….”
침대에 누워 몇 시간 전의 상황을 곱씹던 재광은 한번 읊조려봤다. 허니, 달링 따위의 낯간지러운 애칭을 입 밖으로 낸 것도 아니건만 금세 착잡한 한숨이 샌다.
이쯤 되면 정말 이상하다고밖엔 할 수 없었다. 다른 말도 아닌 형인데. 당장 한집에 사는 민광을 평생 형이라 칭해왔고, 아직도 절친한 관계인 도원은 휴대전화 저장명마저 도원이 ‘형’이건만.
그 한 글자를 의주에게 붙였다는 이유로 괜히 기분이 이상해진다. 재광은 으, 질색하는 소리를 내며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어색한 건 둘째 치고 입에 잘 붙지도 않았다. 하릴없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뱉는 한숨이 무거웠다.
‘근데 팀장님도 별다를 건 없지 않나.’
그런 생각은 심호흡을 몇 번 한 뒤에야 들었다.
그렇지 않나. 의주는 늘 재광에게 “야, 광” 혹은 “광아” 하며 이름을 조금 바꿔 부르기만 했다. 그것도 둘 사이의 간질거리는 느낌보다는 본인 편의에 따라 줄여 부르는 쪽에 가까웠다.
뭐, 간혹가다 “자기야”라고 할 때도 있지만 그 또한 특별하게 들리지는 않았다.
제가 원하는 게 있을 때마다 재광을 무력화시키려 외는 주문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사귀기 전부터 종종 그렇게 부르기도 했고.
그렇게 따지면 관계 변화 전후로 바뀐 게 없는 건 양쪽 모두였다. 즉, 재광만 이렇게 잠 못 들며 붙잡고 있을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하지만 재광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그를 ‘팀장님’이라고 칭할 때와 의주가 저를 ‘야, 광’ 또는 ‘광아’라고 부를 때의 온도 차를. 의주의 부름에는 늘 다량의 애정이 잔뜩 묻어났다.
“하, 진짜….”
거기까지 계산해낸 재광은 별안간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문제로 끙끙 앓고 있단 사실이 불현듯 우스워진 것이다.
스무 살, 처음 연애를 하던 시절에도 안 하던 고민을 스물일곱에야 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결국 재광은 아무런 답도 내리지 못하고 옆으로 돌아누웠다. 문득 휴대전화를 들어 시간을 확인해보니 지금 자야 여섯 시간은 자고 출근할 수 있을 듯했다. 억지로 눈을 감은 그는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당겨 덮었다.
????
― 나는 별로 안 걸릴 거 같아서 그냥 집에 가져가려고.
재광은 답지 않은 고민을 하느라 잠까지 설쳤건만, 정작 짐을 지워준 의주는 해맑았다.
오히려 잘된 일이긴 했다. 혹시라도 그가 커플 티를 팍팍 낼 수 있는 닭살스러운 애칭으로 불러달라 졸랐다면 그게 더 난감했을 테니까.
재광은 평소와 다름없는 의주의 태도에 덩달아 태연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 그래요?”
― 응. 너는 저녁 약속 있다 그랬지. 술도 마시나?
“아뇨. 밥만 먹고 헤어질 거라. 일 얼마 안 걸리는 거면 이따 들를게요.”
― 그럴래? 그럼 출발할 때 연락 줘.
“네. 저녁 맛있게 먹어요.”
통화는 “응, 너도” 하는 자상한 음성을 끝으로 마무리됐다.
그즈음 막 식당 안에 들어선 재광은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으며 홀을 둘러봤다. 방황하던 시선은 벽 쪽에 앉은 사람을 발견한 뒤 안정을 되찾았다.
도원이었다. 일을 보러 나왔다가 저녁 시간이 잠깐 뜬다기에 밥이나 같이 먹기로 한 참이다. 다가오는 재광을 발견한 그가 언제나와 같은 상냥한 미소를 띠며 손을 흔들었다.
“오래 기다렸어요?”
“나도 온 지 얼마 안 됐어. 주문 먼저 할까?”
재광은 자리에 앉으며 “그래요” 했다. 그러자 도원이 조금 전까지 보던 메뉴판을 내민다.
메뉴 선택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전부터 메뉴판을 보던 도원은 물론이고, 막 도착한 재광도 망설임 없이 제 몫의 식사를 골랐다.
두 사람은 주문을 받은 직원이 돌아간 다음에야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했다.
“근데 형은 프로젝트 끝난 지 얼마 안 됐다면서 벌써 바빠요? 이전까지는 그래도 좀 텀이 있지 않았나.”
먼저 말을 꺼낸 이는 재광이었다. 자연스럽게 근황을 화두에 올리자 물을 따라주던 도원이 곧장 대꾸한다.
“지금도 그렇게 바쁜 건 아니야. 어쩌다 보니까 오늘 볼일이 몰려서 그러지.”
“그래요?”
“응. 교수님도 스케줄 되게 신경 쓰시는 편이라 그렇게 빡빡하지는 않아.”
자신이 소속된 곳이라 부러 좋게 포장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재광은 신기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깡패도 대학원생 돈은 안 뺏는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만큼 대학원 생활은 악명이 높지 않던가. 그런데 그걸 1년이 넘도록 불평 한마디 없이 하는 거로도 모자라 되레 괜찮다 말하니 신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기야 천성이 순해 남의 부탁을 잘 들어주는 건 기본이고, 어떤 상황이나 사람에게 함부로 불만을 품지도 않는 사람이라 오히려 대학원이 적성에 맞는지도 몰랐다.
거기까지 생각한 재광은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
“갑자기 왜 웃어?”
“아니, 그냥. 저 고등학교 친구 중에도 대학원 간 애 있는데 걔는 가끔 연락하면 진짜 죽을라 그러거든요. 근데 형은 다닐 만해 보이니까 성향이 잘 맞나 보다 싶어서요.”
의아하게 묻는 말에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도원이 조금은 민망한 듯 목덜미를 매만졌다.
“잘 맞고 말고 보다는… 회사 다니는 사람들도 다 고충은 있잖아. 환경이 달라서 그렇지 비슷하지 않을까?”
“글쎄요.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할까요?”
재광의 반문에는 멋쩍게 웃어버리는 게 다였다. 화제는 자연스럽게 재광에게로 돌아왔다.
“너는 요새 어때? 전에 다른 부서 사람 때문에 고생했었잖아. 요즘은 괜찮아?”
다른 부서 사람이라면, 자사 홈페이지 보수 건으로 재광의 속을 썩인 개발자를 뜻하는 게 분명했다. 상당 시간을 시달린 터라 간간이 하소연을 좀 했더니만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다.
재광은 싱긋 웃었다.
“그럼요.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천국이죠.”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의주가 간 크게 사달을 낸 뒤로는 눈에 띄게 일이 편해진 게 사실이니까.
재광을 힘들게 한 원흉인 개발자는 해킹 사건 이후로 징계위원회에 넘어가 3개월 감봉 처분을 받았다. 또한 홈페이지 담당자도 재광의 사수로 교체되어 그와는 맞닥뜨릴 필요가 없었다.
뿐만아니라 서류 좋아하는 회사에서는 타부서 간의 협업 시 작성해야 할 체크리스트를 배포하기도 했다. 단순 배포에 그치지 않고 모니터링까지 강화한 덕분에 부당한 태업이 줄어들었다는 게 근로자들의 감상이었다.
물론 불쑥 쏟아지는 업무량과 그로 인한 추가 근무는 별개의 얘기였다. 하지만 재광은 사람에 시달리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다.
“다행이다. 그때 너무 힘들어 보여서 걱정했었는데.”
“그 정도였나.”
걱정했다는 얘기에 괜히 쑥스러워 목소리를 줄일 때였다. 서빙 카트를 밀고 온 직원이 두 사람이 앉은 자리 앞에 멈춰 섰다.
테이블 위로는 쌀국수 두 그릇과 스프링 롤이 가지런히 놓였다. 그리고 세팅을 마친 직원이 다시 뒤돌아 갈 즈음, 테이블 상판을 타고 진동이 느껴졌다.
도원의 휴대전화였다. 리드미컬하게 울리는 진동으로 보아 전화가 걸려오는 듯한데, 어쩐지 그는 선뜻 기기를 집어 들지 못했다. 재광은 그 모습을 의아하게 지켜보다가 이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잠깐 손 좀 씻고 올게요. 전화 오는 거 같은데 받아요.”
“어? 응, 그래. 다녀와.”
도원이 타인 앞에서 쉽게 반응하지 못할 전화라면 발신자가 연우일 가능성이 컸다.
재광이 두 사람의 관계를 알게 된 이후 꽤 오랜 시간이 지났고, 잠시나마 서먹하던 분위기도 완전히 회복되었으나 도원은 여전히 연우와의 사이를 드러내는 걸 조심스러워했기 때문이다.
이만하면 재광으로서도 꽤 기민한 눈치를 발휘한 셈이었다. 더는 말을 얹지 않고 발을 떼자 테이블을 지나치기 무섭게 다정한 목소리가 들린다.
“응, 연우야.”
전화를 받았다는 뜻으로 막 운을 떼는 데 불과한 말이었다. 의주가 재광의 전화를 받을 때와 다름없는 첫마디.
그런데 왜인지 그게 재광의 귓속에 콕 박혀 들었다. 저도 모르게 멈칫거린 그는 부러 더 걸음에 속도를 높였다.
화장실로 들어선 재광은 곧장 세면대 앞으로 향했다. 쏟아지는 물줄기에 손을 밀어 넣고 부지런히 비비면서도 눈길은 어딘가 멍했다.
- 응, 연우야.
귓가에는 조금 전 들은 도원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울리는 것 같았다.
별거 아닌 부름에 이토록 반응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요 근래 재광이 가장 고민하던 문제와 맞닿아 있지 않던가. 다들 사귀는 사이에 뭐라고 부르나, 하던 무의식이 은연중에 발휘되어 그쪽으로 귀가 열린 게 분명했다.
관심의 정도에 비하자면 스치듯 들은 도원의 목소리는 지극히 평범한 축이었다. 상대방이 누구인지 알고 전화를 받을 때 으레 나올 수 있는 반응인 것이다. 저나 의주가 서로의 전화를 받을 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조금은 의외로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도원은 타고난 성격처럼 매사에 부드럽고 다정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니까.
늘 상냥한 만큼 진지하게 만나는 이에게는 그보다 더한 모습을 보일 거라고, 저도 모르게 그리 여겼는지도 몰랐다.
“….”
재광은 거기까지만 생각하고 말았다. 거품이 다 씻겨나간 손을 뒤늦게 거둔 그는 남은 물기를 탈탈 털어내고 화장실 문을 나섰다.
다시 자리로 돌아갔을 때, 도원은 이미 통화를 끝내고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재광은 담담하게 말을 건네며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먼저 먹지 그랬어요.”
“금방 올 거 같아서 그냥 기다렸지. 먹자, 이제.”
그냥 시간을 때우는 중이었다는 걸 보여주기라도 하듯 기기를 정리하는 행동이 빨랐다. 싱긋 웃는 얼굴을 마주한 재광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젓가락을 들었다.
“전화, 유연우였죠.”
그러면서 넌지시 묻자 막 입안을 채운 도원이 주춤거린다. 그는 입가를 손으로 가리며 고개만 두어 번 끄덕였다. 대답은 조금 뒤에야 흘러나왔다.
“응. 생각보다 촬영이 빨리 끝났대.”
“아….”
최근 연우가 영화 촬영에 돌입했다는 사실은 재광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왠지 잘 아는 소식을 접하면서도 반응이 영 시원치가 않다.
무언가 떨떠름하거나 내키지 않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갈등하는 표정이었다. 재광이 한 젓가락 가득 집어 든 면을 그대로 들고만 있자 도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네? 아, 아니에요.”
의아하게 묻는 음성에는 냅다 아니라며 쌀국수를 입안에 욱여넣었으나 말처럼 대수롭지 않은 표정은 아니었다. 그 탓에 도원의 시선이 꽤 오래 재광에게 머물렀다.
의심의 여지없이 순수한 호기심의 눈길이었다. 애써 모르는 척하며 면발만 열심히 씹던 재광은 끝내 굴복하고 입을 열었다.
“아, 저 그냥 그….”
“응?”
“아뇨, 형이랑 유연우요. 꽤 오래 만났다면서요.”
“아… 응, 그렇지?”
도원의 얼굴에는 여전히 궁금한 기색이 역력했다. 답지 않게 시간을 끈 재광은 아랫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놓은 다음에야 본론을 꺼냈다.
“아직도 서로 이름… 부르는 거예요?”
“….”
“아니, 형은 원래 좀 다정한 스타일이잖아요. 그러니까 뭔가 그런 쪽으로 표현이 더 많을 수도 있을 거 같아서요.”
남의 연애에 이만한 관심을 보이는 게 퍽 민망한지 부연이 길었다. 말을 마치고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거나 눈동자를 굴리며 가만있지를 못한다.
조심스러워야 마땅한 질문이긴 했다. 남 연애사를 궁금해 하는 것 자체도 그렇지만, 도원은 특히나 연우와의 관계를 들키고도 되도록 티 내지 않으려 노력했지 않던가.
잔뜩 멋쩍어하는 재광을 바라보던 도원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아직도?”
간결하게 흘려보내는 대꾸에서는 얕은 의문이 느껴졌다.
굳이 표현을 콕 집어 말꼬리를 잡으려는 의도로는 안 보였다. 그보다는 의아해 하는 듯했다. 사귀는 사이에 서로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기한이 정해져 있는 걸까, 그런 고민을 하는 게 분명했다.
“아, 그게요….”
“대부분 이름을 부르긴 하는데. 글쎄, 이게 만나는 기간이랑 연관을 지을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
돌아오는 대답에는 음절마다 신중함이 그대로 묻어나왔다. 어디까지 이야기해도 될지를 가늠하듯 조금은 느린 말투였다.
“한 번도 그런 거로는 얘기해본 적이 없어서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미안.”
“아니에요. 갑자기 그냥 궁금해져서 물어본 거니까 신경 쓰지 마요.”
재광은 역시나 괜한 물음이었을까 싶어 황급히 수습했다.
도원도 다른 꿍꿍이를 가지고 의도적인 질문을 던졌다고 생각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온화하게 웃은 그는 잠시 끊긴 식사를 지속하려 젓가락을 든 손을 움직였다.
그러나 면을 집으려다 말고 금세 다시 손을 멈추고 만다. 도원은 꽤 진중한 안색으로 재차 운을 뗐다.
“근데 그게 중요할까?”
“네?”
“뭐라고 부르는 지가 관계에 어떤 척도는 안 되는 거 같아서.”
“….”
“예를 들어서 ‘야’라고 불러도 듣는 사람이 애정을 느낄 수 있으면 그 둘 사이에는 굳이 다른 호칭이 필요하지 않을 거 같은데.”
“아….”
“그냥, 당장 생각하기론 그런 거 같아.”
재광은 실없이 “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참 도원다운 답이라고 생각했다.
상냥함이 기본 값인 사람이라 본인이라면 “야” 하는 한 음절도 충분히 다정하게 부를 수 있다는 걸 알기에 할 수 있는 대답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묘하게 위안이 되는 면이 없지는 않았다.
다정의 대명사인 도원마저도 애칭 정도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단순히 이름을 부른다는 얘기였으니까. 심지어 몇 년씩 장기 연애를 하는 중인데도 말이다.
연애 선배이자 자상하기로는 몇 수나 위인 그가 딱히 신경 쓰지 않는 문제라고 생각하니 최근 골머리를 앓던 고민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맞는 말인 거 같아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구는 의주를 따라 애써 태연한 척하던 재광은 이제야 진심으로 맘 한구석이 편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당장은 그럴 용기가 없지만, 언젠가는 도원에게 자신의 사정을 터놓겠다는 생각 또한 어렴풋이 들었다.
????
도원과는 먼젓번의 통화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밥만 먹고 헤어졌다. 식사 후 곧바로 의주의 집으로 온 재광은 익숙하게 로비 비밀번호를 누르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로비뿐이 아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와서는 무신경한 표정과 달리 빠른 속도로 정확한 목적지를 찾아냈다. 재킷 주머니에서 막 나온 손이 초인종이 아닌 도어록 키패드로 향했다.
의주의 오피스텔 비밀번호를 안 지는 좀 됐다. 재광이 형과 다투고 하룻밤 신세를 졌을 때부터 비밀번호를 알려주겠다고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던 의주가 기어이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처음에는 그래도 남의 집인데 어떻게 멋대로 문을 따고 들어가나 싶었던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몇 번 해보자 금세 적응이 됐다. 재광은 제 집 비밀번호를 누르듯 자연스러운 손길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광, 왔어?”
키패드 누르는 소리를 듣고 재광의 방문을 알아차린 듯했다. 현관까지 나와 있던 의주가 숨김없이 반색한다. 재광이 막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설 때는 기다렸다는 양 허리를 끌어안기도 했다.
이런 종류의 스킨십은 의주의 집 비밀번호를 누르는 것보다 더 빨리 익숙해진 부분이었다. 재광은 표정 변화 하나 없이 현관에서 가장 가까운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제 허리에 올라온 손을 슬며시 겹쳐 쥐면서.
“일은 다 끝낸 거예요?”
“당연하지, 내가 누군데. 가뿐히 끝내고 너 기다리고 있었지.”
간단히 이야기를 주고받을 즈음에는 잠깐 겹쳤던 손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막 방 안에 들어선 타이밍이었다.
의주가 드레스룸으로 사용하는 방이다. 벽을 따라 행거와 선반이 배치되어 있고, 한가운데는 시계장을 겸한 아일랜드 수납장이 자리해 깔끔한 느낌을 주는 공간이었다. 재광은 겉옷을 벗어 익숙하게 행거에 걸었다.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전화를 떠올린 건 그다음이었다. 진동 소리가 작게 울리자 재광이 서둘러 재킷 안에서 기기를 빼냈다.
장남
야 나 오늘 자고 들어간다 오후 9:02
민광이 보낸 메시지였다. 늘 저는 멋대로 집을 드나들면서 재광에게만큼은 연락을 하니 마니 내로남불을 시전하더니만, 요새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외박 시에 꼬박꼬박 보고를 하는 중이었다.
용건이 명료한 메시지를 들여다보던 재광은 ‘ㅇ’만 간단히 찍어 보냈다. 그러고는 궁금한 얼굴로 저를 보는 의주에게 말했다.
“형이에요. 오늘 안 들어온다고.”
그러자 의주의 눈이 반짝 빛난다.
“그럼 너도 안 들어가면 되겠다.”
곧바로 꺼내는 말에는 별다른 대꾸 없이 웃기만 했으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거절이 칼 같은 재광에게 모호한 반응이란 긍정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러면 저 옷 좀 주세요. 편한 거.”
역시나 이어지는 말은 긍정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만족스러운 웃음을 띤 의주가 잽싸게 맞은편 선반 앞에서 곱게 갠 티셔츠를 집어 든다. 트레이닝 팬츠까지 골라 드는 손길에는 거침이 없었다.
“근데 저녁은 누구랑 먹은 거야?”
정작 옷을 건넬 때는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꽤 자상한 목소리로 묻자 재광이 옷을 받아 들며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대꾸했다.
“아… 대학 동기랑요.”
“대학 동기? 저번에 걔? 송민주였나.”
“아뇨, 걔 말고 동기 형이요.”
“동기… 형?”
민주 얘기를 꺼낼 때만 해도 잠잠하던 의주의 눈썹이 일순간 크게 들썩거린다. 영문을 모르는 재광만 멀뚱히 눈을 끔뻑였다.
“네. 동긴데 삼수해서 형이에요.”
“형이면 남자겠네.”
이어지는 말에는 의주를 보던 말간 눈이 슬며시 일그러졌다. 굳이 ‘형’이나 ‘남자’를 짚어낸 의도를 갓 읽어낸 참이다.
남자친구를 두고 남자 사람 친구와 저녁을 먹은 거냐고 묻고 싶은 게 분명했다. 정확히는 단둘이 식사를 할 정도라면 어떤 사이인지 그 깊이를 가늠해보고 싶을 것이다.
민주와 처음 맞닥뜨렸을 때도 그러지 않았나. 의주에게는 난데없이 친구와의 약속에 끼어들어 기어이 무슨 사이냐고 묻고서야 흡족해하며 돌아간 전적이 있었다.
그로 미루어볼 때, 이번에도 같은 의미로 미심쩍어하는 게 틀림없었다.
“그 형 만나는 사람 있어요. 저한테는 대표님 같은 사람이라고요.”
그래서 빠르게 오해의 소지를 없애려고 했는데, 문득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불쾌한 건 아니었다. 통칭 이성 친구와의 만남은 연인들 사이에서 유구한 갈등의 씨앗이었으니까. 다만, 재광이 의주를 만나기 전까지 남녀 간의 관계를 당연히 여겼다는 게 문제였다.
그러니까, 재광이 여자인 친구와 만나든 남자인 친구와 만나든 둘 다 오해를 살 수 있다는 뜻이다. 거기까지 생각을 정리한 재광은 바람 같은 웃음을 흘렸다.
“아니 근데 송민주 만났을 때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여자 남자 안 가리고 이렇게 나오면 저는 대체 누구랑 놀아야 돼요?”
말투는 가볍지만 재광 딴에는 꽤 진지한 문제 제기였다. 그러나 의주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명쾌하게 답했다.
“나랑.”
히죽 웃어버린 다음에는 쪽 소리 나게 입까지 맞춘다.
큰 체격에 어울리지 않는 애교였다. 더군다나 형제로 오해를 살 만큼 닮은 얼굴을 하고서 이런 행동이라니. 불과 몇 달 전만 됐어도 재광은 금세 질색하며 떨어져 나갔을 테지만….
“아 진짜….”
그간의 변화가 컸다. 제게는 심각한 문제라고 거듭 말할 새도 없이 입꼬리가 비척비척 올라가고 마는 거다.
그뿐일까. 기가 찬다는 양 웃음을 흘리고 나서는 돌려주듯 재차 입술을 맞대기까지 했다.
이렇게 되면 의주 쪽에서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무덤덤과 무뚝뚝의 경계를 수시로 드나드는 애인의 귀한 스킨십이지 않나. 그는 금세 떨어지려는 재광의 뒤통수를 손으로 감싸고 매끄럽게 맞붙은 입술을 물었다.
얇은 피부를 입술 끝으로 가볍게 물었다 놓는 움직임이 부드러웠다. 윗입술와 아랫입술을 차례로 훑은 그는 틈을 가르고 들어갈 것처럼 굴다가 불쑥 물러났다.
그래 봐야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슬며시 시선을 내려 눈을 맞춘 의주는 여느 때보다도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속삭이듯 읊조리는 음성 또한 감미로웠다.
“내가 밤새 놀아줄게.”
애초에 대답이 필요치 않은 말이었다. 마침표를 찍은 그는 고작 몇 센티미터 벌렸던 거리를 도로 좁혔다.
평소라면 왜 성급하게 옷 방에서 이러느냐 말렸을 재광이지만, 그도 뜻밖의 외박에 은근히 들뜬 모양이었다. 제지하기는커녕 바짝 붙어 서는 의주의 등을 망설임 없이 끌어안는다. 조금 전 건네받은 옷가지가 미련 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등 뒤로 닿는 손길을 느낀 의주는 꼭 허락이라도 받은 것처럼 입술을 갈랐다. 반항 없이 열리는 틈으로 혀를 밀어 넣자 뜨거운 살덩이가 바로 감겨든다.
제법 달콤한 키스였다. 장소를 옮길 새도 없이 입술부터 붙인 것치고는 여유가 넘쳤다. 의주는 유연하게 움직이는 재광의 혀를 옭아맸다가 길게 빨았다가. 제 뜻대로 움직이며 마음껏 입안을 탐했다.
장난스럽게 치열을 훑은 뒤에는 혀를 깊게 밀어 넣고 눅진하게 점막을 훑었다. 예민한 부위를 간지럽게 훑고 지나가자 곧바로 숨을 집어삼킨 재광이 감은 눈꺼풀을 파르르 떤다.
호응이 좋았다. 지레 긴장하던 재광은 서둘러 제 페이스를 되찾고 외려 더 적극적으로 굴었다. 제 입안을 헤집는 살덩이의 움직임을 따라가며 부지런히 손을 놀린다.
날개뼈 부근을 넓게 감싸던 손은 의주가 편하게 걸친 맨투맨 티셔츠 안으로 들어갔다. 선명한 잔근육을 타고 올라간 손끝이 매끄럽게 피부를 훑자 끈질기게 입안을 파고들던 의주가 불쑥 입술을 뗀다.
“….”
“….”
별다른 말은 않지만 표정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잔뜩 상기된 안색은 의주의 조급한 사정을 대변하기 충분했다.
한 발자국 물러선 의주는 팔을 교차해 자신의 티셔츠 밑단을 잡았다. 그대로 끌어올리자 순식간에 탄탄한 상체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는 재광의 목울대가 크게 일렁였다.
벗은 옷을 아무렇게나 팽개친 의주는 곧바로 재광에게 다가왔다.
“팔.”
짧게 내뱉는 말에 부연은 없었으나 몸짓이 모든 걸 설명했다. 자신이 방금 그랬던 것처럼 재광의 상의 아래를 붙잡으며 읊조린 것이다.
재광은 순순하게 팔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순간 눈앞이 컴컴해지며 옷자락이 얼굴을 스친다. 의주가 벗어 던진 티셔츠 위를 재광의 옷이 덮었다.
맨살에 닿는 공기에 어깨를 움츠릴 틈도 없었다. 재광의 허리를 끌어안는 듯하던 의주의 손이 자연스럽게 몸을 반 바퀴 돌려세웠다. 덕분에 재광은 의주가 아닌 수납장을 맞닥뜨렸다.
곧장 버클로 향하는 손길에는 재광이 저절로 상판을 짚었다. 고가의 시계와 넥타이가 꼭 재광의 손 크기만큼 가려졌다. 등 뒤에서는 부산스러운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었다.
“…왜요?”
그러나 당장이라도 좁은 뒤를 뚫고 들어올 것 같던 의주는 아무런 액션이 없었다. 그 탓에 만반의 준비를 마친 재광만 의아하게 됐다. 수납장을 짚고 상체를 숙인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느껴지는 감각에 뒤를 제대로 살필 수는 없었지만.
“흐읏…!”
재광이 고개를 온전히 돌리기도 전에 온기가 닿았다. 골반이나 볼기가 아닌, 허벅지 안쪽에.
“아, 으응… 저기, 아…!”
생전 처음 손을 타는 부위는 아니었으나 지극히 생소한 감각이었다. 재광은 낯선 감촉에 어쩔 줄을 몰라 하며 고개만 좌우로 흔들었다. 목을 꺾어 고개를 뚝 떨어뜨릴 때는 머스크 향이 은은하게 올라왔다.
재광이 느낀 생경함에 한몫을 톡톡히 한 그것의 정체였다. 바디로션이다. 의주는 바디로션을 듬뿍 얹은 손으로 허벅지 안쪽을 진득하게 매만졌다.
참으로 애매한 손길이었다. 섹스 중에 으레 그렇듯 상대방의 흥분을 돋우려는 행동이 아닌 것이다. 주물대거나 쓸어내리며 야릇한 감각을 자아내던 이전과 달리 지금은….
그래, 투박했다. 그냥 바디로션을 펴 바르는 행위에 가까웠다. 그것도 정성스레 발라주는 게 아니라 치덕치덕 아무렇게나.
“뭐, 뭐 하는 거예….”
불안하게 눈동자만 굴리던 재광이 참다 못해 물었으나 그마저도 끝맺음은 무리였다. 평소와 다른 움직임을 보이던 손이 빠져나가고 결이 다른 체온이 다리 사이를 채운다. 당황한 재광은 끝내 “흡” 하고 숨을 삼켰다.
굳이 시선을 내려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재광이 누구보다 잘 아는 부피감이니까. 숱하게 몸 안으로 받아냈던 의주의 중심부다. 단단한 살덩이의 정체를 알아차린 재광의 허벅지가 순간 움찔거렸다.
“지금 이게 무슨…!”
“광아, 다리 더 붙여봐.”
당황을 솔직하게 드러내 봐도 소용없었다. 의주는 귀를 닫은 양 굳건한 투로 요구했다.
그렇다고 해서 강압적인 어조는 절대 아니었다. 그러나 재광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두 발을 가지런히 붙이고 섰다. 허벅지 안쪽이 길게 맞붙자 의주가 슬며시 몸을 뒤로 뺐다가 도로 붙였다.
“아, 흐으….”
흡수되지 않은 바디로션 탓에 살덩이가 다리 사이로 쑥 미끄러진다. 그때까지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재광의 시야로 잔뜩 발기한 귀두가 보였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서 애써 고개를 돌렸다.
생소한 경험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건 조금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허벅지 사이를 매끄럽게 오가는 성기는 뜨겁고 단단했다. 그 감각을 내벽이 아닌 여린 살갗으로 느끼기는 처음이라 몇 번 안 되는 움직임에도 금세 다리가 후들거린다.
의주가 허리부터 다리까지 옆면을 길게 훑어 내릴 때는 정말이지 감당이 어려웠다. 수납장에 의지해 간신히 버티던 몸이 하마터면 무너져 내릴 뻔했다.
다행히 사고는 없었다. 순간 휘청거리던 재광이 재빨리 몸에 힘을 줬다. 그 바람에 버티고 선 두 다리에도 자연히 힘이 실렸다. 허벅지 안쪽의 근육이 바짝 서 의주의 중심부를 더 선명하게 조였다.
“또…. 김재광 또 사람 미치게 하지. 하, 씨.”
“내가 뭘, 요. 으읏!”
의주로서는 그에 더 흥분하는 게 당연했다. 이게 뭐 하는 짓이냐며 당황할 땐 언제고 알아서 다리 사이를 더 조이며 자극을 극대화하지 않던가. 그 와중에 제가 뭘 했는지도 모르는 걸 보면 타고났다고밖엔 설명이 안 됐다.
“응, 사랑, 한다고.”
엎드린 등 위에 가볍게 입 맞춘 의주는 팔을 둘러 재광의 몸을 더 안정적으로 끌어안았다. 그런 뒤에는 더욱 힘주어 고간을 붙였다.
잔뜩 커진 성기가 쭉 미끄러지며 모습을 감추자 엎드린 재광의 어깨가 작게 파들거렸다. 의주의 팔에 닿은 아랫배도 동시에 경련한다.
솔직한 반응에 숨 같은 웃음을 흘린 의주는 자신의 머리칼을 크게 쓸어 넘겼다. 이어 재광의 허리를 고쳐 안는 얼굴에는 더 이상 웃음기가 남아 있지 않았다.
“아, 흣…! 이상, 해요. 아 진짜 이, 상해, 요, 그만… 아…!”
예민한 살갗을 스치는 속도가 높아지자 재광의 목소리가 훨씬 다급해진다. 유리 상판 위에 놓인 손도 몇 번씩 미끄러져 고쳐 짚느라 부산스러웠다.
그러나 의주는 온몸에 드러나는 당혹감에도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재광을 달래려 목덜미나 어깨쯤에 부드럽게 입술을 누르는 게 다였다.
유연하게 튕기는 허리 짓은 여전히 빨랐다. 물론, 혼자만의 욕심을 채우려 몰아붙이는 행동은 아니었다.
“이상한 거, 아닌 거 같은데.”
허리를 감싼 팔이 느슨해지나 싶더니 흘러내린 손이 재광의 아래를 톡, 건드린다. 입으로는 연신 이상하다면서도 중심부는 어느새 발기해 꺼떡이는 중이었다.
“흐으, 응, 읍…!”
손끝으로 귀두를 가볍게 튕겨낸 의주는 재광의 것을 만져주는 대신 그의 얼굴을 제 쪽으로 돌렸다. 생경한 쾌감에 아직도 혼란스러워하느라고 잔뜩 울상이다.
그것마저도 의주의 눈엔 마냥 귀여웠다. 엄지로 뺨을 지그시 문지른 그는 곧장 상체를 숙여 재광의 입술을 덮었다.
이전보다 훨씬 뜨거운 숨결이 넘어온다. 틀어 막힌 신음도 함께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상하다며 우는 소릴 하던 재광은 막상 입술을 겹치자 성심성의껏 의주의 혀를 빨았다.
의주가 얼굴을 감싸지 않은 손으로 가슴을 훑자 주춤거리는 것마저도 완벽했다. 건드리는 족족 드러나는 반응에 만족한 의주는 이만 입술을 떼어냈다.
“아… 흣!”
대신 꼭 상을 주듯이 재광의 것을 잡았다. 음경을 길게 훑어 올리며 자극하다가 귀두를 간질이는 것처럼 섬세하게 매만진다. 그러는 사이에도 다리 사이를 드나드는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예민한 부위가 지속적으로 자극당하는 거로도 모자라 직접적인 접촉까지 더해지니 재광으로서도 더 견디기가 어려운 게 당연했다. 의주의 팔에 닿는 아랫배가 수축하고, 판판한 등에는 날개뼈가 도드라지게 올라온다.
내뱉는 숨이 거칠어지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더는 앓는 소리도 못 내고 끝이 갈라지는 호흡만 간신히 이어간다. 날숨의 주기도 점점 짧아져 수그린 상체가 바쁘게 들썩거렸다.
급격히 달라지는 모든 반응이 사정의 신호임은 누구보다도 의주가 더 잘 알 터였다. 그러나 그는 짓궂은 장난에 구미가 돌았는지 뻔뻔하게 모르는 척 굴었다.
금방이라도 체액을 분출할 것처럼 팽팽하게 부푼 성기를 쥐고서 그 끝을 막아버리는 거다. 재광의 도리질이 거의 몸부림이 됐다.
“아, 좀…! 싫, 싫어, 요. 아, 윽….”
탓하는 음성도 울먹거림에 가까웠다. 유리 상판 위에서 미끄러진 손을 뒤로 뻗어 의주의 다리를 마구 두드리는데도 그는 조금도 물러설 줄을 몰랐다.
“좀만, 하, 좀만 참아 봐.”
오히려 참아보라며 가당치도 않은 소리를 지껄인다. 이 순간 더없이 짓궂은 짓을 하는 주제에 뻔뻔하게 요구하는 목소리는 몹시도 부드러웠다.
한시가 급한 재광에게는 그래서 더 얄미운 게 사실이지만, 그래도 희망이 없지는 않았다. 짧은 한마디 내뱉는 의주의 음성 또한 한껏 달뜬 기색이 역력했기 때문이다.
그건 곧, 그의 절정도 멀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으, 으응… 빨리, 빨리요. 제발. 읏…!”
재차 재촉한 재광은 거의 수납장 위로 엎어진 자세가 됐다.
잔뜩 열 오른 몸이라 유리가 유독 차갑게 느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미 힘이 풀린 팔에는 다시 몸을 지탱할 만한 힘이 들어갈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상체를 늘어뜨리고 끙끙 앓기만 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위에서 낮게 목을 긁는 소리가 들린다. 곧 한껏 긴장 상태던 허벅지 안쪽에서 짧은 떨림이 느껴졌다. 그리고,
“아…!”
원망스러울 만큼 분출구를 정확히 틀어막고 있던 손길이 사라졌다. 일순간 재광의 온몸이 경직됐다가 풀렸다. 극도의 긴장감이 가시자 그는 거의 녹아내리듯 상판에 눌어붙었다.
“하, 여의주 진짜….”
뺨 한 쪽을 유리에 찰싹 붙이고서 중얼거리는 입술이 부루퉁하게 튀어나왔다.
“뭐라고?”
그런데 저도 모르게 너무 솔직한 맘이 새어 나와버렸다. 웅얼거림에 가까운 말을 들은 의주가 득달같이 묻는다. 반쯤 멍한 정신이던 재광은 그제야 눈치를 살피며 괜히 아랫입술만 물었다 놨다.
그래도 세 살이 많은 상대건만 이름 석 자는 너무했나 싶은 것이다.
똑같이 세 살 많은 제 형에게 ‘너’라고 했다가 말꼬리 잡혀 시달린 경험 다수, 두 살 많은 도원에게도 꾸준히 ‘형’ 하며 존댓말을 쓰는 재광에게는 꽤 신경 쓰이는 실언이 아닐 수 없었다.
“아니, 그게….”
엎드린 자세로 목소리만 겨우 들은 터라 더 그랬다. 찔리는 마음 때문인지는 몰라도 간결히 묻는 의주의 음성이 유독 더 가라앉은 것처럼 들린 것이다.
그 때문에 뭐라 변명이라도 할 생각으로 여태 늘어져 있던 상체를 일으켰건만….
“해 봐, 다시.”
등을 꼿꼿이 세우자마자 성급히 재광을 돌려세운 의주의 얼굴은 예상과 달랐다. 표정이 없긴 하지만 불쾌하거나 화가 난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재광이 잘 아는, 흥분했을 때 보이는 의주의 표정이다. 아무래도 재광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 석 자가 그의 스위치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빨리.”
생각과 다른 상황에 되레 당황한 재광이 가만히 있자 보채기까지 한다.
끝내 재광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즐겁고 신이 나서가 아니라 어이가 없어 흘리는 실소였다. 그러는 와중에 마주치는 눈길만큼은 또 뜨거워서 더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의주는 진지했다. 재광이 눈만 끔뻑거리고 있었더니 고새를 못 참고 어깨를 세게 그러쥐며 무언의 재촉을 한다. 재광은 그제야 입술을 뗐다.
“의주야, 좋아?”
장난이었다. 세 살 어린 상대방에게 반말을 들은 게 뭐가 그리 좋아서 채근까지 하나 싶어 조금 짓궂게 군 것뿐이었는데.
“아!”
정확히 원하는 바에 부합했던 모양이다. 의주는 당장 제 앞에 선 재광을 들어 올렸다. 순간 허공에 붕 뜬 재광은 수납장 위에 안착했다.
“….”
“….”
그러고 나자 분위기가 더 기묘해진다. 조금 전까지 양껏 달아오른 눈길을 보내던 의주만의 사정이 아니었다. 재광이 눈동자를 버벅거리며 황급히 눈 둘 곳을 찾아 헤맸다.
타의로 상판 위에 앉게 된 재광의 행색이 문제였다. 다리를 접어 온전히 올라앉은 탓에 조금 전까지 자극당한 부위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가관이었다. 지속적인 마찰로 붉게 달아오른 피부, 그 위로는 흡수되고 남은 바디로션과 정액이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뒤섞여 묻어 있었다.
조금은 지저분하고, 그래서 더 선정적으로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의주는 노골적인 시선으로 재광의 다리 사이를 훑었다. 그러고는 그야말로 눈이 뒤집혀 달려들었다.
“아, 안 돼요 바로는. 저기, 아아!”
당장이라도 뒤를 비집고 들어올 기세에 놀란 재광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만류했다. 깜짝 놀라 버둥거리느라 곱게 접어 올려놓았던 다리가 허공에서 애처롭게 흔들린다.
의주도 냅다 뒤를 뚫고 들어갈 만큼 이성을 잃은 상태는 아닌 듯했다. 그는 재광의 목덜미를 물어뜯으며 유사 성행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허벅지를 더듬었다.
“하으… 아, 읏!”
정체 모를 점액을 꼼꼼하게 훑은 손은 곧장 뒤로 향했다. 미끌거리는 손가락을 밀어 넣자 재광이 서둘러 의주의 어깨에 매달린다. 잔뜩 굳은 안색을 한 의주의 손이 빠르게 구멍을 들쑤셨다.
조급한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행위였다. 오로지 뒤를 넓히는 데만 충실한 거다. 깊게 집어넣은 중지를 빙글 돌리며 안을 넓히나 싶더니 금세 손가락 개수를 늘린다.
마디를 끝까지 밀어 넣은 뒤에는 의도적으로 전립선 부근만 꾹꾹 눌러 성감을 끌어올렸다.
“으, 으응! 흐… 으읏, 아…!”
앓는 소리가 샐 때마다 재광의 손끝이 희게 질렸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가락이 미끄러지는 길을 따라 의주의 어깨에 손톱자국이 선명히 남는다.
“…해도 돼?”
조급한 맘을 억누르며 뒤를 풀던 의주도 이제는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듯 보였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끝이 미세하게 갈라진다.
다른 때에 비하면 삽입에 들이는 시간이 확연히 짧은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여유가 없기는 재광도 마찬가지라 수긍이 빨랐다.
재광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그의 다리를 양옆으로 벌린 의주가 볼기 사이로 귀두를 맞췄다.
순식간이었다. 의주는 제 것을 단숨에 끝까지 밀어 넣었다. 첫 삽입에 고간이 빈틈없이 맞닿자 재광이 어떤 소리도 못 내고 입술만 벙긋거린다. 당황과 통증과 쾌감이 동시에 뒤섞여 혼비백산하는 안색이었다.
이미 끝까지 들어온 것 같던 살덩이가 조금 더 깊이 들어올 때는 벙긋거리던 입술이 더 크게 벌어졌다. 목을 긁으며 거칠게 넘어가는 숨소리만 짧은 탄성처럼 흘러나왔다.
“아파?”
“조, 조금… 아, 흐, 으윽!”
걱정하는 목소리를 내면서도 의주의 움직임은 좀처럼 잦아들 줄 몰랐다. 그 탓에 재광이 그의 어깨에 더 바짝 매달렸다.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허리를 쳐올리던 의주는 입술만은 부드럽게 겹쳤다.
“으응, 으, 읍…!”
타액을 섞느라 질척거리는 입안에서는 차마 뱉지 못한 신음이 울렸다. 재광은 꼭 해갈하는 사람처럼 의주의 혀를 옭아매며 더욱 진한 입맞춤을 졸랐다.
의주는 그가 원하는 대로 해줬다. 깊숙이 자리한 점막을 진득하게 쓸자 어깨를 짚던 재광의 손이 목을 타고 올라가 의주의 뒷머리를 파고든다. 흥분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손길이었다. 덩달아 허리 짓의 강도가 거세졌다.
“아…! 하, 으읏, 응, 흣! 아아!”
배 속 예민한 부분을 강하게 짓누르는 감각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딥키스를 갈망하던 재광의 고개가 절로 떨어져 나간다. 고개를 한껏 뒤로 젖힌 탓에 목울대의 움직임이 선명히 드러났다.
의주는 불룩 솟았다 가라앉는 울대 위에 입 맞췄다. 살며시 닿았다가 떨어진 입술이 재광의 목선을 길게 지나 어깨뼈에 닿는다. 재광을 더 끌어당겨 안은 그는 허리를 크게 뒤로 물렀다가 곧장 다시 치받았다.
목을 한껏 젖힌 재광의 입술 새로 일순 숨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명백하게 쾌락을 담은 호흡이었다. 크게 부풀었다 가라앉는 가슴 아래로 아랫배가 잘게 요동친다.
안쪽 사정은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밀려들어온 살덩이를 본뜨듯 착 달라붙은 내벽이 떨리며 콱 조여들었다.
꼭 의주를 더 깊숙이 끌어당기려는 의도로 느껴질 만큼 자극적인 움직임이었다. 지그시 눈을 감았다 뜨며 호흡을 가다듬은 의주가 재차 자신의 것을 빼냈다.
“아아! 으, 흐읏…. 아!”
입구에 간신히 끄트머리를 걸쳤다가 도로 박아 넣자 재광이 눈을 질끈 감으며 앓는다. 이미 엉덩이에 닿은 고간을 더 밀어붙일 때는 거의 울먹거리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 흐, 으응, 윽…! 깊, 어요. 아! 너무… 읏!”
이전보다 더 깊게 찔러 넣은 건 사실이었다. 아랫배에서부터 예리하게 올라오는 감각을 느낀 재광이 급격히 바르작대기 시작한다.
한층 더해진 깊이감이 저와 의주 사이의 거리 때문이라 여기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여태 어깨를 끌어안고 버티던 그는 별안간 한쪽 팔을 풀어 상판을 짚었다.
그마저도 쉽지는 않았다. 밀어붙이는 의주 때문에 몸은 자꾸만 들썩거리지, 배어 나온 땀 때문에 유리를 짚은 손은 미끄러지지. 결론적으로는 더 불안정한 자세가 된 셈이었다.
“팀장, 팀장님… 아! 잠, 깐만…. 아, 흣! 아아!”
자꾸만 밑을 쳐대는 통에 다시 의주에게 안겨들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어정쩡한 자세로 힘겹게 버티던 재광은 결국 도움을 청했다.
비록 말은 다 잇지 못했지만 소통에 어려움은 없었다. 애처롭게 뻗은 팔이 대신 의미를 전했다.
“….”
의주는 굳은 표정으로 재광을 마주했다. 그러면서도 순순히 재광의 팔을 끌어다 제 어깨에 걸쳤다. 다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으앗…! 아, 아아!”
재광이 원하는 건 그저 안정적으로 매달려 몸을 지탱하는 수준에 불과했으나 의주는 자신의 어깨에 의지하는 재광을 그대로 들어 올렸다.
당황은 오로지 재광의 몫이었다. 순식간에 허공으로 몸이 뜬 그는 어쩔 수 없이 의주에게 찰싹 달라붙어 안겼다. 그러자 의주의 팔이 등을 가로질러 단단히 뒤를 받친다.
“으, 응! 팀장, 님, 아! 이거 아닌, 거, 같, 아! 아아…!”
의주의 위에 스스로 내려 앉아본 경험은 다수였으나 이건 또 달랐다. 몸이 공중에 떴다가 가라앉을 때마다 내벽 깊숙한 곳까지 살덩이가 처박혀 온몸을 찌르르 울린다.
다리를 땅에 붙이고 위아래로 움직일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허공에 들렸다가 훅 떨어지는 감각이 주는 불안과, 반동이 클수록 더욱 깊게 들어오는 쾌감 따위가 어지럽게 뒤섞여 몸이며 머리를 다 헤집어놨다.
좋은지 싫은지 판단을 내리는 것마저 어려웠으나 몸만은 솔직했다. 공기 중에 떠올랐다 가라앉는 순간마다 내벽이 잔뜩 수축하며 의주의 것을 꽉 조인다. 재광을 받친 의주의 손이 덩달아 볼기를 세게 쥐며 흥분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아흐… 으, 흣! 아, 아아…! 아!”
“한 번만, 더, 불러, 봐.”
정신없이 흔들리는 재광의 고개는 의주의 어깨 위로 떨어진 지 오래였다. 의주는 그런 재광의 귓가에 대고 낮게 읊조렸다.
재광이 이런 요구에 인색한 편은 아니었으나 지금은 맘처럼 되지가 않았다. 젖은 입술을 몇 번씩 벙긋거리는데도 달뜬 숨만 겨우 새어 나온다. 그것도 꼭 울음처럼.
“팀장…님, 아… 팀, 장, 아아! 읏!”
간신히 요구에 응하기까지는 조금의 시간이 더 걸렸다. 재광은 제가 뭐라는 줄도 모르는 표정으로 겨우겨우 말문을 텄다.
그마저도 매끄럽게 이어지지는 못했으나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듯했다. 쳐올리는 의주의 움직임이 빨라지나 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내벽 안쪽에 살덩이를 푹 처박았다.
꼭 온몸을 터뜨릴 것처럼 재광을 꽉 안은 다음에야 그가 체액을 터뜨렸다.
“하아. 아! 으응….”
안이 한껏 예민해진 탓인지 재광은 도로 수납장 위에 올려놓는 움직임에도 쉽게 앓았다. 속을 꽉 채우던 의주가 빠져나갈 때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끙끙대며 바르작거리는 얼굴이 거의 울상이었다.
“아…! 흐으… 아, 아아!”
의주가 중심부를 쥘 때는 온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축축한 속눈썹을 파들파들 떨면서 입술을 질끈 깨문 그는 의주의 손놀림이 조금 더 빨라진 뒤에야 두 번째 사정을 마쳤다.
한순간 극도의 긴장을 겪은 몸은 금세 흐물흐물 풀어졌다. 허공에서 흔들리느라 체력 소모가 컸던 탓인지 평소보다 더 노곤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두 다리와 양팔을 수납장 아래로 떨어뜨리며 늘어지자 픽 웃은 의주가 주섬주섬 재광을 챙겨 든다.
챙겨 든다는 표현이 딱이었다. 아무렇게나 늘어진 팔을 일자로 가지런히 모으고, 수납장 아래서 달랑거리는 다리 또한 꼭 붙여 정리한 그는 등과 무릎 뒤로 손을 넣어 재광을 들어 올렸다.
널브러져 있던 재광이 목을 끌어안을 때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이마에 입술을 붙이기도 했다. 발치에 걸리는 옷가지를 대충 밀어낸 그는 곧장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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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길었다. 얼마나 앓아댔는지 목이 칼칼할 지경이었다.
침실에 딸린 욕실로 들어선 재광은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으며 샤워기 아래 섰다. 수도꼭지를 틀기도 전부터 하품이 쩍쩍 나온다.
뜻밖의 외박에 들떠 출근은 까맣게 잊고 밤새 붙어먹은 결과였다. 그래놓고 혹시 지각이라도 할까 봐 긴장했는지 일찌감치 정신이 번쩍 들었다. 퉁퉁 부은 눈을 한 재광은 쏟아지는 물줄기 아래서 얼굴을 노곤하게 쓸어내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푹 적시고서 막 샴푸를 짜려던 참이었다. 시원스러운 물줄기 사이로 달칵거리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불쑥 찬 공기가 밀려든다.
“광아.”
의주였다. 당연히 거실 쪽 욕실에서 씻고 있는 줄 알았던 그의 등장에 재광이 물을 껐다. 눈가의 물기를 훔치는 손길이 급했다.
급작스럽게 욕실 문을 연 데는 다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이었다. 가령 그런 것들 말이다. 칫솔을 놓고 갔다든가, 클렌징폼이 다 떨어졌다든가 하는.
그런데 정작 용건은 재광에게 있는 듯했다. 의주가 쏜살같이 샤워 부스 안으로 들어온다.
“왜요?”
“같이 씻게.”
“굳이?”
“우리 좀 있으면 헤어지는데 좀 더 같이 있자고.”
당당한 사유에 재광은 기가 차서 웃었다.
누가 들으면 앞으로 일주일은 족히 떨어지는 줄 알 터였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당장 오늘 저녁에도 퇴근은 했냐, 저녁은 먹었냐 메시지를 주고받다가 어떻게든 만날 게 뻔했다.
둘 사이에서는 익숙한 패턴이었다. 그렇기에 의주도 저녁의 만남을 내다보지 못할 리가 없건만 왜인지 오늘따라 엄살을 피운다.
“자기 샴푸 했어?”
이쪽이 취약한 ‘자기’ 소리까지 해가면서.
재광은 숨처럼 웃어버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사실 재광에게는 의주와 함께 하는 샤워가 어쩐지 어색한 행위로 느껴졌다. 과장을 조금만 보태자면 의주와는 옷을 입고 지낸 시간이나 나체로 함께한 시간이 비등비등할 텐데도 못내 쑥스러웠다.
어린애도 아니고, 혼자 온몸 구석구석 다 씻을 수 있는 청년끼리 굳이 쫄딱 젖어 부대낄 필요가 없어 보인 탓이다. 더군다나 거실에 딸린 커다란 욕실도 아니고 고작 샤워부스와 세면대가 전부인 이곳에서는 더더욱.
“아뇨, 아직.”
“그럼 내가 해줘야지.”
그런데도 기겁하거나 펄쩍 뛰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괜히 재광 혼자 멋쩍어해서 그렇지, 전에 없던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의주는 가끔 욕실로 쳐들어올 때가 있었다. 정말이지 뜬금없이.
특별한 목적이나 엉큼한 의도가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랬다면 진작 사고를 치고도 남았을 텐데, 끽해야 거품을 씻어주거나 샴푸를 해주는 정도가 다였다.
몇 번 그러다 보니 재광도 의주의 돌발 행동을 조금이나마 붙어 있고 싶은 마음으로 해석하고는 말았다. 그리 생각하면 좀 뜬금없긴 해도 귀엽게 봐줄 만했다.
“눈 꽉 감아.”
그렇기에 이번에도 순순히 따라줬던 건데.
“….”
물줄기가 잦아들 즈음 불쑥 입술이 닿았다.
습한 공기 때문인지 촉, 닿았다 떨어지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뒤늦게 눈꺼풀을 들어 올린 재광이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솔직히 이건 귀엽게 봐줄 만한 수준이 아니라 진짜 귀여웠다. 면전에서 뻔뻔하게 달려들어 딥키스부터 하고 봐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양반이 굳이 눈 감은 틈을 타 도둑 뽀뽀를 하지 않나.
그 부조화가 더 거세게 재광의 맘을 흔들었다. 섹스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사이에 살갗만 스치는 뽀뽀 정도로 가슴이 간질간질하다.
“…뭐예요, 뜬금없이.”
타박하듯 던지는 말에는 진심이 전혀 묻어나지 않았다. 귀 끝을 붉힌 재광은 괜스레 눈동자만 굴리다가 이내 뒤꿈치를 가볍게 들었다.
덕분에 의주와 눈높이가 얼추 맞는다. 그는 재빠르게 입술을 붙였다가 뗐다. 잠깐 들린 발끝이 금세 제자리를 찾았다.
“야, 광아….”
의주는 새삼 얼빠진 안색을 했다.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인 건 자신이었음을 그새 잊은 모양새였다. 귀한 재광의 스킨십에 비척비척 새는 웃음을 참지 못한 그는 금방 다시 입술을 맞붙였다.
훨씬 본격적인 자세였다. 재광의 젖은 등 뒤로 팔을 휘감고, 다른 한 손으로는 뺨을 그러쥔다. 비스듬히 얼굴을 기울인 뒤에는 곧장 맞물린 입술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순식간에 짙어진 농도에 놀란 재광이 흠칫 굳었으나 잠시뿐이었다. 어정쩡하게 반쯤 내려간 눈꺼풀을 온전히 닫은 그는 의주의 팔뚝을 가벼이 짚으며 입안으로 밀려들어오는 살덩이를 받아들였다.
모닝 키스치고는 상당히 진한 입맞춤이었다. 재광의 입안을 부드럽게 유영하는 의주의 혀는 곳곳을 섬세하게 자극했다. 재광이 급히 숨을 먹거나 팔뚝을 부여잡은 손에 힘을 줄 때면 여지없이 더 깊게 밀려들어 선명한 자극을 전했다.
서로의 입안을 오가며 정신없이 혀를 섞는 마찰음이 유난히 외설적으로 들렸다. 축축하게 젖은 타일 벽을 타고 질척거리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린다.
“으읍, 흐….”
아마 그게 더 큰 자극이 된 듯싶었다. 재광의 등과 뺨을 감싸 쥐던 의주의 손이 점점 더 아래로 내려가 온 피부를 훑는다.
머리카락에서 헹궈낸 샴푸 물이 몸을 타고 흘러 전신이 미끈거렸다. 척추를 타고 내려갔다가, 다시 날개뼈 인근까지 올라왔다가. 부지런히 움직이는 의주의 손이 꼭 거품기 남은 물을 온몸에 펴 바르는 것만 같았다.
닿는 족족 미끄러지는 촉감은 비단 의주에게만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건 아니었다. 여느 때보다도 매끄럽게 피부를 훑는 손길에 재광이 간헐적으로 어깨를 떤다. 그의 몸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질 때마다 의주가 더욱 깊숙이 혀를 밀어 넣어 점막을 쓸었다.
“아… 으응, 흡…!”
종래에는 끌어안은 몸 아래로 하체가 맞닿았다. 평소보다 훨씬 눅진하고 습한 키스에 열이 올라 발딱 선 살덩이가 살갗에 고스란히 느껴진다. 주춤 물러서고 다가서느라 다리가 얽히는 동안 중심부도 끊임없이 마찰했다.
의주가 열감에 취해 허리를 움직일 때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예민한 표피끼리 뭉툭하게 닿았다가 스르륵 미끄러지며 보다 큰 쾌감을 만들어냈다.
“아! 하아… 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던 입술이 떨어지자 재광의 목소리가 욕실 전체에 퍼진다. 자못 진지하기까지 한 눈길로 달뜬 얼굴을 바라보던 의주는 거침없이 손을 아래로 내렸다.
금방이라도 허리를 쳐올릴 것처럼 움직일 때마다 부딪히던 성기를 한번에 쥐자 재광이 곧바로 “읏” 하며 숨을 먹는다. 의주는 꼭 두 개를 한 번에 주무르듯 손에 힘을 줬다가 풀기를 반복했다.
직접적인 접촉에 재광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도 그럴 게, 의주가 손으로 만져준 적은 많지만 이런 식으로 성기를 맞대기는 처음이었다. 예민한 피부끼리 쓸리는, 그것도 씻다 만 샴푸에 미끄러지다시피 하는 느낌은 몹시도 생소했다.
그래서 더 자극이 컸다. 맞닿은 성기는 뜨겁고, 미끄럽고, 또 한껏 야릇한 감각을 만들어냈다. 아랫배는 점점 더 묵직해지고, 다리에는 금방이라도 힘이 풀릴 것만 같았다.
재광은 거의 쥐어짜는 목소리로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아흐, 아… 저, 금방, 응!”
큼직하게 주무르던 의주의 손길이 위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안팎으로 의주의 손과 성기가 얇은 피부를 감싸 온몸이 저릿했다.
이대로는 금방 주저앉지 싶었다. 의주의 어깨를 짚은 손에 다급히 힘이 들어갔다. 그러고도 버티기가 힘든지 아예 이마를 어깨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러면서 꼭 신음처럼,
“흐, 팀장님….”
하고 불렀더니….
“아, 아아…!”
의주의 팔에 선명히 힘줄이 돋는다. 두 살덩이를 흔들어대는 손길에도 속도가 더해졌다. 마치 화라도 난 듯이 표정을 굳힌 그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서 손짓을 지속했다.
소리마저 야릇했다. 젖은, 그것도 미끈거리는 살덩이를 한데 부여잡고 흔들어대니 진득하게 찰박대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울리는 것이다.
의주의 손동작이 격해진 뒤로는 찰싹 때리는 듯한 효과음까지 났다. 그 즈음에는 재광의 온몸에 힘이 빳빳하게 들어갔다.
몰아치는 성감을 견디기가 어려운지 허리를 이리저리 비틀어 대다가도 결국에는 의주에게 기대고 마는 패턴이었다. 의주는 제 어깨 위로 떨어진 고개를 한 손으로 감싸고는 더욱 피치를 올렸다.
“으응, 흐… 아, 아!”
얼마 지나지 않아 희끄무레한 점액이 터져 나왔다. 두 사람은 비슷한 타이밍에 체액을 토해냈다. 재광이 여운으로 몸을 잘게 떨자 의주가 그를 꽉 끌어안으며 젖은 머리칼에 입술을 묻었다.
가슴을 크게 들썩이며 숨을 고르던 재광은 불현듯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바람 새듯 실없는 소리였다. 가만히 그를 안고 있던 의주가 나직이 물었다.
“왜 웃어.”
“출근 앞두고 아침부터 이게 뭐예요.”
재광은 자칫 부루퉁한 목소리를 냈으나 하는 행동만은 정반대였다. 조금의 틈도 남김없이 의주의 상박에 꼭 붙어 서는 거다. 기분 좋게 코웃음을 친 의주가 히죽거리며 대꾸했다.
“뭐긴 뭐야. 애정 행각이지.”
그는 재광의 턱을 들어 올려 다시금 짧게 입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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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런을 떨며 일찍 일어난 게 천만다행이었다. 오늘 아침, 의주와는 재차 진한 입맞춤을 나누고서야 온전히 씻고 나올 수 있었다.
덕분에 피로가 엄청났다. 어젯밤 일은 물론이고 아침부터 대차게 한 발 뽑고 나온 터라 여태까지도 조금은 몽롱한 정신이었다.
오전 내내 무슨 정신으로 업무를 봤는지도 까마득했다.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구내식당에서 밥을 마시고 온 재광은 의자에 푹 기대 뻑뻑한 눈을 비볐다.
‘미쳤지. 무슨 배짱으로 여의주를 자극해서는.’
속으로는 늦어도 너무 늦은 후회를 하면서.
- 의주야, 좋아?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문제였다. 의주가 제 이름 석 자를 다시 불러보라고 보챘을 때, 평소처럼 뭘 그런 걸 다시 듣냐며 무시하고 넘어갔다면 그가 그토록 흥분하진 않았을 터였다.
간만의 외박 소식에 한껏 들떴단 사실을 고려해도 그랬다. 그래 봐야 익숙한, 즉 버틸 만한 강도의 섹스를 하고 끝이 났을 테다.
그러니까 되지도 않는 패기를 부린 게 문제였다고. 재광은 어제의 격렬한 관계에 대해 그런 결론을 내렸다.
아니, 정확히는 내리려고 했다. 그런데 문득 다른 기억이 뇌리를 스친다.
- 팀장, 팀장님… 아! 잠, 깐만….
수납장 위로 자꾸만 손이 미끄러져 의주를 불렀을 때의 기억이다.
이쪽에서는 그저 몸을 지탱할 수가 없어 SOS의 뜻으로 외친 것뿐이지만, 그는 특유의 굳은 얼굴을 하고서 아예 재광을 안아 들었었다.
당장 오늘 아침에도 다르지 않았다.
- 팀장님….
절정에 가까워진 재광이 신음처럼 중얼거리며 어깨에 기대자 의주의 팔에 힘줄이 바짝 돋았다. 힘이 들어간 만큼 손짓에 가속이 붙은 건 당연한 일이었고.
거기까지 되돌아보고 나면 결론은 달라진다. 의주는 재광이 자신의 이름을, 혹은 여태까지와 다른 표현으로 불렀기 때문에 돌연 흥분한 게 아닌 거다.
그보다는 한창 열이 오른 상태에서 재광이 그를 호명했단 사실 자체가 영향을 끼쳤다고 보는 게 더 설득력 있었다.
“하….”
제법 명쾌하게 답을 내린 재광은 헛숨을 내뱉었다. 하릴없이 얼굴을 쓸어내리는 손길에서는 묵은 피로가 고스란히 묻어나왔다. 그러면서도 뺨을 마구잡이로 문지를 즈음에는 입매가 뚜렷이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부르는 소리가 뭐 그렇게 야해서 불쑥 흥분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히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오히려 좋았다. 별거 아닌 부름에 즉각적으로 반응할 만큼 의주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뜻이지 않던가. 고작해야 1초 흘러나오는 목소리에도 눈이 뒤집힌다니.
이만하면 어디 가서 세기의 사랑을 한다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뭐라고 부르든 착실히 반응하는 의주 덕에 응어리처럼 남았던 호칭 고민이 말끔히 지워지는 건 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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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많이 늦겠네요?”
재광의 예상은 빗나갔다. 저녁이 되면 여느 때와 다름없이 퇴근은 했냐, 저녁은 먹었냐 얘기하다가 짬을 내 만날 줄 알았건만 오늘은 예외였던 거다.
― 응. 오픈하자마자 트래픽 엄청 몰리네. 데이팅은 터졌어, 지금.
오후에 오픈한 낭만인의 이벤트 때문이었다.
나이팅이 론칭 이후 줄곧 선전하면서 데이팅 또한 재조명을 받았다. 론칭 초반에 재광이 전해 듣기로는 시리즈 앱이니 당연히 반짝 관심이 쏠릴 수 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고 했다. 그렇기에 들뜨지 않고 조용히 넘어가기로 했다고.
하지만 예상 밖에도 인기는 지속됐고, 낭만인에서도 급히 노를 저으며 두 앱을 아우르는 이벤트를 기획했다. 그 이벤트의 오픈 일자가 바로 오늘 오후였다.
회사 건물을 나서던 재광은 귀에 댄 휴대전화를 고쳐 잡으며 대꾸했다.
“정신없겠네. 끊을 테니까 얼른 일해요.”
― 응, 조심히 들어가고. 이따 연락할게.
휴대전화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하고 여유롭지만 정신없는 상황만은 고스란히 전달되는 느낌이었다. 그렇기에 재광도 더는 시간을 뺏지 않으려 했는데….
“네, 너무 무리하지 말고….”
막상 통화를 마무리 지으려다 말고 말끝이 잦아든다. 잠시간 침묵하던 그는 불쑥 물었다.
“근데 팀장님 저녁은요? 먹었어요?”
지극히 한국인스러운 질문이었다. 지나가다 마주친 사람에게도 밥은 먹었냐고 묻는 게 기본 인사인 마당에 애인의 끼니 상황이 궁금하지 않을 리가.
― 아까 다 같이 피자 시켜 먹었더니 아직은 생각 없네.
“아 그래요?”
― 왜? 뭐 사다 주기라도 하게? 그러면 생각 있어. 완전 있어.
와중에 의주는 또 눈치가 얼마나 좋은지 몰랐다. 매일같이 오가는 얘기건만 고 짧은 새 속내를 넘겨짚고 득달같이 말을 바꾼다.
마냥 자신의 바람을 읊어댔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재광도 정말 그럴 마음이 있어 물은 게 맞았으니까.
일종의 보답 같은 거였다. 재광이 저녁도 거르고 일을 할 때면 의주는 늦은 시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거한 상을 차려주곤 하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저도 제 방식대로 한번은 갚아주고 싶었다.
그러나 본론을 꺼내기도 전에 들켜버리고 말자 괜히 멋쩍은 기분이 된다. 재광은 “아니 그냥 뭐…” 하며 얼버무리다가 황급히 말을 마쳤다.
“봐서요.”
풀어 얘기하자면 ‘그럴 생각은 있는데 아직 확실하게 결정을 내리진 못 했다’는 뜻이었다. 퍽 애매한 대답에 전화 너머의 의주가 웃는다.
― 기다릴게, 자기야.
목소리만 들리는 게 전부인데도 꼭 눈앞에 윙크를 날리는 의주의 표정이 다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 반응에 재광이 헛웃음을 쳤으나 상대방에게도 전달되었는지는 의문이었다. 휴대전화에 대고 뽀뽀라도 했는지 쪽, 하는 소리가 들린 뒤 곧장 전화가 끊겨버리고 만다.
이렇게 된 이상 요깃거리를 사 들고 찾아갈 의사가 없었다고 해도 그냥 넘어가긴 어렵게 됐다.
하여간 원하는 대로 상황을 몰아가는 재주는 탁월하다고. 속으로만 중얼거린 재광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사무실에 몇 명이나 있어요?오후 8:31
통화를 마치고 한 시간은 족히 지난 다음에야 메시지를 보낸 건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속내를 간파당했단 사실을 순순히 인정하고 싶지 않아 일부러 느지막이 연락을 한 것이다.
뭐, 오후에 피자를 먹었다 하니 이쯤은 돼야 허기가 질 것도 같았고.
여의주 팀장님
올 거야?
지금은 여덟쯤 있는데 셋은 30분 안으로 간대. 오후 8:32
의주의 답장은 빨랐다. 이미 집에 도착해 식사까지 마치고서도 여전히 외출복 차림이던 재광은 그제야 슬슬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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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광은 익숙한 오피스 단지 앞에 섰다. 양손에는 물고기가 그려진 파란 쇼핑백을 들고서였다. 그 안에는 이전에 전하지 못한 초밥 세트가 들어 있었다.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기까지의 과정은 일사천리였다. 눈에 익은 현판 앞에 선 재광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호출벨을 눌렀다.
배짱 좋게 지문 인식을 했다가 걸린 게 벌써 몇 달 전 일이었다. 지금은 자신의 지문이 지워졌는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들도 있는 상황에서는 이 방법이 훨씬 자연스러워 보일 것 같았다.
― 누구세요?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낯설었다. 그 때문에 잠시 멈칫거리는 사이, “엥?” 하는 의문스러운 소리가 따라붙는다. 재광은 황급히 “아, 저…” 하며 말문을 열었다.
“여의주 팀장님 찾아왔는데요.”
― 잠시만요.
대답이 들린 다음의 반응은 빨랐다. 불투명 처리된 유리문 너머로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곧 안에서 누가 문을 열고 나온다.
목소리만큼이나 낯선 얼굴이었다. 키는 재광과 비슷하고, 알이 두꺼운 안경을 쓴 남자다. 그는 어설프게 목을 까딱여 인사 비스무리한 것을 건넸다. 그러고는 이쪽을 흘끔대며 입을 연다.
“혹시 팀장님 동생이세요?”
“네? 아뇨.”
조금 전에도 잔뜩 의문스러운 소리를 내더라니, 그게 몹시도 궁금했나 보다. 남자는 진심으로 후련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 다음에야 들어오라며 한 발자국 앞서 안으로 들어간다.
낭만인 사무실이라면 눈 감고도 길을 찾을 정도로 재광에게 익숙한 장소였으나 그는 순순히 뒤를 따랐다. 어쩐지 미심쩍은 눈길로 남자의 뒤통수를 주시하면서.
“어? 재광 씨! 여긴 무슨 일이에요?”
앞서가는 남자의 뒤통수에 박힌 시선을 떼어낸 이는 치원이었다. 다섯 명쯤 남을 거라더니만 그중엔 치원도 포함됐던 모양이었다. 막 회의실 앞을 지나칠 무렵 마주친 그가 반색하며 다가왔다.
“팀장님이랑 연락하다가 잠깐 들렸어요.”
“팀장님? 아, 여 팀장님이요?”
거리낌 없이 말이 오가자 문을 열어준 남자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돌아본다. 그 반응을 알아차린 치원이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재광을 소개했다.
“실제로 만나는 건 처음이죠? 재광 씨예요. 왜, 그 개발팀 첫 팀원이었던….”
“아…. 아! 어쩐지 닮았더라.”
재광의 회사에서 의주의 업적이 아직도 전설처럼 내려오듯 낭만인에서도 꼭 닮은 두 사람의 인연이 구전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간 전해 듣던 이야기를 뒤늦게 떠올렸는지 남자가 깨달음을 얻은 안색으로 고개를 크게 끄덕거린다.
“재광 씨, 이쪽은 현직 개발팀 사원이요.”
치원이 상대방을 소개할 때는 재광의 눈빛도 한결 진해졌다. 말로만 듣던 ‘의주와 죽이 잘 맞는다는’ 인턴(현 사원)을 실제로 보기는 처음이라 눈길에 묘한 경계가 서렸다.
“참, 여 팀장님 만나러 왔다고 했죠? 자리에 계세요.”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한 치원은 여전히 해맑았다. 재광은 가벼운 미소로 화답하고 잠시 멈췄던 걸음을 계속했다. 재광이 사무실 구조에 익숙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원도 이번에는 굳이 안내하려 들지 않았다.
치원의 말대로 의주는 자신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상당히 집중한 모습이었다. 가볍게 미간을 좁히고서 모니터를 들여다보느라 가까이 다가선 재광의 기척도 느끼질 못했다.
“…팀장님.”
재광이 넌지시 부르고서야 휙, 고개가 돌아온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화면을 노려보던 인상이 순식간에 환히 폈다.
“왔어?”
짤막하게 건네는 말에도 반색이 완연했다. 누가 보면 당장 아침까지 함께 있어놓고 유난이라 하겠지만, 그래서 더 도움이 됐다. 오랜만에 만나는 직장 동료로 보이기 충분한 반응이었던 것이다.
물론, 반기는 척 팔을 뻗어 슬쩍 손을 잡고 떨어진 것만 빼면.
그래도 아주 잠깐이었다. 닿는 온기가 아니었다면 당사자도 몰랐을 테다. 그만큼 재빠른 행동이었기에 재광도 펄쩍 뛰거나 정색하며 물러서지는 않았다. 오히려 아무 일 없었다는 양 태연하게 말을 건넸다.
“일 많은 거 같은데, 잠깐 먹을 시간은 돼요? 초밥 사왔는데.”
“여의주 님이 그럴 시간도 없을까 봐? 돼, 당연히 돼.”
앉은 자리에서 재광을 올려다보던 의주는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허공에 대고 “시간 괜찮은 분들은 먹고 합시다” 하는 목소리가 우렁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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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주를 포함해 다섯 명 남은 직원들이 회의실에 모여 앉았다. 재광이 이미 마주친 세 사람과 마케팅 팀장, 그리고 새로 구인한 경력직 개발자였다.
의주는 금의환향한 자식을 둔 아버지처럼 대대적으로 재광을 소개했다. 졸지에 주인공이 된 재광이 멋쩍게 인사를 건네고 나서야 본격적인 야식 타임이 시작됐다.
“재광 씨는 안 먹어요?”
불쑥 튀어나온 목소리의 주인공은 마케팅 팀장이었다. 이미 재광과 안면이 있는 그는 제법 편한 말투로 말을 걸었다. 의주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재광도 무던한 목소리로 답했다.
“네, 괜찮아요.”
“그래도 맛이라도 보지 그래요.”
혼자 멀뚱히 앉아 있는 모습이 못내 걸려 말을 붙이는 모양새였다. 정작 별생각이 없던 재광은 괜찮다며 확고한 의사를 밝히려 했으나 의주가 한발 빨랐다.
“먹을래?”
막 집어 든 초밥 하나를 재광의 입가에 가져다 대는 것이다. 의도적으로 돌아보지 않은 재광은 테이블 아래로 의주의 발목 즈음을 툭 걷어찼다. 그러면서 슬며시 짓는 미소가 퍽 상냥했다.
“괜찮아요. 저녁 먹은 지 얼마 안 돼서요.”
“그래요?”
“이거만 드리고 가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까 이렇게 됐어요. 저 신경 쓰지 말고 드세요.”
그제야 마케팅 팀장이 어정쩡하게 들고 있던 젓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 분 엄청 닮았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었는데 사이도 되게 좋으셨나 봐요. 퇴사했는데 이렇게 야식까지 챙겨주러 오는 거 보면.”
잠깐의 정적 끝에 말을 얹은 이는 새로운 개발자였다.
회의실에서 재광을 마주한 순간부터 계속 흘끔거리던 그는 아직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안색이었다. 그러면서도 건네는 목소리만은 정중한 사회인의 그것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능청을 떨던 재광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누구 덕에 뻔뻔함이 많이 늘긴 했으나 아직 멀었지 싶었다. 두 사람 사이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자 지레 찔리는 마음이 되고 마는 거다.
그래서 “아, 예, 뭐…” 하며 적절한 답을 찾을 시간을 버는데, 복스럽게 초밥을 흡입하던 치원이 대신 대꾸했다.
“좋기만 했게요? 재광 씨 송별회 때 여 팀장님이 가지 말고 계속 같이 일하자고 껴안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둘 사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시에는 애꿎은 마케팅 팀장이 사레가 들렸다. 정작 흑역사의 주인공인 의주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떳떳한 모습이었다.
“제가 많이 좋아하죠.”
보이기에만 그랬을까. 내뱉는 말 또한 누가 들으면 명망 높은 게이의 다큐멘터리 속 인터뷰인 줄로 착각할 법한 언사다.
쓸데없이 진지한 목소리에 잔뜩 굳은 재광은 뻣뻣하게 곁을 돌아봤다. 순간 눈이 마주친 의주가 생긋 웃는다.
물론 여기서 이 모든 행동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사람은 없었다. 마케팅 팀장이 조금 찜찜한 안색이기는 했으나 그 또한 ‘저 미친놈’ 하고 마는 눈치였다. 의주도 그 사실을 알기에 더 대범하게 구는 거기도 했고.
“재광 씨 그거 알아요? 재광 씨 그만둔 다음에 여 팀장님이 보고 싶다고 혼잣말하시고 그랬어요.”
치원은 오랜만에 보는 그림이 재밌는지 한술 더 떴다. 이번에도 역시나 의주는 쉽게 수긍했다.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자신의 순정이 그리도 지고지순하다고 말하듯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거린다.
덕분에 재광만 난감하게 됐다. 빠르게 다른 사람들의 표정을 살핀 그는 인위적인 미소를 띠며 수습에 나섰다.
“그거야… 저 나가고 한동안 혼자 일하셨으니까요. 업무 분담할 사람이 없어서, 그래서 그러셨겠죠.”
자연스러운 말투였으나 그렇게 얘기하는 재광의 이마에서는 금방이라도 식은땀이 흐를 것만 같았다.
그래도 다행히 잘 먹히는 분위기였다. 혼자 업무를 다 감당하려면 전 팀원이 그리울 수밖에 없을 거라고 다들 수긍하는 듯싶었다.
재광은 남들 몰래 안도의 한숨을 흘려보냈다. 적극적으로 해명하던 그가 입을 다물자 잠시 정적이 찾아든다. 그러는 사이 누군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래도 이제 저 있잖아요, 팀장님.”
아까 사무실 문을 열어주었던 사원이다. 그는 어깨를 곧게 펴고 자신의 가슴을 주먹으로 탕탕 치며 의기양양한 태도로 말했다.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시선을 옮긴 재광은 꽤 유심히 남자를 살폈다.
“너 뭐.”
답지 않게 집요한 눈길을 보내는 재광과 달리 의주는 심드렁한 태도였다. 감수성이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라면 얼마든지 실망하고 상처받을 수 있을 만큼 무뚝뚝한 말투다.
그러나 당사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조금은 거만하다 싶을 정도로 턱을 치켜들고 한껏 자신감 가득한 표정을 짓는다.
“일 욕심 많고 능력도 뛰어난 부하 직원이 와서 팀장님 업무 많이 줄여드렸잖아요.”
“윤 대리 얘기하는 거야? 그건 맞지. 윤 대리, 내가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의주는 새파란 말단의 거드름을 대번에 부정했다. 경력직 개발자로 주어를 바꿔버리고 만다.
졸지에 두 사람의 대화에 소환당한 대리는 어색하게 웃으며 상황을 모면하려 했으나 사원도 만만치 않았다. 치원이 재광에게 말했듯 자기애 강하고 일 욕심 많은 성격이 의주와 닮았다는 그는 다시금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에이, 팀장님 또 그러신다.”
그 모습까지도 놓치지 않고 바라보던 재광의 눈에 순간 이채가 돌았다.
“팀장님, 언제까지 이러실 거예요. 저 솔직히 일 잘하는 건 맞잖아요. 이제 그만 인정하세요.”
“일 잘해서 이벤트 데이터 다 날려먹을 뻔했냐?”
“아니 그거는 인간미죠, 팀장님. 실수도 하고 그런 거지, 사람이. 거 참 팍팍하시네.”
“야 너는 경력에 비해 잘 하는 건 맞는데, 네 실력보다 자랑을 많이 해. 잘난 척도 팩트로만 해야 되는 거라고. 오케이?”
티격태격하면서도 그래서 더 죽이 잘 맞아 보인다는 치원의 감상이 틀린 말은 아니지 싶었다.
의주가 틱틱거리기는 하지만 상대방도 그걸 불쾌하게 여기지 않고 받아쳐 대화가 물 흐르듯 이어진다. 격의 없이 오가는 말투라 그런지 두 사람은 확연히 친해 보였다.
그 때문에 서운하거나 속이 상하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새 팀원을 대하는 의주의 태도는 자신에게 하던 것과 완전히 달랐으니까.
의주는 재광에게 늘 실없이 구는 편이었지, 한 번도 딱딱하거나 무뚝뚝한 모습을 보인 적은 없었다. 오히려 능구렁이처럼 다정으로 사람을 홀려 거부할 수 없게 만들어 얄미운 쪽에 가까웠다.
즉, 의주에게 재광과 새 팀원이 갖는 의미가 뚜렷이 다르다는 뜻이다.
그 사실을 몸소 느끼면서도 재광은 찝찝함을 다 떨쳐내지 못했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복잡하지 않던가. 저와는 전혀 다른 감정으로 상대방을 대한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의 자리를 대신한 이와 의주가 잘 지내는 광경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아니, 정확히는….
“팀장님 진짜 두고 봐요. 내가 팀장님한테 인정받고 만다.”
그래. 저거 때문이다. 팀장님 소리.
팀장과 사원 치고 유난히 친해 보이는 관계는 자신이 훨씬 긴밀하단 사실을 상기하면 흐린 눈을 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의주에게 각기 다른 의미를 지닌 사이건만 그를 똑같은 표현으로 부르고 있다는 게 못내 맘에 걸렸다.
실로 유치한 감정이었다. 묘하게 거슬리는 저 사원과 차별화가 되고 싶은 거다.
자신이 뭐라고 불러도 착실히 반응하는 의주이니 호칭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라고 결론 내린 게 몇 시간 전이건만, 간사하게도 금세 맘이 바뀌고 만다. 그것도 아주 격하게.
“광아.”
“….”
“광, 눈 뜨고 자?”
한순간 치솟은 치기를 감내하느라 제대로 정신이 팔린 참이었다. 문득 들리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리자 의주가 가만히 재광의 어깨를 짚는다.
“이제 일어나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피곤해?”
“아… 아, 다 드셨어요?”
재광은 멍한 기운이 남은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어느새 포장 용기를 다 비운 직원들이 각자의 자리를 치우는 중이다. 뒤늦은 재광의 반응에는 저마다 잘 먹었다는 말을 한마디씩 건넸다.
그에 재광은 미미한 미소로 답했다. 그러고 나자 의주의 손이 본격적으로 그의 어깨를 감싼다.
“마무리 부탁해요. 저는 재광이 요 앞까지만 바래다주고 올게요.”
이번에는 잘 가라는 인사가 줄줄이 이어졌다. 재광도 이만 가보겠다며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그런 뒤 먼저 회의실을 나서려는데, 잠깐 사이 익숙해진 음성이 걸음을 주춤하게 만든다.
“팀장님, 저 하던 거 봐주셔야 돼요.”
개발팀 사원이었다. 사심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오히려 야망만이 가득한 말투건만 재차 반복되는 ‘팀장님’ 소리에 재광이 눈에 띄게 멈칫거렸다.
“어. 금방 와.”
그러나 잠시뿐이었다. 의주가 가볍게 대꾸할 즈음에는 언제 움찔거렸냐는 듯 태연한 안색으로 도로 발을 뗐다.
????
사무실을 나선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엘리베이터가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돌렸다. 시간이 늦어 그런지 지하 주차장부터 7층까지 단숨에 올라온다.
내려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막힘없이 움직이는 엘리베이터 안, 의주는 계속해서 싱글벙글이었다.
이 시간에 재광이 자신을 챙겨주러 왔단 사실이 퍽 만족스러운 듯 보였다. 비록 반쯤은 엎드려 절한 셈이라도 말이다. 재광의 등을 가로지른 팔 끝에서 손가락이 유연하게 움직이며 어깨뼈를 가볍게 두드렸다.
“….”
잔뜩 신이 난 의주와 달리 재광은 정적이었다. 원래도 의주에 비해 조용한 성격이기는 하다만, 그 점을 고려해도 유독 말이 없었다.
이유야 간단했다. 자리를 뜨는 순간까지도 ‘팀장님’이라 부르던 사원의 목소리가 자꾸만 머릿속에 맴도는 탓이다. 원래도 조금씩 신경이 쓰이던 상대라 그런지 직접 만나고 나자 여파가 꽤 컸다.
그러나 머리는 맘처럼 비상하게 굴러가지 않았다. 제 빈자리를 채운 사원과 똑같은 호칭을 사용한다는 건 내키지 않는데, 그래서 의주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는 거다.
재광은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의주만 흘끔흘끔 훔쳐봤다.
“광아, 너 나 몰래 사고 쳤어?”
그게 꼭 찔리는 바가 있어 눈치를 살피는 모습으로 보인 모양이었다. 1층에 막 도착할 무렵, 의주가 그렇게 말한다. 감싼 어깨를 제 쪽으로 더 끌어당기면서.
“사고는 무슨 사고예요.”
재광은 언제나와 같이 덤덤한 목소리로 대꾸했으나 눈동자만은 분주했다. 의주를 돌아보려다가 그냥 정면을 보고, 저도 모르게 바닥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가 도로 들어 올리느라 그랬다.
부산스러운 눈길만큼 머릿속도 얼마나 복잡한지 몰랐다. 대뜸 자기, 여보 해대기에는 입에 붙질 않고 그보다 편하게 부를 수 있는 표현은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는다.
그래서 또 혼자만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려던 차였다.
“데려다주고 싶은데 시간이 없네. 조심히 들어가고, 도착하면 연락해.”
그 사이에 택시를 잡은 의주가 재광의 옷매무새를 매만져주며 그런다.
황급히 정신을 차린 재광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차 뒷문을 열고 올라탔다. 그래도 인사만은 태연히 잘 건네는가 싶더니만.
“들어가 봐요. 일 마무리 잘하고, 이따 연락할게요….”
이마저도 말꼬리가 잔뜩 늘어나고 말았다. 급격히 줄어드는 목소리에는 의주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반쯤 닫힌 문을 잡고 갈등하던 재광은 곧 작은 성량으로 덧붙였다.
“…형.”
그런 뒤에야 어정쩡하게 열려 있던 뒷문이 속 시원히 닫힌다. 택시가 기다렸다는 듯 출발했다.
뒷좌석에 앉은 재광은 고개를 푹 수그렸다. 스물일곱 해를 살면서 만 번도 넘게 불렀을 ‘형’이란 말이 이렇게나 쑥스럽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그래도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내지른 보람이 있었다. 신호에 걸린 틈을 타 문득 뒤를 돌아보자 유리 너머로 의주의 모습이 보인 탓이다.
고개를 한껏 뒤로 젖힌 그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제자리를 빙빙 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