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 Toy Project (12/21)

12. Toy Project

일하다가 한창 나른해질 시각. 재광은 막 도착한 메시지를 바로 확인했다.

여의주 팀장님

여기 콜드 파스타가 맛있대 오후 3:17

https://day-ting.com/seoul/food/ category3/ 2036491203 오후 3:18

출시 전 최종 테스트를 성공적으로 마친 의주는 확실히 여유가 많이 생긴 듯했다. 업무 시간에 웬 파스타 전문점 링크를 보내올 정도면 말이다. 심지어는 오늘 당장 가자고 채근을 하기에 이른다.

여의주 팀장님

오늘 저녁에 바로 예약된대 가자

콜? 오후 3:19

광아

자기야 오후 3:20

재광이 퇴근 시간을 가늠해보는 잠깐의 틈도 견딜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연달아 도착하던 의주의 메시지는 “알았어요” 하고 대답을 한 뒤에야 기세가 한풀 꺾였다.

재촉 끝에 답장을 받아낸 의주가 연이어 많이 바쁘냐고 묻기에 그렇진 않다고 얘기하려던 참이었다.

“재광 씨, 잠시만요.”

옆자리에 앉은 사수가 불쑥 재광을 부른다. 그는 의주에게 보낼 답장을 미루고 서둘러 메신저 창을 내렸다.

바로 옆에 앉아 있는 터라 서둘러 달려갈 필요까진 없었다. 재광이 “네?” 하며 고개를 돌리자 사수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간다.

“자사 홈페이지 보수 건은 완료된 거예요?”

“아, 그게….”

비즈니스용 해끔한 낯으로 고개를 돌릴 때와는 달리 재광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무어라 말을 꺼내려다 말고 입술을 슬며시 감쳐 문 그는 조금 뒤 자신 없는 눈빛으로 사수를 마주했다.

“그게?”

“처음에 보고 올렸던 내용 중에 두 가지는 반영이 됐고, 하나는 지금 진행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업무 현황을 전달하는 말투는 의젓했으나 내용은 두루뭉술했다.

반은 본능적이고, 반은 의도적인 대꾸였다. 아무리 신입이라 해도 이 일이 지지부진 시간만 잡아먹고 있단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나마 보완이 된 두 가지도 그중 하나는 상사의 개입으로 이뤄낸 결과였다. 나머지 하나는 재광이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수정 사항을 반영시키긴 했지만….

실상 가장 중요한 요청 사항은 아직 씨알도 안 먹히는 중이었다. 그 사실까지 세세하게 알렸다가는 한 소리 듣고 끝날 걸 오히려 각 잡고 털릴 수도 있었다.

또, 쪼르르 일러바쳐 상사의 바지폭에서만 업무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던가. 그 때문에 어떻게든 자신이 해결할 요량으로 자세한 사항까지는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재광 씨.”

다행히 상사도 더 집요하게 캐물을 의사는 없는 듯했다. 짧게 숨을 몰아쉬며 조금 더 단단한 목소리로 재광을 부른다. 공손하게 앉은 재광은 사선으로 눈길을 내리며 담담하게 “네” 하고 대꾸했다.

“홈페이지 활용도가 높지 않아서 별로 안 중요해 보일 수도 있어요.”

“….”

“근데 그거 안 중요해서 신입사원 테스트용으로 그냥 한번 줘보는 게 아니라 엄연한 업무예요. 담당자는 재광 씨고요.”

“네, 알고 있습니다.”

“몇몇 팀들이 우리한테 비협조적으로 나온다는 것도 알아요. 그치만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구슬려서 움직이느냐도 중요한 업무 스킬이거든요.”

“아…. 네.”

“저쪽 담당자가 안 된다고 하면 쩔쩔매지 말고, 조금 더 적극적으로 신경 써서 해주면 좋겠어요.”

“네, 죄송합니다.”

재광은 토 달지 않고 곧바로 사과했다. 그러자 진지하게 얘기하던 상사가 조금은 멋쩍은 듯이 볼을 긁는다.

“죄송할 것까지는 없고요. 재광 씨도 이렇게까지 오래 걸릴 일 아닌 거 알잖아요. 그 정도의 속도는 맞출 수 있게 노력해달라고 하는 얘기였어요. 그럼 일 봐요.”

“넵.”

직속 상사에게 이 정도로 꾸지람을 듣기는 처음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기가 죽거나 침울하지는 않았다. 그저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려는 정도에 불과했다. 목까지 차오른 한숨을 꾹 참은 재광은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마땅한 대답을 주지 않고 메신저가 끊겼던 터라 의주에게 온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 그래도 같은 직장인이라고, 사정을 모르지는 않는지 왜 답이 없냐며 재촉 몇 번 하다가 많이 바쁜가 보다 하고 멈춘 상태였다.

오늘 저녁 같이 먹을 정도는 돼요. 오후 3:27

뒤늦게 답장을 보낸 재광은 빠르게 사내 메신저로 넘어갔다. 재광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요구할 때마다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 된다며 미루기 바쁜 담당자의 이름을 보니 벌써 어깨가 무거워지는 기분이었다.

????

“팀장님 다닐 때도 그랬어요? 말만 꺼내면 안 된다면서 한정 없이 미루고 그런 거요.”

그럼 그렇지. 여태 일을 미뤄온 담당자가 재촉 한 번에 빠릿빠릿해질 수는 없었다. 내가 하는 일이 그거밖에 없는 줄 아냐, 그거보다 중요한 게 널렸다…. 말은 또 왜 그리 많은지 몰랐다.

대략 언제쯤까지 마무리 짓겠다고 한 이전 메시지를 인용해도 소용없었다. 사람이 하는 일인데 일정이 기계처럼 딱딱 맞춰지느냐고 오히려 재광을 다그친 것이다. 힘없는 신입사원인 재광으로서는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

“제가 신입이라서 기죽이려고 그러는 건지, 원래 그런 건지를 모르겠어요.”

그래서인지 의주 앞에서도 볼멘소리가 툭 튀어나온다.

의주에게는 드물다 못해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고상하게 파스타 면을 포크에 돌돌 말던 그가 기억을 더듬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도 그런 놈들 있었지. 부서마다 한둘씩은.”

“팀장님한테도 그런 사람 있었어요?”

재광이 재차 물은 말에는 대답이 조금 늦었다.

지나가는 서버를 붙잡고 “여기 콜라 하나만 주세요” 하느라고 그랬다. 친절하게 응대한 직원이 몇 걸음 멀어진 다음에야 의주가 다시 재광을 봤다.

“야 나한테는 널렸었지. 원래 천재는 시기와 질투를 몰고 다니는 법이니까.”

재광은 조금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고민하는 기색 없이 그렇다고 하는데, 질색하거나 짜증 나는 기색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제 장단에 맞춰주느라고 하는 소린가 싶었다.

“진짜로요?”

“응. 걔네 얼마나 유치한데. 일 안 해주는 건 기본이고, 나중에는 흠잡을 게 없으니까 남들 다 똑같이 쓰는 보고서가 잘못됐다고 난리였잖아.”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일 안 해주는 건 내가 혼자 해버렸고, 보고서는 뭐. 너도 알 텐데?”

순간 재광의 눈이 가늘어진다. 무언가 들은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이 기억이 흐릿했다. 그래서 잠자코 있자 의주가 알아서 말을 잇는다.

“다 똑같은 형식인데 뭐가 다르다고 저러나 하면서 남의 거 눌러봤다가 내용 없이 올린 것들 발견해가지고 리스트 뽑았잖아.”

“아….”

“광아, 너 내 덕에 쓸데없는 보고서 많이 줄어든 거다. 나한테 고마워해.”

재광에게는 아직도 불필요한 서류 작업이 많았지만 이전에는 더 많았다고 생각하면 의주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그는 “아, 예…” 이도 저도 아닌 대꾸만 하고 말았다.

딱히 도움이 되는 경험담은 아니었다. 자신의 실력에 자신감이 있고, 능력도 뒷받침되는 의주 정도니까 그런 일들을 벌이는 게 가능했을 거다. 회사에 대놓고 반항하는 배짱 역시도.

하지만 재광은 최대한 소란스럽지 않게, 물살에 휩쓸려 튀지 않고 조용히 지내기를 선호하는 성향이었다. 의주처럼 대놓고 불만을 표출하는 건 상상조차 힘들다. 결국 나오는 건 한숨뿐이었다.

“뭐야, 여의주 님 영웅담을 듣고 왜 한숨을 쉬어?”

“아뇨, 제가 팀장님이랑 똑같이 그럴 수는 없잖아요.”

“왜? 그냥 들이받아. 그러고 나서 낭만인으로 돌아오면 되겠다, 그치. 내가 회사 차원에서 환영회도 크게 해줄게.”

재광의 재입사를 상상만 해도 즐거운지 의주의 얼굴에 들뜬 기색이 역력했다. 재광은 피식 따라 웃으며 고개를 설설 저었다.

“전 여기 오래 다닐 거라니까요.”

“그럼 뭐, 버티는 것밖에 더 있나. 그런 애들은 실질적으로 뭔가 일이 딱 터지지 않는 이상 절대 알아서 정신 안 차린다니까?”

의주가 제 업무 아니라고 막 얘기하는 것 같아도 틀린 소리는 아니었다. 실제로 재광의 업무가 뒤로 밀리는 이유도 항상 같지 않았나. 당장 일어난 일이 아니어서 그랬다.

- 그래서 털렸어요? 아니잖아요.

지금 속을 썩이는 담당자에게도 그 말만 여태 몇 번을 들었는지 몰랐다. 앞으로도 이런 날들의 연속일 거라 생각하면 벌써 눈앞이 컴컴해진다.

재광의 입술 새로는 재차 한숨이 터졌다. 그는 옆에 놓인 와인 잔에 슬며시 손을 가져다 댔다.

“주문하신 콜라 한 잔 나왔습니다.”

그러나 잔을 들어올리기 전에 직원이 다가와 얼음 가득한 콜라 잔을 올려놓는다. 직원이 간단한 목례를 하고 걸음을 옮기자 의주가 자연스럽게 콜라를 재광의 앞으로 밀어줬다.

이번에야말로 재광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미소를 지었다. 의주의 눈에도 스트레스깨나 받아 보였던 모양이었다. 거절하지 않고 받아든 재광은 빨대를 옆으로 치우고 컵째로 콜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우리 이거 먹고 드라이브 가자. 야경 끝내주는 데로. 형아가 기분 좋게 해줄게.”

재광은 목을 세게 때리는 탄산에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뒤늦게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의주를 보자 곧바로 눈이 마주친다.

“좋지?”

“야경 보러 가는 건 좋은데요. 충분히 풀렸어요. 이제 괜찮으니까 제 기분 안 맞춰도 돼요.”

괜히 투정을 부려 기분 좋은 데이트에 찬물을 끼얹은 건 아닐까 우려해 하는 말이었다. 그러자 의주가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갸우뚱한다.

“광아 근데, 네가 생각하는 거랑은 다른 기분일 수도 있지 않을까?”

정말 천연덕스러운 표정과 그러한 말투였다. 재광은 미쳤냐고 바락 소리를 지르는 대신 슬그머니 미간을 좁히며 경멸의 눈초리를 했다. 그에 의주가 웃음을 터뜨린다.

“장난이야, 장난. 알지? 나 그렇게 파렴치한은 아니다.”

“그러니까 왜 말을 그렇게….”

“근데 네가 허락하면 그럴 생각이 아예 없는 건 아니고.”

“아, 좀!”

의주는 기어이 2절까지 하며 재광이 언성을 높이도록 만들었다. 저도 모르게 큰소리를 낸 재광은 서둘러 다른 테이블들을 둘러보며 입을 다물었다.

“분위기를 꼭 그렇게 깨야겠어요?”

“이게 내 매력이잖아.”

힐난하는 말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의주는 찡긋, 윙크까지 해보였다.

뻔뻔하게 구는 데는 장사가 없었다. 질색하듯 눈을 흘기던 재광도 끝내 웃음을 터뜨리고 만다.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치는 모습에 가까웠지만 지켜보던 의주는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닮은 얼굴에 슬며시 미소가 번졌다.

????

“별것도 아닌 거로 애를 잡고 난리야.”

대낮의 사무실. 의주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들여다봤다.

메인 모니터에는 재광의 회사 홈페이지를 띄워놓은 상태였다. 거의 눕다시피 등받이에 기대앉은 의주가 팔만 길게 뻗어 메뉴를 하나하나 눌러본다. 대충 살펴본 다음에는 브라우저 기능을 이용해 소스 코드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보이는 면에 있어서는 꾸준히 관리를 잘 하는 듯했다. 그러나 조금만 들여다봐도 꽤 오랫동안 설렁설렁 유지만 해온 티가 났다. 아마 재광의 말마따나 활용도가 높지 않기에 번드르르하게 보이는 데만 신경을 쓴 것 같았다.

“이거 수정하는 데 얼마 걸리지도 않겠고만.”

의주는 매끈한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암만 봐도 신입사원 기죽일 셈으로 일을 미룬다고밖엔 생각이 안 들었다.

아무래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제 연인의 일이잖은가. 그것도 오랫동안 버텨 퇴직금을 최대한 끌어모으겠다는 재광의 일.

의주 본인이야, 그 회사에 재직할 때 비협조적으로 구는 사람이 있으면 괴로워하기는커녕 제 실력을 뽐낼 기회랍시고 신나서 남의 업무까지 해치웠었다.

그뿐인가. 괜한 트집을 잡으면 순순히 말을 듣는 척하면서 뒤통수 거하게 때려 통쾌한 복수도 했다.

어디까지나 자신만만하고 쉽게 기죽지 않는 성격을 타고났기에 가능한 대처였다. 즉 이래도 저래도 네, 네 하고 마는 재광은 시도도 못 할 거란 뜻이다.

‘이거 뭐 담당자 찾아내서 감봉하라고 시위할 수도 없고.’

머릿속으로만 떠올린 의주는 영 떨떠름한 안색을 하고서 화면만 노려봤다. 그러자 뒤에서 불쑥 고개 하나가 튀어나온다.

“여 팀장님, 뭐가 그렇게 심각해요?”

선호였다. 언제 왔는지 모를 그는 상체를 한껏 수그려 의주와 같은 높이에서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 깜짝이야.”

“뭘 하는데 사람 오는 것도 모르나 했더니….”

“뭐.”

“다시 오래?”

의주의 경력을 훤히 아는 사이다 보니 이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스카웃 제의라도 받은 줄로 안 모양이었다. 선호는 미간을 콱 좁히며 물었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떨떠름한 기색을 내비치던 의주가 언제 그랬냐는 듯 가슴을 쫙 편다.

“그랬으면, 가도 돼?”

“돌았냐?”

조금 격한 언사였으나 순순히 보내줄 수 없다는 의사만은 정확하게 전달이 된다. 그에 흡족하게 웃은 의주가 슬며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여의주 님 없이는 안 돌아가는 거 뻔히 아는데 내가 어떻게 가겠냐.”

“아오, 말이나 못 하면.”

선호는 거기까지만 하고는 눈빛으로 의주를 한 대 쥐어박았다. 더 이상 말을 않는 것으로 봐서는 이만할 요량인 듯싶었다. 그런데 뜻밖의 목소리가 둘 사이에 끼어든다.

“저기, 대표님.”

고맙게도 재광의 자리를 메워준 인턴이었다. 선호는 언제 인상을 구겼냐는 듯 상냥한 표정으로 그를 돌아봤다. 젠틀한 목소리로 “네, 말씀하세요” 하자 인턴이 한 손을 자신의 가슴에 올리며 입을 연다.

“제가 있습니다.”

“네?”

“팀장님이 안 계셔도 제가 잘 이끌어나가 보겠습니다.”

예의를 갖추고는 있지만 자신감이 물씬 풍기는 태도였다. 잠시간 황당한 표정으로 굳어 있던 선호는 별안간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손뼉까지 짝 친다. 그는 곧 의주의 어깨를 짚었다.

“여 팀장님, 긴장하셔야겠어요.”

가볍게 어깨를 주무르며 얘기하자 의주가 눈썹을 꿈틀댄다.

“저 하룻강아지, 저거.”

대놓고 야망을 드러내는 인턴을 노려보면서도 진심으로 아니꼬워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무심하게 대충 넘어가려는 쪽에 가까웠다.

다른 때 같았더라면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업무를 줄줄이 읊으며 네가 진정 감당이 가능하겠냐고 쏘아붙였겠지만, 지금은 인턴의 허세를 일일이 받아칠 여유가 없었다.

그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 있잖은가. 재빠르게 시선을 돌린 의주는 가늘게 뜬 눈으로 모니터를 응시했다. 매끈한 턱을 가볍게 쓰는 모양새에서 갈등하는 기색이 느껴지는 듯도 했다.

하지만 잠시였다. 화면을 주시하던 그는 곧 자세를 바르게 일으키며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의주가 다분히 신경 쓸 수밖에 없는 사안이긴 하지만, 어찌 됐든 결국엔 재광의 일이지 않나. 저 혼자 백날 들여다보고 고민해 봐야 소용없었다. 당사자의 의사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의주는 빙글, 의자를 돌려 책상을 등졌다. 그런 뒤 휴대전화를 귓가에 가져대는 동작이 잽쌌다.

― 네, 저예요.

뜻밖에도 전화기 너머의 반응이 빨랐다. 한창 업무 중일 때라 시간이 좀 걸릴 줄 알았던 의주는 “빨리 받네?” 하며 솔직한 목소리를 냈다. 그러자 이번에는 잠깐의 텀을 두고 대답이 돌아온다.

― 아, 잠깐 나와 있어서.

그러고 보니 주변으로 어수선한 소음들이 들린다. 바람 소리도 함께인 점을 고려하면 잠깐 담배를 피우러 나간 모양이었다. 조금 전의 공백은 연기를 뱉어내는 틈이었을 확률이 높았다.

“아 그래?”

― 이 시간에 웬 전화예요. 무슨 일 있어요?

업무 시간인 걸 빤히 알면서 건 전화는 받는 쪽에서도 꽤 의아한 듯했다. 그러나 의주는 순순히 본론을 꺼내는 대신 말꼬리를 잡아 되물었다.

“너야말로 무슨 일 있어? 목소리가 왜 그래.”

흡연자가 잠깐 나가 담배 한 대 태우는 거야 흔히 있는 일이지만, 그런 것치고는 재광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쩐지 기가 팍 죽은 낌새를 느낀 그는 미간을 콱 좁혔다.

― 회사에서 있을 일이 뭐 별거 있겠어요?

“왜, 또 홈페이지 담당자가 진상 피워?”

― 아뇨, 그런 건 아니고… 비슷해요. 방금 팀 회의했는데 그거 땜에 엄청 까였거든요.

흠. 의주는 대답 대신 크게 콧김을 뿜었다. 누가 봐도 멋모르는 신입 길들이겠다고 뻐기고 있건만, 그걸 모를 리 없으면서 신입만 달달 볶는 저 상황이 못내 답답한 것이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 터놓지는 않았다. 대신 더욱 차분한 말투를 내어 물었다.

“광아. 근데 들이받든 그냥 드럽고 치사해서든, 그만둘 생각은 없는 거지?”

처음부터 이걸 물으려 전화를 건 참이었다. 예상 못 한 상황에 본론이 조금 늦어지기는 했으나 어쨌든 경로는 이탈하지 않은 셈이었다. 전화 너머에서 재광이 짧게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 입사한 지 얼마나 됐다고요. 당연히 없죠.

“그래. 알았어.”

그만하면 쓴맛을 충분히 봤으니 돌아오라든가, 그놈들은 답이 없으니 적당히 다니라든가. 평소 같은 회유는 없었다. 흔쾌히 대꾸한 의주의 얼굴이 담담했다.

????

“고기 냄새 다 뱄죠.”

팀 회의에서 지적을 당하고 기죽은 재광에게 고기를 잔뜩 먹이고 돌아온 참이었다. 집안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의주가 뒤에서 안자, 재광이 제 배 위로 올라온 손을 슬며시 감싸 쥐며 물었다.

“응. 맛있는 냄새 나.”

1초의 틈도 없이 대꾸한 의주가 재광의 목덜미에 코를 박았다. 그 상태 그대로 소파까지 가는 걸음이 뒤뚱거렸다.

의주는 소파에 다다라서야 재광을 놓아줬다. 맛있는 냄새가 난다더니. 진짜로 맛이라도 보듯 목덜미에 몇 번이고 쪽쪽거린 다음이었다. 배가 불러 한껏 나른해진 재광은 푹신한 등받이에 비스듬히 기대앉았다.

“맞다. 아까 낮에 전화는 왜 했던 거예요?”

불현듯 생각난 말을 꺼내면서도 어조는 한없이 늘어졌다. 하는 양이 귀여워 잠시 턱을 간질이던 의주는 짧게 고민했다.

실은 그 회사에 더 다닐 심산인지 아닌지를 물으려던 게 목적이었고, 굳이 숨길 생각도 없어 대놓고 묻기도 했었다.

하지만 재광은 그게 본론이라고는 예상 못 한 눈치였다. 그런 그에게 인제 와서 왜 그걸 물었는지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의주는 대충 둘러댔다.

“그냥. 목소리 듣고 싶어서.”

구체적인 배경 설명 없이 간단하게 둘러댄 것치고는 진솔한 목소리였다. 더군다나 화자가 의주라고 하면 아무리 실없는 핑계를 대도 진심처럼 느껴지는 효과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재광도 “참 나” 하며 웃어버리는 게 다였다. 그러나 조금 뒤에는 훨씬 조심스러운 말투를 내기에 이르렀다.

“회사에서 무슨 일 있었던 거예요?”

혹여 자신처럼 고단한 일이 있어 문득 목소리를 듣고 싶단 생각이 든 건 아닐까. 생각이 거기까지 치달은 게 틀림없었다. 의주는 조금의 의심도 못 하게끔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가? 회사에서? 뭐 때문에?”

온통 물음표투성이였지만 의미를 알아먹기란 어렵지 않을 터였다. 뭐든 잘하는 여의주가, 쌓인 업무를 완벽하게 쳐내며 직원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급히 애인 목소리가 듣고 싶어질 만큼 속상할 일이 어디 있겠냐는 뜻이었다.

어렵지 않게 의도를 간파한 재광은 헛웃음을 쳤다. 이 순간마저 당당한 의주의 태도에 어이없어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제 코가 석 자인데 누굴 걱정했나, 하는 게 분명했다.

“아님 말고요. 혹시나 했죠.”

“광아, 너를 향한 형아의 애정이 이렇게 깊단다. 문득 생각나서 전화하고 그럴 만큼.”

“예, 뭐. 황송하네요.”

성의 없이 흘리는 대꾸였음에도 질색하거나 내켜 하지 않는 뉘앙스는 아니었다. 의주는 바람 새는 소리로 웃으며 재광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흐트러뜨렸다.

이후로는 언제나와 같은 홈 데이트가 이어졌다. 재광이 보고 싶었다는 영화 VOD를 찾아 같이 봤고, 중간중간에는 손을 더듬거나 허리를 지분대는 등 간질거리는 스킨십도 왕왕 오갔다. 간간이 내용이나 캐릭터에 관해 얘기를 나누는 건 덤이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두 시간이 훌쩍 지났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문득 시간을 확인한 재광이 깜짝 놀라 갈 채비를 한다. 의주가 자연스럽게 따라 일어설 때는 꽤 단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무 늦었어요. 택시 타고 갈게요.”

“왜, 오래 걸리지도 않는데.”

“배도 부르고 해서요. 좀 일찍 내려서 걸어가게요.”

그 말에 의주가 미간을 확 좁혔다. 금방이라도 그런 게 어디 있냐며 같이 걸으면 되지 않느냐 따질 듯한 표정이었다.

“…그래. 대신에 도착하면 연락 꼭 하고.”

그러나 이어지는 대답은 순순했다. 그는 차 키를 집어 드는 대신 재광의 재킷 앞섶을 꼼꼼하게 여며주기도 했다. 그러고는 재광이 짐을 챙기는 동안 습관처럼 노트북을 찾아 테이블 위에 펼쳤다.

“일 아직 남았어요?”

가방을 막 집어 들던 재광은 혹여 제가 시간을 많이 뺏은 건 아닐지 걱정하는 투로 물었다. 그러자 의주가 싱긋 웃는다.

“일은 아니고… 토이 프로젝트[6]? 내가 또 유능한데 부지런하기까지 하잖아.”

의기양양한 말끝에는 찡긋거리는 윙크가 뒤따랐다. 재광은 이번에야말로 성의 없이 “아, 예” 했다.

심드렁한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의주의 눈이 반짝 빛나고 있었다.

????

재광은 의주의 토이 프로젝트가 말 그대로 즐기며 하는 일인 줄로만 알았다.

다른 개발자들이 그러하듯 업무에 바로 적용하기 부담스러운 신기술을 사용해보거나, 취미 삼아 간단한 프로그램을 짜는 정도일 거라고.

그러나 의주는 예상보다 훨씬 진지했다. 일감을 싸 들고 온 재광보다도 더.

일감이라고 해 봐야 각종 서류 작업이긴 했다. 업무 일지부터 이슈 사항 요약본, 담당 업무 진행 보고서 등. 하나로 퉁쳐도 될 법한 내용들을 굳이 세분화해 보고해야 했다.

어차피 서류 종류만 많을 뿐, 경중은 확실하기에 중요한 보고서 한두 개만 성실하게 쓰고 나머지는 요령을 피워도 무방했다. 그렇게 하면 서둘러 작성을 마치고 퇴근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 귀찮다고 대충 올리지 말고 꼼꼼하게 잘 써. 나중에 문제 생기면 나는 할 만큼 했다고 다 까야 되니까.

이전에 언뜻 들은 의주의 말이 맴돌아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하나하나 세세하게 기록을 남기고자 선퇴근 후잔업을 선택한 것이다.

그런데 책임을 피하려 서류 작업에 공을 들이는 자신보다 토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는 의주가 몇 배는 더 심각한 얼굴이라 의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개인적으로 진행하는 일이라 해도 잘 풀리지 않으면 스트레스 받는 건 매한가지일 테다. 그러나 매사에 자신감 넘치는 의주라면 식은 죽 먹듯 후루룩 해내는 모습이 더 어울려 어쩐지 이질감이 느껴졌다.

“뭐가 잘 안 돼요?”

그래서 결국 물었다. 얼마나 집중을 했던지, 의주는 이마저도 제때 듣지 못하고 몇 초 뒤에야 렉 걸린 사람처럼 버벅거리며 “어, 어?” 했다.

“잘 안 풀리냐구요. 엄청 심각해 보이는데.”

“아, 그래?”

재광이 조금 전의 질문을 반복할 때가 되어서야 의주가 검지로 자신의 미간을 꾹꾹 누른다. 집중하느라 잔뜩 좁히고 있던 걸 펴는 행위였다.

“내가 안 풀릴 게 뭐가 있어. 맘만 먹으면 껌이지. 근데 좀….”

“좀?”

“부가적인 계획을 세워야 해서 고민하느라고.”

질문에 답을 들은 재광의 안색이 더 의문스러워졌다.

“대체 뭘 하는데 부가적인 것까지 계획을 세워요?”

순수하게 궁금해서 묻는 말투였다.

아닌 게 아니라, 다른 때 같았더라면 재광의 옆에 철썩 붙어 작업했을 의주는 굳이 바닥에 앉아 소파를 마주 보고 있었다. 자신의 작업 과정을 재광에게 보이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그만큼 꽁꽁 감춘 일을 진행하느라고 전에 없이 진중한 모습을 보이니 영문을 모르는 재광으로서는 궁금할 수밖에.

그러나 늘 재광에게 간, 쓸개마저 내줄 것처럼 구는 의주도 이번에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곧게 마주 본 그의 눈이 생긋 휘어진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비밀.”

이란다. 정확히는 비―밀, 하며 약 올리듯 하는 소리였다. 재광은 기가 막혀 웃어버리고 말았다.

“어디 빚져서 급하게 부업이라도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실없는 말투로 덧붙였더니 의주가 크게 웃는다. 재광의 실소와 대비되는 파안대소였다.

“광아, 나 쓰리룸에 화장실 두 개 딸린 집에 혼자 살면서 자차 모는 남자야. 돈이 궁할 거 같애?”

“그냥 심심풀이로 하는 일에 그렇게 심각할 것 같진 않으니까 그렇죠.”

덤덤하게 받아치는 재광의 대꾸에는 의주의 정갈한 눈썹이 얕게 들썩였다. 뜻밖이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오. 나를 그만큼이나 알아? 제법이네.”

“제법은 무슨….”

“틀린 말은 아닌데, 심심풀이도 가끔은 중요할 때가 있지.”

술술 말하고는 있지만 결국에는 핵심을 빼놓고 혼자만 아는 얘기를 하는 꼴이었다.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 재광은 솔직하게 눈살을 구겼다.

“뭐라는 거예요.”

불퉁한 목소리로 내뱉는데도 의주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제가 하는 일에 관심을 두는 재광의 태도가 만족스러운 것 같았다. 환하게 웃은 그는 잽싸게 바닥에서 일어나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자기야, 내가 비밀 만드는 거 같아서 서운해?”

“서운한 게 아니라 그냥 궁금해서 그런 거죠.”

“그게 그거지.”

언제 떨어져 앉았냐는 듯 곁에 착 붙어 보내는 눈길이 몹시도 은근했다. 낌새를 알아차린 재광이 애써 모르는 척 자신의 노트북 화면으로 시선을 돌려봐도 소용은 없었다. 의주는 목이며 뺨, 보이는 대로 입술을 붙여대기 시작했다.

“아니, 저 아직 안 끝났어요. 좀 남았다고요.”

“응, 응. 일해.”

드러난 살갗마다 입술을 뭉개느라고 발음이 마구 이지러졌다.

????

입사 동기끼리 저녁 약속이 있는 날이었다. 자연스럽게 술자리까지 이어져 시간이 꽤 늦었다. 잠시 담배를 피우러 나왔던 재광은 옆에 있던 동기의 목소리에 고개를 휙 돌렸다.

“재광 씨, 전화 오는 거 아니에요?”

“아… 네. 맞아요.”

조금 전부터 요란하게 진동이 울려대고 있었다. 발신인은 당연하게도 의주다. 어쩐지 타인을 앞에 두고 전화를 받을 엄두가 안 난 재광은 어색하게 웃으며 미적거렸다.

“뭐야, 여자친구예요? 아, 그럼 내가 또 흔쾌히 비켜줘야지.”

그러자 동기가 부러 능청을 떨며 짤막한 담배 개비를 지져 끈다. 재광은 그가 식당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본 다음에야 통화를 수락했다.

“네.”

― 잘 놀고 있나 보네? 전화도 늦게 받는 거 보니까.

언뜻 들으면 데이트 대신 동기들과의 저녁을 택한 재광을 원망하는 것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오늘 약속이 있다는 소식에 누구보다 기뻐한 게 의주였기 때문이다.

대놓고 화색을 띠지는 않았지만 목소리만으로도 충분히 느껴질 만큼 뚜렷한 감정이었다. 뭐랄까, 꼭 기회를 잡은 사람 같았다고나 할까.

다소 미심쩍은 게 사실이나 재광은 따로 묻지는 않았다. 보나 마나 뻔하지 않던가. 요즘 토이 프로젝트에 푹 빠져 있으니 그것과 관련해 중대한 일이라도 하려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죠, 뭐.”

― 그래도 술은 많이 마시지 말고. 오늘은 못 데리러 간단 말이야.

못 데리러 간다며 지레 걱정하는 것으로 보아 어지간히 중요한 일이지 싶었다. 재광은 흘리듯 웃으며 대답했다.

“어차피 동기끼리 편하게 마시는 자리예요. 그 정도는 조절할 수 있으니까 걱정 마요.”

― 기특한 말을 하네. 그래, 그럼 적당히 마시고 들어가. 집에 도착하면 연락 주고.

데리러 갈 수 없으니 음주량을 조절하라는 게 용건이었던 듯했다. 짧은 통화가 어느새 마무리될 기미를 보인다. 재광도 굳이 시간을 끌지 않고 순순히 답하려 했다.

그런데 그러겠다는 재광의 대꾸보다 의주가 덧붙이는 말이 더 빨랐다.

― 내일부터는 내가 다시 재밌게 놀아줄게.

자못 설레는 목소리였다. 그에 실없이 웃어버린 재광은 “그러든가요” 하는 대답을 끝으로 이만 통화를 마쳤다.

어쩌다 보니 사귀는 사이까지 되고 말았지만, 의주는 정말이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었다. 아무리 토이 프로젝트라고는 해도 본업과 선을 그을 수 없는 일이건만 그걸 놓고 저렇게 설레고 즐거워하지 않나.

재광으로서는 감히 공감할 수 없었다. 당사자가 좋다니 그럼 됐다, 하고 넘기는 것뿐.

괜히 어깨를 한번 으쓱거린 그는 통화를 마친 휴대전화를 재킷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먼저 들어간 동기의 뒤를 고대로 밟아 식당 안으로 발을 들였다.

동기들이 모여 앉은 테이블은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인원이 많은 만큼 가장 북적거리는 자리인 탓이다. 재광이 한 발자국씩 다가갈수록 시끌시끌한 말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렸다.

“아니 대체 왜 그러는 거래요? 신입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몰라요. 신입만 들어오면 괜히 그렇게 잡는다잖아요. 재광 씨만 안됐죠.”

“와 대단하다, 재광 씨. 그걸 어떻게 버텨요?”

입사 초만 해도 사수 잘 못 만난 동기 얘기로 떠들썩하더니 이젠 그 플로우가 재광의 외로운 싸움으로 옮겨온 모양이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동기들 사이에서는 재광의 지난한 업무(근데 이제 고의적인 괴롭힘을 곁들인)에 관한 소문이 진작 다 났으니까.

그러다 보니 제가 없는 자리에서 자신의 얘기가 나왔다고 해도 딱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재광은 꼭 남의 이야기를 듣는 듯 무심한 얼굴로 자리를 찾아 앉았다.

“어? 재광 씨 왔다. 요즘에 많이 힘들다면서요. 저희 그 얘기 하고 있었어요.”

다들 상사 뒷담에 심취한 터라 재광이 빈자리를 채우고 나서야 관심이 이쪽으로 돌아왔다. 한순간 화제의 중심에 놓인 재광은 애써 입꼬리를 올려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 뭐. 그냥 언젠간 끝나겠지 하고 있어요.”

“나였으면 벌써 팀 옮겨달라고 울고불고했을 거 같은데. 어떻게 그렇게 멀쩡해요?”

“포기했어요. 직접 찾아가서 얘기해 봐도 들은 체도 안 하시니까 더 할 수 있는 게 없더라고요.”

허심탄회하게 터놓는 대답에는 모두가 짠 것 같은 반응을 했다. 술 한 잔씩 걸치고 공감 능력이 배로 늘어나기라도 했는지, 동기들이 일제히 입매를 축 늘어뜨리며 안타까운 얼굴을 한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재광만 더 어쩔 줄을 모르게 됐다. 그는 “괜찮은데…” 하고 말끝을 흐리며 어설프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

더 할 수 있는 게 없어 언젠간 끝나겠지 하고 있다던 재광의 말은 진심이었다.

실제로도 혹시 모를 언젠가의 상황을 대비해 온갖 보고서들을 신경 써 작성해왔지 않나. 오늘도 재광은 무념무상의 얼굴로 출근길 지하철에 올라탔다.

간만에 술을 마셔서인지 미약한 두통이 일었다. 그 탓에 작게 미간을 찌푸리며 봉에 기대서는데, 주머니 속에서 짤막한 진동이 울린다.

아침부터 부지런히 메신저 알림을 울린 이는 민주였다. 재광은 보나 마나 출근하기 싫다거나 반차 쓰고 싶다는 투정일 거라 생각하며 휴대전화 잠금을 풀었다.

그러나 내용을 확인하면서부터는 무심한 표정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맥락도 없이 자신이 몸담은 회사가 언급됐기 때문이다.

송민주

이거 김재광 너네 회사 아니야?

찐임? 합성 아니고? 오전 8:09

늘 세상만사에 관심 많은 민주는 웬 링크까지 하나 첨부했다. 의아해하던 재광은 곧바로 링크를 눌렀다.

담당자 바뀐 듯한 GNH 홈페이지 근황

연결된 게시물을 본 재광의 안색이 경악으로 물든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언젠가의 상황’이 바로 오늘인 듯했다.

게시물에 올라온 이미지는 재광의 회사 홈페이지를 캡처한 화면이었다. 실질적인 판매는 오프라인 지점이나 온라인 제휴 영업점을 통해 이루어지는 터라 대개는 제품 소개가 주를 이루고 있었는데….

그게 문제였다. 제품 썸네일 아래 간단히 나와야 할 제품명이 세상 화려했다.

비싸지만 돈값 하는 무선 청소기 ^ㅁ^)/

그냥저냥 쓸 만한 공기청정기 ㅇ_ㅇ

고급화 전략으로 최대한 심플하고 간소하게 구성해놓은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난데없는 이모티콘은 기본이고, 어떤 제품에는 보세 의류 쇼핑몰에서 보던 번쩍이는 아이콘까지 달렸다.

게시물에는 무작위로 바꾼 제품명이 아니라는 사족도 쓰여 있었다. 실제 상품평에 기반해 수정했다는 추측이다.

애석하게도 마냥 헛소리는 아닌 것 같았다. 실제로 직원들 사이에서 혹평을 받았던 제품 이름에 울상을 짓는 이모티콘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재광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하지만 침착을 되찾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런 게시물을 보고 있을 때가 아니라 생각한 그는 부지런히 웹 브라우저를 켜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

합성이 아니냐는 민주의 물음이 무색했다. 즐겨찾기로 추가해둔 자사 홈페이지는 캡처 이미지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빠르게 스크롤을 내려보던 재광은 곧 메뉴를 하나하나 눌러보며 사태 파악에 나섰다.

다행히 메인에 노출된 상품들만 저 꼴이 난 듯했다. 세부 카테고리로 들어가면 정상적인 제품명이 나오는 것 같았는데.

‘이런 미친!’

채 다 확인을 하기도 전에 먹통이 되고 만다.

이런 흐름이야 뻔했다. 민주가 막 메시지를 보내왔듯이, 그리고 그걸 재광이 받아봤듯이. 사람들이 일과를 시작하며 소식을 접하고 사실 여부를 확인하려 한꺼번에 접속하는 바람에 트래픽이 터진 거다.

재광은 빠르게 포기했다. 어차피 터져버린 서버는 복구할 때까지 답이 없잖은가. 붙들고 있는다고 해서 뾰족한 수가 나올 리 만무했다. 민주에게 “찐인가 봄” 하는 답장을 보낸 그는 휴대전화를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근데, 나쁜 건가?’

그런 생각이 든 것은 두 정거장을 더 지난 무렵이었다. 어찌 됐든 자신에게 배정된 업무에 이상이 생겼으니 행복할 일은 아니지만, 지난한 시간을 돌이켜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았다.

문득, 의주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맴돈다.

- 그렇게 안일하게 구는 놈들은 일이 터져야 정신 차리니까, 문제 생기는 것도 꼭 나쁘진 않지.

틀린 말이 아니었다. 백날 해킹 위험 있다, 보안 취약하다… 하며 매달려도 거들떠보지 않은 건 개발 쪽 담당자였다. 그 때문에 업무 해결 못 한다고 시달린 건 재광이고.

- 귀찮다고 대충 올리지 말고 꼼꼼하게 잘 써. 나중에 문제 생기면 나는 할 만큼 했다고 다 까야 되니까.

더군다나 재광에게는 그간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인 한을 담아 세세하게 작성한 일지들도 있었다. 그거라면 불똥은 맞더라도 큰 불길에서 빠져나갈 구실은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자 마음이 급격히 차분해진다. 아니, 차분해진다는 말로는 다 표현이 안 될 정도다.

몸담은 회사가, 심지어 자신이 직접 담당하는 홈페이지가 인터넷에서 마구 조롱을 당하고 있건만….

내심 고소했다. 초조하던 마음은 싹 가시고 ‘이렇게 될 거라고 했잖아’ 하는 배 째라 심정이 된 것이다.

의주의 자신만만한 태도를 옮기라도 한 걸까, 의심될 만큼 맘이 가벼웠다. 먹은 것도 없는데 소화가 다 된 기분이다.

한번 바뀐 심정은 굳건히 자리를 잡았다. 더는 이 출근길이 칠흑 같지 않았다. 오히려 빨리 가서 상황을 관전하고 싶은 생각마저 든다.

재광의 입꼬리가 비적비적 올라갔다.

????

“한 대리, 제품명 손댄 거 말고는 없는 거야?”

“네. 로그 다 확인해 봤는데 메인 페이지 제품들만 변경됐습니다.”

당연히 회사는 난리가 났다. 아무리 활용도가 낮다지만, 어쨌든 사명을 대문짝만 하게 달고 있는 공식 홈페이지 아니던가.

회사의 이미지를 고스란히 담고 있어야 할 공간에 그 난리가 났고, 순식간에 SNS나 커뮤니티로 퍼지기까지 했으니 조용할 수가 없었다.

아직은 재광에게 불똥도 튀지 않은 실정이었다. 않았다기보다는 ‘못’ 튄 쪽에 가깝지만.

복구는 빨랐으나 파장이 커 수습을 먼저 하느라고 그랬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은 팀 차원에서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발 빠르게 사태를 파악해 피해 규모나 추가 정황 등을 명확히 보고해야 했다. 또, 어떤 루트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앞으로 어떻게 보완할 것인지도 확실하게 전달해야 했다.

“윤 팀장, 보고서 어디 있어?”

“재광 씨, 그동안 쓴 보고서랑 일지 정리해서 프린트 해주세요.”

언뜻 보면 번드르르하지만 결국엔 우리 잘못이 아니라고 최대한 책임을 줄이려는 작업이었다. 설설 눈치만 살피고 있던 재광이 팀장의 말에 “넵” 하고 답한다. 동시에 손은 빠르게 서류 작업물 폴더를 클릭했다.

각자가 지시받은 바를 일사불란하게 처리하느라 팀 전체가 분주했다. 숨 돌릴 틈은 조금 뒤에야 주어졌다.

“올라갔다 올 테니까 계속 주시하고 있어. 입단속들 철저히 하고.”

만반의 준비를 마친 차장이 마침내 보고하러 간 다음이었다. 그동안 숨소리마저 죽이며 수습에만 힘쓰던 직원들은 그제야 한마디씩 내뱉기 시작했다. 대개는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 언젠가 이럴 줄 알았다, 하는 얘기들이었다.

재광의 사수 또한 마찬가지였다.

“무슨 여의주나 할 만한 짓을….”

모니터를 응시하며 중얼거리던 사수는 별안간 휙, 하고 옆을 돌아봤다. 나직이 읊조리는 소리를 들은 재광이 그쪽을 쳐다본 것과 거의 동시였다.

“아 저기…. 아니에요.”

재광과 눈이 마주친 사수는 어정쩡하게 혼잣말을 갈무리했다. 의식의 흐름대로 중얼거리다가 문득 재광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급히 말을 줄이는 모양새였다.

그도 그럴 게, 재광이 의주와 함께 일을 했었단 사실은 공공연히 알려져 있지 않던가. 괜한 소릴 얹어 아는 사람을 흉보는 격이 될까 봐 적당히 하고 마는 눈치였다.

재광도 왜 그러느냐고 더 캐묻지는 않았다. 그저 대충 무마하는 사수의 태도에 맞춰 싱겁게 대꾸하고 말 뿐이었다.

“아… 네.”

왜인지 반쯤은 얼이 나간 듯한 안색으로.

이유는 간단했다. 사수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의주를 이 일과 연관 지은 거다. 지금까지는 터질 게 터졌으니 어떻게 되나 지켜보자는 마음으로 구경하느라 그렇게 연결해볼 생각을 전혀 못 했다.

재광의 머릿속으로 토이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며 부지런을 떨던 의주의 모습이 스쳐간다. 퍽 진지하게 인상을 쓰며 노트북을 붙들고 있던 모습부터 약속이 있다는 말에 내심 달가운 기색을 하던 표정, 그리고….

- 오늘은 못 데리러 간단 말이야.

- 내일부터는 내가 다시 재밌게 놀아줄게.

당장 어제 나눈 전화 통화까지 전부.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의주가 소식 하나 없는 것도 이상했다. 평소라면 민주보다도 빠르게 반응했을 텐데 말이다.

빠르게 반응만 했을까. 지금쯤 고놈들 그럴 줄 알았다며 비웃으면서도 혹시나 재광에게 불똥이 튀진 않았는지 걱정하느라 바빴을 터였다. 자신의 조언대로 각종 일지와 보고서를 꼼꼼하게 작성했는지 확인하는 것도 있지 않았을 거고.

그만큼 반응이 훤히 그려지는 그가 여태까지 조용하다니. 최근의 수상한 행적과 조합해보면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심지어 의주는 해킹에도 일가견이 있지 않던가.

지금이야 개발자로 자리를 잡았다지만, 재광이 졸업한 학과 역사상 최초로 서버를 해킹해 자신의 성적을 직접 수정한 위인이었다.

“저기, 대리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허옇게 뜬 얼굴을 한 재광은 사수를 불렀다. 잔뜩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네?”

“그냥 궁금해서 여쭤보는 건데요. 이 정도 스케일이면 회사에서는 어느 정도로 대응…할까요?”

사수는 깊게 고민하지 않고 곧바로 답했다.

“당연히 잡아낼 거고, 잡아낸 다음에는 뭐…. 고소하지 않을까요?”

“고소까지요? 회원 정보는 건드리지도 않았고 메인에 보이는 제품 이름만 바꾼 건데도요?”

아무렇지도 않게 고소 얘기가 나오자 재광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사수는 그런 재광을 꼭 순진한 아이 보듯 하며 웃었다.

“어느 정도 일해봤으니까 이제 알 거 아니에요. 회사에서 이미지 얼마나 신경 쓰는지.”

“아….”

“안에서 무슨 일이 있든 기를 쓰고 포장해서 지금까지 온 건데 그 이미지를 건드렸으니 그냥 두겠어요? 법에 저촉된다 싶은 건 다 걸고넘어질걸요?”

재광은 재차 “아…” 하고 말았다. 조금 전에는 그저 멍한 탄성이었다면 이번에는 흡사 앓는 소리처럼 흘러나왔다. 가슴 속에서는 심장이 미친 듯이 뚝딱거렸다.

물론 재광의 예상이 틀렸을 수도 있었다. 최종 테스트를 성공적으로 마친 이후 의주가 여유로워지긴 했지만, 어쨌든 론칭을 앞둔 시점이잖은가. 그렇다면 언제 또 바빠져도 이상할 게 없었다. 아니 근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난데없이 토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다가 하필 어제 중요한 일이 있었고 지금까지 아무런 연락이 없는 게 다 우연히 들어맞는 거라고?

불안하게 뛰는 재광의 심장박동은 좀처럼 잦아들 줄을 몰랐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당장 연락해서 확인을 받으면 좋겠는데 그것도 여의치가 않다.

조금 전 의주의 이름을 직접 언급한 상사가 바로 옆에 있지 않던가.

이 타이밍에 의주와 아는 사이인 재광이 돌연 자리를 피하는 것도 수상해 보일 수 있었고, 혹여 이 자리에서 의주와 연락을 하다 걸리는 날엔 상황이 더 악화될지도 몰랐다.

그래서 멍하니 모니터만 쳐다보며 생각에 빠져 있던 타이밍이었다. 문득 앞쪽 파티션 너머에서 격앙된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와, 어떡해요? 기어이 해킹 얘기 나왔어요.”

한 팀원의 말에 재광의 사수가 바로 반응했다.

“어디에요?”

“직장인 익명 앱 있잖아요. 개발자 커뮤니티에서 퍼왔다는데, 꽤 논리적으로 이번 일 해킹 가능성 크다고 써놨어요. 술렁술렁하는데요?”

새로운 국면이었다. 지금까지 빠른 복구 이후 무대응으로 온라인상의 조롱을 견디고만 있었는데. 직접적으로 해킹 가능성이 언급되었다면 이제부터는 회사 측에서도 어떻게든 빠르게 입장 표명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재광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초조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

갑작스럽게 대두된 해킹 의혹은 파장이 컸다.

지금껏 우스갯소리로 소비하던 일이 개인정보 유출과 밀접한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니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듯했다. 게시물이 퍼지는 속도가 빠른 건 물론이고, 사건을 대하는 온도 차도 확연히 달라졌다.

긴급한 사안인 만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 보고가 되는 듯했다. 진작 사무실을 나선 차장은 여태 기별이 없었으나 대응은 이루어지고 있었다.

해킹논란 GNH전자, “리뉴얼 테스트 중 해프닝, 해킹과 연관 없어…”

놀림거리가 된 상태로 묵묵부답을 고집하던 것과 달리 빠른 반응이었다. 이전의 상황이 기업 이미지 실추를 불러온다면, 해킹 의혹은 플러스알파로 손실을 일으킬 가능성이 큰 탓일 테다.

“묻고 가려나 보네.”

아마 같은 기사를 보고 있을 재광의 사수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 소리를 들은 재광이 그쪽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그래도 당한 건 사실인데 이래도 돼요?”

아주 순진한 질문이었다. 사수는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꾸했다.

“여기서 해킹당한 건 맞는데 DB는 안전하다고 하면 누가 믿겠어요. 당연히 둘러대는 거라고 생각하지.”

“….”

“신뢰도 문제잖아요. 잠깐 웃음거리는 됐어도 더 중요한 건 지키겠다는 거겠죠.”

터무니없는 소리는 아니었다. 실제로 모종의 피해 사실이 공론화된 상황에서도 기업 이미지를 위해 무대응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왕왕 있었으니까.

하물며 지금은 내부에서만 입을 다물면 얼마든지 숨기고 넘어갈 수 있는 분위기였다. 굳이 사실대로 터놓고 일을 복잡하게 만드느니 이편이 훨씬 효율적인 거다.

게다가 제품명 변경 외에는 명백한 피해도 없지 않던가. 여기에 총력을 기울여 추적하고 법정 싸움까지 가는 건 시간과 인력 모두를 낭비하는 일이 될 터였다.

물론 대외적으로는 부인하고 내부적으로는 은밀하게 보복을 계획할 수도 있겠지만….

투입되는 인력이 늘어날수록 기밀이 새어나갈 확률만 높아지는 셈이었다. 뒤늦게 겉과 속이 다른 모습을 들키기라도 했다가는 오히려 더 큰 조롱을 당할 게 뻔했다.

“벌써 작업 들어간 거 같은데요?”

재광이 “아…” 하며 멍하니 있자 사수가 다시 한번 말을 건넸다. 초점이 돌아오는 재광을 보고는 턱짓으로 가볍게 모니터를 가리킨다. 재광은 용케 그 뜻을 알아차리고 재차 기사를 살폈다.

기사 내용 자체는 토씨 하나 바뀐 게 없지만 댓글 반응은 점차 변하고 있었다. 무턱대고 불신부터 하는 댓글들이 밀려나기 시작한 것이다.

11:49

방구석 코난들 납셨넼ㅋㅋㅋ 애초에 해킹씩이나 했으면 저거만 바꿔놓고 가겠냨ㅋㅋ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밖에 나가 바람도 좀 쐬고 그래라

11:48

담당 직원만 불쌍. 테스트 잘못 했다가 대국민 조롱당함. PTSD 올듯.

11:48

하여간 본인 입맛대로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사실대로 말을 해줘도 듣질 않으니 원… 음모론 펼치시는 분들 사회생활은 제대로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11:47

테스트 좋아하네 갑자기 분위기를 저렇게 확 바꾼다고? 개뻥

11:45

당연히 아니라고 하겠지 ㅋㅋㅋ 해킹이 사실이면 난리 나니까ㅋ

멍하게 “아…” 하던 소리는 이제 “와…”가 됐다. 재광은 솜털이 쭈뼛 서는 기분을 느꼈다. 어쩐지 소름이 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다행인 것 같기도 해 혼란스러운 심정이었다.

“다들 잠깐 회의실로.”

그리고 어떤 감정이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사이, 차장이 돌아왔다. 그가 툭 던지는 말에 팀원들이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난다. 재광도 그 행렬에 섞여 회의실로 향했다.

“….”

상석에 앉은 차장은 진이 다 빠진 안색이었다. 착잡하게 마른세수를 하는 동안 팀원들은 일제히 숨을 죽였다. 잔뜩 피곤한 내색을 하던 차장은 조금 뒤에야 짧게 숨을 몰아쉬며 입술을 뗐다.

“이번 일….”

“….”

“묻기로 했다.”

재광의 긴 눈매가 일순 커졌으나 아주 잠시였다. 그는 금세 평정을 되찾고 덤덤한 얼굴을 했다. 겉으로는 겸허히 사태의 결과를 듣는 척하고 있지만 속에서는 심장이 쿵덕쿵덕 뛰었다.

하지만 높은 심박수와는 반대로 안도하는 마음이 지배적이었다. 이번 사태가 의주의 작품일 거라고 무의식중에 확신한 탓이 클 테다. 재광은 괜히 침을 크게 삼키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이렇게 된 이상 첫째도 입조심, 둘째도 입조심인 거 다들 알지? 보안 철저히 해.”

그러면서도 차장이 하는 말에는 우직하게 “넵” 하고 답했다.

차장은 위에서 협의된 사항을 바탕으로 수습 방안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모니터링 강화와 홈페이지 전면 개편 등, 함축하자면 결국 업무가 늘어날 거라는 얘기였다. 다들 순순히 수긍하며 간간이 소리 내 대답했다.

“그러니까 다들 기밀 유지 철저히 하고, 이만 해산. 윤 팀장은 신경 써서 업무 분담해줘.”

장황하게 이어지던 말은 재차 기밀을 강조하며 끝이 났다. 이제 업무에 파묻힐 일만 남은 팀원들이 부지런히 일어나 회의실을 나선다.

재광도 마찬가지였다. 습관처럼 의자를 하나하나 집어넣으며 문을 향해 다가가는데, 왜인지 자리를 지키고 있던 차장이 그를 부른다.

“재광이는 잠깐 남아서 얘기 좀 하자.”

재광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차장에게 직접 호명되기는 처음이라 적잖이 놀란 듯했다. 그러나 이내 침착을 되찾으며 차분히 답했다.

“아… 네.”

????

재광이 의주를 만난 건 늦은 퇴근 이후였다.

어제 거사를 치르고 이제는 한가해졌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려는 모양이었다. 의주는 두 시간 전부터 회사 인근에 차를 세워놓고 대기 중이었다. 익숙한 차체를 발견한 재광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조수석 문을 벌컥 열었다.

“미쳤어요, 진짜?”

근 이틀 만에 보면서 반기는 인사말도 없었다. 재광은 답지 않게 격앙된 목소리를 내어 쏘아붙였다.

그럴 만도 했다. 어차피 벌어진 사태, 수습하느라 격무에 시달리는 건 아무렇지도 않지만 재광은 남모르게 속앓이까지 해야 했으니까.

혹시라도 사건의 주범으로 의주가 언급이라도 될까 봐 온종일 가슴이 두근거렸다. 일단은 묻고 간다지만 사측의 입장이 바뀌진 않을지 불안해 업무 시간 내내 상사들 대화에 귀를 열고 있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는 당당하게 회사 근처까지 와 시간을 때우고 있으니 차분할 수 있을 리가.

“팀장님이 그런 거 맞죠!”

바락 언성을 높이는데도 의주는 눈 하나 깜짝 안 했다. 굳이 숨기려는 생각도 없는지 해끔한 표정으로 곧게 눈을 맞추며 그런다.

“깜짝 선물 어땠어?”

물음표가 떨어지자마자 기다란 눈매가 슬며시 휘어지며 웃음기를 띠었다. 순간 할 말을 잃은 재광이 입술만 두어 번 벙긋거리다가 만다. 그는 조금 뒤에야 다시 말을 꺼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개인이 기업을 왜 건드려요? 무슨 일이 날 줄 알고.”

“내가 거길 몰라? 어떤 식으로 나올지 뻔히 아니까 맞춤형으로 한 거 아냐.”

“허.”

“생각보다 반응이 좀 느려서 품을 더 들이긴 했지만.”

“품은 또 무슨 품을….”

한결같이 태평하게 구는 의주에게 대꾸하려던 재광은 금세 말끝을 흐렸다.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의주의 말을 곱씹던 그는 한층 경악한 표정이 됐다.

“설마 그 커뮤니티 글…!”

대책을 논의하느라 침묵만 유지하던 회사를 급히 움직이게 만든 그 글 얘기였다. 해킹 가능성을 제시하며 여론을 바꿔놓은 게시물. 그러고 보니 출처가 개발자 커뮤니티라고 들었던 것도 같았다.

- 내가 안 풀릴 게 뭐가 있어. 맘만 먹으면 껌이지. 근데 좀 부가적인 계획을 세워야 해서 고민하느라고.

잊고 있던 기억까지 떠오른 다음에는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그럼 그 계획이라는 게….”

“여의주 님의 큰 그림이지.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재광의 반응을 감탄으로 해석한 듯한 의주가 씨익 웃는다. 기가 차 헛숨을 내쉰 재광은 시트에 푹 기대 이마를 짚었다.

아무리 치밀한 전략을 세워 실행한 일이라 해도 여전히 이해가 안 됐다. 기업이 일개 개인을 바닥으로 끌어 내리는 건 어렵지도 않을 텐데 대체 무슨 배짱으로 이런 짓을 벌였나 싶은 거다. 인간이 하는 일인 이상 무조건 뜻대로 된다는 보장도 없는데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또다시 심장이 벌렁거리는 것만 같았다. 조용하던 재광은 별안간 발딱 일어나 의주의 팔뚝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아!”

앙탈 수준이 아니었다. 감정을 담아 제대로 힘을 실어 때리자 의주가 놀란 내색을 하며 쳐다본다.

“아, 왜.”

“그냥 넘어가기로 했으니까 다행이지, 소송이라도 걸렸으면 어쩌려고 그랬어요? 위험하게 진짜.”

잔뜩 심각한 표정으로 다그치는데도 의주는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운전석 시트에 고개를 털썩 기대며 눈을 감아버린다.

가슴 위로 두 손까지 모은 모양새가 꼭 장난으로 ‘나 죽었소’ 하는 것만 같았다. 그는 눈을 감은 상태로 입술만 달싹거렸다.

“광아, 나는 진짜….”

“….”

“네가 나 걱정할 때마다 너무 짜릿해. 미치겠어.”

그렇게 말하는 얼굴에는 만족감이 흘러넘쳤다. 재광은 당장이라도 ‘이 미친놈이’ 하고 싶은 걸 꾹 눌러 참았다.

결국에는 끙, 앓는 소리만 내는 게 다였다. 덕분에 차 안에는 잠시 적막이 내려앉았다.

길지는 않았다. 시트에 눕다시피 한 의주가 도로 자세를 바로 세우고 재광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근데 네가 나한테 익숙해져서 잊은 게 하나 있어.”

“…뭘요.”

“광아, 네 애인 천재야.”

누가 들으면 단박에 비웃을 소리를 퍽 진지하게도 한다. 의주는 확신이 넘치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적당히 하고 끝내려고 여론을 끌어들이긴 했지. 근데 예상대로 안 됐다고 치자. 그랬으면 뭐, 내가 걔네한테 잡혔을 거 같애?”

동의를 구하듯 눈썹을 달싹이는 움직임에서는 자신감이 철철 흘렀다. 거기다 대고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는 재광은 다 포기한 듯 조수석에 늘어졌다. 그 바람에 잡힌 손이 스르륵 빠진다.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몹시도 노곤했다.

“다음부터는 절대 그러지 마요, 진짜. 나 때문에 그런 짓 했다고 하면 내가 맘이 편하겠냐고요. 종일 심장 터지는 줄 알았네.”

진심으로 하는 얘기였으나 의주는 여전히 태연했다. 그는 축 늘어진 재광의 몸 위로 안전벨트를 둘러주고는 세상 싱그럽게 웃었다.

“나도 사랑해.”

사람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 주제에 지상 최고의 로맨티시스트 같은 말투를 하고 있었다.

????

정작 중요한 질문은 의주의 집에 도착하고도 한참 뒤에야 흘러나왔다.

“대외적으로는 그냥 넘어간다 치고. 그래서 너 일은 어떻게 됐어?”

이 모든 사달이 재광의 업무에서부터 시작된 점을 고려하면 늦어도 한참 늦은 타이밍이었다. 의주의 옷을 입고 치킨을 뜯던 재광은 콜라로 입안을 비운 뒤 대답했다.

“어쨌든 제가 담당하던 업무에서 생긴 일이니까 완전히 책임에서 배제될 수는 없고….”

“없고?”

“그동안 업무 요청하고 그런 것들 다 참작해서 저는 시말서 정도로 끝내기로 했대요.”

팀 회의가 끝나고 재광을 남긴 차장이 직접 전한 얘기였다. 공식적인 담당자였으니 책임을 완전히 면하진 못할 거라고.

다만 그간의 노고를 참작해 시말서 수준으로 정리될 것이며, 사유는 업무 미숙 정도로 에두르라 했다.

그리고 또….

“홈페이지 건은 뭐, 이제 대리님한테 넘어가서 저랑은 상관없게 됐어요.”

해당 업무 담당자가 교체될 거라고도 했다.

차장은 이 사실이 맘에 걸려 재광을 따로 남긴 눈치였다. 담당 업무에서 사고가 터진 것만으로도 버거울 텐데, 그로 인해 한순간 일까지 빼앗긴 꼴이지 않던가.

그 때문에 신입사원이 기가 죽고 상심할 거라 생각한 듯했다. 차장은 몇 마디 심심한 위로의 말을 전하며 재광을 격려했다.

하지만 재광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어디선가 의주의 이름이 나올까 봐 불안해하느라 상심할 틈이 없었다. 또, 아주 이해 못 할 처사가 아니기도 했고.

흔한 상황이지 않던가. 어떠한 문제가 생겼을 때 상급자가 나와 수습하는 일은 빈번했다.

이번에도 그와 같은 맥락일 터였다. 신입사원이 담당하던 업무에서 사고가 났으니 사수가 해결하는 것뿐이었다. 보다 업무에 능숙한 직원이 수습을 도맡는 그림이 윗사람들에게 더 미더워 보이기도 할 테니까.

그렇기에 재광도 순순히 받아들였다. 딱히 불만이 있지도, 끝까지 마무리하지 못한 업무에 미련이 남지도 않았다.

그런데 의주는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걸 왜 딴 사람한테 넘겨? 여태 일은 다 했는데 적용을 안 해줘서 이 사달 난 거잖아. 근데 인제 와서 담당자를 왜 바꿔? 누구 좋으라고?”

일 욕심, 실력에 대한 자부심이 넘치는 인간이라 그런지 의주는 담당자 변경이라는 수습 방안이 상당히 언짢은 듯했다.

“저한테 줬다가 해킹당했는데 계속 맡겨놓고 싶겠어요?”

“그게 왜 네 잘못이야. 백날 천날 말해도 안 들어먹은 개발자 잘못이지.”

“그래서 그분은 징계위원회 넘겨질 거래요.”

재광이 굳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까지 꺼낸 의도는 ‘그러니 자신은 가볍게 넘어가는 수준’이라는 걸 어필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미 맘이 상한 의주에게는 잘 먹히지 않았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그 정도는 충분히 수습 가능한 실력인데 왜?”

“그걸 팀장님이 어떻게 알아요. 대리님이 가져갔으니까 제가 모르고 지나친 것도 더 꼼꼼하게 찾아낼 수 있죠.”

“왜 몰라? 내가 너를 석 달을 데리고 있었는데.”

“그때랑 지금이랑은 하는 일이 다른….”

하는 일이 다른데 자신의 능력을 어떻게 아느냐고 물으려던 참이었다. 따박따박 받아치던 재광은 돌연 말을 먹었다.

일일이 대꾸를 해봐야 끝이 나지 않을 언쟁이라는 걸 아는 탓이다. 게다가 이걸 가지고 의주와 제가 실랑이를 벌일 이유도 없었고.

“치킨이나 먹어요.”

그래서 그냥 화제를 돌려버렸다. 누가 봐도 더 말씨름할 의향이 없다는 티가 팍팍 나는 목소리였다. 의주는 아직 못 한 말이 많은 듯 “야, 광” 하고 불렀으나 재광은 그마저도 듣지 않았다.

“어차피 저 편해지라고 그렇게까지 한 거잖아요. 그래서 저는 그 일에서 분리됐고, 충분히 후련해요. 그럼 된 거 아니에요?”

“진짜 그렇게 생각해?”

“네. 그러니까 우리끼리 말꼬리 잡고 그런 거는 그만해요.”

이전에도 마구 험악한 분위기는 아니었으나 재광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층 온화한 공기가 된다. 조금은 뚱하던 의주의 표정이 금세 사르르 녹았다.

재광의 입술 새로 나온 ‘우리’라는 두 글자 때문이었다. 사귀기 전이나 후나 변함없이 구는 재광의 언사치고는 상당히 친밀한 단어 선택이 아닐 수 없었다.

참 이상했다. 연애가 처음도 아니고, 이날 이때껏 애정표현을 안 받아보고 산 것도 아닌데 이게 뭐라고 좋아죽겠는 거다. 진실의 광대가 볼록 솟고, 입꼬리가 절로 실실 올라간다.

어차피 의주도 어떻게든 재광을 이겨 먹고 싶은 생각은 없던 차라 더 쉽게 마음이 넘어갔다. 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만하고 치킨 먹어, 든든하게 먹어. 그래야 오늘 버티지.”

“하루 다 갔는데 버틸 게 뭐가 있….”

버틴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자각한 순간 재광이 말을 끊었다. ‘아휴’ 하는 듯한 얼굴을 보는 의주의 눈에서 큼지막한 하트가 마구 쏟아져 나왔다.

????

‘아휴’가 ‘아흑’이 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재광은 잘 버티고, 잘 잤다.

오랜만에 의주의 집에서 맞는 출근길이었다. 조수석에 올라타는 재광의 얼굴에 졸음기가 한가득이다. 입가를 가리고 늘어지게 하품을 하던 그는 불쑥 물었다.

“맞다. 론칭 얼마 안 남지 않았어요?”

낭만인의 신규 앱 얘기다. 재광이 인턴을 할 때부터 준비 중이던 앱이 드디어 론칭한다는 소식을 듣기는 했었는데 최근에 워낙 정신이 없어 깜빡하고 있던 차였다.

의주는 가벼이 고개를 까딱였다. 피곤하기는커녕 평소보다 더 쌩쌩한 안색으로.

“응. 다음 주”

도톰한 입술 새로 흘러나오는 목소리 또한 힘이 넘쳤다. 오랜 시간 공들인 앱을 드디어 출시하는데도 떨리거나 불안해하는 기색은 전혀 보이질 않는다. 오로지 기대와 설렘이 그득했다.

론칭 일자에 동요한 쪽은 오히려 재광이었다. 나른하게 풀렸던 눈이 순간 동그래진다.

론칭이 얼마 안 남았다고 듣기는 했지만 이렇게나 금방일 줄은 몰랐던 탓이다. 무엇보다도 의주가 너무 느긋해 기한이 훨씬 더 많이 남은 줄로만 알았다.

실제로도 토이 프로젝트랍시고 재광의 회사 홈페이지를 뒤집는 데 열과 성을 다하지 않았나. 누가 봐도 시간 많은 사람의 행보였건만 이렇게나 큰일을 코앞에 두고 있었을 줄이야.

“준비는 제대로 하고 있는 거예요?”

다시 한번 묻는 재광의 목소리에 우려가 섞였다.

그럴 만도 했다. 앱 개발 초기, 재광이 인턴으로 있던 시절에도 기능 테스트를 앞두고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으니까. 최근에는 또 어떻고. 최종 테스트를 앞둔 의주는 한동안 얼굴도 보기 힘들었다.

테스트만 해도 그 정도인데 정식 론칭이라고 다를 리 없었다. 다르지 않기만 할까. 이전보다 훨씬 더 정신없고 바쁜 게 당연할 것 같았다.

그래서 물었더니 의주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짓는다.

“자기야, 내가 제대로 안 하는 일이 어디 있어.”

“….”

“이미 완벽한 앱으로 만들어 놨지.”

당연하게도 재광의 우려를 덜어줄 의도로 부러 하는 얘기는 아니었다. 그렇게 말하는 투나 목소리, 표정과 자세까지 전부 자신감이 철철 흘러넘친다.

“네, 뭐. 그럼 됐어요.”

“스토어에 풀리면 1등으로 다운 받아. 알았지?”

자신 있기만 할까. 하루빨리 제 완벽한 작업물을 보여주고 싶어 안달이 난 것 같기도 했다.

재광으로서도 완전히 이해 못 할 태도는 아니었다. 조금의 긴장감도 없는 모습은 신기하긴 하다만. 어쨌든 오랜 시간 공들인 결과물이 드디어 빛을 보는 셈이니 디데이가 기다려진대도 이상할 건 없었다.

그래서 순순히 “노력해볼게요” 하고 마는데, 의주가 불쑥 흥미 도는 목소리를 낸다.

“그때쯤에 좀 한가하면 서버 한번 뚫어 봐도 되고.”

언뜻 들으면 권유처럼 들리지만 이 역시 자신감에서 기인한 말이었다. 절대로 쉽게 접근할 수 없을 거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게 옳았다.

한결같이 자부심 넘치는 의주를 흘긋 돌아본 재광이 피식 웃었다.

“뚫으면요?”

괜히 하는 소리였다. 당분간은 어제 일을 수습하느라 팀 전체가 바쁠 텐데 남의 앱이나 해킹하고 있을 여유가 있을 리 없잖은가. 더군다나 상대가 의주라면 밸런스 자체가 이미 무너진 게임이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받아친 건 어디까지나 장단을 맞춰주려는 의도였다.

“뚫으면 스카웃해야지. 낭만인 보안 전문가로.”

“어떡해요. 그 자리 계속 공석이겠네.”

그러나 의주에게는 제법 진지한 제안이었던 듯했다. 재광이 불응할 의사를 내비치자 곧바로 “아 왜!” 하며 서운한 목소리를 낸다.

“왜는 왜예요. 덕분에 한동안 바쁠 텐데 그럴 시간이 어디 있어요.”

차분하게 받아치는 말에 내쉬는 한숨에서도 아쉬운 내색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의주가 한숨을 쉬느라 잠시 대꾸를 멈춘 사이, 차 안에는 짧은 진동음이 울려 퍼졌다. 찰나의 정적 덕에 더욱 선명하게 들리는 소리였다.

진동의 주인은 재광이었다. 그는 작게 몸을 들썩이며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송민주

김재광 이거 봄?ㅋㅋㅋㅋㅋ

해시태그 눌러봐ㅋㅋ 오전 8:06

짧은 진동을 울린 이는 민주였다. 단체 채팅방에서 재광을 정확히 지목한 그는 링크 하나를 공유했다.

바로 어제, 홈페이지 해킹 소식을 접할 때와 비슷한 양상이었다. 재광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고서 링크를 눌렀다.

민주가 보낸 주소는 한 SNS로 연결됐다. 팔로워 숫자로 보아 소위 말하는 인플루언서의 계정인 듯한데, 피드에 재광의 회사에서 출시한 제품 사진이 있었다.

#비싸지만_돈값하는_무선청소기

의주가 바꿔놓았던 제품명을 그대로 가져다 쓴 해시태그도 함께.

헛웃음이 터지려는 걸 참은 재광은 민주의 말대로 해시태그를 눌렀다. 그러자 이번에는 SNS상에 올라온 동일 제품 사진들이 와르르 뜬다.

어제처럼 회사를 조롱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무슨무슨 챌린지처럼 너도나도 인증하는 쪽에 가까웠다. 말 그대로 비싼 제품이다 보니 명품백이나 시계를 자랑하듯 올리는 것 같았다.

“하.”

끝내 숨처럼 웃어버리고 만 재광은 슬며시 옆을 돌아봤다. 온라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는 의주는 잔뜩 해끔한 낯으로 운전 중이었다.

난 놈은 난 놈인 모양이라고. 그런 생각을 하며 빤히 쳐다보자 신호에 걸린 틈을 타 의주가 이쪽을 돌아본다.

“왜? 옆에 있는데도 막 보고 싶고 그래?”

가볍디가벼운 목소리로 말하며 싱긋 웃는 얼굴에는 장난기가 그득했다. 재광은 별일 아니라는 양 고개만 설설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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