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 ; (Semicolon) (13/21)

13. ; (Semicolon)

의주가 벌인 일의 여파는 꽤 오래갔다.

어느 인플루언서가 제품 인증샷을 올리며 해시태그를 사용한 게 시작이었다. 이후로 유행처럼 구매 인증이 시작되더니, 몇몇 쇼핑몰에서는 아예 패러디한 제품명을 사용하기까지 했다.

일종의 밈이었다. 처음에만 해도 조롱하듯 우스갯거리로 소비하는 분위기였으나 지금은 달랐다. 오히려 대기업의 고고한 이미지에 친근함이 더해진 느낌이라고나 할까.

회사에서도 그 흐름을 모를 리 없었다. 그래서인지 이번 사태를 확실하게 안고 갈 심산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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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SNS에 막 올라온 게시물을 보면 말이다.

재광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이벤트 내용을 훑어봤다.

다시 한번 드는 생각이지만, 정말이지 여의주는 대단한 인간이 아닐 수 없었다. 제 애인 속 썩이는 담당자 한 방 먹이려고 대충 지은 제품명이잖은가. 그게 이토록 유행을 할 줄 누가 알았을까.

차라리 유행만 했더라면 천운이라 치고 넘어가기나 하지. 와중에 의주는 목표까지 이뤄냈다.

일단 재광의 손에서 골치 아픈 업무를 떼어냈고, 모든 일의 원흉인 담당자는 석 달 감봉 처분을 받았다. 소문으로는 익명의 제보자가 이전부터 이어져온 고의적 업무 불응을 고발했다는 것도 같았다.

물론 재광에게도 시말서라는 불똥이 튀긴 했으나 이만하면 제대로 멕인 셈이었다.

“….”

회사 SNS 계정을 들여다보던 재광은 설렁설렁 고개를 저으며 인터넷 창을 껐다. 이제 딴짓은 그만하고 일에 집중할 생각이었다.

그 순간, 타이밍도 좋게 메신저 알림이 울린다.

여의주 팀장님

야 광 아직도 다운 안 받았어? 오후 1:10

재광의 얼굴에 아차 하는 기색이 감돌았다. 오전부터 회의다 뭐다 유달리 정신이 없어 잊고 있었던 탓이다.

오늘은 낭만인의 새 앱, ‘나이팅’의 론칭일이었다.

정확히 짚고 넘어가자면 출시 자체를 잊은 건 아니었다. 오전에 회의를 마치고 나와 가장 먼저 한 일이 앱 다운로드였으니까.

다만 여기저기서 재광을 불러대는 통에 실행해볼 여유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점심때나 확인해봐야겠다고 미룬 게 지금까지 와버리고 만 거다.

죄송해요. 다운은 받았는데 켜보질 못했어요. 지금 함ㅇㅇ 오후 1:11

답장을 보낸 재광은 곧바로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나이팅 앱에 접속하는 손놀림이 잽쌌다.

회원 가입을 하는 속도 또한 빨랐다. 데이팅의 시리즈 앱인 만큼 기본 포맷이 비슷해 딱히 어려울 게 없었다. 숙박이나 음주 서비스가 포함돼 성인 인증 단계만 늘어난 정도였다. 그는 익숙하게 인증을 하고 회원가입을 마쳤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앱 내의 알림이 뜬다. 재광은 기어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지금

여의주 님께서 커플 계정 연동을 신청하셨습니다.

내내 회원 정보를 들여다보기라도 한 건가 했는데. 이걸 하고 싶어서 재광의 연락처를 계속 입력해본 모양이었다.

YES or NO. 재광은 팝업으로 뜬 선택지를 가만히 훑어봤다. 여기서 NO를 누르면 의주가 어떤 반응일는지 내심 궁금하지만… 결국에는 순순히 YES 버튼을 눌렀다.

본의는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 충분히 애를 태웠지 않나. 여기서 한 번 더 튕겼다가는 당장 전화기에 불이 날 터였다.

연이어 울리는 알림은 그 예상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커플 계정으로 연동되자마자 예약 내역이 좌라락 뜨는 거다.

의주가 이걸 하고 싶어 얼마나 근질근질했을지는 가늠도 안 됐다. 식당이며 펍, 심지어 호텔까지 예약되는 사이에는 조금의 공백도 없었다.

“하….”

화면을 들여다보던 재광은 한숨처럼 웃었다. 휴대전화를 쥐지 않은 손으로는 괜히 목덜미를 주물렀다.

커플 간 예약 내역 공유는 데이팅에서부터 있던 기능이었다. 그렇기에 재광도 알았다. 커플로 연동된 계정이라 하더라도 설정에 따라 예약 내역을 공유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원하는 유저들의 의견을 반영한 서비스라 했다. 하지만 지금 의주는 보란 듯이 예약을 체결하고 있었다.

즉, 미리 논의는 안 했지만 오늘 데이트를 할 테니 무조건 시간을 맞추라고 압박하는 중인 거다.

“…참 나.”

실없는 소리를 흘리면서도 재광의 입꼬리는 빙긋 호선을 그렸다. 머릿속은 남은 업무를 정리해보느라 복작거렸다.

다행히 의주에게 두 번 미안할 일은 없지 싶었다. 비록 내일의 제가 조금 더 바빠질 테지만, 그래도 적당한 선에서 조율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물론, 그렇게 조율을 하려면 지금부터 부지런히 일을 해야 했고.

여태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던 재광은 황급히 기기를 내려놓고 모니터를 응시했다.

????

재광은 무난히 칼퇴근에 성공했다. 오히려 신나게 데이트 계획을 세운 의주의 퇴근이 늦어지는 중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짜증이 나거나 아쉽지는 않았다.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한 재광은 백화점에 들렀다가 오는 길이었다.

늘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일을 즐기는 의주지만 론칭 때문에 고생이 많았던 건 재광도 잘 알지 않던가. 그래도 나름 연인인데, 그냥 넘어갈 수 없어 선물을 사온 참이었다.

“아….”

그런데, 신경 써 고른 선물이 너무 튄다.

깜짝 이벤트를 해줄 요량까지는 아니었지만 본래 선물이라는 게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받는 기쁨도 있는 건데.

샛노란 손잡이가 달린 초록색 쇼핑백은 100m 밖에서 봐도 눈에 띄었다. 당장 건너편 건물에서 의주가 튀어나와 ‘그거 내 거야?’ 하고 묻는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그렇다고 큰맘 먹고 거금 들여 산 명품을 가방에 구겨 넣을 수도 없었다. 재광은 하는 수 없이 잔뜩 튀는 색감의 쇼핑백을 달랑달랑 들고만 있었다.

“그거 내 거야?”

아니나 다를까 들뜬 목소리가 재광을 맞는다. 진짜로 건물에서 튀어나온 건 아니고, 주차장에서 빠져나온 차가 재광이 있는 인도 앞에 멈춰 선 다음이었다.

반쯤 내린 창문 너머로는 유독 신이 난 얼굴이 보였다. 재광은 이렇다 할 대꾸 없이 조수석에 올라탔다.

“자요.”

이렇게 된 이상 ‘다른 사람 줄 거다’ 혹은 ‘내 거다’ 하며 괜히 약을 올릴 필요는 없었다. 재광은 어떤 서론도 없이 대뜸 쇼핑백부터 내밀었다.

“뭐야, 진짜야?”

의주는 퍽 감동 받은 표정이었으나 재광은 보지 못했다. 쇼핑백이 의주의 손에 넘어간 순간부터 관심을 끄고 안전벨트나 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클립을 채운 뒤에야 운전석을 돌아봤다.

“와, 어떻게 이런 귀여운 생각을 다 했어.”

부산스럽다 했더니만 의주는 벌써 상자를 열어보는 중이었다. 개나리색 더스트백을 꺼내 안을 들여다본 얼굴이 환해진다.

안에 들어 있는 물건은 벨트였다. 더스트백 안으로 동그랗게 말린 형태를 확인한 의주는 도로 상자를 닫았다.

“광아, 선물이 너무 야해.”

돌아오는 반응에는 재광이 엥, 하는 표정을 지었다. 손 떨리는 금액을 제외하고는 꽤 무난한 선물이 아닌가 싶은데. 도대체 어딜 보고 야하다는 건지를 모르겠는 거다.

그런 속내를 정확히 읽은 의주는 생긋 웃었다. 팔을 뻗어 재광의 뺨을 가볍게 문지르는 손길이 자연스러웠다.

“너무 맘에 들어. 잘 쓸게, 고마워.”

장난기를 지우고 인사를 건네자 이건 또 이거대로 어색했다. 괜히 귀 끝을 붉힌 재광은 “잘 쓰든가요” 하고 웅얼거렸다.

“앱은 써 봤어?”

부끄럼 많은 애인을 잘 아는 의주는 부러 화제를 돌렸다. 그러자 우물대던 재광의 발음이 금세 또렷해진다.

“아까 시간 좀 남아서 봤을 때는 괜찮던데요? 데이팅이랑 UI가 비슷해서 쓰기는 편한데, 업체는 다르니까 차별화도 잘 된 거 같아요.”

“와, 우리 햇병아리 제법 컸네. 그런 평가도 할 줄 알고.”

의주는 론칭 전부터 자신감이 넘쳤던 게 사실이나 막상 가까운 이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들으니 좋은 모양이었다. 제법이라며 거들먹거리면서도 입매가 시원스레 호선을 그렸다.

“반응은 어때요? 괜찮아요?”

“당연하지. 기존 회원 전환도 빠르고.”

잠자코 듣던 재광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추임새처럼 “잘 됐네요” 하고 대꾸할 때는 의주가 곧장 말을 붙였다.

“대체로 다 반응 좋은데, 특히 숙박 예약이 불나더라.”

“그래요?”

“맞다. 광, 거기 알지.”

“어디요?”

“왜, 우리 저번에 출장 갔던 모텔.”

출장 갔던 모텔. 그 이상의 설명은 필요치 않았다. 업체명은 정확히 모를지라도 그곳에 대한 기억만은 아직 선명했으니까.

객실 전면이 거울로 둘러싸인 방에서 섹스 파트너와 함께 일을 하고, 제대로 뒹굴기까지 한 장소를 쉽게 잊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적나라하게 들여다보이는 행위를 마주할 때의 수치심 또한.

“아… 네.”

그 탓에 어정쩡한 대꾸가 튀어나왔다. 의주는 전혀 개의치 않는 목소리로 답했다.

“거기 지금 난리 났어. 그 거울룸 이번 달 예약 다 찼다니까?”

“진짜요?”

“지금도 불나고 있을걸? 딱 석 달 있었으면서 큰일 하고 갔다, 너.”

“큰일은 무슨….”

재광은 민망한 기색을 드러내며 목덜미를 문질렀다.

진심으로 민망했다. 출장이랍시고 가서 결국엔 섹스만 진득하게 하다 오지 않았나. 그런데 그걸 공으로 추켜세워주니 몸 둘 바를 모르게 된다.

그러나 의주는 당당했다. 재광의 말끝이 잦아들기 무섭게 끼어들어 정당한 공이라는 사실을 토로한다.

“그때 우리가 가줬으니까 거기 잡을 수 있었던 거야. 민선호 성격에 확인도 안 하고 덜컥 계약 못 하지.”

“그런가.”

“그러지. 우리가 좀 꼼꼼하게 보고 왔어? 딴 사람이 갔으면 그렇게까지 못 살펴봤을걸. 내가 사진도 예술로 찍어 왔다고.”

하여간 사람 홀리는 말발은 알아줘야 한다. 순간 혹한 재광은 얼떨떨하게 눈만 끔뻑거리다가 끝내 고개를 끄덕거렸다. 곁눈으로 반응을 살핀 의주가 씨익 웃더니 슬그머니 손을 뻗었다.

“오늘은 거기보다 더 좋은 데 가자, 자기야.”

재광의 허벅지 위로 턱하니 올라온 손이 슬그머니 안쪽으로 미끄러진다. 은밀한 손길을 알아차린 재광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밀어내지는 않았다. 대신 더 깊숙하게 들어오기 전에 나쁜 손을 맞잡았다. 그마저도 운전에 집중하라는 뜻으로 금방 놓아주고 말았지만 의주는 그 정도만으로도 만족한 듯싶었다.

앞 유리 너머로 신호를 확인하는 얼굴에 슬며시 미소가 번졌다.

????

한바탕 칼질로 배를 채우고서 막 펍으로 자리를 옮긴 타이밍이었다. 재광이 조심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근데, 이렇게 여유 부리고 있어도 되는 거예요?”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 탓이다. 오랜 시간 공들인 앱이 드디어 출시된 건 축하할 만한 일이나 론칭이 끝은 아니잖은가.

언뜻 듣기로는 반응도 좋다는데, 그렇다면 불시에 튀어나올 오류나 서버 문제들을 대비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데이트 중에 이런 얘기는 미안하지만 재광 딴에도 많이 참다 꺼낸 말이었다. 괜히 제가 다 불안해 식사 때부터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모른다.

그래도 밥 먹는 사람한테 일하라고 채찍질을 할 순 없어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한때 같은 일에 몸 았던 사람으로서 끝내 참지 못했다.

“광아.”

의주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러나 대답은 바로 나오지 못했다. 불쑥 나타난 가게 직원 때문이다. 재광의 앞에 생맥주를, 의주 앞에 논 알콜 칵테일을 놓아준 직원이 돌아간 뒤에야 대답이 이어졌다.

“나 여의주야.”

그럼 그렇지. 잠시 끼어든 공백이 민망할 만큼 허무한 대꾸가 튀어나온다. 그에 재광이 실소를 흘리려는데, 반응을 미리 내다보기라도 한 듯 의주가 타이밍을 가로챘다.

“론칭 직후부터 반응이 심상치가 않았잖아. 느낌이 빡 와서 만반의 준비를 다 해놓고 왔지. 그러느라 늦은 거기도 하고.”

근거 있는 자신감을 보인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더니 곧 테이블 위로 상체를 깊게 기울인다. 대단한 기밀이라도 터놓을 듯한 행동에 재광이 덩달아 테이블 가까이로 다가갔다.

“그리고 이건 업계 기밀인데….”

“….”

“서버는 사람이 없어야 터져. 내가 열 시까지 그거만 쳐다보다가 퇴근하지? 그럼 열 시 일 분에 터진다고.”

재광은 이번에야말로 실소를 터뜨렸다.

의주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인다고 생각해서는 아니었다. 서버는 잠든 사이에 터진다는 이야기가 업계에서 통용된다는 사실은 재광도 잘 알았다.

다만 우스갯소리를 엄청난 비밀처럼 꺼내는 의주의 태도가 어이없어 웃어버린 것뿐이었다. 따라 웃은 의주는 불쑥 손을 올려 재광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아, 좀….”

재광이 불에 덴 듯 떨어져 나가는 건 예견된 일이었다. 의주는 하나도 아쉽지 않은 표정으로 순순히 손을 거뒀다.

“밖에서 이러지 말라니까요.”

잔뜩 소리를 낮춰 당부하는 재광을 보면서도 동요하는 기색이 하나 없었다. 오히려 의주는 곧게 편 검지를 좌우로 느슨하게 흔들어 보였다.

“광아, 자연스럽게 행동하면 다 된다니까?”

“예?”

“잘 보잖아? 그럼 그냥 여자 좋아하고 그런 놈들이 딱 달라붙어서 다니고 머리 쓰다듬고 다 해. 그런 거 보면서 누가 의심해? 안 해. 그냥 유별나게 친한가 보다 하지.”

그러니 무슨 짓을 해도 그러려니 굴면 의심 살 일이 없다는 뜻일 터였다. 재광도 그 말이 완전 틀렸다고는 생각 안 하지만….

‘아닌데. 사귀는 사이라서 유별난 거던데.’

머릿속에 도원과 연우가 떠오르면서부터는 공감할 수 없게 됐다.

하지만 그마저도 오래가는 견해는 아니었다. 한 바퀴 더 꼬아 생각하면, 당장 자신도 사귀느라 유별났던 두 사람을 그저 친구로만 봐왔지 않던가. 심지어 세상만사에 기민하게 구는 민주도 그 둘 사이를 의심한 적 없었다.

그렇다고 치면 행동의 주체가 자연스레 굴었을 때 주변의 시선도 덩달아 안일해지는 게 맞는지도 몰랐다. 물론, 사고와 행동은 별개의 일이고.

아직 재광에게는 남들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능력치가 모자랐다.

“아, 그래도 좀… 밖에서는 조심했으면 좋겠어요.”

그 때문에 확고히 선을 긋는데도 의주는 아쉬운 내색을 하지 않았다. 되레 흔쾌한 목소리로 “그래, 그럼” 하는 게 전부였다.

대신 그는 당장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온 지 얼마 안 된 논 알콜 칵테일은 정말 입만 대본 수준이었다. 벌떡 일어나는 행동에 놀란 재광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주를 올려다봤다.

“밖에서 조심해줄 수는 있는데, 지금은 좀 그래. 그냥 바로 호텔로 가자.”

당장 만지고 싶어 죽겠으니까 차라리 바깥 데이트를 포기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재광이 헛웃음을 쳤다.

그렇다고 버티고 앉아 있지도 않았다. 의주가 한 수 물러 줬으니 이쪽에서도 그의 의사를 받아들여 주는 게 공평하지 않나. 재광은 반도 못 마신 맥주를 그대로 남겨두고서 미련 없이 일어났다.

????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된 뒤로 이렇게나 여유로웠던 적은 아마 없지 싶었다. 늘 시간에 쫓기고 욕구에 먹혀 다급히 엉겨 붙느라 바빴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느긋하게 씻고 나온 의주는 침대에 드러누워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는 중이었고, 욕실에서는 샤워기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시원스럽게 떨어지던 물소리가 잦아들 즈음에는 의주가 자세를 고쳐 잡았다. 고집스럽게 확인하던 휴대전화까지 내려놓고서 침대 헤드에 기대앉는 거다. 재광이 촉촉하게 젖은 모습으로 나타날 때는 양팔을 넓게 벌리기도 했다.

보람 없는 행동은 아니었다. 재광은 피실 웃으면서도 고분고분 침대 위로 올라왔다. 그뿐일까, 푹신한 시트 위를 무릎으로 걸어 순순히 의주의 품으로 들어왔다.

“따끈따끈해. 기분 좋아.”

재광의 젖은 머리카락 위로는 의주의 나직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따뜻한 물로 몸을 푹 적신 뒤 가운 한 장 입고 나온 터라 온기가 그대로 전달된다. 재광도 썩 나쁜 느낌은 아닌지 품 안에서 작게 웃었다.

“그러게요. 이제 진짜 쉬는 거 같다.”

따뜻한 물에 몸을 풀고 나와서인지 흘러나오는 목소리마저 나른했다. 느릿하게 눈을 끔뻑거리는 얼굴을 내려다본 의주는 가볍게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이제는 이런 간질거리는 스킨십도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재광이 용케도 부끄러운 기색 없이 자신의 페이스대로 말을 잇는다.

“고생 많았어요. 준비하느라.”

조곤조곤 하는 말을 듣는 의주의 팔에 슬며시 힘이 들어간다. 그는 긴장감 없이 제게 기댄 재광의 턱 끝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내가 이런 걸 고생으로 여기는 사람은 아닌데….”

“….”

“네가 그렇게 얘기하니까 고생한 척하고 싶네.”

의주를 올려다보는 모양새가 된 재광은 숨처럼 웃었다.

“고생한 척은 어떻게 하는 건데요.”

“나 힘들었으니까 사랑으로 보살펴달라고?”

장난스럽게 눈썹을 들썩거린 의주는 다시 한번 재광의 이마에 입 맞췄다.

이번에는 더 오랫동안 온기가 머문다. 느릿하게 떨어져 나간 입술은 슬며시 닫히는 눈꺼풀로, 그리고 코끝을 지나 뺨으로, 끝내는 재광의 입술 위에 안착했다.

가볍게 맞물린 입술이 곧 촉촉한 마찰음을 내며 떨어졌다. 짧은 입맞춤이었으나 누구도 아쉬운 내색은 하지 않았다. 이렇게 끝날 키스가 아님을 잘 알고 있는 탓이다.

재광은 빙긋 웃었고, 의주는 그런 그의 뺨을 가볍게 감싸며 재차 입술을 붙였다.

위아래 입술을 가볍게 무는 움직임이 부드러웠다. 얌전히 받아주기만 하던 재광도 금세 의주의 목 뒤로 팔을 두르며 서로 간의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의주가 고개를 비스듬히 틀며 더 깊게 파고들 즈음,

“….”

매트리스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놓았던 의주의 휴대전화에서 메시지 알림이 울렸다.

급격히 무르익던 분위기를 깨기에 무리가 없는 소리였다. 물론 짤막하게 울리고 만 터라 무시하자면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었다. 잠시 멈칫거린 의주는 아랑곳하지 않고 재광의 뒷머리를 받쳤다.

그러나 여의치 않았다. 한 번을 끝으로 잦아든 줄 알았던 알림이 연달아 울리기 시작한다.

“…확인해요.”

결국에는 재광이 먼저 의주의 품을 빠져나갔다. “급한 거 같은데” 하고 덧붙이면서도 딱히 불만스러운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한숨은 의주에게서 나왔다. 그는 짤막한 숨을 토해내고는 아쉬움을 가득 담아 재광의 입술에 짧게 키스했다. 그런 뒤에야 손으로 매트리스 위를 뒤져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회사예요?”

“응. 서버 터졌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좋은 분위기를 방해당해 골이 난 표정이더니만. 서버가 나갔다는 소식에는 지체 없이 일어나 침대 아래로 내려간다.

전혀 예상 못 한 일은 아니었다. 러기지 랙에 올려둔 가방을 뒤적거리던 의주는 자연스럽게 노트북을 꺼내 들고 침대로 돌아왔다.

“광아, 이번에 대박 나려나 봐. 만반의 준비를 다 했는데도 서버 나간 것 봐.”

쭉 뻗은 다리 위로 노트북을 올려놓으며 말할 때는 재광이 의주의 어깨 위로 고개를 툭 떨어뜨렸다.

“잘 되면 좋죠.”

“그치, 좋지. 그래서 말인데….”

“네.”

“낭만인 잘 키워놓을 테니까 바람은 적당히 쐬고 돌아와.”

자못 진지한 목소리에 재광이 기가 찬 듯 실소를 흘렸다.

예전과 똑같은 패턴이었다. 사귀기 전에는 섹스만 하고 나면 사귀자더니, 요새는 틈만 나면 돌아오라고 난리다. 정작 재광의 일이 편해지도록 간 크게 해킹까지 해놓고서는.

재광은 “또 그 소리” 하며 어깨에 기댄 자세를 바로 세웠다. 그러자 의주가 팔을 뻗어 재광의 머리통을 도로 제 어깨에 붙인다. 시선은 오로지 노트북 화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재광도 굳이 저항하지는 않았다. 다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묻기만 할 뿐이었다.

“근데 이걸 제가 봐도 되는 거예요? 회사 내부 일인데.”

의주와 나란히 앉은 터라 그가 일하는 내용이 고스란히 다 보였다. 그래도 엄연히 외부 사람인데 이렇게나 오픈해도 되는 건가 싶어 묻자, 의주가 흘긋 쳐다보며 그런다.

“와, 봐버렸으니까 안 되겠다. 어쩔 수 없이 돌아와야지.”

잠깐 흘려 말하고 끝난 줄 알았던 얘기가 또 나오자 재광은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아, 진짜. 저 눈 감아요. 안 봐요.”

얘기한 다음에는 진짜로 눈을 감아버린다. 비스듬히 시선을 내려 감긴 눈을 확인한 의주는 가볍게 웃었다. 그러느라고 어깨가 들썩거리는데도 재광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래도 이만하면 썩 괜찮은 업무 환경이라 할 수 있었다. 고급 침대에 포근한 시트, 옆에는 같은 바디 워시 향을 풍기는 애인까지. 의주는 오밤중에 일하는 사람이라 볼 수 없을 만큼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의주의 귓가에 고른 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노트북 화면만 뚫어져라 쳐다보던 의주는 시선을 돌려 제 어깨 위를 봤다. 업무 내용을 보지 않겠다며 시야를 차단해버린 재광이 어느새 잠들어 있다.

부러 깨우거나 서운한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의주는 키보드를 더 조심스럽게 두드리며 어깨의 떨림을 최소화했다.

????

작정하고 호텔까지 예약한 기세에 비하면 참 허무한 밤이었다.

의주가 터진 서버를 수습하고 났을 때 재광은 이미 숙면 중이었고, 의주 또한 정신없이 자는 그를 깨우고 싶지 않아 조용히 잠드는 편을 택했다.

그때까지도 제게 기대 있던 재광을 눕히는 손길이 얼마나 정성스러웠는지 모른다. 의주는 재광이 인상 한번 찌푸리지 않을 만큼 고이 눕혔고, 그런 뒤에야 저도 그를 끌어안고서 잠에 들었다.

덕분에 아침에 깬 재광만 민망하게 됐다. 호텔까지 와서 순수하게 잠만 잔 건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일하는 사람 옆에서 속 편히 잠들어버린 게 내심 멋쩍은 거다.

“깨우지 그랬어요.”

잠도 얼마나 깊게 잘 잤는지 조식 먹을 시간도 놓쳐버렸다. 덕분에 비싼 데서 잘 자고 일어나 부랴부랴 출근 준비부터 하는 모양새가 됐다.

“너무 잘 자니까 깨울 수가 있어야지. 요새 많이 피곤했어?”

사실 의주는 조식을 먹고도 여유를 부릴 수 있을 만큼 일찌감치 눈을 떴었다. 다만 정신 들 기미가 안 보이는 재광을 따라 누워있느라 느지막이 나갈 채비를 시작했을 뿐.

시간 가는 걸 빤히 알면서도 주체적으로 늑장을 부린 탓인지 의주는 재광에 비해 한결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다. 느긋하게 옷을 꿰어 입고는 객실 안을 거닐며 자신의 물건을 하나씩 챙긴다.

그는 짐을 다 챙겼는지 확인할 때가 되어서야 주춤했다. 가방 안을 들여다보는 눈길이 자못 진지했다.

“광아.”

불쑥 부르는 소리에는 부산스럽게 움직이던 재광이 다급하게 “네?” 하고 대답한다. 의주는 여전히 서두르는 기색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리 좀 와 봐.”

세상에서 제일 바빠 보이던 재광도 그 한마디에는 잠시 평정을 찾고 순순히 걸음을 옮겼다. 의주가 서 있는 테이블 앞으로 다가서자 기다렸다는 듯 무언가가 내밀어진다.

의주가 내민 물건은 바로 어제 재광이 선물한 벨트였다. 시그니처 패턴이 가장자리에만 언뜻 보이고, 브랜드 이름은 버클 옆면에 음각된 심플한 디자인의 벨트.

재광은 자신이 직접 고른 벨트를 한 번, 그리고 내민 손의 주인을 한 번 번갈아 봤다. 뜬금없이 이걸 내미는 의중을 모른다는 표정이었다. 뜻을 알아차린 의주는 곧장 입을 열었다.

“처음 하는 건데 선물한 사람이 직접 해줘야지.”

“이게 무슨 목걸이, 반지 같은 것도 아니고….”

당연히 재광은 기겁했으나 이미 늦은 타이밍이었다. 내키지 않는 반응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벨트는 이미 재광의 손안이었다.

기가 막혀 실소를 터뜨린 그는 하는 수 없다는 듯 둥글게 말린 가죽을 풀어냈다. 허리춤의 고리 안으로 날렵하게 재단된 벨트 끝을 맞춰 넣는 손이 작게 떨렸다.

- 광아, 선물이 너무 야해.

거금 들여 산 선물을 보고 너스레를 떨던 의주의 말을, 재광은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대놓고 아래를 쳐다보는 것으로도 모자라, 손으로는 허리께를 더듬으며 고리를 찾아 끼우고 있으려니 모양새가 퍽 요상한 것이다.

반쯤 밀어 넣고서 등 뒤로 팔을 두를 때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저 벨트를 반대쪽으로 가져오려는 것뿐인데도 당장 끌어안을 듯한 자세라 내심 신경이 곤두섰다.

그뿐이 아니다. 애매하게 마주 보고 선 거리도 한몫을 톡톡히 했다. 맞닿은 것도 아니건만 여차하면 닿을 듯한 몸 사이가 괜히 더 기분을 이상하게 만든다. 정수리 위로 떨어지는 시선이 느껴질 때는 마른침까지 꼴깍 넘어갔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버클을 채웠는데….

“아…!”

그럼 그렇지. 그냥 넘어갈 리 없는 의주가 잽싸게 재광을 끌어안는다.

아마도 재광이 벨트만 딱 채우고 도망치듯 떨어질 거라 예상한 모양이었다. 껴안는 동작이 꽤 격했다. 그 때문에 가슴이 부딪치듯 맞닿아 저절로 탄성이 터졌다.

재광이 깜짝 놀라 올려다보는데도 의주는 평온하기 짝이 없었다. 재광과 닮은 듯, 그러나 더 날카로운 눈매가 되레 순하게 꼬리를 내려 웃음 짓는다.

얼떨떨하게 마주한 얼굴을 웃으며 들여다보는 것도 잠시였다. 의주는 이내 꾹, 힘주어 입술을 눌러 짧게 키스했다. 그리고는 간신히 숨을 집어삼킬 틈만 주고는 도로 재광의 입술을 물었다.

모닝 키스 치고는 몹시도 진했다. 끌어안은 허리를 타고 올라가 재광의 목 뒤를 가볍게 주무르는 손길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의주는 당장이라도 어젯밤 못다 치른 밤을 재개할 듯이 굴었다.

“….”

물론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출근 시간 1, 2분에 전전긍긍하는 말단 사원 재광이 퍼뜩 정신을 차린 탓이다. 그는 제법 힘주어 어깨를 밀어냈다.

의주는 고집부리지 않고 물러섰다. 그러고는 제법 상기된 얼굴로 저를 보는 재광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광아, 밤에는 풀어줘야 돼.”

쓸데없이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재광은 이 순간 이렇게나 한결같은 인간은 또 없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사귀기 전이나 후나 이토록 수작에 열심이라니. 이제는 대단해 보일 정도다.

습관적으로 눈을 흘기고는 있지만 속으로는 그게 마냥 한심하거나 얄밉지 않았다. 크게 심호흡한 재광은 큰맘 먹고 도로 입술을 붙였다.

재광에게는 몇십만 원씩 하는 벨트를 결제할 때보다 더 큰 결심이 필요한 행동이었다. 비록 짧은 입맞춤일지라도 말이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의주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도도한 척하기는커녕 성심성의껏 좋아죽겠다는 티를 내니 재광도 따라 웃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다.

한쪽은 더 날카롭고, 다른 한쪽은 더 순한 인상이지만 마주 보고 환하게 웃는 얼굴만큼은 꼭 닮아 있었다.

생김새를 넘어 서로를 보고 짓는 표정까지도 완벽하게.

『Geek&Hot(긱앤핫)』 마침

주석

[6] 토이 프로젝트 : 업무와 관계없이 개별적으로 진행하는 프로젝트.

Geek&Hot(긱앤핫)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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