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 Refactoring (8/21)

8. Refactoring

재광은 회사로 엮인 연이 끊기면 자연스럽게 의주와도 멀어질 줄 알았다. 그게 크나큰 오산이었음을 깨닫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 야, 광. 내려와.

시작은 머플러였다. 재광에게 빌려준 걸 받으러 온다는 핑계로 다음 날 득달같이 찾아온 의주는 그 길로 내리 한 시간을 떠들다가 갔다. 다음 날에는 퇴근하며 지나는 길이라면서, 그다음에는 커피를 사 왔다면서 재광을 불러냈다.

하루 종일 연락하는 건 기본이었다. 실없는 장난부터 아무 영양가 없는 대화까지 온종일 알림이 울렸다. 그래도 전 직장 상사인데 마냥 무시하기가 뭐해 답을 해주다 보니 어느새 채팅창의 말풍선이 양쪽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었다.

온종일 메신저를 하고도 모자라 밤늦게는 통화도 자주 했다. 재광은 사사로이 전화할 사이인가, 하면서도 못내 불편해 피할 상대는 아니라 생각해 그걸 또 곧이곧대로 받아줬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인 오늘까지도.

― 벌써 집이야? 친구들 만난다며.

타이밍도 어찌나 잘 잡는지 몰랐다. 별다른 언질이 없었는데도 마침 집에 들어온 찰나에 전화가 걸려왔다. 친구들과 만나고 들어오는 길인 재광은 머플러만 대충 풀며 소파에 털썩 앉았다.

“적당히 놀고 헤어졌어요.”

― 연말인데 벌써? 종 치는 것도 안 보고?

“이제 슬슬 연수원 들어갈 짐도 싸야죠. 그래도 2주는 있을 건데 급하게 챙기면 다 빠뜨리고 갈 거 같아서.”

백수 생활의 여유도 마음껏 즐기지 못했건만 연수원 입소가 당장 이틀 뒤였다. 퇴사 후 어영부영 시간을 보낸 재광은 이제부터라도 컨디션을 조절하며 차근차근 짐을 챙길 계획이었다.

그런데 의주는 꼭 연수원 입소 준비를 한다는 얘기를 못 들은 것처럼 굴었다.

― 아 뭐야. 이렇게 일찍 헤어질 줄 알았으면 오늘 보자고 할걸. 오늘 같은 날 혼자 처량하게 이게 뭐야.

아무래도 그에게는 만인의 기념일인 연말에 재광을 못 본 게 아쉬워 죽겠는 모양이었다.

재광은 기가 막혀 헛웃음을 흘렸다. 당장 어제까지도 커피를 미끼로 불러내 한참을 보다 갔으면서 하루쯤 건너뛰는 게 뭐 어떤가 싶은 거다.

그러나 입장 차이는 확고했다. 의주는 보고 싶다는 말도 서슴없이 내뱉으며 시종일관 아쉬운 내색을 비쳤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자정이 가까운 시각이다. 거실 벽에 걸린 시계가 열한 시 오십구 분을 가리킬 즈음, 의주는 여전히 서운한 목소리로 말문을 텄다.

― 아 이런 건 얼굴 보고 하고 싶었는데. 아무튼 광아.

거기까지 했을 때, 시곗바늘이 정확히 00분을 가리켰다. 문 너머로 아득하게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리는 것도 같았다. 그 사이로 선명한 의주의 목소리가 휴대전화를 넘어온다.

― 해피 뉴 이어.

“…팀장님도요.”

재광은 얼떨결에 의주와 가장 먼저 신년 인사를 나눴다. 왜인지 간질간질한 기분으로.

혼자 처량하다느니, 보고 싶다느니. 온갖 아쉬운 소리를 해대던 그가 성대한 연말 파티를 즐기는 중이었다는 건, 다음 날 마케팅 팀장의 메신저 프로필 사진을 보고 알게 된 사실이었다.

????

의주와의 부지런한 연락은 연수원에 입소한 뒤에도 꾸준히 이어졌다.

물론 의주의 공이 컸다. 일과를 마치고 숙소에 돌아오면 일정을 다 꿰고 있는 그가 기다렸다는 듯 전화를 걸어왔다.

하루는 20분 넘게 휴대전화를 붙들고 있다가 좀 자자며 일방적으로 통화를 마쳤더니 룸메이트가 그러더라.

- 애인이 재광 씨 되게 좋아하나 봐요.

재광은 기겁하며 그런 게 아니라고 했지만, 입사 전 인턴하던 회사 상사라고 설명하기에는 영 이상해 대충 얼버무리고만 말았다.

친한 친구들보다 의주와 더 많은 메시지를 주고받았대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적인 연락이 잦아진 탓인지, 더 이상 상사와 부하 직원이 아니게 된 탓인지. 재광도 의주가 이전보다 훨씬 편해진 느낌이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연락이 끊겼다. 정확히는 연수를 마치기 사흘 전부터다.

여의주 팀장님

시간 빨라. 이제 좀 있음 연수원 나오겠다. 오후 10:38

ㅇㅇ 금요일에 끝 오후 10:40

여의주 팀장님

이제 진짜 신입사원 되는 거네 ㅊㅋㅊㅋ

집 가면 뭐할 거야? 오후 10:41

집까지 가려면 시간 좀 걸리니까 금요일은 일단 쉬고, 주말에는 친구들 만나기로 했어요. 오후 10:42

여의주 팀장님

친구들? 오후 10:42

ㅇㅇ네. 대학 동기들. 오후 10:43

의주와의 마지막 대화였다. 누구를 만나는지 답장한 뒤로는 쭉 묵묵부답이었다.

평소의 재광이었다면 답장이 안 와도 그러려니 하고 넘겼을 터였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 일주일 넘게 매일 같이 연락을 주고받던 의주가 감감무소식이니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먼저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많이 바쁜지, 혹은 무슨 일이 있는 건지를 물었으나 여전히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다만, 수신 확인용 숫자는 즉각 사라졌다.

다 보고 있지만 답장만은 안 하는 거다. 재광은 두 번의 메시지 모두 읽씹당하고서야 알았다.

‘이 인간 삐쳤네.’

의주는 일이 너무 바빠 연락할 틈이 없는 게 아니라 삐친 게 분명했다. 2주간의 연수 기간이 끝나고 처음 만나는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는 지점에서 서운해한 게 틀림없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서는 재광도 그를 내버려 뒀다. 왜 삐쳤는지 이유는 짐작이 되지만 이해는 안 된 탓이다. 신입사원 연수가 끝나고 친구들과 약속을 잡은 게 왜 서운할 일인지를 모르겠는 거다.

‘다 큰 성인이 자기 일정 알아서 정하는데 그게 왜?’

대뜸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기에도 이상한 것 같아 함께 침묵했더니 기묘한 냉전만 지속됐다.

“와 신입사원이다!”

그리고 냉전 사흘 차, 연수가 끝난 주말. 재광은 예정대로 친구들을 만나러 나왔다. 예약해둔 식당 룸에는 민주와 연우가 먼저 와 있었다. 재광이 호들갑으로 저를 반기는 민주 옆에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았다.

“도원이 형은?”

“갑자기 연락 와서 랩실 갔어. 금방 올 거야.”

빈자리를 보고 묻는 말에는 연우가 대답했다. 먼저 소식을 들었을 민주가 곧바로 거들었다.

“같이 오려고 차 타는데 전화 와 가지고 연우가 태워다주고 왔대. 진짜 너무하다, 주말에.”

“그래도 다른 데에 비하면 괜찮은 거래. 교수님도 잘해주신다 그러고.”

“도원 오빠는 당연히 그렇게 얘기하겠지. 야, 우리가 윤 교수님을 모르냐? 좀 깐깐해야지, 그 양반.”

재광은 제 몫으로 놓인 물만 들이켜는 중이었다. 그러면서 민주와 연우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잠자코 듣는데, 별안간 화살이 이쪽으로 돌아온다.

“아! 그러고 보니까 너한테 인턴 자리 소개해준 것도 윤 교수님이었지 않아?”

“어. 맞아.”

“뭐야, 졸업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다들 윤 교수님 손아귀에 있는 거야. 무섭게. 연우야, 너랑 나만 벗어났다.”

영양가 없는 얘기에 연우는 그냥 싱긋 웃어넘겼다. 재광 또한 “나도 이제 벗어났거든?” 하고 말았다.

그때였다. 문밖에서 단정한 노크 소리가 두어 번 울린다. 민주의 “음식 나왔나 보다” 하는 말을 끝으로 어수선한 대화가 잦아들었다.

“왜 이렇게 조용해?”

그러나 민주의 예상은 빗나갔다. 문밖에는 서빙 카트가 아닌 도원이 서 있었다. 금방 온다던 연우의 말처럼 그새 볼일을 다 해결하고 온 모양이었다. 그는 비어 있는 연우의 옆자리로 다가갔다.

“형 왔어요? 일은 잘 해결된 거예요?”

“아, 응. 서류 확인만 하면 되는 거라 금방 보고 왔어.”

도원은 재광의 물음에 답하며 의자에 앉았다. 그를 따라 재광의 시선도 위에서 아래로 낮아진다. 시야에는 자연스럽게 도원과 연우 두 사람이 잡혔다.

재광과 마찬가지로 도원을 따라 시선을 낮추는 연우의 얼굴에 화색이 가득했다. 민주의 실없는 소리에 싱긋 미소 짓던 것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활짝 핀 웃음이었다. 심지어 빨리 앉으라는 듯 도원의 소매를 잡아당기기까지 한다.

‘매일 집에서 볼 텐데 저렇게나 반가울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재광은 머릿속으로만 떠올리며 헛웃음을 쳤다.

두 사람 유난스러운 거야 대학 때부터 유명했다. 사람 멀리하던 유연우의 철벽을 최초로 무너뜨린 게 도원이라, 다들 끈덕지게 붙어 다니는 둘을 당연하게 여기는 분위기였다.

재광과 민주는 “연우가 도원의 친자일 것이다”, “아니다, 사귀는 거다” 하며 실없는 논쟁을 벌이기도 했을 만큼 둘의 끈끈한 사이는 공공연하게 알려져 있었다.

아무개는 연우가 본격적으로 연예계 생활을 하면 깨질 우정이라 점쳤지만, 그마저도 틀린 소리였다. 연우가 작품 활동에 매진하면서부터 두 사람은 아예 한집에 살기 시작했으니까.

그게 벌써 몇 년 전의 일이다. 수년을 한집에 살면서도 새삼 밖에서 보니 이토록 반가워한다는 게 신기했다. 재광은 환하게 웃는 연우를 잠시 보다가 재차 들리는 노크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주문하신 음식 나왔습니다.”

이번에는 진짜로 음식이 나왔다. 코스 요리를 한 번에 내온 터라 접시를 내려놓는 시간만 한참이었다.

????

만날 때마다 오랜만이다 보니 할 얘기가 태산이었다. 심심찮게 메신저를 주고받는다고 해도 일거수일투족을 공유하는 건 아니라, 이야기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아, 맞다!”

넷 중 가장 부지런히 수다를 떠는 이는 단연 민주였다. 아주 잠깐 정적이 흐르는 걸 참지 못하고 금세 무언가를 떠올려낸다. 그는 손뼉까지 작게 짝짝 치며 잔뜩 흥미가 도는 안색을 했다.

“이거 얘기 안 한 거 같은데, 나 지난주에 혜진이 언니 결혼식 갔다 왔다?”

‘혜진이 언니’라 함은, 대쪽 같은 취향을 가진 재광의 첫사랑이다. 재광의 열등감을 폭발시켜 의주와의 관계가 지금까지 이어지게 만든 원인이기도 했다. 익숙한 이름에 막 스테이크를 집어 올린 재광이 흘긋 민주를 돌아봤다.

그게 다였다. 무심한 표정을 한 그는 곧 잘 자른 스테이크 조각을 입안에 넣고 부지런히 턱을 움직였다.

“아니, 나 저번에 얘네 회사 근처로 미팅 갔다가 같이 저녁 먹었잖아. 그때 의주 오빠도 봤거든? 그러고 나서 언니 신랑 보니까 더 닮아 보이더라.”

오히려 재광은 여기서 동요했다. ‘의주 오빠’라는 말에 저도 모르게 어깨가 움찔거린다. 부드러운 육질을 열심히 으스러뜨리던 턱짓도 완전히 멎어버리고 말았다.

2주간의 연수가 끝나고 자신과 먼저 만나지 않았다고 해서 삐친다는 건 여전히 이해 불가였다. 나이 서른에 그런 사사로운 이유로 잠수를 타는 게 말이 되나 싶은 것도 사실이고.

그렇지만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가 없다. 하필이면 연수 가기 직전, 그리고 연수 기간 동안 사이가 몹시도 좋았던 터라 상심해 연락을 끊어버린 의주의 행동이 더 거슬렸다.

하루가 멀다고 메시지와 전화를 일삼던 그가 이만큼이나 조용하다니, 대체 얼마나 맘이 상한 건가 싶어지는 거다. 가끔 좀 뜬금없는 짓을 하긴 해도 여태 의주가 제게 잘해줬던 건 사실이라 조금은 미안한 감정마저 들었다.

‘알아서 잘 놀고 있을 텐데 뭐.’

입안에서 잘게 씹힌 고기 조각을 꿀꺽 삼킨 재광은 의도적으로 생각을 접으려 노력했다.

미안한 마음을 외면하고 싶어 괜스레 넘겨짚는 건 아니었다. 지난 연말에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의주는 같이 새해를 맞지 못해 섭섭한 내색을 잔뜩 내비쳤었다. 자정 직전 통화를 하면서도 오늘 같은 날 봤어야 하는데 아쉽다며 투정을 부렸었다. 그래놓고 실은 대표와 마케팅 팀장 커플 사이에 끼어 호화 파티를 즐기지 않았던가.

오늘도 그러지 말란 법은 없었다. 당장 지금 이 시간, 의주가 어디서 뭘 하며 신나게 놀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이만 잡념을 떨쳐버리려고 했는데.

“야, 김재광!”

체감한 것보다 더욱 깊게 생각에 빠져 있었던 모양이다. 민주가 재광의 눈앞에서 손가락을 부딪치며 딱, 소리를 낸다. 재광이 서둘러 눈에 초점을 찾으며 동기들을 둘러봤다.

“어? 어, 왜.”

“눈 뜨고 조냐?”

“졸긴 뭘 졸아. 그래서 뭐, 왜.”

“밥 먹고 가볍게 와인 한잔하는 거 어떠냐고.”

평소의 재광이라면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을 터였다. 원래 이거 하자 해도 그래, 저거 하자 해도 그래 하는 게 재광이니까.

그런데 이번에는 쉽사리 답이 나오질 않는다. 재광은 “아…” 하고 의미 없는 소리로 시간을 끌었다.

맞은편에 앉은 도원과 연우가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이쪽을 본다. 그들과 차례로 눈을 맞춘 재광은 천천히 말을 꺼냈다.

“저기, 미안한데….”

“….”

“나, 오늘은 밥만 먹고 가야 될 거 같애.”

말을 끝마친 재광은 애써 한숨을 삼켰다.

의주가 어디서 신나게 놀고 있든, 지지리 궁상을 떨며 집에 처박혀있든 확인은 해봐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이 상태로는 아무리 좋은 와인을 입에 대줘도 마음이 찜찜해 맛을 모르지 싶었다.

오래간만에 만난 친구들마저 뒤로하게 만들다니. 결국 여의주의 옹졸함이 이긴 셈이었다.

????

식당에서 나와 친구들과 다른 방향으로 돌아서면서도, 재광은 이게 지금 무슨 짓인가 했다. 자신이 고민하고 내린 결정이지만 이게 과연 옳은지는 확신이 서지 않았던 거다.

무작정 의주의 집까지 와서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마침 출입하는 사람이 있어 1층 현관은 손쉽게 들어왔지만, 현관문 앞에서 난관에 부딪힌 것이다.

늘 그랬듯이 벨을 눌렀으나 어떤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단단히 삐쳐 재광임을 알고 문을 안 열어주는 게 아니라, 아예 집에 없는 것 같았다. 현관문에 귀를 바짝 붙여봐도 기척이라곤 느껴지지 않는다.

잠시간 멀뚱히 서 있던 재광은 하릴없이 목 뒤를 긁적거렸다. 그러다 곧 휴대전화를 꺼내들기에 이른다.

어디예요? 오후 8:11

며칠 전과 같은 양상이었다. 메시지를 보내기 무섭게 말풍선 옆에 달린 1이 없어졌으나 답장은 오지 않는다. 헛웃음을 친 재광은 다시 한번 키보드를 두드렸다.

나 지금 집 앞인데 오후 8:14

이번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면 이만 돌아갈 심산이었다. 의주가 아무리 제게 맘이 상했다고 해도 이만하면 할 만큼은 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대로 영영 답이 오지 않는다 해도 더 이상 맘 한편이 찝찝할 일은 없을 듯했다.

그런데 웬걸. 단호한 결심이 전해지기라도 했는지 이번에는 바로 휴대전화가 울린다. 무심하게 화면을 내려다보던 재광은 곧장 기기를 귓가에 가져다 댔다.

“네.”

― 무슨 집? 우리 집?

여보세요 한마디 않고 대뜸 내뱉는 목소리가 다급했다. 재광은 상반되는 느긋한 소리로 “팀장님 집이요” 했다.

― 왜?

“왜는 무슨 왜. 그래서 어딘데요. 멀리 있으면 그냥 가고.”

― 아, 아! 안 멀어. 좀만 기다려. 10분만, 아니 5분만!

막 전화를 받을 때부터 이보다 더 급할 수 없을 것 같던 목소리는 그냥 가겠다는 말에 더 조급해졌다. 알겠다는 대꾸를 입 밖으로 내기 무섭게 끊기는 전화가 의주의 심정을 대변했다.

짤막한 통화를 마친 재광은 멋쩍음을 감추지 못해 괜히 주변만 둘러봤다. 채근하려는 건 아니었건만 졸지에 목줄을 당긴 기분이라 적잖이 겸연쩍었다.

멀리 있으면 그냥 가겠다는 말은 표면적 의미 그대로였다. 집 밖에 나간 사정이 있을 테니 돌아오기 번거로운 상황이라면 굳이 서두를 필요는 없을 듯해 그렇게 말한 거다.

그런데 이렇게나 다급하게 굴 줄이야.

이제 꼼짝없이 기다려야만 하는 처지가 된 재광은 현관문 옆의 벽에 기대어 섰다. 자못 처량하기도, 혹은 수상하기도 한 모습이었다. 그는 신발 앞코로 괜스레 바닥만 툭툭 차댔다.

“야, 광!”

전화 너머와 똑같은 목소리는 잠시 후에 들려왔다. 정확한 시간을 확인하지는 않았으나 5분 이상, 10분 이하쯤 되지 싶었다. 혼비백산한 꼴로 다가오는 의주의 걸음이 빨랐다. 아직도 어리둥절한 것 같은데, 그런 와중에도 표정이 꼭….

신도원 반기는 유연우의 그것이다.

의주는 재광이 도망갈세라 팔목부터 잡아챘다. 제법 힘을 실어 붙들고서야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른다.

“친구들 만난다며.”

“밥만 먹고 왔어요.”

의주가 “왜?” 하고 물을 때는 이미 집안이었다. 막 신발을 벗고 현관 문턱을 넘은 그는 그제야 재광과 마주했다. 재광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술을 뗐다.

“…팀장님 삐쳤잖아요.”

말을 마친 다음에는 아차 싶긴 했다. 그래도 서른 먹은 남자한테 삐쳤다니.

자기랑 안 만난다고 연락을 끊어버린 행동이 옹졸하다고 생각한 건 사실이지만, 곧이곧대로 말하고 보니 기분이 나쁠 것도 같았다.

그러나 명백한 기우였다. 의주는 저를 빼닮은 얼굴을 꼼꼼하게 들여다보다 말고 활짝 웃었다.

“어떻게 알았어?”

흘러나오는 목소리 역시 밝았다.

재광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쳤다. 어떻게 알았냐니. 티를 그렇게 내놓고 할 소리냐고.

솔직히 재광이 매사에 무심하고 둔한 건 맞다. 이번에도 만약 의주가 안읽씹을 했더라면 제게 서운해한다는 걸 알아차리기보다는 무슨 일이 생겼나 했을 거다.

그러나 메시지를 보내는 족족 당장 확인하고 답이 없지 않았던가. 다 보고도 일부러 답을 안 하는 건 서운함을 알아달라는 시위와도 같았다.

“그렇게 티 내는데 어떻게 몰라요.”

“제법이네.”

이제야 잡은 팔목을 놓아준 의주가 재광의 볼을 손끝으로 톡, 쳤다.

“그래도 아직 멀었다, 너는.”

재광은 뜻 모를 말에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릴 뿐, 무어라 대꾸하지는 않았다. 제 형이 하듯 괜한 지적을 하나보다 하고 마는 거다. 의주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그는 익숙하게 소파로 다가갔다.

“뭐 하고 있었는데요.”

“요 앞에서 민선호랑 밥 먹고 있었어.”

“대표님이랑요? 근데 갑자기 와도 되는 거예요?”

“괜찮아, 걔도 나 여러 번 버렸어. 너 밥 먹었다 그랬지. 마실 거 줄까? 커피? 콜라? 차도 있는데. 아 맞다, 귤 있어. 귤 먹자.”

친구랑 밥 먹다 별안간 홀로 남겨진 선호는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었다. 선호에 관한 이야기를 지나 무얼 내어줄지 고민하는 의주의 언사에 확실한 경중이 드러났다.

????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할 거면서 저를 안 만난 게 뭐가 그리 서운했는지. 재광은 좀처럼 알 수가 없었다.

재광도 의주와 무얼 하자고 여기까지 온 건 아니지만, 집에 발을 들인 이후 두 사람은 사이좋게 앉아 텔레비전만 봤다.

한참 뒤에 있는 채널에서 송출되는 옛날 예능프로그램이었다. 보는 둥 마는 둥 하던 재광은 어느새 휴대전화를 꺼내 들고 한눈을 팔았고, 의주는 제 것인 양 재광의 다리를 베고 누워 실실거리는 중이었다.

“이제 좀 풀렸어요?”

재광은 인터넷 뉴스를 들여다보며 무심한 투로 물었다. 마찬가지로 텔레비전에 시선을 꽂은 의주가 느긋하게 귤을 까며 “응” 그런다. 고민하는 기색 하나 없이 순순한 말투였다.

“내가 오지도 않고 연락도 더 안 했으면 어쩌려고 그랬어요?”

“그러려고 했어?”

“어쩌면.”

“와 서운해. 그래도 우리가 연락 좀 끊겼다고 영원히 안 볼 사이는 아니지 않냐?”

재광은 액정에 뜬 기사 스크롤만 무신경하게 슥슥 내렸다. 금시초문이라는 듯 “그런가” 하자 의주가 눈을 흘긴다. 물론 재광은 휴대전화 화면을 쳐다보느라 그 눈길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는 너 더 연락 없으면 내일쯤엔 전화할라 그랬지.”

“뭐야. 그냥 하루만 더 있을걸.”

“야.”

답지 않게 뺀질대자 의주가 금세 정색을 한다. 굳이 얼굴을 들여다보지는 않았으나 다 보이는 것만 같은 반응이었다. 단 한 글자에서 고스란히 묻어나는 감정에 재광이 설핏 웃었다.

“근데 대체 왜 삐친 건데요. 이게 뭐라고.”

그러면서 던지는 질문은 진심으로 궁금한 말투였다.

“광아, 원래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최우선이고 싶은 게 자연스러운 감정이야.”

고집스럽게 액정화면만 들여다보던 재광이 이제야 제 허벅지를 베고 누운 의주를 봤다. 눈길을 알아차렸는지 텔레비전을 보던 의주가 슬며시 웃는다. 무어라 말하려다 말고 주춤거리던 재광은 애써 무심한 말투를 냈다.

“그런 말 좀 아무렇지 않게 하지 마요.”

“왜. 헷갈려?”

“….”

“좋은 현상이야.”

의주는 공들여 깐 귤을 한 조각 떼어 기분 좋게 입안에 넣었다. 그러고는 왜인지 잠시 멈칫거리다가, 이어 한 조각을 더 떼어내 재광의 입가로 가져다 댔다.

보지 않고 팔을 뻗은 터라 입술로부터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재광은 별말 않고 고개를 움직여 흔쾌히 받아먹었다. 그리고 탱탱한 알맹이를 씹는 순간 표정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으!”

익지도 않은 귤을 따다 팔았는지 시고 떫고 난리가 났다. 먼저 맛본 의주가 의도적으로 재광에게도 건넨 게 분명했다. 재광이 복수의 뜻으로 무릎을 세게 튕기자 소리 내어 웃던 의주의 고개가 힘없이 들렸다 떨어진다.

“일부러 줬죠.”

“나만 먹기 아깝잖아.”

고백 비스름한 소리를 잘도 해대더니 고새를 못 참고 또 장난질이다. 이런 인간한테 잠시나마 헷갈렸다는 게 억울한 재광은 제 다리 위에 놓인 머리통을 쥐어박는 시늉을 했다.

정수리 바로 위까지 내려온 주먹이 애꿎은 공기만 흐트러뜨리고 멀어지자 타이밍 좋게 의주가 몸을 일으킨다. 그는 시디신 귤을 고스란히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등받이에 기대앉았다.

의주의 팔이 당연하다는 듯 재광의 어깨를 감싼다. 그는 허심탄회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야, 광. 너 이제 진짜 대기업 사원이네.”

“그렇죠.”

“살면서 대기업 명함 한번 달아보라고 내가 순순히 보내주긴 하는데, 그냥 적당히 다니다 나와.”

재광이 작게 눈살을 찌푸리며 곁을 돌아봤다. 상반기 서류 전멸에, 하반기에도 간신히 여기 하나 붙어 겨우 들어간 건데 적당히 다니다 나오라니. 이게 무슨 가당치도 않은 얘긴가 싶은 거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말라고 이마에 떡하니 써 붙인 표정을 본 의주는 당당하게 말했다.

“진심인데.”

“다닐 수 있을 때까지 꽉꽉 채워서 다니고 퇴직금 엄청 많이 챙길 건데요.”

“하기야 너같이 이래도 네, 저래도 네 하는 성격이면 오래 다닐 수도 있겠다.”

재광은 “참 나” 하면서도 부정하지는 않았다.

어릴 때부터 형에게 복종하고 살아온 덕에 윗사람 말 잘 듣기로는 제일이라는 걸 본인도 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입 아픈 소리를 하는 대신 의주에게로 턴을 넘겼다.

“그러는 팀장님은 왜 그만둔 건데요.”

“회사가 나를 담을 그릇이 안 되니까 박차고 나왔지.”

재광은 입을 꾹 다물었으나 만면에 쓰여 있었다. 얼씨구.

“내 능력을 펼치기엔 너무 회사가 구식이야. 나는 좀 풀어놔야 능력 발휘를 하는데 꽉 막혔어. 앞뒤 양옆 사방으로 꽉꽉.”

재광도 전혀 없는 말을 한다고 생각지는 않았다. 30분씩 지각을 하고도 뻔뻔한 인간이 대형 조직을 이끌기 위한 규칙들을 다 지키며 살려면 그게 갑갑하게 느껴지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테니까.

“일 해보면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걸?”

“그러겠죠.”

“너 이제 진짜 큰일이야. 출근하지? 그날부터 나 보고 싶어가지고 난리난다.”

“설마요.”

“진짜야. 보고 싶다고 화장실에서 몰래 울고 그러면 안 돼. 연락하면 내가 셀카라도 보내줄게.”

“그냥 거울을 볼게요.”

한마디도 안 빼먹고 받아치던 재광은 냉정하게 선을 그었다. 단박에 거절당하고도 의주는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아주 합리적인 친구네.”

오히려 어깨에 얹어놓은 손을 들어 재광의 뒷머리를 가볍게 헝클었다. 하하 웃는 소리가 말끝에 따라붙었다.

????

보고 싶어 큰일 날 거란 의주의 말이 온전히 틀린 건 아니었다.

“재광이 보고 싶다.”

주체가 재광이 아닌 의주라서 그렇지.

사심을 쏙 뺀 진심이었다. 요즘 의주에게는 재광 같은 직원이 절실히 필요했다.

재광의 자리는 아직도 공석이었다. 출근 사흘째 되는 날에 점심 먹고 튄 인턴 이후 한 명 더 합격 소식을 전하긴 했었지만, 나오기로 한 당일에 사정이 생겼다며 입사 취소 의사를 통보했더랬다.

그다음부터는 암만 양보를 해도 출근을 권해볼 만한 응시자를 만나지 못했다. 즉, 낭만인의 모든 개발 업무를 의주 혼자 떠맡고 있다는 뜻이다.

재광이 오기 전에도 낭만인 유일의 개발자였으나 그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새로운 직원의 합류로 일을 늘려놓았기 때문이다.

물론 회사에서 그를 압박하는 건 아니었다. 친구 좋다는 게 뭔가. 사정을 잘 아는 선호는 신규 앱 출시 일정을 늦출 의사를 보였으나 의주가 거절했다. 천하의 여의주가 업무를 감당해내지 못하는 걸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든 꾸역꾸역 쳐내고는 있었다. 본인이 자처한 일이라 원망할 사람이 없기도 했고.

그러나 재광도 거뜬히 해결할 수 있는 단순한 서비스 문제를 일일이 신경 쓰고 있으려니 그가 그리워지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뭐해 일 할만해? 1

오후 3:17

와중에 재광은 입사 초기라 아주 바쁜지 메시지 한 줄 읽지도 않아 더 일할 맛이 안 난다. 1이 고스란히 남은 말풍선을 물끄러미 보던 의주는 곧 의자에 널브러졌다.

집중력이 흐트러진 김에 숨이라도 돌리려는 차였다. 의자에 눕다시피 앉아 손으로 마우스만 달깍거리고 있는데, 탕비실에서 나온 직원들이 그런 의주를 보고 말을 건다.

“여 팀장님 괜찮으신 거예요? 좀 쉬셔야 할 거 같은데.”

걱정스러운 투로 얘기한 이는 마케팅팀의 여자 직원이었다. 이어 조금 더 친근한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다들 재광 씨 없다고 저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니까요. 여 팀장님 안색이 말이 아니에요.”

의주를 놀리듯 하는 소리였으나 당사자는 별 반응이 없었다. 듣는 시늉도 않고 축 처져만 있던 그는 몇 초 뒤에야 커다란 느낌표를 띄운 표정으로 허리를 곧추세웠다.

“치원 씨, 재광이랑 연락돼요?”

“네? 어… 지금이요?”

“지금.”

“안 해봐서 모르겠는데요. 해볼까요?”

“아뇨. 하지 말아요. 절대.”

혹여 제게만 답을 안 하는 걸까, 문득 의문이 들어 물어놓고 직접 확인해보겠다는 호의에는 인색했다. 마치 당장이 아니라 앞으로도 연락하지 말라는 것처럼 경고하는 뉘앙스였다.

치원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어넘겼다. 옆에 있던 여자 직원도 또 변덕을 부리신다며 고개만 설설 젓고 금방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든가 말든가. 의주는 모니터 하단에 뜬 시간만 노려봤다. 그래도 입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양심이 있으면 정시 퇴근은 시켜주겠지― 생각하면서.

물론 자신은 정시 퇴근을 꿈도 못 꾸겠지만, 그래도 그쯤에는 통화 정도는 할 수 있을 테니 그걸 기대하는 중이었다.

????

정작 재광은 의주를 그리워할 겨를이 없었다. 한창 업무 교육을 받고 회사에 적응하는 중이라 딴생각을 가질 틈이 없었던 것도 큰 이유지만, 무엇보다도….

- 와 진짜 의주 씨랑 똑같이 생겼네.

- 아아, 그 여의주 미니미라던….

요 며칠 저보다 의주의 이름을 더 많이 들은 터라 이 정도면 의주가 같이 있는 수준이 아닐까 싶었다.

- 학교 선배예요. 잠깐 같이 일하기도 했었고.

그토록 닮은 의주와 연이 있단 사실을 밝힌 뒤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피가 섞였나 의심이 될 만큼 판박이인 두 사람이 같은 대학을 나와 한 직장을 다니고, 심지어 의주가 다니던 회사에 재광이 뒤따라 입사를 하다니. 열화와 같은 관심을 받기에 적합한 사연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더 관심을 받자고 꺼낸 얘기는 아니었다. 면접 때 자신을 목격하고 의주에게 연락한 인사팀 직원이 있었으니, 언제든 소문이 퍼질 걸 알아 제 입으로 먼저 터놓은 것뿐이었다. 일찍 알려지면 그만큼 빨리 사그라질 거란 계산이었다.

비록 빨리 사그라지는 시기가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저더러 여의주 미니미래요.”

오늘도 의주의 이름에 한바탕 시달린 재광은 휴대전화에 대고 말했다.

지하철역에서 나와 집까지 걷는 길이었다. 기기 너머로 “잘 어울리네, 미니미” 하고 웃는 목소리가 넘어온다. 재광은 부루퉁하게 대꾸했다.

“대체 팀장님은 회사를 어떻게 다녔길래 그 큰 데서 모르는 사람들이 없어요?”

불만이 조금 스몄으나 진심으로 궁금해 묻는 말이기도 했다. 직접 업무로 부딪히지 않는 이상 어느 부서에 누가 있는지조차 알기 힘든 조직에서 어떻게 다들 의주를 또렷하게 기억하는지가 의문인 거다.

그 많은 사람 중 퇴사자가 한둘이 아니었을 텐데도 다들 그를 알고 있었다. 1년 반 즈음의 길지 않은 재직기간을 고려하면 더욱 놀라울 만큼 확실하게.

― 나같이 한결같은 사람이 어떻게는 뭘 어떻게야. 광아, 사랑이랑 재채기만 안 감춰지는 줄 알아? 명석함도 숨길 수가 없다고. 가만 있어도 빛이 막 난다니까?

“허.”

재광은 헛웃음을 지으면서도 마냥 없는 소리를 하는 건 아닐 거라 생각했다. 요 며칠 의주의 이름에 시달리며 들어온 이야기들이 있는 탓이다.

공채 기죽이는 특채, 라고 했다.

공채 문화가 있는 기업 특성상 치열한 경쟁을 뚫고 입사한 이들 사이에서 결속력이나 자긍심이 생기기 쉬운 구조였다. 그러다 보니 특채나 이직자에게는 알게 모르게 인색한 구석이 있었는데, 그런 분위기를 알면서도 전혀 기죽지 않았다고.

오히려 활개를 치고 다녔다고 했다. 지치지도 않는지 야근에 철야를 해가면서도 제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 모조리 참견하고 지적을 하고 다녔단다. 말로만 수평적 구조를 목표로 하는 회사에서 유일하게 그걸 실천으로 옮긴 사람이었다고도 했다.

의주를 향한 가장 긍정적인 평가였다. 그것도 좋게 말했을 때 그렇다는 거고. 실제로는 의주가 지적질 하나 할 때마다, 신입 주제를 모르고 나댈 때마다 주변 사람들이 피곤해졌을 게 뻔했다.

그래서인지 다들 의주를 ‘비범한 천재’인 동시에 ‘시끄러운 또라이’ 정도로 기억하는 듯했다.

“평범한 척이라도 좀 하시지.”

덕분에 재광도 입사와 동시에 화제의 중심에 놓였고 말이다.

보통 키, 보통 체격, 무던한 성격까지. 이날 이때껏 평범하게 행인1의 존재감으로 남들 틈에 섞여 살았던 재광으로서는 그 관심이 부담스럽기 그지없었다.

대단한 구경거리라도 되는 양 저를 향하는 시선은 약과였다. 괜히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말 몇 마디 붙였다가 여타 신입사원과 다를 바 없는 태도를 보고 내심 흥미를 잃은 기색을 보이는 이도 여럿이었다.

매사를 그러려니 하고 흘려보내는 재광이라 이 정도지, 그렇지 않은 사람이었다면 스트레스깨나 받을 법한 상황일 테다.

“왜, 누가 나 닮았다고 너 괴롭혀? 어느 부서 누군데. 말만 해. 내가 걔네 숨 쉴 틈도 없게 만들어줄게!”

재광은 ‘괴롭히긴 누가 괴롭혀요’ 하고 대꾸하려다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어쩐지 목소리가 생생하다 했지. 언제부터 따라오고 있었는지, 재광이 걷던 인도 바로 옆에 익숙한 차가 보인다.

재광이 자못 놀란 표정을 하자 조수석 창문을 내린 의주가 찡긋, 윙크를 날렸다. 이젠 이마저도 익숙해진 참이었다. 재광은 특별한 반응 없이 차에 올라탔다.

“뭐예요? 어떻게 여기 있어요?”

“집에서 일하려고 가는데 너 보여서 쪼르르 따라왔지.”

재광은 설핏 웃었다. 새 회사에 적응하느라 모르는 사람들에게 시달려서 그런지, 친근한 얼굴을 보는 게 내심 반갑기는 했다. 그 뜻을 읽은 의주가 곧바로 묻는다.

“반갑지?”

“뭐, 조금은.”

그렇다는 대답이 듣고 싶어 채근하듯 물어놓고, 의외로 순순한 대답에는 의주가 지레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며칠 만에 보는 재광의 얼굴을 꼼꼼히 뜯어보던 의주의 손이 단박에 재광의 뺨에 닿는다.

“아니 그놈의 회사는 신입을 어떻게 굴리길래 그새 볼살이 쏙 빠졌어?”

“적응하느라고 긴장해서 그렇죠.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굴리고 말고 할 게 뭐가 있어요.”

“벌써 자기네 회사라고 편들기는.”

“그러는 팀장님은요. 인턴 아직이에요? 완전 좀비 다 됐는데?”

표현은 장난스럽지만 마냥 놀리듯 하는 소리는 아니었다. 일이 많아 한껏 예민하고 피곤해하던 의주의 모습을 못 본 건 아니지만, 재광의 눈에 지금 의주는 그때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초췌해 보였다.

의주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선바이저를 내렸다. 단번에 거울 커버를 젖히고 들여다보는 눈빛이 진중했다. 자신의 뺨과 턱을 한 손으로 훑은 그는 금방 다시 재광을 바라봤다.

“이렇게 잘생긴 좀비 봤냐?”

“그런 소리 하는 거 보니까 아직 살 만한가 보네요.”

냉담한 반응에는 가볍게 웃고 말았다.

의주가 별다른 대꾸 없이 잠시 멈췄던 차를 출발시키자 재광이 곧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인턴은요. 괜찮은 사람 없었어요?”

자신의 빈자리가 여태 의주에게 부담을 주는 것 같아 적잖이 마음이 쓰이는 중이었다. 누구보다도 새 직원이 필요한 건 의주겠지만, 자리에 적합한 사람을 뽑았단 소식을 하루빨리 듣고 싶은 건 재광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재차 묻자 의주가 뻑뻑한 눈을 크게 끔뻑거리며 대답한다.

“있으면 뭐해. 왔다가 도망가고 온댔다가 취소하고 그러는데. 다들 보는 눈이 없어. 나같이 좋은 상사를 못 알아보고 말이야.”

“그러게요.”

이건 서비스였다. 저 때문에 온갖 일 혼자 다 끌어안고 고생하는 의주를 위해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싶었다. 비록 립서비스에 능숙하지 못해 영혼 없이 튀어나오긴 했지만.

다행히 효과는 좋았다. 의주는 흘끔 조수석을 돌아보고는 활짝 웃었다.

“광아, 너도 마찬가지야. 너는 내가 세상의 쓴맛 좀 보라고 보내준 거니까, 적당히 찍어 먹기만 하고 와.”

“됐거든요.”

“안 넘어오네.”

미리부터 퇴사를 종용하는 말은 가차 없이 쳐냈으나 그뿐이었다. 재광은 신호에 걸린 틈을 타 은근슬쩍 잡아 오는 의주의 손길을 쳐내지 않았다. 슬그머니 눈치를 살피던 의주는 얌전히 놓인 재광의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어 보다 단단하게 깍지를 꼈다.

????

재광의 새 회사 적응기는 현재 진행형이었다. 부서 배정 일주일 차. 입사 동기들도 이제는 조금 여유가 생겼는지 함께 점심을 먹는 자리가 마련됐다. 오늘 점심 어떠냐는 메시지를 받은 재광도 흔쾌히 나와 한 자리를 차지했다.

회사에서 만난 사이다 보니 당연히 일 얘기가 주된 화제로 떠올랐다. 물론, 아직 교육 중인 신입들이라 심도 깊은 대화로 이어지지는 못했고 대개는 각자가 느끼는 부서 분위기나 업무 난이도에 관해 이야기했다.

“사수 잘 만나는 것도 복이라니까요. 왜, 그 윤경 씨 알죠. 경영지원팀으로 간.”

활발하게 떠들던 목소리는 ‘사수’라는 단어가 언급되며 급격히 조용해졌다. 말을 꺼낸 동기가 목소리를 낮추자 다들 짠 것처럼 고개를 쭉 빼고서 화자에게 집중했다.

“그 사수 분이 성격 장난 아니라 그러더라구요.”

“아 그래요?”

“저희 팀 분들도 다 알고 계실 정도니까 악명이 자자한가 봐요. 그러잖아도 엊그제 휴게실 앞에서 윤경 씨 봤는데 그새 얼굴이 반쪽이 됐더라니까요.”

원래 남 욕을 할 때 결속력이 급속도로 끈끈해지는 법이었다. 여기저기서 나도 봤는데 안색이 안 좋더라, 소문은 들었는데 진짜일 줄은 몰랐다― 하며 말을 얹었다.

재광은 거기에 끼지 않았다. 어떻게 말이 새어나갈지 모르니 몸을 사리겠다는 건 아니었다. 그보다는 몰라서 할 말이 없었다.

윤경이라는 이름도 메신저에서 접속 알림으로 봤을 뿐 얼굴도 기억 안 났다. 동기도 잘 모르는 상황에 그 사수가 누군지 알 리도 없잖은가.

재광은 그냥 밥만 먹었다. 그런데 다들 활발하게 대화를 나누는 중이라 그게 더 눈에 띈 모양이었다. 앞장서 이야기를 주도하던 동기가 불쑥 재광을 지목한다.

“재광 씨는요? 사수 괜찮아요?”

뒷담에 너도 동참하라는 의미는 아닌 듯했다. 그보다는 다들 떠들썩한 가운데 홀로 말이 없으니 더 잘 섞여들라고 일부러 말을 건 눈치였다. 불룩하게 튀어나온 볼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턱짓한 재광은 입안을 깨끗이 비운 뒤 입술을 뗐다.

“아, 네. 저는 뭐…. 괜찮아요.”

심심하기 그지없는 대답이었으나 다들 착하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다행이라 호응해줬다. 덕분에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듯했는데, 불쑥 짓궂은 목소리 하나가 끼어든다.

“재광 씨는 사수가 문제가 아니지 않아요?”

무어라 정확히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모두가 찰떡같이 알아먹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새로 대두된 주제에 곧 사방에서 잡음이 터져 나왔다.

“맞아. 저도 들었어요, 그거.”

“아, 그 엄청 닮았다던?”

“그분이 재광 씨 대학 선배에다가, 여기 오기 전에 일도 같이 했었다면서요.”

재광은 어정쩡하게 수저를 들고서 눈알만 데룩데룩 굴렸다.

아는 얼굴보다 모르는 얼굴이 더 많은 이 큰 조직에서도 소문은 어지간히도 빠르구나 싶어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동기 중 누구에게도 직접적으로 전한 적 없는 얘기를 다들 알고 있지 않나.

뭐, 따지고 보면 대단한 일은 아닐 터였다. 조금 전 누구의 사수가 성격이 안 좋다더라는 이야기도 다들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 것도 다 아는데 장안의 화제였던 소식을 모를 리가.

“주임 직급부터는 그분 모르는 사람이 없던데요?”

“와 진짜 궁금하다. 얼마나 닮았길래 그래요?”

이제야 윗사람들이 좀 조용해졌나 싶더니, 아직 동기들이라는 관문이 남아있었나 보다. 재광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친형보다 더, 닮았어요.”

친형과는 눈을 씻고 봐도 닮은 구석을 찾지 못할 수준이긴 했다. 하지만 같은 피를 물려받았다 하면 기본적으로 닮았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어 이만하면 적절한 대답이지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들 눈을 크게 뜨고 “우와” 하는 소리를 낸다.

“그 정도로요? 와 신기하겠다.”

“오기 전에 일 같이했을 때는 어땠어요?”

정작 재광이 회사 선배들에게 시달릴 때는 누구도 입에 올리지 않더니, 다들 기회가 없어서 그렇지 내심 궁금했던 듯했다.

“그냥 뭐….”

“맞아. 그분 진짜 장난 아니었다면서요. 회사를 막 뒤집어놓고 다녔다고 그러던데요?”

어쩌면 궁금한 게 아니라 자신들이 들은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고 싶은 것 같기도 했고.

질문을 받은 당사자는 재광이었으나 그가 한마디 채 마치기도 전에 여러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재광은 꾸역꾸역 말을 잇기보다는 다들 무슨 소리를 해대는지에 귀를 기울였다.

“맞아, 맞아. 쓸데없는 서류 작업 너무 많다고 건의했다가, 입 다물고 그냥 하랬더니 그동안 보고 양식 가라로 올린 상사들 리스트 만들어서 다 뿌렸다면서요?”

“그것도 들었어요. 내부 통신망 보안 취약하다고 말했는데도 안 들어주니까 자기가 직접 해킹해서 웃긴 짤로 경고문 띄웠다구요.”

“그랬는데도 아무 문제없이 회사 다녔대요?”

“일 커지면 윗선에서도 다 알게 되잖아요. 그래가지고 어느 선에서 의견이 묵살됐는지 그거 조사하느라 난리였다던데요?”

재광도 저를 찾는 상사들에게서 지난 한 주간 지겹게 들은 이야기들이었다. 이 밖에도 특채라 은근히 차별하는 직속 상사를 고발한 사건, 보복성으로 업무에서 배제했더니 온 사무실을 동네 마실 다니듯 돌아다닌 일 등이 레퍼토리처럼 줄줄이 쏟아졌다.

거기까지는 그러려니 할 수 있었다. 아직 어색한 상사들 사이에서 그런 이야기를 듣고도 속 시원히 끼어들 수 없었을 테니 지금은 얼마나 신이 날까 싶기도 했다.

그런데 갑자기 분위기가 이상한 쪽으로 흘러간다.

“와 진짜 무서울 게 없는 사람이었네요. 지금 이렇게 소문으로 들으면 그냥 재밌는데, 제 동기라고 하면 좀 그럴 거 같긴 해요.”

“아무래도 그렇죠. 자뻑도 엄청 심해서 다른 사람들 자꾸 무시해가지고 더 안 껴주고 그랬다던데.”

“머리가 좋긴 좋았대요. 적당히라는 걸 몰라서 온갖 사람 잡고 들들 볶아서 그렇지.”

상사들이 가십거리로 가벼이 떠들어댄 탓인지 동기들 또한 가볍게 의주를 입에 올리고 있었다. 재광의 표정이 저도 모르는 새 천천히 굳었다.

솔직히 지난 한 주간 상사들이 제게 이런 얘기를 해댈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의주라면 그랬을 법도 했고, 직접 사달을 겪은 사람이라면 그의 행동이 적잖이 난감하기도 했을 테니 말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달랐다.

눈앞의 동기들은 의주를 모르지 않나. 심지어 입에서 입으로 전달된 상황들을 멀리서나마 직접 겪고, 그 때문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도 아니었다. 의주에 관해서는 단 하나도 모르는 이들이 멋대로 떠들고 판단하는 게 영 내키지 않았다.

“재광 씨는 어땠어요? 같이 일할 때 엄청 힘들었죠.”

아니, 솔직히 내키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싫었다.

있었던 일이야 들은 대로 떠든다 치자. 그런데 왜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멋대로 평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치부하는지. 그게 못내 불쾌했다. 어쩐지 화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고 해서 재광이 곧이곧대로 아니꼬운 감정을 드러내는 편이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불편한 말도 귓등으로 듣고 넘겨버리는 게 가장 편하다 생각해 형에게도 제대로 대들어본 적 한번 없지 않던가.

“…하나도, 안 힘들었어요.”

그러나 지금은 그게 안 됐다. 하소연이 나와야 자연스러울 흐름이란 걸 알면서도 재광은 힘을 실어 말했다.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진다. 가십으로 신나게 떠들던 와중에 유일한 관련자가 정색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재광도 굳이 눈치를 살피며 어색하게 둘러대는 짓은 하지 않았다.

“튀는 행동을 했다고 하니까 그런 이미지로 보이나 봐요. 근데 실제로 그렇게 힘든 분은 아니었어요. 자기 자랑은 해도 남 무시하지는 않았고, 책임감도 있고, 배려도 잘 해주셨어요.”

이게 예의인 것 같았다. 지금 이 시각에도 저의 빈자리를 홀로 감당하느라 애쓰고 있을 의주를 누구보다 잘 아니까.

그러니까, 미운 정 고운 정 몸 정까지 든 사람으로서의 의리 같은 건데….

왜 의주를 놓고 떠드는 소리에 제 속이 이토록 상하는지는 재광 본인도 알 수 없었다.

????

동기들끼리의 점심 식사는 갑분싸 이후 어색하게 마무리되었지만 생각보다 타격이 크지는 않았다.

그 자리에 있던 몇몇과 어색한 사이가 되기는 했다. 그건 반대로 말하자면 나머지와는 아무 일 없었다는 양 잘 지낸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재광도 데면데면하게 인사하는 소수의 동기들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걸 맘 깊이 담아놓을 여유가 없기도 했고.

조금씩 제 앞으로 떨어지기 시작한 업무를 익히기만도 벅찼다. 여태 낭만인에서 앱을 다뤄왔건만, 여기서는 웹 기반으로 다시 시작하려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일뿐이면 다행이지, 그리도 하고 싶어 했던 보안 업무가 이렇게나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을 줄이야. 재광은 다른 부서들의 눈치를 보느라고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오늘만 해도 그랬다. 사수가 처음으로 재광에게 타 부서와의 커뮤니케이션을 맡겨, 자사 웹사이트의 취약점을 보고했더랬다.

간추리자면, 공격적인 수준은 아니지만 간헐적으로 해킹 시도가 발생하고 있으니 지금보다 시스템을 견고히 해둘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었다. 서버 보안팀 자체가 혹시 모를 상황에 미리 대비하고자 구성된 조직이니 응당 해야 할 말을 한 것뿐이었는데.

돌아오는 건 잔뜩 날이 선 반응이었다. 그래서 뚫렸냐부터 시작해 말만 하면 뚝딱 다 나오는 줄 아냐, 실제로 당한 적도 없는데 유난이다….

애먼 재광에게 공격적으로 굴더니 끝내는 “일단 알았다”라며 이도 저도 아닌 답만 했다.

전혀 예상 못 한 반응은 아니었다. 업무 교육을 받는 동안 눈치라는 게 있으면 분위기 정도는 알아서 깨우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요, 대리님.”

하지만 직접 당하는 건 또 달랐다. 뭐 나쁜 말이라도 했다고 급발진해 따지고 드는데, 무던한 재광도 당황스러워 어쩔 줄을 모를 정도였다.

혹여 제가 말실수라도 했나 싶어 사수에게 도움을 구하기도 했다. 대화 양상을 훑어본 사수는 애잔한 표정으로 재광을 불러내 흡연 구역으로 데리고 왔다.

“온라인으로 서비스하는 거면 보안이 당연히 중요한 거 아니에요?”

못내 억울한 목소리로 물은 재광은 곧장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막 연기를 뱉어낸 사수가 씁쓸하게 웃었다.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고, 그게 맞긴 한데요.”

“….”

“인식이 그래요. 보안팀 저것들 돈 한 푼 안 벌어오면서 지들이 뭐라도 되는 양 개발, 유지 보수 부려 먹기만 한다. 안 그래도 업무 많은데 있지도 않은 상황 설정해서 일만 더 얹어준다.”

“허.”

“근데 있지도 않은 상황이 실제로 벌어지면, 그땐 그거 우리 책임 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모르는 척하고 넘어갈 수도 없어요.”

담배를 물며 어깨를 으쓱거리는 사수의 표정이 꼭 해탈한 사람 같았다. 재광은 할 말을 잃고 그 얼굴만 쳐다봤다. 그러자 이내 사수가 재차 입을 연다.

“이건 상급자로서 재광 씨한테 좀 미안한 면도 있어요. 위에서 관계를 잘 쌓아왔어야 서로 이해하고 일하는 환경이 조성되는데, 이전에 그게 잘 안 됐던 거 같아서.”

그러면서 격려의 뜻으로 어깨를 툭툭 두드려준다. 재광은 거기다 대고 더 투덜거릴 수도 없어 괜히 입술만 삐죽거리다가 말았다.

머릿속으로는 그나마 사수 운이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한편으로는 저런 성품쯤 되니까 여기서 대리까지 달았겠구나 싶기도 했다.

- 하기야 너같이 이래도 네, 저래도 네 하는 성격이면 오래 다닐 수도 있겠다.

순간 의주가 제게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저도 몇 년 뒤에는 눈앞의 사수 같은 표정 하고 있을까 싶어진 거다.

그때였다. 바지 주머니에서 불쑥 진동이 울린다. 짧아진 담배 개비를 휴지통에 지져 끈 재광은 서둘러 기기를 빼 들었다.

제 말은 아니지만 제 생각을 하고 있는 걸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반가운 이름이 액정화면에 뜬다.

지금

여의주 팀장님 : 야 광. 축하해라. 새 인턴 4일 연속 출근했다.

줄곧 착잡하던 재광의 얼굴에 얼핏 미소가 스쳤다.

????

여의주가 얄미운 이유 중 하나는, 헛소리는 하되 틀린 말은 안 한다는 점이었다. 재광은 출근 일수가 늘어날수록 그 사실을 절감했다.

- 내가 생각을 해봤는데, 네가 너무 좋은 데서 일을 시작했어.

- 네가 딴 데를 가 봐야 ‘아, 내가 복에 겨웠었구나’하고 깨닫지.

대기업 서류 전탈하고 쫓기듯 갔다고 해서 의기소침해 있을 때가 아니었던 거다. 첫 팀원인지라 체계가 미흡하고 업무량이 많기는 했어도, 남 눈치 안 보고 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낭만인은 천국이었다.

- 회사가 구식이야. 나는 좀 풀어놔야 능력 발휘를 하는데 꽉 막혔어. 앞뒤 양옆 사방으로 꽉꽉.

게다가 업무 처리 방식은 얼마나 빡빡한지. 그러잖아도 여타 부서들에 미움을 사며 일하는 판국이건만 형식상으로 주고받아야 할 서류가 많아 그거 작성하는 데만 한세월이었다.

왜 의주가 구색만 맞춘 보고 파일들을 리스트업해 뿌렸는지, 그 심정을 벌써 이해할 수 있었다.

- 상사가 너무 실력이 좋아. 일이 빡세긴 해도 많이 배우긴 했잖아. 게다가 내가 좀 잘해줬어?

사수는 또 어떻고. 신입은 당연히 할 줄 아는 게 없을 거라 전제했던 의주는 보살이었다.

지금의 사수는 딱히 지랄 맞지는 않지만 박한 구석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공채 뚫을 정도면 이만큼은 하겠지’ 하는 기대치가 있는 모양이었다. 재광이 조금이라도 버벅거릴라치면 대놓고 내색은 안 해도 실망한 티가 배어 나왔다.

- 너 이제 진짜 큰일이야. 출근하지? 그날부터 나 보고 싶어가지고 난리난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재광이 속으로 ‘팀장님 보고 싶어요’를 외치는 횟수만 늘어나고 있었다. 물론 곧이곧대로 의주에게 연락해 하소연하지는 않았지만.

요즘 의주는 안정적으로 출근하는 인턴이 생긴 덕에 일에도 탄력이 붙은 듯싶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바쁜 게 맞나 의심스러울 만큼 재광에게 연락을 해대더니, 이제는 그마저도 드문드문이었다.

재광도 서운해하며 먼저 연락하지는 않았다. 바빠서 그럴 게 뻔한데 굳이 시간을 뺏을 용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걸 의식하며 메시지며 전화를 할 정신이 없었기도 하고.

요 며칠 줄줄이 야근이었다. 재광은 오늘도 어김없이 열 시를 훌쩍 넘겨 간신히 집에 도착했다. 환복이나 샤워는 다 미뤄놓고 일단 침대로 뛰어들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는데.

“아 진짜….”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꼴이 뒤집힌 양말과 빈 술병의 콜라보다. 잔뜩 짜증이 치민 재광은 곧바로 소파에 앉은 민광을 쏘아봤다.

재활용 수거일에 빈 술병을 내놓을 줄도 모르는 인간이 또 소주를 까고 있다. 반찬통째로 꺼낸 김치를 안주 삼아 벌써 한 병은 훌쩍 비운 듯했다.

최근 회사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아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아무래도 여자친구와 또 헤어졌지 싶었다. 처음 헤어졌을 때 폐인이 다 됐다가 겨우 재결합하고 회복하더니. 두 번째는 재결합의 희망도 없어 그런지 폐인이란 말로도 다 표현이 안 될 정도였다.

재광은 현관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술병을 세우다가 끝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 분리수거일이 언젠지를 속으로 세워보다 보니 오늘인 거다.

“이건 좀 심하지 않냐?”

갑작스럽게 짜증이 치밀었다. 모든 걸 미뤄두고 숨 돌릴 생각으로 집에 왔더니만 잔뜩 쌓인 술병을 내다 버리러 가야 한다니. 심지어 술병의 주인은 뒤처리는 생각도 않고 여전히 빈 병을 생산 중이었다.

스트레스가 머리끝까지 찬 상태라 그런 걸까. 평소처럼 참고 넘길 수가 없었다. 졸업 후 형과 같이 살며 집안일은 늘 재광의 몫이었지만, 그때만 해도 취준생의 탈을 쓴 백수였잖은가.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민광이 무시하던 쥐콩만 한 스타트업도 아니고 대등하게 큰 기업에 입사했다. 새 회사에 적응하랴 쏟아지는 업무량 채우랴 심신을 갉아먹으며 일하기도 바쁜데 여전히 모든 집안일이 제 몫이라니 억울한 거다.

“씨발 뭐.”

하지만 그런 심정이 민광에게 가 닿을 리는 없었다. 27년 내내 동생의 마음을 헤아려준 적 없는 그에게 새삼 재광의 애환이 보일 리가. 민광은 불만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상소리를 했다.

“일찍 퇴근했으면 맨정신일 때 좀 치우든가. 일주일 내내 이렇게 늘어놓기만 하면 나보고 다 하라고? 나 요새 맨날 늦는 거 몰라?”

“내가 알 바야?”

“왜 알 바가 아닌데. 이 집에 안 살아? 집을 발 디딜 틈도 없이 만들어놓으면 같이 사는 사람은? 배려 안 해?”

재광도 지지 않고 대들었다. 회사에서 찍소리도 못하고 당하던 걸 그나마 만만한 가족에게 푸는 낌새가 없잖아 있었지만, 어느 한 곳이라도 숨통을 틔워줘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부터는 참고 싶지가 않았다.

그런데 민광이 거기다 대고 기어이 기름을 붓고 만다.

“얹혀살면서 말이 많아. 집세도 안 내는 게 뒤치다꺼리라도 해야지.”

싸늘하게 표정을 굳힌 재광의 이마에 힘줄이 솟았다.

“얹혀살아? 누가, 내가?”

“너지 누구야. 엄연히 여기 나한테 해준 집인데.”

“엄마 명의로 계약한 거 뻔히 다 아는데 뭔 소리야. 애초에 같이 살라고 여기로 구해준 거잖아.”

재광이 주관적 해석 없이 사실만을 적시하는데도 민광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더 뻔뻔한 목소리를 낸다.

“그게 그 뜻인 걸 몰라? 너는 쪽방에서 월세 축내면서 혼자 살게 하느니 내 수발이라도 들라고 여기 붙여놓은 거야.”

술에 취해서 저렇게까지 말하는 거라고. 그리 여기고 싶었으나 재광은 오랜 시간 겪어온 그를 잘 알았다. 알코올 한 방울 안 들어갔더라도 두 눈 똑바로 쳐다보며 저런 얘길 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걸.

그간 대수롭지 않게 여겨온 것과 달리 굳어진 얼굴이 펴질 줄을 몰랐다. 그런 기미를 알아차리지 못한 민광만이 어이없는 소리를 이어나갔다.

“너는 진짜 그러면 안 돼. 네가 장남의 무게를 알아? 막내라고 다 오냐오냐해줘, 뭘 해도 다 풀어줘. 내 덕에 자유롭게 멋대로 살았으면 그만큼 너도 희생하는 게 있어야지.”

“무게 같은 소리 하네. 내가 자유로웠다고?”

“아니야?”

“그러는 너는. 장남이라고 먹는 거 입는 거 쓰는 거 뭐 하나 모자라게 가진 적 있어? 받아낼 건 다 받아내고 인제 와서 무게? 그럼 진작 거절하고 너한테 기대 걸지 말라고 확실하게 못 박았어야지.”

민광의 뻔뻔한 낯짝이 동요한다. 그는 도끼눈을 뜨며 목소리에 힘을 줬다.

“너 지금 나한테 너라고 했냐?”

이 상황에서도 맞먹는 호칭이 거슬린 모양이었다. 재광은 이를 으득 갈며 답했다.

“너는 날 동생 취급 안 하면서 왜 나한테 형 대접받길 바라는데.”

“하. 이 새끼 말하는 거 봐라? 야, 네가 알아서 사람 구실 했으면 내가 너한테 그랬겠냐? 안일해 빠져서 더 잘되라고 잔소리 몇 마디 했다고 그게 동생 취급 안 한 것까지 갈 일이야?”

“얼마나?”

“뭐?”

“뭘 얼마나 더 하라고. 취업 못 했다고 무시해, 취업했더니 작은 회사라고 무시해. 그래서 대기업 갔더니 얹혀산다고 난리. 나보고 어쩌라고! 이 이상 뭘 더 해?”

그간 참아온 게 독이 됐다. 혼자 속으로 삭인 것들이 한 번 터진 감정에 와르르 쏟아져 나온다. 들리는 말 한마디 모두 날을 세워 듣게 됐다.

민광도 이제는 당황한 기색이었다. 같은 배에서 나고 자란 동생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이니 그럴 만도 했다.

“야. 김재광.”

“내가 자유롭게 멋대로 살았다고? 야. 나는 다 네 다음이었어. 그 잘난 장남의 무게로 일궈놓은 것들 때문에 암만 잘해도 칭찬 한번 받아본 적도 없다고.”

“….”

“너 대기업 들어갔다고 집안에 아주 경사 났었지. 나는 어땠는 줄 알긴 하냐? 잘했다고 하면서도 이제야 정신 차렸네, 딱 그거였어.”

“야.”

“그래서 내가 너 원망한 적 있어? 너 때문에 내 노력은 다 당연한 게 됐다고 네 탓이라도 했어?”

민광이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건 당연했다. 재광은 조금의 왜곡도 없이 사실 그대로만을 얘기하고 있었으니까.

“근데 넌 나한테 왜 그러는데. 사람 구실 같은 핑계 대지 마. 너는 그냥 만만한 상대 하나 깔아뭉개서 스트레스 풀고 우월감 느끼는 찌질한 새끼인 거야.”

“너 지금 뭐라 그랬냐? 뭐, 찌질?”

그래도 동생에게 지긴 싫어 말꼬리를 잡았으나 통하지 않았다. 이젠 상종할 마음마저 없는지, 재광이 민광을 짙게 노려보다가 등을 돌리고 만다.

“누구는 지랑 살고 싶어서 사는 줄 아나.”

신발 한 짝 벗지도 못하고 말싸움을 벌이던 재광은 그대로 뒤돌아서 집을 나왔다. 그딴 말 지껄여놓고 어딜 가느냐고 내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마저도 모른 척했다. 누가 봐도 살벌한 안색을 한 그는 빠른 속도로 건물을 빠져나갔다.

대차게 자리를 박찬 행동과 달리 처량하기 그지없는 행색이었다. 피로에 찌들어 몰골은 말이 아니고, 정작 갈 데도 없어 기운 하나 없는 걸음으로 주변만 배회하는 것이다.

심지어 이날 이때껏 살아오며 겪은 설움을 토해내고 속이 막 시원하지도 않았다. 이렇게 되고 나니 얻을 게 뭐 있다고 급발진해서 대들었나 싶은 생각까지 든다.

“짜증 나, 진짜.”

재광은 작게 중얼거렸다.

혹여 집에서 내다봤을 때 보일까 봐 단지를 완전히 벗어난 차였다. 적당히 앉을 자리도 찾지 못해 바닥에 쪼그리고 앉자니 제 신세가 너무도 처량했다. 밤이 깊어 그런지 뺨을 스치는 바람마저도 살을 엘 듯 시렸다.

그 난장을 치고 나왔으니 이대로 집에 들어가기는 무리였다. 그렇다면 오늘 하루 잘 곳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홀로 숙박업소를 찾아가자니 그것도 내키질 않는다. 혼자 호텔이든 모텔이든 가는 게 문제가 아니라, 이 기분으로 혼자 있기가 싫었다.

재광은 시린 손으로 휴대전화를 꺼내 들고 연락처 목록을 살폈다. 당연히 가장 먼저 찾게 되는 건 절친한 대학 동기들이었다.

하지만 민주와는 아무리 친하대도 여자 혼자 사는 집에 얹혀 자기는 무리였고, 도원은 대학 때부터 집에 타인을 들이지 않기로 유명했다. 연우는 그런 도원과 함께 살고.

한 명 한 명 안 되는 이유를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연락처를 뒤지다 보니 손끝은 어느새 익숙한 이름 위에 올라가 있었다.

여의주 팀장님.

바빠서 요샌 연락도 잘 못 하는데 이 시간에 재워달라고 전화를 거는 게 맞는 걸까. 그런 우려가 들긴 했다. 그러나 의주까지 제외해버리면 정말 남는 사람이 없었다. 재광은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응, 광아. 퇴근했어?

사정을 알 리 없는 의주는 필요 이상의 다정한 말투로 전화를 받았다. 막상 빠른 응답에 당황한 재광은 약간의 공백 뒤에야 입술을 뗐다.

“…팀장님.”

― 뭐야, 너 목소리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팀장님, 하고 고작 세 글자 내뱉었을 뿐이건만 지레 걱정을 해줄 때는 하마터면 울컥할 뻔했다. 재광은 최대한 태연한 척하려 노력했다.

“죄송한데, 저 오늘 좀 재워주시면 안 돼요?”

― 너 지금 어딘데.

“집 앞인데, 택시 타면 금방 갈….”

가차 없이 말허리를 자르는 의주의 음성이 단호했다.

― 좀만 기다려. 데리러 갈게.

????

“야, 광!”

집이 멀지 않다는 건 이럴 때 좋았다. 전화를 끊자마자 달려 나오기라도 한 건지, 의주는 실로 빨리 도착했다. 길가에 차를 세워놓고 허겁지겁 내리는 얼굴에 놀란 기색이 그득했다.

놀랄 만도 했다. 집 앞이라고만 했지,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 정확히 일러준 적이 없는 탓이다. 아마 의주도 무작정 집 근처까지 왔다가 우연히 재광을 발견하고 내렸을 터였다.

그때까지도 쪼그리고 앉아 멍을 때리던 재광은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고서야 몸을 일으켰다. 추운 날씨 덕에 한껏 웅크리고 있었더니 그새 굳은 다리가 뻐근했다. 허벅지를 통통 두드리며 일어서자 그사이에 다가온 의주가 덥석 어깨를 붙든다.

“어디라도 들어가 있지 왜 밖에서 궁상을 떨고 있어.”

“그냥, 들어갈 데 찾기 귀찮아서요.”

의주는 당장이라도 ‘요즘 세상에 이러고 있으면 두들겨 맞고 삥 뜯긴다’고 말할 기세였으나 결국에는 반박하려 벌린 입술을 꾹 다물었다.

대신 차게 식은 재광의 뺨과 이마를 짚어보더니 서둘러 차로 데려갔다. 조수석에 막 올라탄 재광을 보고 안전벨트를 채워준 뒤, 손수 문까지 닫아주고서야 저도 운전석으로 향한다.

“이 시간에 갑자기 뭐야. 가출이라도 했어?”

의주는 히터 온도를 높이면서 그렇게 물었다. 대뜸 불러낸 게 민망한지 재광이 괜히 안전벨트를 손끝으로 매만지며 대꾸했다.

“네.”

분명 ‘이 나이에 무슨 가출이에요’라고 할 줄 알았건만. 뜻밖의 수긍에 놀란 의주가 곁을 휙 돌아봤다가 금세 시선을 거뒀다. 그러고는 부러 더 대수롭지 않은 말투를 내어 물었다.

“안 추워? 히터 더 올릴까?”

“괜찮아요. 그보다, 일하다 온 거면 미안해요.”

“일하다 온 건 맞는데, 어차피 집이었어. 나도 괜찮아.”

의주는 손끝으로 재광의 뺨을 톡 두드린 뒤에야 차를 출발시켰다.

밤늦은 도로는 고요했고, 음악 하나 틀지 않은 차 안은 정적 그 자체였다. 재광은 시트에 푹 기대앉아 옆으로 고개를 돌리고 바깥만 내다봤다.

오밤중에 난데없이 전화를 걸어 재워달랬으니 그 사정이 궁금하지 않을 리가 없을 텐데, 의주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무심하다기보다는 의도적으로 묻지 않는 게 분명했다.

천하의 여의주가, 남 눈치라는 걸 보고 있었다.

놀랍긴 해도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재광은 신세를 지는 주제에 호의를 베푼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 것 같아 미안한 맘이 컸다. 하지만 구구절절 사정을 설명할 여력도 없어서 가만히 있는 것뿐이었다.

두 사람 모두 입을 다문 사이, 어느새 창밖으로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미끄러지듯 바퀴를 굴린 의주의 차가 지하 주차장으로 접어든다. 재광은 푹 기댔던 몸을 바르게 일으키며 내릴 채비를 했다.

주차장에서 내려 엘리베이터를 타서도, 복도를 지나 집안에 들어올 때까지도. 의주는 별말 하지 않았다. 입도 벙긋 안 하고 저기압인 재광이 답답할 법한데도 채근하는 기색마저 없었다.

“잠깐만 있어 봐.”

의주는 현관 문턱을 넘자마자 재광을 소파에 앉혀놓고 혼자 부지런히 움직였다. 아마 재광이 침묵하는 동안 의주도 계획을 세우느라 바빴던 모양이었다. 바삐 움직이는 와중에도 동선이 몹시 매끄러웠다.

재광을 거실에 덜렁 앉혀두고 쌩하니 들어간 욕실에서는 곧 물소리가 들렸다. 콸콸 쏟아지는 물소리를 배경음처럼 틀어놓은 의주는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가, 부엌으로 갔다가, 다시 욕실로 향했다.

“야, 광. 일로 와.”

의주는 한바탕 부산을 떨고 나서야 도로 재광을 불렀다. 욕실 문 앞에서 손짓하는 걸 보고도 재광이 굼뜨자 그새를 못 참고 달려와 그를 일으켜 세웠다.

결국 재광은 양어깨가 붙들린 모양새로 욕실 앞에 가 섰다. 열린 문틈에 다가서기 무섭게 상큼한 향이 훅 끼쳐온다.

“이게 무슨….”

이미 뿌연 김이 찬 욕실에는 반신욕 준비가 되어있었다. 욕조에는 입욕제가 풀린 물이 반 넘게 차 있고, 욕조 전용 트레이에는 얼음 컵에 따른 콜라가. 수납장 위에는 갈아입을 옷까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이걸 준비하느라고 그렇게 바빴던 듯했다. 극진한 대우에 놀란 재광이 돌아보자 의주는 씨익 웃어 보였다.

“밖에 오래 있었잖아. 푹 담그고 나와.”

재광은 얼떨떨한 기분을 지우지 못하고 문가에 서 있기만 했다. 그런 그의 등을 떠민 의주는 친히 문까지 닫아주었다.

같이 씻자고 장난이라도 칠 줄 알았더니만 실없는 소리 한마디 않고 간 셈이었다. 그러니까, 오로지 저를 위해 이 모든 걸 준비해준 거다.

감정이 예민해진 상태라서 그런 걸까. 재광은 괜히 코끝이 찡해서 가만히 서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탄산이 톡톡 터지는 콜라를 보고는 희미하게 웃었다.

- 콜라는 달아도 잘 마셔요.

- 스트레스 받아서 속 답답할 때 쭉 들이켜면 그게 그렇게 좋더라고요.

출장 가던 길에 집요하게 캐묻더라니. 그걸 여태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표면에 물방울이 흐르는 컵을 집어든 재광은 몇 모금을 연달아 삼켰다.

식도가 타들어 가는 듯한 느낌에 눈을 질끈 감으면서도 입꼬리는 미미하게 올라가 있었다.

????

재광이 목욕을 마치고 나왔을 때, 의주는 거실 소파에 앉아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심각한 눈길로 화면을 뚫을 듯 집중하는 중이라 재광도 방해가 되지 않으려 신경 써 발소리를 죽였다.

노력은 했으나 소용은 없었다. 소파를 막 지나칠 즈음, 화면을 노려보던 의주가 곁을 지나던 재광을 돌아봤다.

아마 욕실 문이 열리는 기척부터 다 알아채고 있었던 듯했다. 흠칫 놀라는 기색 없이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리는 걸 보면.

의주는 발갛게 열이 오른 재광의 볼을 보고 슬며시 웃었다. 그러고는 긴장감 없이 늘어진 손목을 붙잡고 이내 소파에서 일어섰다.

의주가 재광을 데리고 간 곳은 자신의 방이었다. 콘솔 서랍에서 드라이기를 꺼내 드는 손길이 능숙했다. 인형 놀이라도 하는 것처럼 재광을 멀뚱히 세워둔 그는 약한 바람을 쏘며 젖은 머리카락을 살살 헤집었다.

“…줘요. 제가 할게요.”

이쯤 되면 서비스가 과했다. 재광이 몸이 안 좋은 것도 아니고, 신체 어디 다친 것도 아니잖은가. 그저 기분이 좀 다운된 것뿐인데 이토록 지극정성으로 굴다니. 이렇게까지 나오면 감동보다 미안한 마음이 더 커진다.

“일하고 있었잖아요. 저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해요.”

“신경 안 쓸 거면 데리러 가지도 않았어. 가만히 좀 있어 봐.”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드라이기를 넘겨달라고 내미는 손마저 단번에 끌어내려진 재광은 못 이기겠다는 듯 웃음을 흘리며 가만히 서 있었다.

뭇 남자들이 그렇듯 머리를 말리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차분하게 마른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내린 의주는 곧바로 드라이기를 정리해 도로 서랍 속에 넣었다. 그러고 나서야 재광을 제 쪽으로 돌려세웠다.

“보송보송하네.”

물기가 다 마른 뺨을 손등으로 비비며 내뱉는 말투는 장난스러웠다. 재광도 눈을 흘기거나 정색하지 않고 흐리게 웃었다.

“가자. 아직 비장의 무기가 남았지.”

이미 VIP 대우는 다 받은 것 같은데, 아직도 끝이 아닌 뉘앙스였다. 재광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남았다고요?” 하자 의주가 한쪽 눈을 찡긋 감으며 능청을 떤다. 손목을 당겨 다시 거실로 나가는 걸음이 급했다.

거실에서 욕실로, 거실에서 방으로, 그리고 또다시 거실로.

재광이 의주의 집에 드나든 횟수는 셀 수 없지만 이처럼 부지런히 돌아다니기는 처음이었다. 그래서 아직도 지금 뭘 하는 건가 싶은 게 재광의 솔직한 심정이건만, 정작 의주는 여전히 바빴다.

내내 상대방을 조종하듯 움직인 그는 소파 위에 있던 노트북을 치우고 거기에 재광을 앉혔다.

“짜잔.”

그리고는 짧은 효과음을 육성으로 곁들이며 비장의 무기를 집어 들었다.

대단한 뭔가처럼 언급한 물건은 다름 아닌 담요였다. 자연스럽게 잡히는 주름을 타고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극세사 담요.

“그게 무기예요?”

기대한 바는 없지만 번드르르한 표현에 비하면 너무도 일상 친화적이고 사소한 아이템이었다. 그 때문에 재광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의주가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거린다.

“부드러운 거 기분 좋잖아.”

널찍한 담요를 펼쳐 재광의 등 뒤로 둘러주는 손길이 섬세했다. 몸을 빙 두르고 남은 담요 자락을 겹쳐 풀리지 않도록 고정하는 움직임 또한 야무졌다.

재광은 더 이상의 말없이 얌전하게 앉아만 있었다. 고맙다고 먼저 해야 할까, 미안하다고 재차 사과부터 해야 할까. 머릿속으로는 그런 고민을 하는 중이었다. 옆에 자리를 잡고 앉은 의주가 한 박자 빠르게 움직인다.

“일로 와.”

의주는 느릿하게 눈만 끔뻑거리는 재광을 끌어안았다. 품에 꽉 가두고서 막 말린 머리칼에 제 뺨을 가볍게 비비적댄다. 담요에 결박당해 꼼짝없이 품에 갇힌 재광이 망설이다 말고 입술을 뗐다.

“할 기분 아니에요.”

실은 알고 있었다. 의주가 여태 정성을 다한 게 기승전 섹스로 가려는 의도는 아니라는 걸.

그런데도 괜한 소리를 한 건 오로지 부끄러워서였다. 대뜸 신세 지러 와서는 기분 하나 감추지 못해 이토록 신경 쓰게 만든 게 민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 때문에 괜히 툴툴거리는데도 의주는 개의치 않았다.

“누가 하재? 위로잖아, 위로.”

오히려 자신의 의도를 가감 없이 드러내며 재광을 더 꼭 끌어안았다.

위로.

재광은 그 두 글자를 소리 없이 입안에서 굴려봤다. 오밤중에 갑작스레 불러냈는데도 사정을 캐묻지 않아 놓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면서 위로라니.

그런데 그 마음이 진심이라는 건 충분히 와닿아서. 순간 코끝이 시큰거렸다.

의주가 당기는 대로 순순히 품 안에 들어갔던 재광은 담요 아래 묻힌 손으로 조심스럽게 가슴팍을 밀었다. 아주 조금이었다. 틈이 벌어진 사이 고개를 든 그는 말없이 의주를 바라봤다.

“….”

엷은 속쌍꺼풀이 있는 기다란 눈매, 각이 선명한 코와, 선이 또렷하고 도톰한 입술까지. 소름 돋게 닮았다 생각했던 이목구비건만 찬찬히 들여다보니 새삼스럽게 다르다.

의주의 눈매는 더 날카롭고 끝이 매섭게 올라갔으며, 완만한 곡선을 그리는 재광과 달리 쭉 뻗은 콧대를 가졌다. 또, 재광은 윗입술에 비해 아랫입술이 도톰한 편인 반면 그는 골고루 도톰한 입술을 가졌다.

하나하나 세심하게 뜯어보던 재광의 눈길은 의주의 입술에 머물렀다. 여전히 아무것도 묻지 않고 굳게 다물린 입술. 순간 재광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입술에 키스하고 싶다고.

불쑥 치미는 충동에 마음이 덜컥였다. 가슴속에서 심장이 쿵, 하고 울린다. 재광은 곧 눈을 질끈 감으며 의주의 입술로 돌진했다.

그동안 재광은 스킨십을 잘 받아주긴 해도 먼저 하는 법은 절대 없었다. 그렇기에 짐짓 놀란 의주의 눈이 동그랗게 뜨인다.

그러나 잠시뿐이었다. 꼭 감긴 눈을 가까이서 지켜보던 의주는 이내 자신도 눈꺼풀을 가벼이 내렸다.

갓 말린 차분한 머리카락을 파고드는 손길이 부드러웠다. 뒤통수를 넓게 감싼 의주는 맞물린 입술을 매끄럽게 감쳐물었다가 놓아줬다. 그러고는 곧 입술 틈새를 가르고 혀를 밀어 넣었다.

꼼꼼히 여민 담요 아래로 삐죽 튀어나온 재광의 팔이 의주의 허리를 감싼다. 그에 질세라 의주도 재광의 등을 단단히 받치며 더욱 깊게 입안을 파고들었다.

두 사람 사이에 오간 것 중 가장 차분하고 애틋한 입맞춤이었다. 두 입술은 축축한 소리를 내며 아쉽게 떨어져 나갔다.

“….”

“….”

오고 가는 눈길 사이에 끼어드는 말은 없었다. 재광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상대를 봤고, 의주는 조금의 떨림도 없이 곧은 눈길로 그를 마주했다. 그리고 잠시 뒤.

“아아….”

혼란스럽게 앓은 재광이 툭, 의주의 어깨에 이마를 떨어뜨렸다. 의주는 부드럽게 그의 뒷머리를 쓸어내렸다.

― 다음 권에서 계속

Geek&Hot(긱앤핫)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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