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Break Points 上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앞으로 더 정신없어질 텐데, 그래도 기반 잘 다져놓으면 그다음이 편할 거니까요. 다들 힘내봅시다.”
전체 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새 앱이 주요 기능 테스트를 거치고 나자 각 부서에 할당되는 업무도 저절로 많아졌다. 이야기를 마친 선호는 이만 회의를 마무리했다.
회의실을 채우던 직원들이 우르르 일어나 밖으로 나간다. 그 사이에는 재광도 있었다. 그는 삐뚤게 튀어나온 의자들을 올바르게 정리하며 차근차근 바깥쪽으로 향했다.
“야, 광.”
이제 막 문밖으로 나설 무렵이었다. 가볍게 부르는 목소리와 달리 묵직한 무게가 몸을 누른다. 의주가 재광의 어깨 위로 팔을 올려놓은 탓이다. 긴장감 없이 늘어진 팔이 재광의 가슴께까지 길게 내려왔다.
남아서 교실 정리하는 주번도 아니고. 조금 전까지 같은 회의실에 있었으면서 굳이 기다린 모양이었다. 1분도 안 걸릴 거리에 딱 붙은 자리가 있는데도 말이다.
재광은 멀뚱히 쳐다만 봤다. 영문 모를 행동에도 의아해하거나 미심쩍어하는 기미가 없었다. 딱 부름에 응하는 정도의 리액션이다. 재광의 어깨로 무게중심을 옮긴 의주는 곧 본론을 꺼냈다.
“커피나 한잔하러 가자.”
당장 오늘부터 일찍 퇴근하기는 글렀으니 미리 카페인 충전이나 하자는 뉘앙스였다. 재광은 평소와 같은 무표정한(조금은 뚱한) 낯으로 짧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냥 카드만 쥐여주고 사오라 명해도 될 것을 뭘 굳이 같이 가나, 싶기는 해도 대단히 난감한 요구는 아니니 그러자 하고 마는 것이다.
“….”
그런데 어째, 축 늘어져 있던 손이 점차 올라와 재광의 팔뚝을 주무른다.
바빠질 일정을 격려하는 차원이 아니라는 것쯤은 재광도 잘 알았다. 느릿하게, 그래서 더 진득한 손길을 느낀 재광은 냉큼 눈을 흘겼다. 그리고 당장 떼어내려 의주의 손을 잡을 때였다.
“여 팀장님!”
선호가 의주를 부른다.
몇 발자국 앞서 걷던 그는 무심결에 뒤를 돌았다가 사색이 됐다. 얼마나 놀랐는지 가던 걸음까지 돌려 한달음에 다가온다. 의주 옆에 선 대표가 안면근육을 바들바들 떨며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시간 되면 차라도 한잔하실까요?”
생긋 웃는 얼굴로 상냥하게 말하고는 있지만 ‘당장 따라와 새끼야’로 들리는 권유였다. 그렇게 말한 선호의 눈동자는 재광의 팔뚝을 쥔 손을 빠르게 훑었다. 그런 뒤에는 약간의 강제성을 담아 눈썹을 달싹거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강제한다 해서 순순히 들을 의주냐, 하면 당연히 아니다. 의주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은 표정으로 성의 없이 대꾸했다.
“싫은데요.”
“야.”
“저희 팀원이랑 차 말고 더 맛있는 커피 마시고 오겠습니다, 대표님.”
그러더니 여태 어설프게 저를 붙들고 있던 재광의 손을 보란 듯 잡는다.
갑작스러운 선호의 부름에 재광은 자신이 의주의 손을 붙잡았다는 것마저도 잊고 있던 차였다. 덥석 감기는 체온에 화들짝 놀라 손을 빼내는 행동이 급했다. 덕분에 선호의 표정이 한층 경악스러워진다.
“할 말 없으시면 이만?”
그러거나 말거나. 홀로 태평한 의주는 쓸데없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때까지 옆에 철석 붙어있던 재광도 얼떨결에 같이 목례를 하고 마저 발을 뗐다.
결국에는 선호만 제자리에 남게 됐다. 제가 방금 뭘 본 건가 의심하는 안색이었다. 그는 오도카니 서서 천천히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만 허망하게 응시했다.
????
커피 한잔 사 오는 동안 의주의 메신저는 불이 났다. 카페에 도착해 주문을 하고, 음료가 나오길 기다리는 잠깐 사이에도 워치에서 쉼 없이 진동이 울리는 걸 꿋꿋이 무시하던 차였다. 자리에 막 돌아와 앉은 의주는 감흥 없이 메신저 창을 켰다.
민선호
미친놈아 아까 그거 뭐야?
왜 손을 잡아?
너 설마 재광 씨랑 사귀냐? 오후 3:43
암만 그래도 사내 연애는 아니지 않냐?
볼 거 다 알아. 뭐라고 대답이라도 해 좀.
진짜 사귀는 거야? 아니지? 오후 3:51
아니 근데 사귀는 거 아니면 그것도 이상하잖아. 오후 3:54
아 진짜 뭐냐고 여의주 미친 새끼야 오후 3:55
선호가 직원으로서의 재광을 꽤 흡족해한다는 사실은 의주도 잘 아는 바였다. 그래서인지 유달리 반응이 격하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긴 했다. 지금으로부터 반년 전쯤, 연애 때문에 난장을 친 직원들이 있었으니까.
평소에는 묵묵히 맡은 일 잘하는 이들이었고, 둘이 사귄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없을 만큼 철저한 비밀 연애였다. 그런데 모종의 이유로 대판 싸우고는 폭주하기 시작하더니, 끝내는 둘 다 퇴사했다.
서로 엿 먹이겠다고 기 싸움을 해대는 통에 눈치를 보느라 다른 직원들도 고생깨나 했더랬다. 심지어 같은 이유로 인수인계 파일을 개떡같이 만들어놔 퇴사 후까지 수습하느라 진을 뺀 사건이었다.
함께 겪은 일이다 보니 의주도 선호가 이러는 이유를 전혀 모르진 않았다. 어나더 레벨 여의주 님께서 평범하디 평범한 부하 직원과 꽤 원활히 일하고 있지 않던가.
선호의 관점에서는 그게 또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었다. 오로지 저 잘난 것만 중요한 의주를 묵묵히 받아주는 귀한 인재. 그게 재광인 거다.
기대보다 걱정이 더 컸던 개발팀 구인을 무사히 해결했다고 생각하던 찰나, 잘 지내는 줄 알았던 두 사람이 사적인 감정으로 엮여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게 되면 그로 인한 파장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가 없을 터였다.
단순히는 새로 사람을 뽑는 것 정도겠지만 뉴페이스가 의주를 견뎌줄 거라는. 혹은 천재 여의주 님이 다른 직원을 성에 차 할 거라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새로운 앱 개발에 열을 올리는 시기라 팀원 변동은 적잖이 큰 타격이었다.
회사의 상황도, 선호가 우려하는 이유도 익히 잘 아는 의주지만 그는 여전히 천하태평이었다. 돔리드가 꽉 차도록 휘핑크림을 쌓아 올린 음료수를 쪽 빤다.
“뭐 대단한 거 봤다고 호들갑이야.”
다디단 맛을 음미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린 그는 그제야 키보드 위에 손을 얹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금세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민선호
이거만 딱 말해.
사귀는 거 맞아 아니야. 오후 4:03
사귀자고 했는데 안 넘어오네. 오후 4:05
민선호
고백했었다고??? 벌써 차였어???????? 오후 4:05
그럼 더 그러면 안 되지 또라이야!!!!! 오후 4:06
고백했다 차여놓고도 정신을 못 차리고 몸을 지분대며 플러팅하는 상사라니. 아마 선호의 머릿속에서는 이 상황에서도 묵묵히 버티는 재광이 더 안쓰럽고 대단해 보일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매사에 당당한 의주라도 이번만큼은 자세한 설명을 덧붙일 용의가 없었다. 경악한 심정을 드러내듯 의미 없는 날타를 보내는 메시지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그는 또다시 빨대만 쪽 빨았다.
“아, 맞다.”
의주가 너 당장 들어와서 얘기 좀 하자는 선호의 메시지를 무시하는 사이, 재광은 허둥지둥 인터넷 창을 켰다. 의주가 사준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입에 댈 틈도 없이 바쁜 동작이었다.
회의 때까지만 해도 기억하고 있던 2차 합격 발표를 깜빡한 참이었다. 갑작스럽게 의주에게 이끌려 카페에 다녀온 다음에야 기억났다. 득달같이 합격자 조회 사이트에 접속한 재광은 빠르게 자신의 정보를 조회했다.
1차 서류 전형 때 한없이 미적대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게, 자포자기였던 그때와 달리 이번에는 일말의 기대가 있었다.
아직 커피에 입을 대기도 전이건만 재광의 가슴이 콩닥콩닥 뛴다. 합격 여부 조회 버튼을 누를 때는 입술이 바싹 마를 정도로 긴장이 됐다.
김재광 님은 직무적성검사에 합격하셨습니다.
‘예스!’
속으로 쾌재를 부르는 재광의 표정은 덤덤했다. 지난번이야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라 어리숙하게 티를 내고 말았지만, 이번에는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었기에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기가 쉬웠다.
그렇다고 해서 붙을 거라 자신만만했던 건 아니다. 하필이면 시험을 대비하는 동안 회사가 바빠져 물리적 시간이 턱없이 모자라지 않았나. 그래서 더 기를 쓰고 체력을 갈아가며 준비했었다.
그런데 합격이라니. 이보다 더 값진 결과는 또 없을 터였다. 한결 밝은 기분이 된 재광은 이 기쁨을 나누려 부지런히 메신저 창을 켰다.
대박! 나 2차 합격했어. 오후 4:15
유연우
진짜? ㅊㅋㅊㅋ 오후 4:16
도원이 형
안 그래도 궁금했는데 잘됐네. 진짜 축하해! 좀만 더 힘내! 오후 4:16
송민주
헐 미쳣닼ㅋㅋㅋ 야 면접 뿌시고 와 오후 4:17
다들 궁금하지만 조심스러워 묻지 못한 분위기였다. 재광이 인적성 합격 소식을 전하자 기다렸다는 듯 축하 메시지들이 날아든다.
많이 바빴는데 준비하느라 고생 많았다, 이제 면접 준비해야지 않냐, 3차까지 잘 되면 좋겠다….
한동안은 채팅창에 격려와 응원의 말들이 오갔다. 재광은 여전히 얼떨떨한 기분으로 합격자 조회 창과 대학 동기들의 채팅창을 번갈아 봤다.
현실적인 이야기가 대두된 것은 조금 뒤였다.
유연우
근데 아직 인턴인데 연차 그런 거 낼 수 있는 거야? 오후 4:43
도원이 형
아 면접 평일이겠구나. 인턴이어도 한 달 되면 1개씩 생길걸? 오후 4:45
송민주
안 빼줘도 어떡해. 째고서라도 무조건 가야지. 야 김재광. 수습은 그다음이다. 오후 4:46
인적성은 다행히 주말에 맞물려 어떤 내색도 하지 않고 조용히 치를 수 있었다. 하지만 면접은 이전 데이터로 보건대 늘 평일에 있어왔다. 이번 분기에도 아마 다르지 않을 터였다. 재광은 곰곰이 기억을 더듬었다.
휴무와 관련해서는 계약서를 쓰던 당시에 언뜻 설명을 듣기는 했다. 선호도 도원이 말한 내용을 언급했던 것 같다. 그동안 회사의 구성원으로서 지켜봤을 때도 누군가의 연차에 크게 눈치를 주거나 반려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고로, 인턴이 휴가를 내는 건 내심 눈치가 보이긴 해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 같은데….
재광의 고개가 문득 옆으로 돌아간다. 아예 돔리드를 벗겨내고 산처럼 쌓은 휘핑크림을 빨대로 떠먹는 의주가 시야에 잡힌다.
‘저 인간만 조용히 넘어가면 되는데.’
아직 면접 일정이 공지된 건 아니지만 빠르면 2주, 늦어야 3주 안으로 진행될 게 뻔했다. 하필이면 당장 오늘부터 바빠진 처지라 연차니 뭐니 결재해달라 내밀기가 더 민망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의주라면 되지도 않는 이유로 연차를 반려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게 문제다. CTO님이 밤낮없이 일하는데 인턴 나부랭이가 어딜 쉬냐고 해도, 혼자 일하기 심심하니까 나오라고 해도. 화자가 여의주라면 다 납득이 되는 거다.
“그새 또 내가 보고 싶어가지고 그렇게 쳐다봐?”
불쑥 치미는 불안감에 입술을 뜯으며 의주를 주시하자, 시선을 알아차린 그가 득달같이 그런다.
재광은 조금 전까지 치솟던 걱정을 접어두고 정색했다. 그러자 설핏 웃은 의주가 찡긋, 윙크를 날린다.
굳이 반응하지 않은 재광은 도로 제 모니터를 바라봤다.
????
화려한 마블링을 자랑하는 생고기가 불판 위에 올라가기 무섭게 치익, 하고 달라붙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맑은 빨강을 띠던 살코기는 금세 진한 빛깔로 익었다. 타이밍 좋게 뒤집자 선명하게 드러난 결 사이로 육즙이 촉촉하게 배어 나왔다.
“야, 지금이다. 알아서 집어 먹어라.”
막 집게를 내려놓으며 말한 이는 선호였다.
새로운 앱 개발에 박차를 가하며 유독 고생하는 팀장들을 격려하는 자리였다. 고기 한 조각을 입에 넣은 의주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거린다.
별말은 않지만 제법 흡족한 모양새였다. 슬쩍 눈을 흘긴 선호는 타박하듯 입을 열었다.
“됐냐, 이 새끼야?”
사실은 친구라는 이름에 묻어가며 삼겹살로 때우려 했었다. 그러나 “돼지는 점심에 먹는 제육으로도 충분하다”는 의주의 성화에 결국 꽃등심으로 메뉴를 업그레이드 했다.
“이게 대접이지. 어디서 여의주 님의 노고를 삼겹살로 퉁치려고.”
덕분에 지갑 털리는 단위가 달라진 선호만 속이 쓰리게 됐다. 그는 뒤늦게 잘 구운 고기 한 조각을 집어 먹으며 입안에서 살살 녹는 꽃등심을 음미했다.
“맛있긴 하네.”
제 돈 주고 사 먹는 거긴 해도 값어치는 제대로 하는 맛이었다.
그러나 마음 놓고 음미할 시간은 오래 주어지지 않았다. 앞으로 더 바빠질 것을 고려해 미리 몸보신이라도 해주려고 왔다지만, 앞으로는 앞으로고 지금 당장도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다.
“저번에 내가 말했던 데는 어떻게 되고 있어?”
고기 한 점을 삼키기 무섭게 선호가 물었다. 구운 버섯을 갓 집어 든 마케팅 팀장이 앞접시 위에서 젓가락질을 멈추고 대답했다.
“뭐, 그 테마 모텔?”
“어.”
“네 말대로 그 근처에서는 꽤 유명한가 보더라. 근데 후기 편차가 좀 있어서 가서 본 다음에 컨택해야 될 듯?”
“아 그래?”
“들어보니까 이전에 예약 서비스 입점했다가 빠진 게 수수료 때문이래. 어차피 장사 잘되니까 굳이 수수료 떼일 필요 없었던 거겠지. 가서 한번 보고, 괜찮으면 그때부터 제대로 얘기 꺼내 봐야지 뭐.”
요즘 개발이 한창인 신규 앱은 낭만인을 지금까지 이끌어온 ‘데이팅’의 시리즈, ‘나이팅’이었다. 데이팅이 말 그대로 낮에, 화사한 분위기에서 연령대 구분 없이 즐기기 좋은 곳들을 모아놓았다면 나이팅은 그 반대인 것이다.
실제로 입점할 가게들도 콘셉트에 맞춰 컨택하고 있었다. 분위기 좋게 술 한잔 기울이기 좋은 펍이나, 디너 메뉴를 주력으로 하는 식당들. 야경이 좋은 드라이브 코스, 거기에 숙박업소까지.
데이팅에 비해 다루는 업종이 다양해진 건 물론이고, 수도권부터 점차 서비스 권역을 넓혀가던 이전과 달리 전국망을 갖춘 뒤 런칭하는 게 목표라 요즘은 다들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 모든 정보를 모아 앱으로 구현해야 하는 의주도 당연히 바빴다. 다만, 코드와 씨름하느라 외근이 잦은 직원들의 사정까지는 속속들이 꿰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뭐야, 모텔도 직접 가?”
윤기 좔좔 흐르는 소고기를 꿀떡 삼키고 의아하게 물은 것도 그 때문이다. 앱의 콘셉트에 맞춰 작업을 진행하고는 있지만 거기까지 실제로 가보리라곤 생각을 못 했던 거다. 의주의 눈동자에 순간 이채가 돌았다.
“다 그런 건 아니고, 차별화가 될 것 같다 싶으면 신경 쓰는 거지.”
마케팅 팀장이 언제나와 같은 차분한 목소리로 답을 줬다. 이어 푸념과 같은 어조가 뒤따랐다.
“지금도 다 정신없이 바쁜데 어떻게 다 가보냐? 방금 말한 데만 해도 시간 빼기 빠듯하고만.”
직함은 편의상 마케팅 팀장으로 불리지만, 실상 영업의 경계를 넘나들며 총괄하고 있는 그는 피곤한 내색을 했다. 잠자코 답변을 듣던 의주가 눈을 희번덕거린다.
“그럼 내가 가줄게, 거기.”
누가 기회를 뺏기라도 하는 것처럼 재빠른 대꾸였다. 반주 삼아 주문한 복분자주를 한 모금 들이켠 선호가 미간을 찌푸렸다.
“네가 거길 왜? 너는 개발이나 해.”
“그니까.”
“뭐?”
“다 시간 없다며. 근데 코딩은 노트북만 있으면 되니까 어디서 하든 상관없잖아.”
제 업무가 아니면 관심도 없는 의주가 회사 사정을 고려해 발 벗고 나서준다면 당연히 고마운 일이지만. 어쩐지 선호의 얼굴에는 경계가 진하게 드러났다.
무슨 의중으로 이러는지를 모르는 탓이다. 오로지 자기중심, 제 관심사가 아닌 이상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인간의 갑작스러운 호의는 의심만 더 불러일으켰다.
“너 없으면 재광 씨는 어떻게 일하라고.”
“당연히 같이 가야지.”
조금의 공백도 없이 튀어나오는 대답에는 선호의 만면에 아차 싶은 기색이 가득 퍼졌다.
“너 말 잘 꺼냈다. 야, 너 진짜 재광 씨 가만 냅둬라.”
“내가 뭘?”
“왜, 뭐 했어?”
먼저 반박한 이는 의주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말투로 되물은 사람은 마케팅 팀장이었다. 선호는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에 제가 다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야, 이 새끼 막 지 부하 직원한테 들러붙어서 수작을 부리더라니까?”
“수작이라니.”
“그게 수작이지 뭐야?”
사업을 함께할 만큼 친한 사이다 보니 두 사람은 의주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선호는 재광을 향한 의주의 손길을 더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선호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던 마케팅 팀장은 별말 하지는 않았다. 다만 의주를 쳐다볼 뿐이었다. 세상에 둘도 없는 쓰레기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야, 그렇게 보지 마라.”
“….”
“너희는 재광이한테 그러면 안 되지. 근데 나랑 우리 광 사이에는 라포 형성이 됐다고. 단순히 상사와 부하직원 사이가 아니라니까. 알아들어?”
“너 이미 차였다며!”
쓰레기 보듯 하던 눈길은 이제 경악이 됐다.
갓 사회생활을 시작한 인턴에게 고백해 회사생활을 불편하게 만들어놓고, 깔끔하게 물러서기는커녕 구질구질하게 치근대기까지 하는 찌질이가 제 친구라니. 사람 다시 봤다는 듯한 마음의 소리가 똑똑히 읽혔다.
“아, 진짜 이것들이.”
언제 어디서 무슨 짓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의주라지만 이번만큼은 답답해 가슴을 치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다. 됐다. 늬들이 뭘 알겠냐.”
그러나 당장이라도 해명할 듯하던 의주는 곧 말을 돌렸다.
자신의 사회적 체면 때문이 아니었다. 의주 본인이야 저와 꼭 닮은 부하 직원을 섹스 파트너로 삼았다고 솔직히 터놔도 저 미친놈이 기어이, 하고 넘어갈 테니까.
하지만 재광의 입장은 다를 터였다. 제가 입 밖으로 둘의 사이를 폭로하는 순간부터 이들이 재광을 보는 시선이 달라질 것 아닌가. 영문도 모르고 묘하게 바뀐 태도를 맞닥뜨리는 재광은 퍽 당황스러울 터였다.
결국 의주는 마음을 다스리는 것처럼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한편으로는 파트너를 위해 체면을 구기는 자신의 배려심에 우쭐한 듯도 보였다.
“두 분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끈끈하고 사이좋으니까 걱정 마세요들.”
“사이가 좋다 치더라도 다른 직원들 보면 놀라니까 회사에서 그러지 마라, 진짜.”
선호는 끝까지 당부를 잊지 않았으나 의주는 더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귀담아듣는 시늉도 하지 않고 고기만 홀랑 집어 먹는다.
‘어후, 저 화상.’
제 말에 신경도 안 쓰는 의주를 노려보던 선호는 괜히 복분자주만 한 잔 더 비웠다.
????
아무튼 그 화상, 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살 팔자는 타고났다고. 선호는 생각했다.
“영업 쪽이랑도 얘기해 봤는데 일정 조율이 영 안 되나 봐. 나도 마찬가지고.”
마케팅 팀장이 물고 온 소식 때문이다. 낭만인에서 눈독 들이던 테마 모텔에 다른 업체가 먼저 접촉을 했단다.
그쪽이 마음에 들면 그쪽이랑 하라지 뭐,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예약 앱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인기 숙박업소라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독점으로 예약 서비스를 시행했을 때 따라올 유저들을 놓칠 수가 없는 거다. 그런 독보적 업체를 유치했을 때 따라오는 홍보 효과 또한.
그렇다고 소문만 듣고 덜컥 제안서를 내밀기는 뭐했다. 마케팅 팀장이 말했던 것처럼 이용자들의 후기가 갈리는 부분이 있을뿐더러, 테마 모텔인 만큼 콘셉트를 잡아놓은 방 외에는 정보가 별로 없는 탓이다.
다량의 정보와 높은 품질. 두 마리 토끼를 바라는 선호로서는 그렇기에 더욱 확인 절차가 필요했다. 입점만 된다면 메인 상품이 될 텐데, 절대 소홀할 수 없었다.
어쩌다 보니 일정이 꼬여 지금까지 밀리게 됐다만.
“어떡할까?”
“제안서 먼저 보내.”
“답사 없이?”
“시간 없으니까 동시에라도 해야지.”
선호가 명확한 대안 없이 지시만 내리자 마케팅 팀장이 의아한 표정을 했다. 그러나 한시가 급한 상황. 그는 이내 알겠다며 대표실을 나섰다.
선호는 문이 닫히기 무섭게 메신저부터 켰다. 간단하게 야, 하고 전송하자 답장이 빠르게 돌아온다.
여의주
뭐 오전 11:17
어쩔 수 없었다. 다들 바빠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판국에 먼저 출장 의사를 밝힌 사람이 있으니 그 기회를 이용하는 수밖에.
물론 소규모 회사에서는 부서를 넘나들며 도움을 주고받는 경우가 왕왕 있었지만, 철저히 계약서로 얽힌 직원들에게 그런 부담을 넘겨주고 싶지는 않았다. 귀찮고 번거로운 일인 만큼 계약 이상으로 연관된 인물에게 맡기는 게 옳다는 생각이었다.
- 너 없으면 재광 씨는 어떻게 일하라고.
- 당연히 같이 가야지.
물론 재광도 철저히 계약서로 얽힌 직원이긴 하다만…. 그것까진 어쩔 수 없었다. 선호는 참회하는 마음으로 의주에게 답장을 보냈다.
내일 출장 가능해? 오전 11:21
여의주
???
어디로? 오전 11:22
저번에 고기 먹을 때 말했던 그 모텔 오전 11:23
좋다고 펄쩍 뛸 줄 알았건만 그새 마음이 바뀌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고깃집에서는 보내만 준다면 어디든 한달음에 달려갈 것 같더니, 정작 가라니 답변이 없다.
그러나 답장은 메신저가 아닌 육성으로 확인 가능했다.
“야, 광! 내일 우리 출장 간다!”
이게 과연 옳은 선택일까, 다시금 헤아려보던 선호의 입술 새로 진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래도 본인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의주인 만큼 시설이나 서비스를 기민하게 들여다보기에는 적합할 터였다. 그 사실만이 찜찜한 선호의 마음을 달랬다.
????
모두가 분주하게 움직이는 출근길. 재광은 혼자 시간이 멈춘 사람처럼 우뚝 서 있었다.
평소라면 재광도 출근 행렬에 끼어 지하철역을 향해 한창 걸을 때였다. 그러나 오늘은 사정이 달랐다.
어제 오전, 갑작스럽게 전해 들은 출장 소식 때문이다. 의주가 일러준 대로 노트북을 챙겨 나온 재광은 눈동자만 움직여 주변을 살펴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차체가 눈에 들어온다. 늘 윤이 나는 검은 세단은 정확히 재광의 앞에 멈춰 섰다. 재차 살필 것 없이 곧장 조수석 문을 여는 동작이 자연스러웠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네며 차에 올라타려던 재광은 순간 멈칫거렸다. 의주의 차를 타고 다니는 동안 당연하게도 자신의 자리였던 조수석에 물건이 있는 탓이다.
의주의 노트북이었다. 여기까지 오면서도 틈틈이 업무 알림을 확인했는지 사용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의주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는 재광을 보고는 “아” 하며 제 물건을 치웠다.
잠시뿐이었다. 재광이 안전벨트를 매자마자 무릎 위로 노트북이 내려앉는다. 반사적으로 돌아오는 눈길을 마주한 의주는 잔뜩 해끔한 얼굴로 말했다.
“오늘 네 임무다. 운전하는 동안 나 대신 알림 좀 확인해. 오류 관련해서 문의 들어오면 바로 말해주고.”
“아…. 네.”
여태 재광은 짐을 떠맡듯 어정쩡하게 노트북을 무릎 위에 올려두고 있었다. 그는 의주의 얘기를 듣고 나서야 화면이 잘 보이도록 기기를 돌려세웠다. 때마침 열어놓은 노트북에서 기업용 메신저 알림이 뜬다.
재광은 덤덤한 목소리로 “대표님한테 연락왔어요” 했다. 이어 인공지능 스피커처럼 메시지를 그대로 읽기 시작했다.
“시설이랑 서비스 꼼꼼하게 살펴보고 와. 애꿎은 재광 씨한테….”
조금 빠르다 싶을 만큼 술술 흘러나오던 말은 곧 늘어지고 말았다. 사색이 된 재광이 곁을 돌아보며 메시지 내용을 끝맺었다.
“껄떡대지 말…고?”
막 도로로 빠져나온 의주는 운전에 몰두 중이었으나 낌새를 못 알아차릴 정도는 아니었다. 슬쩍 곁눈질만 해도 재광의 파리한 안색이 훤히 보인다. 그는 잔뜩 의문스러운 재광의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걔는 왜 그런 소리를 개인 톡으로 안 하고 거기다가 해.”
“뭐예요? 대표님이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데요.”
“아 왜, 그때 회의 끝나고 커피 마시러 간 날. 너 주무르는 거 보고 민 대표가 사귀냐고 난리 났었거든.”
그날이라면 재광도 기억했다. 끈적한 손길에 한마디 하려는 순간 선호가 돌아봤었다. 예기치 못한 시선에 놀란 재광은 제가 의주의 손을 잡았다는 사실도 잊고 가만히 있었더랬다.
그런데 그걸 다 봤었다니. 차 한잔하자는 소리를 이 악물고 한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는 걸, 재광은 이제야 깨달았다.
“그래서 대충 얘기했어. 내가 너한테 고백했다가 차였다고.”
“네에?”
“걱정 마. 우리가 특별한 사이인 것까진 말 안 했으니까.”
재광은 잠시 반응이 없었다. 기다란 눈만 끔뻑거리며 의주의 옆얼굴을 쳐다보는 게 전부였다. 그러더니 조금 뒤에야 입을 열었다.
“그, 대표님은 아시는 거예요?”
“뭘?”
“팀장님, 남자 좋아하는 거….”
한껏 조심스러운 투로 묻자, 의주가 별안간 크게 웃는다.
“알고 지낸 세월이 몇 년인데 설마 모르겠어? 같이 사업도 하는 사이에. 걔 말고 마케팅 팀장도 알아.”
아무래도 남자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재광에게나 심각한 사안인 듯했다. 하기야, 의주는 얼굴 본 지 일주일 조금 넘은 제게도 아무렇지 않게 게이라 터놓은 이력도 있잖은가. 그렇게 생각하면 조심스럽게 물은 자신이 되레 우스워졌다.
“아….”
그래서 이도 저도 아닌 소리만 내뱉고 이만 말을 줄였다. 그러자 의주가 잔뜩 얄궂은 말투로 입술을 뗀다.
“뭐야. 우리끼리만 아는 비밀인 줄 알았는데 아니라서 아쉬워?”
‘우리’라는 대목에 악센트가 들어갔다. 재광은 멍하던 표정을 담담히 바꾸며 곧바로 받아쳤다.
“아뇨. 하나도.”
“응, 괜찮아. 우리만 아는 비밀은 이따가 만들면 되니까.”
여기서 어떤 대답을 하든지 간에 의주는 저 듣고 싶은 대로 들을 게 뻔했다. 재광은 가볍게 고개만 젓고 말았다.
이전 같았더라면 속 깊이에서부터 진한 한숨이 올라왔을 텐데, 그동안 의주에게 적응이라도 된 모양이었다. 이 정도 멋대로 구는 건 이제 아무렇지도 않았다.
????
재광은 입사 초 주말, 의주와의 우연한 만남으로 경기 외곽의 식당까지 따라간 적이 있었다. 그때도 충분히 먼 거리를 오갔다 생각했는데, 오늘은 그에 비할 바가 못 됐다.
서울을 나서 경기도의 경계까지 가뿐히 넘어버린 것이다. 재광은 조금 얼떨떨한 표정으로 숟가락을 들었다.
휴게소에서 이른 점심을 해결하기로 한 차였다. 재광이 뚝배기 안에서 아직도 보글보글 끓는 국물을 휘저으며 물었다.
“원래 미팅을 이렇게 멀리까지 가요?”
‘출장’이라는 말에 그러려니 하고 따라나섰을 뿐, 재광은 오늘의 일정에 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어디를 가는지, 왜 가는지, 심지어는 가서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까지도.
그저 신규 앱 때문이겠거니 생각하고 말았다. 요즘 회사 사람들이 죄 거기에 매달려 바쁘지 않던가. 실질적으로 인턴에게 세세한 진행 상황이 전달되는 경우도 없어 어렴풋이 짐작하는 게 다였다.
치원에게 들은 바로는 신규 앱이 전국구 서비스 런칭을 목표로 한다고 하니 이번 출장도 그것과 관련이 있겠구나, 하고 말이다.
“미팅? 웬 미팅?”
물론 한참 잘못 짚은 추측이었다. 돈가스를 크게 한 조각 잘라내던 의주는 금시초문이라는 투로 되물었다. 그러면서도 재광의 밥공기 위에 막 자른 돈가스를 얹어주는 행동만큼은 자연스러웠다.
“출장이라면서요. 개발팀이 밖에 나가서 할 일은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 그냥 회사 돈으로 놀러 가는 건데?”
“네?” 하는 재광의 안색은 진심으로 당황스러워 보였다. 갑작스럽게 잡힌 일정이라고는 해도, 그만큼 급하고 중요하기에 서둘러 진행하는 거라 여긴 탓이다.
그런데 놀러 가는 거란다. 부러 장난을 치는 낌새도 없이.
의주는 밥 한술 뜨지도 않고 의문스러워하는 재광을 빤히 봤다. 그런 다음에야 설명이 더 필요한가 싶어 말을 더했다.
“뭐, 민선호한테는 일이긴 하지. 메인으로 푸시할 상품 확인하러 가는 거니까.”
“아….”
“근데 저번에 너도 가봤잖아. 식당 간 거처럼 어떤지만 확인하고 나머지는 알아서 놀면 돼. 꿀이지?”
뒤늦게 출장의 목적을 알게 된 재광의 얼굴은 여전히 어리둥절했다. 일로 가는 거라고는 하지만 하루 치 근무를 이렇게 날로 먹어도 되는 걸까, 하는 게 틀림없었다.
“야, 광. 다른 직원들 다 바쁘긴 해도 우리만큼 야근 많이 하고 늦게까지 하는 팀이 또 어딨냐. 가끔 이렇게 숨통 틔는 날도 있어야지. 안 그래?”
낌새를 알아차린 의주가 거기까지 얘기하고 난 다음에야 재광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만한 보상이 타당하다는 뉘앙스에 홀랑 넘어간 건 아니었다. 단지 이로 인한 문제가 생긴다면 책임은 어차피 팀장의 몫이 될 테니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한 거다.
속내가 어떻든 의주의 눈에는 그게 제 뜻에 동의하는 것으로 비쳤다. 재광이 돈가스를 한 입 베어 물자 그 모습을 지켜보는 의주의 표정이 한껏 흐뭇한 빛을 띠었다.
“국물 요리 좋아해?”
잠시 멈췄던 대화는 잠시 뒤 재개됐다. 재광이 흔한 한국 직장인의 식사 속도로 국밥을 다 비워갈 즈음이었다. 그보다도 빨리 접시를 비운 의주가 묻자, 재광은 모호한 말투로 답했다.
“막 그렇게 좋아하는 것까진 아니고 그냥…. 있으면 먹어요.”
무던하게 대꾸한 재광은 마지막 남은 양을 한 숟가락에 싹싹 긁어 올렸다. 그리고 막 입에 넣으려는데, 곧바로 질문이 돌아온다.
“그럼 뭐 좋아하는데?”
하필이면 마지막 한 숟갈을 해치우려 입을 와앙 벌린 타이밍이었다. 대답이 먼저인지 밥이 먼저인지. 순간적으로 판단이 안 서 그대로 굳어버리자 의주가 숨처럼 웃는다.
“먹어, 일단 먹어.”
의주는 팔을 뻗어 재광의 손에 들린 숟가락을 가볍게 쥐었다. 직접 입가로 대령해준 다음에야 재광이 밥을 마저 먹는다.
다분히 기계적인 턱짓이었다. 재광은 국물에 푹 잠겨 부드럽게 풀린 밥알을 꼭꼭 씹었다. 얼빠진 모습을 보였단 사실이 자못 민망했으나 입안을 말끔히 비울 무렵에는 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음식 안 가려서 이거저거 다 잘 먹어요.”
“와 대답 봐, 성의 없어.”
“진짠데.”
“그래도 묻는 사람 생각해서 좀 더 구체적인 대꾸를 할 순 없어?”
의주는 원하는 정보를 얻지 못해 다소 실망스러운 모양이었다. 재차 답을 강요하자 냅킨으로 입가를 닦던 재광이 무심하게 눈을 감았다 뜬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이게 뭐라고’ 싶지만, 의주가 꽤 집요한 인간이란 걸 알아 대충 맞춰주고 마는 게 나을 듯했다.
“굳이 고르자면 한식이 더 좋은 정도…?”
이 역시 정확한 메뉴를 짚어주길 바란 의주의 의도를 충족시키지 못한 대답이었다. 그나마 카테고리를 줄여준 게 어디냐 싶어진 의주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으음, 엄청나게 구체적이네.”
못마땅한 티를 역력히 내면서.
하지만 재광으로서는 되레 그 마뜩잖은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주는 대로 넙죽 잘 받아먹으면 됐지, 굳이 뭐가 제일 좋고 말고를 따질 필요가 있나 싶은 마음이었다. 재광은 다 먹은 쟁반을 정리하면서 툭, 내뱉듯 말했다.
“그게 중요해요?”
“중요하지.”
“왜요?”
“원래 좋아하는 사람에 관한 건 다 알고 싶어지는 거니까.”
키도 덩치도 좋은 성인 남성이 만화처럼 선명하게 눈을 끔뻑거리는 모양새가 퍽 볼만했다.
예전의 재광이었다면 당장 질색하고도 남을 짓이었다. 꼭 닮은 얼굴로 본인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을 하는 거로 모자라, 자신을 상대로 좋아하는 사람을 운운하지 않나.
그러나 이마저도 가까이 붙어 지내며 적응이 된 듯했다. 더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다. 재광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쟁반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맞은편에 앉은 의주 또한 그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야 광, 우리 나가면서 커피 사자.”
진심을 어필하려다 실패했음에도 의주에겐 실망한 기색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무덤덤하게 넘기고 마는 재광을 재밌어하고 있었다.
앞서가는 뒤통수를 응시하는 눈이 유독 반짝거렸다.
????
“담배 안 피워도 돼?”
막 식당가를 빠져나와 카페로 향할 때였다. 재광의 어깨에 척하니 팔을 걸친 의주가 묻는다. 재광은 묵직한 무게감에 흘긋 제 어깨를 돌아봤다. 그러나 별다른 제재를 하지는 않았다.
“괜찮아요. 한 대 안 피운다고 큰일 나는 것도 아니고.”
앞만 보고 걸으며 무신경하게 하는 대꾸였다. 그러나 이어지는 의주의 말에는 저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왜, 치원 씨 없어서 그래?”
부하 직원 흡연까지 챙겨주는 상사가 어디 있냐고 너스레를 떨 줄 알았건만, 난데없이 얘기가 치원에게로 튄다.
굳이 따지자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회사에서 점심을 먹은 뒤 자연스럽게 옥상에 올라가는 건 치원의 영향이 컸으니까.
특별한 이유가 있다기보다는 같이 피울 사람이 있단 사실이 중요했다. ‘같이’ 피우면서 소소하게 오가는 잡담을 즐기는 거지, 비흡연자를 멀뚱히 세워놓고 혼자 연기를 뿜어대는 취미는 없었다. 정말 그뿐인데.
어째, 재광을 들여다보는 의주의 눈길이 심상치가 않다.
“뭐야 왜 아무 말 안 해? 진짜야?”
이건 또 뭔가 싶은 재광이 대답을 않자 채근하는 목소리가 더 심각해진다.
재광은 뚱한 표정으로 제 곁에 선 의주를 봤다. 어쩐 일로 그를 관찰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 제가 계속 재광 씨랑 붙어 다니니까 걱정돼서 따라오신 거예요? 나쁜 물이라도 들일까 봐요?
아마 그때부터였을 거다. 불쑥 옥상까지 따라온 이후부터 의주는 유독 치원을 경계했다. 그렇다고 일부러 못되게 굴거나 서운할 만큼 선을 긋는 건 아니었다. 대신 재광이 그와 어울릴 때면 꼭 가자미눈을 뜨고 레이저를 쏴댔다.
‘친한 친구 뺏기기 싫은 초딩이야 뭐야.’
본심을 감춘 재광은 결국 입바른 소리만 하고 말았다.
“팀장님 담배 안 피우잖아요. 괜히 옆에서 연기만 마실 텐데 뭘 굳이.”
이미 마음은 타 기업 면접장에 가 있는 판에 새삼 아부를 떨자는 건 아니었다. 다만 여기서 치원에게 왜 그러느냐 언급했다간 자신은 물론이고 당사자에게도 괜한 불똥이 튈 것 같아 함구하기로 한 것뿐이었다.
그렇다고 아예 없는 소리를 한 것도 아니니 찔릴 것도 없었다. 덤덤하게 흘러나간 대꾸에 의주가 별안간 씨익 웃었다.
“지금 나 배려해주는 거야?”
서로 뻘쭘할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는 의도였지, 딱히 의주를 위해서는 아니었는데.
“배려까지는 아니지만….”
막상 감동 받은 양 구는 모습을 보니 굳이 솔직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재광이 말을 잇기를 포기하자 만면에 흡족한 미소를 띤 의주가 그런다.
“아 그러면 또 그냥 못 넘어가지. 기분이다, 커피는 내가 쏜다!”
이거야말로 참 새삼스러웠다. 재광을 이끌고 카페에 갈 때면 늘 당연하다는 듯 자신의 카드를 꺼냈으면서 꼭 어쩌다 오는 기회처럼 구는 거다.
그런데 그렇게 구는 얼굴이 진심으로 즐거워 보이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러니 재광으로서는 딱히 보일 수 있는 반응이 없었다. 그는 자신을 카페 방향으로 이끄는 손길에 얌전히 따랐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 주문대 앞에 설 때까지도 재광의 어깨에 내려앉은 팔은 그대로였다.
“뭐 마실래?”
오히려 메뉴를 물을 때는 더 단단히 재광의 몸을 옥좼다. 한층 묵직해지는 무게감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그는 메뉴판을 볼 것도 없이 답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요.”
“또? 너 그러다 위에 빵꾸나.”
“팀장님은 뭐 드실 건데요.”
“나는 캬라멜 마끼아또 휘핑 많이.”
“그러다 당뇨 와요.”
피차 건강에 안 좋은 걸 주문하면서 영양가 없이 나누는 대화였다. 포스기 앞에 선 직원이 입술을 앙 감쳐물며 카드를 긁었다.
“음료 나오면 진동벨로 알려드리겠습니다.”
의주가 재광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린 것은 카드와 함께 진동벨을 건네받은 다음이었다. 픽업대 쪽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뒷머리를 살랑살랑 간질이자 재광이 흘끔 시선을 들어 의주를 봤다. 별다른 얘기는 않지만 ‘왜요?’ 하는 뜻이 고스란히 비치는 눈길이었다.
“많이 컸다? 말대꾸도 할 줄 알고.”
사실이었다. 입사 초만 해도 의주가 어이없는 소릴 몇 번이나 하든 “아, 네” 하고 말던 재광이 똑같은 수준으로 앙갚음을 하지 않던가.
의주는 부하 직원이 저와 맞먹는다는 점에 중점을 두고 기분 나빠하기보다는 오히려 뿌듯해했다. 철저하게 몸 말고는 내어주지 않던 상대방이 저를 편하게 여긴다니. 그것만큼 틈을 파고들기 좋은 신호는 또 없기 때문이다.
지금만 해도 그랬다. 남들 있는 곳에서 조금만 터치를 해도 하지 말라며 못 박던 재광이 어깨동무를 하든, 머리카락을 쓰다듬든 내버려 두지 않나.
익숙한 것만큼 무서운 건 또 없다는 게 의주의 견해였다. 그는 몹시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제가 흐트러뜨린 재광의 뒷머리를 다시 정리해줬다.
????
위가 어쩌고 당뇨가 어쩌고. 잠깐 투덕거리기는 했으나 각자의 커피를 챙긴 이후로는 꽤 순조로운 출장길이 됐다.
재광은 의주의 노트북을 들여다보며 착실히 비서 노릇을 하려 했으나 정작 알림이 오질 않아 할 일이 없었다.
그나마 온 두 건의 연락도 별 내용 아니었다. 결재 서류판 어디에다 뒀냐는 마케팅 팀장의 물음과 계약이 성사되면 필요하니 사진 많이 찍어오라는 대표의 지시가 다였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일보다는 가벼운 사담을 나누는 시간이 더 많았다. 당연하게도 주로 화제를 던지는 쪽은 의주였고, 재광은 담담히 답해주다가 종종 질문을 되돌려주는 식으로 반응했다.
“너는 그럼 단 거는 아예 안 먹어? 싫어하는 거야?”
맥락이랄 것도 없었다. 의주는 오늘 작정을 한 건지 질문 폭격기처럼 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대학 동기들이랑은 아직도 자주 연락하냐고 물었으면서, 몇몇과는 꾸준히 연락한다는 대답을 듣기 무섭게 단 건 안 먹냐고 하는 거다.
생뚱맞기 그지없으면서도 질문의 속도만은 마치 취조를 하는 것처럼 빨랐다. 하지만 무던한 성정의 재광은 그저 오늘따라 제게 관심이 많다 생각하며 꼬박꼬박 답을 줬다.
“싫어하는 건 아니에요. 그냥 먼저 찾아 먹진 않는 거지.”
“그게 싫어하는 거 아니야?”
“싫어하면 아예 안 먹겠죠. 그치만 있으면 먹긴 하니까.”
“있으면 먹는구나.”
의주는 작은 소리로 재광의 대꾸를 되뇌었다. 그 모습이 꼭 잘 기억해놓으려 머릿속에 새기는 행동처럼 보였다.
보이기만 하는 게 아니라 실은 그게 맞았다. 의주는 지금 대놓고 재광에 관한 정보를 캐내는 중이었다.
몇 번이나 살을 섞고 때마다 좋아 죽으면서도 실상 김재광이라는 인간과 관련해 아는 건 없는 탓이다. 자신과 닮은 얼굴, 기복 없는 성격과 무심하게 툭 건네는 말들이 다 좋은 것과는 별개로.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정의하면서부터는 종종 같이 식사를 하고 커피도 마셨지만, 대개는 업무의 연장 같은 대화(그게 아니면 실없는 장난)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
몸만 주고받는 관계라 일부러 대화 주제에도 거리를 둔 건 아니었다. 다만 서로 공유하는 범주라곤 회사가 유일하기에 자연히 그렇게 된 것뿐. 속속들이 꿰고 있는 몸 사정에 비하면 사람 그 자체에 대한 정보는 턱없이 모자란 셈이었다.
“그럼 단 것 중에는 뭐가 좋아?”
“중에는?”
“왜, 사탕 단맛이랑 초콜릿 단맛은 다르잖아. 그런 거 중에 뭐가 더 나아?”
그런 와중에 급작스럽게 잡힌 출장 일정은 더없이 좋은 찬스였다. 평소에도 시답잖은 얘기는 자주 하지만 이런 사소한 주제로 대화를 길게 끌고 가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시간 대부분을 보내는 장소가 회사라는 점이 한몫 톡톡히 했을 거다. 사무실에서의 재광은 의주의 장난을 무반응으로 넘기기 일쑤였고, 메신저로 사적인 얘기를 꺼내도 잘 이어지지가 않았다.
그에 비하면 지금은 거의 케이지 매치나 다름없었다. 설사 난감한 질문을 하더라도 재광이 도망칠 곳이 있는 것도 아니고, 농땡이 치는 걸 들킬까 눈치를 봐야 할 사람도 없었다.
“그 둘 중에는 초콜릿? 아, 근데 그거 말고 콜라는 달아도 잘 마셔요.”
더군다나 장거리 이동에 서로 심심한 참이라 재광은 여느 때보다도 성실히 답변에 응했다.
“스트레스 받아서 속 답답할 때 쭉 들이켜면 그게 그렇게 좋더라고요.”
“그래? 콜라?”
“네. 팀장님은요?”
“나? 나 뭐.”
“콜라랑 사이다 중에서요.”
“아아. 나도 콜라.”
평소 의주는 탄산음료에 취향이 확고한 편은 아니었으나 이 순간 그렇게 정했다. 재광이 콜라가 좋다지 않나. 그렇다면 기꺼이 콜라에 한 표를 던질 수 있었다.
― 목적지 부근입니다. 안내를 종료합니다.
소소하지만 의주에게는 유익한 대화를 나누는 사이, 내비게이션이 임무를 다하고 잠잠해졌다. 차 안에 울리는 안내 멘트를 들은 재광이 안전벨트를 만지작거리며 창밖을 둘러본다.
출발할 때도, 미팅에 가는 거냐 물었을 때도. 재광은 정확한 목적지를 들은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 알아서 잘 가겠거니 하고 있었지만, 막상 도착했다는 소식에는 어딘지 궁금해지는 게 사람 심리였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멀뚱히 쳐다보던 재광은 곧 다급히 입을 열었다.
“아니 근데, 저기….”
은행, 식당, 카페까지. 수많은 건물을 지나친 의주의 차가 모텔 주차장으로 직행한 타이밍이었다.
호텔 간판을 달고 있긴 했지만 틀림없는 모텔이었다. 재광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곁을 돌아봤다. 기다란 눈매 안에서 눈동자가 요동친다.
의주는 평온한 낯빛으로 재광과 마주했다. 그는 흔들림이라곤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 내가 출장 가다가 딴 길로 새기라도 했을까 봐?”
“….”
재광은 쉽게 답하지 않았다. 짧은 침묵은 ‘너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얘기하는 것만 같았다.
의주는 물씬 풍기는 불신의 기운에도 섭섭해하지 않았다. 대신 쓸데없을 만큼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나이팅이 뭐 하는 앱인지는 알지? 밤 데이트잖아. 그래서 온 거야. 여기 되게 재밌는 데래.”
재광은 이제야 깨달았다. 자신의 시간을 금처럼 여기는 여의주가 출장 소식에 왜 그렇게 들떴었는지를.
“뭐해, 안 내리고. 우리 일하러 온 거라니까?”
엄습하는 불안감에 굳어버린 재광은 채근하는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겨우 안전벨트 클립을 풀었다.
????
익히 아는 호텔에 비하면 규모는 작을지라도 신경 쓴 티는 제법 나는 곳이었다.
대리석으로 꾸민 프런트는 환했고, 로비의 대기용 소파 주변으로 미술품이나 각종 장식물이 놓여 그럴싸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한쪽에는 토스트나 라면 등 간단한 음식을 비롯해 에스프레소 머신까지 깔끔하게 구비 되어 있었다.
의주는 안으로 들어서면서 세심하게 시설들을 살폈다. 꼼꼼하게 살펴보고 오라는 선호의 당부를 성실하게 이행하는 중이었다.
“야, 광. 뭘 그렇게 어색해해.”
“제가 뭘요. 언제 어색해했다고….”
아무렇지 않게 프런트로 다가가는 의주와 달리 재광은 쭈뼛쭈뼛 그 뒤를 따랐다. 대학 시절 술 먹고 뻗은 동기들끼리 모텔 방에 처박힌 적은 있지만, 남자와 단둘이 숙박업소에 들어오기는 처음이라 민망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차라리 치원처럼 명백한 회사 동료와 왔다면 떳떳했을 거였다. 하지만 의주는 상사인 동시에 섹스 파트너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함께 모텔에 발을 들이는 기분이 남달랐다. 마음 한편이 콕콕 쑤시는 느낌이랄까.
“일반 객실로 하나 주세요. 아, 대실이요.”
하지만 이 상황이 민망스러운 건 재광뿐인 듯했다. 프런트를 지키고 있던 직원도 아무렇지 않게 카드 키와 어매니티 파우치를 내어준다.
어디로 봐도 회사원 태가 나서 그런지, 형제처럼 보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두 사람을 이상하게 여기는 눈치는 아니었다. 오히려 권태로운 일에 지친 듯 무관심한 태도였다.
무뚝뚝하게 건네는 물건을 받아든 의주는 곧바로 재광에게 고갯짓을 했다. 엘리베이터를 가리키는 행동이었다. 잠자코 따라가려던 재광이 순간 멈칫거린다.
“아…. 잠시만요.”
“왜?”
“저 통화 좀 하고 갈게요. 몇 호인지만 톡으로 알려주세요.”
그렇게 말하는 동안에도 주머니에서 막 꺼내든 휴대전화에서 진동이 쉼 없이 울렸다.
“그래, 그럼.”
답이 떨어지자마자 재광이 밖으로 나간다. 서두르는 뒷모습을 잠시 보던 의주는 별다른 표정 없이 홀로 엘리베이터 앞에 가 섰다.
목적하는 층에서 내려 객실을 찾기까지 의주는 느긋하게 걸었다. 엘리베이터 내부나 복도의 분위기, 청결도 따위를 살피느라 부러 걸음을 늦춘 거다.
객실에 도착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의주는 주름 없이 판판하게 펼쳐진 침구나 창가에 놓인 테이블, 비치된 용품들을 뜯어보느라 바빴다.
흡사 집을 보러 온 사람 같기도 했다. 욕실에 들어가 세면대 수도꼭지를 틀더니 변기 물까지 내려보는 거다.
“괜찮네.”
꽤 흡족한지 고개를 두어 번 끄덕거린 그는 곧장 문가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는 휴대전화를 꺼내 들고 욕실 전체의 사진을 찍었다.
선호가 많이 찍어오라 당부한 그 사진이다. 계약이 성사되면 바이럴 용도로 사용하려는 게 분명했다. 여느 인플루언서 부럽지 않은 솜씨로 각 잡고 사진을 찍는 낯이 진지했다.
재광에게 몇 호실인지 보내주는 것도 잊은 그는 한참 동안 사진을 찍는 데만 열중했다. 침대가 보이는 객실 전경부터 티 세트가 담긴 트레이까지 세세하게도 찍었다.
“으음….”
분주하게 셔터를 눌러대던 의주는 침대 옆 콘솔을 찍다 말고 휴대전화를 내렸다. 반듯하게 놓인 리플릿을 발견한 참이었다.
모텔의 객실 정보와 이용 가능한 서비스들을 소개해놓은 안내서였다. 종이를 집어 들고 이리저리 훑어보던 의주의 눈이 별안간 빛난다.
“….”
그는 잠시 고민하듯 리플릿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러고는 프런트로 연결되는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
재광은 건물 밖으로 나와서야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하는 간단한 인사를 전하자 휴대전화 너머로 한껏 친근한 말투가 들려온다.
― 응, 엄마야. 뭐 하고 있었어?
“뭐하긴 일하지. 출장 왔어.”
― 출장 갔어? 그래도 회사 잘 다니고 있나 보네.
“그렇지 뭐. 근데 왜.”
유별나게 살갑지도, 그렇다고 너무 퉁명스럽지도 않은 대꾸였다. 어머니와 무뚝뚝한 아들의 흔한 대화. 무슨 용건으로 전화했느냐 묻는 재광의 말에 어머니가 내심 서운한 내색을 비쳤다.
― 왜는 무슨. 엄마가 아들한테 전화하는데 무슨 일이 있어야만 하니?
여기다 대고는 딱히 보일 반응이 없었다. 나한테는 무슨 일이 있어야만 전화하지 않느냐고 따지고 물으면 싸움이 될 것 아닌가. 재광은 애매하게 “으응” 하고 넘겼다.
그 뒤로는 잔소리 비슷한 말들이 줄줄이 들려왔다. 너는 엄마가 안 하면 절대 전화 안 하더라, 뭐 하고 사는지 안부는 들려줘야 할 거 아니냐…. 한동안 서운함을 토로하시던 어머니는 조금 뒤에야 “아, 참” 하며 새로운 화제를 꺼냈다.
― 엊그제 반찬 보낸 건 받았어? 어떻게 된 게 두 형제가 다 받았다 어쨌다 말이 없어.
“나는 못 봤는데. 형이 얻다 뒀겠지 뭐.”
― 느이 형이 다 좋은데 살림은 영 꽝이잖아. 오늘 집 가면 확인해봐. 고기 재운 건 얼렸다가 나중에 먹어도 되니까 당장 먹을 거 아니면 냉동실에 꼭 옮겨 놓고.
재광은 끙, 앓는 소리가 새려는 걸 꾹 참았다.
‘형이 살림에 소질 없는 게 뭐 때문인데.’
귀한 장남 불에 델까, 칼에 벨까. 어릴 때부터 부엌에는 출입도 못 하게 한 게 부모님이었다. 그에 반해 재광은 초등학교 때부터 형의 라면 심부름을 했고.
그런데 인제 와서 형은 살림이 꽝이라 반찬 정리마저도 재광이 확인을 해야 한단다.
재광은 불쑥 치미는 불만을 삭이며 침묵했다.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화를 내 봐야 부모가 못 할 말 했느냐며 혼이 날 게 뻔했다. 그래서 듣고만 있었더니 기나긴 서론 끝에 본론이 나온다.
― 근데 너희 형 요즘 무슨 일 있대?
어쩐 일로 살가운 장남 두고 저한테 전화를 다 걸었나 했다. 그럼 그렇지, 형의 낌새가 석연치 않아 걱정스러웠던 거다. 새삼스럽게 실망하지도 않은 재광은 성의 없이 대꾸했다.
“모르겠는데. 왜?”
― 통화해도 목소리에 영 힘이 없던데? 왜 그러냐고 물어봐도 아니라고만 하고. 너는 한 집에 살면서 식구가 어떤지도 몰랐니?
“한집에 살면 뭘 해. 잘 마주치지도 않는데.”
― 그러지 말고 은근히 좀 떠봐. 큰일이면 어떡해.
“내가 떠본다고 순순히 말해줄 인간이야? 엄마가 하는 게 더 빠를걸.”
이쯤 되자 재광은 이만 전화를 끊고 싶어졌다. 형이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지 빤히 알면서 이런 요구를 하는 게 너무하다 싶은 것이다.
형을 우선시하는 부모님의 태도에 새삼 서운해할 짬은 아니지만, 사이도 안 좋은 형의 안부를 어떻게든 쥐어짜 대신 전해야 하는 일은 썩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통화를 마칠 만한 핑계를 찾는데, 타이밍 좋게 휴대전화에서 짤막한 진동이 울린다.
― 그래도 엄마가 물어보는 거랑 동생이 그러는 거랑 같아? 너한테 터놓는 게 더 편할 거 아냐.
“엄마, 팀장님이 나 찾는다. 일해야 돼, 끊을게!”
“재광아, 김재광!” 하고 불러대는 소리를 못 들은 척. 재광은 당장 통화를 끝냈다. 부모님 사랑을 독차지할 거면 걱정할 일은 안 만드는 게 도리 아니냐는 생각을 하면서였다.
여의주 팀장님
609호로 오면 돼. 오후 1:45
그래도 상한 기분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의주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할 때는 이미 통화의 여운이 다 가신 뒤였다. 재광은 답장을 보내는 대신 곧바로 걸음을 돌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손님이 오는 줄 알고 일어서던 프런트 직원은 조금 전 나갔던 재광을 알아봤는지 도로 의자에 앉았다. 재광도 일부러 그쪽엔 눈길을 안 두고 곧장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의주가 올라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듯했다. 층수를 나타내는 전광판에는 6이라는 숫자가 또렷하게 표기되어 있었다.
????
의주와 함께 들어설 때만 해도 못내 민망했으나, 혼자 남은 재광은 모텔 안을 누비는 게 아무렇지 않았다. 복도도 지나다니는 사람 하나 없이 고요해 오히려 편한 마음으로 거닐 수 있었다.
607, 608…. 호수를 확인하며 닫힌 문들을 지나치던 재광은 곧 걸음을 멈췄다.
609호. 의주가 일러준 객실은 복도 끝, 막다른 길에 있었다. 막 다다른 재광이 두어 번 단정하게 노크하자 오래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린다. 옆으로 비켜서는 의주를 지나친 재광의 눈이 별안간 크게 뜨였다.
“아니, 이게 지금 무슨….”
떡 벌어진 입술 새로 흘러나오는 황당한 목소리는 덤이었다.
“여기 진짜 재밌지.”
의주는 적잖이 만족스러운 듯 의기양양하게 팔짱을 끼고 말했다. 재광은 여전히 눈 둘 곳을 찾지 못해 두리번거리고만 있었다.
분명 프런트에서 의주는 ‘일반 객실’을 달라 요구했었다. 그러나 막상 들어온 방은 ‘일반 객실’과 거리가 멀어 보였다.
온통 거울 천지였다. 재광도 이런 콘셉트를 잡는 곳이 있다는 사실은 알지만, 침대 주변만 거울로 꾸며놓은 게 아니라 온 벽이 다 거울인 건 처음 접해본 참이었다.
여기서 아무것도 안 하고 정말 일만 하다가 나간다고 해도 내내 눈 둘 곳 찾기가 어려울 듯했다.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섹시한 분위기보다는, 오히려 어떻게든 탈출해야 할 방에 갇힌 느낌이었다.
“아까 분명 일반 객실 달라고….”
생각지 못한 상황에 말을 잃었던 재광은 뒤늦게 물었다. 그러자 의주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답을 준다.
“응, 그랬는데 리플릿 보니까 이런 방이 있더라? 그래서 바꿔달라고 했어.”
“왜요?”
“재밌잖아. 야, 광. 내가 너 없는 동안에 살펴봤는데 거울에 지문 하나도 없어. 관리 엄청 하나 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재광은 여전히 버벅거리고 있었으나 의주는 개의치 않았다. “민선호한테 여기 꼭 잡으라고 해야겠다” 하고 중얼거리며 객실 감상에 여념이 없었다.
의주의 사무적인 태도 때문에 재광만 더 민망해졌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혼자 장소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부끄러워한 느낌이 들어서다. 연신 감탄하는 의주를 지켜보던 그는 애써 평정을 되찾았다.
“여기 좋다, 그치.”
그러나 혼자만 넘겨짚었던 건 아닌 모양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방에 비친 제 모습을 보며 흡족해하던 의주가 금세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렇게 얘기하는 동안 한 팔은 자연스럽게 재광의 등을 가로질러 옆구리를 감쌌다.
“아, 저기.”
“민 대표가 꼼꼼하게 다 살펴보고 오랬잖아. 우리한테는 회사 일에 최선을 다할 의무가 있다고 봐.”
말을 마치기 무섭게 재광의 허리를 감싼 팔에 힘을 주자 재광이 손쉽게 딸려온다. 두 몸이 빈틈없이 맞닿았다.
이대로 당장 침대에 뛰어든다 해도 나무랄 사람이 없었다. 두 사람만 뜻이 맞는다면 물고 빨든 나뒹굴든, 뭐든 해도 된다는 얘기다.
“….”
“….”
꼭 붙어 선 두 사람은 비스듬히 고개를 틀어 서로를 바라봤다. 오가는 말은 더 이상 없었지만, 의사를 확인하기에는 충분한 소통이었다. 작게 울려 퍼지는 숨소리가 횟수를 더할수록 눈길에도 열이 올랐다.
“아…. 잠시만요.”
아쉽게도 순조롭지는 못했다. 예열이 길어지는 틈에 진동음이 끼어든 것이다. 기기의 주인인 재광은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며 재킷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낭만인 서치원
재광 씨 오늘 이벤트 오픈한 거 참여자 명단이 안 불러와져요ㅜㅜ 혹시 확인해주실 수 있을까요?
아 이건 여팀장님한테 말씀드려야 되는 건가? 오후 2:19
이벤트라 함은 재광의 첫 과제를 의미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아직 인턴. 팀장이 걸러주는 업무만 받아서 하는 실정이라, 엄밀히 따지면 의주에게 가야 맞는 질문이긴 했다. 재광은 휴대전화 화면을 들여다보다가 불쑥 의주를 돌아봤다.
“이벤트요. 오늘 오픈했는데 참여자 명단이 안 불러와진대요.”
“아니 그게 왜 안 돼.”
불과 몇 초 전까지만 해도 냅다 재광을 안아 올릴 것처럼 이글거리던 의주의 얼굴이 그새 차갑게 식었다.
한참 좋던 분위기가 깨져 골이 난 게 아니다. 자신이 최종 승인한 결과물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자존심이 상한 거다. 감정적인 부분에 무딘 재광도 그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의주는 단숨에 재광에게서 떨어졌다. 가방을 놓아둔 콘솔 쪽으로 가는 뒷모습은 자칫 비장하기까지 했다. 크게 잘못한 기분이 된 재광이 눈동자만 도르륵 굴리며 그가 하는 양을 지켜봤다.
“광, 일로 와.”
노트북을 꺼내든 의주가 턱짓으로 가리킨 곳은 침대였다. 객실 내부의 가구들이 실용성보다 비주얼에 초점을 둬, 두 사람이 편히 몸을 붙일 만한 장소는 거기뿐이었다. 그는 재광이 다가오길 기다리지 않고 먼저 침대 위로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침대 헤드에 기대앉아 쭉 뻗은 다리 위로 노트북을 올리는 동작이 자연스러웠다. 뒤이어 재광이 매트리스 위로 올라가 의주와 몸을 나란히 했다.
“잠깐만 있어 봐.”
의주는 곧바로 이벤트 관리자 페이지에 접속했다. 재광에게 전해 들은 대로 참여자 명단이 먹통이다. 짐짓 심각한 안색을 한 그는 재빨리 이벤트 서버로 넘어가 데이터 처리 현황을 살폈다. 다행히 정보는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그럼 불러오는 과정에서 뻑났다는 건데….’
잠시 생각하던 의주는 불쑥 곁을 돌아봤다.
“데이터는 멀쩡하니까 네가 해봐. 그게 맞지.”
그렇게 말하며 노트북을 넘겨주자 재광이 반사적으로 기기를 받아든다. 그는 부담스러운 기색을 비치면서도 묵묵히 제 앞에 놓인 화면을 들여다봤다. 의주의 얼굴에 언뜻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의주가 좋아하는 재광의 모습 중 하나였다. 엄살떨지 않고, 군말하지 않는 점.
다르게 말하면 우직하다고도 할 수 있겠다. 재광은 이것저것 다 해보겠다고 용감하게 나서는 열의까지는 보이지 않아도, 시키는 족족 어떻게든 해내려 노력하는 편이었다.
의주 아래서 무던히 버티는 것도 그런 성격이 큰 영향을 끼쳤을 테다. 스타트업의 특성상, 그리고 현저히 모자란 인원 탓에 이렇다 할 포지션 없이 일을 던져주는데도 재광은 불평한 적이 없었다. 이래도 네, 저래도 네, 하고 마는 거다.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도 마구잡이로 부려먹을 요량은 아니고. 인턴 기간 동안 잘 살펴보다가 정직원 전환이 되면 그때는 더 두각을 보이는 쪽으로 확실한 포지션을 잡아줄 생각이었다.
“….”
재광은 화면에 빨려 들어갈 듯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 옆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의주는 이내 재광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뭐예요.”
훅 들어오는 무게감에 흘긋 돌아본 재광의 반응은 그게 다였다. 갑자기 왜 이러느냐고 물으면서도 밀어내거나 불쾌한 내색은 하지 않는다. 의주는 “그냥” 하며 의미 없는 대꾸를 하고는 재광과 같은 화면을 들여다봤다.
참 기묘한 그림이었다. 온통 거울로 둘러싸인 모텔 방에서 섹스 파트너와 침대에 나란히 앉아 일을 하다니. 누구에게도 없을 경험일 거다. 그러나 둘은 유별난 환경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집중력을 발휘했다.
“아, 저거…!”
간간이 키패드를 누르는 소리만 들리는 가운데, 불쑥 입을 연 이는 의주였다. 차마 말을 끝맺지 못하는 표정이 자못 허망했다.
재광의 속도에 맞춰 코드를 살펴보던 중 뭐가 문제였는지를 막 발견한 참이다. 아무리 바빴어도 그렇지, 어떻게 저걸 못 잡아냈나 싶어 어이없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왜요?”
“야, 저거 저번에….”
그러나 휙 돌아보는 재광에게는 말을 아꼈다.
“아니야.”
직접 찾게 하려는 의도였다.
본인이 수백 번씩 들여다보며 짠 코드에서는 남의 작업물보다 오류가 더 안 보인다는 건 의주도 잘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매번 대신 찾아줘 봐야 재광에게 도움이 되진 않는다.
적어도 어디서 뭐가 잘못됐는지 스스로 가늠해볼 수 있는 시간 정도는 줘야 한다는 게 의주의 생각이었다.
“광아, 설마 일부러 못 본 척하는 건 아니지.”
부하 직원의 발전을 위하는 마음은 기특했으나 애석하게도 참을성은 모자랐다. 집중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린 재광이 몇 분째 진전이 없자 고새 보채고 만다. 재광은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대꾸했다.
“설마요.”
“그치? 그럼 됐어. 좀 더 분발해 봐.”
“넵.”
참으로 간결한 대답이었다. 의주는 영혼 없는 목소리로 “좋은 자세야” 하고 칭찬했다. 그러고는 한층 나른하게 몸을 늘어뜨리며 재광에게 푹 기댔다.
“아….”
다행히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재광이 탄식한다.
입사 초에 의주의 도움을 구했던 실수와 비슷한 양상이었다. 불러와야 할 정보 값을 잘못 설정한 거다. 기초적인 실수에 혀를 내두른 재광은 차분하게 코드를 수정했다.
“다 컸네, 혼자 수정할 줄도 알고.”
여전히 고개를 기대고 있던 의주가 슬며시 웃으며 재광의 목덜미를 주물렀다.
잘못된 부분을 찾아낸 뒤로는 테스트까지 일사천리였다. 서두르는 의주 때문에 치원에게 답장하는 것마저 잊었던 재광은 뒤늦게야 수정이 완료되었다는 소식을 전할 수 있었다.
“됐지?”
재광이 스스로 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면서도 내심 조급했던 모양이었다. 꼭 붙어 전송 버튼을 누르는 것까지 지켜본 의주는 득달같이 물으며 재광의 허리를 감쌌다.
급작스럽게 달아오른 흥이 깨졌으면 그만큼 김이 샐 법도 하건만. 의주는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엄청난 갈증에 시달리기라도 한 듯이 목덜미에 곧장 입술을 묻는다.
“그래도 그쪽에서 된다는 대답까지는 확인해야죠. 아니, 저기….”
당황한 재광이 목을 비틀어 빼며 의주의 어깨를 밀었다.
물론 의주가 쉽게 밀려나 줄 리는 없었다. 되레 더 진하게 입술을 누르자 급히 숨을 들이켠 재광이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눈을 질끈 감았다.
치원에게서 답장이 도착한 건 그때였다. 저쪽에서도 이벤트 현황을 알 수 없어 속깨나 끓였는지 돌아오는 반응이 빨랐다. 꾹 닫았던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린 재광이 간신히 메시지를 확인했다.
잘 작동한다는 대답이었다. 짧은 새 안도하는 눈빛을 읽어낸 의주는 더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입술을 맞댔다.
의주는 어느 때보다도 성급했다. 흔히 주어지지 않는 기회에 더 흥분한 듯했다.
전혀 이해 못 할 부분은 아니긴 했다. 섹스 파트너라는 이름으로 엮이긴 했으나 관계의 정의가 무색한 날들이었으니까.
밥 먹듯이 야근을 하다 보니 정작 몸을 부딪칠 일은 드물었다. 그래도 이전까지는 사이좋게 야근하다 열이 올라 급히 의주의 집까지 함께 가기도 했던 것 같은데….
- 저….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 팀장님, 저는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재광이 2차 합격 소식을 접한 뒤로는 면접 준비에 사활을 거느라 그럴 틈도 없었다.
재광이야 자신의 사정 때문이니 그런 상황을 이해한다 쳐도 의주의 입장은 달랐다. 영문도 모르고 황급히 퇴근하는 재광을 그저 보내줄 수밖에 없었던 거다.
저를 피하는 것 같은 눈치였다면 어떻게든 붙잡아놨겠지만, 그보다는 집에 꿀이라도 발라놓은 사람 같았다. 진짜로 급한 일이 있는 듯한데 묘하게 설레 보이기도 하는 기묘한 모습이었다고나 할까. 그 때문에 언젠가 꼭 캐묻겠다는 다짐을 하며 지켜보기만 했었다.
“….”
“….”
그러다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찬스를 맞았으니 마음이 급해지는 것도 당연했다. 깊은 입맞춤 끝에 잠시 숨을 트는 와중에도 의주의 눈빛은 식을 줄을 몰랐다. 이 관계에 적응한 지 오래인 재광이 불현듯 긴장할 만큼 욕정에 물든 눈이었다.
“저기, 팀장님 좀만 천천히….”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낀 재광은 젖은 입술을 겨우 뗐다. 그러나 어떤 말도 않고 바라보는 눈빛에 기가 눌려 끝맺지는 못했다.
“뭐라고?”
악의라곤 묻어나지 않는 대꾸에도 괜히 심장이 철렁거린다. 눈동자를 굴리며 눈을 빠르게 깜빡거리던 재광은 결국 꼬리를 내렸다.
“…아니, 아니에요.”
이것도 업보라면 업보였다. 대기업 면접이라는 중대한 일정이 있다고는 하나, 일언반구도 하지 않은 이상 이런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 일방적으로 피한 셈이지 않던가.
어쩌다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파트너로서의 직무 유기에 해당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여긴 재광은 겸허히 지금의 의주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동안 도마뱀 꼬리 자르듯 사무실을 나서던 제게 아무런 말도 얹지 않은 의주니까. 자신도 이 정도는 감내하는 게 제대로 된 기브 앤 테이크가 아닐까 싶었다.
결정적으로, 싫어 죽겠다는 걸 억지로 밀어붙이는 것도 아니니 굳이 진정시킬 필요까진 없을 듯했다.
“아!”
의주도 그런 심정을 정확히 읽은 게 틀림없었다. 재광이 하려던 말을 급히 마무리 짓자 기다렸다는 듯 그를 눕힌다.
지그시 누르는 힘에 넘어간 재광은 저와 닮은 얼굴을 마주했다. 자신도 모르게 쥔 의주의 옷자락이 손안에서 볼품없이 구겨졌다.
지레 겁을 먹고 단단히 각오한 바에 비하면 원활한 관계였다. 의주는 꼭 입술을 물어뜯을 것처럼 달려들어 놓고 정작 혀는 부드럽게 움직였고, 금방이라도 찢을 듯이 옷을 벗겨내고도 맨몸을 더듬어 내려가는 손길만은 조심스러웠다.
가슴을 타고 내려가 아랫배로, 옆구리를 지나 허벅지로. 유려하게 훑어 내리던 손이 은밀한 곳에 가 닿을 때부터는 조심스럽다 못해 정성스럽기 그지없었다. 입구 주변을 성심성의껏 매만지다가 손가락을 밀어 넣는 움직임이 자연스러웠다.
꽉 닫힌 구멍을 뚫고 들어오는 느낌이라곤 전혀 없었다. 그야말로 미끄러지듯이, 마치 제자리를 찾은 듯이 안으로 밀려들어온 손가락이 유연하게 내벽을 넓혔다.
“으응, 흣! 흐으… 아, 아아…!”
능숙하게 전립선 인근을 자극하는 손가락의 개수가 늘어날수록 점차 속도도 더해갔다. 체온에 녹은 젤은 흡사 물이 튀는 마냥 찰박거리며 시트 위에 잔해를 흩뿌렸다.
손가락만으로도 강렬하게 올라오는 감각에 재광이 괜한 이불자락만 쥐었다. 의주의 기다란 손가락이 정확한 지점을 누르고 빠질 때마다 손안에서 천 쪼가리가 마구잡이로 주름을 잡는다.
주먹을 꽉 쥐는 것만으로는 견디기가 어려웠는지, 재광은 곧 힘없이 벌리고 있던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직 전희에 불과하다는 걸 알면서도 이 진한 쾌감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흐읏, 아… 윽, 으응.”
소용없는 행동이긴 했다. 잇새에서 입술을 빼낸 의주가 짧게 키스하고 떨어지자 그새 또 참지 못한 소리가 마음껏 샜다.
자꾸만 눈앞이 점멸하고, 그럴수록 중심에서부터 올라오는 감각이 더 선명해진다. 의주의 손끝이 스팟을 건드릴 때마다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 안이 꽉 조여들었다. 그럴 때마다 더 또렷하게 느껴지는 이물감에 정신이 점점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재광은 흐릿한 의식으로 어렴풋이 그런 생각을 했다. 어쩌다 제가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고. 이 상황이 나쁘다는 건 아니고, 순수하게 드는 의문이었다.
스무 살. 첫 연애라는 걸 할 때만 해도 섹스 자체가 즐겁고 흥분되기보다는 좋아하는 사람과 육체를, 그 이상의 감정을 주고받는다는데 큰 의의를 뒀었다. 그러니 마음 없이 몸을 부대낀다는 건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는데….
지금은 마음이 없다 못해 한때 그리도 미워하던 의주의 손길에 녹아내리고 있었다. 오로지 몸의 감각에만 의존해서 흥분하고 느낀다. 그것도 아주 익숙하게.
“아아… 윽!”
그러나 자신의 변화를 깊게 고민해볼 틈은 주어지지 않았다. 문득 든 생각에 흐려진 안색을 본 의주가 부러 강하게 안을 찌른 것이다.
“광아. 나랑 뒹굴면서 딴 생각하면, 내가 섭섭하잖아.”
“그게 아니라, 아…! 아, 으읏!”
오랜만인 섹스에 부담을 느낄까, 공들여 안을 풀어주던 손길에 별안간 힘이 실렸다. 조금씩 속도를 올리던 움직임에도 가속이 실려 맑게 찰박거리던 마찰음이 요란해졌다.
의주는 질끈 감기는 재광의 눈을 지그시 쳐다보며 팔을 더 거칠게 움직였다. 의도적으로 느끼는 곳만 몇 번씩 눌러대자 재광이 몸을 비틀어대며 어쩔 줄을 모른다. 잔뜩 열이 오른 얼굴을 유심히 살피던 의주는 더 빠르게 그를 몰아붙였다.
“흐으, 아! 아아, 하, 읏!”
손가락이 한 번씩 들어왔다 나갈 때마다 재광의 온몸이 빳빳하게 긴장했다.
“하아, 하. 아….”
그리고 머지않아 재광이 체액을 분출했다. 둘 중 누구도 재광의 것에는 손을 댄 적이 없었다. 오로지 의주의 손짓으로만 절정을 맛본 셈이었다.
뒤로만, 그것도 손가락으로만 사정한 재광의 몸이 축 늘어진다. 수치스럽다 여길 틈도 없었다. 순식간에 가빠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크게 들썩거리는 가슴 위로 의주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한 손으로는 어깻죽지를 크게 훑으며 상체 곳곳을 자극한다.
입술 끝으로 탄탄한 피부를 훑다가 불시에 돌기를 물자 나른하게 감긴 재광의 눈매 아래로 속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그는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의주를 밀어내지는 않았다. 오히려 상박을 매만지던 손이 팔을 타고 내려왔을 때, 저보다 큰 손을 깍지 껴 잡아주기까지 했다. 신경 써 호응해주려는 의도는 아니고, 무의식중에 한 행동이었다.
“아, 김재광 진짜….”
그게 의주의 욕구에 불을 지핀 모양이었다. 가슴을 집요하게 빨아대던 의주가 벌떡 몸을 일으키며 설핏 웃는다. 그는 맞잡은 손에 더욱 힘을 줘 손가락을 옭아매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재광의 골반을 틀어쥐었다.
골반을 잡힌 다음의 상황은 예측할 필요도 없었다. 삽입을 목전에 두고 여전히 눈을 감은 재광은 마른침을 크게 삼켰다. 선명하게 솟은 울대가 크게 일렁이며 긴장을 고스란히 표한다.
“읏! 아아…!”
이미 손가락으로 실컷 자극당한 내벽은 사정 직후라 더 예민해진 상태였다. 굵고 단단한 살덩이가 쑥 밀려들어오자 정확한 지점을 누르기도 전에 몸이 민감하게 반응한다.
뒤를 꽉 조인 재광은 극대화된 감각에 몸 둘 바를 몰라했다. 어쩔 도리가 없어 애꿎은 목만 비틀어댈 지경이었다.
“흐… 으응, 읍.”
도리질을 치는 뺨이 붉었다. 보기만 해도 뜨거운 체온을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손을 들어 올린 의주는 빨갛게 열이 오른 볼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광아, 눈 떠야지.”
그렇게 말하는 입매가 빙긋 호선을 그렸다.
그러면서도 허리 아래로는 쉬지 않았다. 조금 전 파정한 재광을 배려해 빠르게 치받지는 않았으나 충분히 자극이 갈 만큼 뒤를 들락거리는 중이었다.
재광은 의주가 안을 찌르는 족족 솔직하게 끙끙 앓았다. 그러면서도 눈을 뜨라는 자상한 목소리에는 착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린다.
“히익….”
겨우겨우 눈을 뜨기가 무섭게 기겁하며 숨을 먹는 소리가 생생하게 울렸다. 실로 간만에 느끼는 쾌감에 주의를 빼앗겨 여태 간과하던 사실을 깨달은 찰나였다.
온 방을 뒤덮은 거울. 벽은 물론이고 천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눈을 뜨자마자 침대에 누운 자신과 무릎을 세워 앉은 의주의 정수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샤워할 때가 아니고서야 벗은 몸을 거울에 비춰볼 일이 없는 재광에게는 실로 낯선 환경이었다. 나체가 비치기만 한다면 그래도 참아 보겠는데. 의주의 성기가 제 안을 오가는 게 적나라하게 보여 당황스러웠다.
눈 둘 곳이 없었다. 황급히 눈동자를 굴려 옆을 봐도 똑같은 모습이 각도만 달리해 보였다.
그간 몸으로 받아내기만 했지, 저 큰 게 어떻게 뒤를 오가는지 육안으로 확인한 적은 없었던 터라 당혹감이 크게 밀려들었다.
그러나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더 흥분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조금 전 정액을 토해내고 늘어져 있던 중심이 서서히 다시 일어서기 시작한다.
“아…! 아, 흣!”
양 뺨을 넘어 귀 끝까지 새빨개진 재광은 그사이에도 터져 나오는 신음을 뱉고서야 도로 눈을 감아버렸다.
제 안으로 사라졌다 나타나는 의주의 중심부를 보는 것까지는 어찌어찌 참아볼 만했다. 하지만 안을 찔릴 때마다 남세스러운 소리를 내뱉는 자신의 얼굴은 차마 마주할 용기가 안 났다.
그 모습은 손가락으로 뒤를 쑤시는 것만으로 갔다는 사실보다 몇 배는 더 수치스러웠다.
“광아 왜. 하, 왜 또.”
착하게 말을 듣더니만 일순 다시 눈을 감자 의주가 곧장 그런다. 왜냐고 묻고는 있지만 이유를 떠나 다시 눈동자를 드러내길 바라는 뉘앙스였다. 재광은 감은 눈에 더 힘을 주며 도리질을 쳤다.
“아아, 안, 돼요. 으읏… 못, 보겠어, 요. 아…!”
여기서 더 강요했다가는 수치심을 못 이겨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의주는 제 아래서 흔들리며 잔뜩 흐트러진 재광의 머리칼을 크게 쓸어 넘겨줬다. 그리고는 재차 입을 열었다.
“이러면 돼?”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장난기 없이 친절했다. 다른 때 같았더라면 또 무슨 짓궂은 짓을 할까 의심하고도 남을 멘트건만. 부드럽고 담백한 말투가 묘한 신뢰감을 불러일으켜 슬며시 눈을 뜰 용기를 갖게 된다.
“아….”
“이러면, 괜찮아?”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있던 의주가 상체를 낮게 숙여 재광의 시야를 가렸다. 가까이서 보이는 얼굴에 초점을 맞추자 곁눈으로 보이는 거울의 형상이 자연스럽게 흐려진다.
“하… 으응, 네. 읏!”
열감을 이기지 못해 축축해진 눈을 내려다보던 의주는 곧 재광의 이마에 입술을 붙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눈을 맞추길 원했으나 이제는 입 맞추지 않고는 참을 수가 없었다.
도저히 못 보겠다며 울상을 짓던 재광이지 않나. 싫은 건 싫다고 딱 잘라 말할 줄 아는 그가 조금의 타협에 순순히 응하고 마는 게 귀여웠다.
정확히는 말간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며 수긍하고 마는 얼굴이 너무.
이마에서 콧잔등, 눈가와 뺨으로 이어진 입맞춤은 끝내 입술로 옮겨갔다. 달뜬 숨과 신음을 단번에 집어삼키자 축축한 혀가 익숙하게 감겨든다.
화답하듯 혀를 얽던 의주는 곧 재광의 입안을 가득 채우며 깊숙이 위치한 점막을 섬세하게 훑었다. 내리깐 시야로 재광의 눈이 다시 감기는 게 보였다.
하지만 재차 채근하지는 않았다. 감은 눈이 그리는 기다란 선이, 그 아래로 파들거리는 단정한 속눈썹이 충분히 좋았으니까.
의주는 상대방의 입속에 밀어 넣은 혀를 한동안 거두지 않았다. 재광이 마치 오럴 섹스를 하듯 혀를 빨아댄 탓이다. 오히려 더 깊은 곳까지 찔러 넣자 거친 호흡이 입안에 흩어진다.
그때까지도 맞잡고 있던 손을 먼저 놓은 쪽은 재광이었다. 그는 자유로워진 양손으로 의주의 어깨를 부여잡았다가, 이내는 목 뒤로 둘러 매달렸다.
“으, 흐윽, 아…! 아! 으읏.”
입술을 놓아주자마자 젖은 입술 새로 쉼 없는 탄성이 터졌다. 이전에 비해 확연히 거칠어진 숨도 틈틈이 끼어들었다. 반쯤 풀린 재광의 눈을 곧게 응시한 의주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허리 짓의 강도를 올렸다.
“하, 으, 응…. 흣, 아, 아아!”
피치를 올리자 숨처럼 뱉어내던 재광의 신음도 뚝뚝 끊겼다. 치받는 힘이 갑작스럽게 세지자 버거운지 온몸을 바르작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의주의 몸짓에 따라 허망하게 흔들리던 다리는 매트리스를 짚었다가, 허공에 떴다가, 종래에는 단단히 버티고 선 몸을 감쌌다. 다시금 사정감이 밀려올 때는 양쪽 허벅지가 의주의 허리를 콱 조였다.
그렇게 되니 의주도 이제는 재광이 눈을 뜨든 감든 상관없게 됐다. 낮춘 상체를 슬며시 들어 올린 그는 허벅지 뒤의 부드러운 피부를 훑고 지나가 엉덩이를 꽉 부여잡았다. 고간을 부딪치는 힘이 여느 때보다도 거셌다.
“윽, 아아!”
그만큼 깊게 들어간 성기가 뿌리 끝까지 처박힌다. 재광은 모호한 신음을 터뜨렸다.
마치 여태 열린 적 없는 깊숙한 곳이 억지로 벌어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아픈 것 같으면서도 그렇다고 고통스럽지만도 않은 기이한 감각이었다.
“아…! 하으, 읏….”
더 들어갈 수 없을 만큼 깊은 곳까지 뚫고 들어간 의주는 그대로 사정했다. 빠듯하게 비집고 들어간 탓인지 체액을 토해내며 작게 꿈틀거리는 움직임이 아랫배를 선명하게 울린다.
반사적으로 내벽이 좁아지자 재광의 뺨을 어루만지던 의주가 몸을 살짝 뒤로 뺐다. 정말 조금이었다. 빠져나갈 생각이 없는 듯 곧바로 조금 전 닿은 지점까지 밀어 넣자 이제는 재광이 축축하게 젖은 신음을 흘렸다.
“흐으, 윽… 으응….”
금세 다시 오므라들던 곳을 또다시 비집고 들어가자 온몸이 찌릿찌릿 울렸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모조리 형용할 수 없는 자극에 뒤덮인 기분이었다.
재광은 거의 울고 싶은 기분이 되어 하릴없이 시트를 더듬었다. 그러자 안쓰러울 만치 방황하는 손을 발견한 의주가 곧장 손등을 감싸 쥔다.
하지만 배려는 거기까지였다. 빠져나갈 듯 움직이던 살덩이가 또다시 내리꽂힌다. 다 풀린 눈앞에 강한 플래시가 터지는 듯했다. 그러고 나자 단단하게 부풀어 꺼떡대던 아래에서 두 번째로 정액이 새기 시작한다.
“흣! 아아….”
의주는 그제야 재광의 성기를 만져줬다. 기둥을 넓게 감싸 주무르듯 약한 악력을 가하자 조금씩 배어 나오던 희끄무레한 점액이 울컥울컥 쏟아져 나온다. 의주는 귀두 끝을 꼼꼼하게 문질러 남은 한 방울까지 빼냈다.
의주는 티슈를 뽑아 체액을 대충 닦아준 뒤에야 자신도 뒤처리를 했다. 그러고 난 뒤에는 재광의 옆에 꼭 붙어 누웠다.
“광아, 아팠어?”
그렇게 묻는 걸 보면 평소보다 더 깊게 들어갔다는 걸 확실히 인지하고 있는 듯했다. 재광은 그 물음이 얄궂게 느껴지면서도 나직한 목소리만은 듣기 좋다고 생각했다. 힘없이 늘어진 얼굴을 그러쥐는 손길은 자못 상냥하기까지 했다.
아직도 열기가 남은 숨을 토해내던 재광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모르겠어요.”
모호하기 짝이 없지만 재광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몸속을 찢어발기는 것 같으면서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쾌감이 동시에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 느낌이 고통인지 극한의 성감인지 쉽게 구분해낼 수 없었다.
“좋기는 했나 보네. 그치.”
애매한 대꾸를 알아서 해석한 의주는 재광의 고개를 제 쪽으로 돌렸다. 나른하게 풀려 있는 상태라 그런지 손쉽게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재광은 그가 키스를 하려는 줄 알았다. 합리적인 추측이었다. 여태껏 의주는 입맞춤이 후한 편이었고, 섹스 후에도 여운을 즐기듯 혀를 섞는 경우가 많았지 않나.
“….”
“….”
그런데 웬일인지 쳐다만 본다. 입술 사이의 거리가 10cm도 안 될 텐데도 달려들지 않고 눈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민망해지는 건 재광이었다. 차라리 욕정에 잡아먹힌 것처럼 정신없이 타액을 나누고 입술을 집어삼키는 게 낫지. 아무런 말도 없이 보고만 있으니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더군다나 바라보는 눈길이 퍽 다정해 더 기분이 이상했다.
“왜, 왜요.”
결국엔 참지 못하고 영문을 물었다. 투박한 말투에 웃고 만 의주는 조금 전과 같이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광아.”
“…네.”
“나는 너 좋아.”
재광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차라리 또 사귀자고 달려들었으면 딱 잘라 싫다고나 할 텐데. 장난기라도 그득했으면 눈이나 흘기고 말았을 텐데.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고백이라 마땅한 반응을 찾기가 어려웠다.
어쩔 도리가 없어 의주와 꼭 닮은 눈만 끔뻑거리는 게 다였다. 그러자 의주가 씨익 웃는다.
“설렜어?”
덧붙이는 말은 한껏 장난스러웠으나 여전히 완전한 농담으로 치부되지는 않았다. 아마 좋다던 고백의 여파가 너무도 강력하기 때문일 거다. 덕분에 재광은 더 굳건히 입을 닫아야만 했다.
입을 여는 건 의주의 몫이었다. 마주한 얼굴을 여태 손으로 감싸고 있던 그는 슬며시 재광의 뒷머리를 받쳤다. 그리고는 일정하게 유지하던 거리를 좁혀 입을 맞췄다.
앙다문 입술을 가르는 움직임이 매끄러웠다. 재광은 언제 민망했냐는 듯 스스럼없이 혀를 내줬다.
의주는 서두르지 않았다. 재광의 고른 치열을 훑었다가, 점막으로 미끄러져 입안을 길게 훑었다가. 모든 움직임이 느긋했다. 그래서인지 척척하게 울리는 마찰음이 더욱 진득하게 귓가를 자극했다.
의주의 단단한 상박을 더듬는 재광의 손길이 제법 익숙해 보였다. 살갗을 스치듯 매만지다가 입안을 채운 혀가 예민한 부근을 문지르면 즉각 손가락이 말려들었다.
손끝이 하얘질 만큼 힘이 들어갔던 손에 긴장이 풀리면 의주의 등에는 꼭 지장처럼 붉은 흔적이 남았다. 단정한 손톱자국이 일정한 간격으로 콕콕 찍힌 것으로 보아 꽤 따끔했을 법도 한데. 의주는 눈살 한번 찌푸리지 않았다.
“하, 하아….”
외려 여유롭게 숨을 틔워주며 미소 지었다.
“광아, 올라올래?”
그렇게 말하면서는 손자국이 역력한 재광의 볼기를 가볍게 쥐었다가 놨다. 잠시 고민하듯 눈동자를 굴리던 재광은 오래 걸리지 않아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재광이 아닌 건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하기는 해도 섹스에 있어서는 관대한 축이었다. 식탁에 눕히려다가 실패한 전적은 있으나 그뿐이었다. 의주가 1만큼을 양보하면 5 이상을 받아줬다.
지금도 그랬다. 이미 두 번을 사정한 재광은 지친 기색이 드러나는데도 금세 의주의 요청에 응했다. 올라오라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훤히 알면서도 내빼지 않는 거다.
재광은 큼직한 베개를 겹쳐 비스듬히 누운 의주의 위로 가볍게 올라탔다. 올라타기만 했을까. 더한 것도 했다.
“야, 재광, 읏…!”
시키지도 않았건만 손으로 의주의 중심부를 덥석 잡는다. 사정한 지 얼마 안 된 그의 것을 세우려는 행동이었다. 순간 놀란 의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곧 헛웃음을 쳤다.
“광아, 너는 대체 나를 어디까지 홀리려고 이래. 이런 건 또 어디서 배워가지고.”
“…누구 보고 배웠겠어요.”
덤덤한 목소리와 달리 손놀림이 부지런했다. 대담하게 의주의 성기를 자극하면서도 코앞의 거울만큼은 마주하기 힘든지 목이 푹 꺾여 있었다. 새카만 머리칼 아래로 보이는 귀 끝이 빨갰다.
조금 뒤, 재광은 비스듬히 상체를 기울였다. 의주의 골반 언저리를 조심스럽게 손으로 짚더니 이내 아래를 살짝 띄우기에 이른다.
내심 부끄러워하면서도 행동에는 거침이 없었다. 그새 단단히 발기한 의주의 위로 조금씩 내려앉는다.
“아…! 흐으….”
한바탕 벌어졌던 뒤는 수월하게 살덩이를 받아들였으나 마냥 편하지는 않았다. 접합부가 빈틈없이 맞닿아, 그만큼 배 속 깊숙이까지 이물감이 차는 것이다. 사방을 둘러싼 거울이 민망해 푹 수그렸던 고개가 저절로 들렸다.
“하아…. 으, 으응, 읏!”
재광은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자발적으로 시야를 차단한 터라 중심을 잡기가 더 어려웠다. 의지와 달리 뒤로 넘어간 목 때문에 무게중심이 멋대로 흔들린다. 한 번 내려앉았다 올라올 때마다 흔들리는 몸의 강도가 실제보다 훨씬 크게 느껴졌다.
금방이라도 뒤로 넘어갈 듯 불안정한 느낌을 받은 재광은 슬며시 눈을 떴다. 그러나 의주 위에서 방아를 찧는 제 모습을 마주하고는 금세 다시 포기하고 말았다.
“잡아… 잡아, 흣, 주세요. …아아!”
도로 눈꺼풀을 닫은 재광은 어쩔 수 없이 의주에게 도움을 청했다. 마음껏 재광을 감상하던 의주는 흔쾌히 팔을 뻗어 자신의 고간 위에 앉은 몸을 붙들었다. 의지할 곳이 생기자 솔직하게 안심하는 얼굴을 보며 짓는 미소가 환했다.
받쳐주는 손길이 생긴 뒤로는 재광의 움직임에도 안정감이 생겼다. 재광 또한 불안감이 지난 자리를 오롯이 채운 성감 덕분에 앓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이미 한 차례 깊숙이 박아댄 탓에 안이 흐물흐물하게 풀린 줄로만 알았는데. 잠깐 떨어진 사이에 원상복구가 됐는지 아랫배를 채우는 부피감이 빠듯하게 느껴졌다.
“아…! 하윽….”
이미 두 번의 사정으로 나른해진 몸임에도 불구하고 무릎을 온전히 접어 앉을 때마다 뒤가 잔뜩 조여든다.
느끼는 지점을 정확히 누를 때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허리를 뭉근하게 돌릴 때마다 움찔움찔 놀란 내벽이 잔뜩 수축하며 의주의 것을 타이트하게 감쌌다. 잔뜩 조인 상태에서 무릎을 세울 때면 미끈하게 표피를 쓸고 지나가는 감촉이 자못 황홀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느끼는 건 의주뿐만이 아니지 싶었다. 재광의 몸짓에 점차 속도가 붙는 거다. 헉헉거리며 가쁜 숨을 내쉬면서도 끌어올린 피치를 낮출 줄을 모른다. 상기된 얼굴을 한 그는 어느새 질끈 감았던 눈까지 뜨고서 몸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으, 흐읏… 아, 아, 윽…!”
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쾌락에 눈빛이 흐렸다. 재광은 금방이라도 고꾸라질 것처럼 위태롭게 흔들렸다.
“….”
오로지 본능에만 의지해 움직이던 재광이 돌연 멈춘 것은 조금 뒤였다.
밀려오는 쾌감을 이기지 못해 한껏 고개를 쳐들었다가 천장에 고스란히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 타이밍이었다. 이성을 놓고 흐트러진 모습을 대면하자 온 얼굴에 당황이 묻어난다.
하지만 이미 달아오른 육체를 외면할 수도 없었다. 서둘러 눈을 감은 재광은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서 다시 허리를 돌리기 시작했다. 낌새를 알아차린 의주가 비스듬히 기대 있던 몸을 완전히 일으켰다.
“이리 와.”
남들은 더 흥분한다는 연출을 이토록 견디질 못하니 어쩔 수 없었다. 의주는 재광을 안고 그의 고개를 제 어깨에 푹 기대도록 했다. 판판한 어깨에 이마가 닿자 뜨끈한 열기가 고스란히 전달된다.
“아, 아! 윽, 으읏…!”
재광의 뒷머리를 가볍게 쓸어내리는 따뜻한 손길과 달리 하체는 거칠었다. 크게 튕기며 쳐올리는 힘에 재광이 급히 의주를 끌어안았다. 간신히 호흡만 뱉어내자 의주가 재광의 귓바퀴를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으응, 아, 아아!”
“하….”
한동안은 의미 없는 탄성만 어지럽게 섞여 들였다. 의주가 단숨에 속도를 높여 안쪽 깊숙한 곳을 찔러대자 금방 사정감이 몰렸다.
“흐으… 아…!”
그로부터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의주가 꽉 조여든 내벽 안에서 체액을 쏟아내자, 간발의 차로 재광이 늘어졌다. 벌써 세 번째 사정을 맞은 터라 처음보다 한결 묽은 정액이었다.
거친 숨을 몰아쉴 때마다 아직 안에 자리한 의주의 성기가 고스란히 느껴져 죽을 맛이었다. 그러잖아도 피로도가 급상승한 요즘이라 여기서 더 느끼면 정말 졸도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손 하나 까딱할 힘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재광은 의주의 품에 늘어지듯 기대 간신히 숨만 몰아쉬었다.
의주도 굳이 재광을 떼어낼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그는 재광의 목이며 어깨에 가볍게 입 맞추며 맞닿은 몸을 더 세게 감싸 안았다.
빈틈없이 맞붙은 가슴 너머로 심장이 크게 요동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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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광은 슬며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마지막 기억은 쓰러지듯 의주에게 기댄 거였는데. 어느새 몸을 반듯하게 뉜 걸 보니 잠이라도 든 모양이었다.
이대로는 졸도할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던 기억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정신을 잃은 것까진 아닌 모양이지만 정말 기절하듯 잠이 들긴 한 듯해 멋쩍은 기분이었다.
괜스레 눈을 깜빡거리다 말고 눈동자를 굴리자 바로 곁에 앉은 의주가 보였다. 그새 일이 생긴 건지, 아니면 혼자 노는 건지. 의주는 다리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타자를 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시선을 느끼고 이쪽을 돌아본다.
“깼어?”
자상하게 웃은 의주는 팔을 뻗어 재광의 머리칼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린 손이 그대로 미끄러져 내려와 뺨을 문지른다.
“….”
재광은 아무런 말도 못 하고 가만히 눈만 끔뻑거렸다.
아직 몽롱한 정신이라서 그런 걸까. 내려다보는 시선이, 슬며시 짓는 미소가, 그리고 닿는 손길까지. 모든 게 너무 자상했다. 매사에 진지한 기색이라곤 없는 여의주치고는 너무도 따스한 모습이다.
- 나는 너 좋아.
난데없이 치고 들어온 고백 때문에 착각이 드는지도 몰랐다. 재광은 혼란스러운 기분이 되어 아쉽게 떨어져 나가는 손을 봤다.
“푹 자더라, 너. 피곤하면 피곤하다고 말을 하지.”
버티지 못할 행위를 일방적으로 밀어붙였나 싶어 하는 소리일 테다. 그런데 그렇게 얘기하는 목소리마저 너무 다정해서, 재광은 현실감 없는 기분을 도무지 지울 수가 없었다.
어쩌면 객실에 발을 들이기 전에 받은 전화가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었다.
기승전 장남으로 흐르는 지겨운 레퍼토리에 인제 와 기분이 상한 건 아니지만, 가족들에게 늘 뒷전이었던 건 맞지 않나. 그렇기에 재광에게는 오롯이 저를 향한 친절이 남다르게 다가오는 것이다.
하필이면 소소한 감동 따위가 아니라 부채감으로.
이렇게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몰래 곁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게 문득 미안해졌다. 부쩍 체력이 달린 것도 면접 준비에 몰두한 결과인데, 그런 사실도 모르고 의주가 걱정하는 체를 하니 괜히 맘 한편이 찔렸다.
“…팀장님.”
거기에 아직 남은 잠기운까지 더해져 충동적으로 입이 움직이고 만다. 잘해줄 필요 없다고, 나 딴 데 면접 보러 간다고. 사실대로 터놔야 이 부채감을 덜 수 있을 것 같았다.
“응, 왜?”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해끔하게 쳐다보는 얼굴을 보니 퍼뜩 정신이 들었다. 괜히 입방정 떨었다가 만에 하나 면접에 떨어지기라도 하면 배는 더 민망해질 것 아닌가.
“아. 아니에요.”
그래서 황급히 입을 다물었더니 의주가 반듯한 미간을 확 좁힌다.
“아 뭔데. 왜 말을 하다 말아, 사람 궁금하게.”
“아뇨, 그냥…. 저 얼마나 잤나 하고요.”
여기서 얼버무렸다가는 실토할 때까지 물고 늘어질 기세라, 재광은 되는 대로 둘러댔다.
다행히 자연스러운 말투였다. 의주도 장난스럽게 빙긋 웃는 걸 보니 아무 말이나 했다고는 생각지 않는 듯했다.
“한 시간 다 돼갈걸?”
“아….”
“야, 광. 너 잠들어가지고 시간 연장했잖아. 퇴근 시간도 지났어 지금. 와 여의주 님의 귀한 시간을 이렇게 뺏네.”
평소와 같은 오만한 언사에 재광은 하마터면 가슴을 쓸어내릴 뻔했다. 영문 모를 잠깐의 친절에 홀려 손수 무덤을 파다가 겨우 빠져나온 참이었다.
‘계속 재수 없게 굴지, 왜 갑자기 잘해줘가지고.’
내심 투덜거린 재광은 더 이상의 대꾸 없이 몸을 일으켰다. 의주가 일어나는 재광을 꾸준히 지켜보다 말고 불쑥 물었다.
“씻게?”
“여의주 님 귀한 시간 그만 뺏으려면 얼른 씻고 가야죠.”
받은 말을 고대로 돌려주자 호쾌한 웃음이 이어진다. “같이 씻을까?” 하는 말을 귓등으로 흘린 재광은 침대에 남은 의주를 뒤로하고 서둘러 욕실로 들어갔다.
부드럽게 밀린 욕실 문이 반동으로 매끄럽게 닫혔다. 그 모습을 잠자코 바라보던 의주는 픽 웃었다. 이미 볼 거 다 봤는데 같이 씻는 게 뭐라고 싶으면서도 사소한 데서 부끄럼 많은 게 귀여워 그러려니 하고 말았다.
깜빡한 사실이 떠오르기 전까지는.
“아, 맞다.”
다리 위에 올려놓은 노트북을 급히 정리한 의주는 서둘러 침대 아래로 내려갔다.
긴 다리가 조금 전 재광이 밟은 루트를 그대로 따라갔다. 불투명 처리가 된 유리문 너머로 벌써 물줄기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의주는 망설임 없이 문을 밀었다.
연인들 사이에서 호평이 자자한 곳답게 욕실 시설도 꽤 좋은 편이었다. 욕조와 샤워 부스를 구분지어 놓을 만큼 공간이 넉넉해 성인 남성 둘이 들어와도 크게 답답함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빠르게 내부를 훑은 의주는 곧장 샤워기 아래 선 재광에게로 다가갔다.
“뭐, 뭐예요 갑자기!”
그새 쫄딱 젖은 재광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씻겨주겠다느니, 같이 씻자느니. 의주가 그런 농담을 심심찮게 던지긴 했어도 진짜로 밀고 들어온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조금 전에도 그냥 싱겁게 하는 얘기인 줄로만 알았다. 그렇기에 지금 상황이 더 당황스러웠다.
“아니, 너 모를 거 같아서.”
그런데 의주는 더 모르는 소리만 하고 있으니 의문이 풀릴 리가. 재광이 어정쩡하게 서서 쳐다만 보자 의주가 덥석 팔목을 잡는다.
“뭔데요. 왜요.”
“우리 앉아서 할 때 콘돔 없이 했어.”
얼떨결에 욕조까지 끌려온 재광은 여전히 멀뚱멀뚱했다. 그럼 그렇지, 하는 마음이 된 의주가 지그시 힘을 줘 저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어깨를 눌렀다. 그 탓에 재광이 순순히 욕조 바닥에 앉는다.
“안에다 싼 거 기억 안 나? 빼야 될 거 아냐.”
그제야 재광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오른다. 만취한 상태로 의주와 두 번째 잤을 때가 떠오른 탓이다.
그때도 꼭 오늘처럼 마주 앉아 섹스를 했었다. 그런 다음 의주가 저를 돌려세웠을 때, 불쑥 드는 이물감에 앞으로 고꾸라졌던 기억이 아직도 어렴풋이 남아있었다.
“아….”
재광에게는 민망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전에는 머리끝까지 취하기나 했지, 멀쩡한 정신으로 대뜸 엉덩이를 내밀려니 이것만큼 부끄러운 것도 없었다.
“엎드려 봐. 빼줄게.”
그러나 의주는 당당히 요구했다. 어떤 동요도 없는 목소리는 꼭 이게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고 일러주는 것만 같았다. 재광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이내 욕조 프레임에 기대 엎드렸다.
“흐읍….”
상체를 숙이기 무섭게 뒤로 손가락이 밀려들어온다. 그 바람에 재광이 급히 숨을 집어삼켰다.
사실 안에 남아 있는 양이 많은 건 아니었다. 앉은 자세로 잠든 재광을 눕히려 막 몸을 떼어냈을 때 일부가 자연스레 흘러내린 탓이다.
의주는 그때 바로 빼줄까 고민도 했으나, 세상모르고 잠든 사람의 뒤를 헤집어놓기도 뭐해 그냥 뒀다. 흘러내린 흔적만 티슈로 대충 훔쳐주고 말았던 거다.
“아! 흐으….”
그래서인지 남은 체액은 깊게 고여 있었다. 그 때문에 안쪽까지 깊숙하게 손가락을 집어넣자 재광의 입술 새로 참지 못한 소리가 흘러나온다.
비록 이 상황에서도 앓는다는 게 부끄러워 금세 입술을 감쳐물고 말았지만.
참 기묘했다. 섹스를 하려는 것도 아니면서 엉덩이를 내어주는 게 수치스러운 한편, 혼자서 안에 남은 정액을 긁어내고 있었을 걸 생각하면….
그건 또 그거대로 비참할 것 같았다. 같은 남자와 몸을 전제로 관계를 이어오고 있긴 하지만, 아직 재광에게 셀프로 뒤를 쑤신다는 건 장벽이 높은 행동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뒤처리까지 섬세하게 신경 써주는 의주에게 고마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긴 한데.
“으읏…. 저기, 그만… 아!”
점점 음란해지는 손길은 고마움과 별개로 버거운 것도 사실이었다.
이미 나올 게 다 나왔다는 건 재광도 눈치껏 알았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온 손가락이 부드럽게 풀린 내벽을 자극하며 나갈 줄을 모른다.
끈질기게 괴롭히던 손가락이 빠져나간 다음에는 더한 곤혹스러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야 숨 좀 돌리려는 재광의 볼기 사이로 뜨거운 살덩이가 닿는다.
“광아, 우리 연장해서 시간 많은데.”
의주는 물에 젖어 축축한 피부 사이로 몽둥이처럼 단단하게 부푼 것을 문지르며 말했다. 은근한 말투는 누가 봐도 한 번 더 하자는 뜻이었다.
재광은 기겁하며 발딱 몸을 일으켰다. 이미 두 번의 정사, 세 번의 사정을 경험한 그에게 더 이상의 섹스는 무리였다.
“저 오늘은 진짜 더 안….”
“….”
“아….”
그렇기에 거절하려 했으나 위용을 자랑하는 의주의 중심부를 보고는 할 말을 잃었다.
“대체 왜….”
뭘 했다고 그 짧은 새 저토록 크게 발기했는지 알 수 없었다. 오히려 또 한 번 뒤를 헤집어지며 자극당한 건 자신인데 의주가 왜?
이해는 안 되지만 같은 남자로서 모르는 척할 수도 없는 상태였다. 저 정도라면 자연히 가라앉히는 게 고문일 테니까.
“광아, 너는 네가 얼마나 사람 미치게 하는지 알 필요가 있어.”
사탕발림한 말(의주는 진심이지만) 따위는 재광의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그의 머릿속은 무섭도록 부푼 저걸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고민하느라 바빴다.
“…앉아 봐요.”
결단을 내리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한 재광이 잠시간의 망설임 끝에 말을 꺼냈다. 잠자코 기다리던 의주는 순순히 재광의 뜻에 따랐다.
재광이 엎드리며 기댔던 욕조 프레임 위에는 이제 의주가 앉아 있었다. 그 아래 무릎을 꿇은 재광은 다시금 굳게 마음을 다지듯 다부진 표정이었다.
아직 말끔히 날아가지 않은 부채감과 제 몸을 건사하며 상황을 해결하려는 조급함, 동성 간의 유대 등. 복합적인 사유들이 영향을 끼친 결론이었다. 재광은 흉물스럽게 솟은 의주의 성기로 손을 뻗다가 멈칫거렸다.
“근데.”
“응?”
“입에다가 하는 것까진 안 돼요. 그건 싫어요.”
순간 의주의 눈이 크게 뜨였다.
기껏해야 손으로 대신 만져주는 정도일 거라 생각한 참이었다. 실제로 재광은 손을 뻗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입에다가 하지 말라니. 펠라티오를 하겠다는 선전포고다. 재광의 과감한 결정에 박수라도 치고 싶어진 의주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 참아 볼게.”
대답을 받아낸 재광은 그제야 온전히 의주의 것을 쥐었다.
사실 재광은 손으로만 만져줘도 충분히 해결 가능하단 생각을 미처 못 한 참이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해서인지 직접 삽입을 하지 않고 한 발 뽑아낼 방법으로 이것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아마 가장 최근의 경험이라 그랬을지도 몰랐다. 한 번씩 손으로 풀던 기억보다 의주의 입에 먹힌 기억이 훨씬 생생했으니까.
“….”
한 번도 해보지 않은 행위에 긴장한 재광이 마른침을 삼켰다. 손안에 감기는 부피감마저 압도적이라 맘먹은 것과 달리 또 망설이게 된다. 재광은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가 다물고, 조금 더 크게 벌렸다가 또 다물었다.
의주는 재촉하지 않았다. 오히려 엄두를 못 내고 망설이는 재광이 귀여워서 동그란 머리통을 한없이 인자하게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돌연 못 하겠다고 내뺀대도 봐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하….”
결단을 내린 재광이 귀두를 물었다.
암만 봐도 가늠이 안 되는지 입을 맞추듯 표피에 입술을 댔다가 천천히 턱을 끌어내린다. 벌써 버거운지 크게 벌린 턱을 미세하게 떨면서도 조금씩 고개를 내리고 있었다. 예민한 피부로 닿는 뜨거운 숨에 의주가 낮게 신음했다.
조심스럽게 성기를 머금던 재광은 서툴게 고개를 움직였다. 끝까지 다 넣지 않고 넣었다 뱉기를 반복하는데도 충분히 자극적이었다.
몇 번 고개를 움직이고 나서부터는 반동처럼 더욱 깊게 빨아들이기에 이르렀다. 미끈한 점막이 뜨거운 기둥을 감싸자 의주의 커다란 손이 반사적으로 재광의 뒷머리에 가 닿는다.
“으읍!”
머리칼을 파고든 손은 욕심껏 힘주어 뒤통수를 눌렀다. 순간 꽉 들어찬 재광의 입에서 컥, 틀어막힌 소리가 샜다. 본능적으로 조여든 목구멍이 더욱 거센 자극을 만들었다.
의주는 저도 모르게 재광의 뒷머리를 세게 움켜쥐었다가 얼른 놨다. 자꾸만 머리를 아래로 누르던 압박감이 사라지자 재광이 훨씬 가벼운 움직임으로 위아래를 오르내린다.
중간중간 턱에 힘이 풀리는지 이가 민감한 피부를 스치기도 했다. 아주 약한 강도였다. 덕분에 아프지는 않았으나 그게 더한 흥분을 불러일으킨 것만은 확실했다. 얌전히 앉아 있던 의주가 저도 모르게 허리를 튕겼다.
“…미안. 안 되겠다.”
어느새 전세 역전이었다. 의주는 이제 빨리는 게 아니라 박는 쪽에 가까웠다. 한껏 뜨거워진 살덩이가 입안 끄트머리를 쿡쿡 찌를 때마다 재광의 눈꼬리에 생리적인 눈물이 고였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뱉어낼 생각은 않는다.
간헐적으로 턱을 떨면서도 얌전히 벌린 입술 새로는 축축하게 젖은 성기가 빠르게 드나들었다. 의주의 단단한 허벅지를 짚고 있던 재광의 손끝이 하얗게 질렸다. 그쯤 되자 입안의 여린 점막을 때리는 동작에도 속도가 붙었다.
정신없이 입안을 찔러대며 성감도 최대치로 치달았다. 사정감을 느낀 의주는 재광의 머리를 받치던 손을 떼어냈다. 그러나 재광은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꾸역꾸역 버티고만 있다.
결국은 의주가 먼저 재광의 어깨를 밀어 거리를 벌렸다.
“아….”
간발의 차였다. 재광의 당부대로 입안에서 사정하지는 않았으나 윗가슴, 그리고 얼굴까지 허여멀건 액이 튀었다.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은 재광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굳은 듯 있었다. 의주가 넋을 잃고 감상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그제야 그가 입을 열었다.
“좀… 닦아주세요.”
담담한 목소리였다. 뒤늦게 정신을 일깨운 의주가 급히 물을 틀어 재광의 얼굴을 닦았다.
몇 번씩 헹궈내며 말끔히 흔적을 지워낸 다음에야 두 사람은 다시 눈을 마주칠 수 있었다.
????
재광은 불쾌해하거나 화내지 않았다.
참는 게 아니라 진짜로 별생각이 없는 거였다. 의주와 뒹굴며 몸에 체액이 묻은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었으니까.
누구의 몸에서 나왔는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맛을 보고 싶진 않았을 뿐이다. 뭐, 얼굴에 튈 거라고는 전혀 예상 못 한 게 사실이지만….
의주도 일부러 그런 그림을 연출한 눈치는 아니었으니 사고로 넘어갈 수 있었다.
“광아 나 껌 하나만.”
“네.”
덕분에 얼굴 붉힐 일 없이 출장을 마칠 수 있었다. 돌아가는 차 안, 껌을 요구하는 의주의 말에 수납 칸에서 껌 통을 꺼내 드는 재광의 손놀림이 일사불란했다.
코팅된 껌 알맹이를 두어 개 털어 건넸으나 받아들려는 기미는 안 보였다. 핸들을 쥔 의주의 손을 물끄러미 보던 재광은 한숨처럼 짧은 호흡을 토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팔을 더 길게 뻗었다.
입술 바로 앞까지 껌을 대령하자 그제야 의주가 날름 받아먹는다. 두 알을 착실하게 입안으로 밀어 넣은 입술 끝이 흡족하게 호선을 그렸다.
“참 나.”
재광은 어이없어하면서도 불만을 표하지는 않았다. 의주가 못내 제게 미안해하고 있단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본인은 괜찮다고 했지만, 남의 얼굴에 그런 실례를 범한 게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껌만 해도 그랬다. 다른 때 같았더라면 먹여주길 종용해 당장 손가락이라도 같이 물었을 거다. 그러나 용건만 간단히 껌만 집어삼키지 않았나. 그것만으로도 의주에게는 한 수 크게 물러준 격일 터였다.
심지어 고속도로를 타는 내내 잡소리도 일절 들리지 않았다. 이만하면 의주도 꽤 참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나쁘지 않았다. 재광이 진심으로 기분이 상했다면 이마저도 짜증스러웠겠지만, 지금은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의주가 얌전한 꼴을 볼까 싶어 내심 재밌기도 했다.
‘잠깐, 여의주가 얌전하다고?’
문득 드는 생각에는 재광의 눈이 가늘어졌다. 고개를 정면으로 고정하고 바깥을 내다보는 척하면서 눈동자는 슬쩍 운전석 쪽으로 향한다.
갑자기 사고가 비상하게 굴러간다. 이 기회를 잘 이용해야 한다는 양 머릿속에서 빨간 불이 번쩍번쩍 튄다.
재광은 혀끝을 살짝 내어 마른 입술을 축였다. 슬그머니 눈치를 살피는 건 덤이었다. 그는 의주의 얼굴에 짓궂은 낌새가 없다는 걸 확인한 뒤 천천히 말문을 텄다.
“저기, 팀장님.”
“응, 왜.”
“저 다음 주에 하루 쉴 수 있어요?”
맞다. 면접 날이다.
아까까지만 해도 잘해주는 의주 몰래 이직을 준비한다는 게 미안했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아무리 부채감이 느껴진대도 다신 없을지도 모를 기회를 날려버릴 순 없었다.
목표를 위해 한 번은 꼭 거쳐야 하는 과정이라면 되도록 수월하게 넘어갔으면 했다. 이런 자신이 속물적이고 간사한 것 같더라도 말이다.
“다음 주? 언제?”
“목요일이요.”
“왜, 무슨 일 있어?”
“아 그냥 좀…. 큰일은 아니고요.”
의주는 장난으로라도 미심쩍어하는 척 한번 안 했다. 일정을 따져볼 틈도 없이 곧장 “그래” 하고 마는 거다. 재광이 내심 긴장한 게 무색할 정도로 흔쾌한 태도였다.
“내일 출근하면 휴가계 써서 올려.”
“넵.”
재광은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오려는 걸 숨기려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평일의 밤, 한산한 고속도로 풍경이 빠르게 차창을 지나쳐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