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Context Switching
- 나는 진짜 꼭 연애라고 안 해도 되니까 너 잡아둘 수 있으면 계속 이전처럼 지내려고 했어.
의주가 왜 그런 결심을 했었는지. 재광은 시간이 조금 지나고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한바탕 난리가 났던 그 날로부터 꼬박 일주일이 지나는 동안 두 사람 사이는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변할 게 없는 사이였다. 원래부터 연락(메시지나 통화를 가리지 않고)이 잦았고, 시간이 맞으면 부담 없이 만났으며, 밥이나 커피도 심심치 않게 즐겼지 않던가. 심지어는 섹스마저도.
그러다 보니 색다를 게 없었다. 각자의 일이 바쁘다 보니 부지런히 연락을 주고받으며 짬이 날 때 얼굴을 보는 식의 만남이 지속됐다.
아. 세세히 들여다보자면 바뀐 게 있기는 했다.
여의주 팀장님
자기야 언제쯤 퇴근할 거 같아? 오후 8:16
섹스 파트너로 지낼 때는 재광의 강력한 주장으로 금기시되었던 ‘자기’라는 호칭이 꽤 자주 등장했다. 메시지든 육성이든 간에.
부러 재광을 부끄럽게 해 놀려먹으려는 의도는 아니지 싶었다. 의주의 ‘자기야’는 오히려 이전과 다름없는 사이에서 두 사람이 사귄다는 사실을 환기하는 장치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실제로도 ‘야, 광’ 혹은 ‘광아’ 하고 부르는 경우가 훨씬 많았고.
그래서인지 더는 ‘자기’라는 표현을 보거나 들어도 아무렇지 않았다. 늦게까지 사무실을 지키고 있던 재광은 눈으로 메시지를 한 번 훑고는 무덤덤하게 답을 보냈다.
오래 안 걸릴 거 같아요. 2-30분 내로? 오후 8:17
여의주 팀장님
나 집 가서 마저 일 할 거거든. 그럼 가는 길에 너 태워 갈게.
잠깐 들렸다 가 오후 8:18
ㅇㅇ 오후 8:18
도착하면 얘기해요. 오후 8:19
사실, 짬이 날 때 얼굴을 본다고는 하지만 그마저도 의주의 공이 컸다.
아무래도 업무 숙련도가 월등하고, 회사 내에서의 위치도 다르다 보니 스케줄 운용이 수월한 것이다. 그가 재광의 일정에 맞춰 자신의 잔업을 조절하는 터라 바쁜 와중에도 꼬박꼬박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오늘도 기꺼이 짬을 내겠다는 의주에게 간단히 답장한 재광은 서둘러 업무를 마무리하려 보고서 파일을 열었다. 다행히 온종일 코드와 씨름하던 건 다 끝났고, 남은 건 서류 작업이라 속도를 내려면 낼 수 있는 상황이었다.
재광은 보고 양식에 맞춰 빠르게 날짜를 기입했다. 그러나 막힘없이 내용을 써 내려갈 것 같던 손가락이 이내 멈칫거린다.
머릿속에 꽁꽁 묻어두었던 목소리 하나가 불쑥 떠오른 탓이다.
- 너는 아직 학생이라 몰라. 간신히 퇴근하고 나면 얼마나 기운 빠지는지 알아?
첫 연애의 막바지에 들은 말이었다. 그즈음, 취업계를 내고 회사생활 중인 상대방에게 통 만날 수가 없다며 서운함을 토로했다가 들은 대답으로 기억한다.
싸움까진 아니고 약간의 실랑이였다. 말 안 해주는데 내가 어떻게 아냐, 말하면 네가 아냐…. 그러다가 흐지부지되고 말았는데,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헤어졌다.
- 말을 해야 알지. 안 하는데 내가 어떻게 아냐? 내가 도사야? 그럼 벌써 돗자리 깔고 돈 쓸어 담았지!
그게 얼마나 억울했던지 술을 들이붓고 친구들에게 한탄도 했었는데.
이제야 전 여자친구의 맘을 조금 알 것 같았다. 갓 입사해 회사에 적응하느라 진을 다 빼고 나면 다른 무언가를 할 만한 기력이 남질 않았던 거다.
주말이면 마냥 집에 틀어박혀 쉬고도 싶었겠지. 그리고 그게 연애가 끝물로 치달았다는 신호였을 테고.
그걸 알아차리지 못해 억울해하던 과거의 자신을 떠올린 재광은 픽 웃었다. 그리고는 바쁜 일정을 쪼개 자신과 시간을 보내자 말하는 의주의 메시지를 다시 확인했다.
싫지 않았다. 아니, 싫기는커녕 명백하게 좋았다. 자신을 향한 오롯한 애정은 실로 간만이라. 설레는 맘으로 누군가를 보는 것도 참 오랜만이라 좋았다.
“아….”
지난 메시지들을 훑어보던 재광은 곧 시간을 확인하고는 황급히 창을 닫았다. 이럴 시간에 서둘러 보고서 작성을 하고 의주가 도착할 즈음에 맞춰 나가는 게 훨씬 효율적일 듯했다.
겨우 날짜를 써놓고 멈춰버린 보고서 화면에 금세 글자가 늘어났다.
????
“일은 다 끝내고 온 거야?”
조수석 문을 열자마자 의주가 묻는다. 차에 올라타는 재광에게 대뜸 팔을 뻗는 동작이 자연스러웠다. 익숙하게 시트에 기대앉은 재광 또한 대수롭지 않게 손을 내어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할 건 다 마무리했어요. 팀장님은요? 일 많이 남았어요?”
“나야 맨날 똑같지. 밥은. 먹었어?”
“아뇨. 조금이라도 빨리 끝내려고 그냥 건너뛰었어요.”
“야 그래도 밥은 먹으면서 해야지.”
“틈만 나면 샌드위치로 대충 때우는 사람이 할 얘긴 아닌 거 같은데.”
진득하게 매만지던 손을 놓고 슬슬 출발할 준비를 하던 타이밍이었다. 재광의 말에 의주가 히죽 웃는다.
“광아, 나는 워낙 건강체잖아. 나랑 비교하면 안 되지. 너는 허약하니까 신경 써서 챙겨 먹어야 된다고.”
“저보고 허약하다는 사람은 팀장님밖에 없을걸요.”
“그거야 다른 사람들은 네가 두 번 하면 나가떨어지는 걸 모르니… 아!”
결국에는 꽉 쥔 주먹으로 허벅지를 강타당하고 나서야 의주의 입이 다물렸다. 물론 잠시뿐이었지만.
냅다 다리를 내려친 재광과 달리 부드러운 손길로 그의 허벅지를 쓰다듬은 의주는 자신을 소중히 다뤄달라 당부했다. 그런 뒤에야 기어를 바꾸며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한 차례 폭력 비슷한 게 오갔으나 그 정도로 흐려질 분위기는 아니었다. 앞에 가는 차를 주시하며 일정 속도를 유지하던 의주는 차 안이 언제 어수선했냐는 듯 차분한 투로 일순 끊긴 대화를 이었다.
“회사에서는 별일 없었고?”
“똑같죠, 뭐.”
일상적인 물음에 걸맞는 담담한 대꾸였다. 그러나 말끝에는 한숨이 묻어나온다. 똑같다는 말의 의미가 별 탈이 없었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재광이 처음으로 커뮤니케이션을 넘겨받았던 자사 홈페이지의 보수 문제는 아직까지도 해결이 안 된 차였다. 그나마 상사가 한 번 개입해준 뒤로는 담당 부서에서 듣는 시늉이라도 해주고 있긴 한데, 실질적인 보완은 아직이었다.
“그래도 대리님이 한 번 뭐라고 한 뒤로는 말을 들어주긴 하거든요? 근데 세 개를 요청하면 질질 끌다가 겨우 하나 해주니까 끝이 안 나요.”
“아니, 무슨 배짱으로?”
“타격이 있을 만큼 피해 입은 적이 없다는 거죠. 아시잖아요. 저희 홈페이지 어차피 상품 소개하고 지점으로 연결해주는 루트로만 사용하는 거. 그래서 별로 중요하게 생각을 안 하는 거 같아요.”
매끄럽게 핸들을 돌리던 의주가 혀를 끌끌 찼다. 별말은 않지만 그놈들 여전하다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은 반응이었다.
“사실 저도 어느 정도 이해하긴 하는데요. 그래도 저는 이게 저한테 할당된 일이니까 어떻게든 해야 되잖아요. 이렇게 오래 끌 만한 일도 아닌데 계속 해결이 안 되니까 저만 답답하죠.”
의주는 가는 눈으로 신호를 살폈다. 어떻게 하면 재광에게 멋대로 구는 인간들을 한 방 먹일 수 있을까 고민하는 모양새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개를 설설 젓고 만다.
“나 같으면 진작 들이받았을 텐데 너한테 그러라고 할 수도 없고.”
“안 되죠. 입사한 지 얼마나 됐다고.”
“야, 광. 거기 아직도 보고서니 뭐니 서류 쓰는 거 좋아하지.”
“아마도요?”
“귀찮다고 대충 올리지 말고 꼼꼼하게 잘 써. 나중에 문제 생기면 나는 할 만큼 했다고 다 까야 되니까.”
제법 진지하게 하는 조언에는 재광이 피실 웃었다.
“꼭 문제 생기길 바라는 것처럼 얘기하네요.”
“그렇게 안일하게 구는 놈들은 일이 터져야 정신 차리니까, 문제 생기는 것도 꼭 나쁘진 않지.”
재광은 이번에도 별다른 의미 없이 웃어넘기며 몸을 달싹거렸다. 시트에 푹 파묻혀 있던 자세를 고쳐 앉는 행위였다. 편한 각도를 찾느라 잠시간 부산스럽게 움직이던 그는 곧 안정을 되찾고 의주를 돌아봤다.
“팀장님은요? 테스트 준비는 잘 돼가요?”
여태 자신의 신세 한탄을 했으니 저 역시 들어주는 게 순리라 생각해 물은 참이었다. 신중하게 정면을 주시한 의주가 어깨를 한껏 치켜 올리고 거만한 티를 낸다.
“누가 하는 건데. 당연히 잘 돼가지.”
“으응, 네.”
재광은 ‘어련하시겠어요’ 하듯 대꾸하고 말았다. 그러자 돌아올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가볍게 웃은 의주가 곧바로 말을 붙인다.
“아, 근데 새 소식은 하나 있다. 우리 개발자 한 명 더 뽑기로 했어. 이번엔 경력으로.”
“아 진짜요?”
“민선호가 론칭한다고 끝나는 거 아니니까 미리 더 뽑자고 그러더라. 그때 가서 채용해 봐야 또 도망가고 어쩌고 하면 정작 필요할 때 공석이라고.”
“맞는 말인 거 같아요. 잘됐네요.”
말투는 무덤덤하지만 재광으로서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 내뱉은 말이었다. 어쨌든 일손이 늘어나면 독박 쓰듯 업무를 끌어안은 의주에게도 여유라는 게 조금은 더 생길 테니까.
“그치. 근데 지금 있는 인턴은 자기 있는데 왜 사람이 더 필요하냐고 그러더라. 또라이야, 걔.”
그런데 이어지는 의주의 대꾸에는 묘하게 표정이 굳고 만다.
그간 잊고 있던 인턴의 존재를 상기한 탓이다. 그러고 보면 그날 무턱대고 사무실에 쳐들어간 것도 그 새로운 인턴 때문이었는데. 오해를 풀고 보다 긴밀해진 관계에 취해 있느라고 여태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인턴이 출근을 잘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뒤로 의주에게서 그의 이야기를 접하기는 처음이었다. ‘또라이’라는 표현은 투박했으나 그렇게 부르는 의주의 어조만은 치원의 얘기처럼 친근하게 들렸다.
그래도 같이 일만 하는 사이인 걸 충분히 알고 있기에 내심 신경 쓰인다는 내색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 인턴 분이랑은 꽤 잘 지내나 봐요.”
아무렇지 않게 한마디 건넨다는 게 영 뜻대로 되질 않는다. 누가 봐도 ‘나 그 사람 거슬려요’ 하는 말투로 흘러나가고 만 것이다.
그러니 의주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었다. 풋, 웃음을 터뜨린 그는 신호에 걸린 틈을 타 조수석을 휙 돌아봤다.
“왜? 잘 지내는 거 싫어? 질투 나?”
망했다 싶은 재광은 잽싸게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딱히 효과가 좋지는 않았다. 창문으로 실실 웃는 의주의 얼굴이 반사되어 보였다.
“그런 거 아닌데요.”
“얼굴은 그런데요.”
애써 아닌 척해 봐도 먹히질 않는다. 의주는 재광의 볼을 손끝으로 톡 치며 흡족하게 웃었다. 그러더니 이내 손을 내려 재광의 허벅지를 슬며시 누른다.
“걱정 마, 자기야. 나는 그런 타입 안 좋아해.”
재광이 손길을 밀어내려 해도 소용없었다. 손이 닿자마자 의주가 냅다 깍지를 껴 옭아맨다.
그쯤 되자 재광도 포기했다. 하는 수 없이 손을 맞잡았더니 낮게 웃는 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재광은 민망함을 이기지 못해 괜한 이마만 창문에 콩 박았다.
????
“이 시간에 너무 거한 거 아니에요?”
의주의 부름에 달려온 재광의 첫마디였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혼자 부엌에 틀어박혀 부산스럽더라니. 저녁을 건너뛰었다는 재광의 끼니를 챙기려 늦은 시간에 밥상을 차린 것이다.
음식 냄새가 거실까지 진동해 밥을 준비하고 있단 건 재광도 알았다. 그러면서도 소불고기가 수북이 쌓인 비주얼을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성이 고맙긴 한데, 이 시간에 상을 차리게 만들었다는 미안함과 황송한 차림새에 몸 둘 바를 모르게 된다. 그래서 엉거주춤 옆에 서 있기만 하자 의주가 냉큼 다가와 재광을 의자에 앉혔다.
“뭐가 거해. 나 원래 이렇게 먹는데?”
재광의 부담을 덜어주려 부러 하는 소리는 아닐 터였다. 의주의 집에서 식사할 때는 늘 메인 반찬이 뚜렷한 상차림을 받아봤지 않나. 식당 수준의 플레이팅도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네, 뭐. 아무튼 잘 먹을게요.”
“응. 많이 먹어.”
재광이 수저를 집어 들 때가 되어서야 의주도 맞은편에 가 앉았다. 저녁을 대충 먹어 허기진다더니 같이 식사를 할 요량인 듯했다.
“맛있어요.”
“그치. 이거 나물은 집에서 보내준 건데 이것도 맛있어. 먹어 봐.”
맛있다는 한마디에 헤벌쭉 웃은 의주가 신이 나서 옆에 있던 나물까지 손수 밥 위에 얹어준다. 하는 양을 가만 지켜보던 재광은 슬그머니 시선을 내리깔며 입매에 힘을 꽉 줬다.
- 너는 내가 얼마나 참고 있는지를 좀 알아야 돼.
몰래 면접을 본 다음날, 딱 이 자리에서 들었던 얘기가 생각난 탓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뭘 참느냐며 어리둥절해 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 뜻을 너무도 잘 알았다.
의주는 처음 사귀자고 했던 그때부터 줄곧 재광에게 진심이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심지어는 좋아하는 마음을 더는 참고 싶지 않다고까지 얘기했었다.
어떻게든 재광을 꼬여내려 말만 번드르르하게 늘어놓은 것 같지는 않았다. 의주는 그 고백 이후 정말로 이전과 다른 모습을 많이 보였으니까.
사귀기로 한 다음부터 사람이 180도 변했느냐 하면 그건 아니지만, 표현에 있어 마음껏 솔직해진 느낌이 있었다.
퇴근 후 만났을 때 환하게 맞아주는 표정은 물론이고, 기다렸다는 듯 손을 잡는 행동이나 손등을 간질이는 손길 따위가 모두 이전과 달랐다. 장난기를 쏙 빼고 안달이 나는 속내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만 같았다.
지금도 그랬다. 이전 같았더라면 맛있다는 반응에 여의주 님이 못 하는 게 어디 있냐며 너스레를 떨었을 거였다. 하지만 지금은….
대단한 칭찬이라도 들은 것처럼 환하게 웃으며 재광을 더 챙겨준다.
“왜 웃어?”
그게 내심 좋으면서도 고스란히 드러내기가 쑥스러워 숨기려고 했는데. 표정 관리가 미숙했던 모양이었다. 빙긋 올라간 재광의 입매를 빠르게 알아차린 의주가 묻는다. 재광은 괜스레 눈만 두어 번 끔뻑거렸다.
“아뇨, 그냥. 맛있어서.”
“그래 뭐, 우는 것보단 낫지. 먹어, 먹어.”
그냥 둘러대는 얘기라는 걸 모를 리 없을 텐데도 의주는 집요하게 캐묻지 않았다. 좋지 않은 낌새였다면 솔직히 답할 때까지 물고 늘어졌겠지만 그 반대라 그냥 내버려 두는 눈치였다.
덕분에 재광은 더 편하게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밥을 숟가락 가득 떠서 몇 번이고 입가에 가져가는 동작이 빨랐다.
한동안 배를 채우는 데만 열중하던 그는 밥공기를 반쯤 비운 다음에야 다시 의주를 봤다. 너무 먹기만 했나 싶어 멋쩍어하면서도 느긋하게 입안에 든 음식물을 씹는다. 밥을 꼭꼭 씹어 꼴깍 삼킨 다음에야 재광이 입을 열었다.
“근데 이렇게 여유 부리고 있어도 되는 거예요? 일 가지고 왔다면서요.”
정말로 허기만 달랠 의도였는지 적게 떠온 밥을 그새 다 비운 의주가 물을 마시다 말고 재광을 봤다.
“이러려고 오라고 한 거지. 광아, 네 남자친구 프로야. 맡은 일은 완벽하게 한다고.”
“아, 예.”
치켜세워주기는커녕 눈을 흘기고 마는 반응에도 의주는 서운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럴 걸 기대라도 한 듯이 사르르 웃어버리고 만다. 덕분에 재광만 괜히 수줍어서 밥그릇에 코를 박아야 했다.
그러고 나서는 부지런한 식사가 재개됐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정적이었던 건 아니고. 간간이 실없는 대화를 주고받으며 적당히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재광은 마지막 한 숟가락을 비우고 배를 통통 두드렸다.
“와 진짜 배부르다. 잘 먹었어요.”
“더 먹어도 돼.”
“더 먹으면 배 터져요. 이거 정리는 제가 할 테니까 이제 일하세요.”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라도 하듯 재광이 빈 그릇을 차곡차곡 쌓는다. 의주는 반사적으로 팔을 뻗다 말고 잠시 눈동자를 굴렸다.
평소와는 다른 행보였다. 재광에게 식사 대접을 한 건 한두 번이 아니지만, 의주는 그때마다 손님은 가만히 있으라며 뒷정리까지 도맡아 했었지 않나.
어쩐 일로 고민을 하던 그는 이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래, 해줘. 고마워.”
이 집에 드나든 이래로 뒷정리에 손을 대보는 건 처음이었으나 재광은 별생각 없었다. 잘 얻어먹었으니 이 정도는 자신이 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었고, 기껏해야 일이 바빠 제게 맡기는가 보다 하고 말 뿐이었다.
그런데 어째, 의주는 재광에게 설거지를 맡겨놓고도 주변을 계속 어슬렁거렸다. 재광은 분명 닦아야 할 접시만 쳐다보고 있는데도 왔다 갔다 하는 게 곁눈으로 다 보일 정도였다.
정신 사납게 하지 말고 좀 가라고 한소리 해야 하나. 재광이 진지하게 고민할 때였다.
“광아, 광아.”
의주가 한 박자 빠르게 재광을 부른다. 개수대만 바라보던 고개가 휙 돌아갈 때는 기다렸다는 양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순순하게 벌린 입술 사이로는 나무 숟가락이 훅 들어왔다. 금세 입안에 달콤 씁쓰름한 맛이 퍼진다.
맞다. 의주의 몸보신을 위해 본가에서 직접 담아 보내줬다는 꿀인삼이다. 쓴 게 싫다던 의주는 재광이 집에 올 때마다 꼭 한 숟가락씩 떠주곤 했다. 그래서인지 인삼 조각을 씹는 재광의 턱짓도 꽤 자연스러웠다.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저리 가라는 말은 인삼과 함께 꿀떡 넘어갔다. 뇌물에 홀랑 넘어간 건 아니고, 이걸 주려고 부산스러웠나 보다 여긴 탓이다. 용건을 해결했으니 이제는 할 일 하러 가겠거니 했는데….
“뭐, 뭐예요.”
오산이었다. 꿀인삼이 든 병을 제자리에 두고 온 의주는 대뜸 뒤에서 재광을 껴안았다. 슬그머니 옆구리를 파고든 양손이 배를 단단히 조인다.
“자기야, 나 이거 하고 싶었어.”
그렇게 말할 때는 재광의 어깨 위로 의주의 턱이 닿았다. 어쩐 일로 순순히 설거지를 맡긴다 했지.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던 게 분명했다.
뒤늦게 의도를 알아차린 재광은 기가 차 웃어버렸다. 그러면서도 군소리는 안 했다. 못 할 짓 한 것도 아닌데 뭐 어떠랴 싶은 거다.
그래서 잠자코 있자, 순순한 반응에 웃은 의주가 목덜미에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췄다.
????
의주의 잔업은 재광이 설거지를 모두 마친 뒤부터 시작됐다. 그나마도 얼른 일부터 끝내라는 재광의 성화 덕분이었다.
재광은 소파에 얌전히 앉아 휴대전화로 각종 기사를 훑어봤고, 의주는 그런 재광의 어깨에 기대 비뚜름히 노트북을 들여다봤다. 종종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나는 것 빼고는 몹시도 조용한 분위기였다.
한 30분쯤 됐지 싶었다. 몸만 붙어 있을 뿐, 각자의 시간을 보낸 게 말이다. 의주야 일을 한다고 쳐도 재광은 공연히 시간만 때우고 있는 격이라 언제쯤 간다는 말을 꺼내야 할지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이미 시간이 늦은 터라 언제든 간다는 말을 꺼내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제 어깨에 기대 일하는 의주가 불량한 자세에도 불구하고 제법 집중하고 있어 그걸 깨뜨리기가 망설여졌다.
“광아, 심심했지.”
의주는 꼭 그런 속내를 읽은 사람 같았다. 이제는 진짜 가야겠다고 생각하기 무섭게 노트북을 탁자 위에 올려놓는다. 어깨에 얹었던 고개도 똑바로 세우더니 이내 팔을 뻗어 재광의 허리를 감쌌다.
“아뇨, 별로. 일은 마무리한 거예요?”
“응. 오늘 봐야 할 건 다 했어.”
“그래도 빨리 끝냈네요.”
“얼마 안 남았었어. 마저 하려다가 너 태워오려고 그냥 퇴근했던 거지.”
재광이 “아…” 하고 실없는 소리를 내자 의주가 허리를 감싸던 손을 올려 그의 어깻죽지를 가만히 주물렀다.
“집에 늦는다고 얘기는 했어?”
왜인지 은근한 말투였다. 언뜻 음흉하게 들리는 것도 같았으나 재광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무던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했죠.”
그러자 길게 늘어난 의주의 입꼬리가 빙긋 호선을 그린다.
그는 팔뚝 언저리를 맴돌던 손을 들어 재광의 양 볼을 한 손에 잡았다. 대답을 하느라 동그랗게 모였던 입술이 악력에 눌려 볼록 튀어나왔다.
우스꽝스럽게 얼굴이 잡히고도 재광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저 ‘왜 이러나’ 하는 표정으로 멀뚱히 쳐다만 볼 뿐이었다.
“착한 동생이네.”
그 눈을 마주한 의주는 제법 매서운 눈매를 부드럽게 휘어 웃더니 곧 붕어처럼 튀어나온 입술에 꾹 입 맞췄다.
불시에 들이닥친 스킨십에 놀란 재광이 움찔거렸으나 그게 다였다. 이번에도 그는 의주가 하는 대로 내버려 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양 볼을 쥐던 손에 스르륵 힘이 풀린다.
장난스럽던 이전과 달리 자상하게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이 와 닿았다. 한결 조심스럽게 닿았다 떨어지는 온기는 덤이었다. 촉촉한 소리를 내며 떨어진 입술이 다시금 다가왔을 때, 재광은 순순히 입을 벌렸다.
의주는 재광의 뒷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마치 당연하게 자신을 받아들이는 걸 칭찬하는 듯한 손짓이었다. 그러더니 이내 뒤통수를 단단히 받치며 비스듬히 고개를 틀었다.
맞닿은 입술 새로 오가는 숨이 금세 달뜬다. 재광은 입안을 진득하게 훑는 의주의 혀를 부지런히 따라다니며 넓은 등을 꽉 끌어안았다.
“….”
“….”
빈틈없이 맞물린 입술은 조금 뒤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서로를 껴안은 듯한 모양새는 그대로였다. 가슴 사이로 고작 주먹 하나 들어갈 만한 거리에서 두 눈길이 부지런히 부딪힌다.
굳이 입 밖으로 목소리를 꺼낼 필요는 없었다. 한동안 서로를 옭아매던 시선이 지속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직 축축한 입술이 도로 겹쳐졌다.
단정하게 차려입은 재광의 스웨터 아래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의주의 손길이 몹시도 자연스러웠다.
????
“으응, 윽… 아아…!”
막 끝까지 밀어 넣은 살덩이를 빼낸 찰나였다. 재광의 아랫배가 격렬히 경련하며 내벽이 덩달아 바르르 떨린다. 묵직하게 아래를 채우던 감각이 온전하게 사라진 뒤에야 재광이 밭은 숨을 토했다.
귀두만 살짝 걸쳐놓은 의주는 잘게 떨리던 아랫배가 평온을 되찾자 옆으로 벌린 재광의 허벅다리를 지그시 눌렀다. 자신의 몸이 더 밀착할 수 있도록 공간을 확보하는 행위였다.
소파 아래로 떨어진 한쪽 다리를 짚은 그는 곧바로 단단하게 부푼 아래를 밀어 넣었다. 뭉툭하게 밀고 들어가는 느낌이 선명한지, 성기가 조금씩 밀려들어갈 때마다 재광의 안이 솔직하게 옴쭉댔다.
바깥 사정도 다르지 않았다. 잘 풀린 내벽이 눌릴 때마다 재광의 허리가 달싹인다.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목을 비트는 건 기본이었다. 흡사 괴로워 보이는 표정을 하면서도 정작 새어 나오는 소리는 나른했다.
“흣… 흐으, 거기… 아! 거기, 으읏!”
“여기? 여기가, 좋아?”
의주가 몸 안쪽 깊숙한 곳을 찌르자 이번에는 재광이 허리를 크게 비틀었다. 솔직한 요구에 피식 웃어버린 의주는 부러 더 뭉근하게 허리를 돌리며 진득하게 한곳을 문질렀다.
“아아…! 아!”
스쳐 가며 섬광처럼 번뜩이던 자극이 끊임없이 이어지자 재광의 상체가 크게 튕겨 오른다. 의주의 팔뚝을 의지하듯 부여잡았던 손끝도 하얗게 질렸다.
재광의 상박이 제자리를 찾았을 때는 의주가 몸을 깊게 숙여 쾌감에 일그러진 얼굴 곳곳에 입술을 눌렀다. 좁혀든 미간부터 코끝, 쫀득한 볼은 물론이고 쉴 새 없이 신음을 토하는 입술까지 진하게 입 맞춘다.
의주는 흥분을 가라앉히듯 재광의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감쳐물었다. 그러면서도 벌어진 입안에서 빠끔히 모습을 드러내는 혀를 놓치지는 않았다. 축축하게 젖은 혀를 제 것으로 감싸는 움직임이 빨랐다.
“응, 으읏, 읍…!”
미끈하게 들어가 안을 들쑤실 때마다 숨처럼 튀어나오던 신음도 끝내는 입안에서 웅웅 울렸다. 제법 힘있게 재광의 혀를 빨 때는 앓는 소리가 그대로 의주의 목을 넘어가는 듯했다.
몸을 애무하는 것처럼 혀를 정성 들여 빨아대던 의주는 곧 입안의 점막을 길게 훑었다. 은밀한 부위의 피부를 손끝으로 훑는 것처럼 간질거리는 감각에 재광이 더욱 크게 반응했다. 판판한 가슴이 빠르게 부풀었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한다.
팔뚝을 쥐던 손도 어느새 너른 등판으로 올라가 손톱을 콱 박아 넣었다. 제법 따끔거릴 만도 하건만, 의주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진득한 혀놀림으로 재광의 입천장을 쓸었다.
위아래가 모두 가득 찬 재광은 버거운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면서도 무엇 하나 무르려 들지 않았다. 뜨거운 숨을 토하느라 혀를 잠시 늘어뜨렸다가도 금세 입안을 헤집는 의주의 움직임을 따라갔고, 뒤는 긴장이 풀릴 새 없이 꽉꽉 조여드는 중이었다.
“아! 하아, 하…. 흣!”
끈질기게 입안을 파고들던 의주가 입술을 떼어냈을 때는 틀어 막혔던 호흡이 간신히 트였다. 하지만 의주는 숨을 고를 틈까지는 주지 않았다. 도드라진 골반 뼈를 콱 틀어잡고 더욱 거세게 아래를 밀어붙였다.
“으윽…! 아, 아아! 좀, 만, 천, 아….! 천천, 히, 읏!”
용케 잘 버티던 재광도 급속도로 빨라지는 행위는 견디기가 어려운 모양이었다. 조금만 천천히 해달라고 청하는 말 사이사이에 뻑뻑하게 밀리는 소파 가죽 소리가 볼썽사납게 끼어들었다.
“응, 그래.”
의주는 거의 이성을 잃은 쪽에 가까웠다. 입으로는 그렇게 하겠다며 순순히 대꾸하면서도 좀처럼 속도는 줄어들질 않는 거다. 몸짓을 늦추기는커녕 되레 골반을 틀어쥔 손에 힘만 더 들어갔다.
허벅지 안쪽의 여린 살을 타고 종아리까지 크게 훑어 내린 의주는 곧 재광의 발목을 잡았다. 허공에서 정처 없이 흔들리던 다리를 곱게 접은 그는 반대쪽도 가지런히 정돈해 제 아래 딱 붙여놓았다.
한껏 벌어졌던 다리를 오므리자 입구가 더 좁아진 느낌이었다. 의주는 곱게 접힌 재광의 다리를 상체로 은근하게 압박하며 더욱 깊이 제 물건을 밀어 넣었다.
“아흑…! 아아, 아…!”
미끄러지듯 깊숙이 들어가던 이전과는 전혀 다른 동작이었다. 예고 없이 한순간에 속을 꿰뚫고 들어간 성기가 배 속 깊이 박혀 들었다. 빠르게 처박힌 성기를 따라 내벽 전체가 밀리는 것만 같았다.
재광의 목이 한껏 뒤로 꺾인다. 소파 팔걸이에 정수리가 닿고, 팽팽하게 늘어난 살갗 아래로는 울대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 모습을 위에서 지켜보던 의주가 제 머리칼을 급히 쓸어 넘겼다.
“광아, 너 이럴 때마다… 하.”
의주의 눈에는 그게 지독하게도 외설적으로 보였다. 처음에야 자신과 닮은 생김새로만 보였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 정도로 치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답지 않게 순애보처럼 마음을 눌러가며 곁을 지킬 만큼 좋아하는 사람이, 같은 감정을 가지고 제 밑에서 온몸으로 느끼고 있지 않던가. 그 사실만으로도 전신에 흥분이 감돌았다.
“진짜 사람 돌게 하는 거 모르지.”
그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움직임이 더욱 거세졌다. 화가 난 것처럼 굳은 표정을 한 의주는 상체 앞으로 모아놓은 재광의 다리를 펴 제 어깨에 걸쳤다.
그 탓에 자연스럽게 골반이 딸려 올라온다. 의주는 허리를 치는 방향을 바꿔 위에서 아래로 꽂아 넣듯 삽입했다.
“아, 아아! 흐으, 읏…!”
녹은 젤과 고간이 부딪혀 찰박거리던 이전과는 소리가 달랐다. 한껏 뜨겁게 달아오른 욕망이 재광의 몸속으로 내리꽂힌다. 뒤를 퍽퍽 쳐댈 때마다 재광의 몸이 밀리며 가죽 마찰음이 더욱 요란하게 울렸다.
재광은 버거운 기색을 여지없이 드러내면서도 잘 느끼고 있었다. 허공에 뜬 골반 위로 피가 잔뜩 몰린 중심부가 크게 꺼떡거린다. 통증과 쾌감 사이의 모호한 감각을 해결하려는지 재광의 손이 위로 올라가려다가 도로 널브러졌다.
하는 양을 빠짐없이 지켜보던 의주는 몇 번을 더 몸을 밀어 넣은 뒤에야 아량을 베풀 듯 재광의 중심부를 쥐었다. 커다란 손이 살 기둥을 넓게 감싸자 아래에서 끙끙 앓는 소리가 커진다.
“읏! 아아, 더…, 못 참겠, 어, 요… 아, 아아!”
뒤로는 쉴 새 없이 의주가 드나들고, 앞은 그의 손에 잡혀 무엇 하나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재광이 머리끝까지 차오른 성감을 이기지 못하고 도리질을 쳐댔다.
의주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음대로 하라는 듯이 고개만 살짝 끄덕거리며 재광의 앞을 집요하게 매만지는 거다. 귀두의 갈라진 틈을 세심하게 파고들었다가, 종래에는 큼직하게 손을 흔들자 반사적으로 내벽이 잔뜩 움츠러들었다.
재광이 말했듯 이제는 정말 한계인 모양이었다. 신음을 내지르다 못해 거의 흐느끼는 목소리가 의주의 아래서 흘러나온다.
“흐으, 응…. 읏, 아아… 아, 아!”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의주의 손안에서 한껏 뜨거운 온기를 내뿜던 재광이 사정했다. 의주가 보다 깊게 성기를 박아 넣은 타이밍이었다. 희끄무레한 액이 판판한 배 위로 흩뿌려졌다.
한순간 온몸을 긴장했던 재광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여전히 하체는 의주에게 붙들린 상태로 상체만 늘어뜨리는 행색이 고단해 보였다.
그마저도 의주에겐 자극적이었다. 나른하게 풀어진 얼굴을 매섭게 들여다본 그는 금방이라도 소파 위로 털썩 떨어질 듯한 하반신을 단단히 부여잡고 강하게 고간을 밀어붙였다.
“아아, 아! 흐으, 읏….”
한차례 사정을 하고 긴장이 풀렸다고는 하지만 되레 감도는 더 좋았다. 여태 단단함을 유지하는 살덩이가 안을 긁을 때마다 온몸이 움찔거린다. 급격하게 조여드는 안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덕분에 빠르게 움직이는 의주의 숨도 점점 더 거칠어졌다. 음담을 내뱉을 정신도 없이 아래를 움직이는 그는 반쯤 풀린 재광의 눈을 뚜렷하게 쳐다보며 뒤를 파고들었다.
사정감이 휘몰아칠 때는 크게 박아 넣는 움직임마저 없었다. 재광의 안쪽 은밀한 곳까지 성기를 박아 넣고는 몸을 가르듯 더욱 깊숙하게 살덩이를 밀었다.
“아…! 아아, 하아….”
안에서 묵직하게 밀려드는 양감에 재광의 기다란 눈매 아래로 속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자극을 주체하지 못해 고인 눈물로 속눈썹이 온통 축축했다.
의주는 몸을 길게 숙여 재광을 끌어안았다. 쇄골 즈음 코를 박고서 윗가슴을 입술로 지그시 깨물 때가 되어서야 잔뜩 흥분했던 아래에서 정액이 터져 나왔다. 미묘한 감각을 느낀 내벽이 뭐든 다 집어삼킬 것처럼 강하게 조여들었다.
체액을 토해낸 살덩이가 안에서 꽉 조여지는 것처럼 의주도 재광을 힘주어 껴안았다. 움직임이 잦아든 뒤에야 숨 고를 여유를 가진 재광의 얼굴 곳곳에 입술을 묻는다.
짓무른 눈가부터 작게 벌어진 입술까지 가리지 않고 입을 맞췄다. 그러는 내내 하반신은 재광의 볼기 사이에 굳건히 자리하고 있었다.
“흐, 으응….”
아무래도 의주는 재광의 안에서 온전히 빠져나올 의사가 없는 듯싶었다. 입술을 지나 목으로, 그리고 가슴까지 내려오면서 슬그머니 아래를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고조된 흥분감을 이기지 못하고 무자비하게 찔러대던 이전과는 다른 움직임이었다. 훨씬 여유롭고 부드럽게 몸 안을 탐한다.
오히려 그래서 더 괴로웠다. 느긋하게 들어왔다 나가는 움직임이 반복되자 재광이 감은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의주의 어깨를 잡았다.
“이상해요, 진짜, 아…! 진짜, 이상…해요.”
어지간해서는 다 받아주는 재광이 이렇게 얘기할 정도라면 적잖이 참기 힘들다는 뜻일 터였다. 그러나 의주는 이상하다 읊조리는 입술 옆으로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움직임을 계속했다.
“진짜 이상해? 좋은 걸 수도 있어.”
짓궂다면 짓궂은 태도였으나 마냥 놀리는 말은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 이상하다는 말만 되풀이하던 재광이 단박에 부정하지 못할 정도였으니까.
한껏 예민해진 몸 안을 이토록 느긋하게 드나드는 일이 처음이라 판단이 잘 안 서는 듯했다. 생소한 감각에 입술만 꾹 깨물고 있던 재광이 이내 의주의 목을 당겨 안았다.
그 탓에 끙끙 앓는 소리가 의주의 귓가에 더 선명히 울린다. 확실히 피치를 올렸을 때 흥분해서 흘리는 신음과는 달랐다. 언뜻 들으면 흐느끼는 듯도, 단순히 숨이 차는 듯도 했다.
확실한 건 그게 부정적인 반응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의주는 의도적으로 더 속도를 늦춰 뒤를 드나들었다. 느리게, 그래서 더 진득하게 내벽을 긁을 때마다 재광의 몸이 파드득 떨렸다.
“빨리… 그냥, 빨, 읏, 빨리…. 아아!”
참다못한 재광은 끝내 진저리치며 크게 버둥거렸다. 그제야 의주가 순순히 하체를 물렀다.
그렇다고 완전히 놓아주려는 심산은 아니었다. 얄궂게 웃은 그는 소파에 누운 재광을 일으켰다. 저항 없이 딸려 올라온 몸은 이내 의주의 허벅지 위로 안착했다.
여느 때처럼 마주 본 자세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재광의 등이 의주의 가슴에 닿도록 온전히 겹쳐 앉았다.
딱히 설명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의주가 당장이라도 몸을 들어 올릴 것처럼 허리께를 감싸자 재광이 스스로 소파를 짚고 아래를 띄웠다. 볼기 사이로 묵직한 부피감이 닿자 천천히 내려앉는 동작이 자연스러웠다.
“아… 아, 흐읏!”
의주의 것을 가득 품고 내려앉았을 때는 허벅지 안쪽이 파들파들 떨렸다. 몸이 떨리는 만큼 내벽도 요동쳤다. 깊숙이 들어오는 자극에 재광의 상박이 자연스레 뒤로 넘어간다.
상체가 비스듬히 기울어지자 의주는 재광을 제 쪽으로 더 끌어당겼다. 한 손으로는 넓게 가슴을 배회하고, 다른 한 손은 아랫배를 감싸며 온전히 제게 기대도록 했다.
안정감을 찾고 나서야 재광의 몸이 더 과감하게 움직였다. 앉은 자리에서 들썩이며 곧추선 음경을 뱉어냈다 삼키기를 반복한다.
제 뜻대로 움직이면서도 안이 가득 찰 때는 여지없이 벅찬 모양이었다. 열심히 오르내리던 재광의 고개가 곧 뒤로 꺾인다. 의주는 기다렸다는 듯 목선을 따라 입술을 문질렀다.
“…아!”
한동안 거친 숨만 내쉬던 재광은 조금 뒤 탄성을 터뜨렸다. 상박을 매만지던 의주의 손이 정확히 유두를 비틀 때였다. 예리하게 퍼지는 감각에 놀라 뒤가 절로 조여든다.
재광이 받은 자극은 의주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됐다. 그는 중심부가 꽉 물리는 느낌에 낮게 신음했다. 그리고는 재광의 어깨에 이를 박으며 더 유려한 손길로 제 위에 앉은 몸을 더듬었다.
의주가 성심성의껏 피부를 훑을 때마다 재광의 몸에는 정직하게 열이 올랐다. 체온이 오르면서는 달싹이는 속도 또한 빨라졌다. 재광은 쉼 없이 헐떡거리면서도 멈출 줄을 몰랐다.
“아아, 읏! 흐으, 읍….”
평소에도 잘 느끼는 편이기는 했지만, 재광이 이토록 흥분한 건 처음이지 싶었다. 위에서 들썩거리는 몸을 지켜보던 의주는 이내 재광의 뺨을 감싸 제 쪽으로 돌렸다.
그는 입술이 맞물리기 무섭게 혀를 깊숙이 처박았다. 그러자 부지런히 오르내리던 재광의 움직임이 자연스럽게 잦아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멎은 건 아니고.
아무래도 온몸을 장악한 흥분감이 쉽게 가시지 않는 듯했다. 재광은 입안을 진득하게 헤집는 혀를 옭아매면서 뭉근하게 허리를 돌렸다.
의주의 키스는 꼭 그에 대한 화답 같았다. 입안의 여린 점막에 혀끝을 미끄러뜨리며 자극하더니, 이내는 재광의 혀를 길게 빨아들인다. 맞닿은 입술 새로는 터지지 못한 신음이 계속해서 고였다.
“하으, 으…. 응, 으읏!”
점점 더 진득해지는 키스를 먼저 끊어낸 쪽은 재광이었다. 제법 유연하게 허리를 돌리던 몸이 빳빳해진 것으로 보아 절정에 다다른 듯싶었다. 크게 원을 그리던 움직임이 이내 한 곳을 집중적으로 문지르기 시작한다.
“광아, 갈 거 같애?”
순순히 밀려난 의주는 귓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달뜬 호흡과 달리 꽤 나직하고 부드러운 어조였다. 아랫배에서부터 가슴을 가로질러 목덜미까지. 길게 쓰다듬으며 묻자 재광의 고개가 위아래로 다급히 흔들린다.
그러나 의주의 손은 여전히 상체만 맴돌았다. 예민한 옆구리 피부를 지분대다가 단단하게 선 유두를 지그시 눌렀다. 동시에 귓바퀴를 가볍게 깨물자 그때까지도 한 지점만 문질러대던 재광의 몸이 짧게 떨린다.
“흐… 아아, 아!”
그는 끝내 성기에 가하는 접촉 없이 사정했다.
의주도 간발의 차로 절정에 달했다. 재광이 울컥울컥 정액을 쏟아내며 뒤를 빠듯하게 조이자 한계까지 부풀어 있던 성기가 그대로 안에 토정했다. 안에서 꿈틀대는 감각을 느낀 재광이 숨처럼 앓으며 마른침을 삼켰다.
재광의 몸은 아직도 잔뜩 예민한 상태였다. 뒤에서 껴안는 것만으로도 움찔댈 정도다. 눈에 띄게 반응하는 어깨에 척하니 턱을 얹은 의주는 필요 이상으로 자상한 어투로 물었다.
“오늘 왜 이렇게 흥분했어?”
“…모르겠어요.”
대답하는 재광의 목소리는 꼭 반쯤 넋이 나간 사람 같았다.
영양가 없는 답이었으나 사실 크게 중요한 부분은 아니었다. 오늘따라 잘 느껴졌다는 것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는 문제 아니던가. 뻔히 알면서도 물은 이유는 이토록 적극적인 재광의 모습이 뜻밖이라 그런 것뿐이었다.
결국 의주는 아무렴 상관없다는 양 웃어버렸다. 그리고는 긴장이 풀린 재광의 목에 가벼이 입 맞췄다.
????
“얼굴이 왜 그래요?”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 조수석에 앉은 재광이 불쑥 묻는다. 아무런 표정 없이, 자칫 화가 난 사람처럼 정면만 응시하던 의주가 슬며시 눈동자만 굴려 옆을 봤다.
“나? 왜?”
짤막하게 되물으면서는 금세 시선이 제자리를 찾아간다.
제법 능청스러운 말투로 반문했으나 룸미러에 비친 의주의 얼굴은 확실히 수상쩍었다. 재광을 데려다주겠다고 집을 나설 때만 해도 물고 빨고 좋아 죽더니만, 주차장을 빠져나오면서부터는 왜인지 심각해진 것이다.
그렇게 보이기만 하는 게 아니라 의주는 진짜로 심각한 게 맞았다. 왜냐고 묻는다면, 기시감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지금 이 상황이 의주에게는 너무도 익숙했다. 그러니까 ‘지금 상황’이라 함은, 재광과 집에서 밥을 먹고 별안간 불꽃이 튀어 붙어먹었다가 밤늦게 데려다주는 일련의 과정 모두를 포함했다.
그래서 문제였다.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친숙하다는 게.
누군가는(ex: 재광) 함께 해온 시간이 있으니 그게 당연하다 여기겠지만 의주는 아니었다. 아무리 연애와 다름없는 패턴으로 지냈다 해도 그때는 엄연히 섹스 파트너였지 않나.
지금은 어엿한 연인이었다. 관계는 바뀌었고, 더 깊은 사이가 되어야 마땅하건만 이전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단 사실이 순간 의주의 머리에 경종을 울렸다.
좋아서 달려든 건 자신이면서도 귀한 시간 내어 만나 결국엔 섹스만 하고 헤어지는 기분이라 영 찜찜한 거다.
“저 외박 못 해서 그래요?”
그런 맘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재광은 갑작스럽게 의주의 기분이 가라앉은 이유가 외박 때문이라 짐작한 모양이었다. 의주는 정면만 응시하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다른 때 같았더라면 ‘우리 광은 신데렐라가 따로 없지’ 하면서 너스레라도 떨었을 거였다. 그러나 하필이면 아직도 몸만 엮이는 사이 같아 고심하던 중에 들은 말이라 속이 좀 쓰렸다.
재광마저 의주의 침묵을 밤새 붙어먹지 못한 아쉬움으로 해석하고 있지 않던가.
대단한 고난과 역경을 겪고 이어진 관계는 아니라지만 그래도 나름 냉가슴 앓으며 맺은 사이인데, 아직도 파트너 정도로 박혀 있는 인식이 달가울 리 없었다.
“그게 아니라….”
“나중에 시간 괜찮을 때 미리 말해놓을게요.”
그런데 이쪽에서 종용하지도 않은 외박을 스스로 시도하겠다니.
개이득.
이건 지금껏 고민하던 내용과 별개였다. 제 발로 굴러들어오겠다는 기특한 연인을 내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진짜?”
휘둥그레진 눈으로 흘긋 돌아보는 얼굴에 화색이 짙었다. 희소식을 들은 입꼬리가 참지 못하고 비적비적 올라간다.
“형이랑 사이 별로 안 좋아서 몸 사린 거지, 안 되는 건 아니니까요. 괜찮다고 하면 얘기는….”
“괜찮지. 완전 괜찮지, 당연히 괜찮아.”
혹시라도 말을 바꿀까 봐 득달같이 긍정하자 재광이 어이없다는 양 웃었다. 별다른 소리는 안 했으나 웃음의 의미를 알아차리기는 쉬웠다.
왜인지 여태 굳어 있던 얼굴이 외박 소식에 함박웃음을 띠지 않나. 재광의 눈에는 그게 밤늦게 돌아가는 애인에게 느낀 서운함이 금세 풀린 것으로 비쳤을 터였다.
“광아, 근데 그거 때문이 아니고….”
그렇다면 오해는 풀어야 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섹스만 밝히는 인간으로 남고 싶지는 않으니 말이다.
“네?”
“너 외박하는 건 당연히 좋지. 그건 찬성인데, 나는 너랑 데이트하고 싶어.”
재광은 대답이 없었다. 운전 중이라 제대로 돌아볼 수는 없었으나 곁눈으로 보기로는 눈을 크게 끔뻑거리고 있는 듯싶었다. 조금 전까지 한 게 데이트지 뭐냐고 의아해하는 게 분명했다.
“아니, 우리 원래도 밥 먹고 자고 이런 건 많이 했잖아. 그래도 이제 진짜 사귀는데 남들 하는 정도는 해야 되는 거 아니야?”
“남들 하는 게 뭔데요.”
“영화 보고 차 마시고 야경 좋은 데서 드라이브도 하고 그런 거 있잖아.”
이쯤 얘기하면 재광도 알아먹을 터였다. 둘이 함께 영화관 출입은 해본 적도 없었고, 커피는 대개 테이크 아웃이나 드라이브 스루를 이용해 차 안에서 해결했다.
그뿐일까. 함께 차를 타는 일은 잦았으나 코스는 늘 같았다. 회사에서 집, 혹은 의주의 집에서 재광의 집. 그건 드라이브라기보다는 착실한 이동에 불과했다.
“내가 그래도 명색이 데이팅 개발잔데 정작 내 데이트는 못 챙기면 좀 그렇지 않아?”
“하면 되죠. 어려운 일도 아닌데.”
혹여 애도 아니고 뭐 그런 데 신경을 쓰냐고 할까 봐 말이 길어지던 차였다. 재광이 대수롭지 않은 투로 툭 내뱉듯이 대꾸했다. 그러자 의주가 흡족한 미소를 짓는다.
“그치, 안 어렵지. 그럼 내일 영화 볼까?”
“내일 바로요?”
“퇴근 시간은 또 모르는 일이니까 아예 심야로 예매하는 게 낫겠지?”
하여간 실행력 하나는 끝내줬다. 의주는 재광이 수긍하기 무섭게 당장 내일의 일정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에 당황한 재광이 눈동자를 버벅버벅 굴렸다.
“아니, 저기….”
“응?”
“그렇게 급할 거 없잖아요. 주말에 봐도 되고.”
“왜? 내일 안 돼? 다른 약속 있어?”
회의적인 반응에는 의주가 곧장 조수석을 돌아봤다. 밤길을 열심히 달린 차가 이미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온 타이밍이었다. 적당한 장소에 차를 세운 그는 뚫어져라 재광을 바라봤다.
“그런 건 아닌데, 최종 테스트 얼마 안 남아서 바쁘잖아요. 무리하지 말라고요.”
금방이라도 실망할 준비를 하는 것 같던 의주의 얼굴이 금세 밝아진다. 그는 무릎 위에 얌전히 놓여 있는 재광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자기야, 나한테 무리라는 게 어디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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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있긴, 여기 있지.
재광은 스크린 불빛에 비치는 인영을 발견하고 헛웃음을 쳤다.
체력 짱짱한 본인에게 무리란 없다고 호언장담하며 고집을 피우더라니. 의주는 기어이 심야 영화를 보러 와서는 맥을 못 추고 조는 중이었다.
이해는 됐다. 의주가 체력 좋다는 거야 누구보다도 재광이 잘 알지 않던가. 실제로도 밤늦게 재광을 만나며 한 번도 지친 기색을 보인 적이 없었다.
아마 오늘도 밖에서 다른 무언가를 했더라면 평소처럼 쌩쌩한 모습을 보였을 거다. 단지 어두컴컴하고 포근한 영화관의 환경이 졸기에 제격이라 거기에 홀랑 넘어갔을 뿐.
- 아니 저기 이게 무슨….
- 왜? 맞잖아, 커플.
먼저 영화를 보자고 제안한 게 의주인 터라 예매하고 직접 방문하는 과정에서는 당연히 의주가 더 적극적이었다. 재광도 리드하기보다는 따라주는 성향이다 보니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내버려뒀는데….
그랬더니만 의주가 냅다 커플석을 예매해버렸다. 각각의 좌석이 두 개씩 붙어 있는 수준도 아니고, 누가 봐도 ‘우리 사귑니다’ 하는 자리였다.
중간에 걸리적거리는 팔걸이 없이 하나로 이어진 소파 자리 말이다. 색깔마저도 일반 좌석들과 달라 눈에 띌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아니죠.
재광이 그런 자리에 의주와 떳떳하게 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렇기에 해당 사실을 알자마자 펄쩍 뛰었으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 이거 예술 영화라 심야밖에 없어서 어차피 사람도 안 많아. 볼래?
의주가 들이민 예매 현황에는 빈 좌석이 월등히 많았고,
- 자기야, 나 여기 앉고 싶어.
필살기 쓰듯 ‘자기야’ 해대며 눈을 끔뻑거리는 모습에는 더 거절할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귀신에 씐 것 같았다. 자신보다 키도 덩치도 월등히 큰 인간이 낯간지럽게 불러대는 꼴은 결코 보기 좋지 않건만, 이상하게도 흔하디흔한 애칭 하나에 무력해지고 마는 것이다.
실제로 그런 의주가 귀엽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도 그랬다. 그냥 ‘자기야’ 하면서 제가 원하는 걸 터놓으면 순식간에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이러려고 커플석 잡은 거냐고.’
그렇게 해서 여기까지 와놓고 정작 졸라대던 장본인이 졸고 있다니.
재광은 어이가 없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러면서도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조는 의주를 보는 낯이 불만스럽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격하게 헤드뱅잉 하는 의주의 고개를 잡아다 제 어깨에 올렸다.
하나로 이어진 좌석이라 팔걸이가 없는 게 편하긴 했다. 잠든 와중에도 몸을 들썩이며 편한 자세를 찾는 의주가 온전히 재광에게 기댄다.
눈동자만 굴려 흘긋 그 모습을 본 재광은 다시 스크린으로 시선을 돌렸다. 의주가 기대기 편하도록 허리를 곧게 펴 앉느라 시야가 조금 올라갔다.
“아….”
귓가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울린 것은 한참 뒤였다. 큼직한 사운드로 잔잔한 배경음악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영화관의 음향 시설을 뚫고 생생한 음성이 들린다. 이윽고 재광의 어깨 한쪽이 휑해졌다.
무표정으로 영화를 보던 재광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곁을 향했다. 그러자 막 몸을 일으킨 의주와 곧장 눈이 마주친다.
의주는 눈을 가늘게 접어 웃고 있었다. 제가 먼저 권해놓고 잠든 게 민망한 눈치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잠이 든 자신의 고개가 재광의 어깨에 안착해 있었다는 사실이 매우 흡족한 기색이었다.
“좋다, 그치.”
잠이 덜 깨 한껏 가라앉은 음성으로 속삭인 그는 다시금 몸을 기울여 재광에게 기댔다. 슬금슬금 등 뒤로 넘어온 손이 허리께로 향하더니, 남은 한 손을 마저 뻗어 몸통 전체를 감싼다.
평소의 재광 같았더라면 밖에서 뭐 하는 짓이냐고 화들짝 놀라 다그쳐야 마땅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흘긋 눈길만 줄 뿐 별말 하지 않았다.
어차피 관객이라고는 띄엄띄엄 앉은 세 사람뿐이었고, 모두가 스크린을 보고 있으며, 내부도 암전이었기 때문이다.
이 분위기가 싫지만은 않아 재광도 더 대담하게 굴었다. 자신의 몸을 끌어안은 의주의 손등 위로 제 손을 가만히 올려둔 것이다. 선명한 온기를 느낀 의주가 조용히 웃느라고 몸을 들썩거렸다. 어느덧 영화도 막바지였다.
엔딩 크레딧이 반쯤 흐를 때, 두 사람은 다른 관객들보다 먼저 상영관을 나왔다. 지하 주차장으로 가는 엘리베이터에서 의주가 물었다.
“영화 재밌었어?”
재광은 실소를 흘렸다.
“몰라요. 어렵던데.”
“그래? 난 좋았는데.”
의주의 대꾸는 상영 대부분을 숙면으로 보낸 사실이 멋쩍어 능청을 떠는 게 아니었다. 아마 그의 좋았다는 표현은 바깥에서 마음껏 벌인 애정 행각을 두고 하는 말일 터였다.
재광은 타박하지 않고 그냥 웃어넘겼다. 그러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지하 주차장에 멈춰 선다. 늦은 시각이라 그런지 차도,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다음부터는 좀 여유 있을 때 만나요. 하루 안 본다고 내가 도망가는 것도 아니고.”
의주는 대답 대신 냉큼 손을 잡았다. 보는 눈이 없는 탓에 재광도 관대하게 군다. 그는 슬그머니 깍지를 끼려는 의주의 손을 순순히 맞잡았다.
????
영화관 데이트는 마지막 불꽃이었다. 낭만인의 신규 앱 테스트가 가까워지며 의주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진 것이다.
이전까지만 해도 어떻게든 얼굴도장이라도 찍으려던 그가 재광을 보챌 엄두도 못 낼 정도였다. 일을 집에 가지고 갈 여유도 없어 사무실에서 밤을 새우는 수준이라, 간간이 통화로 목소리를 듣는 것마저 귀했다.
그래도 뭐, 이제는 그것도 끝이 보였다. 낭만인의 신규 앱 최종 테스트가 코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말뿐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코앞이었다. 당장 5분 뒤.
식당에 들어선 재광은 휴대전화에 대고 말했다.
“원래 테스트를 이렇게 늦게 해요?”
― 일정이 좀 꼬여서 어쩔 수 없었어. 너는, 친구들 만났어?
“이제 막 식당 도착했어요. 곧 테스트 시작한다면서요. 끊어요.”
― 아, 또 빡빡하게 군다. 자기야, 잘하고 오라는 인사 정도는 해줘야지.
“네, 잘하시고 끝나면 연락해요.”
의주가 원한 응원의 메시지는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예상 못 한 바도 아닐 터였다. 재광이 성의 없이 무덤덤한 말투로 얘기하자 휴대전화 너머에서 가볍게 웃는 소리가 들린다.
― 응, 너도 재밌게 놀아.
막간을 이용한 통화는 이걸로 끝이었다. 알겠다고 착실히 답한 재광은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 뒤 주변을 넓게 살폈다.
친한 대학 동기들과 저녁을 먹으러 온 참이었다. 넷이 모일 때 자주 방문하던 곳이라 구조가 익숙했다. 덕분에 금방 목적지를 발견한 그는 걸음의 속도를 더 높였다.
“어, 왔어?”
재광이 서 있던 곳에서 멀지 않은 방의 문을 열자 익숙한 얼굴들이 보인다. 도원이 부드럽게 웃으며 알은체하자 재광도 “일찍 왔네요” 하며 맞은편 자리로 들어갔다.
민주는 아직인 모양이었다. 방 안에는 도원과 연우 두 사람만 나란히 앉아 있었다. 늘 유난한 사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건만, 둘이 어떤 사이인지를 알고 보니 또 색다르게 보인다.
하기야, 연우는 둘 사이를 들켰단 사실을 모르다 보니 갑작스럽게 자리를 바꿔 앉기도 이상했을 테다. 재광은 티 안 나게 도원과 눈길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의 애정 행각을 목격한 이후 직접 만나기는 처음이지만 딱히 달라진 건 없었다. 당일에 도원과 이야기를 잘 나눴지 않던가.
무엇보다 지금의 재광은 누구보다도 둘의 사이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입장이기도 했다.
“너도 일찍 도착했네. 요즘에는 퇴근 좀 빨라진 거야?”
물론 도원은 재광의 연애에 관해 들은 게 없지만, 그가 자신들의 관계를 충분히 이해해주고 있단 사실만은 의심 없이 받아들인 듯했다. 건네는 말이 몹시도 자연스러운 걸 보면 말이다.
“매일 이런 건 아니고, 그냥 좀 대중이 없어요.”
덕분에 재광도 아무렇지 않게 대하기가 더 수월했다. 먼저 말을 건넨 도원에게는 물론이고, 연우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유연우, 너는 영화 들어간다더니 아직은 시간 괜찮냐?”
“아, 어. 아직 캐스팅 덜 끝나서 당분간은 한가해.”
연우는 재광만큼이나 무던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리고는 제 앞에 있는 물병을 집어 들어 팔을 뻗었다.
이제 막 도착한 재광의 컵을 채워줄 요량인 듯했다. 눈치껏 뜻을 알아차린 재광이 컵을 앞으로 슥 내밀었다. 그리고 그때.
“아….”
“어떡해.”
차분하던 분위기가 일순 어수선해졌다.
맞은편으로 팔을 길게 뻗던 연우가 자신의 컵을 건드린 게 화근이었다. 다행히 컵이 깨지거나 하지는 않았으나 따라놓은 물이 촤르륵 쏟아졌다. 재광의 시야에서는 다 보이지 않지만 저 정도라면 아마 연우의 옷이 다 젖었을 터였다.
“괜찮아? 안 차가워?”
불시에 물을 맞은 건 연우건만 반응은 도원이 더 빨랐다. 순식간에 냅킨을 뽑아 들고 연우의 옷 곳곳을 찍어낸다.
재광은 순간 상황에 맞지 않는 웃음이 터질 뻔해 꾹 참아야 했다. 컵이 깨진 것도 아니고 그저 맹물을 쏟은 것뿐인데도 도원의 얼굴이 순수한 걱정으로 가득했다.
사실 여태 봐온 것과 다르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런데 인제 와서 보니 어떻게 그간 두 사람 사이를 한 번도 의심 안 해봤는지 의문이었다.
“많이 젖었어?”
잠시 끼어든 생각을 지운 재광은 조금 늦은 타이밍에 말을 건넸다. 테이블 한쪽에 축축이 젖은 냅킨이 쌓인 뒤였다. 아직도 옷을 닦느라 바쁜 도원 대신 연우가 고개를 들었다.
“괜찮아. 물인데 뭐, 금방 마르겠지.”
부지런히 물기를 닦던 도원은 그제야 자세를 바로 하고 재광을 봤다. 잠시 눈길을 주고받는 사이에 싱긋 짓는 미소가 조금은 어색했다.
여태 아무렇지 않게 굴었으나 막상 연우의 일에 유난스레 굴고 나니 둘의 관계를 상기시키는 행동 같아 민망한 모양이었다. 재광은 부러 더 태연한 표정을 해 보였다.
“와 진짜 배고파! 음식 아직 안 나왔어?”
그때였다. 재광과 도원 사이에 눈길만 오가는 사이, 막 도착한 민주의 목소리가 쾌활하게 분위기를 바꿔놓는다. 재광은 자연스럽게 민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둘중 하나가 송민주랑 사귄다는 것보다는 저 둘이 만나는 게 덜 놀랍지.’
아직은 도원과 연우의 사이가 못내 낯설지만, 적응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지는 않았다.
????
“술 마셨어?”
“맥주 한 잔 마셨는데, 냄새나요?”
“어렴풋이? 안 심해, 괜찮아.”
두 사람은 재광이 친구들과 자리를 옮겨 맥주를 한잔 한 뒤에야 만났다. 의주도 최종 테스트라는 큰 산을 넘어 회사 사람들과 저녁을 거하게 먹고 온 참이었다.
고작 며칠 뜸했을 뿐이건만 체감상 꽤 오랜만에 만난 느낌이었다. 비단 재광만의 감상은 아닌지, 의주도 유독 싱글벙글한 얼굴이었다.
서비스도 좋았다. 훅 다가와 조수석의 안전벨트를 손수 매준 그는 그대로 물러나지 않고 재광의 뺨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뭐야, 왜 얼굴이 더 좋아졌어?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잠시 머물던 손길이 사라지자 재광이 괜스레 자신의 뺨을 문질렀다. 특별히 더 좋아지고 말고 하진 않은 것 같은데, 좋아졌다 하니 못내 멋쩍은 듯했다. 그러나 받아치는 목소리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간만에 보는데 안 좋은 것보단 낫죠. 보기 좋은 떡이….”
금세 아차 싶어 말끝을 흐리긴 했지만.
며칠 만에 보는 거 좋은 낯으로 마주하는 게 낫지 않냐는 뜻을 전하고 싶었으나 묘하게 경로를 벗어난 언사가 튀어나온 거다.
능청스럽게 끝까지 내뱉는다 쳐도 재광의 성격으로는 뒷감당이 쉽지 않을 게 뻔했다. 그래서 차라리 말을 먹는 편을 택했지만 의주에겐 통하지 않았다. 갓길에 세운 차를 막 출발시키려던 그는 잽싸게 곁을 돌아봤다.
“보기 좋은 떡이 뭐?”
“아니에요. 잘못 말했어요.”
“아니야, 잘못 말한 거 아닌데?”
그럼 그렇지, 의주가 그냥 넘어갈 리 없었다. 흐지부지하고 싶은 재광의 마음을 모르지 않을 텐데도 뜻대로 해줄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재광으로서는 그게 조금 얄미워서 못마땅하게 눈을 흘기고 마는데….
“아!”
순식간이었다. 예고 없이 얼굴을 들이민 의주가 재광의 뺨을 물었다. 입술로 앙, 물고 떨어진 게 아니라 정말로 이를 세워 콱 깨물었다.
“뭐 하는 거예요.”
갑작스럽게 살이 짓눌려 깜짝 놀랐을 뿐, 곧장 입을 연 재광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내심 당황스러운 행동이긴 해도 그 주체가 의주라 생각하면 별일 아니라고 여기는 게 분명했다.
재광이 무던하게 굴자 의주도 덩달아 해끔한 낯으로 그를 마주했다. 어느 때보다도 또랑또랑한 눈빛이었다.
“맛 좋대서 확인해 봤어.”
당당하게 하는 대꾸에는 차마 더 할 얘기가 없었다. 재광은 입술만 벙긋거리며 눈을 끔뻑였다.
그런 모습마저 의주의 눈엔 그저 귀여운 모양이었다. 그는 동그란 정수리를 한번 쓰다듬고서 출발할 채비를 했다.
“우리 집으로 간다.”
“그러든가요.”
목적지에는 이견이 없었다. 통보와도 같은 의주의 말에 재광이 순순히 수긍하자 이내 차 바퀴가 부드럽게 구르기 시작했다. 잠시간 어수선하던 분위기도 자연스럽게 가라앉았다.
“테스트는요. 잘 끝났어요?”
재광이 새로운 화제를 꺼낸 것은 출발한 지 얼마 안 돼 바로 신호에 걸린 차였다. 사실 오늘 만나면 가장 먼저 물으려던 말이었는데, 의주의 돌발행동에 이제야 꺼내게 됐다.
물론 묻는 타이밍쯤은 상관없었다. 곁을 돌아본 의주가 의기양양하게 웃는다.
“당연하지. 여의주 님이 몇 달을 공들인 건데.”
저 잘났다고 하는 소리도 더는 얄밉지만은 않았다. 재광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가볍게 웃어넘겼다.
“그래도 론칭 때까지는 계속 바쁘죠.”
그러고 나서 물을 때는 “광아, 원래 나 같은 고급 인재는 한가할 틈이 없어” 하는 너스레가 돌아왔다. 답지 않게 싱그러운 미소를 띤 의주는 슬그머니 재광의 손을 잡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간단한 수정밖에 안 나와서 이전처럼 그렇게 바쁘지는 않을걸?”
“그럼 다행이고요.”
“왜. 며칠 못 보니까 막 안달나고 그랬어?”
얌전히 잡혀있던 재광의 손이 스르륵, 의주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갔다. 슬그머니 눈을 흘기는 모양새로만 보면 당장이라도 실없는 소리 말라고 타박할 듯한 기세였다.
그러나 정작 흘러나오는 말은 전혀 다른 뉘앙스를 풍겼다.
“숨 돌릴 틈 생겨서 다행이라고요. 그동안 너무 정신없이 바빴으니까….”
결은 조금 다를지라도 의주가 흡족해할 만한 대답인 것만은 확실했다. 결국엔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뜻이지 않나.
그는 입매를 길게 말아 올리며 도망간 재광의 손을 도로 잡았다. 이번엔 쉽게 놔주지 않으려는지 악력이 제법 셌다.
“자기 나 걱정했어?”
“걱정 하지 안 해요? 바쁘면 밥도 제대로 안 먹고 일만 하는 거 다 아는데.”
“와, 감동. 보고 싶단 말도 한 번을 안 해주더니 속으로는 엄청 생각하고 있었네.”
좋아하는 감정을 들킨 지는 한참이건만 어째서인지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고 나자 상당히 민망스러웠다. 재광의 귀 끝이 발갛게 달아오른다.
“광아,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
“갑자기 무슨.”
“네가 우리 집에 들어와서 사는 거야. 그러면 내가 바빠도 옆에서 계속 볼 수 있으니까 괜한 걱정 안 해도 되잖아.”
의주는 대단한 아이디어를 떠올린 듯 순수한 목소리를 냈다. 그에 재광이 헛기침을 한다. 의주와 동거했다가는 바쁜 그가 아니라 자신의 체력을 걱정해야 할 거라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재광은 하릴없이 시선을 피하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신호 바뀌었어요. 출발해요.”
제법 자연스럽지만 말을 돌리려는 의도가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대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