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두기
-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지명, 기업, 사건 등은 실제 현실과 관련 없는 허구입니다.
-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표준어문규범을 준용하지 않고 작성된 부분이 있습니다.
9. Bug
“형이랑 싸우고 집 나온 거예요.”
늦은 밤, 막 침대에 누운 참이었다. 천장을 보고 누운 재광이 나른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반듯하게 누워 있던 의주가 재광 쪽으로 몸을 돌리느라고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형이랑? 왜, 무슨 일 있었어?”
“무슨 일…까진 사실 아니었는데, 제가 못 참았죠 뭐.”
언제나 묵묵하게 참고 넘어가는 재광이 못 참았다니. 의주는 그 대목에서 눈썹을 꿈틀거렸다.
불은 끈 다음이라 미심쩍어하는 기색이 노골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다. 재광이 느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앞머리를 쓸어 넘기는 부드러운 손길뿐이었다.
“저희 형이 원래 그렇거든요. 항상 자기만 잘났고 저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무시하고.”
“뭐?”
“집에서도 그랬어요. 어릴 때부터 우리 장남, 우리 장남 하면서 치켜세워주고, 저한테는 형한테 잘하라 그러고.”
“….”
“근데 진짜 잘나긴 했거든요. 어릴 때부터 항상 공부도 잘했고, 대학도 잘 가, 졸업하자마자 큰 회사 척하니 붙어. 부모님 속이라곤 안 썩였어요.”
재광은 기분이 많이 풀린 듯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의주의 감정이 상하고 만다. 그는 잠자코 듣던 것을 멈추고 불퉁한 목소리를 냈다.
“너도 대기업 갔잖아.”
과정이 어쨌든 큰 회사에 다니는 건 똑같은데 왜 그게 형만의 자랑거리가 되는지 이해 못 하겠다는 말투였다. 솔직한 대꾸에 재광이 푸스스 웃었다.
“팀장님은 형제가 없어서 모를 거예요.”
“뭘.”
“위에서 그렇게 모범을 보이잖아요. 그럼 부모님은 그게 당연한 줄 아시거든요. 형이 합격했을 때는 처음이니까 그게 집안 경사고 대단히 자랑스러운 일인데, 그러고 나면 그게 당연해지는 거예요.”
“….”
“제가 아무리 아등바등해도 형이 일궈놓은 거에 못 미치면 모자란 거고, 그거 겨우 따라가면 당연히 해야 할 만큼 한 게 되는 거죠.”
“야….”
“더군다나 저는 형만큼 속 시원히 해낸 적이 없으니까, 가족들 눈엔 제가 얼마나 모자라 보였겠어요. 특히 형은 저랑 같이 살기까지 하잖아요. 볼 때마다 자극한답시고 무시하고 깔보고….”
아마 지금 불을 켠다면 의주의 얼굴이 새빨간 빛을 띨지도 몰랐다. 거칠게 머리칼을 쓸어 넘긴 그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대꾸했다.
“그걸 그냥 놔뒀어? 욕을 하든 들이패든 한 번은 본때를 보여주지.”
“중2병 세게 왔을 때 해봤죠. 근데 저보다 키도 크고 체격도 훨씬 좋으니까 상대가 안 되더라고요. 한 대 쥐어박고 배로 두들겨 맞았어요. 그다음부터는 찍소리 안 하게 되던데요.”
“아. 스트레스.”
“그냥 참는 게 제일 낫더라고요. 진심으로 대들어 봐야 싫은 소리만 더 길어지는데, 대충 무시하고 별말 안 하면 적당히 하고 끝나니까 그게 더 편했어요.”
의주는 이를 악물고 이마를 짚었다. 싫은 티가 팍팍 나는데도 기어이 참고 마는 재광을 귀여워했던 자신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런 성격이 어디서 기인한 줄도 모르고 좋아한 꼴이라니.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그 때문에 의주가 입을 다문 사이, 재광은 무던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오늘은 좀 한계였나 봐요. 회사 일도 많고 힘들고 그런데 집에서까지 속을 박박 긁어놓으니까 안 참아졌어요. 평소에 형이 절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진작 알고 있었는데, 막상 자기 부속품처럼 여기는 말을 필터 없이 하니까 듣고만 있기가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싸웠어?”
“따지자면 저 혼자 급발진한 거지만…. 뭐, 그런 셈이죠.”
“잘했어. 진짜 잘했어.”
이불 안에서 크게 꿈틀댄 의주는 어느새 재광의 옆에 찰싹 붙어 있었다. 그는 재광을 꼭 끌어안고서 재차 입술을 뗐다. 포근한 품과 달리 서슬 퍼런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형 이름 뭐야. 회사에 고개 못 들고 다니게 해줄까? 아니면 고생 좀 하라고 다리 한쪽 부러뜨려줘? 나 10년 무사고야. 보험료 좀 올라도 돼.”
기분을 맞춰주려 공연히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 사실을 잘 아는 재광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가족인데 그런다고 제가 속이 시원하겠어요?”
“그럼 어떡해. 아 그래, 밤길에 뒤통수라도 세게 때리자. 그게 좋겠다.”
당장 복면과 목장갑을 사러 갈 기세였다. 이번에는 재광이 더 큰 웃음을 터뜨리며 의주의 등을 두드렸다. 이만 흥분을 가라앉히라는 뜻이다.
썩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참 실없는데 우습게도 든든한 면이 있다고. 속으로만 생각한 재광은 가만가만 등을 두드리던 손짓을 멈추고 의주를 마주 안았다.
분명 의주에게 전화를 걸 때만 해도 땅굴을 파고 들어가고 싶을 만큼 착잡한 심정이었건만, 어느새 입꼬리가 빙긋 올라가 있었다.
????
오전 12:04
장남 : 어디냐 너
오전 12:04
장남 : 좋은 말로 할 때 들어와라
오전 12:20
장남 : 네가 간땡이가 부었지?
오전 12:45
장남 : 너 할 말만 그따위로 하고 나가면 어쩌라고
오전 1:00
장남 : 한 시간 내로 답 안 하면 비밀번호 바꾼다
밤사이 민광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의주와 만난 뒤로는 휴대전화를 들여다보지 않아 몰랐는데, 부재중 전화도 몇 통 쌓여 있다.
자정을 넘기고서야 연락을 취한 걸 보니 술이 어느 정도 깨고 나서 상황을 수습할 정신이 든 듯했다. 집에 얹혀사느니 마느니 하는 소리에 폭발한 감정이었건만, 그새 또 비밀번호를 바꾸겠다고 엄포를 놓는 꼴을 보니 헛웃음이 난다.
민광이라면 진짜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하지만 기분이 더 나쁘거나 착잡하지는 않았다. 재광은 전문가를 불러 도어록을 부수는 비용이 얼마나 될지 가늠하며 휴대전화를 내려놨다. 그러는 사이 입가로 무언가가 불쑥 내밀어진다.
“아침부터 누구랑 그렇게 연락을 해.”
나무 숟가락이었다. 재광은 익숙한 듯이 숟가락을 물었다. 진득한 꿀에 절인 인삼을 씹는 턱짓이 느긋했다. 그는 자잘하게 씹힌 인삼을 꿀떡 삼킨 뒤에야 감흥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형이요.”
“뭐래, 미안하대?”
“설마요. 한번 터뜨렸다고 금방 사과할 인간이면 여태 저한테 그러지도 않았죠.”
의주의 생각에 재광의 형이란 작자가 할 말이라곤 사과밖에 없어야 마땅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니. 그가 기함하자 재광이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한다.
“바라지도 않았어요. 그냥 당장 꼴 보기 싫어서 나온 거였지.”
“당장? 그럼 오늘은 들어갈 거야?”
“어쩔 수 없잖아요. 물건도 다 집에 있고, 당장 어딜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보증금 모을 때까지는 거기서 비벼야죠.”
‘보증금’ 소리에 의주가 눈썹을 달싹거린다. “보증금?” 하고 되묻자 재광이 대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월세라도 얻으려면 어느 정도는 있어야 할 거 아니에요.”
“그게 왜 필요해. 그냥 여기 들어와서 살아.”
“네?”
“오늘부터. 좋다, 짐 싸서 오늘 당장 와.”
다소 어이없어하는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의주의 눈이 빛났다. 진심으로 기대를 품은 표정이라 재광은 되레 당황했다.
“뭔 소리예요. 하루 신세 졌으면 됐지.”
“광아, 나는 너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힐 자신 있어.”
“아 됐어요.”
하지만 평정을 찾는 것도 금방이었다. 섹스 두 번만에 대뜸 사귀자 달려들던 의주지 않나. 재광의 눈에는 지금의 권유가 그때와 다르지 않아 보였다. 몹시도 충동적이고 가벼운 언사로 느껴지는 것이다.
단칼에 거절하자 의주가 아쉬움을 가득 담아 쯧, 혀를 찬다. “안 통하네” 하고 중얼거린 그는 금세 태연한 안색을 하며 차 키를 집어 들었다.
“출근이나 하자. 데려다줄게.”
“뭐 하러요. 저는 지하철 타고 가면 돼요.”
이마저도 단박에 거절당하고 말았지만.
뭐 하나 쉬운 게 없었다. 같이 살자 해도 싫대, 데려다주는 것도 싫대. 이미 하룻밤 신세를 진 재광은 염치라는 걸 차리려 그러는 것일 테지만 의주는 그게 못내 불만스러웠다. 홉뜬 눈에 진심이 어린다.
“아, 왜! 이럴 때 생색내게 좀 데려다주자!”
“아침에 차 막히잖아요. 그럼 팀장님은 언제 출근하게요.”
“나는 CTO잖아. 사장 친구.”
퍽 당당한, 그러나 말 같지도 않은 소리에 재광이 헛웃음을 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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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논리는 무논리를 못 이기는 법이다. 마치 송별회 때처럼 고집을 부리는 의주를 당해내기란 무리였다.
재광은 조수석에 앉아 꽉 막힌 도로를 내다봤다. 멀지 않은 곳에 익숙한 사옥이 보인다.
줄줄이 늘어선 차들로 보건대, 대충 갓길에 차를 세우고 내려서 걸어가는 편이 훨씬 빠를 듯했다. 하지만 지각을 각오하고 여기까지 데려다주러 나선 의주에게 그 뜻이 통할 리가. 재광은 잠자코 앉아 안전벨트만 만지작거렸다.
“회사에 괴롭히는 사람은 없지?”
“네.”
불쑥 묻는 말에 따르는 대답은 빨랐다. 의주는 조금의 틈도 없이 기계적으로 나오는 대꾸가 외려 더 의심스러운 눈치였지만 재광은 덤덤했다.
거짓말은 아닌 탓이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회사생활이긴 하지만, 까칠하게 구는 직원들도 콕 집어 재광을 괴롭히겠다는 의도가 있는 거로는 안 보였다. 그저 말만 섞었다 하면 귀찮은 일을 얹어주는 보안 팀을 꺼려할 뿐.
그런 태도에 스트레스를 받는 건 사실이나 그래도 운명이려니 하고 받아들이려 애쓰는 중이었다. 이 또한 적응하고 나면 아무렇지 않아질 거라 생각하면서.
“진짜로?”
“네. 팀장님 닮았다고 한바탕 찾아온 뒤로는 귀찮은 일도 없었고요.”
“아무튼 그것들 사람 귀찮게 하는 건 알아줘야 된다니까. 무슨 호들갑들을 그렇게 떨어댔대.”
“신기하겠죠. 똑 닮았는데 아는 사이라고까지 하니까. 어, 저 여기 앞에서 내릴게요.”
몇 마디 말을 더 잇는 사이 어느새 사옥 앞 건널목이었다. 문득 밖을 내다보던 재광이 내릴 준비를 하자 의주가 순순히 차를 세운다. 그는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며 막 내리려는 재광에게 급히 덧붙였다.
“그래도 괴롭히는 놈들 있으면 말해.”
“말하면요.”
“혹시 모르지. 내가 수호천사 해줄지도?”
의주는 두 눈을 크게 끔뻑거렸다. 그러면서 싱긋 입매를 올리는 모습이 농담과 진담을 구분 못 하게 만든다. 재광은 웃는 둥 마는 둥 모호한 표정으로 땅에 발을 디뎠다.
“조심히 가요. 연락할게요.”
의주의 말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나 돌아서는 얼굴에는 미미한 미소가 걸렸다.
멋이 없다 못해 당장이라도 비겁한 수를 쓸 것 같은데, 그게 싫지만은 않았다. 그렇게라도 제 편이 되어 주겠다는 사람이 있단 사실이 내심 든든하게 느껴졌다.
????
“집 앞이에요.”
― 벌써? 아 왜. 우리 집으로 오라고 꼬실랬더니 빠르기도 하네.
“하루면 됐지 뭐하러요. 바쁠 땐데 일이나 해요.”
타박타박 아파트 복도를 걷는 재광의 걸음이 늘어진다. 그는 멀찍이 시선을 던져 집 주변을 살폈다. 창문 너머로 빛이 새어 나오는 걸 보니 민광이 집에 있는 모양이었다.
꼬박 24시간만의 귀가였다. 외박을 안 해본 건 아니지만 그토록 큰 갈등을 빚고 집을 나간 적은 처음이라 돌아가는 발걸음이 마냥 가볍지만은 못했다.
“팀장님, 저 다 왔어요. 일단 끊어요.”
어차피 중요한 용건을 나누던 통화는 아니었기에 마무리하는 말이 간결히 흘러나왔다. 전화기 너머에서도 서운한 기색 없는 대꾸가 이어졌다.
― 응. 나 오늘은 회사라 빨리 데리러 못 가. 비밀번호 알려줄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우리 집 가 있어.
“무슨 일 있길 바라는 거 같은데.
― 아. 들켰네.
말로는 들켰다면서도 당황하거나 놀란 기색이라곤 전혀 드러나지 않는 목소리였다. 덕분에 실없이 웃음을 흘린 재광은 더 지체하지 않고 통화를 마쳤다. 그러고는 잠시 멈춰 서 빛이 새어 나오는 창문을 가는 눈으로 쳐다봤다.
본가에서 형한테 왜 그랬냐며 질타하는 전화가 걸려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새 부모님께 일러바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일 거다. 당황해 당하고 만 그날의 치욕을 배로 갚아줄 생각으로 칼을 갈거나, 답지 않게 반성하며 그간의 잘못을 인정했거나.
그렇게 예상하면서도 재광은 알고 있었다. 후자일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걸. 서른 평생 제가 하는 모든 행동을 정답으로 여기며 살아온 인간이 인제 와 깨달음을 얻을 리는 없잖은가.
집으로 향하는 걸음이 유독 무거운 것도 그 때문이었다. 대차게 내질러놓고 하루 만에 미쳤었나 보다 하며 비는 건 재광에게도 내키지 않는 일이었으니까.
아무리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해도 수습에 급급해 비굴하게 굴 맘은 없었다.
“….”
느릿한 발걸음은 어느새 현관문 앞에서 멈췄다. 각오를 다지듯 흡, 숨을 먹은 재광은 천천히 도어록 비밀번호를 눌렀다. 커버를 내리는 손길에는 적지 않은 긴장감이 묻어나왔다.
비밀번호를 바꾸겠다고 엄포를 놓더니만 실행으로 옮기지는 않은 듯했다. 잠금이 풀리는 알림음이 영롱하게 울려 퍼진다.
‘그럼 그렇지.’
덕분에 내심 안도하는 마음으로 집안에 들어섰을 때는 어제와 같은 풍경이 재광을 맞았다. 현관에 나뒹구는 술병에서는 찌든 알코올 향이 올라오고, 주변에는 볼썽사납게 뒤집힌 양말이 널브러져 있다.
재광은 이 광경을 한 수도 물러줄 생각 없는 민광의 입장 표명으로 받아들였다. 저는 잘못한 게 없으니 하던 대로 하겠다는 뜻으로.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어차피 집안싸움인 이상 재광에게 불리해 길게 끌고 갈 수도 없었다. 새삼 눈물 바람으로 껴안고 화해할 사이도 아니니 이대로 없던 일 치고 평소처럼 지내도 괜찮았다.
애초에 그 몇 마디 대들었다고 민광의 태도가 바뀔 거라 기대치 않았던 탓이다. 참다 참다 내지른 말에 곱절로 당하지 않고 넘어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선방이었다.
“….”
“….”
그런데, 진짜로 선방을 한 것 같다.
방에서 막 나온 민광은 현관에 선 재광을 보고도 별말 하지 않았다. 불같은 성질머리로는 어느 안전이라고 문을 박차고 나갔다가 이제 오느냐며 벌써 따지고 들었어야 마땅한데. 주춤대며 쳐다만 보는 거다.
재광도 덩달아 눈을 맞추다가 별안간 허리를 숙였다. 나뒹구는 술병을 집어 들어 일렬로 가지런히 세우자 저쪽에서 먼저 운을 뗀다.
“놔둬. 내가 할 테니까.”
이번에야말로 재광은 놀랐다. 김민광의 입에서 나온 말이 맞는지 순간 의심부터 할 정도였다.
제 딴에도 내심 찔리는 게 많았던 건지, 그거 하나 못 하겠다는 동생에게 선을 긋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뜻밖의 언사인 것만은 분명했다.
“됐어.”
그러나 재광은 단호했다. 술병들을 정리하는 손길이 투박하면서도 재빨랐다.
회사에서 짬이 날 때마다 고민한 결과였다. 최대 6개월. 무조건 그 안에 목돈을 모아 독립한다. 그리고 그 기간에는 여태 그랬던 것처럼, 혹은 그 이상으로 민광의 손가락 하나 까딱 못 하게 할 참이었다.
의주도 그랬지 않나. 떠나 봐야 자신의 소중함을 알 테니 가보라고.
재광도 그럴 작정이었다. 무서울 만큼 수발을 들어주고, 예고 없이 이사를 나가버리는 거다.
한순간 수족을 잃어버린 민광의 꼴이 볼만하겠다 싶었다. 손 안 가는 데가 없는 집안 살림을 떠맡아 봐야 제가 얼마나 좋은 동생이었는지 알 거였다.
“….”
근데 좀 이상하다. 어차피 쪽도 못 쓰고 꼬리 내릴 거 왜 객기를 부렸냐고 타박할 줄 알았던 민광이 조용했다. 수두룩한 술병을 다 정리한 재광은 허리를 곧추세웠다가 여태 방문 앞에 선 제 형을 보고 흠칫 놀랐다.
기이하게도, 민광이 재광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데 차마 못 하고 입술만 물어뜯는다.
“뭐.”
“뭐.”
보다 못한 재광이 할 말 있느냐는 뜻으로 퉁명스럽게 말을 걸어도 마찬가지다. 똑같이 받아친 민광이 이번에는 아예 고개를 팩 돌려버리고 만다. 재광은 헛웃음이 나려는 걸 꾹 참았다.
‘그래도 사람 새끼라고 찔리긴 했나 보지.’
잘된 일이었다. 저야 난데없이 방을 빼는 것으로 소심한 복수 계획을 세웠다지만, 그러는 동안에 민광이 제 눈치를 본다면 손해는 아니었다.
그래, 이렇게 된 거 제대로 가시방석을 만들어주자고. 콧방귀를 낀 재광은 당당하게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옷을 갈아입자마자 침대 위로 쓰러지는 동작에서 피로가 고스란히 묻어났다. 베개에 얼굴을 정면으로 묻은 재광은 죽은 듯 엎어져 있다가 드르륵 울리는 진동 소리에 도로 몸을 일으켰다.
끙, 앓는 소리를 낸 그는 책상 위에서 요란하게 진동하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화면에 뜬 이름은 집에 들어오기 전까지 통화를 나눈 의주였다.
“왜요?”
― 형 만났어?
집에 다 왔으니 일단 끊으라고 했더니만 정말 ‘일단’ 끊고 다시 전화를 걸 줄이야. 아마도 자기 딴에는 형제가 대화를 나눌 만한 시간을 가늠해 연락한 모양이었다.
“네. 먼저 와 있었어요.”
― 뭐래? 별일 없었어?
어제 재광의 낌새가 심상치 않았기에 귀가 후의 상황이 궁금하긴 한가 본데. 걱정 반, 기대 반의 오묘한 목소리였다.
“별말 안 하던데요. 그냥 방에 들어왔어요.”
― 아, 진짜?
“뭐야, 실망한 거 같은데.”
― 티 나?
“엄청 많이.”
들켰다며 웃는 소리는 가볍기 그지없었지만, 잘 넘어갔으면 다행이라고 덧붙이는 음성에서는 진심이 느껴졌다. 형이랑 싸운 일로 신세를 진 거로도 모자라 걱정까지 끼친 재광은 괜히 멋쩍어 퉁명스러운 말투를 냈다.
“뭐 심각한 일이라고 이런 거까지 신경을 써요.”
― 우리 가출 청년 또 삐뚤어지진 않나, 참된 어른으로서 굽어 살펴야지.
“비밀번호 알려준다고 꼬셔놓고 무슨 참된 어른이에요.”
― 그것도 다 보살핌의 일환이거든?
의주는 뻔뻔하게 받아쳤으나 그것도 오래가지는 못 했다. 정말 형과의 마찰 여부를 확인하려는 요량이었는지 이번 통화는 금세 끊겼다.
????
“아… 그새 잠들었네.”
눈꺼풀을 겨우 반쯤 뜬 재광의 입술 새로 끝이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알람을 끄고 눈 한번 깜빡거리는 사이에 잠이 들어 벌써 10분이 지난 시점이었다.
평소보다 늦은 기상이기는 하나 타격이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이 정도야 행동만 조금 빠르게 하면 손쉽게 수습 가능한 정도니까.
감기려는 눈을 부릅뜬 재광은 서둘러 침대 아래로 내려갔다. 현실감 없이 붕붕 뜨는 발길이 부지런히 욕실을 향해 움직였다.
“지금 일어났냐?”
다른 날보다 조금 늦게 일어났을 뿐, 크게 다를 바 없는 풍경이었다. NPC처럼 거실 소파에 자리 잡은 민광은 모닝커피를 마시다 말고 물었다. 시선은 휙 지나쳐가는 재광이 아니라 벽에 걸린 시계에 박혀 있었다.
“어.”
군더더기 없이 답한 재광은 한번 돌아보지도 않고 욕실로 쑥 들어갔다.
어쩐 일로 민광의 말이 짧았다는 사실은 씻고 방으로 돌아간 뒤에야 깨달았다. 맑은 정신에 생각해보니 지금 일어났냐는 정도로 끝날 일이 아니었던 거다.
제 입으로 떠들기로는 장남의 무게 어쩌고 했지만 그는 천성이 부지런한 편이었다. 늘 같은 시간에 일어나 조깅을 하고 모닝커피를 마신 다음 출근할 정도로.
그만큼 한 치의 오차 없는 루틴을 지키는 인간이라 재광의 기상이 조금만 늦어져도 이해를 못 했더랬다.
그런 행보에 비춰보자면 고작 10분일지라도 자비 없는 잔소리가 쏟아져야 마땅했다. 대기업 들어가면 끝이냐, 신입이 잘하는 짓이다, 벌써부터 빠져가지고 정신 못 차린다 등등. 민광이 했을 법한 멘트는 귓가에 선했다.
그런데 이제 일어났냐는 한마디로 끝나다니. 셔츠에 팔을 꿰던 재광이 의아한 내색을 하며 단추를 잠갔다.
어제 막 집에 들어왔을 때도 민광은 은근히 재광의 눈치를 살피는 모양새였다. 이 집에서 버텨야 하는 한 그가 자신의 눈치를 보는 게 나쁜 현상은 아니라 여기긴 했지만….
그러면서도 맘 한편으로는 저게 얼마나 가겠냐 하는 의심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만하면 저 성질에 제법 오래가는 듯해 뜻밖이란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오늘도 늦냐?”
후딱 준비를 마치고 나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민광의 입에서 나와야 할 말은 ‘늦냐?’가 아니라 ‘신입이 겁도 없이 늦잠이나 자고 잘 하는 짓이다’가 더 알맞았다.
재광은 대꾸 없이 잠깐 제 형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단단히 멕일 준비를 하며 간보는 건 아닌 것 같고, 진짜 바락대든 행동 때문에 자중하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쉽게 꼬리 내릴 줄 알았으면 진작 한번 들이받을걸.’
속으로만 읊조린 그는 이내 작게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얼마나 갈 변화인지는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탓이다. 대신 지금을 즐기자는 쪽으로 마음을 고쳐먹은 재광은 퉁명스럽게 답했다.
“가 봐야 알지.”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민광에게서는 별 반응이 없었다. 눈썹이 크게 들썩거리는 모습으로 보아 어디 감히 저한테 대드나 싶어 기분깨나 상한 듯한데, 결국 돌아오는 욕지거리는 없었다.
덕분에 가벼운 걸음으로 출근길에 나서려는 찰나, 민광이 또 한 번 재광을 불러 세운다.
“야.”
이름 석 자도 아닌 단 한 음절로.
정 없고 딱딱하지만 그 한 글자에서 오만 감정이 다 느껴졌다. 제 잘못은 없다고 뻔뻔하게 굴고 싶은데, 그래도 양심이라는 게 있는지 잘 안 되는 게 분명했다. 재광은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봤다.
“왜.”
그러나 정작 그를 불러 세운 민광은 멀뚱히 서 있기만 한다.
“나 지금 나가야 돼. 할 말 있으면 빨리해.”
결국엔 재광이 배포 좋게 채근까지 했다. 그제야 민광이 불만스러운 속내를 억누르며 다가온다.
“…필요한 거 있으면 사라고.”
답지 않게 굼뜬 그가 내민 것은 자신의 카드였다. 늘 밀린 잔소리 값 치르던 습관은 어디 안 가는지 이번에도 돈으로 해결할 요량인 듯했다. 카드를 통째로 내밀 정도면 이번 일이 민광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긴 한 것 같았다.
제 앞으로 내밀어진 카드를 보는 재광의 얼굴에 약한 갈등이 인다. 솔직히 냅다 받아다가 백화점을 휩쓸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됐어.”
참아야 했다. 여기서 카드를 넙죽 받아버리면 이 인간은 후불로 모든 게 해결된다고 믿을 테니까. 간신히 욕구를 눌러 참은 재광은 카드를 쥔 손을 밀어냈다.
“내가 돈 안 버는 것도 아니고.”
“야. 김재광.”
“이런 거 주지 말고 그냥 나한테 신경을 꺼. 조언인지 참견인지 그런 거 하지 말고.”
평소대로라면 건방지기 짝이 없는 차남의 언사였으나 지난 일의 여파가 컸다. 민광은 인상을 마구 구기면서도 끝내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간다.”
재광은 그에게 심경 변화가 생기기 전에 재빨리 집을 나섰다.
집 안에서 서둘러 준비한 보람이 있었다. 민광 때문에 예기치 못한 지연이 있었는데도 그리 늦지는 않은 시각이었다. 재광은 꽤 느긋하게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그리고 막 지하철역 입구로 들어서려는 때, 코트 주머니 안에서 짤막한 진동이 울린다.
이 시간부터 연락해올 곳이라곤 회사 아니면 의주일 터였다. 재광은 막 계단을 내려가려다 말고 잠시 멈춰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어?”
예상은 가뿐히 빗나갔다. 일찍부터 휴대전화 진동을 울린 쪽은 의주도, 회사도 아니었다.
낭만인 서치원
재광 씨! 오늘 저녁에 시간 돼요? 오전 8:05
반가운 이름에 재광의 입매가 미미한 호선을 그렸다.
????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고, 간만에 일찍 퇴근할 수 있는 날이라 문득 재광이 생각났단다. 퇴사 이후 종종 안부를 주고받긴 했지만 만날 약속을 정하긴 처음이라, 재광도 달갑게 그의 연락에 응했다.
치원과는 다르게 칼퇴를 할 상황은 아니었으나 그쯤은 원만히 합의가 됐다. 정시 퇴근하는 치원이 이쪽으로 오기로 한 것이다. 그 덕에 시간을 번 재광은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한 시간의 초과근무를 마쳤다.
“많이 기다렸어요?”
“아뇨, 아뇨. 느긋하게 왔더니 저도 좀 전에 도착했어요.”
두 사람이 마주한 곳은 회사에서 조금 떨어진 식당이었다. 익숙한 얼굴을 보고 다가선 재광은 멋쩍게 웃으며 앞자리에 앉았다.
퇴사 이후 만나기는 처음이었으나 치원은 여전한 모습이었다. 트레이드 마크 같은 동그란 안경을 쓰고 또랑또랑한 눈을 빛낸다.
듣기로는 회사 전체가 바빴다던데, 그런데도 지친 기색 하나 없는 모습이었다.
“주문은 먼저 해놨어요. 저 때문에 괜히 일 대충 마치고 온 건 아니죠?”
“설마요. 저도 요 며칠 좀 빡세게 해서 오늘은 일찍 끝낼 만했어요.”
“대기업도 바쁜 건 똑같나 봐요. 일은 할 만해요?”
괜히 사람들 마음 뒤숭숭하게 만들까 봐 재광의 이직 소식은 퇴사 때까지 비밀이었다. 이미 나온 회사에 뒤늦게 퇴사 사유를 밝힐 일도 없는 게 사실이지만, 치원과는 종종 연락을 취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터놓게 됐었다.
재광은 막 세팅되는 전골냄비를 보다 말고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배우는 단계라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어영부영하다 보면 늘겠죠, 뭐.”
“적응할 때는 아무래도 힘들긴 하겠다. 그래도 여 팀장님이 아직도 아쉬워하는 인재잖아요. 익숙해지면 잘할 거예요.”
치원이 마치 화이팅을 외치듯 불끈 쥔 두 주먹을 들어 보인다. 재광은 어설프게 주먹 하나를 따라 흔들다가 도로 내렸다.
“그래도 이번에 온 인턴은 꾸준히 출근하고 있다면서요. 어때요?”
저더러 의주가 아직도 아쉬워하는 인재라 칭하기에 하는 소리였다. 금세 끓기 시작한 냄비를 기대 가득한 눈으로 보던 치원이 곧장 웃음을 터뜨렸다.
“여 팀장님은 자기 닮은 사람한테 끌리는 경향이 있으신가 봐요.”
“에?”
“재광 씨는 얼굴이 똑 닮았었잖아요. 이번에 온 분은 성격이 판박이에요.”
생각만 해도 웃긴지 치원의 얼굴에 웃음기가 떠나질 않는다. 그 반응에 덩달아 호기심이 생긴 재광이 의문 가득한 안색으로 그를 응시했다.
의주와는 꾸준히 통화를 하고 메시지를 주고받았지만 새 인턴에 관한 이야기는 오늘 출근을 했느냐 아니냐에 국한됐던 게 사실이다. 그렇기에 그가 어떤 사람인지 듣는 건 지금이 처음이라 궁금한 것도 당연했다.
그런 낌새를 알아차렸는지 치원도 시간 끌지 않고 답했다.
“저는 그쪽 일 잘 몰라서 정확하지는 않은데요. 인 프론트? 뭐 그런 거 있잖아요.”
“프론트 엔드, 백 엔드요?”
“맞아요, 그거! 여 팀장님이 새로 온 분한테 그중 하나만 시켰나 봐요. 그랬더니 자기는 둘 다 할 수 있는 실력인데 왜 한쪽에만 국한되게 일 주냐고 따지더라니까요.”
거기까지 들은 재광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렸다.
대표적인 한 사례겠지만, 특이하긴 했다. 프론트와 백으로 구분 짓는 만큼 두 분야에서 사용하는 언어도 다르고, 역할도 확연한 차이가 있기에 대개는 둘 모두를 요구하는 회사를 꺼리는 탓이다.
재광이야 학교에서 기초로 배운 내용들이 있었기에 시키는 대로 더듬더듬 익혀 나가며 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보통의 경우에는 대중없이 주어진 업무를 부담스러워하거나 불만을 느낄 터였다.
실제로도 출근 사흘 만에 유니콘 뿔을 찾아 떠난 인턴도 있었지 않나. 출근 당일에 입사 취소 통보를 한 사람도 있었고.
아마 의주가 한쪽으로 방향을 잡아 업무 지시를 한 것도 그 때문일 터였다. 재광처럼 무던히 받아들이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걸 깨닫고 조금이라도 인턴을 오래 잡아둘 만한 방법을 고안해낸 거다.
그런데 하필 그 타이밍에 저 같은 인턴을 받은 거겠지.
“그래서 팀장님은 어떻게 하셨는데요?”
“저도 업무 중에 흘끔흘끔 본 거라 제대로는 모르는데, 되게 골 때려 하면서도 만족해하시는 거 같았어요. 요새 별말 없는 거 보면 아마 인턴 분이 하고 싶단 대로 해준 거 아닐까요?”
치원은 부지런히 대꾸하며 팔팔 끓는 냄비에서 재광 몫의 전골을 덜었다.
일전에 부대찌개를 뜨다 재광의 눈에 국물을 튄 전적이 있는지라 유독 조심스럽게 구는 모양새였다. 그래서 더 상냥해 보이는 동작으로 앞접시를 내민 그는 이어 자신의 몫을 덜어갔다.
이제야 한입 맛보려 숟가락을 들 때였다. 테이블 구석에 놓아둔 재광의 휴대전화에서 긴 진동이 울린다.
액정화면에 뜨는 이름은 “여의주 팀장님” 여섯 글자다. 재광은 곧바로 휴대전화를 뒤집었다.
“전화 아니에요? 안 받아도 돼요?”
“아… 괜찮아요.”
깊게 생각하고 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냥 무의식중에 괜히 혼자 찔려 전화를 피한 거다. 반사적으로 한 행동이지만 복합적인 이유가 영향을 끼쳤을 터였다.
첫째로, 재광은 유독 치원과의 관계에 민감한 의주를 잘 알았다. 그렇기에 상대방이 반기지 않을 소식을 굳이 알릴 필요는 없지 싶었다.
둘째로는, 의주와 자연스럽게 연락하는 모습을 치원에게 보여선 안 될 것 같았다. 무어라 이유를 콕 집을 수는 없지만 왜인지 그래야 할 듯했다.
요 근래 의주와의 사이가 몹시도 좋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제게 잘해준 의주의 신경을 거스르기 싫고, 부쩍 친밀해진 사이를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이런 표현이 적절할지는 모르겠으나 이 순간 재광은 그런 생각을 했다. 바람피우는 사람들이 이런 기분일까, 하고.
전 직장 동료와 오래간만에 식사 한 끼 하는 것쯤이야 별일 아니건만 괜히 맘이 콕콕 쑤셨다.
뭐, 오래가는 죄책감은 아니었지만.
“성격이 비슷해서 그런지 매일 티격태격하면서도 잘 지내더라구요.”
치원은 잠시 끊긴 흐름을 되찾아왔다. 주어는 없지만 의주와 새로운 인턴에 관한 이야기라는 건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마 재광이 몸담았던 팀인 만큼 공동의 화제로 가장 적합하다 여기는 모양이었다.
재광도 그것까지는 이해했다. 더 이상 저와 관련 없는 일이라 여겨 전혀 관심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 꽤 흥미롭게 들리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요?”
“재광 씨 있을 때처럼 여 팀장님이 막 싸고도는 분위기는 아니긴 한데요. 괜히 틱틱거려서 그렇지, 서로 싫어 죽겠거나 그런 건 아닌 거 같아요. 오히려 티격태격할 때마다 더 친근해 보인다니까요?”
그런데 친근해 보인다는 대목에서는 괜히 맘 한구석이 꽁했다. 빨리 자신의 자리가 채워지길 바랐고, 안정적으로 출근하는 인턴이 생기면 좋겠다고 생각한 건 분명 진심이었건만….
막상 제 빈자리를 채운 누군가가 의주와 잘 지낸다니. 그것도 남의 눈에 친근해 보일 정도라니 기분이 묘하다.
“둘이 잘 맞는다고 하면 서로 질색하는데 진짜 비슷하거든요. 새로 온 인턴도 담배 안 피우고 술도 잘 안 하더라고요. 입맛도 비슷한지 둘만 나가서 점심 먹고 올 때도 꽤 많아요.”
“아….”
“그만하면 진짜 죽이 잘 맞는 거 같은데 두 사람만 인정 안 한다니까요?”
재광은 전골에 든 고기를 한입에 집어넣고 씹느라 고개만 대충 끄덕거리고 말았다. 그러고는 꼭꼭 씹어 삼킨 뒤에야 넌지시 물었다.
“근데 그 새 인턴이라는 분이요.”
“네.”
“남자예요?”
물을까 말까, 짧은 새 속으로 몇 번씩 고민하고 던진 질문이었다. 하지만 기어이 입 밖으로 내고서도 재광은 저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제 집에 오라느니, 비밀번호를 알려주겠다느니 진심으로 말하던 의주지 않나. 그런 그가 저 몰래 다른 파트너를 만들었을 거라곤 의심하지 않지만, 어쩐지 신경이 쓰였다.
몇 살인지, 어떻게 생겼는지. 심지어 성별도 모르는 그 사람이.
“네. 남자요. 저랑 동갑이니까… 재광 씨보다 한 살 더 많겠네요.”
“…그렇구나.”
그토록 치원을 경계하던 의주의 심정을 이제 조금 알 것도 같았다. 그래서 오히려 더 찝찝한 감정이 되고 마는데.
“둘 다 약간 워커홀릭 기질이 있어서 요새 개발팀 분위기 완전 전투적이거든요. 오늘도 일부러 좀 여유 있게 나왔는데, 두 분만 사무실에 남아 있더라구요.”
둘만 사무실에 남았다는 소식까지 접하고 나자 입술이 부루퉁하게 나올 뻔했다. 간신히 음식을 욱여넣으며 입술을 앙다문 재광은 애매하게 고개만 끄덕거렸다.
“요새 여 팀장님 진짜 정신없으시거든요. 그나마 일 욕심 있는 사람이 와서 좀 덜어주니까 다행인 거 같긴 해요.”
“그러게요. 다행이네요.”
치원의 말이 맞다고 생각하면서도 받아치는 목소리에는 괜한 감정이 실렸다. 혹여 들킬까, 비어가는 앞접시만 쳐다보던 재광은 잠시 망설이다가 도로 시선을 들었다.
“그러면 그, 인턴 분도 야근 많이 하겠네요?”
한 번 신경이 쓰이기 시작하니 걷잡을 수가 없었다. 투덕거려도 친근해 보이고, 은근히 취향이 잘 맞아 둘이서만 식사를 하고.
“그쵸. 최근에는 항상 개발팀이 제일 늦게까지 남아 있었으니까.”
심지어 의주가 바쁘단 사실만 알았던 요즘에도 늦은 시간까지 둘이 함께 있었을 거라 생각하면 가슴 속에 가시가 돋은 듯 맘이 불편했다.
물론 재광 본인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몰래 면접을 보고 이직한 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선택이었으니까. 의주 혼자 모든 일을 떠맡지 않으려면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게 당연했다.
그런데 이 찝찝함은 대체 어디에서부터 올라오는 건지, 좀처럼 알 길이 없었다.
“그러면 팀장님은 오늘도 늦게까지 계신대요?”
그런 마음을 여과 없이 드러낼 수는 없어 간신히 걸러낸 참이었다. 재광이 의주의 행방을 묻자 치원이 눈동자를 휙, 위로 굴린다.
“아마 그러지 않을까요? 론칭 때까지는 제때 퇴근 못 하시지 싶은데.”
무해하게 돌아오는 대답에 재광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슬며시 내리깐 눈꺼풀 아래로 눈동자가 도륵도륵 구르며 복잡한 심경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
“그럼 이만 유능한 인턴은 가보겠습니다.”
휑한 사무실에 정중한 목소리가 울린다. 의주는 고개를 비스듬히 돌렸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재광이 앉던 자리에 새로운 인턴이 일어나 있었다.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건가?”
“뭘요?”
“유능한?”
의주는 뻔뻔한 수식어에 의문을 보였으나 인턴은 기죽지 않고 떳떳하게 눈을 마주쳤다. 짧게 끄덕이는 고갯짓에 자신감이 물씬 묻어났다.
“이 많은 업무를 팀장님보다 먼저 마치고 가는데 유능하죠.”
“그래 뭐, 가는 건 가는 건데. 다음부터 그런 말은 업무일지 본 다음에 하자.”
“넵.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한 인턴은 그제야 빈 사무실을 걸어 나갔다. 당당한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의주는 작게 혀를 차며 고개를 설설 저었다.
일 욕심이나 해결 능력 따위를 보자면 제법 실력이 있는 것 같긴 한데, 업무량을 제대로 비교할 줄도 모르는 걸 보면 또 명석한 놈이라고는 못 하겠고. 참 애매한 녀석이라는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지금 퇴근해요?”
“네. 내일 뵙겠습니다.”
“잘 가요, 수고 많았어요.”
사무실 입구 쪽에서 말소리가 들려온다. 한쪽은 방금 나간 인턴이고, 다른 한쪽은 선호가 분명했다. 투자자와 미팅이 있다며 퇴근 시간도 되기 전에 회사를 나서놓고 웬일인지 다시 온 모양이었다.
“여의주, 밥은 먹었냐?”
할 일이 남아 돌아온 눈치는 아니었다. 대표실 쪽은 거들떠도 안 본 선호가 안쪽에 있는 의주의 자리로 직진했다. 한 손에는 근처 프랜차이즈 분식집 로고가 박힌 쇼핑백을 들고서였다.
“먹었다.”
“보아하니 또 샌드위치 쪼가리 먹었겠고만. 이거나 먹어라.”
달랑달랑 들고 들어온 쇼핑백은 금세 의주에게 넘어갔다. 선호의 예상대로 샌드위치 쪼가리로 저녁을 때운 의주는 사양하지 않고 곧바로 내용물을 확인했다. 김밥과 만두 냄새가 골고루 섞인 상자가 네 개나 쌓여있었다.
“뭘 이렇게 많이 샀대.”
“둘이 있는 줄 알고 넉넉히 샀는데 좀 전에 인턴 퇴근하더라. 가는 거 잡을 수는 없지. 너 다 먹어라.”
조금 전 퇴근한 인턴이 언급되자 의주가 픽 웃는다. 재미있는 생각이 들어서라기보다는 어이없어 흘리는 실소에 가까웠다.
“야, 걔가 퇴근하면서 뭐라는 줄 아냐? 유능한 인턴은 먼저 가보겠대.”
“직접 그렇게 말해?”
“어. 지가 지 입으로.”
선호는 딱히 놀라거나 기가 막혀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느긋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한 팀 답네. 너도 그러잖아.”
본인 입으로 자기 자랑하기로는 의주가 일인자였다. 그런 그와 오래 알고 지낸 선호는 그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커다랗게 썬 김밥을 한입에 넣은 의주는 불만스럽게 눈썹을 달싹거렸다. 그는 턱짓에 속도를 올려 빠르게 김밥을 삼키고서야 입을 열었다.
“나는 진짜 잘하잖아.”
“허.”
“쟤는 아직 새싹이야. 앞으로 필지 질지 모른다고. 아, 물론 여의주 님 밑에서 잘 버티기만 하면 100퍼센트 피지.”
선호는 별도로 말을 얹지 않았으나 표정만으로 충분했다. ‘그럼 그렇지’ 하는 거다. 그는 솔직한 마음을 내비치는 대신 어르는 듯한 말투로 대꾸했다.
“그래, 얼른 잘 키워서 실력 좀 피우게 만들어 봐라. 그래야 일도 좀 넘겨주고 너도 사람 같이 살지.”
“지금도 완벽한데?”
“완벽은 개뿔. 이 시간까지 회사에서 이러고 있는 게 완벽해 보이냐?”
“나 아님 누가 이걸 소화해.”
퍽 당당한 목소리에 선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일 자체를 즐기고 책임감 넘치게 해결해주는 건 대표로서 당연히 고맙지만. 인간 대 인간으로, 혹은 친구로서 지켜볼 때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당사자가 중대한 업무를 해결하는 자신의 능력에 푹 빠져 있으니 이걸 뜯어말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선호는 느릿하게 고개를 저으며 한탄하듯 말했다.
“야, 그냥 어디 나가서 연애라도 해라. 그래야 일에 좀 덜 매달리지.”
“대표가 열심히 일하는 직원한테 할 소리냐?”
“정도를 모르니까 그러지, 인마. 친구 갈아서 내 배 불리면 그게 맘이 편하겠냐?”
“와 눈물겨운 우정 나셨네.”
저를 걱정한다는데도 의주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그에 선호가 눈을 흘기자 대수롭지 않게 목 뒤를 긁적거리던 의주가 무게감 없는 목소리로 그런다.
“야, 근데. 연애 꼭 할 필요 있냐?”
????
재광은 익숙한 건물 앞에 섰다.
스타트업 기업들이 모여 있는 오피스 단지다. 늦은 밤이지만 촘촘하게 뚫린 창문 너머로는 빛이 새어 나오는 곳이 많았다. 재광의 전 직장이자 의주의 현 직장인 낭만인도 저 수많은 불빛 중 하나를 담당하고 있을 터였다.
‘야식 챙겨주는 게 뭐 별거야?’
잠시 머뭇거리던 재광은 재차 마음을 다지며 건물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의 손에는 파란색 네모에 물고기 무늬가 새겨진 초밥집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치원과는 일, 취미, 집안 사정까지 잡다한 대화를 나누다가 30여 분 전에 헤어졌다. 딱히 누가 서둘러서는 아니고 식사에 이어 차까지 마시고 나자 자연스럽게 파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그렇기에 재광도 이만 집에 들어가려던 참이었는데….
- 그러면 팀장님은 오늘도 늦게까지 계신대요?
- 아마 그러지 않을까요? 론칭 때까지는 제때 퇴근 못 하시지 싶은데.
한참 전에 치원과 나눈 대화가 재광의 발목을 잡았다.
돌이켜보면 형과 싸우고 냅다 집을 나와 하룻밤 신세를 졌을 때, 미안하다는 인사는 했으나 고맙다는 말은 한 적이 없었다. 지극정성으로 돌봐줘 고맙다고 별도의 사례를 할 정신도 없었고.
그렇기에 오늘 생각난 김에 은혜 갚은 까치가 되어볼까 했다. 일하는 사람 옆에서 방해할 순 없으니 포장해온 초밥을 전해주고 수고하란 격려의 인사 정도 하고 나올 요량이었다.
- 그만하면 진짜 죽이 잘 맞는 거 같은데 두 사람만 인정 안 한다니까요?
타이밍이 잘 맞는다면야 뭐, 의주와 죽이 잘 맞는다는 새 인턴도 보고 싶었고.
재광도 대체 자신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치원에게 새로운 인턴과 의주의 관계를 들은 다음부터 그게 줄곧 신경 쓰였다.
친한 친구 뺏긴 초딩처럼 구는 의주의 심정이 이해되는 날이 올 줄이야. 쓰게 웃은 그는 익숙한 걸음으로 건물 안에 들어섰다. 그래도 인턴이 신경 쓰이는 마음보다는 보답의 의지가 훨씬 크다고 스스로를 세뇌하면서.
안 하던 짓 하는 김에 괜한 바람까지 들어 의주에게는 연락도 하지 않고 온 차였다. 치원과 함께 있을 때 지레 찔려 연락을 피한 게 마지막이었다는 소리다.
의주가 그사이에 퇴근했으리라고는 예상하지 않았다. 그래도 개발팀 첫 인턴으로 재직한 경험이 있지 않나. 집에서 일하려 했다면 진작 갔을 거였다. 치원의 말로는 퇴근 시간 이후까지 남아 있었다 했으니 아직도 사무실에 있을 가능성이 컸다.
“….”
새 회사 출근길에 익숙해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먼저 익힌 기억이 지워지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자연스럽게 7층에 올라온 재광은 단번에 낭만인 사무실을 찾아냈다.
출근 첫날 이후로는 눌러본 일 없는 호출벨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재광은 당연하게도 호출 버튼을 누르려다가 이내 멈칫거리며 손을 거뒀다.
인근에 있는 지문 인식기가 눈에 들어온 탓이다. 퇴사하고 벌써 몇 달이 지났으니 재광의 데이터는 이미 지우고도 남았겠지만, 왜인지 한번 인식을 해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팔자에 없는 서프라이즈를 하겠다고 여기까지 와놓고 인제 와 뭔들 못 하겠냐는 합리화가 맘 한편에 자리 잡는다. 어차피 열리지 않을 걸 알고 손만 한번 대보는 거니까. 몇 초 걸리지도 않는 거 해보자 싶었다.
재광은 검지를 지문 인식기에 가져다 댔다.
“…어?”
당연히 경고음이 울릴 줄 알았으나 뜻밖에도 문이 철컥 열렸다. 하루에도 몇 번씩 직원들이 오가다 보니 열리고 닫힐 때 들리는 소리도 없앤 상태였다. 잠금쇠가 풀리는 약간의 소음만이 들린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더 큰 회사 가겠다고 인턴 기간만 마치고 나온 건 재광 본인인데, 딱히 불만을 가진 적 없는 곳이라 그런지 고향에라도 돌아온 느낌이었다.
하지만 감상에 젖어 있을 여유는 없었다. 이렇게 된 거, 제대로 된 서프라이즈가 가능해졌다. 재광은 아직 불이 켜진 사무실을 들여다보며 안도하는 한편, 더욱더 발소리를 죽여 걸었다.
어두운 내부에 다른 직원들은 없었다. 개발팀 자리가 있는 쪽에만 불이 켜져 있고, 의주는 컴퓨터에 가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 앞에 누군가가 서 있어 의주가 아직 있다는 사실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
재광은 걸음을 늘어뜨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혹시 저기 서 있는 사람이 새로운 인턴인가 싶어 유의 깊게 살피는 것이다.
그러나 몇 걸음 더 내디딘 뒤 쉽게 알아차렸다. 재광에게 익숙한 저 얼굴은 분명 선호였다. 눈동자를 굴려 주변 책상을 살핀 재광이 인턴의 부재를 깨닫고 조금 김샌 표정을 했다.
이렇게 된 거 초밥만 얼른 전해주고 가야겠다 싶었다. 그래서 숨죽이던 걸음에 조금 더 속도를 붙이자 멀리서 웅얼웅얼 들리던 말소리가 훨씬 더 또렷해진다.
“야, 근데. 연애 꼭 할 필요 있냐?”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그렇게 묻는 목소리는 틀림없이 의주였다. 재광은 저도 모르게 가까운 기둥에 기대어 서며 발을 멈췄다.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여기까지 대범하게 잘만 들어와놓고 새삼스럽게 몸을 숨기게 된다. 그러면서도 귀는 두 사람이 있는 방향으로 활짝 열려 있었다.
“꼭은 아니겠지만… 괜찮은 사람 있으면 굳이 안 할 필요도 없는 거 아니냐?”
“야, 나는 요새 그렇게 생각해. 잘 맞는 사람 있으면 같이 재밌게 놀고, 욕구만 해결하면 그걸로 된 거지 그게 꼭 연애일 필요는 없지 않나 싶어.”
몰래 엿듣던 재광의 눈이 크게 뜨인다.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져 끝내 쿵, 하고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순간 밀려드는 기분을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충격이나 실망 뭐 그런 류인 듯했다.
꼭 연애를 할 필요 없다는 의주의 말에 제가 왜 그런 기분을 느끼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맘을 헤아려볼 정신도 없었다.
몸을 숨길 때 그랬던 것처럼, 재광은 어쩐지 이 자리에 제가 있어선 안 될 것 같단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온 길을 되돌아 나가는 걸음이 조용하면서도 재빨랐다.
????
몰래 온 손님을 알아차리지 못한 두 사람만이 태평하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사귀지는 않는데 재밌게 놀고, 욕구 뭐? 설마 지금 섹스 파트너 그런 거 얘기하는 거냐?”
여자친구와 1,000일을 넘기고도 좋아죽는 이 시대의 순정남 선호는 온몸으로 질색했다.
질색만 할까, 당장이라도 의주를 경멸할 태세를 취했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부정적 감정이 의주를 정면으로 덮친다. 그는 덩달아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게밖에 해석을 못 해?”
“그럼 뭔데.”
“아니, 내 말은. 괜찮은 사람이랑 좋은 감정으로 관계가 쭉 이어지는데, 그걸 꼭 연애라는 이름으로 옭아맬 필요가 있냐는 거야.”
선호는 여전히 이해 못 하는 기색이었다. “안 옭아매면?” 하고 되묻는 목소리에 의아함이 서린다.
“어차피 연애도 제일 큰 파이는 신뢰잖아. 꼭 사귀자 어쩌자 말은 안 했어도 상호 간에 신뢰가 있다? 편하게 연락하고 만난다? 심지어 욕구 해결에도 문제가 없다? 그럼 그대로 유지만 해도 괜찮은 거 아니야?”
맞다. 이건 지난 몇 달간 성미에도 안 맞는 짝사랑을 해온 여의주의 자기 합리화다.
처음부터 이런 관계를 원한 건 아니었다. 원하는 바는 무조건 이뤄내고야 마는 여의주답게 재광의 애인 자리를 차지하는 게 최종 목표였다 이거다.
그러나 출생 이후 쭉 여자를 좋아해온 헤테로의 마음을 사로잡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억지와 운의 기막힌 콜라보레이션으로 섹스 파트너까지는 됐는데, 이후의 진전은 미미했다.
남들보다 훨씬 친밀한 사이가 된 건 사실이나 그 이상의 관계로 가기가 어려웠다. 확실히 재광은 이전보다 의주를 편하게 대했고, 일상적인 스킨십에도 더 관대해졌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익숙함에 불과했다.
재광이 자신을 연애 상대로 안 본다는 사실은 당사자인 의주가 가장 잘 알았다. 그래도 재광이 집을 나왔던 날, 불쑥 먼저 입을 맞춰오기에 약간의 기대를 실어보기도 했는데….
거기까지였다. 상한 마음에 잠시 안 하던 짓을 했던 것뿐인지, 제 기분을 찾은 재광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굴었다. 덕분에 하고 싶은 건 다 하고야 마는 여의주의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살짝 날 뻔했더랬다.
“말장난하냐? 그게 연애지 뭐야.”
“그니까.”
그런데 생각해보니 지금 재광과의 사이가 연애와 다를 게 뭔가 싶었다. 오히려 여태 의주가 해본 연애에 비하면 훨씬 더 달콤하고 안정적인 관계였다.
충분한 승산이 보이는데도 진전이 없는 건 재광의 연애관 때문일 테다. 그에게 진지한 만남의 상대는 여자인 게 당연할 테니까. 같은 남자에게 어찌어찌 몸까지는 허락했다 쳐도 그 이상의 깊은 사이가 되기에는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지도 몰랐다.
바로 그 점이 의주의 상심을 막았다. 자신이 재광에게 충분한 호감을 사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잖은가. 다만 하루아침에 성 지향성의 변화를 실감하고 인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테니 더 느긋하게 기다려볼 심산이었다.
더군다나 기다리는 시간이 늘어나더라도 선호의 말마따나 연애와 마찬가지인 사이로 지낼 수 있으니 크게 힘들 것도 없었다.
“굳이 껍데기에 집착할 필요 없이 알맹이만 잘 누리면 그거로도 충분하다는 거지.”
선호는 중언부언하는 제 친구를 지그시 봤다. 순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해대면서 표정만은 명답을 찾아낸 현인 같았다. 이렇게까지 구구절절 말이 많은 걸 보면 맘을 둔 상대가 없지만은 않다는 건데….
순간 선호의 머릿속으로 의주와 똑같이 생긴 얼굴이 스친다.
“야, 너 설마….”
“뭐.”
“아직도 재광 씨한테 수작 걸고 있는 거냐?”
선호가 그렇게나 두려워하던 사내연애의 가능성이 깨진 터라 한동안 잊고 있었다. 재광의 송별회 때 가지 말라고 진상을 부리던 의주를.
심지어 그는 술 취해 재광에게 키스까지 하지 않았나. 이만하면 지금까지 이어진 의주의 헛소리에 재광을 떠올리지 못한 게 더 이상할 지경이었다.
“수작이라니. 남의 순정을 그렇게 매도하지 마라.”
매도하지 말라니 더 이상 첨언하지는 않겠지만, 선호의 눈길에서는 여전히 찜찜한 속내가 묻어나왔다.
그동안 변태 같은 놈, 또라이 하며 의주를 칭하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거다. 저와 똑 닮은 남자에게 사심을 품다니. 범인(凡人)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런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의주는 태연했다.
“그러고 보니까 얘 왜 이렇게 연락이 없냐.”
혼자 중얼거리는 말 속의 ‘얘’는 재광일 게 분명했다.
????
집까지 무슨 정신으로 왔는지 알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쫓기기라도 하듯 급한 걸음으로 들어선 재광은 쾅 닫히는 문소리에 놀라 어깨를 움찔거렸다.
“왔냐?”
문소리가 어지간히 컸던지 방에 있던 민광이 나와 툭 던지듯 묻는다. 재광은 그때까지도 멍한 표정을 하고서 고개만 끄덕거렸다.
“뭐냐, 그건?”
민광이 턱짓으로 가리킨 것은 재광의 손에 들린 쇼핑백이었다. 주인을 찾아가지 못한 초밥이다. 재광은 구구절절 사연을 늘어놓는 대신 선 자리에 그대로 쇼핑백을 내려놓았다.
“먹든가.”
그러고는 곧바로 자신의 방에 들어갔다.
옷을 갈아입으면서도, 냅다 침대에 드러누워서도 정신이 맑질 못했다. 원인을 꼽을 수 없이 마음이 복잡했고, 괜스레 서러운 것도 같다가, 제가 왜 이러는지를 몰라 답답하기까지 했다.
꼭 폭풍이라도 몰아친 것 같았다. 너무도 짧은 시간에 수많은 감정이 속을 헤집었기 때문이다.
- 오히려 티격태격할 때마다 더 친근해 보인다니까요?
새 인턴과 의주의 사이를 접했을 때부터 이상한 기미가 있었다. 평소의 재광이라면 그러려니 하고 넘겨야 마땅한 이야기가 식사 내내 마음에 걸린 것이다.
어디 한 군데가 체한 듯 턱하니 막힌 느낌이라면 참아봤을 텐데, 거스러미처럼 까슬까슬하게 거슬려 식사 내내 신경이 쓰였다. 하룻밤 진 신세를 갚겠다는 핑계로 찾아간 것도 그 때문이었지 않나.
그래도 거기까지는 자기변호가 가능했다. 초등학생처럼 유치하게 짝꿍이 다른 애랑 친하게 지낸다니까 샘이 나서 그랬다는 말로 퉁칠 수 있다는 뜻이다.
아무리 난데없는 행동이었대도 충동이라는 말만 붙이면 어느 정도의 당위성은 얻을 수 있었다.
- 야, 근데. 연애 꼭 할 필요 있냐?
- 잘 맞는 사람 있으면 같이 재밌게 놀고, 욕구만 해결하면 그걸로 된 거지 그게 꼭 연애일 필요는 없지 않나 싶어.
그런데 왜 의주의 말에 상처 입은 비련의 주인공처럼 뛰쳐나왔는지는 도통 이해가 안 됐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행동인데도.
따지고 보면 의주가 대단히 충격적인 얘길 한 것도 아니었다. 이렇게 들어도 저렇게 들어도 재광과의 관계를 객관적으로 서술한 정도에 불과했다.
- 나 좋아하라고 한 적 없는데? 그냥 어제처럼 섹스만 하자니까?
의주가 사탕발림한 말로 재광을 꼬드겨 입맛대로 굴린 것도 아니잖은가. 그는 처음부터 투명하게 자신의 의도를 드러냈었다. 나중에는 사귀자는데도 재광이 굳이 거절하고 섹스만 하는 사이를 자처해 지금까지 이어지는 중이었고.
그런 사이에 의주의 말이 충격적일 게 뭐가 있을까. 재광은 형에게 그간 쌓인 응어리를 쏟아냈을 때보다 더 착잡한 기분으로 머리를 굴렸다.
- 욕구만 해결하면 그걸로 된 거지 그게 꼭 연애일 필요는 없지 않나 싶어.
가슴에 비수처럼 꽂혀 들던 목소리가 다시 한번 귓가에 맴돈다. 이번에 재광은 어이가 없어 웃어버렸다.
몇 번을 곱씹어도 섹스 파트너의 정의를 그대로 읊은 수준이었다. 그런데 그게 왜 실망스러웠을까.
혼란스러운 기분이라 그렇지, 사실 크게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다. 그 말에 기분이 상할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여의주랑 연애라도 하고 싶었던 거냐고.’
여기까지는 단순한 추론으로 답을 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다음부터는 난이도가 확 올라간다.
섹스 두 번만에 덜컥 사귀자던 의주를 거절한 건 재광이었다. 이러나저러나 육체적 관계를 빼놓을 수 없다면 몸만 내어주는 쪽이 덜 손해라고 생각해서 내린 결론이었다.
그런데 지금 시점에서 의주와 연애가 하고 싶었다? 그건 곧 그에게 이전과 다른 마음이 생겼다는 뜻일 테다.
하지만 재광이 누구던가. 이별 후 몇 년이 지났는데도 애꿎은 의주를 미워할 만큼 첫사랑에 진심이었던 남자다.
즉 여자를 좋아하고, 동성에게 연심이 생길 수 있다는 사실도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이었다. 자신이 의주를 좋아한다는 가정마저 재광에게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 나는 너 좋아.
좋아한다, 안 좋아한다. 꽃잎을 뜯듯 오락가락하는 마음에 문득 나직한 목소리가 끼어든다.
한바탕 정사 후 지긋하게 쳐다보던 의주가 속삭이듯 했던 말이다. 기억은 불현듯 어느 날의 밤으로 이어졌다.
- 아… 좋아.
술기운에, 혹은 잠결에 재광을 보고 중얼거리던 꾸밈없는 말투와 따뜻하던 품의 온기.
그런 사사로운 요소들에 현혹되기라도 했던 모양이었다. 의주가 자신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다고, 은연중에 그리 여겼는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더 부끄러워진다. 남자와 남자 사이에 진지한 감정이 생길 수 없다 여기면서 의주가 자신을 좋아하는 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얘기니까. 앞뒤가 영 맞질 않았다.
휘몰아치는 감정에 혼란스러워하던 재광의 정신을 깨운 것은 요란한 진동음이었다. 옷을 갈아입으며 책상 위에 대충 팽개친 휴대전화가 긴 진동에 미세히 움직이고 있었다. 재광은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
그러나 곧장 기기를 집어 들고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끊길 줄 모르는 전화의 주인공이 의주인 탓이다.
여의주 팀장님.
간결하게 뜨는 저장명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도 통화 버튼을 누를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그러자 얼마 안 가 전화가 끊긴다. 대신 메시지가 날아들기 시작했다.
지금
여의주 팀장님 : 퇴근 아직이야? 왜 연락이 안 돼.
지금
여의주 팀장님 : 많이 바빠???
지금
여의주 팀장님 :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지금
여의주 팀장님 : 보면 연락 줘. 걱정되잖아.
재광은 연달아 도착하는 메시지들을 모두 미리보기로 확인했다. 한 글자씩 눈에 담을 때마다 만면에 혼란이 인다. 고작 몇 글자뿐인 메시지인데도 걱정하는 맘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것 같아 더 속이 복작거렸다.
치원과 막 저녁을 먹을 때부터 전화를 안 받았으니 고작해야 서너 시간 연락이 안 된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게 뭐라고 저렇게 걱정을 하는지. 더군다나,
욕구만 해결하면 되는 사이인데.
결국 재광은 휴대전화를 도로 책상 위에 올려놨다. 어쩐지 지금은 저기다 대고 아무렇지 않게 답장을 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
‘욕구만 풀면 되는 사이’가 몰고 온 여파는 컸다. 당장 오늘 아침에도 어디가 아프기라도 한 거냐는 의주의 메시지를 받은 재광은 죽을상을 하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굴레에 갇힌 심정이었다. 처음엔 의주의 말 한마디에 왜 본인이 실망하고 상심하는지를 몰라 혼란스럽고, 그 혼란이 너무도 급격히 몰려와 아무렇지 않은 척 연락을 받을 엄두가 안 났었는데.
그대로 시간이 지나고 나자 이제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굴 자신이 없어 연락을 피하게 된다. 사정을 모르는 저쪽에서는 이 침묵이 몹시도 당황스러울 걸 알면서도.
마냥 피하는 게 좋은 해결 방법이 아니라는 건 재광도 잘 알았다. 그렇기에 언제까지고 무응답으로 일관할 작정도 아니었다.
다만 지금은 어떻게 의주를 봐야 할지를 모르겠는 것뿐이다.
눈 딱 감고 물어볼까 생각도 했다. 팀장님한테 우리는 재밌게 놀고 욕구만 푸는 사이일 뿐이냐고.
물론 그게 하등 쓸모없는 질문이란 걸 금방 깨달아 냉큼 접었다.
애당초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낸 장본인이 의주였지 않나. 자신의 생각이라며 서두에 못을 박아두고 시작한 얘기이기도 했다.
희박한 확률로 이전과 다른 대답이 나온다고 쳐도 마찬가지였다. 가령 멋없어 보일까 봐 대충 둘러낸 얘기였다고 해도 달라질 상황은 아니었다.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의주가 사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실은 진심으로 좋아한다고 고백해도 재광이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러니까 간단히 얘기하자면, 재광이 자신의 감정을 공고히 하지 않는 이상 아무것도 해결이 안 된다는 의미다. 그러지 않고서야 제가 원하는 방향이 어느 쪽인지를 모르니 어떤 결말도 만족할 수 없을 게 뻔했다.
“아, 진짜….”
좀처럼 답을 찾기 어려운 문제에 기어이 혼잣말이 밖으로 샜다. 양팔을 책상 위에 고이 접어 머리를 싸매자 옆자리에 있던 사수가 파티션 너머로 목을 쭉 뺀다.
“무슨 일 있어요? 또 개발팀에서 뭐라고 해요?”
옆에서 한숨 푹푹 내쉬며 끙끙 앓다가 종래에는 머리까지 쥐어뜯으니 일이 잘 풀리지 않아 그런 줄로 오해한 듯했다. 빠르게 자신의 근무 태도를 돌아본 재광은 발딱 몸을 일으켰다.
“아,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두통이 좀 있어서….”
의주의 얼굴은 태연히 대할 자신이 없어 며칠째 피하고만 있으면서, 상사에게는 뻔뻔한 거짓말이 잘만 나온다. 저쪽에서도 한 치의 의심 없이 변명을 믿는 눈치였다.
“약은 먹었어요?”
“아니요. 그 정도는 아니에요.”
“약 챙겨 먹고, 혹시나 무슨 일 있으면 얘기해요.”
“네. 감사합니다.”
재광은 목례로 대화를 마치고는 정자세로 고쳐 앉으며 모니터를 봤다.
딴생각은 의식적으로라도 끊어내고 일에 매진해볼 요량이었다. 차라리 업무에 몰두하면 잡념은 자연스럽게 밀려날 거라는 기대였다.
그러나 아주 순진한 바람이었다. 사내 메신저를 켠 재광은 판판하게 굳은 눈매로 제게 온 메시지를 읽었다.
‘또 안 된대, 또.’
자사 웹사이트 보완 건으로 아직 실랑이 중이었다.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재광이 매뉴얼에 따라 형식적으로 보완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면, 저쪽에서는 갖가지 핑계를 대며 안 된다고만 하는 거다.
사수의 말로는 원래 사이가 좋진 않아도 이 정도로 고집을 부릴 문제는 아니라며, 신입이라 괜한 기 싸움을 거는 것 같다고도 했다.
평소라면 조금 짜증은 나도 전형적인 답장을 해줄 수는 있었을 것 같은데 오늘은 영 의욕이 안 생긴다. 결국 재광은 다시금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전까지 컨디션이 안 좋다던 재광이 일어나자 사수가 곧장 그를 쳐다본다.
“저, 잠깐만 바람 좀 쐬고 올게요.”
“그래요.”
재광은 겉옷과 휴대전화를 챙겨 사무실을 나섰다. 연애(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와 일, 뭐 하나 수월히 풀리는 게 없으니 찬바람으로 머리를 좀 식히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
소란한 맘을 끌어안은 재광은 밖으로 나도는 편을 택했다.
아무리 고민해도 시끄러운 속을 달랠 길이 없어 차라리 정신 사나운 쪽이 낫겠다는 판단이었다. 다른 사람들 속에 섞여 한눈을 팔다 보면 잠시라도 답 없는 고민을 잊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어제는 관심도 없는 사내 동아리에 열심히 기웃거렸고, 오늘은 타이밍이 잘 맞아 대학 동기들을 만나러 왔다.
두 시간쯤 초과근무를 한 터라 조금 늦었다. 평소라면 동기들에게 저 없이 만나라고 했을 상황이지만, 오늘은 그러고 싶지가 않아 뒤늦게 합류한 참이었다.
“어, 재광이 왔어? 고생 많았어.”
“야 너 아직 신입인데 너무 구르는 거 아니야? 일이 왜 이렇게 많아?”
재광이 모습을 드러내자 도원과 민주가 차례로 그를 맞는다. 왜 이렇게 일이 많냐는 말에 “적응하면 좀 낫겠지” 하고 대꾸하던 재광의 시선이 문득 연우에게로 향했다.
원래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니지만 그 점을 고려해도 유독 조용하더라니. 재광이 늦는 사이에 술을 거하게 들이켠 모양이었다. 연우의 눈이 반쯤 풀려 있었다. 의식도 그만큼 몽롱한지 금방이라도 잠들 것 같은 얼굴이었다.
“작정하고 유연우만 먹였어? 쟤 벌써 취했는데?”
연우가 과음한 모습은 스무 살 때 이후 처음이었다. 본격적으로 연기 활동을 시작하면서는 늘 자기 관리에 철저해, 동기들끼리 모인 자리에서도 분위기만 맞추는 정도로 홀짝이는 게 다였더랬다.
그런 그가 눈이 풀릴 만큼 취한 게 의아해서 묻자 흐릿한 정신에도 자신의 이름을 똑똑히 들은 연우가 배시시 웃는다.
“나 오늘, 영화 캐스팅 확정됐다.”
그래서 기분이 좋아 평소보다 더 마셨다는 뜻일 터였다. 재광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안색으로 대꾸했다.
“어… 그래, 야 축하한다.”
솔직한 맘으로 흥행 치트키라 불리는 호감도 1위 배우 유연우가 영화 출연 하나 확실시 한 게 뭐 그리 특별한 일인가 싶었다. 수두룩 쌓인 시나리오 중 원하는 걸 골라서 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던가.
그런 속내가 대답에서도 여실히 묻어난 듯했다. 도원이 연우의 뒷머리를 자상하게 쓰다듬으며 부연한다.
“엄청 욕심내던 작품이거든. 근데 이미지 안 맞을 거 같다고 감독님이 고민을 꽤 오래 하셨나 봐. 미팅 만 몇 번씩 하다가 오늘 결정됐대.”
“아아. 그럼 좋을 만했네. 야 유연우, 진짜 진짜 축하해.”
오늘따라 유난히 들뜬 연우를 이해한 재광은 영혼을 담아 재차 축하 인사를 전했다. 그러나 금세 또 의문에 휩싸였다.
“근데 유연우가 하겠다는데 그걸 고민하는 감독이 있어? 모셔가려고 난리 아니야?”
“야, 감독이 박찬영이래. 알지, 해외 시상식에서 상 받아서 난리 난.”
이번에는 안주를 집어 먹던 민주가 대신 답했다. 그는 재광이 아까의 자신과 똑같은 반응을 보인다며 유쾌하게 웃었다.
뒤늦게 합류한 재광을 배려해 한동안은 세 사람이 여태 나눈 이야기가 되풀이됐다.
아직 기사가 나기 전이니 캐스팅 소식은 대외비라는 당부부터 민주가 얄미운 후배를 골탕 먹인 얘기, 새 프로젝트가 들어와 한동안은 또 정신이 없을 것 같다는 도원의 이야기까지. 요점 정리하듯 간략하고 신속한 말들이 오갔다.
재광은 안주로 빈속을 채우며 착실히 청자 역할을 했다. 빠르게 밀려들어오는 정보들을 머릿속에 입력하느라고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일부러 사람들 틈에 섞이길 택한 재광의 의도가 잘 먹힌 셈이었다.
“재광이는? 일 해보니까 어때? 원래 보안 쪽으로 가고 싶어 했잖아.”
세 사람의 근황을 다 전해 듣고 나자 자연스럽게 재광에게로 턴이 돌아왔다. 도원은 아직 많이 남은 튀김을 밀어주며 순한 말투로 물었다. 막 맥주를 들이켠 재광이 큼직한 새우튀김 하나를 집어 들며 입을 연다.
“아직 배우는 단계라서 잘은 모르겠지만 그래도 일은 괜찮거든요? 좀 지루하긴 해도 할 만한데, 사람이 문제죠.”
“왜? 상사랑 안 맞아?”
“아뇨. 상사도 괜찮아요. 근데 이게 다른 팀에서 개발해놓은 걸 가지고 여기가 취약하다, 이거 좀 보완해라 해야 되니까요. 그게 소통이 좀 안 돼요. 요새는 말만 걸어도 급발진 한다니까요?”
“아, 그건 좀 민감하긴 하겠다. 어렵게 이직한 건데 일이 힘들어서 어떡해.”
“이것도 적응하면 되겠죠. 사수 보면 해탈하는 수밖에 없는 거 같더라고요.”
말을 마친 재광이 통통한 새우튀김을 아그작 베어 물었다. 크게 한입 베어 물고 남은 부분을 앞접시에 내려놓은 그는 별안간 코트 주머니를 더듬기 시작했다.
“왜? 뭐 찾아?”
“회사 얘기하니까 갑자기 담배 말려서요. 아, 있다. 저 한 대만 피우고 올게요.”
주머니에서 반쯤 찬 담뱃갑을 찾아낸 재광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덩달아 가방을 뒤지던 민주가 “나도!” 하며 뒤를 따른다. 도원은 다녀오라는 뜻으로 고개만 가볍게 끄덕이고 말았다.
네 사람이 모일 때 자주 이용하는 술집이라 내부 구조에는 빠삭했다. 재광과 민주는 익숙하게 흡연 구역으로 나가는 복도를 걸었다.
복도를 반쯤 빠져나왔을 때, 코트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고 있던 재광이 탄식했다. 문득 담뱃갑을 꺼내 본 타이밍이었다.
“아….”
“왜?”
“송민주, 이따 불 좀.”
담뱃갑이 어쩐지 가벼운 듯해 다시 확인해보니 라이터가 없었다. 재광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민주에게 말했다. 그러자 민주가 어이없다는 듯 자신의 담배를 빼 든다.
“얘 봐라? 나 전담으로 갈아탄 지가 언젠데.”
“그랬냐?”
“친구한테 관심 좀 가져라, 진짜.”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과장해 서운한 내색을 했으나 재광은 동요하지 않았다. 대신 귀찮게 됐다는 듯 목덜미를 긁다가 걸음을 돌렸다.
주머니에 없다면 가방에 있을 게 뻔해 가지러 가려는 심산이었다. 가방에도 없다면 도원에게 빌려도 됐고.
“먼저 나가. 라이터 갖고 갈게.”
“오냐.”
되돌아가는 걸음은 나갈 때보다 더 빨랐다. 순식간에 복도를 지나친 재광은 가장 안쪽에 있는 문 앞에 섰다.
그는 여기가 자신이 있던 방이 맞는지 확인한 뒤 문을 열었다. 미닫이문이 작은 소음 하나 없이 매끄럽게 밀린다. 점차 벌어지는 문틈으로 나란히 앉은 도원과 연우의 모습이 보였다.
재광은 라이터를 놓고 갔다고 얘기하며 얼른 물건만 챙겨 나올 생각이었다. 그러나 반 발자국 안으로 들이기 무섭게 온몸이 굳고 만다.
“….”
연우가 도원에게 입을 맞췄다.
가볍게 쪽, 하고서 떨어지는 뽀뽀였다. 재광이 도착할 즈음부터 이미 취해 있던 연우의 상태를 고려하면 주정이라 해도 될 것 같긴 한데….
“기분 엄청 좋은가 보네.”
놀란 기색 하나 없이 뺨을 훑어주는 도원의 반응이 한낱 주정이 아니라는 걸 알려준다.
헙, 숨을 집어삼킨 재광은 간신히 들여놓은 발을 바깥으로 빼며 서둘러 문을 닫았다. 닫히는 문 틈새, 황급히 돌아보는 도원의 얼굴이 슬로우모션처럼 보였다.
예상 못 한 상황에 당황한 재광은 쫓기듯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지나쳤다.
똥개 훈련하듯 같은 구간을 몇 번씩 오가는 모습이 우습다 느낄 겨를도 없었다. 얼굴이 허옇게 질린 그는 어쩔 줄을 몰라 당장 바깥으로 나가기에만 급급했다.
“와씨, 야 밖에 개추워. 나 잠바 좀 입고 갈게.”
먼저 나갔다가 칼바람을 맞고 돌아온 민주와 맞닥뜨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몸을 한껏 웅크린 민주가 오들오들 떨며 말하는데도 재광은 그럴 줄 알았다며 놀려먹거나 혀를 끌끌 차지 않았다. 꼭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혼비백산하며 “어? 어” 하고 지나칠 뿐이었다.
“뭐야, 갑자기 왜 얼이 빠졌어?”
민주가 물었으나 재광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저 앞만 보고 걸어 잽싸게 내부를 빠져나가느라 바빴다.
안광을 잃고 밖으로 나온 재광은 그제야 멈춰 섰다. 머릿속에는 대학 시절부터 봐온 도원과 연우의 유난스러운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는 중이었다.
민주와 장난으로 연우가 도원의 친자다, 둘이 사귄다 얘기한 적은 있지만 그게 사실이었을 줄이야. 재광의 긴 눈매 안에서 눈동자가 버벅거리며 방황했다.
‘그니까 둘이 사실은 사귄다고?’
원래부터 둘 사이는 이상하긴 했다. 원래 다정한 성격인 도원은 연우의 일에 더 유난스럽게 반응했고, 연우는 그런 도원을 새끼 오리 마냥 졸졸 따라다녔으니까.
누구도 그걸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유별나다고 하면서도 연우가 처음으로 마음을 연 사람이 도원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그러려니 하는 분위기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참 안일했다. 처음으로 마음을 연 상대니까, 그러니까 단순 동기 이상의 감정을 품기도 쉬웠을 텐데 거기까지 내다볼 줄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니.
물론 누구도 둘 사이를 눈치 채지 못했던 건 모두가 둔해서만은 아닐 터였다. 그렇다기보다는 도원과 연우, 양쪽 다 남자라서 감히 상상을 못 했던 거다. 둘 중 한 명이 여자였더라면 진작 사사로운 감정으로 엮어 왈가왈부했을 게 분명했다.
한마디로 도원과 연우 사이는 편견이 지켜준 셈이었다. 그러니 주변에서 눈치를 채지 못한 것도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인데….
‘아니 근데 어쩌다가….’
대체 어쩌다가 그런 사이가 됐는지는 여전히 의문이었다. 맘을 열고 어쩌고 하며 서로 간에 서사가 쌓였다고 한들, 그게 같은 남자끼리 눈이 맞는 결론으로 이어질 일이란 말인가.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쉽게 이해는 안 됐다.
마음이 급격히 심란해진다. 그러잖아도 욕구만 해결하면 그만이라는 의주의 말에 제대로 휘둘려 갈피를 못 잡고 있는 판국에, 절친한 남자 동기 둘이 실은 사귀는 사이라는 걸 알게 돼버리다니. 타이밍도 정말 너무했다.
재광은 코트 주머니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잽싸게 꽁무니를 빼느라 잊었던 담배 생각이 절실해진 탓이다.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문 그는 이내 인상을 확 찌푸렸다.
라이터를 가지러 갔다가 이 사달이 났음을 새삼 깨달은 참이다. 담배 연기 대신 한숨을 훅 내뱉은 재광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주변에 편의점이라도 있는지 살피는 행위였다.
그것도 잠시, 곧 재광의 앞으로 라이터 불이 내밀어졌다.
“…형.”
도원이었다. 재광이 문을 닫던 순간 돌아보는 얼굴에 당황이 가득했었는데, 이제야 따라 나온 모양이었다.
이유는 묻지 않아도 안다. 취한 연우를 혼자 둘 수 없어 마침 겉옷을 가지러 갔던 민주에게 맡겨놓고 나오느라 시간이 좀 걸렸을 테다.
재광은 괜히 아랫입술만 질끈 깨물며 멀뚱히 서 있었다. 그러자 도원이 조금 더 가까이 불을 대준다.
그제야 재광이 도로 담배를 물고 가볍게 빨아들였다. 불씨가 옮겨붙은 다음에는 도원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담배에 불을 붙였다.
“….”
“….”
이 상황이 갑작스럽고 착잡하기는 저쪽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재광을 따라 나온 도원은 말이 없었다. 한 발자국 떨어져 선 두 사람 사이에는 무겁게 뱉어내는 담배 연기만 쌓였다.
“재광아, 그게….”
도원은 담배 한 대를 다 태우고 난 뒤, 무거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운을 떼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을 거였다. 그는 쉽게 말을 잇지 못하고 망설였다.
“….”
“…제가 생각하는 게, 맞아요?”
또다시 찾아들려는 침묵을 끊어낸 이는 재광이었다. 도원 대신 요점을 짚는 목소리가 조심스러웠다.
도원은 잠시 입을 다물고 재광을 가만히 쳐다봤다. 그가 생각하는 게 뭔지 꿰뚫어 보기라도 하려는 듯한 눈빛이었다. 재광이 그랬던 것처럼 잠시간 입술 끝을 물어뜯던 도원은 조금의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맞아.”
“왜 둘이…. 둘 다 남잔데… 아니, 근데 어쩌다가….”
지금껏 도원과 연우의 사이를 확신하고 있었으면서도 막상 확답을 들으니 멘탈이 더 흔들린다. 재광이 횡설수설하자 도원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조금은 걱정스러운 듯도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거야, 재광아.”
“…네?”
“어쩌다 보니까 좋아하는 마음이 생겨서 그래. 그게 다야.”
제법 담담한 말투로 얘기한 도원은 눈을 질끈 감으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순한 눈매가 다시 뜨일 때는 조금 더 또렷한 눈동자가 재광을 향했다.
“이해해달라고는 안 할게. 네가 불편하다고 하면, 그러면….”
큰맘 먹고 입을 여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확고한 시선과 달리 말끝은 금세 잦아들고 만다.
끝맺지 않았다고 해서 못 알아먹을 내용은 아니었다. 애정 행각을 목격한 사람이 불편한 내색을 하면 굳이 이 관계를 계속 이어가길 강요하지 않겠다는 뜻일 테다.
참으로 조심스러운 태도였으나 그의 진중함이 무색할 만큼 이 문제의 답은 간단했다.
- 설마, 게이예요?
- 응. 못 들어봤어? 완벽한 남자는 다 게이라고.
재광의 인생에서 커밍아웃은 이번이 두 번째지 않던가. 의주는 ‘점심에 김치찌개 먹었어’ 하듯이 자신의 성 지향성을 터놨고, 재광은 그 고백을 받아들이고 말고 할 새도 없이 그와 몸을 섞었다.
그뿐인가. 인간적으로도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지내왔다. 이제는 그것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긴 하다만, 어쨌든 재광에게 있어 동성을 좋아한다는 사실이 인맥을 끊어낼 만한 사유가 못 된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형, 저는 사귀지도 않는 남자랑 잤어요.’
재광은 목까지 차오른 말을 간신히 참아냈다. 그리고는 말끝을 흐린 도원 대신 입을 열었다.
“형.”
“….”
“저, 놀란 거지 불편한 거 아니니까 걱정 마요. 누구한테 얘기할 건 당연히 아니고.”
대꾸하는 목소리는 담담하고, 또 단단했다.
사실이었다. 좋아하는 형이니까, 그리고 친구니까 애써 덮고 넘어가려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성 지향성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재광이 두 사람 사이를 놓고 이토록 놀라고 당황스러워 한 이유는….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근데 재광아.”
“네?”
“남자… 좋아하는 거, 그거 나야. 연우는 아니야.”
그래, 이거였다.
재광은 남자끼리도 이렇게나 애틋하고 진중한 감정을 가질 수 있다는 걸 오늘 처음 깨달았다.
기분이 좋아서 마음껏 애정 표현을 하던 연우의 표정이나, 당연하게 받아주던 도원의 손길 따위에서 저들이 진심이라는 게 훤히 보였다.
덧붙이자면 서로에게 서로가 얼마나 소중한지도.
지금만 해도 그랬다. 도원은 재광이 괜찮다는데도 연우의 입장이 난처해질까 봐 부러 말을 더하고 있었다. 그게 얼마나 깊은 마음일지, 차마 그것까지는 재광이 함부로 가늠할 수 없었다.
의주는 말로만 게이라 들었지, 그가 다른 남자와 감정을 주고받는 걸 목격한 경험은 없었잖은가. 재광에게 사귀자, 좋다 말하긴 했어도 결국엔 다 장난으로 이어지고 말 뿐이었다.
그렇기에 남자와 남자 사이에 얼마나 진지한 마음이 오갈 수 있는지는 딱히 헤아려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째, 그게 가능하다는 걸 깨닫고 나니 더 혼란한 기분이 든다.
“연우는 그냥 나를 좋아하게 된 거지, 남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야.”
덧붙이는 도원의 말에는 머리를 크게 얻어맞은 느낌마저 들었다.
말장난 같은 한마디가 거센 파도를 몰고 온다. 일순 멍해진 재광은 속으로 도원의 말을 곱씹느라 어떤 대답도 주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침묵에 도원은 멋쩍은 듯 웃었다.
“오해 안 했으면 해서.”
“아… 네. 안 해요, 오해.”
“그래주면 고맙고.”
조심스럽던 대화도 이제 끝물이었다. 유난히 찬바람에 겉옷을 여미던 도원은 미미한 미소를 지으며 재차 입술을 뗐다.
“춥다. 이제 들어가자.”
“먼저 들어가요. 저 한 대만 더 피우고…. 아, 형 저 불 좀 빌릴게요.”
“아, 그럴래?”
도원이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손수 불을 켜줬다. 그 사이에 담배 한 대를 더 꺼내 문 재광은 익숙하게 불씨를 옮겨왔다.
“재광아 추워, 너무 오래 있지 말고 들어와.”
“그럴게요.”
걱정하는 말을 남긴 도원이 뒤돌아 건물 안으로 사라진다. 잠깐 열린 문이 온전히 닫히는 모습을 확인한 재광은 그제야 긴 한숨을 내쉬며 입에 문 담배를 빼냈다.
찝찝한 기분이었다. 여태 붙들고 끙끙대던 실타래가 어느 정도 풀린 것 같으면서도 정작 중요한 부분은 풀리지 않은 느낌이랄까.
착잡한 재광의 머릿속으로 조금 전 들었던 도원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맴돌았다.
- 연우는 그냥 나를 좋아하게 된 거지, 남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야.
재광은 지금까지 남자 사이에서 얼마나 깊은 감정이 오갈 수 있는지를 몰랐고, 여자를 좋아해온 자신이 남자를 대상으로 같은 마음을 품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도원의 그 말이 모든 걸 뒤집었다.
재광이 목격한 장면은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그 사이에도 도원과 연우가 서로에게 가진 마음은 감히 가늠할 수 없는 깊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또, 남자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특정한 사람을 좋아한다고 치면 재광이 근래 보인 이상 행동들이 모두 설명됐다. 새삼스럽게 인턴을 신경 쓴 것도, 연애 따위는 안 해도 된다는 의주의 말에 상처 입은 것도 다.
드디어 자신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게 됐으나 속은 전혀 시원하지 않았다. 이 감정을 인정한다고 해도 달라질 게 없는 탓이다.
- 욕구만 해결하면 그걸로 된 거지 그게 꼭 연애일 필요는 없지 않나 싶어.
의주는 욕구만 해결하면 그걸로 된다고 했지 않던가. 그런 사람의 곁에 사사로운 감정을 품고 남는 건 말이 안 됐다.
의주와 보통 사이도 아니고 섹스 파트너인데 일방적인 마음을 갖고서 몸을 섞는다?
그건 상상만 해도 비참했다. 저 자신을 갉아먹으면서까지 파트너 자리를 고수해야 하는가 하면, 정말이지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뭐, 이미 한 번 여의주의 그림자에 먹혀 열등감에 휩싸인 상태로 첫사랑과의 연애를 지속하긴 했다만….
“…씨발.”
거기까지 생각한 재광은 끝내 욕설을 읊조렸다.
첫사랑 누나가 졸졸 따라다니던 남자를 좋아하게 된 상황이라니. 이게 말이나 되나 싶었다.
이제는 담배 맛도 다 떨어졌다. 재광은 반쯤 타들어간 담배 개비를 미련 없이 땅에 툭 떨어뜨렸다. 신발 밑창으로 밟아 끄는 발짓에 자못 짜증이 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