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 Debugging (10/21)

10. Debugging

의주는 잔뜩 골이 났다. 휘몰아치는 업무량 때문도 아니고, 꼭 저 같은 인턴의 태도가 얄미워서도 아니다. 그가 이토록 언짢은 이유는 오로지 재광 때문이었다.

며칠째 그와 연락이 닿지 않았다. 어디 멀리 출장이라도 가서 연락이 안 될 거라든가, 휴대전화가 고장이 났다든가. 그러한 언질 하나 없이 어느 순간부터 뚝 끊겨버린 거다. 무슨 일이 있느냐 물어도, 아프냐 물어도 좀처럼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대판 싸웠거나 함께 있을 때 불편한 기색이라도 보였으면 이렇게 애가 타지도 않았을 거였다. 사이가 틀어질 만한 연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분위기가 한참 좋게 흘러가던 타이밍에 일방적으로 연락이 끊기다니. 덕분에 의주만 답답하게 됐다.

“….”

눈을 가늘게 뜬 의주는 검지 끝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성질 같아서는 받을 때까지 100통이라도 전화를 걸고 싶었고, 당장 회사나 집 앞에 찾아가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았다.

하지만 바쁜 현대인에겐 그럴 짬이 없었다. 전화는 다섯 통이 최대였고, 요새는 퇴근이 자정 언저리를 맴도는 터라 직접 찾아가기에도 무리가 있었다.

하필 재광은 그 흔한 SNS 계정도 없어 염탐도 못 했다. 그러니까, 유일한 연락 수단인 휴대전화가 막혀버리자 그가 어떻게 지내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의주는 잔뜩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무래도 재광은 이런 방식으로 저와의 관계를 끝내려 드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해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마냥 수긍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 갑갑한 상황을 타파할 키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 키를 어디서 찾아야 할지 고심하는데, 문득 모니터 아래서 메신저 알림이 올라온다. 재빠르게 발신인을 확인한 의주가 다소 김이 샌 얼굴로 메신저를 켰다.

민선호

야 이거 뭐냐? 오후 2:11

의문스러운 말과 함께 캡처된 이미지 하나가 뜬다. 감흥 없는 손길로 미리보기 이미지를 누른 의주는 눈을 크게 뜨고 화면을 신중히 들여다봤다.

선호가 보낸 이미지는 출퇴근 시간 데이터의 일부였다.

1차적으로 퇴근 시간을 보고 추가 근무 수당을 처리하기에 그가 내역을 확인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거기에 묘한 기록이 하나 끼어 있다.

“뭐야, 이거….”

재광의 이름이다.

지문으로 인식하는 프로그램이라 당사자가 방문하지 않는 이상 출입 기록에 뜬금없는 데이터가 들어갈 리 없는데. 퇴사한 재광의 이름이 버젓이 최근 날짜로 남아 있었다.

기계 오작동이나 기이한 오류로 받아들일 틈도 없었다. 의주의 머리가 비상하게 굴러 재광과 연락이 끊긴 게 언제부터였는지를 떠올려낸다. 바삐 움직이는 눈동자 또한 선호가 보내온 기록의 일자를 확인했다.

의주의 기억과 데이터가 보여주는 날짜는 정확히 일치했다. 의주가 최근 들어 가장 늦게까지 야근을 했던 날이자, 선호가 야식을 사 들고 찾아왔던 그날이다. 심지어는 시간도 딱 그즈음인 것 같았다.

‘근데 왜 그냥 갔지?’

퇴사한 직장에 제 발로 찾아와놓고 기척도 없이 돌아간 재광은 무슨 생각이었을까. 몰래 와서 할 일이라곤 저를 만나거나 하드를 털어가거나 둘 중 하나일 텐데. 그래도 인간 된 도리가 있지, 후자의 가능성은 적을 터였다.

그렇다면 의주를 만나러 왔다가 그냥 갔다는 뜻이 된다. 그는 미간을 좁히며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까지 와서 아는 척도 안 하고 돌아갈 이유가 있었다고?’

선호가 있었다고는 해도 영 모르는 얼굴도 아니니 굳이 불편해 피할 필요는 없었을 터였다. 그렇다면 대체 왜? 의주의 얼굴에 시름이 깊어진다.

‘뭐 못 들을 말이라도 들었냐고.’

그는 곧 긴 숨을 내쉬며 의자 등받이에 푹 기댔다.

선호와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까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뻔했다. 일 얘기 아니면 시답잖은 농담 따먹기. 그날은 재광이 차마 끼어들지 못할 만한 성인용 드립도 안 쳤지 싶은데….

“설마.”

의주는 별안간 푹 기대 있던 상체를 발딱 세웠다. 대각선 자리에 앉은 인턴이 왜 저러나 하는 눈길로 쳐다봤으나 그쯤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허공을 노려보며 기억을 더듬는 데 매진했다.

그날 선호와 대단한 얘기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개중 재광이 신경을 쓸 법한 내용이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떠오르는 게 있긴 했다. 정확한 워딩은 몰라도 연애를 꼭 할 필요 있겠냐며 떠들어댔지 않았던가.

선호는 섹스 파트너 얘기를 하는 거냐며 질색했었고, 의주가 해명하자 아직도 재광에게 수작을 걸고 있냐는 말까지 나왔었다.

재광이 거기까지 대화를 들었다면, 그래서 그 부분에 신경이 쓰여 연락을 끊었다면 전부는 아니지만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몸만 주고받는 관계에 예민하게 선을 긋는 재광이지 않나. 자신과의 사이가 연상되는 말을 타인에게 꺼낸 게 기분 나빴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일방적인 잠수가 합당하냐, 하면 당연히 아니지만….

그래도 무언가 실마리를 잡은 것 같았다. 의주는 금세 들뜬 기분이 되어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예상이 100퍼센트 들어맞을 거라 생각지는 않았으나 재광에게 무엇이 영향을 끼쳤는지 정도는 알아낸 셈이었다. 기분이 상했다면 달래주면 되고, 오해가 있었다면 풀면 된다.

‘못 먹어도 고.’

그동안은 영문을 몰라 어영부영 일에만 치이고 있었다 치자. 그렇지만 이젠 갈피를 잡았으니 그럴 필요가 없었다. 여태 잡생각에 빠져 있던 의주는 빠르게 자세를 고쳐 잡고 집중할 채비를 했다.

????

실행은 빨랐다. 한동안 회사 지박령처럼 사무실을 지키던 의주는 평소보다 일찍 퇴근했다. 타이밍 좋게 일이 적었던 건 아니고, 급한 것만 우선 처리하고 미룰 수 있는 업무는 융통성 있게 미뤄둔 차였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스프링이 자체 내장된 인간인 줄로 알았을 거다. 컴퓨터를 끄자마자 부리나케 튀어나온 그는 곧바로 차를 몰고 재광의 집으로 향했다.

연락이 끊기기 전의 기억으로는 재광도 야근을 심심찮게 하는 모양이었지만 이 시간쯤이라면 집에 있을 가능성이 컸다. 혹시라도 퇴근을 못 했다면 뭐. 기다리면 되는 거고.

어차피 재광이 외박을 일삼는 편도 아니니 죽치고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는 만날 터였다. 아파트 단지로 향하는 의주의 얼굴이 결연했다.

그러나 결연하던 표정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재광의 집 근처 지하철역을 지나 익숙한 도로를 달릴 때였다. 잠시 신호가 걸린 틈을 타 바깥을 내다보던 의주의 입에서 실없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

고작 한 음절 내뱉는 얼굴에는 반색이 가득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뒷모습 때문이다. 대한민국 평균보다 조금 더 크다고는 해도 의주의 눈에는 한없이 귀여운 키. 숱이 많아 폭신해 보이는 동그란 뒤통수는 물론이고, 100명 사이에 두면 실오라기 하나 튀지 않을 무난한 패션까지.

저건 분명 재광이었다.

평소의 의주였다면 이게 운명이 아니고 뭐겠냐고 너스레를 떨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여유는 무슨, 선명하게 떠올랐던 반색마저 금세 자취를 감춘다. 여전히 바깥으로 시선을 던진 의주는 잔뜩 의아한 안색으로 읊조렸다.

“뭐야 저거….”

당장이라도 달려가 붙잡고 싶었던 재광은 혼자가 아니었다. 정확히는 혼자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재광보다 두어 걸음 앞서가던 웬 남자가 불쑥 뒤를 돌아보며 말을 건넨 것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지나가는 사람인 줄 알았건만, 별다른 표정 없이 무어라 얘기하는 행동에는 거리낌이 없어 보였다.

재광은 또 어떻고. 갑작스럽게 말을 거는데도 놀란 기색 하나 없이 대꾸하고 있었다. 의주는 눈 한 번 깜빡거릴 새도 없이 창밖의 두 사람을 주시했다.

신호가 바뀌는 줄도 모를 만큼 집중해서.

“아이, 진짜.”

뒤차의 클랙슨 소리에 정신을 차린 의주는 황급히 갓길로 빠졌다. 그러는 동안에도 재광은 의문의 남자와 계속 이야기 중이었다.

주차 구역에 차를 세운 의주는 본격적인 자세를 취했다. 팔짱을 단단히 끼고서 운전석 시트에 깊게 몸을 기대앉는 거다. 기다란 눈매는 자못 매서운 빛을 띠며 외간 남자를 향했다.

키는 재광보다 훌쩍 컸다. 덩치도 제법 있는데, 태로 보아 운동깨나 즐기는 듯한 다부진 체격이다.

듬직한 몸에 비해 얼굴은 제법 화려했다. 물론 좋게 얘기하자면 그렇고, 큼직큼직한 이목구비가 몹시 진한 인상이었다. 의주나 재광과는 정 반대로.

“뭐야, 또.”

그래서 저놈과 무슨 사이냐고. 그런 생각을 할 즈음이었다. 외간 남자와 몇 마디 나누던 재광의 표정이 급속도로 안 좋아진다.

마주 본 남자의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그쪽은 안색이 안 좋아졌다는 말로는 설명이 다 안 될 만큼 험악한 분위기를 풍겼다. 지켜보는 의주의 눈빛이 덩달아 진지하게 가라앉았다.

“미친, 설마…!”

그리고 조금 뒤, 미간에 주름을 콱 잡고서 관전하던 의주가 급히 차에서 내렸다.

팽팽하게 대립하는 두 사람의 주변 풍경을 막 알아차린 타이밍이었다. 마주 선 그들의 뒤에는 화려하게 빛나는 모텔 간판이 있었다.

큰 건물에 반쯤 가려져 여태 눈치채지 못했던 것 같았다. 한순간 눈에 들어온 간판을 알아차린 의주는 잔뜩 굳은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한 발자국 내디딜 때마다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쿵쿵거렸다. 머릿속에서는 아침 드라마 한 편의 줄거리가 휘리릭 스쳐간다. 당사자들에게 다가가는 의주의 주변으로 꼭 불길이 활활 치솟는 것만 같았다.

전혀 생각지 못한 상황이었다. 재광이 사무실에 왔던 그날, 자신의 언행 중 어떤 부분을 오해했거나 혹은 그 자체를 두고 감정이 상해 잠수를 탄 줄로만 알았던 거다.

그런데 다른 남자?

이건 막 연락이 끊긴 시점으로 되돌아간다 해도 상상할 수 없을 사유였다.

“야, 광!”

마침내 내지른 소리는 거리를 쩌렁쩌렁 울렸다. 재광은 물론이고 그와 대립각을 세우던 남자의 시선까지 한꺼번에 돌아온다.

평소의 의주였다면 능글맞게 재광의 허리를 감싸며 ‘자기야 여기서 뭐해?’ 하는 편이 자연스럽긴 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게 안 됐다. 재광이 낯선 남자와 실랑이를 벌이듯 시간을 끌고 있잖은가.

그것도 모텔 인근에서.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차에서 내릴 때부터 의주의 이성은 제자리에 없었다. 그는 서슬 퍼런 눈을 하고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뜻밖의 등장에 놀란 재광은 어떤 대꾸도 없이 놀란 표정만 했고, 남자는 황당한 듯 혹은 당황한 듯한 안색으로 이쪽을 봤다. 의주에게는 그 표정이 꼭 파트너의 존재를 알면서 만남을 시도한 파렴치한으로 보였다.

“너 내 연락은 안 받고 여기서 뭐해?”

그래서인지 묻는 말에도 안 좋은 감정이 팍팍 실려 나온다. 재광에게 건네는 말이었으나 시선은 정확히 남자에게 꽂혀 있었다.

“씨발, 이거 뭐야….”

재광과 꼭 닮은 얼굴에 반쯤 얼이 빠진 남자는 흘리듯 중얼거리며 의주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재광 또한 의주에게서 시선을 못 뗐다.

당연했다. 얄밉고 실없고, 근데 또 은근히 다정하던 인간이 이토록 살벌한 모습을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 못 했으니까.

하지만 갑작스러운 등장과 그러한 행동에 놀란 것도 잠시였다. 재광은 지금 이 상황이 어이가 없어 기가 찰 지경이었다.

“이 남자 누구야. 누군데 너랑 여기 같이 있어?”

의주가 무슨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지까지는 모르겠으나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지 않던가. 재광은 기가 차다 못해 당장 헛웃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의주가 죽일 듯 노려보는 남자는 재광의 형, 민광이었다.

- 야, 김재광. 집 가냐?

10분 전. 민광이 어쩐 일로 지하철을 탔는지, 역에서 막 나오던 차에 재광을 알아보고 먼저 알은체를 했었다.

어차피 목적지가 같은 터라 굳이 무시하거나 회피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재광도 “어” 하고는 가던 길을 간 게 다였다. 새삼스럽게 딱 달라붙어 우애 좋은 형제처럼 굴 사이도 아니니 두어 걸음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특별히 내외하고자 하는 의도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평소처럼 군 쪽에 가까웠다. 그런데 그게 민광에게는 적잖이 거슬렸던 모양이었다.

- 야, 내가 이만큼 하면 너도 좀 맞춰야 하는 거 아니냐? 계속 그따위로 굴래?

긴 다리 자랑이라도 하듯 저벅저벅 앞서가다가 난데없이 버럭댄 것이다.

해석이 어렵지는 않았다. 지난번에 한바탕 크게 부딪힌 이후 제 딴에는 관계를 회복하려 노력하는 중인데 재광이 비협조적으로 군다는 뜻일 터였다.

재광에게는 퍽 어이없는 소리였다. 답지 않게 눈치 좀 보고 카드를 내민 것 말고는 민광이 무슨 노력을 했는지도 모르겠고, 저 역시 카드를 안 받은 것 말고는 특별히 그를 적대적으로 대한 적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입장 차이가 상당했던 것 같았다. 민광은 자신의 화해 시그널이 맘처럼 먹히지 않자 자존심이 꽤 상한 듯싶었다. 길거리에서 급발진해 재광을 막무가내로 몰아세운 걸 보면 말이다.

그의 생각이 어떻든 간에 재광에게는 날벼락 같은 상황이었다. 형과는 평소처럼 지내고 있다고 여겨왔건만 갑작스럽게 시비에 휘말려 길 한복판에서 실랑이를 하게 되었지 않나.

그런데 거기에 의주까지 나타날 줄이야.

“야, 광. 누구냐니까?”

예상치 못한 전개에 말문이 턱 막혀 왜 여기 있느냐고 물어볼 새도 없었다. 재광은 눈만 크게 끔뻑거리며 의주를 쳐다봤다. 마주 선 민광이 기함하는 표정으로 제 동생과 의주를 번갈아 본다.

“뭐, 뭐야 이 새낀? 언제 봤다고 자꾸 광, 광 거려? 쟤랑 똑같이 생겨 가지고, 소름 돋게.”

그 와중에 자의식은 어찌나 충만한지. 의주가 저를 부른 줄로 알고 밖에서 새는 바가지 노릇을 충실히 한다. 저 대신 재광과 피를 나눈 듯한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데도 애써 태연한 체하면서까지.

“언제는 언제야. 내가 먼저였는데.”

문제는 민광의 오해를 의주도 제 방식대로 해석하고 있단 사실이었다. 민광은 ‘나를’ 언제 봤다고 친한 척하느냐 물었으나, 물불 가릴 정신이 없는 의주의 귀에는 그게 ‘재광을’ 언제 봤다고 끼어드냐는 의미로 들린 거다.

“먼저 같은 소리 하네. 이 미친 새끼가 뭐라는 거야! 가던 길이나 가세요. 네?”

“그쪽이야말로 갈 길 가세요. 딱 봐도 불편해하는 애한테 길거리에서 이러지 말고.”

“불편? 얘가? 난데없이 끼어든 인간이 판단할 건 아닌 거 같은데?”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 보면 답 딱 나오지. 이 상황에 안 불편하고 배기겠냐고. 왜, 남의 눈에도 훤히 보인다니까 쪽팔리긴 해?”

“내가 쪽팔리긴 뭐가 쪽팔려. 그러는 그쪽이야말로 길거리에서 괜한 사람한테 시비 거는 거 안 쪽팔려? 재수가 없으려니까 웬 미친 새끼가 꼬여가지고!”

이상하게도 뜻이 통하지 않는 대화가 부지런히 꼬리를 잡으며 이어진다. 목소리 큰 놈이 이기기라도 하는 건지 한마디를 더할 때마다 언성이 더 높아지기까지 한다.

지나가던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모여드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중간에서 입장이 난처해진 재광은 그제야 서둘러 입술을 뗐다.

“아니 저기 뭔가 오해가 있는 거 같은데….”

잔뜩 흥분한 두 사람에 비하면 작디작은 목소리였으나 분위기를 환기하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던 듯했다. 금방이라도 드잡이를 할 것처럼 으르렁대던 둘의 눈길이 일제히 재광을 향한다.

“뭐야, 너 아는 놈이야?”

“야, 광. 이 사람 뭐야. 너랑 뭐 하자고 이러는 건데?”

민광은 잔뜩 짜증스러운 표정이었고, 의주는 분노와 낙담과 배신감 등등 여러 감정이 한데 섞인 복잡한 안색이었다. 둘중 할 말이 더 많은 의주는 한마디에 그치지 않고 다다다 말을 이어나갔다.

“네가 나 왜 피하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는데, 그렇다고 내가 너 딴 놈한테 잡혀서 모테…!”

…ㄹ로 끌려 들어가는 꼴을 두고만 볼 수 있겠냐고. 틀림없이 그리 얘기하려 했을 테다. 비록 끝은 맺지 못했지만.

재광은 모텔이라는 두 글자가 완성되기 전에 재빨리 의주의 입을 틀어막았다.

“형이에요, 형!”

얼마나 할 말이 많은지, 잠시도 쉬지 않고 읍읍대던 의주가 그제야 잠잠해진다.

답지 않게 흥분해 사리분별 못 하던 의주의 머릿속에 경종이 울린 순간이었다. 당장이라도 불을 뿜어낼 듯하던 눈길은 온순해지고, 어디든 달려들 것 같던 몸에는 힘이 풀렸다.

누가 봐도 한풀 크게 꺾인 모습이었다. 재광은 그제야 의주의 입을 막았던 손을 거뒀다. 그러자 다소 허무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형?”

“네. 친형이요.”

의주는 다시금 확인한 뒤에야 온전한 페이스를 되찾았다. 바람을 가르며 빠른 속도로 걸어오느라 흐트러진 매무새를 다듬는 손길이 분주했다.

- 형이랑은 안 닮았어요.

그러고 보니 입사 첫날 면담에서 들은 얘기가 기억난다. 왜인지 맥이 풀린 표정, 그러한 말투까지 전부.

기억력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건만 조금 전에는 눈이 회까닥 뒤집혀 회로가 다 마비됐던 게 분명했다. 이성을 되찾은 의주는 큼큼,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었다.

섣부른 무례를 사과하려는 심산이었다. 사실 확인이 미흡한 상태에서 파렴치한 취급부터 하고 봤으니 자신의 실수가 크지 않던가.

그러나 태도를 달리하는 의주를 보면서도 민광은 띠꺼운 기색을 지우지 않았다. 오히려 경멸에 가까운 눈초리로 의주와 재광을 훑어봤다.

“김재광. 너 밖에서 대체 뭐 하고 다니는 거냐? 끼리끼리도 정도가 있지.”

“말조심해. 왜 모르는 사람을 함부로 얘기해?”

“와, 이걸 저 새끼 편을 든다고? 먼저 지랄한 게 누군데! 하여간 너는 네 체면만 중요하고 가족은 안중에도 없지?”

이렇게 나오면 얘기가 또 달랐다. 애먼 재광을 잡는 행동에는 잠시나마 정중히 사과하려 했던 맘이 쏙 들어가는 거다. 금세 다시 눈에 힘을 준 의주는 형제의 말다툼에 끼어들었다.

“아니 왜 나랑 치고받아놓고 애꿎은 애를 잡아요?”

그렇게 내뱉으면서는 재광의 팔목을 끌어당겨 자신의 등 뒤로 감췄다.

참으로 기묘한 그림이 아닐 수 없었다. 동생은 남을 감싸고, 형은 그런 동생을 꾸짖고, 그랬더니 남이 동생을 보호하려 든다. 민광도 이 상황이 기가 막히는지 헛웃음을 쳤다.

“그렇게 생긴 얼굴들끼리 연대라도 하는지 어떤지는 모르겠는데, 가족 일엔 빠지시지? 아, 나 진짜 꼴 같지 않아서.”

그러면서 내뱉는 말은 명백한 시비조였다. 평소의 의주였다면 여유롭게 웃으며 되로 갚아줬을 만한 강도다.

그러나 의주는 얄궂게 웃거나 뺀질대지 않았다. 오히려 차갑게 안색을 굳혔다. 등 뒤로는 재광의 팔목을 더 단단히 고쳐 쥐었다.

“가족이면. 이따위로 굴어도 되는 거야?”

“뭐?”

“피 한 방울 안 섞인 나도 애가 좀만 시무룩하면 걱정돼서 속이 끓는데, 가족이라면서 그렇게 몰아세우기부터 하는 게 말이 되냐고.”

짐짓 화가 난 듯한 의주의 목소리에서 진심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 모습에 놀라는 건 오롯이 재광의 몫이었다. 그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비스듬히 보이는 의주의 얼굴을 지켜봤다.

“아니 뭔데 남의 집안일까지 참견이세요. 선 넘네?”

“선은 나만 넘은 게 아닌 거 같은데.”

그러나 어안이 벙벙해 있을 시간은 오래 주어지지 않았다. 민광이 불쾌한 티를 팍팍 내자 의주도 지지 않고 받아치며 또다시 둘 사이에 불이 붙는다. 재광은 황급히 입술을 뗐다.

“그만…. 그만해, 둘 다.”

마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 말리려는 의도였는데,

“너는 이 상황에 태평하게 그만 하란 소리가 나오냐? 평소에 행실을 어떻게 하고 다녔으면…!”

“왜 또 얘한테 난린데!”

역효과가 나고 만다. 민광이 재광에게 화풀이하는 순간 의주가 참지 않고 언성을 높였다.

“씨발, 다 큰 새끼를 눈꼴시게 감싸네, 아주! 피라도 섞이셨어요? 데려가서 살지 그래?”

“뭐? 씨발?”

“…그만 좀 하라고!”

결국 더는 참지 못한 재광이 바락 소리를 질렀다.

의외의 인물이 강한 태도를 보이자 이번에는 제법 효과가 있었다. 본격적으로 목에 핏대를 세울 준비를 하던 두 사람이 입을 꾹 다문 것이다.

그래 봐야 잠시일 게 뻔했다. 언제 또 부딪힐지 모르는 둘을 아는 재광은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가요. 따로 얘기해요.”

그렇게 말하고는 곧장 뒤돌아선다. 그때까지도 민광을 노려보던 의주도 이내 뒤를 따랐다.

“차 어디 있어요.”

“저쪽에.”

“앞장서요.”

아무래도 의주와 있는 이상은 바깥에서 대화를 나누기 무리일 것 같았다. 그래서 차를 찾았더니 의주가 군말 없이 한 발자국 앞서간다. 재광은 그 뒤를 따라 걸으며 격변하는 감정을 억누르려 애썼다.

처음 의주를 발견했을 때만 해도 연락이 안 되는 저 때문에 여기까지 왔겠거니 싶어 조금은 미안했고, 적극적으로 나서 제 편을 들어줄 때는 감동까지 받을 뻔했는데.

길가를 걸으며 아까의 상황을 곱씹어보자니 기분이 상하고 만다.

- 이 남자 누구야. 누군데 너랑 여기 같이 있어?

- 네가 나 왜 피하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렇다고 내가 너 딴 놈한테 잡혀서 모테…!

정작 그 말들을 들었을 때는 당황스러워 입을 틀어막기에 급급했지만, 인제 와서 보니 다른 남자가 생겨 제 연락을 무시했던 거냐 따지는 내용이었던 거다.

생각해 보면 이전에도 그랬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 재광이 고심 끝에 섹스 파트너가 되기로 맘먹었을 때. 그때도 의주는 자신과만 관계를 맺어야 한다며 당연한 소릴 해댔었다.

‘대체 사람을 뭐로 보고….’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 속에서 뜨거운 불덩이가 울컥 올라온다. 저는 연애할 생각도 없다면서 사방으로 뜯어봐도 결백한 자신을 의심했다니.

거기까지 상황 판단이 된 재광은 불쾌함을 감출 길이 없었다. 조수석에 올라타 쾅, 하고 요란하게 차 문을 닫는다. 재광의 분풀이에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은 의주가 금세 운전석으로 가 앉았다.

의주의 표정만 보자면 당장 무슨 말이라도 쏟아낼 것만 같았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아직도 그 자리에 남은 민광이 씨근덕대며 이쪽을 보고 있는 탓이다. 급히 입술을 벙긋대던 의주는 하는 수 없이 운전대부터 잡았다.

????

“광아.”

꽉 막힌 도로를 벗어나 한산한 주택가에 들어선 다음에야 간신히 재광을 부를 수 있었다. 의주는 당장이라도 그를 어르고 달랠 기세였으나 날카롭게 귓가를 파고드는 목소리에 금방 황당한 안색이 됐다.

“거긴 왜 온 거예요?”

재광에게는 의주의 등장이 갑작스러웠을 테니 이런 물음이 나오는 것도 이상하진 않았다. 다만 예상 못 한 분이 배어 나와 어리둥절할 뿐이지.

의주는 답지 않게 얼빠진 목소리를 내어 답했다.

“그거야 네가 계속 연락이 안 되니까….”

그러나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기분이 확 상한 재광이 말허리를 댕강 자른다.

“팀장님이랑 저 사이에 꼭 연락을 해야 될 의무가 있는 건 아니잖아요.”

“뭐?”

여태 봐온 재광에게서는 절대 상상할 수 없던 차가운 언사였다. 태도도 마찬가지. 눈길 한 번 안 주고 고집스럽게 앞만 보면서 말한다. 그 바람에 의주의 표정도 심각하게 굳는데, 불쑥 한마디가 더해진다.

“…우리가 뭐,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차갑다 못해 시리던 이전과는 톤이 사뭇 달랐다. 여전히 냉담하지만 왜인지 서운한 내색이 은근하게 묻어난다.

간단히 얘기하자면 투정. 그래, 그쪽에 가까운 말투였다. 조금 전까지 진지하게 표정을 굳혔던 의주의 입꼬리가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사귀지 않는다는 사실에 재광이 섭섭해하다니. 의주에게는 횡재나 다름없는 소식이었다. 그러나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는 법. 그는 확신을 위한 회심의 일격을 날렸다.

“안 사귀는 게 왜? 그게 잘못이야?”

그러자 재광이 곧장 울컥한다. 여태 정면만 노려보더니만 팩 고개를 돌려 드디어 의주를 보는 거다. 그는 왜인지 원망스러운 눈초리를 하고서 바락 대꾸했다.

“연애를 꼭 해야 되는지는 모르겠다면서 사람 맘 흔들어놓는 게 그럼 잘한 짓이에요?”

순간 치미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해 쏘아붙인 재광은 아차 싶어 입을 꾹 다물었다.

이렇게 얘기하면 그날 사무실에 찾아가 선호와의 대화를 엿들었다는 걸 자백하는 꼴이었다. 괜한 소릴 한 것 같아 애꿎은 입술을 깨문 그는 황급히 의주의 눈치를 살폈다.

방금 내뱉은 말이 단순히 대화를 훔쳐 들었단 고백에 불과했다면 이만큼이나 눈치를 보지는 않았을 거였다. 하지만 조금 전 그 얘기는 분명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사실 내포라고 하기도 뭐했다. 대놓고 말했잖은가. 사람 맘 흔들어 놨지 않냐고. 그것도 몹시 탓하는 어조로.

조마조마하는 마음으로 의주의 눈치를 살피던 재광은 곧 아랫입술을 질끈 물었다.

허무했다.

욕구만 풀면 그만이라는 의주의 말에 왜 상처 입었는지도 모르고 그리도 혼란스러웠으면서. 소란한 맘을 달랠 길이 없어 부단히도 밖으로 나돌고, 그러다가 친한 동기들의 긴밀한 관계까지 알아차려 곤혹스러웠으면서.

그렇게까지 한 뒤에야 겨우 인정한 감정을 이토록 실없이 내보이게 될 줄이야.

물론 확실하게 좋아한다는 말로 못을 박지는 않았지만, 표현만 다를 뿐 마찬가지인 소리였다. 게다가 눈치 빠른 의주라면 이 정도 가지고도 충분히 재광의 속내를 가늠할 게 뻔했다.

“….”

아니나 다를까, 흘긋 옆을 본 의주가 남의 집 담벼락 아래 급히 차를 세운다. 재광은 차마 눈을 마주할 용기가 안 나 애꿎은 글로브박스만 노려봤다.

사위가 어두워 혈색까지 들여다보이지는 않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의주의 눈에는 비스듬한 시선을 유지한 재광의 귀가 꼭 붉은색으로 보였다. 고집스러운 옆얼굴을 감상하던 그는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풉, 하고 기침처럼 새어 나오더니 종래에는 시원스럽게 소리 내어 웃는다. 골 때린다는 듯 목덜미를 문지르며 간신히 진정한 그는 웃음기 남은 눈으로 재광을 바라봤다.

“너 진짜 그 말 때문에 잠수 탄 거였어?”

그날 그 시각, 재광이 사무실에 왔다 간 사실을 알고 있다는 뉘앙스가 짙게 풍겼다. 재광이 자못 당황한 얼굴로 돌아봤다가 도로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의주가 대번에 안전벨트 클립을 푼다. 한결 자유로워진 그는 불쑥 고개를 들이밀며 더 집요한 말투를 냈다.

“응? 광아, 묻잖아.”

“…욕구만 해결하면 된다면서요.”

불퉁하게 꺼내는 말에는 의주가 또다시 웃기 시작했다.

그럴 만도 했다. 그 얘기에 상처를 받았다는 건, 욕구만 해결하는 사이가 아니길 바란다는 뜻이잖은가.

심지어 재광은 조금 전에 맘이 흔들렸다고 터놓기까지 했다. 차 안에 들어와 내뱉은 모든 얘기가 의주에게는 희소식이었다.

연락이 끊겨 전전긍긍 애를 태우던 시간은 잊힌 지 오래였다. 이 순간 의주는 혼자 오해하고 속을 앓으며 저를 피했을 재광이 귀여워 어쩔 줄을 모를 지경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혼자 만족해 웃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 마른세수를 하며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힌 의주는 웃느라 한껏 젖혔던 고개를 바로 했다.

조수석 쪽으로 몸을 돌린 그가 슬그머니 재광의 손을 잡는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라 잡힌 손이 크게 움찔거렸다.

혹여 빼내기라도 할까 봐, 의주는 조금 더 힘주어 단단하게 손을 쥐었다. 순간 가하는 악력에는 반사적으로 재광의 고개가 돌아왔다. 이때다 싶어 눈길을 옭아맨 의주의 시선이 지긋했다.

“너 나 좋아해?”

그렇게 묻는 목소리 또한 나직했다. 재광이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눈동자를 버벅거릴 만큼.

“….”

“응? 광아.”

의주가 재촉할 때가 되어서야 재광이 입을 열었다.

“…그게 뭐가 중요해요. 그렇다고 해도 어차피 달라질 거 없는 거잖아요.”

어딘가 억울한 듯 들리는 불퉁한 목소리였다. 의주는 숨처럼 웃었다.

“그거야 나랑 사귈 맘이 전혀 없는 줄 알았으니까 한 소리지. 끝까지 못 들은 거 같아서 얘기해주는 건데….”

물 흐르듯 나오던 말이 잠시 끊긴다. 어떻게 요약해야 할지 궁리하는 기색이었다. 그는 오래 지나지 않아 다시 입을 열었다.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좋으니까, 계속 그렇게만 지내도 만족할 수 있다는 뜻이었어.”

말을 마친 의주가 싱긋 웃었다.

재광은 어쩐지 개운하지 못한 안색이었다. 의주의 해명이 진심인지, 아니면 평소와 같은 유려한 언변일 뿐인지를 가늠할 수 없어 혼란스러워 하는 게 분명했다.

그 얼굴을 잠자코 들여다보던 의주는 혹시라도 재광이 맘을 무를세라 서둘러 못을 박았다.

“처음 사귀자고 했을 때부터 나는 너한테 진심 아닌 적 없었어.”

곁을 지키는 것만으로 만족하겠다는 건 어디까지나 발전 가능성이 미미할 때 얘기지, 재광이 제게 맘이 있단 걸 안 이상 모호한 관계에 머무를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조금 전에는 재광이 다른 남자와 있는 모습에 눈이 뒤집혀 이성을 놓아버리기까지 하지 않았나. 그러고 나니 그와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확고히 들었다.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거다. 그간은 만나던 상대와 헤어지면 그를 대체할 만한 흥밋거리를 새로 찾으면 그만이었으나, 재광은 그런 식으로 대체될 대상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곁에 두고 싶고, 곁에 남고 싶었다.

그러니까, 이 순간 꼭 잡아야만 하는 사람인 것이다.

의주에게 누군가를 좋아하고 그 사실을 인정하는 건 간단한 일이지만, 좋아하는 마음이 이토록 깊어질 수 있다는 건 생소하고, 그만큼 더 중요한 문제였다.

“좋다는 말도 너 부담스러울까 봐 가볍게는 했어도, 농담으로 한 적은 없어.”

그래서인지 이번에는 고백을 내뱉는 목소리도 퍽 진지하게 흘러나왔다.

다행히 진심이 잘 전해진 듯싶었다. 재광의 얼굴에 미심쩍어하던 기색이 말끔히 사라진다. 대신 그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눈동자만 요리조리 굴려댔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의주는 이내 잡은 손을 제 쪽으로 끌어왔다.

“재광아.”

“….”

“나 너 좋아하는 거 더는 참기 싫어.”

덧붙이는 한마디에는 재광의 눈동자가 이전에 비할 수 없이 요동쳤다. 언젠가 넌센스 퀴즈처럼 들은 이야기의 답을 이제야 확실히 알게 된 것이다.

흔들리는 시선마저 놓치지 않고 눈을 맞추던 의주는 재광의 손등에 입술을 눌렀다. 재광이 순순히 손을 내어주자 그다음에는 이마로 입술이 옮겨간다.

단정한 속눈썹을 파들거리던 재광이 슬며시 눈을 감을 때는 그대로 뺨을 타고 내려가 입술을 덮었다.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온기였다. 그간의 공백이 무색하게 퍼즐처럼 맞물린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이 오갔다.

고개를 비틀어 더욱 깊게 입안을 파고드는 의주의 손이 자연스럽게 재광의 가슴께로 내려갔다. 가슴부터 허리까지 더듬어 내려가는 손길에는 막힘이 없었다.

재광도 그의 노골적인 접촉을 거부하지 않았다. 순순히 받아들이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저 또한 상대방의 등이며 허리를 지분대느라 바빴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의주의 옷 안으로 손을 넣었을 때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뒤로 뺐다.

“….”

“….”

제가 만져놓고 지레 놀란 꼴이 우스울 법도 하건만 의주는 웃음기 하나 없이 눈을 맞췄다. 얼핏 보면 화가 난 것도 같은 얼굴.

재광은 이 얼굴을 알고 있었다. 흥분한 의주는 꽤 자주 표정이 없었으니까.

이번에도 같은 맥락일 터였다. 잠시간 눈을 맞추던 의주가 별말 없이 운전석으로 돌아간다. 시동을 걸고 기어를 바꾸는 모든 손짓에서 조급한 기색이 역력히 묻어나왔다.

????

두 입술은 끈질기게 맞붙었다. 차 안에서도, 그리고 호텔에서도.

의주의 결정이었다. 차 안이라 해도 상관없지만 이런 날엔 어울리지 않는다며 가장 가까이에 있는 호텔로 차를 돌린 거다.

여기까지 오는 시간이 얼마나 억겁 같았는지 모른다. 잠시 신호가 걸릴 때마다 의주는 애가 타는 사람처럼 재광의 손을, 허벅지를 꾹 쥐며 열 오른 눈으로 재광을 봤다.

그동안 부담스러울까 봐 부러 가볍게 굴었다더니. 재광은 그게 거짓말이 아니었다는 걸 그 짧은 사이에 여실히 깨달았다.

의주는 열어젖힌 객실 문이 반동으로 닫히기도 전에 재광을 몰아붙였다. 한 팔에 허리를 감싸 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뒷머리를 감싸며 입술로 돌진한 것이다.

재광도 태연히 받아들였다. 체크인하고 올라오는 도중에도 더 서두르지 못해 안달이 난 의주의 모습을 봐왔기 때문이다. 그는 오히려 덮치듯 끌어안는 상대의 등을 가볍게 짚으며 입맞춤에 호응했다.

넓고 푹신한 침대에는 가보지도 못했다. 입구에서부터 엉겨 붙은 두 사람은 정신없이 밀고 밀렸다. 불안정하게 움직이던 두 몸은 재광의 등이 창문 옆 벽에 닿고 나서야 안정을 찾았다.

“아…! 흐으….”

한바탕 거칠게 입안을 휘젓고 나간 의주는 뺨이며 턱을 타고 미끄러지듯 내려가다가 종래에는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깊게 들이쉬는 숨소리가 마치 해갈을 하는 사람 같았다. 피라도 뽑아낼 것처럼 집요하게 목을 물어뜯는다.

그러는 동안에도 손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재광의 단정한 티셔츠 아래로 들어가 맨살을 더듬기 시작한다. 옆구리에서 시작해 등을 가로지르더니 이내는 가슴팍으로 올라와 유두를 지그시 눌렀다.

재광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야릇한 손길에 몸을 움찔거리면서도 의주의 셔츠 안으로 손을 밀어 넣고 탄탄한 등판을 넓게 훑었다. 자극이 진하게 느껴질 때마다 손끝이 솔직하게 의주의 등에 처박혔다.

“…아!”

연신 거친 숨을 몰아쉬던 재광의 입에서는 짧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의주의 손이 불시에 버클을 푼 타이밍이었다. 여유가 생긴 허리춤으로 의주의 커다란 손이 무리 없이 밀려 들어왔다.

순식간에 속옷 안까지 들어온 손은 차지게 감겨드는 엉덩이를 꽉 쥐었다가 놨다. 그리고는 통통한 볼기 사이로 들어갈 듯하더니, 급선회해 재광의 성기를 쥐었다.

“아아, 으, 흐읍…!”

커다란 손이 부드럽게 압박을 가하자 재광이 급히 숨을 집어 먹는다. 의주의 등 뒤를 배회하던 손이 저도 모르게 팔뚝을 부여잡았다. 의주가 살덩이를 주무르듯 손에 힘을 줬다 풀기를 반복할 때는 팔뚝을 잡은 손끝이 희게 질렸다.

“안 되겠다. 내릴게.”

버클이 풀린 바지 덕에 손을 밀어 넣기는 수월했으나, 딱 달라붙는 드로즈 안에서 마음껏 움직이기란 쉽지 않았다. 짧게 끄덕거리는 재광의 머리에 가볍게 입술을 댄 의주는 부드러운 키스와 달리 거칠게 하의를 끌어내렸다.

완벽히 벗겨낼 만한 여유도 없었다. 허벅지 중간에 바지를 그대로 걸쳐둔 의주는 한결 자유로워진 손길로 재광의 중심부를 잡았다.

“하… 아아, 읏….”

은근하게 압박하며 주무르던 이전과 달리 위아래로 흔들자 훨씬 더 빠른 반응이 돌아온다. 빠르게 치솟는 열기에 재광이 의주의 어깨 위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잡힌 건 아래인데 온몸에 열이 올랐다. 의주의 손짓이 빨라질수록 척추를 타고 올라온 쾌감이 목에서 터진다. 재광은 낮게 앓으며 간절하게 의주의 옷자락만 꽉 쥐었다.

그런데 별안간 손안에 틀어쥔 옷자락이 쑥 빠져나간다. 앞을 가로막고 있던 의주가 사라진 탓이다.

그는 어느새 바닥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었다. 정수리를 내려다보는 재광의 눈동자가 작게 떨렸다.

“아읏! 으응, 흐….”

괜한 긴장은 아니었다. 의주는 손으로 단단히 세운 재광의 아래를 망설임 없이 삼켰다. 손바닥의 온기와는 비교할 수 없이 뜨거운 감각이 예민한 피부를 감싼다. 목을 길게 뻗은 재광의 젖은 입술 새로 달뜬 숨이 터져 나왔다.

시작부터 깊게 성기를 문 의주는 볼 안쪽을 바짝 조이며 고개를 뒤로 뺐다. 매끄러운 점막이 음경을 길게 훑고 지나가자 재광은 어쩔 줄을 몰랐다.

갈 곳을 잃고 허공을 배회하던 손으로 벽을 짚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질끈 감은 눈처럼 힘주어 벽을 짚는 손끝에 핏기가 가신다.

“자, 잠깐. 그만…. 아, 흐읍!”

노골적인 자극을 견디기가 힘들어 슬그머니 벽에 붙어 서보기도 했으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골반께를 두른 의주의 팔이 뒤로 빠진 몸을 금세 당겨와 입안 깊게 성기를 머금는다.

오히려 피하려 한 게 독이 됐지 싶었다. 입안을 조여 깊게 빨아들였다 뱉기를 반복하던 의주가 이제는 혀를 유연하게 움직이며 살 기둥을 자극한다.

이미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피부라 혀끝에 돋은 미세한 돌기들이 다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충분히 뜨겁다고 생각했는데, 혀가 진득하게 훑는 자리마다 홧홧하게 더 열이 오른다.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던 재광은 거의 울먹이듯 신음하기에 이르렀다. 벽에서 미끄러진 손을 옮겨 의주의 머리 위로 얹은 그는 머리칼 사이를 파고들며 눈을 질끈 감았다.

흥분이 고스란히 서린 행동이라 그랬을까. 의주는 제가 애무를 받는 사람처럼 굴었다. 뒷머리를 헤집을 때마다 재광의 것을 빨아들이는 깊이가 더해진다. 심지어 끄트머리에 갈라진 틈을 혀끝으로 집요하게 파고들기까지 했다.

“아, 아아…! 그만, 흣, 할 거, 할 거 같, 아요. 흐읏!”

잔뜩 예민해진 부위를 더 섬세하게 자극하자 재광으로서는 더 버틸 재간이 없었다. 온몸은 뜨겁고, 그보다 더 뜨거운 중심부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조금이라도 서둘러 배출하고 싶은 욕구가 치밀었으나 의주는 좀처럼 비킬 줄을 몰랐다. 성감에 잔뜩 힘이 들어간 팔을 뻗어 어깨를 밀어 봐도 요지부동이다. 한계까지 몰린 재광이 거칠게 도리질을 쳐도 물러설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진짜, 읏, 더 안 돼요, 하, 아아!”

오히려 더는 못 참겠단 재광의 말에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한다. 물론, 한계에 다다른 살덩이를 깊게 물고서였다.

빈틈없이 표피를 감싼 상태로 흔들어대니 더 버틸 수 있을 리가. 목을 한껏 젖히고 뜨거운 숨을 뱉던 재광이 결국 의주의 입안에 정액을 분출했다.

의주는 움찔거리는 기색도 없이 비릿한 체액을 다 받아냈다. 오히려 한차례 꿈틀거리다 잦아든 재광의 것을 혀끝으로 끈질기게 자극해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말끔하게 뽑아냈다.

“아니, 왜 굳이….”

바짝 힘이 들어갔던 몸에 긴장을 푼 재광이 가슴을 크게 들썩이며 묻자, 희끄무레한 액을 손에 뱉어낸 의주가 싱긋 웃는다. 그는 상기된 재광의 볼을 가볍게 쓰다듬고는 나직이 말했다.

“광아, 돌아봐.”

상대방이 뭐라고 하든 아랑곳하지 않고 일방적인 주문을 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실은 재광에게 주는 답이기도 했다. 바로 근처에 윤활제로 쓸 만한 물건이 없어 일부러 한 발을 먼저 뽑아낸 거다.

뜻을 알아차린 재광은 순순히 뒤돌아섰다. 허벅지에 걸린 바지와 속옷 때문에 엉거주춤한 자세였으나 제자리에서 돌아서는 정도는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아, 흐으, 읏….”

자연스럽게 벽을 짚고 서자 의주가 곧장 뒤로 손을 가져다 댔다. 구멍 주변으로 체액을 펴 바르고는 거침없이 손가락을 밀어 넣는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재광이 작게 휘청거릴 때는 재빠르게 팔을 둘러 몸을 지탱했다.

한동안 삽입이 없었던 터라 꽤 빡빡했다. 거칠게 내쉬는 재광의 숨소리도 느끼는 것보다는 버거운 쪽에 가까웠다.

낌새를 알아차린 의주는 입술로 목선을 훑어 내렸다. 허리를 감싼 손 또한 티셔츠 안으로 들어가 가슴팍을 문질렀다.

긴장을 풀어주려 한 행동이지만 효과가 크지는 않았다. 손가락 두 개 들어갔을 뿐이건만 꽉 조여든 뒤에는 여유가 없었다. 몇 번 손가락을 움직여보던 의주는 곧 의도적으로 전립선 부근을 건드렸다.

“아…!”

순간적으로 내벽이 더 수축하는 듯했으나 힘을 풀 때는 이전보다 더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의주는 안을 사방으로 꾹꾹 누르며 공간을 넓혔다. 그리고는 빠듯하게 손가락을 감싸던 감각이 덜하다 느껴질 때가 되어서야 개수를 더 늘려나갔다.

문 닫히는 틈마저 못 기다리고 무자비하게 몰아세울 때와는 전혀 다른 행보였다. 의주는 제법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뒤를 풀었다. 점차 거칠어지는 호흡만 봐도 맘이 조급한 것 같은데, 용케도 서두르지 않는 중이었다.

“하아, 으… 흐읏…!”

덕분에 재광만 더 곤혹스러웠다. 기다란 손가락이 스팟을 건드릴 때마다 찌릿한 감각이 온몸에 퍼지는데, 묵직한 살덩이로 진득하게 눌러주는 것에 비하면 가볍게 스치는 정도라 오히려 감질이 나는 것이다.

“해요. 하아, 넣어요, 그냥.”

결국 재광은 미친 척 재촉했다.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뒤를 돌아보며 그렇게 말했더니 금방이라도 불꽃이 튈 듯한 눈을 한 의주가 냅다 입술을 문다. 그는 재광의 의도와는 달리 혀를 깊이 밀어 넣으며 입안을 헤집었다.

아랫도리도 가만있지는 않았다. 뒤를 드나들던 손가락을 한 번에 빼낸 의주는 급히 자신의 바지 버클을 풀었다. 그리고는 볼기 사이로 단단히 발기한 성기를 바짝 붙였다.

발딱 선 살덩이는 채근한 재광이 되레 놀라 흠칫할 정도였다. 여태 어떻게 참고 있었는지, 피부 위로 닿는 부피감이 상당했다.

“으읍, 읏!”

입안의 여린 살을 혀끝으로 어지럽게 매만지던 의주는 볼기 사이로 제 것을 문지르다가 슬며시 끄트머리를 밀어 넣었다. 손가락이 빠져나간 자리를 더 넓게 비집고 들어가려니 역시나 여유 없이 빠듯하다.

받아들이는 재광도 버거운 모양이었다. 틀어 막힌 입안에서 가쁜 호흡이 맴돈다. 벙벙한 티셔츠 아래로 가슴이 빠르게 들썩일 때마다 구멍이 움찔움찔 조여들었다.

“아…! 하아, 하….”

상황이 그렇다 보니 더 욕심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의주는 아쉽게 입술을 떼며 재광의 숨통을 틔워줬다. 그러자 여태 비스듬히 뒤를 보던 목이 곧바로 아래를 향해 푹 꺾인다. 숨을 고르는 등이 크게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

의주는 품이 넉넉한 티셔츠를 확 걷어 올렸다. 그리고는 볼품없이 말려 올라간 밑단을 손으로 고정하고서 재광의 등 곳곳에 입 맞췄다. 뜨겁게 달아오른 입술이 진득하게 눌어붙을 때마다 곧추선 아래가 더 깊이 밀려들어갔다.

“아아, 읏! 흐…!”

“하, 진짜….”

잠시 뒤였다. 천천히 들어가던 의주의 성기가 재광의 안으로 자취를 감췄다. 고간이 엉덩이에 맞닿을 만큼 깊숙하게 밀어 넣은 차였다. 판판한 아랫배를 가로지른 의주의 팔에 얕은 부피감이 느껴진다.

적지 않은 희열이 밀려왔다. 재광과의 섹스가 처음이 아닌데도 이 순간 제 일부가 재광의 몸 안 깊숙이 들어 있다는 게 좋았다. 허리에 두른 팔을 푼 의주는 대신 손을 넓게 펼쳐 재광의 아랫배를 짚었다.

이전처럼 짓궂게 압박하지는 않았다. 다만 매만질 뿐이었다. 아랫배를 크게 문지르며 제가 만들어낸 양감을 선명하게 느꼈다.

몹시도 섬세한 손길이었다. 살갗을 간질이는 감촉만으로도 온몸이 예민해지는데, 하필이면 속이 가득 찬 부위를 만져대니 재광으로서는 견디기가 힘들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재광은 하지 말라는 뜻으로 푹 수그린 고개를 흔들었다. 의주가 흔쾌히 손을 떼어내며 낮게 웃었다. 그리고는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움직일게.”

재광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순순한 반응에 흡족한 미소를 지은 의주는 장난스럽게 재광의 귓바퀴를 깨물며 슬며시 몸을 뒤로 뺐다.

“흐으, 아….”

재광은 어김없이 앓았다. 아래를 꽉 채우던 살덩이가 천천히 빠져나간 탓에 내벽이 쓸리는 느낌이 더 생생할 거였다. 의주가 재차 고간을 붙이며 막 오므라든 내벽을 가를 때는 한층 새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서두르지 않고 움직이던 의주는 몇 번 왕복한 뒤에 자세를 고쳐 잡았다. 상체를 곧게 세우고 재광의 도드라진 골반뼈를 틀어쥐는 손에 제법 힘이 실린다. 그는 삽입이 보다 매끄럽게 이루어지자 조금씩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아, 아아! 읏, 으응, 아! 아…!”

굵고 단단한 살덩이는 안에 들어갔다 나올 때마다 재광이 느끼는 곳을 정확히 자극했다. 의주가 피치를 높일수록 재광이 정신없이 신음을 흘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재광의 입술 새로 소리가 샐 때마다 뒤도 덩달아 조여들었다. 아래를 밀어 넣는 족족 꽉 물어오는 탓에 의주 또한 강도 높은 자극을 느꼈다.

“아아!”

빠른 속도로 빠져나온 의주가 간신히 귀두만 걸쳐놓고 있다가 불시에 치받자 벽에 의지하던 재광의 고개가 휙 꺾인다. 다시 한번 빼냈다가 깊숙이 처박을 때는 거의 울먹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같은 움직임은 몇 번 더 반복됐다. 길게 빼냈다가 단숨에 치고 들어갈 때마다 치받는 힘을 견디지 못한 재광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종래에는 벽을 의지하던 손이 미끄러져 바로 옆에 있던 창문을 짚었다. 아주 잠깐이었으나 유리에는 선명한 손자국이 남았다.

그때쯤에는 재광도 거의 흐느낌에 가까운 소리를 냈다. 밀어 넣는 힘이 강한 만큼 자극 또한 거센 모양이었다. 버티기가 힘든지 벽을 짚은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가 하는 모양새가 애처로워 보일 지경이었다.

의주는 간신히 버티고 선 재광의 등을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뺨에, 귓가에, 목에. 닿을 수 있는 곳마다 입을 맞췄다.

“아… 윽! 으읏, 응!”

딱 달라붙은 몸 때문에 더 이상 움직임이 크지는 않았다. 다만 살짝만 뺐다가 더욱 깊숙이 밀고 들어오는 탓에 재광은 또다시 고통과 쾌락 사이의 모호한 감각을 맛봤다.

뱃속 깊은 곳이 찔리며 예리한 성감이 찌르르 올라오는 거다. 눈을 질끈 감았는데도 눈앞에서 불빛이 번쩍 튀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손끝을 바짝 세운 재광은 애꿎은 벽을 긁으며 끙끙댔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전조에 불과했다. 의주의 몸짓에 속도가 붙자 이제는 머릿속이 온통 새카매진다.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도 모를 만큼 정신이 없고, 오로지 쾌감만이 온몸을 감쌌다.

어느새 다시 발기한 성기는 의주가 뒤를 퍽퍽 쳐올릴 때마다 크게 꺼떡거렸다. 제법 묵직하게 흔들리는 바람에 통증이 일 정도였다. 참지 못한 재광은 벽을 긁던 손을 내려 앞으로 가져갔다.

“아, 으으, 흣, 아아! 아…!”

하지만 몰아세우는 힘에 속절없이 흔들리는 몸을 가누기란 쉽지 않았다. 간신히 끌어내린 손이 목표물을 빗나간다. 결국에는 낌새를 알아차린 의주가 재광의 것을 대신 쥐었다.

아까처럼 은근한 압박을 가하며 시간을 끌지는 않았다. 그건 곧, 의주의 사정도 머지않았다는 뜻일 테다. 음경을 넓게 감싼 그는 지체 없이 손을 위아래로 흔들며 피부를 자극했다.

“하아, 아! 읏, 아아… 아!”

앞뒤로 몰아치는 자극에는 끝내 재광의 눈가가 짓무르고 만다. 그는 거의 몸서리치듯 이마를 벽에 기댔다. 몸을 의도대로 가눌 수 없어 거의 머리를 박는 것처럼 보였다. 부지런히 허리를 놀리던 의주가 재빨리 다른 손으로 재광의 이마를 감쌌다.

그러는 동안에도 하체는 부지런히 안을 들쑤셨다. 방 안에는 불안정한 호흡과 진득한 마찰음만이 울려 퍼졌다.

“아… 하으, 읏! 아, 아아! 하아….”

얼마 지나지 않은 타이밍이었다. 가능한 한 가장 깊은 곳까지 몸을 밀어 넣은 의주가 그대로 재광의 안에 파정했다.

재광 또한 마찬가지였다. 의주의 손짓에 금방 체액을 쏟아낸 그는 턱 끝까지 찬 숨을 가라앉히려 크게 심호흡을 했다.

내내 서서 의주를 받아내느라 체력소모가 컸던 듯했다. 재광이 무너지듯 벽에 기대어 서자 잠시간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의주가 그를 번쩍 안아든다.

“뭐예요, 갑자기!”

갑작스럽게 허공에 뜬 재광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지만 의주는 태연했다. “힘들잖아” 하면서 꿋꿋하게 재광을 침대로 옮겨놓는 것이다. 다 큰 청년을 시트 위에 정성스럽게도 눕혀놓은 다음에는 저도 곁에 몸을 뉘었다.

급한 불을 끄고 나니 퍽 웃긴 그림이었다. 둘 다 볼품없이 구겨진 윗도리를 입고 아래만 훤히 드러낸 차림새인 거다.

그나마 의주는 아랫도리를 다 벗어던지기나 했지, 재광의 다리에는 아직도 바지와 속옷이 걸려있었다.

그 사실을 인지한 의주는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폭소하는 수준은 아니었으나 뜬금없게 느껴지기에는 모자람이 없는 웃음소리였다. 푹신한 시트에 편안히 늘어져 있던 재광이 슬며시 곁으로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왜 웃어요.”

의주는 제법 자상한 손길로 재광의 뺨을 부여잡고 눈을 맞췄다.

“그냥. 꼴이 좀 웃겨서.”

“…아.”

그제야 상태를 알아차린 재광이 조금 멋쩍은 안색을 했다. 의주는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을 더했다.

“누가 연락 씹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짐승처럼 굴진 않았을 텐데. 그치.”

말하는 투는 가볍지만 분명히 일방적으로 연락을 피한 재광을 탓하는 말이었다. 재광이 민망함에 눈을 흘기며 입을 다물자 의주가 손끝으로 입술을 톡 두드리며 웃었다.

“그래도 괜찮아. 아량 넓은 여의주 님께서 흔쾌히 용서해줄게.”

“남의 동네에서 소란 피워놓고 아량은 무슨.”

“소란 피운 건 미안한데, 나 진짜 그때 눈에 뵈는 게 없었다고. 웬 남자랑 있는데 그게 모텔 앞이란 걸 알았을 때부터 머릿속이 새하얬어, 자기야.”

혹여 지난 소동에 재광이 싫은 내색이라도 할까 봐 일부러 더 능글맞게 구는 눈치였다. 다행히 재광이 ‘얼씨구’ 하는 표정으로 아무 말 않자, 그 틈을 탄 의주가 침대 위에 놓인 재광의 손을 잡아챈다.

가볍게 손등에 닿은 의주의 입술은 손가락 끝까지 매끄럽게 움직였다. 재광이 잠자코 내버려 두자 종래에는 손끝을 아프지 않게 깨문다.

“그래도 나 좋지?”

그때까지만 해도 시답잖은 장난을 치는 모양새였다. 그런데 어째, 장난치고는 꽤 진득해지고 만다. 입술 끝으로 가볍게 문 손가락을 혀끝으로 살살 핥아 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불시에 닿은 축축한 감각을 느낀 재광이 황급히 손을 빼내려 해도 소용없었다. 손목을 꽉 잡은 의주는 곧은 시선으로 재광을 보며 손가락을 자극했다. 느릿하게 빨아들였다가 뱉어내는 움직임이 반복되자 어느새 재광의 목울대가 크게 울린다.

실질적으로 들리는 소리는 없었으나 꼭 꿀꺽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선명한 움직임이었다. 그게 마치 신호라도 되는 양 의주가 재광의 위로 올라탔다.

멋대로 구겨진 티셔츠를 벗겨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온전히 드러난 재광의 나신을 훑어보던 의주는 조금 전까지 손가락을 괴롭히던 입술을 쇄골 아래로 가져갔다.

“아…!”

재광도 밀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제 가슴팍 위를 맴도는 의주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감싸며 눈을 질끈 감았다.

살갗을 얕게 빨아들이던 의주의 입술은 어느새 유두를 감쌌다. 입안에 가둔 돌기를 혀끝으로 집요하게 굴리자 재광의 숨소리가 더 거칠어진다. 의주가 고개를 묻은 가슴팍도 더욱 크게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

아주 솔직하고, 그래서 더 만족스러운 반응이었다. 의주는 꾸준하게 혀를 놀리면서도 손으로는 부지런히 재광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커다란 손은 허벅지 안쪽의 여린 피부를 차근차근 훑었다. 손끝으로 가볍게 주무르듯 하다가 이내 힘을 주어 꽉 쥐자 탄력 좋은 살이 손안에 차지게 감긴다. 금세 놓아주었는데도 손이 떠난 자리에는 붉게 자국이 남았다.

가슴을 애무하던 의주는 꼭 흔적을 보기라도 한 것 같았다. 금방 쥐었다 놓은 자리를 가만가만 쓰다듬는다.

물론 잠시뿐이었다. 허벅지를 더듬던 손이 점차 올라가나 싶더니 이내 한쪽 다리를 바깥으로 활짝 벌렸다.

“흐읍!”

그 탓에 드문드문 신음하던 재광이 급히 숨을 들이마신다. 그러느라 한껏 부푼 가슴을 핥을 때는 금방이라도 오므라들 듯 다리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당연하게도 의지대로 되지는 않았다. 벌어진 다리 사이에는 의주의 무릎이 단단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의주는 저를 미는 허벅지를 재차 열었다.

민감한 살갗을 힘주어 누르던 손은 바짝 선 근육을 따라 올라갔다. 고관절을 지난 다음에는 더욱더 은밀한 곳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탄탄한 볼기를 한 손 가득 쥐었다 놓은 의주가 가볍게 살을 벌렸다.

“으응, 흣, 아….”

그 사이로 어느새 힘이 실린 성기를 가져다 대고 비비자 재광이 상체를 달싹이며 고개를 뒤로 젖힌다. 그 탓인지 잔뜩 달아오른 숨결 끝이 갈라졌다.

의주는 삽입 없이 구멍 주변으로만 길게 마찰했다. 뜨겁게 달아오른 피부끼리 진득하게 맞닿을 때마다 재광의 엉덩이가 움찔거린다.

그 모습이 꽤 볼만했다. 생소한 느낌에 어쩔 줄 모르는 것 같기도, 한편으로는 빨리 넣어주길 보채는 것 같기도 했다. 의주는 움직임 하나하나를 집요하게 눈에 담았다.

골을 길게 긁고 내려온 중심부가 뒤를 파고든 건 조금 뒤의 일이었다. 꽉 닫힌 구멍을 가르고 들어가자 잔뜩 좁아져 있던 내벽이 빠듯하게 열린다. 넣는 족족 안이 벌어지며 살덩이를 진득하게 빨아들였다.

“아…! 흐읏, 으, 응….”

의주는 제 아래서 잔뜩 상기된 재광의 얼굴을 보며 몸을 바짝 붙였다.

서두르지는 않았다. 슬며시 안을 열고 들어가는 속도를 유지하며 살살 밀어 넣었다. 그러자 머지않아 굵은 살 기둥이 볼기 사이로 모조리 자취를 감춘다.

그즈음 의주는 잠시 일으켰던 상박을 도로 낮췄다. 의식적으로 호흡을 가다듬는 재광의 귓가를 잘근잘근 깨물다가 목을 타고 내려오는 움직임이 자연스러웠다.

“아아, 아, 읏…! 아!”

축축한 소리를 내며 목선을 훑던 의주는 슬며시 아래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히려 지금의 자극이 재광에게는 더 잘 전달되는 듯했다. 약한 움직임에도 훨씬 민감한 반응이 돌아온다.

이미 한 차례 들쑤셔 속이 예민해진 데다 깊숙이 사정까지 해놓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끝까지 밀어 넣었다가 빼낼 때마다 한층 질척해진 소리가 침대 위에 울렸다.

“윽! 하아, 흐, 잠깐. 잠, 깐만요. 아아…! 아!”

잠시 뒤 젖은 숨을 토하던 재광이 다급해진다. 일정한 속도로 뒤를 드나들던 의주가 더욱 깊이 안을 찌른 타이밍이었다.

길게 빠져나갔다가 들어오던 이전과는 다른 움직임이었다. 이미 끝까지 들어왔다 생각했던 성기가 더 벌어질 수 없을 것 같은 내벽을 비집고 들어온다.

무리하게 밀고 들어오는 느낌도 아니었다. 깊숙한 곳을 짧게 끊어 쿡쿡 쑤시는 쪽에 가까웠다. 그때마다 재광의 눈앞에는 섬광이 튀었다. 그 탓에 저절로 초점이 흐려진다.

그리고 의주가 풀린 눈을 마주할 때부터는 하체에 이전과 비할 수 없는 힘이 실렸다.

“흣, …아! 아아, 아, 으읏!”

재광은 이제 잠깐만이라고 외칠 정신도 없는 듯했다. 거센 자극에 도망이라도 가고 싶은지 발로 시트를 밀며 바르작댈 뿐이었다.

그마저도 수월하지는 않았다. 바깥 방향으로 활짝 열린 한쪽 다리가 의주의 손에 단단히 눌려 있었기 때문이다.

재광이 버거워하는 걸 모를 리 없을 텐데도 의주는 봐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래를 밀어붙이는 움직임이 점점 더 거세져만 간다.

의주는 뒤에서 빠져나오는 대신 재광의 중심부를 쥐었다. 안을 찌르는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흔들자 강한 성감을 이기지 못한 재광이 눈을 질끈 감으며 목을 비튼다. 아랫배가 경련하고, 내벽 또한 잔뜩 수축했다.

“아! 흐윽, 하, 아아…!”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재광의 배 위로 후두둑 정액이 떨어진다. 그러면서 잔뜩 조여든 내벽이 잘게 떨렸다. 한계까지 밀고 들어온 의주의 것을 품고서였다.

이렇게 되니 의주로서도 더 버틸 수는 없는 듯했다. 재광의 뱃속 깊은 곳에서 또 한 번의 사정이 이루어졌다

재광은 뒤를 채우던 살덩이가 빠져나간 다음에야 온전히 늘어졌다. 가슴은 크게 오르내리고, 힘없이 감은 눈매 아래로는 축축하게 엉겨 붙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김재광, 진짜 너는….”

답지 않게 현실감 없는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의주가 답삭 재광을 안는다. 시트 위에 축 늘어진 머리를 품으로 당기는 손에 선명한 힘줄이 돋았다.

????

“다 큰 어른이랑 하룻밤 보내는 게 이렇게 힘들 일이야?”

차에 올라탄 의주가 시동을 걸며 볼멘소리를 했다. 한동안 감감무소식으로 애를 태우던 재광과 드디어 맘이 맞았건만, 고스란히 집에 들여다 놔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운 모양이었다.

조수석에 자리한 재광은 포슬포슬 잘 말린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며 대꾸했다.

“아까 그 난리를 치고 왔는데 집에 안 들어가면 좀 이상하잖아요.”

실로 무덤덤한 말투였다. 난리의 주범인 의주는 눈동자를 도륵도륵 굴리나 싶더니 이내 재광의 손을 감싸 쥐었다.

“그건 좀 봐주라.”

재광의 손등을 간질이는 엄지의 움직임이 제법 진득했다. 살갗을 누르듯 쓸어내리는 손길을 흘긋 쳐다본 재광은 예의상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가 슬그머니 빼냈다.

“봐주고 말고 할 게 뭐가 있어요. 제가 연락 피해서 그렇게 된 건데. 아무튼 저 마무리해야 될 일도 있고, 내일 출근하려면 집 들어가야 돼요.”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나 이만하고 얼른 운전이나 하라는 의미였다. 뜻을 알아먹은 의주가 치, 하고 바람 새는 소리를 내더니 군말 없이 운전대를 잡았다.

“야, 광. 근데 진짜 잠수는 너무했어.”

잠시 끊겼던 대화는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며 재개됐다. 정면 유리 너머로 시선을 던진 의주가 잔뜩 서운한 목소리를 낸다. 그러나 연이어 물을 때는 순수하게 궁금한 기색만 남았다.

“근데 대체 왜 그런 거야? 다시는 나랑 안 보려고 했어?”

아까는 욕구만 풀면 된다는 소리에 상처받았을 재광이 마냥 귀엽고, 그런 생각을 했단 자체가 반가운 소식이라 그냥 넘어갔었지만 인제 와서 생각해 보니 이상한 거다. 평소에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사는 의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러잖은가. 일부 들은 대화가 마음에 걸렸다면 아까처럼 말을 했으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왜 혼자 동굴에 들어가서 사람 속을 바싹 타들어 가게 했는지 의문이었다.

혼자 고민한다고 오해가 풀리지도 않을 테고, 그렇게 잠적하다가는 서로 멀어지는 결말밖에 없을 것 아닌가.

그래서 솔직하게 묻자 재광이 멋쩍게 목덜미를 매만지며 대답한다.

“처음엔 그냥 좀… 혼란스럽기도 하고, 앞으로 어떻게 대해야 될지를 모르겠어서 그랬는데요.”

“그랬는데?”

“무턱대고 피하기 시작하니까, 나중에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연락하고 그러기도 이상해서….”

그러니까 결국은, 연락을 안 하다 보니 못 하겠더라―는 결론이었다. 그간 의주가 신경을 곤두세우고 애를 끓인 시간에 비하면 다소 허무한 사유다.

그러나 의주는 고작 그런 이유였냐고 재광을 몰아세우지도, 암만 그래도 그렇게까지 했어야 했냐고 원망하지도 않았다. 다만 자상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래도 기특하게 자각은 했네. 어떻게 알았어? 나 좋아하는 거.”

덧붙이는 질문은 필요 이상으로 나직하게 흘러나왔다. 그때까지도 뒷목 언저리를 긁적거리던 재광이 손을 내려 안전벨트를 쥔다. 눈꺼풀을 반쯤 내려 멍한 눈으로 허공을 보던 그는 곧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입을 열었다.

“…몰라요. 그냥 어쩌다 보니까.”

대충 둘러대려는 의도로는 안 들렸다. 그러기에는 너무도 진솔한 목소리였다. 의주는 그게 뭐냐며 타박하는 대신 고개만 두어 번 끄덕였다.

궁금증을 말끔하게 해결해주는 대답은 아니지만 이해할 수 있는 거다. 사람 좋아하는 걸 ‘오늘부터다!’ 딱 정해놓고 시작하진 않을 테니까. 본인이 재광에게 빠져들 때 그랬듯이.

그래서 미미한 미소만 띠고 마는데, 옆에서 슬그머니 곁눈질하던 재광이 다시금 입을 연다.

“팀장님은요. 저 거기 갔던 거 어떻게 알았어요?”

“그거? 민선호가 추가 근무 수당 정산하려고 출퇴근 기록 확인하다가 보고 알려줬어.”

“아….”

“보니까 딱 언젠지 알겠더라고. 걔랑 나랑 하는 얘기 뻔한데, 네가 듣고 거슬릴 만한 건 하나밖에 없는 거 같아서 당장 달려왔지.”

재광은 괜히 손에 쥔 안전벨트만 만지작거리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혼자서 오해하고 성급하게 상처받은 게 퍽 민망한 모양이었다. 흘끔 옆을 살핀 의주는 작게 웃으며 말을 더했다.

“그러게 이왕 몰래 들었으면 끝까지 듣고나 가지, 왜 그렇게 급하게 도망갔어?”

“몰라요. 그냥 그래야 될 거 같았으니까 그랬지.”

“우리 광은 모르는 것도 많아.”

언뜻 놀리는 것처럼 들리는 언사였으나 짓궂기보다는 내심 귀여워하는 뉘앙스가 더 진했다. 재광이 쉽게 대꾸하지 못하고 침묵하는 사이, 의주는 불현듯 톤을 바꾸며 자못 엄한 목소리를 냈다.

“광아, 그래도 너 그건 꼭 알아야 돼.”

“…뭘요.”

“나는 여태까지 내가 하고 싶은 건 다 하고 살았거든.”

대단한 고백처럼 진지하게 내뱉은 것치고는 실없는 소리였다. 의주를 하루만 봐도 제멋대로 살아온 티가 역력히 나지 않던가. 그 때문인지 돌아오는 재광의 대꾸가 심드렁했다.

“그래 보여요.”

“응. 근데 너 때문에 처음으로 포기할라 그랬잖아.”

“뭘 포기해요?”

“나는 너랑 연애가 하고 싶은데, 네가 남자랑 사귀는 걸 절대 못 받아들이는 거 같으니까. 거기다 대고 밀어붙이면 영영 도망가 버릴까 봐 내가 얼마나 참았는 줄 알아?”

“….”

“나는 진짜 꼭 연애라고 안 해도 되니까 너 잡아둘 수 있으면 계속 이전처럼 지내려고 했어.”

호텔로 향하기 전에 대화를 나눌 때는 마음이 급해 간략히 압축했던 이야기였다. 재광은 차마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침묵했으나 의주는 자신의 페이스대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니까 이 여의주 님이 하고 싶은 걸 꾹 참을 만큼 너를 엄청 좋아한다는 거지.”

“….”

“반대로 얘기하면 내가 연애도 포기하고 옆에 남고 싶게 만든 너도 대단한 거고.”

거기까지 말한 의주는 설핏 웃었다. 그러더니 곧 평소의 장난기 어린 말투를 내어 짐짓 진지하던 분위기를 바꿨다.

“근데 역시 타고난 건 어쩔 수 없나 봐. 포기하려고 했는데도 여자 좋아하던 애를 결국 꼬셔버리고 만다, 내가. 역시 여의주. 못 하는 게 없어.”

목소리에는 장난스러운 기운이 가득하지만 느긋하게 목을 비트는 동작에서는 당당함이 고스란히 묻어나왔다. 진심으로 뿌듯해하는 모습에 재광이 어이없다는 듯 웃어버렸다. 그러면서도 굳이 부정하는 말은 안 했다.

그러는 사이, 창밖으로는 어느새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의주의 차가 아파트 정문을 매끄럽게 넘는다. 익숙하게 재광이 사는 건물 앞까지 간 그는 불쑥 조수석을 돌아봤다.

“같이 갈까?”

부연은 없지만 재광의 형이 애꿎은 앙갚음을 하진 않을지 우려해 묻는 말이었다. 어렵지 않게 뜻을 알아차린 재광은 곧장 고개를 저었다.

“됐어요. 그게 더 소란스러울 걸요.”

“그래도 형이 또 뭐라고 하면 연락해. 나 여기서 기다릴게.”

“뭘 기다려요. 별일도 없을 텐데. 가요. 운전 조심하고.”

재광은 늘 그렇듯 담담한 표정으로 내릴 채비를 했다. 재광이 조수석 문의 손잡이를 잡자 의주가 재빠르게 팔을 뻗어 그의 손목을 붙든다. 돌아보는 얼굴에는 용건이 더 남았냐는 듯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쉽잖아. 뽀뽀라도 해주고 가.”

급하게 붙잡은 행동에 비하면 지극히 허무한 용건이었으나 그렇게 말하는 표정이나 목소리 따위는 몹시도 당당했다. 재광은 기가 찬다는 듯 숨 같은 웃음을 흘렸다.

“….”

그러나 내빼지는 않았다. 보채듯 목을 쭉 빼고 있는 의주의 입술에 일순 온기가 닿았다가 떨어진다.

찰나였지만 확실한 접촉이었다. 입술을 부딪친 재광은 그런 적 없는 것처럼 냅다 뒤돌아 문을 열었다. “얼른 가요” 하고 덧붙이는 뒤통수 옆으로 새빨개진 귀가 선명히 보인다.

재광은 이번에야말로 도망치듯이 꽁무니를 뺐다. 순식간에 탁, 하며 문을 닫고 건물 안으로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재빠른 뒷모습을 지켜보던 의주는 혼자 남은 차 안에서 실없이 웃었다.

- 그런 건 나중에 사귀는 사람한테나 해달라고 하세요.

똑같은 요구를 칼같이 자르던 과거가 떠오르자 더욱 짜릿한 기분이 되고 만다. 그는 웃음이 만연한 얼굴을 손으로 가볍게 쓸어내렸다.

“아. 너무 좋아.”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진한 행복감이 묻어나왔다.

????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재광은 익숙한 복도를 걸었다. 슬며시 바깥을 내려다보자 정말 기다리기라도 할 요량인지 아직도 의주의 차가 건물 앞에 서 있다.

참 유난이다 싶으면서도 꼭 나쁘지만은 않은 기분이었다. 재광은 방에 들어가자마자 얼른 돌아가라고 연락해줘야겠단 생각을 하며 도어록 비밀번호를 눌렀다.

“뭐냐, 너?”

집안에 발을 들이기 무섭게 그를 반긴 것은 불만 가득한 목소리였다.

당연히 민광이다. 그는 한바탕 싸운 이후 눈치를 보던 게 거짓인 것처럼 이전과 다를 바 없는 말투를 냈다.

“너 뭐 집에서 모르게 사이비에라도 빠졌냐?”

난데없는 불청객의 출현을 그런 식으로 해석한 모양이었다. 잔뜩 흥분한 의주가 모텔이 어쩌고 했던 터라 혹여 눈치챈 건 아닐지 걱정했는데. 둘 사이를 알아차린 낌새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 거 아니거든.”

내심 안도한 재광은 부러 더 퉁명스럽게 받아쳤다. 평소에 형과의 대화를 대충 마무리 짓고 말려던 것과 다름없는 말투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민광이 순순히 놓아줄 리는 없었지만.

“그럼 그 새끼는 또 어디서 알게 된 놈인데? 어디서 지랑 똑같이 생긴 놈을 찾아가지고. 너 뭐 이상한 다단계라도 다니냐?”

“아, 아니라고.”

“밖에서 뭘 하고 다니는데 똑같이 생긴 새끼를 여기까지 끌어들여. 너 진짜 허튼 짓거리 하고 다니기만 해봐라. 가만 안 둔다.”

부러 목소리를 깔고 으름장을 놓으면서도 재광과 똑 닮은 의주를 생각하면 아직도 솜털까지 바짝 서는 모양이었다. 민광의 얼굴에 질겁한 기색이 그득했다.

하지만 재광은 이렇다 저렇다 말을 얹지 않았다. 성의 없이 “어어” 하고 흘려 대꾸하며 조용히 제 방문을 열 뿐이었다.

“저거 저 사람 말 하는데 듣는 척도 안 하고 들어가는 거 봐라?”

그새 또 시비를 거는데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아예 침묵으로 일관했다.

의주와 이렇게 된 이상 제 앞날은 모르게 됐잖은가. 집안 어른들의 결혼 압박과 대를 잇는 중대사는 장남에게 모두 몰아줄 심산이었다.

민광이 장남의 의무를 다함으로써 제가 한층 편해질 거라 생각하면 이 정도 꼬장은 아량 넓게 넘어갈 수 있는 것이다.

‘장남 파이팅.’

재광은 진심 어린 응원을 속으로 읊조리며 문을 닫았다. 탁, 하는 마찰음마저 마냥 경쾌하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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