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Break Points 下
― 현재 시각은 오전 8시 20분이며, 오늘은 섭씨 19도로 선선한 날이 될 것 같아요. 다음은 오늘의 뉴스입니다….
재광의 알람이 평소보다 한 시간 늦게 울렸다.
면접을 위한 특별 조치였다. 하루 휴무를 냈다고 해서 하루치 일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보니 어제는 늦게까지 야근을 했다. 그 사실을 고려해 정한 기상 시간이 바로 지금이다.
고작 한 시간 더 자서 해결될 피로는 아니었으나 재광의 눈이 뜨이는 속도는 빨랐다. 평소라면 축축 늘어져야 마땅한 몸도 가뿐하게 침대를 떠난다.
일생일대의 기회를 앞둔 그는 긴장보다 설렘에 들뜬 상태였다. 방문을 나가는 걸음마저 가볍다.
“얼씨구? 늦게 일어나놓고 여유만만이다?”
“연차 냈거든?”
사정도 모르고 거는 시비에 대꾸하는 말투마저 산뜻하기 그지없었다. 출근 준비를 마친 번듯한 모습으로 커피를 마시던 민광이 닮은 구석이라곤 없는 얼굴을 팍 구긴다.
“자랑이라고. 너는 사람이 말을 하면 들어먹질 않지? 입사한 지 얼마나 됐다고 쏠랑 쉰다는 말이 나오던?”
“나오던데.”
“남들은 인사 고과 영향 갈까 봐 정직원 되기 전에 엄두도 못 내는 걸 잘도 했다. 아무튼 저건 막내라고 편하게만 살아서 간절함이 없어, 간절함이.”
편하게 산 게 누군데, 라는 게 솔직한 심정이지만 재광은 답하지 않는 편을 택했다. 대신 저게 실성했나 오해를 살 만큼 상큼하게 웃어 보였다.
“미쳤냐?”
친동생의 환한 미소를 참지 못한 민광이 커피 잔을 탕, 내려놨다. 안면 근육이 이전에 비할 수 없이 구겨진다. 흡사 방금 마신 커피를 뱉어내고 싶다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관심도 없는 나한테 신경 쓰지 말고, 이럴 시간에 여자 친구한테 잘못했다고 빌기나 하세요.”
“야, 이씨….”
“아, 아니지. 이제 전 여친이겠구나.”
“이 씨발 새끼야!”
간만에 만족스러운 일격을 날린 재광은 급발진하는 형을 뒤로하고 욕실로 들어섰다. 면접 당일에 김민광을 한 방 먹이다니, 오늘 일진이 꽤 괜찮다고 생각하면서.
“너 당장 안 나오냐? 미친놈이 말 함부로 하고 지랄이야 아침부터 재수 없게! 야! 김재광!”
약점을 찔린 민광이 고래고래 악을 쓰는 소리가 문을 넘어왔지만 그것도 곧 물소리에 묻혔다. 재광은 조소를 흘리며 물줄기 아래 섰다.
사실, 형이 여자친구와 헤어졌는지 어떤지 직접 들은 바는 없었다. 민광의 목소리에 영 힘이 없다던 어머니의 전화를 받은 뒤 자연스럽게 알게 됐을 뿐이지.
어머니 말씀대로 비실대나 싶더니 별안간 술 처먹고 들어와 주정을 부린 거다. 돌아와라, 잘못했다…. 늦은 시각에 한참이나 절절하게 떠드는 걸 보고는 모를 수가 없게 됐다.
물론 실연의 아픔을 호되게 겪어본 사람으로서 조금 전의 공격은 치사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만큼 속 시원한 반격을 하는 날도 있어야 독립할 때까지 이 집에서 버틸 수 있을 터였다.
재광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샴푸를 짰다. 이 기세를 몰아 면접까지 합격하면 쥐콩만 한 회사, 인턴 나부랭이 등을 들먹거리며 저를 무시하던 김민광의 코를 납작 눌러줄 수 있었다.
그뿐인가. 달라지는 급여에 돈을 모으는 속도도 훨씬 빨라질 거고, 그럼 지긋지긋한 김민광과도 하루빨리 갈라설 수 있게 된다.
‘내가 진짜 어떻게든 붙고 만다.’
각오를 다지는 재광의 표정이 결연했다.
????
면접장은 예상보다 붐비지 않았다. 아침 일찍부터 응시자들을 불러 모아 회사 연혁을 읊는 곳도 있다지만, 오늘은 면접 시간에 맞춰 조별로 소집한 유형이었다. 그러다 보니 당장 면접이 닥친 이들만 모여 있어 북적거리지는 않았다.
재광은 막 안내를 받아 대기실로 들어온 참이었다. 아침에 민광의 역린을 찌를 때만 해도 그저 신나고 설렜었는데, 엄숙한 분위기를 맛보자 슬슬 긴장감이 몰려온다. 그저 꿈같던 대기업 면접이 이제야 실감 나는 듯싶었다.
대기실에 발을 들이기 전 소지품을 모두 맡긴 터라 긴장을 풀 만한 것도 없었다. 그저 어떻게든 붙겠다는 아침의 각오를 떠올리며 준비한 멘트들을 되뇌는 게 전부였다.
입술을 벙긋거리며 예상 질문의 답을 외워보던 재광은 문득 시선을 돌렸다. 뭔가 이상한 느낌 때문이었다.
“….”
“….”
아니나 다를까, 고개를 돌리자마자 문가에 있던 누군가와 눈이 마주친다.
여태 봐온 면접 진행 담당자는 아니었다. 응시자들을 안내하던 직원이 공손한 자세로 곁에 선 모습으로 보아, 아마 더 높은 직급인 사람이 모종의 용건을 가지고 잠시 들른 눈치였다. 그렇다면 어떤 인물들이 면접을 왔나 궁금할 것 같기도 한데.
열 명은 족히 모인 대기 공간에서 너무도 명확히 재광을 보고 있었다.
착각이 아닐 확률이 높았다. 재광과 시선이 부딪히기 무섭게 저쪽에서 먼저 시선을 피해버렸으니까. 휙 돌아가는 고갯짓이 눈에 띄게 부자연스러웠다.
‘뭐야, 왜 나를….’
재광은 잠시간 그쪽을 더 바라봤다. 딱히 의문을 해결할 수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 재광을 보던 사람은 금세 진행 담당자를 불러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따라 나가 왜 쳐다봤느냐 따질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럴 수 있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애초에 재광이 이런 문제로 남에게 말을 얹을 성격이 아니기도 했고.
애써 찝찝함을 지운 그는 다시금 예상 질문을 떠올리며 이미지 트레이닝에 몰두했다.
????
면접이라는 간단한 단어로 설명되는 것치고는 엄청난 여정이었다. 재광은 설렘 가득한 맘으로 들어서던 때와 달리 진이 다 빠진 멍한 몰골로 거대한 건물을 나섰다.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직무와 인성, 심지어 창의성까지. 각각의 면접을 다 소화해내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떨기 시작해 짧게는 30분, 길게는 50분가량을 초긴장 상태로 있다 보니 최대치로 끌어올린 컨디션도 어느새 바닥이다.
‘빨리 집에 가고 싶다.’
잘 봤는지 어쨌는지 가늠해볼 정신도 없었다.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결과를 판가름할 만큼 눈에 띄는 성적을 내지도 못한 것 같았고.
그냥 그랬다. 긴장한 것치고는 의연했으나, 그렇다고 함께 들어간 응시자들에 비해 월등히 뛰어난 역량을 보여준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랬다는 말로밖에는 설명이 안 되는 거다.
차라리 벌벌 떨다 입도 벙긋 못 하고 나왔으면 술이나 퍼부으며 포기했을 테다. 그렇지만 대단히 마음 써 결과를 기대할 만큼 두각을 보인 것도 아니라 애매하기 짝이 없었다.
‘모르겠다, 이제.’
이렇게 된 이상 운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오늘 아침만 해도 빨리 다 해치워버리고 후련하고픈 심정이었는데, 정작 모호한 활약을 하고 나니 오히려 속이 더 답답한 기분이 되고 만다.
결국 재광은 지하철역으로 향하던 걸음을 늘어뜨렸다. 세월아, 네월아 걷다 말고 끝내는 인근 건물의 화단 앞에 걸터앉았다. 의미 없이 숨을 토하며 꺼내든 물건은 휴대전화였다.
애매한 기분으로 면접을 마치고 나온 터라 여태 다시 켤 생각도 못 하던 차였다. 그는 사옥에 도착하자마자 껐던 휴대전화의 전원을 켰다.
송민주
김재광 오늘이지! 보러 들어갔나? 야 잘하고 와라! 오전 10:20
유연우
오늘 면접이야? 잘하고 와! 오전 10:22
도원이 형
너무 부담 갖지 말고 편하게 해, 재광아. 화이팅! 오전 10:23
가장 먼저 울리는 알림은 대학 동기들의 응원 메시지였다. 오늘 재광이 면접을 본단 사실을 아는 유일한 사람들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뒤늦게 메신저를 확인한 재광은 고마운 마음을 담아 답장을 써 내려 갔다.
ㄳㄳ 막 끝나고 나왔어. 오후 2:11
송민주
벌써? 와 빠르네. 어땠어? 잘 봄? 오후 2:12
막 망친 건 아닌 거 같은데 그렇다고 엄청 잘 본 거 같지도 않음. 모르겠어. 오후 2:13
유연우
일하면서 준비하느라 정신없었잖아. 수고했어. 오늘은 푹 쉬어 오후 2:14
도원이 형
고생 많았어. 면접 끝난 거 축하해 재광아. 피곤할 텐데 일단 좀 쉬고 다음에 같이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오후 2:14
송민주
그래, 야 망친 거 아닌 게 어디야.
나는 면접 개판쳤다고 술 들이붓고 한 3일 누워 있었잖아. 그 정도 아니면 됐어. 그냥 결과 나올 때까지 잊고 있어. 오후 2:15
면접 그럭저럭 봤다니까 됐고, 별다른 일은 없었지? 오후 2:16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 단정지을 수 없으니 이 이상 응원을 해주기도 어색한 타이밍이긴 했다. 민주가 자연스럽게 일상적인 물음을 던지자 화면에 코를 박던 재광이 눈동자를 위로 휙, 굴렸다.
무슨 일, 있기야 했다. 아침부터 김민광 제대로 열 받게 어퍼컷을 날렸으니 그 정도면 김씨 형제 역사에 길이 남을 일이지 않나. 열 받아서 욕실 문을 두드리던 꼴을 생각하면 아직도 피실 웃음이 샜다.
그래서 그 얘기나 좀 해주려고 했는데. 문득 다른 기억이 뇌리를 스친다.
면접 대기실에서 눈이 마주친 그 직원이 떠올랐다. 얼굴이나 인상착의는 진작 잊어버렸지만, 왜 거기서 자신을 콕 집어 쳐다봤는지. 그 의문스러운 기분만큼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맞다. 나 아까 대기실에 있는데 거기 직원이 나 쳐다보다가 눈 마주쳤다.
이거 좋은 거냐 나쁜 거냐? 오후 2:19
재광의 눈에는 훔쳐보다가 딱 걸려 황급히 고개를 돌린 듯 보였지만, 조금 확대해석을 하자면 눈여겨보았다는 뜻이 될 수도 있었다. 아까는 애써 모른 척했으나 다시 떠올리고 나니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동기들의 의견을 받아보기에는 시간이 모자랐다. 누군가의 답장을 돌려받기도 전에 메신저 창이 검게 물들며 긴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여의주 팀장님
화면에 뜬 이름은 의주였다. 회사에서 온 연락이 없어 내심 안도하던 차였는데 귀신같이 이 타이밍에 전화를 걸다니. 괜히 찔리는 기분이 된 재광은 잠시간 화면을 응시했다.
쉽게 끊일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재광은 어쩔 수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야, 광. 어디야.
“네? 아, 저 지금 밖인데요.”
어디냐는 물음에 짧은 사이 얼마나 많은 생각이 들었는지 모른다. 이벤트 서버가 터졌나, 어제 늦게까지 손본 캘린더 테마가 또 문젠가….
그러나 그중에 답은 없었다.
― 면접은 잘 봤냐?
군더더기 없는 의주의 물음에 잘게 눈동자를 떤 재광이 서둘러 주변을 둘러봤다.
휙, 휙.
재광은 바람을 가르며 이쪽저쪽 고개를 돌렸다. 주변에는 바쁘게 걸어 다니는 사람들뿐, 재광과 닮았다 싶은 얼굴은 어디에도 없었다.
등골이 오싹했다. 차라리 면접이라도 보러 간 거냐며 너스레를 떨었으면 이도 저도 아닌 대꾸로 빠져나가기나 하지. 확신에 가득 차 면접을 잘 봤냐 물으니 차마 할 수 있는 대답이 없다.
바늘에 콕콕 찔리던 양심이 몽둥이에 냅다 후려 맞고 녹다운된 기분이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당황에 입을 꾹 다물고만 있자 휴대전화 너머로 와하하 웃는 소리가 들려온다.
― 설마 내가 보고 있을까 봐 막 돌아보고 그런 건 아니지?
“아니, 저, 그게, 팀장님….”
― 내가 암만 전지전능해도 몸이 두 개는 아니잖아.
“그럼 어떻게… 아신 거예요?”
재광이 조심스럽게 묻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유쾌하던 의주의 음성에 부쩍 힘이 빠진다.
― 광아, 나 진짜 서운해.
그 한마디에 재광이 입술을 헙, 감쳐물었다. 상대방이 대놓고 서운한 내색을 하자 몸 둘 바를 모르겠는 거다.
“죄송….”
― 네가 나한테 더 관심이 있었으면 그런 거 물어볼 일은 없었을 거 아냐.
몰래 탈주를 꿈꾼 게 서운하다는 줄 알고 사과라도 하려 했더니만. 의주의 마음이 상한 포인트는 거기가 아닌 모양이었다. 재광은 얼빠진 소리로 “네?” 하고 물었다.
― 나 졸업하자마자 대기업 특채로 들어갔던 거 알지.
“아… 네.”
― 거기야. 오늘 너 면접 본 데.
이번에는 아, 하는 소리도 안 나왔다. 하필이면 유일하게 면접까지 온 회사가 의주가 다녔던 곳이라니. 똑같이 생긴 얼굴로도 모자라 똑같은 커리어. 운명의 장난도 이만하면 고약한 수준이다.
― 내가 거기서 한 획을 긋고 나왔는데 네가 그 얼굴로 거길 가면 나한테 연락이 오지 안 와? 나보고 다시 면접 보냐 그러잖아.
멍한 표정으로 입술만 벙긋거리던 재광은 그제야 안광을 되찾았다. 머리 위로 느낌표가 크게 솟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몽롱한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그럼 그 사람이….”
조금 전, 대학 동기들에게 말을 꺼냈던 의문의 직원이 의주와 아는 사이인 듯했다. 대기실에서 그와 똑같은 얼굴을 보고 놀라 의주에게 연락했다면 난데없는 눈길부터 막 걸려온 전화까지 모든 게 설명된다.
― 그 사람이라니? 뭐, 왜. 누가 너한테 뭐라 했어?
“아뇨, 그게 아니고…. 그냥 좀 쳐다보던 사람이 있어서.”
― 대기실에서? 걔야, 걔. 나 퇴사한다니까 제일 좋아하던 놈이거든. 재입사하는 줄 알고 기겁했나 보더라.
전 회사 사람이 놀라서 득달같이 연락한 게 우스웠는지 짓궂은 웃음소리가 뒤를 따른다.
내내 의문스럽던 점을 해결하고도 재광은 마음껏 후련해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묵묵히 휴대전화만 쥐고 있는데, 의주가 먼저 가벼운 말투를 꺼냈다.
― 그래서 잘 봤냐고, 면접.
“어, 모르겠어요. 그냥저냥요.”
― 그게 뭐야. 잘 봤어야지. 이 여의주 님이 직속 상산데 어디 가서 꿀리면 돼, 안 돼.
“안… 네?”
정신 놓고 대답하려던 재광은 새된 소리를 냈다. 뜻밖에도 의주의 반응이 흔쾌하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은 것이다.
몰래 면접 보러 간 사실을 들켰다가는 어떻게 감히 여의주와 일하면서 한눈을 팔 수 있느냐고 한바탕 난리를 칠 줄 알았다. 꼭 그렇지 않더라도 못마땅한, 혹은 앙금 쌓인 태도를 보일 거라 예상한 게 사실이었다.
상대가 의주가 아니라 어떤 상사였더라도 그럴 수 있는 상황이잖은가. 한마디 언질도 없이 퇴사 각을 재고 있다는 게. 그런데 언짢은 티라고는 보이질 않아 오히려 놀라웠다.
“근데 팀장님.”
이거야말로 서운하지 않으시냐고, 연차 내고 몰래 면접을 보러 간 게 괘씸하지 않으시냐고. 진심으로 궁금해서 한번 묻고 싶었다.
하지만 운을 떼자마자 다시 정신이 돌아온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는 없었다.
― 응, 왜.
“아. 아니에요.”
― 야, 광. 너 또 말하다 만다? 그거 못된 취미야.
“그게 아니고, 까먹었어요.”
고 짧은 새 할 말을 잊었다는 변명에는 제법 인자한 웃음이 뒤따랐다. 휴대전화 너머로 “면접 끝났다고 넋 나갔고만?” 하는 말이 흘러나온다. 재광은 굳이 부정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 그래 뭐. 이왕 연차니까 쉬고 내일 봐.
“네.”
― 오늘 쉬었으니까 내일은 좀 빨리 출근하고.
“알았어요.”
― 보고 싶으니까.
기만한 죄로 소소한 보복이라도 하려는 건가 했더니 이게 웬 뜬금없는 소리. 재광이 “네?” 하고 대꾸하자 전화 너머의 의주는 낮게 웃었다. 그러더니 한술 더 뜬다.
― 내일 봐, 자기야.
그 한마디를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허망하게 끊긴 전화를 내려다보는 재광의 귀 끝이 새빨갰다. 그러나 표정만큼은 마냥 부끄러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혼란스러운 쪽에 가까웠다.
의주가 보고 싶다는 얘기를 하는 게 처음은 아니었다. “보고 싶어 자기야” 하며 하트까지 남발해 질색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하지만 조금 전에는 어쩐지 다른 느낌이었다. 늘 그랬듯 저를 당황시켜 놀려먹으려는 것처럼 들리지가 않았던 거다.
- 나는 너 좋아.
그래, 딱 그때 같았다. 한바탕 격렬하게 뒹굴어놓고 급작스럽게 진지해지던 목소리, 아무 감정 없던 사람도 한순간 고민하게 만드는 말투.
그래놓고 내일 보자며 자기라 부르는 목소리만큼은 한층 가벼웠다. 이렇게 되면 도무지 의주의 진심이 뭔지를 알 수 없게 된다. 장난이라기엔 진지하고, 본심이라기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거다.
갈피를 못 잡은 재광은 암전된 휴대전화 화면만 한참 내려다봤다.
????
“그럼 그렇지.”
재광은 바탕화면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의주의 당부대로 일찌감치 출근한 참이었다. 무려 30분이나 빨리.
보고 싶다던 목소리가 내내 마음에 걸려서 그런 건 아니고, 이직 각을 재던 걸 홀랑 들킨 이상 더 착실한 모습을 보여야 할 것 같아 그랬다. 마음이 콩밭에 가 정신 못 차린단 소리는 듣기 싫었다.
그래서 더 서둘러 왔는데, 사람 헷갈리게 하던 그 말은 역시나 장난이었지 싶었다. 보고 싶다며 애꿎은 사람 속을 긁어놓은 의주는 여태 코빼기도 안 비치는 것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장난이라 여기면 마음이 편한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어쩐지 김이 새는 듯한 오묘한 기분이었다.
“좋은 아침!”
결국 의주는 출근 시간을 꽉 채워 나타났다. 어김없이 높은 텐션으로, 활기찬 걸음으로.
다리가 길어 그런지 안쪽에 있는 자리까지도 금방 걸어온다. 재광은 훔쳐보듯 흘끔흘끔 눈치만 보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어? 진짜 일찍 왔네?”
찔리는 바가 있어 소심하게 인사를 건넸더니 의주가 싱긋 웃으면서 그런다. 재광이 일찍 온 건 사실이지만, 출근 시간 딱 맞춰 들어온 사람이 건넬 멘트로는 부적합했다.
아마 엊그제만 됐어도 ‘팀장님이 늦게 오신 건데요’ 했을 거였다. 하지만 지금은 지은 죄가 있어 당돌한 말대답은 차마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어색하게 “아, 예” 하고 마는데.
“착하네.”
불쑥 커다란 손이 볼에 닿는다.
만지는 수준이 아니라 말랑이 장난감처럼 조물대는 손길이었다. 움찔 놀란 재광이 휙 돌아보자 의주가 씨익 웃고 지나간다.
평소의 재광이라면 이 악물고 흐즈 므스여, 했을 테지만 오늘은 그러지 못하리란 걸 알고 한 행동이 분명했다. 재광의 자리를 지나쳐 자신의 의자를 빼 앉은 의주의 움직임이 몹시도 가벼워 보였다.
얄미워도 어쩔 수 없었다. 어제의 자신도 의주에겐 충분히 얄미웠을 테니까. 솔직히 볼따구 조금 잡힌 정도는 어제의 일과 같은 선상에 놓을 수 없다는 게 재광의 결론이었다.
“재광 씨, 어제 잘 쉬었어요?”
출근만 30분 일찍 나왔다 뿐이지, 여태 바탕화면만 쳐다보던 재광은 불쑥 들려오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습관처럼 믹스커피를 타가던 치원이 바로 옆에 서 있다.
“아, 네. 어제 별일 없었죠?”
“그럼요. 이따 점심이나 같이….”
“안 돼요.”
일상적인 대화의 맥을 끊는 목소리는 완강했다. 편안한 미소를 띠며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한 곳으로 돌아간다. 재광의 대각선 자리에 있는 의주를 향해서였다.
“아, 팀장님 또 그러시네. 왜요, 왜.”
재광과 둘이 있을 때마다 영문 모를 레이저를 감당해야 했던 치원이 서글서글 웃으며 말을 건넸다. 제게 왜 이러는지 불만스럽다기보다는, 이유는 모르지만 의주를 달래주고 봐야겠다는 듯한 어조였다.
“재광이 오늘 나랑 밥 먹어야 돼. 긴히 할 얘기 있어요.”
“긴히요?”
“야, 광. 맞지?”
의주가 멀뚱히 관전하던 재광에게 턴을 돌린다. 재광은 뜨끔한 표정을 서둘러 감추며 삐걱삐걱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 맞아요.”
녹슨 대문 같은 움직임만큼이나 어색한 대답이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치원이 의주와 재광을 번갈아 쳐다봤다.
“아아, 그럼 전 이만. 재광 씨, 밥은 다음에 먹어요.”
둘 사이에 오가는 기묘한 분위기를 읽은 그는 곧 알아서 꽁무니를 뺐다. 크게 뜬 눈 안에서 도르륵 굴러가는 눈동자가 퍽 익살스러웠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재광은 가시방석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어제 통화를 할 때도 의주는 흔쾌한 태도였고, 오늘도 감정이 상한 눈치는 전혀 아니었지만 또 모르는 일 아닌가. 점심을 같이 먹자고 해놓고 각 잡고 추궁을 해댈지.
‘이래서 걸리면 안 되는 거였는데.’
재광은 바싹 타들어 가는 입술만 깨물었다.
재직 중에 면접을 보러 간 건 자신의 선택이 맞았지만, 솔직히 억울한 면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절친한 대학 동기 세 명 빼고는 합격 사실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지 않나. 심지어 가족들은 아직도 모른다.
회사라고 다를까. 처음 서류 합격 사실을 알았을 때는 제법 자연스럽게 잘 넘어갔고, 2차 합격부터는 티도 안 냈다. 친하게 지내는 치원에게도 말실수 한번 한 적 없을 만큼 철저히 비밀을 유지했다 이 말이다.
‘이 얼굴이 이렇게까지 걸림돌일 줄 알았겠냐고.’
그런데 열심히 준비해 참석한 면접 자리에서 어이없이 걸려버릴 줄이야. 진짜 이건 너무한 처사였다.
낭만인 서치원
여 팀장님이랑 무슨 일 있었어요? 오전 9:07
의주의 물음에 답하던 그 짧은 순간에도 그 억울한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던 모양이다. 자리로 돌아간 치원이 곧장 메신저로 묻는다. 재광은 새어 나오려는 한숨을 삼키며 답했다.
일은요. 업무상 할 얘기가 있는 거죠 뭐. 오전 9:08
그니까 이제 그게 업무랑 관련된 얘기는 맞는데 앞으로 일을 어디서 하게 될 것이냐에 관한 뭐 그런 거….
어쨌든 거짓말은 아닌 셈이었다.
????
“점심시간에 여기는 왜 온 거예요.”
재광은 순순히 신발을 벗으면서 그렇게 물었다.
“왜 오긴, 밥 먹으러 왔지.”
이미 앞장서 안으로 들어간 의주가 가볍게 대꾸했다.
의주의 집이었다. 열두 시 영 분 영 초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기에 늦으면 안 되는 곳이라도 가나 했더니, 언제 와도 상관없는 집엘 그렇게 서둘러 왔던 거다.
“야, 광. 게장 좋아해?”
곧장 부엌에 들어간 의주는 냉장고 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재광은 뭐라도 거들어야 할 것 같아 주변을 서성이며 답했다.
“뭐 그냥. 있으면 먹어요.”
“너는 무슨 애가 속 시원히 좋다고 하는 게 없냐.”
냉장고 앞에서 비켜선 의주가 눈을 흘긴다. 손에는 묘기를 부리듯 쌓은 반찬통을 들고서였다.
재광은 멋쩍게 목덜미를 긁었다. 타고난 성정이 무던한 건지, 형의 취향만이 중요한 집안 분위기 때문인 건지. 이유를 명확히 짚을 수는 없으나 26년 인생을 살며 가장 좋아하는 음식으로 꼽을 만한 게 없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게 잘못은 아닐 터였다. 반찬통을 넘겨받으려 손을 뻗었다가 거절당한 재광은 덤덤한 목소리로 한 타이밍 늦은 대꾸를 했다.
“편식하는 것보단 나은 거 아니에요?”
“응, 훌륭하다.”
의주는 반찬통을 열다 말고 돌아보며 받아쳤다. 영혼이라곤 없는 껍데기 대꾸였다. 그러더니 그때까지도 곁을 지키고 있는 재광의 어깨를 슬그머니 밀었다.
“가서 좀 앉아. 왜 이러고 서 있어?”
“도와드리려고….”
“내가 남의 손 빌릴 일이 뭐가 있어.”
아랫사람 된 도리로 치다꺼리를 하려던 재광은 결국 식탁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야 했다.
그러고 보면 의주의 집에서 처음 식사를 했던 날도 이랬다. 재광은 손 하나 까딱 못 하게 한 의주가 알아서 상차림에 서빙까지 다 도맡았던 거다.
그때 재광은 손님 대접을 해주나보다, 하고 말았었다. 하지만 오늘은 좀 맘이 불편했다.
뭐 예쁘다고 이러나 싶어서다. 차라리 네가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며 배신감에 날뛰는 게 낫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혹은 이전보다 더 잘해주는 듯해 미안한 마음이 배로 커진다.
‘설마 더 미안하라고 이러는 건가.’
순간 의심한 재광은 금세 도리질을 쳤다. 제 머리에서 나온 의심이지만 터무니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짠!”
재광이 혼자만의 생각에 잠긴 틈에도 부지런히 움직이던 의주는 양팔을 넓게 펼치며 주의를 끌었다. 널따란 식탁에는 어느새 음식이 가득했다. 움푹한 접시 위의 게장은 꼭 식당 플레이팅처럼 열을 맞춰 정갈하게 담겨 있었다.
“맛있겠지?”
“네. 잘 먹을게요.”
여전히 담담한 대꾸에 슬며시 웃은 의주는 간장이 잘 밴 몸통 하나를 집어 재광의 그릇 위에 놓아주었다.
“이거 산 거 아니고 집에서 직접 담가서 보내준 거야. 너 주려고 아껴놨다고.”
굳이 거절할 호의는 아니라서 흔쾌히 받아들던 재광의 젓가락이 멈칫거렸다.
너 주려고.
그 말이 참 낯설었다. 형 주려고 아껴놓은 걸 제가 먹었다가 혼난 적은 있어도 자신을 위한 특별식은 받아본 기억이 없어 생소했다. 그래서 더 고맙기는 한데….
하필 뒤통수를 친 다음이라 미안한 마음이 더 컸다.
심지어 의주는 오늘 아침부터 얼굴을 맞댄 내내 무어라 탓하는 말 한마디도 안 했다. 그러다 보니 지레 찔린 재광의 속만 자꾸 타들어 갔다.
“팀장님.”
“응.”
“근데 왜 아무 말씀 안 하세요?”
결국 매도 먼저 맞자는 심정이 된 재광이 먼저 운을 떼고야 만다. 불룩 솟은 볼을 부지런히 움직이던 의주는 입안을 다 비우고서야 여유롭게 대꾸했다.
“무슨 말을 원하는데?”
“아니, 그래도….”
“그래도?”
“제가 몰래 면접 보러 갔잖아요. 할 얘기 있으실 거 같아서.”
“그거 뭐 그럭저럭 봤다며.”
의주는 면접이 어땠는지 들었으니 그걸로 된 듯 보였다. 하지만 재광의 찜찜한 안색이 풀리질 않자 눈을 가늘게 떠가며 고민하는 시늉을 한다.
딱히 하고 싶은 말은 없지만 기대치가 있다면 기꺼이 부응해주겠다는 태도였다. 흐음, 침음한 그는 잠시 뒤 입술을 뗐다.
“보안 직무로 넣었어?”
“…네.”
“잘됐네, 그럼. 너 원래 그거 하고 싶었던 거잖아.”
먼저 질문을 종용한 건 재광이지만 이 반응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재광이 보안 직무에 관심 있다는 사실은 친한 동기들을 제외하곤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 한마디 나눠본 적 없는 의주가 저리 얘기하다니. 어안이 벙벙해 눈을 크게 뜨자 의주가 코웃음을 친다.
“뭘 그렇게 놀라. 저번에 이력서 보니까 각 나오더만. 동아리도 그렇고 졸업 논문도 그렇고.”
“아….”
정작 이력서를 볼 때는 형이랑 닮았냐고 영양가 없는 소리나 하더니, 그러면서도 꼼꼼하게 살필 건 다 살폈던 모양이었다. 의주는 정말 대수롭지 않은 얘기였다는 듯 금세 다른 질문을 던졌다.
“뭐, 면접 봤으니까 앞으로 계획 같은 거라도 있어?”
“…아뇨. 결과가 나와 봐야 알죠.”
“그렇긴 하지. 근데 뭐 계획이랄 게 있을 것도 없긴 해. 붙으면 가는 거고, 아님 마는 거잖아.”
누가 들어도 당연한 소리였으나 재광은 일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태 아쉬운 소리 한마디 안 하더니, 이제는 제가 그만둘 수도 있다는 사실마저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지 않나. 몰래 이직을 준비하던 재광으로서는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반응이었다.
“왜, 내가 안 잡아줘서 서운해?”
재광이 되레 놀란 얼굴을 하자 의주가 가볍게 웃었다. 서운하다는 대답을 듣고 싶어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 같기도 했다.
“그건 아니지만….”
재광은 말끝을 흐렸다. 아무리 의주와의 사이가 많이 편해졌다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상사와 부하 직원이었다.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한바탕 난리를 칠 줄 알았다고 솔직하게 터놓을 수는 없었다.
“내가 생각을 해봤는데, 네가 너무 좋은 데서 일을 시작했어.”
“네?”
“상사가 너무 실력이 좋아. 일이 빡세긴 해도 많이 배우긴 했잖아. 게다가 내가 좀 잘해줬어?”
“….”
“네가 딴 데를 가 봐야 ‘아, 내가 복에 겨웠었구나’ 하고 깨닫지. 나는 네가 깊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
또렷한 눈빛, 확신에 찬 말투였다. 재광은 그럼 그렇지, 하면서도 이만하면 괜찮은 결말이다 싶어 이제야 편히 숟가락을 들 맘이 생겼다.
그러나 한 숟갈 큼직하게 밥을 뜨기도 전에 의주가 다시 입을 연다.
“근데 이건 확실하게 해야 돼.”
“뭘요?”
“만약에 네가 최종 합격을 해서 회사를 옮기잖아? 그건 우리 사이랑 별개의 일인 거지.”
우리 사이라 함은 섹스 파트너를 뜻하는 것일 테다. 재광은 순간 할 말을 잃고 의주만 빤히 쳐다봤다.
서류 합격 소식을 뒤늦게 접하고 거기에 목을 맸던 가장 큰 이유는 대기업 명함보다도 의주와의 불편한 관계에 있었다. 얼떨결에 자고 얼굴 보기 민망해진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으니까.
그러나 인적성 합격을 거쳐 면접을 보기까지 두 사람 사이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더는 몸을 섞는다는 이유로 얼굴 보기가 부끄럽지 않았고, 오히려 주고받는 대화마저 격의가 없어질 만큼 편해진 게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고 이 관계가 이어질 거라 여긴 것도 아니었다.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은 없지만, 몸뿐인 관계에 몸이 멀어지면 자연히 끝을 맞이할 거란 생각이 은연중에 박혀 있었던 것이다.
“야!”
재광이 이렇다 할 답을 내놓지 않자 황당한 표정을 한 의주가 바락 소리쳤다. 이번에야말로 배신감에 물든 안색이었다.
“그래도 어른들끼리 상호 협의 본 일인데 일방적으로 튈 생각을 한다고? 야 그건 말도 안 되지.”
“그렇다기보다는, 아무래도 회사가 달라지면 지금보다 만나기 어려울 테니까요.”
“우리한테는 폰이라는 게 있단다. 연락할 수단이 한두 개야?”
재광은 눈만 끔뻑거리며 의주를 봤다. 반대하는 뜻을 밝히려는 게 아니라 갈피를 잡지 못해 보이는 행동이었다.
솔직히 제가 회사를 떠나면 이 관계도 끝나지 않을까 하고 어렴풋이 생각했던 거지, 이와 관련해 깊게 고민해본 적은 없었다.
툭 까놓고 말하자면 의주와의 잠자리가, 혹은 이외에 함께하는 시간이 싫은 건 아니었다. 불시에 훅 치고 들어와 맘을 찌르르 울릴 때가 있을 만큼 의주에 관한 감정이 꽤 호감으로 돌아선 것도 사실이었고.
하지만 아직도 재광의 안에서는 둘 사이가 정상적이라고 여겨지지 않았다. 언젠가는 정리하고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다짐이 늘 기저에 깔려 있었다.
“광아.”
재광이 입도 벙긋 않고 침묵을 유지하자 답을 기다리다 지친 의주가 식탁 위로 턱을 괬다. 수저도 다 놓아버리고 상심한 티를 고스란히 낸다.
“너는 내가 얼마나 참고 있는지를 좀 알아야 돼.”
“…뭘 참는데요.”
그러면서도 재광에게는 끝내 대답을 주지 않았다. 서운한 와중에도 방금 내뱉은 말마따나 참는 행동이었다.
복잡한 속내는 아니었다. 의주는 재광이 좋았고, 그래서 곁에 두고 싶은 마음이 크지만 그걸 고스란히 다 보여주면 재광이 도망갈 것 같아 참고 있는 중이었다.
애틋한 짝사랑을 하자는 건 아니고, 기회를 보고 있는 쪽이었지만.
종종 마음을 내비치면서도 금세 장난으로 덮고 마는 이유도 그래서였다. 오롯이 진심인 티가 나면 재광은 부담을 먼저 느낄 게 분명했다. 육체적 관계를 수긍하게 되었다고 해서 그게 남자를 연애 상대로 볼 수 있게 됐다는 뜻은 아니지 않던가.
그렇다고 영 가능성이 없는 일도 아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정직하게 사이가 좋아졌고, 가끔 재광이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의주에게는 긍적적인 사인으로 해석됐다.
앞으로도 천천히 스며들면 재광의 곁을 독차지하는 건 시간문제라는 게 의주의 입장이다. 그런데 그 전에 도망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이건 절대 수긍할 수 없었다.
“비밀이야.”
“네?”
“나중에 알려줄게.”
마치 ‘궁금해 죽겠지?’ 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재광이 자못 황당한 내색을 했다. 화답으로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은 의주는 놓았던 수저를 다시 잡았다.
“어쨌든, 계약서는 없어도 엄밀히 따지면 양쪽 다 동의해서 시작한 거잖아. 그럼 끝낼 때도 둘 다 의견이 맞아야지. 안 그래?”
얄미울 만큼 옳은 소리였다. 뭐가 됐든 협의가 끝난 일을 일방적으로 결론짓고 통보하는 건 예의가 아니긴 했으니까. 재광은 어쩔 수 없이 “네” 하고 말았다.
“솔직히 너도 나랑 하는 거 좋잖….”
맥아리 없이 내뱉는 대꾸가 성에 차지 않은 의주는 의도적으로 재광을 자극했으나 말을 다 이을 수는 없었다.
“아, 그만!”
재광이 바락 언성을 높인 탓이다. 발가벗고 몸을 겹치는 건 익숙해졌으면서, 노골적으로 얘기를 꺼내는 건 아직도 뭐한 모양이었다. 밥그릇에 코를 박은 재광의 귀가 빨갰다. 의주는 픽 웃어버리고는 재차 말을 건넸다.
“왜. 또 부끄러워?”
“밥. 먹자고요, 좀.”
의주의 말이 틀리진 않았다. 재광이 아직도 못 받아들이는 구석이 있어서 그렇지, 의주와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으니까. 잠자리든, 평소의 사이든 간에.
하지만 그걸 대놓고 얘기하기는 아직 무리였다. 재광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한 숟가락 크게 뜬 밥만 입안에 욱여넣었다.
????
합격한다면 이직하되, 파트너로서의 관계는 계속 이어간다.
아주 간단한 결론이었다. 점심 한 끼에 중요한 얘기를 마친 두 사람은 그 뒤로도 평소와 다름없이 지냈다.
애초에 달라질 게 없는 상황이긴 했다. 면접을 본 거지, 이직이 결정 난 건 아니었으니까. 간장 게장 결의는 어디까지나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일이었다.
게다가 재광이 면접을 봤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의주가 유일하지 않던가. 그와 재광 사이의 입장이 정리되자 회사생활에 있어 더는 신경이 쓰일 만한 게 없었다.
덕분에 오늘도 평화로운 오후를 보내는 중이었다. 재광이 담당하던 2주년 이벤트가 마무리된 뒤라 간만에 여유가 생긴 참이었다. 느긋하게 사내 메신저를 확인하는데, 문득 나직한 목소리가 들린다.
“야, 광.”
습관적으로 대각선 방향에 시선을 던진 재광은 급히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리를 뜬 의주가 바로 옆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몇 걸음이나 된다고 굳이 옆에 온 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뜻을 그대로 드러내며 쳐다보자 의주가 모니터를 턱짓으로 가리킨다.
“확인해 봐.”
여전히 의미를 알 수 없는 행동이었다. 대체 뭘 확인하라는 건지. 작게 미간을 찌푸린 재광은 의주를 올려다보는 것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행위였으나 ‘뭘요’ 한마디 꺼낼 틈도 없었다. 책상 한쪽에 놓아둔 휴대전화가 진동한 탓이다.
지금
02-67*8-1732
[Web발신] [GNH] 최종 합격자 발표 안내
미리보기 메시지를 흘끔 본 재광은 그제야 의주의 행동을 이해했다. 자신이 몸담았던 회사라 아는 사람을 통해 발표 일정을 먼저 들은 게 분명했다. 재광은 의주를 한번 올려다본 다음에야 인터넷 창을 켰다.
합격자 발표 조회 사이트에 접속하기까지 일사천리였다. 벌써 세 번째 자신의 정보를 입력하는 재광의 손가락도 빨랐다.
아무래도 막 전체 메시지가 전달되어 트래픽이 몰리는 모양이었다. 조회 버튼을 누른 순간부터 로딩이 제법 걸린다. 두 사람은 아무런 말없이 둥글게 돌아가는 로딩 표시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 몇 초 후.
김재광 님은 면접에 합격하셨습니다.
합격을 축하드립니다.
히익, 숨넘어가는 소리를 낸 재광이 입을 틀어막았다. 없는 시간 쪼개 체력을 깎아 먹으며 열심히 준비하긴 했지만, 정작 합격 사실을 확인하니 놀란 감정이 감춰지질 않는다.
그럴 만도 했다. 처음이니까.
취업 준비를 한 이후부터 낭만인에 입사하기 직전까지는 서류 단계에서 줄탈락을 했었다. 뒤늦게 알게 된 1차 합격 소식도 놀라웠고, 2차 때도 기적 같았건만 최종 합격이라니. 이건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다.
눈을 뜨고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 재광은 어안이 벙벙해 입을 틀어막은 자세 그대로 모니터를 보며 굳어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의주가 피식 웃었다.
“고생했다.”
그는 동그란 정수리 위로 손을 얹어 가볍게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그게 정신을 일깨우는 데 일조한 듯했다. 미동도 없던 재광이 천천히 돌아본다. 놀란 표정은 그대로였다.
몰래 면접 보러 간 사실을 들켰을 때는 어쩔 줄을 몰라서 눈치를 살살 보더니만, 막상 합격 소식을 접하고는 벅찬 감정을 감추질 못하는 꼴이라니.
그런 앞뒤 안 맞는 행동마저 의주의 눈엔 귀여웠다. 그는 머리칼을 쓰다듬던 손을 내려 재광의 뺨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축하해.”
다시 한번 말을 건넨 의주는 곧 자리를 떴다.
재광은 그제야 온전히 정신을 차렸다. 마우스를 쥔 손이 잽싸게 움직인다 싶더니, 곧장 캡처 프로그램을 켜 합격자 조회 창을 본뜬다. 이미지로 변환된 합격 소식은 재빨리 메신저로 옮겨졌다.
아무런 설명 없이 사진만 덜렁 전송했으나 반응은 뜨거웠다. 축하한다, 장하다, 고생 많았다 하는 메시지들은 물론이고 온갖 화려한 이모티콘들이 채팅창을 도배했다. 어떤 이모티콘이 올라오는지 제대로 확인도 못 할 만큼 빠른 속도로.
송민주
와 이런 거는 진짜 한잔 거하게 하면서 축하해야 되는데!!
조만간 한 번 봅시다들! 오후 5:16
요란한 축하 플로우 끝에 읽을 만한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민주였다. 제 일처럼 흥분한 기색이 말풍선에도 고스란히 묻어났다.
다른 동기들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한창 휴식기를 보내는 중인 연우가 바로 수락했고, 도원 또한 긍정적인 답을 보냈다.
운 좋게도 뜻이 모이자 어느새 만날 때와 장소를 정하느라 채팅방이 바빴다. 위치와 시간을 고려해 여기가 낫다, 저기가 낫다 분분한 의견이 오간다. 어디서 보든 상관없는 재광은 조용히 채팅창을 관전하다 말고 문득 고개를 돌렸다.
의주의 자리였다. 먼저 다가와 합격자 조회를 권하던 그는 불쑥 사라져 아직 돌아오지 않은 차였다. 잠시간 의문스럽게 빈자리를 바라보던 재광은 곧 다시 메신저 창으로 시선을 옮겼다.
????
재광의 합격 여부를 확인한 의주는 곧장 대표실로 향했다. 성의 없이 노크를 하더니 안에서 답이 들리기도 전에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선다.
“왜. 나 지금 바빠.”
이런 식으로 방에 드나들 사람은 의주뿐이라, 모니터에 시선을 박은 선호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말했다. 제 방인 양 자연스럽게 상석 소파를 차지한 의주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받아친다.
“어. 그래서 더 바쁘게 해줄라고.”
키보드를 타닥타닥 두드리던 선호가 그제야 손을 멈추고 눈길을 준다. 미간을 바짝 좁히고서였다.
“뭐야 무섭게. 뭔데.”
“재광이 정직원 전환 못 해. 인턴 기간만 마치고 나갈 거야.”
“뭐? 야!”
말이 인턴이지, 사실상 정직원 수습 기간이나 마찬가지인 자리였다. 뭐, 그렇다고 해도 서로 적응하는 기간인 만큼 일을 해보고 아니다 싶으면 돌아서는 건 변함없겠지만.
그러니 재광이 정직원 전환을 원치 않는다고 해도 대단히 충격적일 이유는 없었다. 다만, 선호는 재광의 퇴사에 의주가 많은 영향을 끼쳤을 거라 확신할 뿐이었다.
“너 내가 어지간히 집적거리라고 했지!”
목격한 바가 있지 않던가. 노골적인 손길로 팔뚝을 조물거리는 동성의 상사라니. 심지어 의주는 재광에게 사귀자고 했다가 거절당한 사실을 고백한 바도 있었다.
의주는 두 사람 사이에 충분한 라포가 형성되어 있다 해명했지만 재광의 속까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겉으로는 친근하게 굴면서도 속으로는 계약 기간까지만 참자고 이를 갈고 있었는지도.
“뭔 소리야. 나랑은 잘만 지내는고만.”
선호에게는 합리적인 의심이었으나 의주는 따분한 듯 귓가를 긁적거리며 대꾸했다. 그러는 사이 자리에서 일어난 선호가 응대용 소파로 다가와 앉는다.
“잘 지내는데 왜 그만둬. 일이 너무 많대?”
“뭐가 그렇게 궁금해. 일신상의 사유. 됐어?”
“그럼 이유를 알고 내보내야지, 그만둔다고 하면 그래 잘 가라 하냐?”
“응. 사람이 질척거리면 못 써.”
사귈 마음 없다는 재광에게 꾸준히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의주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솔직히 의주에게도 재광의 부재는 매우 아쉬운 사안이었다. 개인적인 연이야 계속 이어가기로 했다지만, 부하 직원으로서의 재광도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력이 대단히 흡족한 수준은 아니었으나 묵묵히 저 할 일을 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급한 대로 가르쳐가며 프론트 엔드, 백 엔드 정신없이 굴리는데도 불평 한마디 없이 따라왔더랬다. 솔직히 그래서 더 욕심내어 일을 줘보기도 했고.
재광만큼 말 잘 듣고 순순한, 거기에 적당한 실력까지 갖춘 부하 직원을 만나기란 어렵다는 걸 의주도 잘 알고 있었다. 1년 반가량이지만 사람 북적거리는 회사에 다녀본 경험이 있었으니까.
“학교 찬스 이미 한 번 썼으니까 쓸 만한 애 좀 물어와 봐.”
당당한 요구에 선호가 끙, 앓는 소리를 냈다. 어쩐지 개발팀 첫 채용이 순조롭더라니, 이렇게 짧은 평화일 줄은 예상 못 했던 탓이다. 그는 착잡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야, 네 입맛에 100퍼센트 맞춘다는 건 사실상 힘들고. 제일 중요한 게 뭔지 말해 봐.”
“중요한 거?”
“아 왜, 있을 거 아냐. 말 잘 듣는 게 최우선이라든가, 싸가지 없어도 되니까 실력이 먼저라든가 그런 거.”
의주는 감흥 없는 표정으로 느릿하게 눈을 끔뻑거렸다. 그러나 대답이 늦지는 않았다. 고민하는 척도 안 한 그는 당연한 걸 묻냐는 듯이 대꾸했다.
“재광이 같은 애.”
진지하게 답을 기다리던 선호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미친놈.”
????
재광의 퇴사 소식은 삽시간에 퍼졌다. 개발팀에 인턴이 들어온다더라, 하며 알음알음 알려지던 이전과 달리 대대적으로 공표된 셈이었다. 구인 사이트에 인턴 공고가 떴으니 말이다.
다행히 지원자는 꾸준히 있었다. 시기상 마지막 학기인 학생들이 많을 때라 그렇기도 했고, 이제 갓 2년을 넘긴 신생 회사라지만 제법 인지도가 있는 앱을 보유하고 있는 덕이기도 했다.
‘진짜 얼굴 보고 뽑았었냐고.’
재광은 넌지시 회의실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재광의 자리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가장 큰 회의실 안에서는 지금 개발팀 인턴 자리를 메꾸기 위한 면접이 한창이었다.
재광이 입사할 때와는 다른 행보였다. 그때는 이력서를 보내라더니 바쁘다며 대뜸 출근 일자부터 통보했었지 않나. 심지어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는 읽어보지도 않았었다.
- 이런 얼굴을 가진 사람이 일을 못 할 리는 없으니까?
- 반은 농담이에요.
그때도 반씩이나 진담이라는 사실에 꽤 놀라긴 했다. 그런데 착실히 면접이 진행되는 요즘, 재광은 그게 진심이었다는 걸 새삼 깨달으며 경악하는 중이었다. 아무리 여의주라지만 무슨 배짱으로 그랬는지 이해가 안 되는 거다.
‘하기야 언제는 이해가 됐나.’
제가 상관할 바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 재광은 회의실 쪽으로 향하던 시선을 거둬들였다. 그리고 새로 들어온 오류 보고가 있는지 확인하려는데, 요란하게 깜빡거리는 메신저가 먼저 시야에 들어온다.
송민주
야 나 너희 회사 근처로 미팅 가는데 끝나고 저녁 드실?
술도 좋아. 미팅한다고 한껏 치장하고 나와서 바로 집 가기 아까움. 오후 3:20
재광으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더는 인적성이니 면접이니 준비하며 퇴근 이후의 시간을 바쁘게 보낼 필요가 없지 않던가. 더불어 퇴사를 앞두고 업무량도 줄여나가는 참이라 오늘은 정시 퇴근도 가능했다.
ㅇㅋ 오후 3:21
재광은 빠르게 답장을 보냈다. 그러고 나자 회의실 쪽에서 인사를 나누는 소리가 들린다.
면접이 막 끝난 듯했다. 깔끔한 차림새를 한 남자와 의주, 그리고 선호가 정중하게 인사를 나눈다. 흘끔 그쪽을 쳐다보던 재광은 서둘러 메신저 창을 껐다.
????
“저 먼저 들어가보겠습니다.”
“응? 어, 잘 가.”
예비 퇴사자가 되어 여유를 찾은 재광과 달리 의주는 극도로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새 앱 개발에 치중하려 재광에게 넘겨줬던 업무 중 일부를 도로 가져와야 했으니 당연했다.
더군다나 요새는 업무 시간마저 면접에 빼앗기는 일이 많아 사정이 더 열악했다. 그래서인지 늘 반들반들하던 의주의 낯에도 피곤한 기색이 그득하다.
“…샌드위치라도 사다 드려요?”
당장 사무실을 나서려던 재광도 그 모습을 그냥 지나치지 못해 한마디 더 얹었다.
진작 미팅을 마친 민주가 요 앞 편의점에서 기다리는 중이긴 했다. 하지만 상사 저녁거리를 사다 준다고 하면 회사원인 그도 충분히 양해해줄 터였다.
물론, 먼저 부탁한 것도 아닌데 굳이 자발적으로 저녁 심부름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지만 의주가 저토록 바빠진 데는 자신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어 마음이 쓰이는 것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서 미안한 마음, 안쓰러운 감정을 담아 호의를 베풀었더니 의주가 그새 피로를 지우고 싱긋 웃는다.
“지금 나 걱정해?”
“아뇨. 걱정하는 건 아닌데.”
빈말로라도 수긍 않는 재광을 보고는 하하, 소리 내 웃어버린다. 그런 뒤에는 바로 의자에서 일어섰다.
재광은 의문스러운 낯으로 그를 봤다. 의주는 코트를 착착 걸치고서 순식간에 재광의 곁에 섰다.
“바람도 쐴 겸 내가 가서 사 올래. 같이 나가자.”
어깨 위로 척하니 두르는 팔이 자연스러웠다.
이제 재광은 자신의 어깨를 감싼 손을 흘끔거리는 행동마저 하지 않았다. 마치 제 몸의 부속물인 양 대수롭지 않게 달고 있는 거다.
나란히 선 두 사람이 사무실을 나가 엘리베이터에 올라탈 때까지도 의주의 손은 재광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일 많아요?”
7층에서 출발한 엘리베이터가 막 3층을 지나칠 즈음이었다. 재광이 하나 마나 한 질문을 던졌다.
얄밉게 놀려먹을 심산은 아니고, 여차하면 어느 정도는 제가 감당해줄 각오로 한 얘기였다. 재광이 입사하던 때와는 달리 채용이 더딘 상황이라 남아있는 동안에는 의주의 부담을 덜어줘야지 않나, 그런 마음이 든 거다.
“응. 너무 많아서 내일쯤 기절할 거니까 키스해서 깨워줘.”
“아직 살 만하신가 보네요.”
하지만 엄살에는 엄격했다. 의주가 재광의 정수리 위로 제 머리를 툭 떨어뜨리자 곧장 거리를 두고 떨어져 서며 그런다. 칫, 바람 새는 소리를 낸 의주는 헐거워진 팔을 단단히 조여 재광을 제자리로 돌려놨다.
“그래도 모레부터 새 인턴 출근하기로 했어.”
“진짜요? 아, 아까 면접 본 사람?”
“응. 드디어 너도 제대로 된 인수인계 해보겠다.”
어느새 1층이었다. 대화를 나누며 엘리베이터를 나서자 건물 입구 쪽에서 “김재광!” 하는 소리가 우렁차게 울린다. 재광은 물론이고 곁에 딱 붙어 선 의주의 고개가 빠르게 돌아갔다.
민주였다. 유별나게 반길 생각이 없는 재광은 눈을 마주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며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늘게 뜬 시야로 미심쩍게 민주를 훑어본 의주도 그를 따랐다.
“어, 뭐야. 와 미쳤다!”
친구를 만나러 왔다가 대학 선배까지 맞닥뜨린 민주는 입을 틀어막으며 놀란 체를 했다. 쉼 없이 굴러다니는 눈동자에 흥미로운 빛이 감돌았다.
두 사람이 닮았다는 사실이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나란히 세워놓고 보기는 처음일 테니 그럴 만도 했다. 잠시간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민주는 뒤늦게 서야 입가를 가린 손을 떼고 제대로 인사를 전했다.
“안녕하세요, 오빠. 저 기억하세요?”
의주와 같이 수업을 들은 적 있는 민주의 목소리가 밝았다. 오래간만에 학교 사람을 보니 퍽 반가운 기색이었다.
그러나 의주는 여전히 미간을 좁히고 미심쩍은 눈길로 민주를 보고 있었다. 여태 감싸고 있던 재광의 어깨를 제 쪽으로 더 당겨오기도 했다.
“어. 알아.”
“진짜로요? 제가 누군데요?”
“너 그 말 많은 애. 뭐더라, 아. 송민주.”
남들보다 기억력이 좋다며 우쭐대던 게 말만은 아니었는지, 몇 년 전 학교에서 본 인연이 다인 민주의 이름까지도 정확하게 짚어낸다. “오오” 하며 감탄을 숨기지 않은 민주가 붙임성 좋게 말을 이었다.
“기억하시네요? 김재광 상사가 오빠란 얘기는 들었었는데 이렇게 볼 줄은 몰랐어요. 잘 지내셨죠?”
“나야 뭐 늘.”
의주는 하나도 반갑지 않은 표정으로 무성의한 대꾸를 했다. 민주 또한 예의상 건넨 안부라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실 거 같았어요. 아, 저는 근처에 미팅 왔다가 김재광이랑 저녁 먹기로 해서요.”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민주가 사회인의 형식적인 대화를 이어가자 의주의 고개가 곧장 재광 쪽을 향한다. 눈에는 잔뜩 힘이 들어간 상태였다.
“저녁? 둘이?”
“네. 저 오늘 미팅 나간다고 한껏 꾸몄는데 진짜 딱 일만 하고 집에 들어가기가 아까워가지구요. 어차피 근처니까 밥이나 먹기로 했죠.”
재광을 보며 물었으나 대답은 민주가 했다. 정작 재광은 그 말이 맞다며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는 게 전부였다. 의주는 잠시 턱을 매만지며 고민하는 내색을 비쳤다.
“나도 갈래.”
“에?”
“그럴래요?”
얼빠져 되물은 이는 재광이요, 달갑게 받아들인 이는 민주였다. 민주는 차마 거절을 못 해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흔쾌한 눈치였다.
이렇게 되면 불편해지는 사람은 오로지 재광뿐이다. 동성의 섹스 파트너와, 그 사실을 모르는 친구의 겸상이라니. 당황스러워 두 사람을 바삐 쳐다보는데도 이쪽에 주목해주는 이는 없었다.
의주와 민주는 며칠 전에도 만난 사이처럼 친근하게 저녁 메뉴를 고르는 데 열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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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한 곳은 회사 인근의 일식집이었다. 연말이 다가와 그런지 평소보다 북적거리는 분위기였다. 세 사람은 가장 안쪽에 있는 자리에 앉아 꽤 자연스럽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의주와 재광이 나란히, 그리고 민주가 반대편에 혼자 앉은 구도였다. 민주는 두툼한 횟감이 인상적인 초밥을 꼭꼭 씹어 삼키고서 입을 열었다.
“아, 저 데이팅 그거 작년에 한창 많이 썼었잖아요.”
“그래? 좋지.”
“좋았는데요, 저 건의할 거 있어요.”
‘건의’라는 말에 의주가 한쪽 눈썹을 달싹거린다. 여의주 님이 만든 완벽한 앱에 일시적인 기능 오류를 제외하고 건의할 사항이 뭐가 있는지 의아해하는 듯했다. 슬며시 찌푸린 인상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민주는 똑 부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커플 캘린더 리셋할 때요. 불태우거나 갈기갈기 찢는 옵션 좀 넣어주세요.”
“오.”
“사람이 만나다 보면 거지 같이 헤어질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근데 그냥 띡 리셋 되니까 속도는 빠른데 뭔가 속이 시원한 느낌이 없더라구요.”
작년, 1년 넘게 만난 남자친구의 바람 현장을 목격하고 한바탕 사달을 낸 민주의 사연을 재광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피식 웃자 좋은 생각이라며 흥미를 보이던 의주가 문득 곁을 돌아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당장 사무실에 달려가 효과를 구현할 것 같던 의주는 눈을 가늘게 떴다. 원래 여자를 만나던 재광과, 현재 남자친구가 없는 듯한 민주를 번갈아 보는 시선이 집요했다.
“근데 너희 무슨 사이야?”
생각해보니 이상한 거다. 재광의 아는 사람이 회사 건물까지 찾아온 것도 처음인데, 그 상대는 여자인데다가, 미팅 때문이라고는 해도 외모에 신경을 쓴 티가 역력했다.
심지어 재광은 민주가 하는 말의 뜻을 다 아는 양 조용히 웃어버리기까지 했다. 그만큼 서로에 관해 잘 안다는 뜻일 테다.
이렇게 되면 또 모르는 일이었다. 애초에 재광이 여자와 단둘이 식사를 한다는 게 거슬려 따라나섰던 의주는 더 날카로운 눈빛을 띠었다.
“뭔 사이긴요. 대학 동기지.”
“아 김재광 또 정 없이 말한다. 그냥 대학 동기보다는 쪼끔 더 끈끈한?”
재광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무심한 말투로 말했으나 어쩐지 조금 서운한 것처럼 들리는 민주의 목소리가 의주의 신경을 더 자극했다. 미간을 좁힌 의주는 젓가락까지 놓아가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끈끈? 뭔데, 썸이라도 타?”
확답을 듣고 싶어 직설적으로 물어놓고 정말 그렇다고 할까 봐 꽤 심각한 표정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동시에 정색하는 두 사람의 반응이 보다 확실한 대꾸가 됐다.
“와, 오빠. 사과하세요.”
먼저 입술을 뗀 쪽은 민주였다. 쉬지 않고 대화를 나누던 때와 달리 목소리를 낮게 착 깔아가며 제법 위협적인 말투를 낸다.
“뭐라는 거예요.”
반면 재광은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내며 그렇게 말했다. 걱정한 것보다 순조로운 식사 자리라 여겼는데, 결국 헛소리 한마디는 하고 넘어간다고 생각하는 안색이었다.
셋 중 의주만 싱글벙글했다. 원하는 답을 들은 그는 “아니면 말고” 하며 새빨간 참치회가 올라간 초밥을 한입에 쏙 집어넣었다. 만족스러운 게 돌아온 대답인지, 초밥의 맛인지는 모르겠으나 끄덕거리는 고갯짓에 여유가 넘쳤다.
“친구니까 밥도 먹으러 오고 그런 거지, 길 가다 마주쳤으면 눈길도 안 줬어요. 쟤 완전 제 스타일 아니에요.”
다시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는지 민주가 다시 한번 확실하게 짚고 넘어간다. 묵묵히 장국을 들이켜던 재광도 “이하 동문” 하며 담담하게 받아쳤다. 그러자 의주가 불쑥 재광쪽으로 몸을 비튼다.
꼭 첫 회식 때 같은 모습이었다. 의주는 양손으로 턱을 척하니 받치고서 크게 눈을 끔뻑거렸다.
“그래? 나는 재광이 완전 내 스타일인데.”
씹던 게 없길 망정이었다. 헛기침하는 재광의 젓가락 끝에서 막 집어 든 장어 초밥이 툭 떨어졌다.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장어구이와 먹기 좋게 뭉쳐놓은 밥알이 볼썽사납게 해체되어 접시를 나뒹굴었다. 그 위로 민주의 웃음소리가 내려앉는다.
“제가 몇 년 만이라 까먹고 있었어요. 맞아, 오빠 이런 사람이었죠. 변함이 없으시네요.”
재광에게는 결코 순수하게 들리지 않는 멘트였건만, 민주는 단순히 의주의 나르시시즘에 기반한 말로 받아들인 듯했다.
그게 내심 다행이면서도 혹시나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리진 않을까 불안했다. 재광의 눈동자가 바쁘게 민주의 얼굴을 살핀다.
이런 속을 모를 리도 없건만 의주는 별다른 해명 없이 오해를 사기 좋은 미소만 띠고 있었다.
“광아, 많이 먹어.”
한술 더 떠 아직 새것 같은 자신의 장어 초밥을 재광의 접시에 옮겨주기까지 한다. 친근한 호칭에 민주가 웃음을 참는 시늉을 하자, 가시방석이 된 재광이 눈을 질끈 감고 한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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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마친 다음에는 자연스럽게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이곳에서 테이블을 차지한 사람은 재광과 민주, 둘뿐이었다.
눈 씻고 찾아봐도 이성 간의 감정이 전혀 없는 두 사람을 보고 안심한 의주가 가벼운 걸음으로 먼저 자리를 떴기 때문이다. 그는 안심한 값을 치르기라도 하듯 기분 좋게 음료를 계산하고 갔다.
“광아, 많이 먹어.”
민주는 커피에 막 입을 대는 재광을 보며 말했다. 근 몇 년간 들어본 것 중 가장 상냥한 목소리로.
이름 끝자만 부르는 낯간지러운 호칭이 상당히 인상 깊었던 모양이었다. 입술을 끝을 씰룩거리면서 의주의 말투를 따라하자 재광이 도끼눈을 뜨며 이를 악문다.
“하지 말라고 했다, 송민주.”
그제야 민주가 호탕하게 웃으며 박수를 짝짝 친다. 재광은 눈을 잔뜩 흘기면서도 더 할 말이 없어 내버려 뒀다.
사실 의주가 자신을 뭐라고 부르는지는 크게 신경 써본 적이 없었다. 꼬박꼬박 ‘재광 씨’ 하다가 ‘재광’이 되었을 때, 말을 놓는 속도가 빠르다 생각한 게 다였다.
자연스럽게 군 의주의 태도도 한몫했을 테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광아, 광아― 불러대는데도 그게 낯간지럽거나 부끄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남의 입을 통해 들으니 민망해 견딜 수가 없다. 물론 민주는 놀려먹을 요량으로 더 다정스러운 말투를 냈겠지만, 그 점을 고려하더라도 너무 친밀하게 들리는 것이다.
유난스러운 깨달음은 아니지 싶었다.
“너희 형보다 나은 수준이라더니 순 뻥이었어. 엄청 친하더만!”
오늘 민주와 처음 마주칠 때부터 의주의 팔걸이 역할을 하고는 있었지만, 맥락상 ‘그 정도 애칭을 쓸 정도라면 가까운 사이가 분명하다’는 쪽으로 해석하는 게 맞았다. 그에 더 민망해진 재광은 괜스레 목을 긁었다.
“그거야 초반에 잘 모르니까 그랬던 거고.”
“알고 보니 괜찮더라?”
“…그런 거지 뭐.”
일생일대의 사고로 시작해 물 흐르듯 변해버린 관계였다. 그러다 보니 재광 본인도 의주를 향한 악감정이 언제 다 사그라졌는지 가늠조차 안 됐다.
어쨌든 확실한 건, 이제는 의주를 제 형과 동일 선상에 놓는 것마저 미안하다는 사실이다. 여전히 의주의 심중은 하나도 모르겠고, 돌발행동은 이해할 수가 없지만….
그가 무슨 행동을 해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의 끈끈함은 생긴 듯했다. 뭐, 종종 예기치 못한 감동을 받을 때면 꽤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도 했고.
“야 그럼 아쉽긴 하겠다. 이제 좀 적응해서 괜찮다 싶었는데 딴 데 가려면.”
의주에 대해 사뭇 달라진 평을 들은 민주는 그렇게 말했다. 자신의 상황이라도 되는 양 제법 이입한 표정이었다. 정작 이직의 당사자인 재광이 태연한 투로 대꾸했다.
“퇴사한다고 끊길 인연도 아닌데 뭘 아쉽기까지.”
마침표를 찍자마자 아차 싶긴 했다. 편한 상대라 그런지 굳이 안 해도 될 말을 덧붙인 것 같아서다. 아니나 다를까, 민주가 눈썹을 크게 달싹이며 의외라는 뜻을 전한다.
“와 뭐야? 일 아니어도 보고 지낼 만큼 가까운 사이였던 거? 인생의 멘토 뭐 그런 건가?”
“….”
“아니면 같은 얼굴끼리는 남달리 통하는 게 있나?”
민주는 그저 똑 닮은 두 사람의 사이가 신기해 더 오버하는 것뿐이겠지만 재광은 내심 마음이 찔려 입을 꾹 다물었다.
의주와는 남달리 통하는 게 있지 않던가. 더군다나 퇴사 이후에도 인연을 이어가기로 한 이유 역시 거기에 있었다.
하지만 스무 살 때부터 지금까지 꽤 오랜 시간을 절친한 친구로 지낸 사람이라 해도 그 사실을 모조리 터놓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잠자코 침묵만 지켰더니 말 많은 민주가 알아서 수다를 이어나간다.
“나는 퇴사하면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갈 거야. 팀장님 번호 차단부터 박는다, 진짜.”
재광이 더 이상 의주의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 노력할 필요도 없었다. 급발진한 민주는 팀장 욕을 바가지로 쏟아내며 열을 올렸다.
하루 이틀 쌓인 앙금이 아닌 듯했다. 입에 침이 마르도록 회사생활의 고충을 토로하던 민주는 한참 뒤에야 다 식은 라떼를 들이켜며 숨을 돌렸다.
“아, 김재광 퇴사 왕 부럽다.”
한숨처럼 내뱉는 목소리에 진심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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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가 부러워한 재광의 퇴사는 착착 진행됐다.
새 인턴이 출근하면서부터 가속이 붙은 느낌이었다. 그동안은 바쁜 의주의 사정을 봐가며 업무를 조금씩 돌려주느라 더뎠다면, 임자가 나타난 지금은 부담 없이 일을 넘겨줄 수 있어 모두가 편해진 차였다.
이제 고작 사흘 출근한 사람을 두고 무어라 판단을 내리기는 어렵겠지만, 다행스럽게도 새로운 인턴은 꽤 괜찮은 직원으로 보였다. 재광이 인수인계해주는 내용을 빠릿하게 이해했고, 다른 직원들과도 수더분하게 잘 어울리는 편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자주 붙어 다니는 이들은 재광, 그리고 치원이었다. 재광과는 가장 이야기를 많이 나눴으니 당연했고, 치원과는 나이대가 비슷해 자연스레 가까워지는 중이었다.
“아, 저기….”
지금만 해도 셋이 함께 점심을 먹고 오는 길이었다. 식당에서 막 나와 회사 건물이 있는 방향으로 돌아서는데, 새 인턴이 문득 입을 연다.
“저 뭐 좀 사러 갈 게 있어서요. 두 분 먼저 들어가세요.”
“네, 그러세요.”
“그럼 다녀오세요. 이따 사무실에서 봬요.”
사람 좋은 미소를 띠고 하는 말에 재광과 치원이 차례로 대답했다. 간단히 목을 까딱거리며 가벼운 인사를 나눈 그들은 곧 서로 다른 방향으로 돌아섰다.
“인수인계 해보니까 어때요? 저는 여기가 첫 직장이라 아직 퇴사를 안 해봐서 모르겠어요. 기분 이상할 거 같다. 아닌가, 후련한가?”
치원은 진심으로 궁금한 말투였다. 인턴 3개월 만에 낭만인 최단기 퇴사자가 된 재광은 조금 민망한 듯 웃었다.
“새 인턴 와서 인수인계하니까 좀 신기하긴 한데, 사실 아직도 실감이 잘 안 나요.”
“그럴 수도 있겠다. 어때요? 인수인계는 잘 돼가요?”
“네, 뭐. 어차피 어려운 일은 팀장님이 다 하고 계셔서 제가 넘겨줄 건 다 쉬운 거밖에 없기도 하고, 저분도 전공자라 금방 이해하시는 거 같아요.”
치원은 “다행이네요” 하다 말고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앞만 보고 걷던 재광이 그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치원이 웃음기 남은 얼굴로 그런다.
“아, 저 별건 아니구요.”
“네?”
“여 팀장님이요. 재광 씨가 그렇게 종일 새 인턴 옆에서 인수인계하고 있으면 그건 그냥 두시나 해서요.”
자세한 설명은 없었으나 재광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뜻을 알아차린 얼굴에 어설픈 미소가 걸린다.
재광이 치원과 붙어 다니는 걸 유독 못마땅해 하던 의주이기에 하는 말이 분명했다. 다행히 치원은 그 못마땅한 눈길을 억울해하지 않고 재밌어했다. 다른 사람에게도 저와 같은 반응을 보이는지가 궁금한 것도 아마 그래서일 터였다.
“아, 뭐…. 일하느라 바빠서 그런 거 신경 쓸 시간도 없죠.”
“그래요? 의외네. 아직도 저는 재광 씨한테 말 한마디만 걸어도 막 째려보시던데.”
그렇게 내뱉는 말소리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남아 있었다. 재광은 슬그머니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아직도 의주가 왜 그리 치원에게 민감하게 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자신과 친해서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자꾸만 눈총을 사는 치원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도 그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말이 나온 김에 사과를 건넸더니 되레 당황한 치원이 빠르게 손사래를 친다.
“어, 아뇨. 그러라고 꺼낸 얘기 아닌데. 제가 뭐 그런다고 눈치를 본 것도 아니고요.”
“그래도요.”
“에이, 사과할 거 없어요.”
맘 불편해하는 재광을 안심시키고자 둘러대는 말은 아니지 싶었다. 동그란 안경 너머로 빛나는 눈동자가 맑았다. 치원은 그제야 편해지는 재광의 안색을 살피며 덧붙였다.
“솔직히 여 팀장님 그러시는 거 신기해서 재광 씨한테 더 친한 척한 것도 있어요.”
“왜요?”
“재광 씨 오기 전까지만 해도 수준 안 맞는데 같이 일하면 피곤하다고 채용 계속 미루셨거든요. 신입 가르치는 것도 귀찮다고 얼마나 질색하셨는지 알아요?”
“아….”
“그래놓고 막상 오니까 팀원이라고 완전 싸고돌잖아요. 그게 재밌어서 더 그랬죠. 아, 이건 제가 재광 씨한테 사과해야겠는데요?”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하는 말에는 재광이 손사래를 쳤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사무실이 있는 건물에 도착했다. 1층 로비로 들어서자 엘리베이터 앞에 모여 있던 익숙한 얼굴들이 일제히 이쪽을 돌아본다.
“식사하고 오는 길이에요?”
반색하며 말을 건넨 이는 선호였다. 그 옆으로 의주와 마케팅 팀장이 보인다.
“네. 식사 맛있게 하셨어요?”
치원이 먼저 서글서글한 투로 대꾸하며 다가섰다. 곁에 서 있던 재광도 보폭을 맞춰 엘리베이터 방향으로 다가섰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어깨에 팔이 턱 올라온다.
돌아볼 것도 없이 의주였다. 그는 언젠가부터 재광을 전용 팔걸이처럼 이용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조금 달랐다. 그저 친근한 어깨동무라기보다는 치원 옆에 서 있는 재광을 빼앗아오는 행동에 더 가까웠다. 비단 재광만의 짐작은 아니었는지 몰래 눈을 마주친 치원이 장난기 어린 미소를 띠었다.
“뭐 먹었어?”
비밀스러운 눈짓도 의주의 레이더를 피해 가지는 못했다. 고 짧은 새 오고 가는 눈길을 알아차린 의주가 곧바로 재광의 고개를 제 쪽으로 돌렸다.
“그냥 밥이요.”
“맛있는 거 먹었네.”
진짜로 뭘 먹었는지가 요점이 아니라는 건 모두 알고 있었다. 성의 없이 대답하는 재광도, 거기다 대고 부쩍 자상하게 구는 의주도, 심지어 그 모습을 지켜보는 치원까지도.
치원은 웃음을 참다 안 되겠는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러는 사이 마케팅 팀장이 새로이 말을 꺼냈다.
“근데 셋이 나가서 왜 둘만 와요?”
막 점심을 먹으러 가던 때의 상황을 기억하는지 예리하게 인원수를 짚어낸다. 헛기침을 갈무리한 치원이 빠르게 답했다.
“아, 뭐 좀 사러 간다고 해서 저희 먼저 왔어요.”
별거 없는 사연에는 다들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뭐 좀 사러 간다던 인턴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점심시간이 다 끝나고도, 퇴근 시간에 다다라서도. 심지어 다음날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무래도 사러 간다던 게 유니콘 뿔쯤 되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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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월 인턴 계약 만료로 낭만인 최단기 퇴사 예정자가 됐던 재광은 눈 깜짝할 새 타이틀을 내주고 말았다. 출근 사흘 만에 무단 퇴사자가 발생해버린 거다.
사실 점심시간이 끝나고 30분가량이 지날 때까지는 다들 사정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뭔가를 사러 간 곳에 사람이 많아 시간이 더 걸릴 수도 있을 테니까.
하지만 문득 새 인턴의 자리를 확인한 뒤에는 포기했다. 사흘간 주인이 있었다고는 믿지 못할 만큼 말끔했기 때문이다. 챙기러 올 짐도 없지, 메시지도 전화도 응답이 없지. 돌아올 기미라곤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사정이 생겼으면 생겼다고 말하면 되고, 하다못해 일이 안 맞으면 안 맞다 얘기하면 될 걸 그렇게 사라질 일이에요? 와 난 아직도 잘 모르겠어.”
유니콘 뿔을 찾아 떠난 인턴의 자리는 결국 공석으로 남았다. 창사 이래 처음 겪어보는 무단 퇴사에 선호는 꽤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재광의 송별회 겸 낭만인 송년회에서도 이 이야기가 나오는 걸 보면 말이다.
“그래도 재광 씨 수고했다고 모인 자린데 그런 얘기는 그만합시다, 대표님.”
선호를 말린 이는 마케팅 팀장이었다. 건배를 몇 차례 한 다음이라 술기운이 조금 오른 듯한 그는 정중한 목소리와 달리 방정맞게 손을 내저으며 제동을 걸었다. 갑갑한 맘에 물만 들이켜던 선호가 아차 싶은 표정으로 재광을 돌아봤다.
“미안해요, 재광 씨. 후련하게 가야 되는데 제가 찜찜한 얘기 했죠.”
“아니에요. 괜찮아요.”
재광은 비즈니스용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근데 여 팀장님은 괜찮으신 거예요?”
그때,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가진 직원 한 명이 끼어들었다. 각자 대화를 나누며 시끌시끌하던 테이블이 일순 조용해진다. 모두가 의주를 바라보는 가운데, 바로 옆에 앉은 재광도 문득 곁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닌 게 아니라 의주는 답지 않게 축 처진 모습이었다. 회식 때면 늘 첫 잔만 비우고 말더니 오늘은 몇 잔이나 더 마신 참이다. 평소에 말수가 적은 편이 아닌데도 입을 꾹 다물고 있어 오히려 더 눈에 띄었다.
“….”
하지만 타고난 성정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홀로 먹구름을 띄우고 조용히 있던 의주는 갑작스럽게 집중되는 이목을 알아차리고 주변을 둘러봤다.
이미지 관리라도 하는 양 흐트러진 자세를 똑바로 세우는 행동이 재빨랐다. 의주는 별안간 눈동자를 굴리며 고민하는 시늉을 했다.
자신을 향한 관심에 부응하려 알맞은 멘트를 떠올리는 눈치였다. 기다란 눈매를 느릿하게 깜빡거리던 그는 입술을 뗐다.
“여러분.”
행사라도 진행하는 듯한 톤이었다. 묵직하지만 그렇다고 심각하지는 않은 어조. 테이블에 둘러앉은 직원들이 잔뜩 궁금한 얼굴로 쳐다보자 잠시 뜸을 들이던 의주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이 왜 여의주인지 아세요?”
하는 양을 지켜보던 선호가 “저 새끼 취했네” 하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마케팅 팀장 또한 관심 없는 표정으로 감자튀김을 집어 먹었다.
호기심은 오로지 직원들의 몫이었다. 심드렁한 친구들과 달리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낸 이들은 지대한 관심을 표하며 의주를 바라봤다.
“왜요, 왜요?”
“저 태어났을 때 저희 할아버지가 절에 가셨는데, 스님이 저는 이름을 크게 지어야 오래 살 수 있다고 지어줬대요.”
이름 얘기를 꺼내자마자 취했다고 하던 선호의 말대로 의주의 발음 곳곳이 자유분방하게 새고 있었다. 그 탓에 더욱이 귀를 기울이던 치원은 불쑥 마케팅 팀장에게 물었다.
“여 팀장님 어릴 때 어디 아프셨어요?”
갓 태어난 아이를 두고 오래 사니 마니 논할 정도라면 무슨 사연이 있었을 거라 예상한 거다.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켠 마케팅 팀장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답했다.
“3.8kg 우량아 출신, 29년 무사고요.”
의주가 술을 잘 안 마셔서 그렇지, 취할 때면 어김없이 되풀이되는 레퍼토리인 듯했다. 테이블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의주의 목소리가 마케팅 팀장의 대답을 길게 풀어낸다.
“저 사실은 3.8kg 우량아 출신이거든요. 그래서 아프고 말고 이런 거 걱정할 필요는 없었는데 워낙 귀한 몸이다 보니까 신경 쓰이셨나 봐요. 근데 또 29년 인생에 감기 한번 크게 앓은 적 없는 거 보면 이름이 주는 시너지가 있나 싶기도 하고요.”
치원과 마찬가지로 가련한 사연을 짐작했던 직원들이 “아 뭐예요” 하며 허무한 심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반응에 동요하지 않은 의주는 아무나 소화하지 못할 이름이라며 자긍심을 표하느라 바빴다.
한바탕 이목을 집중시킨 의주의 이야기가 끝나자 가까이 앉은 사람들끼리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는 분위기가 됐다. 일 얘기부터 요즘 연애 사정, 재테크까지 각양각색의 화젯거리가 테이블 위를 오간다.
재광의 퇴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각에서는 내일부터 늘어지게 늦잠 자겠다며 부러워했고, 누군가는 좀 쉬다 다시 오라며 아쉬운 마음을 드러냈다.
“치원 씨 서운하겠다. 짝꿍 가서 어떡해?”
그리고 또 다른 직원은 재광과 친하게 지내던 치원에게 묻기도 했다. 취기에 뺨이 조금 붉어진 치원은 흘러내린 안경을 추켜올리며 빙긋 웃었다.
“에이, 저보다는 여 팀장님이 훨씬 서운하시죠.”
그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의주에게로 향한다. 취한 정신으로도 얘기는 다 듣고 있었는지, 의주가 옆에 있는 재광을 덥석 안았다.
“어머, 어머.”
직원 한 명이 옆에 앉은 사람의 팔뚝을 찰싹 때렸다가 입을 틀어막았다. 의주에게로 관심을 돌린 치원 또한 놀란 표정으로 입을 떡하니 벌렸다.
치원은 그저 재광과 둘이 다닐 때마다 의주가 레이저를 쏴대기에 유난스러운 팀원 사랑을 언급하려던 것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껴안아버리다니. 전혀 예상 못 한 행동이라 차마 말이 나오질 않는다.
“….”
당황한 건 재광도 마찬가지였다. 의주가 가슴을 가로질러 팔뚝 부근을 단단히 옭아맨 터라 젓가락을 쥔 손이 오도 가도 못 하게 묶여버렸다.
왼쪽 팔이 의주의 가슴에 딱 닿을 만큼 끌어안는 힘이 강했다. 이대로 돌아봤다가는 코앞에서 의주의 얼굴을 마주할 게 뻔해 쉽사리 고개를 돌릴 수도 없었다.
“저기, 팀장님….”
그래서 간신히 불러만 보는데, 이것 좀 놔달라는 본론이 나오기도 전에 의주가 웅얼거린다.
“광아, 가지 말고 나랑 일하자.”
발음은 불분명하지만 못 알아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주변에 있던 다른 직원들도 어지간히 막막한 모양이라며 웃어넘기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재광은 같이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붙으면 가는 거라고 쿨한 척할 때는 언제고.’
몰래 면접 보러 간 사실을 들키고 난 다음에도 세상 시원하게 받아들이더니만, 왜 인제 와서 진상인지를 모르겠는 거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저 때문에 번거로워진 의주의 상황을 알기에 짠한 마음도 들었다.
그 때문에 강하게 밀어낼 수가 없었다. 양가감정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안겨만 있자, 의주는 재광의 어깨에 제 이마를 비벼대기 시작했다.
“저 새끼 뭐야, 저거!”
온 직원이 의주의 어리광을 지켜보기만 할 때였다. 잠시 자리를 비웠던 대표와 마케팅 팀장이 식겁하며 달려 들어온다.
“재광 씨 미안해요.”
“미쳤나 이게.”
한달음에 달려온 그들은 재광을 끌어안은 팔을 억지로 떼어냈다. 환상의 복식조처럼 사과와 힐난을 번갈아 하며 능숙하게 의주를 정리한다.
재광은 덕분에 숨통을 트면서도 갑작스러운 상황이 얼떨떨해 두 상사를 번갈아 봤다. 두 사람은 놀랐다가도 금세 재밌어하고 말던 다른 직원들과 달리 진심으로 기겁해 진땀을 빼고 있었다.
- 그래서 대충 얘기했어. 내가 너한테 고백했다가 차였다고.
그러고 보니 선호가 의주와 자신의 관계를 어느 정도 알고 있다던 얘기가 떠오른다. 마케팅 팀장도 절친한 사이니 말이 전해질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 걱정 마. 우리가 특별한 사이인 것까진 말 안 했으니까.
의주의 설명으로는 현재 어떤 관계인지까지는 터놓지 않았다 했지만, 중요하지 않았다. 어쨌든 의주와 저 사이에서 사사로운 감정이 논의된 적 있다는 사실을 알지 않나.
괜히 뜨끔한 심정이 된 재광은 잔뜩 어색한 목소리를 냈다.
“아… 괜찮아요.”
“진짜 미안해요, 재광 씨.”
“얘는 저희가 데려다줄게요. 완전 맛이 갔네, 이거.”
두 상사는 당사자의 괜찮다는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재차 사과한 마케팅 팀장과 술 취한 친구를 흘겨본 대표가 곧장 의주를 일으킨다. 취객 전담 2인조처럼 손발이 척척 맞는 모습이었다.
“아 왜! 나 멀쩡한데!”
자기 멀쩡하다며 고집을 피우는 의주는 영락없는 취객의 형상이었고.
의주는 세 사람 중 체격이 가장 좋았으나 술에 절어 영 힘을 못 썼다. 쿵짝 잘 맞는 두 사람이 자리에서 끌어내자 긴 다리를 바닥에 늘어뜨리며 질질 끌려가고 마는 거다. 그러면서도 애처롭게 광아, 광아― 해대는 통에 재광만 난감하게 됐다.
하필이면 송별회 자리라 마음이 더 안 좋았다. 차라리 끝까지 쿨한 척 굴었으면 외면하기가 쉬웠을 텐데, 인제 와서 구질구질하게 가지 말라 칭얼대니 맘이 좋지 않은 것이다.
“저기….”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여기 남은 사람들과는 틀어진 적 없이 좋은 관계로 지냈잖은가.
계속해서 자리를 지키며 시시콜콜한 얘기를 나누는 것보다는, 술에 취해 찌질한 본색을 드러낸 의주를 달래주는 편이 더 후련한 퇴사가 될 듯했다.
“저도, 같이 갈게요.”
결단을 내린 목소리가 단단했다.
????
당연히 반발이 거셌다. 내일부터 쉬면서 왜 벌써 가느냐, 주인공이 먼저 빠지는 게 말이 되느냐…. 취기가 조금씩 오른 직원들은 갖은 이유를 들먹이며 재광을 붙잡아두려 했다.
대표와 마케팅 팀장도 같은 의견이었다. 낭만인에서 마지막으로 하는 회식인데 힘들이지 말고 편하게 놀다 가라며 재광을 말렸다.
“재광 씨, 다리 안 저려요?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그런데 왜 재광이 선호의 차 뒷좌석에서 의주에게 무릎을 내어주고 있느냐 하면….
간단한 이유였다. 그 누구보다 술 취한 의주의 고집이 가장 셌던 거다. 볼썽사납게 질질 끌려 나갈 때는 언제고, 같이 가겠다는 재광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버티기에 들어갔더랬다.
힘은 또 얼마나 좋은지 몰랐다. 아무리 당기고 끌어도 옴짝달싹을 안 해, 술집에서 주의를 준 뒤에야 비로소 다른 직원들이 재광을 놓아주었다.
“진짜 내가 어이가 없어서.”
룸미러로 뒷좌석을 들여다본 선호는 고개를 설설 저으며 핸들을 꺾었다.
만취한 의주에게는 재광이 치트키였다. 재광이 같이 가기로 결정이 나자 언제 버텼냐는 듯 두 발로 저벅저벅 걸어 술집을 나선 것이다.
그뿐일까. 선호가 차를 빼 왔을 때는 돌연 안 가겠다고 생각을 바꿨다가도 재광이 먼저 뒷좌석에 올라타자 채근하기도 전에 옆자리를 차지했다. 그러고 나서부터는 재광의 무릎을 베고 잠들어 차 안의 평화가 지속되는 중이었다.
물론 난동을 피우는 것보다야 훨씬 나았다. 그렇지만 그를 온순하게 만든 상대가 하필이면 재광이었다. 의주가 고백했다 차였다는, 그러고도 팔뚝을 조물대던, 심지어 아까는 껴안았던 그 재광.
앞 좌석에 탄 두 사람은 보초를 서듯 틈틈이 뒤를 살폈다.
“야 여의주 일어나. 재광 씨, 이제 걔 깨워요. 다 왔는데.”
의주를 제외한 모두가 좌불안석으로 보내는 시간도 이제 끝물이었다. 의주의 오피스텔 주차장에 다다르자 조수석에 앉은 마케팅 팀장이 말했다. 일부러 창밖만 보던 재광이 황급히 “아, 네” 하며 잠든 의주의 어깨를 흔들었다.
“팀장님. 팀장님 일어나세요.”
여태 쥐 죽은 듯 자던 꼴을 보면 한참이나 실랑이를 해야 깨울 수 있을 듯했는데. 의외로 의주는 잠든 적 없는 것처럼 스르륵 일어났다.
잠깐 눈 좀 붙였다고 정신이 들었나.
다들 그렇게 여긴 게 분명했다. 물론, 크나큰 오산이었다.
“야이 미친 새끼야!”
“저 새끼가 돌았나!”
순순히 일어나 앉은 의주가 냅다 재광의 입술로 돌진한 것이다. 선호의 차는 빈자리를 찾다 말고 멈춰 섰고, 마케팅 팀장은 금방이라도 뒷좌석으로 넘어올 듯 팔을 뻗었다.
돌발 행동에 놀란 재광만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저라도 취하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저까지 취했더라면 놀라 굳어버리기는커녕 습관처럼 입술을 벌리고 혀를 얽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런 공상을 하고 있을 시간은 충분치 않았다. 잔뜩 흥분한 두 사람이 금방이라도 경찰서로 향할 기세였기 때문이다.
“잠시, 잠시만요! 잠깐만요!”
날아드는 욕지거리 속에서 간신히 목소리를 낸 재광은 진정하라는 양 두 손으로 공기를 누르는 시늉을 했다.
추행의 당사자가 침착하게 굴자 목격자 둘이 금방 잡음을 낮춘다. 재광은 그제야 살살 눈치를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 저는 괜찮구요.”
“….”
“팀장님이랑은 좀… 얘기를 해봐야 할 거 같거든요. 집까지만 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아니 재광 씨가 괜찮다면 그런 거지만, 그래도 얘기는 나중에 하는 게….”
마케팅 팀장이 만류하는 뉘앙스를 풍기자 선호도 곧바로 “맞아요” 하며 거들었다.
자신들이 둘의 사이를 어디까지 아는지 얘기할 수 없어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었다. 재광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오늘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서 그래요. 나중에는 소용없을 것 같아서요.”
대충 둘러대는 말이 아니었다. 자신의 퇴사 때문에 속상해하는 의주를 나중에 위로해 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 같아 내린 결론이었다.
재광이 이렇게까지 얘기하니 앞 좌석에 앉은 두 사람도 더 설득하기는 어려웠다. 그들은 눈길을 주고받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찝찝한 한숨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
맹세코 이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으, 응, …흐읏!”
재광은 정말로 저 때문에 혼자 모든 일을 떠맡게 된 의주에게 미안했고, 자신의 퇴사를 아쉬워하는 의주가 안쓰러워 위로해주려는 심산으로 자진해 따라왔었다.
만취했다곤 하지만 자신의 말귀는 다 알아먹지 않았나. 그렇기에 몇 마디 말로 기분을 풀어주고 갈 수 있을 줄로 알았다. 그게 얼마나 안일한 생각이었는지는….
미련하게도 하반신이 휑해진 다음에야 깨달았다.
- 우리 계속 보기로 했잖아요. 그래놓고 퇴사한다고 이렇게 속상해하면 내가 뭐가 돼요. 사람 미안하게.
투박하지만 나름대로 신경 써서 달래줄 때까지만 해도 나쁘지 않았다. 바닥에 주저앉은 의주는 취기에 풀어진 눈을 하고서도 열심히 재광의 목소리를 귀담아들었었다.
그런 다음 의주가 대뜸 입을 맞춰올 때까지도 그러려니 했다. 저의 나은 미래를 위해 의주를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한 건 사실이니 키스쯤이야 받아주는 게 어렵지도 않다고만 여겼다.
근데 입술 먹으랬더니 이렇게 홀딱 벗겨 먹을 줄은 몰랐지.
“아…! 팀장, 님, 아, 아파요, 흣!”
“응, 응.”
“등, 하아, 등, 아프, 다, 고… 아, 으읏…!”
그것도 멀쩡한 침대를 바로 옆에 두고 맨바닥에서.
바닥은 싫다고 말려볼 새도 없었다. 하도 애틋하게 굴어서 어리둥절하던 재광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등이 땅에 닿은 뒤였다. 상황을 알아차린 재광이 흠칫 놀란 기색을 했지만 의주는 꼭 입맞춤으로 끝날 것처럼 굴었다.
현란한 혀 놀림으로 정신을 쏙 빼놓고 섹스로 넘어갈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할 만큼.
의주는 구렁이 담 넘듯 자연스럽게 옷을 벗길 때와 달리 유독 흥분한 모습이었다. 그러잖아도 체격 차이가 나는데 힘으로까지 밀어붙이니 재광은 속수무책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으… 윽!”
한 번 치받을 때마다 온몸이 울렸다. 살갗은 저린 듯하고, 배 속에서는 압박감을 동반한 묵직한 자극이 올라와 전신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그런 건 차라리 버틸 만했다. 안을 거칠게 들쑤시는 몸짓이나 이를 세워 살갗을 무는 행동 따위는 금세 성감으로 치환됐으니까.
“등… 아! 읏, 잠깐, 만, 요. 아아!”
하지만 이건 도통 참을 수가 없다. 의주가 세게 밀어붙일 때마다 등을 타고 올라오는 고통에 재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처음에는 딱딱한 바닥이라 조금 배기는 게 다였다. 그 정도는 불편하되 못 견딜 정도는 아니라 잠자코 있었는데, 점차 흥분이 고조되며 얘기가 달라졌다.
의주의 격한 몸짓을 받아내다 보니 잔뜩 긴장한 몸에서 어느새 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의주가 힘주어 쳐올릴 때마다 매끄럽게 밀려나던 피부가 바닥에 쓸리며 고통이 더해졌다.
뜨겁고 아팠다. 그런 와중에도 안을 찌르는 족족 짜릿한 쾌감이 올라와 더 몸 둘 바를 모르게 됐다.
의주도 아마 그래서 더 재광을 안 놓아주는지도 몰랐다. 입으로는 아프다는데, 정작 눈에 보이는 모습은 잘만 느끼고 있으니 말이다.
결국 한계에 다다른 재광이 의주의 팔이며 등짝을 퍽퍽 때렸다. 아랫입술까지 야무지게 질끈 물고 최선을 다해 힘을 실은 손길이었다. 육중한 타격이 있고서야 의주가 뒤로 물러났다.
“하아, 하….”
한순간이었다. 속도를 높여 빠르게 드나들던 살덩이가 조짐도 없이 훅 빠져나간다. 잠시 멈추길 바란 건 재광이지만, 그마저도 당황스러울 만큼 흐름이 뚝 끊겼다. 조금 전까지 팽팽하게 벌어졌던 입구가 빠르게 닫혀 들었다.
“…아프다고 했잖아요.”
잠시 숨을 고르며 누워있던 재광은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원망스러운 눈길이 의주를 향한다. 그러더니 곧 무릎걸음으로 침대 쪽에 다가갔다.
어디까지나 ‘잠깐’이지 ‘그만’의 뜻으로 섹스를 멈춘 건 아니었다. 잔뜩 흥분만 해놓고 둘 중 누구도 절정을 맛보지는 못했으니 여기서 그만두는 건 재광에게도 달가운 소식일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장소만 옮길 작정이었는데.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 바닥에서… 윽!”
의주는 많이 급했던 모양이었다.
등이 아프다던 재광이 침대 끝에 가까워지자 그대로 몸을 누르는 거다. 덕분에 재광은 상체만 침대 위에 올려놓고 엎드린 자세가 됐다.
등이 아프다고 하니 등을 뗄 기회만 준 격이었다. 납작 엎드린 재광의 등을 내려다본 의주는 군데군데 마찰열로 붉어진 자국을 따라 입술을 붙였다.
“으응, 흣….”
다물린 지 얼마 안 된 구멍을 비집고 들어가기까지도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매트리스 끄트머리에 걸쳐 세운 엉덩이 사이로 단단히 선 성기를 비비던 의주는 예고 없이 몸속을 파고들었다.
단번에 끝까지 밀어 넣자 재광의 몸이 바짝 긴장하는 게 느껴진다. 볼기 옆이 푹 패이고, 내벽은 잔뜩 수축하며 들러붙었다.
이미 수차례 들락거리며 안을 풀어놓은 터라 움직임이 수월했다. 의주는 슬며시 제 것을 뺐다가 도로 깊게 박아 넣었다. 매트리스 위에 엎드린 재광의 입에서 곧장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흡, 아아…!”
재광은 어쩔 줄을 모르는 눈치였다. 몸을 관통하는 쾌감에 고개를 쳐들었다가, 뒤를 돌아보려 했다가, 결국은 매트리스 위로 머리를 박았다. 푹 꺾인 고개 옆으로 갈 곳을 잃은 두 손이 방황했다.
아닌 게 아니라 재광은 진심으로 당황한 상태였다. 바닥에 누워 정면으로 의주를 받아낼 때와 비교할 수 없는 깊이감에 놀라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생소한 자세가 주는 충격이 더 컸다.
- 나랑 닮아서 더 흥분됐는데?
둘 사이의 섹스에서 얼굴을 바라보는 행위는 의주에게 아주 중요한 포인트였지 않던가. 직접 그렇게 얘기했던 건 물론이고, 말뿐이 아니라 실제로도 재광이 자신을 보도록 턱을 고정한 적이 여러 차례였다.
물론 재광에게는 그게 못내 부끄럽고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하지만 니즈를 충족해주려 부러 더 눈을 맞추려 노력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흐, 으읏! 아, 아….”
얼굴은 핑계였나 보다. 골반을 꽉 틀어쥔 의주는 그 어느 때보다도 흥분해 거칠게 재광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재광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닮은 얼굴을 섹스 내내 쳐다보고 있는 것도 곤혹스럽지만, 상대방이 보이지 않는 자세도 썩 좋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꼭 박아 넣기 좋으라고 엉덩이만 대주고 있는 기분이라 수치스럽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도 굵고 단단한 성기가 안을 누를 때마다 정직하게 눈앞이 점멸해 도무지 무슨 기분이어야 할지를 알 수 없었다.
“흣… 아!”
의주는 꼭 재광의 혼란을 알기라도 하는 양 불시에 허리를 세게 튕겼다. 그 탓에 꾹 깨물고 있던 아랫입술이 잇새를 빠져나가며 입안에 고인 신음이 터진다.
솔직하게 내지르는 소리가 제법 만족스러운 듯했다. 의주는 별안간 상체를 낮게 숙였다. 그리고는 재광의 몸을 끌어안았다.
목선을 따라 내려간 입술이 끈적하게 어깨 위를 맴돈다. 허리께를 끌어안던 손은 곧 애처롭게 시트 위를 맴돌던 재광의 손 위로 겹쳐졌다. 이내 겹친 손에 힘이 바짝 실렸다.
“아, 아아!”
한껏 부푼 성기가 깊은 곳까지 콱 찌르고 들어오자 재광의 눈앞이 하얘진다. 배 속에서부터 날카롭게 올라오는 찌릿한 감각이 미세한 신경들을 타고 온몸에 퍼지는 느낌이었다.
이 감각을 재광은 이미 알고 있었다. 벌어지지 않아야 할 곳이 기어이 벌어지고 마는 듯한, 고통 같은 쾌감.
출장을 핑계 삼아 모텔에 갔을 때 처음 경험했었다. 아팠느냐고 묻는 의주에게는 모르겠다고 애매한 대답을 했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아픈 게 아니라, 한도 초과된 성감을 견딜 수가 없는 거다.
“으으, 흑…. 읏, 으응, 아…!”
의주가 깊숙한 내벽, 좁은 틈새를 계속해 짓이기자 재광은 거의 흐느끼듯 신음했다. 전신을 뒤덮는 감각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몰라 등이며 어깨가 움츠러든다.
얇은 선을 가진 기다란 눈매는 짓무른 지 오래였다. 방황하는 재광의 손에, 긴장한 어깨에 차례로 입 맞추던 의주의 입술이 이내 눈꼬리에 가 닿았다.
“흐읏, 아… 아아!”
정성 들인 입맞춤과 달리 고간에는 자비가 없었다. 멈추지 않고 몇 번을 더 한계까지 찔러 넣자 재광의 앞에서 정액이 비적비적 새어 나오기 시작한다.
순간 꿈틀대는 내벽의 의미를 의주가 모를 리 없건만, 그는 재광의 앞을 만져주는 아량을 베푸는 대신 더 빠르게 뒤를 들쑤셨다.
“흣, 하아….”
그리고 단단한 살덩이를 빈틈없이 감싼 내벽이 잘게 떨리며 콱 조여드는 그때, 자신도 재광의 안에서 파정했다.
침대 위에 상체를 뉘었던 재광은 몸을 한층 늘어뜨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등 뒤로 의주의 가슴이 닿는다.
의주는 어깨부터 시작해 목선을 타고 입술을 옮기더니 종래에는 재광의 고개를 제 쪽으로 틀어 입술을 맞댔다.
재광이 순순히 입을 벌리자 입꼬리가 흡족하게 올라간다. 의주는 팽팽하게 비틀린 목선을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재광의 입안을 헤집었다.
아무래도 고개를 비튼 자세 때문에 무리가 많이 가는 듯했다. 재광이 평소보다 빠르게 의주를 밀어냈다. 그러고 나서는 침대 위로 고개를 떨어뜨리며 가쁘게 숨을 몰아쉰다. 웅크린 등이 크게 오르내렸다.
“으, 흐으….”
의주는 그제야 재광의 안에서 빠져나왔다. 예민하게 달아오른 내벽을 긁으며 성기를 빼내자 희끄무레한 체액 일부가 딸려 나와 허벅지를 타고 진득하게 흘러내렸다.
잠시간 자신의 흔적을 눈에 담던 의주는 곧 축 늘어진 재광의 몸을 안아 들었다. 침대에 엎어진 상반신을 일으켜 등을 받치고, 반쯤 접힌 무릎 뒤에 팔을 밀어 넣자 제법 안정적인 자세가 나왔다.
저항 없는 재광을 침대에 반듯이 눕힌 의주는 당연한 수순으로 위에 올라탔다. 재광에게는 조금 전의 섹스가 꽤 곤혹스러웠을 텐데도 올려다보는 눈길은 여전히 말갛다. 의주는 축축한 눈가를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답지 않게 애틋한 손길이었다. 뺨을 부여잡고 엄지로 살살 눈가를 쓸더니 그새 또 입술을 문다. 다른 한 손으로는 가슴께를 크게 쓸어내리며 살갗을 자극했다.
오늘따라 의주는 여유가 없어 보였다. 그래도 이전에는 입을 맞추거나 몸을 어루만지며 체온을 끌어올리는 데 인색한 편은 아니었는데, 유독 급하게 구는 티가 났다.
“아, 잠시만… 하, 아아!”
이번에만 해도 그럤다. 재광이 침대에 등을 붙인 지 얼마 되지 않아 곧바로 살을 가르고 들어오는 거다. 재광의 아랫배가 경련하며 뒤가 급격히 조여들었다.
이미 숱한 자극으로 예민해진 내벽에 의주의 정액까지 묻어나는 상황이었다. 미끈하게 밀려 들어오는 성기의 느낌이 생소하면서도 그래서 더 자극이 컸다. 질끈 감긴 재광의 눈매 아래로 정갈한 속눈썹이 바들바들 떨렸다.
“광아, 나 봐봐.”
아까는 얼굴 따위 볼 필요도 없는 것처럼 굴더니, 막상 마주하고 나자 욕심이 나는 듯했다. 의주가 거칠게 움직이는 하체와는 달리 다정한 목소리로 말한다.
재광은 끙끙 앓으면서도 순순히 요구에 따라줬다.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바로 위에서 지켜보던 의주와 눈이 마주친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눈빛이었다. 꼭 닮은 눈매 안에 무언가가 들끓는데, 그게 순전한 욕정인지 다른 무언가인지는 구분할 길이 없었다. 재광은 의주가 쳐올리는 힘에 마냥 흔들리며 금세 다시 눈을 감았다.
“하으… 윽!”
다 녹은 젤에 체액까지 더해진 뒤에서는 질척거리다 못해 끈적이는 소리마저 났다. 일정한 박자로 뒤를 드나들던 의주가 일순간 크게 치받자 재광의 입술 새로 버거운 신음이 흘러나온다.
재광의 반응이 뜻하는 바를 모르지 않을 텐데도 의주는 꿋꿋했다. 봐주기는커녕 오히려 더 집요하게 군다. 큰 반동으로 쿡 쑤셔 넣은 성기를 살짝만 뺐다가 더 깊이까지 밀어 넣는 것이다. 같은 동작을 몇 번 반복하자 재광이 새된 소리를 내며 목을 비틀었다.
이 이상 더 깊이 들어올 수가 없을 듯한데도 의주는 조금씩 조금씩 더 몸을 가르고 저를 박아 넣었다. 진한 자극을 견디다 못한 재광이 등을 손톱으로 찍어 누르는데도 아랑곳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쯤이면 거의 자신을 새기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재광의 몸 어느 한구석에라도 또렷하게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은 사람처럼 안과 밖을 골고루 파고든다.
아래로는 온몸을 관통할 듯 힘으로 밀어붙이고, 위로는 집요하게 목을 물어뜯었다. 피라도 보려는 사람처럼 이를 세워 무는 통에 흥분과 고통의 경계가 모호할 정도였다.
“아…! 거기, 안, 돼요, 으읏, 응!”
하필이면 물어뜯는 곳이 목울대 바로 옆이었다. 당장 날이 밝고 밖에 나가면 지나가는 사람도 재광이 뜨거운 밤을 보냈음을 알아차릴 만한 부위다.
의주가 아무리 취했다고 해도 이건 다분히 의도적인 행동이었다. 두 사람 모두 술기운에 사고를 쳤을 때도 옷에 가려질 부분만 골라 자국을 남겼던 의주지 않나.
그러나 지금은 어떻게든 보이는 데다 흔적을 남기고 싶어 안달이 난 것 같았다. 안 된다고 말하는데도 고집스럽게 목덜미를 잘근잘근 씹어댄다.
결국에는 재광이 의주를 힘주어 밀어냈다. 그제야 떨어져 나간 그는 잔뜩 서운한 눈으로 재광을 내려다봤다.
“왜 안 돼?”
“보이는 데잖아요.”
“그러라고 하는 건데?”
“그니까 그러지 말라고요.”
“왜?”
의미 없이 빙빙 도는 대화였다. 말은 알아먹는데 말귀는 못 알아먹는 의주 때문에 갑갑해진 재광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의주도 마찬가지였다. 좀처럼 얘기가 통하지 않자 시무룩한 표정을 짓더니 재광이 재차 입을 열기 전에 서둘러 허리를 쳐올렸다.
“윽…! 으, 아흣!”
재광의 입술 새로 하지 말라는 얘기 대신 목을 긁는 거친 숨소리가 흘러나온다. 어떤 조짐도 없이 급격히 속도를 올려 고간을 부딪칠 때는 말뿐만이 아니라 사고도 정지됐다. 까맣게 물든 머릿속에 간헐적으로 불꽃이 튀었다.
횟수를 거듭할수록 안을 들쑤시는 힘이 점점 강해졌다. 가속이 붙는 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재광은 입술을 반쯤 벌리고서 의주의 팔뚝만 겨우 부여잡았다. 하얗게 질린 손끝이 부들부들 떨린다.
“갈 거, 읏… 갈 거 같, 아요, 흐읏!”
지레 엄살을 피우는 게 아니라는 건 의주도 잘 알았다. 내벽이 크게 일렁이며 꽉 조여드는 느낌만으로도 재광이 절정에 다다랐음을 알 수 있었으니까.
의주는 별다른 고민 없이 손을 뻗어 재광의 중심부를 쥐었다. 두어 번 위아래로 가볍게 흔들다가 이내는 손바닥 전체를 이용해 넓게 감싼다. 슬며시 힘을 줬다가 풀자 곧 압박감을 이기지 못한 성기에서 정액이 터져 나왔다.
섬세하게 귀두 끝을 훑어 체액을 모조리 빼낸 의주는 그제야 저도 배 속 깊숙이 몸을 밀어 넣었다. 재광의 뒤가 한계까지 팽팽하게 벌어질 만큼이었다.
의주는 막 사정을 마치고 할딱거리는 재광을 곧게 응시했다. 반쯤 초점 나간 눈동자가 더듬더듬 의주를 찾는다. 그리고 두 눈길이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순간, 의주가 재광의 배 속에 토정했다.
“하아… 아….”
몇 번을 겪어도 좀처럼 적응할 수 없는 기묘한 느낌이었다. 재광이 숨을 몰아쉬며 눈을 감자 의주가 곧장 그를 끌어안았다. 누가 보면 도망가려는 사람 붙들어놓는 줄 알 만큼 단단히 몸을 옭아맨다.
이젠 왜 이러는지 이유를 찾는 것도 무리였다. 재광은 그저 지쳐서 숨만 색색 내쉬었다. 제 위로 몸을 겹친 의주의 무게가 상당했으나 치워낼 엄두도 안 났다. 무거운 이불이라도 덮은 셈 치고 내버려 두는 수밖에.
“흐… 그만, 하, 그만요. 아, 읏!”
그러나 의주는 지치지도 않는 듯했다. 숨 고를 틈 잠깐 주는 것도 아량이었는지, 숨소리가 잦아들기 무섭게 또다시 안을 긁어댄다.
기겁한 재광이 최선을 다해 바르작거려도 소용없었다. 세상 다정하게 입술을 포갠 의주는 거세게 뒤를 몰아붙였다.
????
창문으로 어슴푸레한 빛이 넘어오는 새벽. 침대에 늘어진 재광은 멍하니 천장만 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의주에게 시달리다가 간신히 끝이 난 차였다. 까무룩 잠이 들어버린 의주처럼 재광 또한 금방이라도 졸도할 듯한 피로를 느꼈으나 어쩐지 잠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눈만 끔뻑거리고 있는데, 의주의 목소리가 불쑥 머릿속에 울린다.
- 너는 내가 얼마나 참고 있는지를 좀 알아야 돼.
이직을 하더라도 이 관계를 이어가자는 요구에 침묵으로 일관하자 꺼낸 얘기였다. 뭘 참고 있느냐는 물음에는 비밀이라며 황당한 대답을 내놓았었는데….
‘참고 있는 게 성욕이었냐고.’
오늘에야 그 답을 찾은 것 같았다. 의주는 몸을 섞을 때마다 재광의 체력에 맞춰주고 있었던 거다.
날을 꼬박 새울 수도 있는 사람이 금방 나가떨어지는 파트너 때문에 깨작깨작 욕구를 풀었으니 얼마나 감질났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술에 취해 이성을 잃고 밤새 달려든 것도 이해가 됐다.
하여간, 순 멋대로 굴면서도 이상한 데서 배려심을 발휘하는 인간이었다.
의식의 흐름대로 생각을 이어가던 재광은 문득 옆으로 몸을 돌렸다. 여태 의주가 재광 쪽으로 누워 있던 탓에 잠든 모습이 정면으로 보인다.
벌써 석 달을 꼬박 본 얼굴인데도 아직까지 신기했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사이에서 어떻게 이런 판박이 같은 생김새가 나왔을까. 심지어는 잠들어 눈을 감고 있는데도 이목구비가 비슷했다.
“….”
“….”
새삼스럽게 닮은 외모를 두고 감탄하던 찰나, 곤히 자던 의주가 불쑥 눈을 떴다. 잠기운인지 술기운인지, 여전히 흐릿한 눈빛이었다.
순식간에 몰래 훔쳐본 꼴이 된 재광은 짐짓 당황했다. 그러나 상대방이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아 잠자코 눈치만 살피던 차였다. 이불 속에서 꿈틀거리던 의주는 곧 팔을 뻗어 재광을 꽉 끌어안았다.
생각지 못한 행동이라 밀어낼 새도 없었다. 재광은 품 안에서 멀뚱멀뚱 눈동자를 굴렸다.
“아… 좋아.”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의주의 가슴이 얕게 진동한다.
품에 갇힌 재광의 시야로는 제대로 볼 수 없었으나, 분명 의주는 웃고 있었다. 장난스럽게 꾸며낸 미소가 아니라 진심으로. 그리고 그 미소는 재광의 기억 속 한 장면과 겹쳐졌다.
- 깼어?
세 번의 사정 끝에 기절하듯 잠이 들었던 그 날의 일이다. 막 눈을 떴을 때, 곁에 앉아 있던 의주가 재광을 내려다보며 그렇게 말했었다.
그때 입가에 걸친 미소를 보고 묘한 기분에 휩싸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너무 자상하고 따스해서. 그래서 혼자 괜히 혼란스러워했더랬다.
그런데 그때 왜 혼란스러웠는지를 떠올려보면, 지금의 상황 또한 주정이나 잠꼬대로 치부하기가 어려워진다.
- 나는 너 좋아.
의주는 그때도 재광에게 좋다는 말을 했었다. 이미 지난 기억이라 조작됐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쩐지 장난기를 뺀 말투가 서로 일치하는 것만 같았다.
괜한 과거를 들춰 혼란만 떠안은 재광은 혹여 의주가 깰까, 더 열심히 숨을 죽였다.
어쩌면 의주가 참고 있는 게 욕정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그런 추측이 어렴풋이 재광의 무의식에 똬리를 트는 순간이었다.
????
감은 눈앞은 밝고, 주변은 어수선했다. 동이 틀 무렵에야 잠들었던 재광은 간신히 눈두덩을 들어 올렸다.
방은 불을 켜지 않아도 환했다. 의주는 창밖에서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옷을 챙겨 입는 중이었다. 검은색 스웨터 사이로 막 고개를 빼낸 그는 거칠게 도리질을 치며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어? 일어났어?”
손끝으로 머리칼을 마저 빗어 내릴 때가 되어서야 재광과 눈이 마주쳤다. 슬며시 미소를 띤 의주의 발길이 대번에 침대로 향한다. 그는 매트리스 끝에 걸터앉아 재광의 볼을 쓰다듬었다.
밀가루 반죽을 치대듯 힘이 들어갔지만, 그렇다고 마냥 거칠지만도 않은 손길이었다. 얼굴이 반쯤 뭉개지는데도 가만히 있던 재광은 뺨에 닿은 온기가 떨어져 나간 다음에야 입을 열었다.
“출근해요?”
잠든 지 얼마 안 돼 깨어난 터라 졸음이 잔뜩 묻은 목소리였다. 고작 네 글자 되는 질문이건만 그 끝이 갈라진 음성으로 흘러나왔다. 의주는 뺨에서 떨어져 나간 손으로 이번에는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응. 나 없으면 회사 안 굴러가잖아.”
퍽 자상한 말투로, 그러한 표정으로 해대는 자기과시에 재광이 눈을 흘겼다. 그러고는 무거운 눈꺼풀이 금방이라도 닫히려는 걸 버텨내며 다시 한번 물었다.
“저 좀만 더 자다 가도 돼요?”
“응, 돼. 완전 돼.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과일도 먹고 TV도 보고 게임도 해. 나 퇴근할 때까지 계속 놀고 있어.”
의주는 잔잔한 미소를 띠던 이전과 달리 눈을 반짝거리며 대꾸했다.
흔쾌함을 뛰어넘어 기대하는 눈치였다. 꼭 그렇게 하라고 이르는 듯한 말투에 재광이 나른하게 웃음을 흘렸다. 잠기운이 다 가시지 않은 중에도 이 상황이 좀 웃겼다.
그렇잖은가. 합격 소식을 같이 확인했을 때는 고생했다며 머리를 쓰다듬더니 정작 퇴사 날에는 가지 말라고 껴안고, 앞으로도 당연히 만나는 거라 못 박더니 이제는 집에도 가지 말고 있으라 한다.
상반된 행동이 우스워 헛웃음을 친 재광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 앉았다. 누운 재광을 내려다보던 의주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따라 올라왔다.
“어제 기억은 나요?”
아마 저라면 여태 쿨하게 굴던 태도와 달리 질척거린 게 부끄러울 듯해 묻는 말이었다. 아무리 자기애 충만한 의주라 해도 구질구질한 모습을 보인 건 수치스러울 것 같은데, 아무렇지 않게 저를 대하자 문득 궁금해진 거다.
“당연하지. 난 살면서 필름 끊겨본 적 없어.”
하지만 의주는 떳떳했다. 똑바로 눈을 맞추며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쭉 펴 보이기까지 한다. 재광은 괜스레 눈만 빠르게 깜빡거리다가 도로 시선을 맞췄다.
“그럼 왜 그런 거예요?”
“뭐가?”
“어제 저한테 막 가지 말라 그랬잖아요.”
“응.”
“합격했을 때도 축하해주고 그랬으면서 어제는 갑자기 왜 그랬냐고요.”
의주는 뭐 그런 걸 묻느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추태를 부린 게 민망해서가 아니라, 그 뜻을 굳이 얘기해야지만 아는 건가 싶은 안색이었다.
“안 갔으면 좋겠으니까. 취중진담 뭐 그런 거지.”
“여태까지는 그런 말 한 적 없잖아요. 붙으면 당연히 가는 거라고 했으면서.”
“그래야 멋있잖아.”
즉, 재광의 이직이 아쉬워 죽겠는데 아닌 척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할 말을 잃은 재광은 허, 하고 기가 찬 숨만 내뱉었다. 여전히 부끄러운 기색 없는 의주는 재광의 이마에 짧게 입 맞춘 뒤 말했다.
“어제는 뭐… 멋은 없어도 인간미는 있었잖아. 그치.”
재광은 대답하지 않았다. 인간미는 개뿔, 짐승이었지 않냐고 톡 쏴붙이고 싶은 맘이 있었지만 그 얘기를 꺼내 봐야 본전도 못 찾을 것 같아 관두기로 했다.
그러고 나니 할 말이 없어 잠자코 앉아만 있었다. 침묵을 틈탄 의주가 아쉬운 감정을 한가득 담아 재광의 코끝에, 뺨에 입술을 붙였다 뗀다.
가만두면 물 흐르듯 입술이 맞물릴 터였다. 그때는 살갗만 대는 것으로 끝나지도 않을 거고. 결국 멀뚱히 앉아 있던 재광이 의주의 어깨를 슬며시 밀었다.
“출근한다면서요. 늦어요.”
“아 섭섭하게.”
“원래 퇴사자는 출근하는 사람 볼 때 제일 행복한 거거든요. 빨리 가요, 더 자게.”
의주는 “참 나” 하면서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었다. 그러면서도 더 자겠다는 재광의 말에는 손수 어깨를 눌러 눕혔다. 흘러내린 이불을 가슴께까지 꼼꼼하게 끌어올려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일어나면 연락해.”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이마 언저리를 쓰다듬고 지나가는 손길이 부드러웠다.
의주는 이불 위로 드러난 목덜미를 보며 지그시 웃고는 이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광이 벌써 잠에 빠져드는 목소리로 “네” 하며 눈을 감았다.
????
결과적으로는 의주의 뜻대로 됐다. 아침에 다시 잠든 재광은 오후가 다 되어서야 온전히 눈을 떴고, 외출할 만한 행색을 갖추고 나자 의주의 퇴근 시간이 가까워졌던 것이다.
퇴근이 늦을 것 같냐는 재광의 메시지에 의주는 냅다 노트북을 들고 달려왔다. 일이 수두룩 남은 게 훤히 보이는데도 여유를 부리며 손수 저녁상을 봐주기까지 했다. 그렇게까지 하는데 매정하게 돌아서기도 뭐해 재광도 더 눌러앉았다 오는 길이었다.
“형이 뭐라고 하면 그냥 짐 싸서 우리 집으로 와.”
의주의 차는 재광이 사는 아파트 단지에 서 있었다. 조수석 방향으로 몸을 튼 그는 재광의 목에 두른 머플러를 추켜올려 정돈했다.
어젯밤 신명나게 물고 뜯은 자국을 감추기 위한 임시방편이었다. 파스를 붙이기도 모호한 위치라 의주가 한 번도 착용 안 했다는 명품 신상 머플러가 재광의 목에 걸리게 됐다.
의주는 마네킹에 전시라도 하듯 주름 하나하나 매만져 그럴싸한 모양을 만들어냈다. 그러고 나서야 흡족하게 손을 떼자 어정쩡한 자세로 목을 내주고 있던 재광이 뒤늦은 대꾸를 한다.
“가면요.”
“같이 사는 거지. 우리 집이 너네 회사랑 더 가까워.”
“얼씨구.”
“진심인데.”
“그러시겠죠.”
대놓고 귓등으로 흘리는데도 의주는 아쉬운 내색 하나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심드렁한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상한 말투를 꺼낸다.
“아, 다음 주에 바로 연수랬나?”
“네. 월요일부터요. 2주간.”
“퇴사해놓고 며칠 쉬지도 못하겠네. 그거 어차피 회사 뽕 넣으러 가는 거니까 편하게 갔다 와. 연락하고.”
재광은 별다른 표정 없이 고개를 두어 번 끄덕거리는 게 다였다.
이만하면 장장 이틀을 부대낀 뒤의 작별 인사로 충분했다. 조수석 문손잡이를 잡은 재광이 “갈게요” 하자 의주가 손을 흔든다. 재광은 재차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전하고는 차에서 내렸다.
재광의 생각에는 아무리 첫 팀원의 퇴사가 아쉽다고 해도 엄청난 호의였다. 저녁 상차림에 뒷정리, 거기다 집에 직접 태워다 주기까지. 그는 단지를 빠져나가는 차 뒤꽁무니를 가만히 쳐다보다 이내 건물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극진한 대우를 받는 것도 이제 끝이다. 아마 이대로 집에 들어가면 외박이 잦다, 팔자가 좋네 어쩌네. 민광이 또 한바탕 난리를 쳐댈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복도 저 끝에서부터 집에 불이 켜진 게 보인다. 재광이 의주의 집에서 식사 대접을 받고 여기까지 오는 동안 민광도 퇴근을 한 것이다.
“…다녀왔습니다.”
재광은 냅다 방으로 들어가버릴까 하다가 기척을 했다. 막 욕실로 들어가려던 민광이 돌아봤을 때는 저도 모르게 의주의 머플러를 꼼꼼하게 올려 맸다.
“안 들어오면 연락 좀 하지? 이제 대기업 간다고 눈에 뵈는 게 없냐?”
“회식한다고 했잖아.”
“그걸 핑계라고.”
쯧, 혀를 찬 민광은 못마땅하게 눈을 흘기고는 욕실로 들어섰다.
이만하면 동생 못 잡아먹어 안달인 민광치고 양호한 처사였다. 세기의 사랑이 깨진 듯 폐인 생활을 하다가 근래 재결합을 해 세상만사가 아름다워 보이는 모양이었다. 재광은 굳게 닫힌 욕실 문만 한번 쳐다보고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