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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5. Protocol (5/21)

일러두기

-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지명, 기업, 사건 등은 실제 현실과 관련 없는 허구입니다.

-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표준어문규범을 준용하지 않고 작성된 부분이 있습니다.

5. Protocol

두 사람 모두 맨정신일 때 뒤엉키기는 처음이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한순간 불타오른 욕정에 눈이 먼 상태였으니 완전한 맨정신이라 하기에는 무리가 좀 있겠지만. 어쨌든 간에 둘은 술 한 방울 마시지 않고 잤다.

만취해 벌이던 행각을 멀쩡한 의식으로 할 수 있을까. 혹여 어색하진 않을까. 의주의 집에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재광은 어렴풋이 그런 생각을 했으나 다 기우에 불과했다.

신발을 벗기 무섭게 몰아치는 의주 덕에 어색할 틈이 없었다. 취기 없는 재광을 안는 게 그에게도 적지 않은 자극을 준 듯했다. 의주는 이전보다 훨씬 조급하게 굴었다.

그런 그를 받아들여야 하는 재광으로서는 그래서 더 버거웠던 게 사실이지만….

결국에는 좋았다. 저와 같은 염색체를 가진 상대와의 관계에서 이래도 되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 만큼.

“….”

재광은 온몸에 두른 거품을 씻어냈다. 그간 의주의 집 욕실에서 씻을 때마다 금방이라도 땅굴을 파고 들어갈 듯 착잡한 심정이었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그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정신이 멀쩡할 때 사고를 치고 나니 더 편한 마음이었다. 어쩌면 이번까지 몸을 섞고 나면 관계를 바로잡을 기회가 영영 없을 거란 사실을 알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지난하던 고민이 드디어 끝을 맺은 셈이다.

알면서도 당장의 욕구와 충동에 휩싸여 거절하지 않은 것. 그리고 다음의 상황이 훤히 보이는데도 받아들인 것은 모두 재광의 선택이었다. 피로와 스트레스로 회까닥 돌았었대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자의로 막다른 길까지 온 그는 덤덤한 얼굴로 샤워를 끝마쳤다.

“그냥 자고 가지?”

대충 물기를 거둬내고 옷을 착착 꿰입을 때였다. 편한 차림을 한 의주가 툭 내뱉듯 묻는다.

“또 외박하면 집에서 뭔 일 날지 몰라요.”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재광은 단숨에 겉옷까지 걸쳤다.

그냥 막 둘러대는 핑계는 아니었다. 실제로 민광은 연락 없는 외박이 잦다며 지적하지 않았던가.

민광은 장남으로서 받은 사랑에 보답하듯 제법 살가운 아들 노릇을 하는 인간이라, 오늘마저 집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재광의 행실이 당장 부모님 귀에 들어갈 터였다.

뭐, 지금이라도 집에 가야 기출 문제 하나라도 보고 잘 수 있기도 했고.

“가, 그럼. 데려다줄게.”

의주도 더 붙잡을 생각은 없는 듯했다. 꽤 흔쾌한 목소리로 말하며 차키를 챙긴다. 선뜻 앞장을 서던 그는 한 발 떼기 무섭게 도로 멈춰 서 뒤를 돌아봤다.

“야, 광.”

“네.”

“나 방금 멋있지 않았냐?”

“예?”

“매너 미쳤어. 이 시간에 데려다준대. 와.”

고민하는 기색 없이 데려다주겠다며 차키를 집어 든 본인의 행동이 퍽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재광은 긴 눈매로 직선을 그리며 으, 하는 표정을 지었다. 늦은 시간에 굳이 데려다주겠다는 건 고마운 일이지만, 자화자찬의 태도에는 아직 면역이 모자랐다.

그러거나 말거나였다. 의주는 여전히 제 매너에 감탄하며 현관으로 쭉쭉 걸어 나갔다.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로, 지하주차장에서 내려 차에 도달하기까지. 그는 줄곧 자신의 매력에 심취해 있었다.

“타시죠.”

매너남에 과몰입해 조수석 문까지 열어준다. 난생처음 받아보는 에스코트에 흠칫한 재광은 떨떠름한 안색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어쩔 도리도 없었다. 어차피 타야 할 자리, 이미 열린 문을 닫았다 다시 열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그는 조금 뜸을 들이다 말고 얌전히 조수석에 올라탔다.

의주는 어지간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재광이 앉기를 기다렸다가 경쾌하게 문을 닫아주기까지 한다. 그런 뒤에야 저도 운전석으로 이동했다.

“야, 광. 결국 이럴 거면서 왜 튕겼어. 애태우는 게 취미야?”

그렇게 물은 것은 막 시동을 걸 때였다. 자칫 타박처럼 들릴 수 있겠으나 그런 말투는 아니었다. 오히려 염원하던 목표를 이뤄 들뜬 목소리였다.

재광은 안전벨트를 잡아당기면서 무던하게 대꾸했다.

“그렇다고 사귀겠다는 건 아니에요.”

여태 즐거워 죽던 의주가 빠른 속도로 고개를 돌려 재광을 본다. 차마 눈을 맞추지 못한 재광은 안전벨트 클립을 채운 뒤 정면 유리 너머만 바라봤다.

“어차피 팀장님도 저 좋아서 사귀자는 거 아니잖아요.”

재광이 타협할 수 있는 선이 여기까지라는 의미다. 이날 이때껏 당연하게 여겨온 자신의 성 지향성 일부를 내어주며 육체적 관계를 허락하는 대신, 감정까지는 허락할 수 없었다.

어엿한 성인으로서 자신의 행동, 그리고 선택을 책임지는 편을 택한 것이다. 정서적 교감이라곤 조금도 없는 사람에게 연인이라는 이름까지 붙여 깡통 같은 연애를 하고 싶진 않았다.

어차피 이러나저러나 비정상이지 않던가. 난데없이 남자와 연애를 하는 것도, 마음 없는 사람과 욕망으로 엮여 자는 것도. 양쪽 모두 육체적 결합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면, 몸만 내어주는 쪽이 덜 손해일 것 같았다.

나름대로는 가장 합리적인 지점을 찾는다고 찾은 거다. 재광이 말하는 내내 입꼬리를 움찔거리던 의주가 끝내 소리 내 호탕하게 웃었다.

“야, 광.”

의주는 비꼬려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재밌어하고 있었다. 사귀지도 않는 상대와 어떻게 몸만 섞냐던 재광이었지 않나. 그렇기에 조금 전 침대에서의 일은 사귀자는 제안에 대한 화답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인제 와서 사귀자는 건 아니란다. 의주는 툭 던지듯 말했다.

“나 너 좋아해.”

대뜸 사귀자던 그때의 말투와 같았다. 진지함이라곤 조금도 보이지 않고 오히려 실없는.

그러니 재광의 귀에 그게 진심처럼 들릴 리가 있나. 재광은 좋아한다는 고백에도 동요하는 기색 하나 없이 담담했다.

“몸이 좋은 거겠죠.”

“아닌데?”

“그럼요.”

“얼굴도 좋아해.”

기어 스틱을 쥐던 손이 불시에 올라온다. 의주의 손끝이 재광의 볼을 가볍게 문질렀다.

솔직하게 터놓자면 저를 닮은 얼굴과 잘 맞는 몸. 거기에 그치지 않고 담담한 성격에 종종 예상을 벗어나는 행동까지도 모두 좋았다. 그 옆에 오로지 저만 남고 싶을 만큼.

하지만 온전히 그 맘을 표현할 수는 없었다.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다. 상대방이 이 감정을 오롯이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걸 알아서다. 여기서 진심 운운하며 몰아치면 그나마 허락받은 몸마저도 내빼버릴지 몰랐다. 부러 무게감 없는 목소리를 낸 것도 그 때문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잘 통한 모양이었다. 재광은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흘리고 만다. 의주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확실히 할 건 해야지.”

“뭘요?”

“나랑만 해.”

쓸데없이 단호한 말투였다.

의주에게는 이 점이 정말 중요했다. 당장은 육체적인 관계에 머무르더라도 이것만은 확실히 해야 하는 것이다. 다른 누가 끼어들 수 없는 둘만의 교류라는 걸 말이다.

의주의 심각함과 달리 재광은 당장 경멸의 시선을 보냈다.

‘사람을 대체 뭐로 보고….’

경멸이 아니라 조금 억울한 눈빛 같기도 했다. 이 결정을 내리기까지 얼마나 맘을 앓고 속을 썩였는데. 나랑만 하자는 의주의 말은 꼭 재광을 끌리면 아무나와 붙어먹는 사람쯤으로 여기는 것 같지 않은가.

불쾌함을 만면 가득 드러내자 의주가 싱긋 웃는다.

“그치? 좋아. 그거면 돼.”

재광의 뉘앙스를 정확히 읽은 그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태 시동만 걸린 상태로 미동이 없던 차가 그제야 마음 놓고 바퀴를 굴렸다.

“대신에요.”

재광은 느릿하게 지나치는 주차장 풍경을 보며 다시금 입술을 뗐다. ‘대신’이라는 말에 정면을 응시한 의주가 눈썹을 달싹거린다.

“괴롭히는 건 하지 말기로 해요.”

“내가? 너를?”

금시초문이라는 양 묻자 재광이 내리깐 눈꺼풀 아래로 눈동자를 바쁘게 굴린다.

답지 않게 파격적인 관계를 이어가기로 결단을 내렸지만, 이런 대화를 태연하게 하는 건 익숙지 않은 탓이다. 어떻게 해야 순화할 수 있을지 고민하던 그는 느릿하게 운을 뗐다.

“그, 마지막에….”

“마지막에 뭐?”

“아, 그, 왜. 손 못 대게 하고 그런 거요. 그런 건 싫다고요.”

말은 길었으나 중요한 단어는 거의 생략되거나 에둘러 표현하고 있었다. 맥락으로 보자면 못 알아먹을 정도는 아니었으나 의주는 뻔뻔하게 모르쇠로 일관했다.

“손을 어디다 못 대? 왜 못 대게 해? 내가 그랬다고?”

“아니, 그니까 저번처럼 괜히 못 가게 방해하지 말라고요! 서로 좋자고 하는 거면서 왜….”

답답함에 버럭 언성을 높이던 재광이 자신의 언사에 놀라 황급히 말끝을 줄인다. 살살 신경을 긁어 큰 반응을 끌어내고 만 의주는 만족스럽게 빙긋 웃었다.

“많이 힘들었어? 아, 오케이. 싫다는 건 안 할게.”

흔쾌한 대답에 재광은 눈만 흘기고 말았다.

????

“CTO 출근 완료했습니다. 다들 좋은 아침!”

원래도 화려한 출근을 즐기는 의주는 여느 때보다 더 밝은 얼굴로 나타났다. 다른 직원들이 보기에도 그의 하이 텐션이 티가 났는지 어디선가 “오늘 기분 좋으신가 보네”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체로 다들 그러려니 하는 분위기였다. 재광 또한 그랬다.

“안녕하세요.”

재광 본인이 생각해도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 못 할 자연스러움이었다. 그래도 서로 파트너가 되기로 하고는 첫 만남인데. 이토록 아무렇지 않다는 게 스스로도 놀라울 지경이었다.

안 된다는 이성을 욕구가 무자비하게 이겨버린 영향이 컸다. 갈등하면서도 순순히 의주를 따라나서던 그때부터 이미 재광의 안에서는 뭔가가 하나 뚝 끊겨 나간 기분이었다.

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내려놓았다는 정도가 될 수도 있겠다. 자신은 이미 정상궤도를 벗어났고, 돌이킬 수 없음을 인정하고 나자 꼭 대가처럼 뻔뻔함이 생겼다. 덕분에 재광은 언제나와 같은 태도로 회사생활에 임할 수 있었다.

임하기만 할까. 발등에 떨어진 불을 꺼야 해 평소보다 더 부지런히 움직였다.

어젯밤, 늦게까지 한 야근이 무색하게 됐잖은가. 갑작스럽게 달아오른 열기를 해소하느라 화면 출력 오류는 끝내 잡지 못한 차였다. 그래서 다급한 마음을 애써 침착하게 어르며 코드를 첫 줄부터 살피는데….

“빨리 왔네.”

곁을 지나치던 의주의 손이 불쑥 고개 아래로 들어온다.

마치 강아지 턱 간질이듯 하는 손길이었다. 손가락을 현란하게 움직이며 피부를 훑자 재광이 눈에 띄게 움찔거린다.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서 의주를 향하던 눈길은 곧 다른 직원들을 살폈다. 다들 각자의 일에 몰두해 이쪽은 신경도 안 쓰는 눈치였다.

하지만 재광은 태연할 수가 없었다. 어제 이 시간까지는 그저 직장 상사와 부하 직원 사이였지만, 오늘은 그렇지 않다는 게 마음 한편을 콕콕 쑤시는 거다. 의주의 난데없는 스킨십을 가볍게 넘길 수가 없었다.

제법 뻔뻔히 굴게 됐다고 생각한 게 조금 전이건만 아직 이것까지는 무리인 모양이었다.

“딴 사람들 있는데서 이러지 마세요.”

음량을 잔뜩 낮춰 속삭이는 말에 의주는 킥킥 웃었다. 그러더니 웃음기 남은 눈으로 재광을 봤다.

“하지 마? 알았어.”

흔쾌히 요구를 들어주겠다는데도 묘하게 찝찝함이 남는 대답이었다.

욕구가 이성을 누르는 순간부터 각오는 했지만, 재광은 아무래도 이 관계가 예상보다 더 힘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

의주와 재광의 사이는 예상과 달리 수월하게 이어졌다.

뜻밖에도 두 사람의 쿵짝이 잘 맞았다거나 한 건 아니고, 평탄치 못할 일이 생길 틈 없이 바빴던 탓이 컸다.

재광이 남몰래 타 기업 인적성 시험을 보기까지 둘 사이에는 단 한 번의 교류만 있었다. 야심한 밤, 퇴근길을 함께 하다 충동적으로 가진 관계였다. 그것도 속전속결로, 파트너라는 이름에 걸맞게 주고받아야 할 것만 딱 하고 헤어졌다.

결과만 놓고 보자면 둘 사이에 대해 고민하던 때보다도 깔끔한 게 사실이었다. 다소 허무하지만, 재광은 그래서 더 의주와의 관계 변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더군다나 의주가 의외로 재광의 요구를 잘 받아주기도 했고.

- 딴 사람들 있는 데서 이러지 마세요.

- 하지 마? 알았어.

난데없이 턱으로 손이 들어오던 그때, 한껏 언성을 낮춰 전한 말을 의주는 착실하게 지켰다. 지지리 말도 안 들을 것처럼 굴면서 나름대로 파트너십은 있는 모양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그게 인터넷에 돌아다닐 법한 전형적 이과 인간의 태도라는 것 정도.

“이러지 마세요”라고 했을 때 재광의 ‘이러지’는 남들에게 의심을 살 만한 접촉 모두를 포함하는 표현이었으나, 의주의 ‘이러지’는 턱을 간질이는 행위로 한정됐다.

재광도 몸만 섞는 사이에 그런 차이까지 세세하게 파악하려 노력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의지와는 다르게 알게 됐다.

턱에 닿은 손길을 거둔 이후 의주의 손이 다른 곳을 향하기 시작한 것이다.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에 문득 목덜미를 진득하게 쓸어내리는가 하면, 그거 하지 말랬더니 다음에는 허리를 가로질러 옆구리를 지분거렸다.

요구를 순순히 들어주면서도 결국엔 듣지 않는 태도였다. 살살 약을 올리는 것 같기는 하지만 재광은 화내지 않았다.

들어주는 시늉이라도 하는 게 어디냐 싶었던 거다. 오히려 요즘에는 저 인간 어디까지 하나 보자는 오기마저 생겼다.

어쩌면 재광이 의주에게 가진 편견 때문에 이런 점들을 더 참을 만하게 느끼는지도 몰랐다.

아닌 게 아니라, 저 인간과 엮이면 필시 곤란한 일들이 벌어질 거라 확신하고 있었으니까. 알면서도 결국 욕구에 굴복하긴 했다만, 그래서 더 각오를 단단히 한 것도 사실이었다.

은연중에 최악을 상상했으니 그에 한참 못 미치는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 훨씬 속이 편한 것도 당연했다.

여의주 팀장님

야 광 오전 10:00

오늘은 유독 고요한 오전이었다. 재광을 괴롭히던 출력 오류도 의주의 도움을 받아 해결한 지 오래고, 의주가 매달리던 신규 앱 주요 기능 테스트도 바로 어제 끝이 났다.

간만에 숨 돌릴 틈이 주어진 참이다. 재광은 모니터 아래서 불쑥 올라오는 메시지 알림을 흘긋 봤다.

두 사람의 관계가 정의된 이후 직접 몸으로 부딪친 건 단 한 번뿐이었다. 하지만 사적으로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드는 것만은 확실했다.

지금처럼 사사롭게 오가는 메시지도 부쩍 친근해진 사이를 보여주는 단면이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일 얘기는 대화로 오갔던 터라, 회사에서 굳이 메신저를 이용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재광이 결단을 내린 이후로는 심심찮게 메신저가 울렸다.

대개는 영양가 없는 얘기들이었다. 의주가 재광을 골려 먹을 작정으로 시답잖은 농담을 치면 재광은 단답으로 일관하는 양상이 반복됐다.

이번에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예상한 재광은 무표정한 얼굴로 빠르게 타자를 쳤다.

네오전 10:04

여의주 팀장님

집에서 반찬 보내줬는데 저녁에 와

멸치볶음 먹고 가♥♥♥♥♥ 오전 10:05

..? 오전 10:06

큰 산을 넘고 간신히 숨 고르는 타이밍에 권하는 저녁이 무슨 뜻인지는 재광도 알고 있었다. 그저 라면도 아니고 웬 멸치볶음인가 싶었을 뿐.

생각해보면 지난번에도 그랬다. 자신의 다정함을 어필하며 사귀는 게 어떻겠냐 말하던 의주는 재광의 앞에 손도 안 댄 멸치볶음을 그릇째로 내밀었었다.

둘 사이에 꼭 보편적인 무드를 찾아야 할 이유는 없겠지만, 왜 하필 흔한 밑반찬이 밀어처럼 쓰이는지는 의문스러웠다.

재광이 느릿하게 던진 물음표의 의미는 바로 그거였다. 그러나 물음표를 받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정확한 포인트를 짚지 못할 만했다. 답이 없던 의주는 대뜸 육성으로 재광을 불렀다.

“야, 광.”

재광이 곁을 돌아보자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말이 이어진다.

“눈치 실종됐어?”

“그게 아니라….”

왜 하필 멸치볶음인지 몰라서 그랬다고. 그리 답하려던 재광은 끝내 말을 줄였다.

설사 남들이 듣는다 해도 밑반찬에 관한 토론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을 테지만, 어쨌든 육체적 관계로 이어질 이야기를 공개적인 장소에서 하고 싶진 않았다.

“아니에요. 그렇게 할게요.”

그래서 결론만 얼른 말했더니 의주가 흡족한 미소를 띤다. 용건을 마친 그는 일이나 하라며 금세 상사의 태도로 돌아갔다.

????

귀하디귀한 아들이라 집에서는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할 것 같던 의주는 생각보다 섬세했다. 신경 써 구매한 듯한 그릇에 반찬을 일일이 옮겨 담는 동작은 물론이고, 전기밥솥에서 밥을 푸는 것까지도 자연스러웠다.

하기야 세상에서 저 자신이 제일 중요한 사람이니 한 끼를 먹더라도 제대로 차려 먹을 가능성이 크긴 했다. 그렇다 치면 당연하게 밥이 들어 있는 밥솥과 번거로울 법한 플레이팅도 납득이 됐다.

제 몫의 밥그릇을 쳐다보던 재광은 곧 형식적인 인사를 전했다.

“잘 먹을게요.”

의주의 집에는 벌써 다섯 번째 방문이었으나 식탁 앞에 앉아보기는 처음이었다. 그 때문인지 조금은 어색한 말투가 튀어 나갔다.

다행히 의주는 밥상머리 앞에서 말꼬리를 잡아 놀릴 의향은 없어 보였다. 대신 그는 무언가 잔뜩 기대하는 눈치로 재광을 주시했다. 덕분에 막 밥을 한술 뜬 재광의 젓가락이 버벅버벅 움직였다.

퀴즈의 정답을 맞히듯 젓가락이 향한 곳은 멸치볶음이었다. 종지에 소량만 덜어도 충분할 것을 메인 반찬처럼 수북하게도 담아놨다. 재광이 작은 멸치 몇 마리를 집을 때는 의주의 눈이 반짝 빛나기까지 했다.

아무래도 독특한 암구호에 그치지 않고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모양이었다. 재광은 대놓고 저를 감상하는 의주를 미심쩍게 쳐다봤다. 그리고는 밥을 꼴딱 삼킨 뒤 입을 열었다.

“근데 왜 자꾸 저한테 이거 주시는 거예요?”

“좋아하잖아.”

“제가요?”

“아니야?”

0.1초의 틈도 없이 이어지던 대화 끝에 먼저 침묵한 쪽은 재광이었다. 그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눈만 끔뻑거렸다.

솔직히 재광은 의주가 자신을 놀리는 줄로만 알았다. 주야장천 야근하던 시기, 캐비닛 위의 컵라면을 내릴 때만 해도 그랬잖은가. 작아서 저기 안 닿는 거냐느니, 귀엽다느니 하면서.

하필이면 칼슘 함유량이 많다는 메뉴라 같은 맥락으로 해석하기 딱 좋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고.

“너 입사 첫날에 이거만 먹어서 그런 줄 알았지.”

이건 좀 기분이 이상했다. 한시라도 못 놀려 먹으면 입이 근질거리는 인간이 정말 챙겨줄 뜻으로 반찬을 권했다니.

그러고 보면 의주는 대뜸 사귀자고 하던 날 전에도 그랬었다. 잘난 형 덕에 주말 아침부터 방황하다가 의주를 만났던 날이다. 얼떨결에 고속도로를 타고 도착한 식당에서도 그는 재광의 앞에 마른반찬을 밀어줬다.

재광은 머릿속 어딘가에 남은 말을 상기하며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 내가 그냥 머리가 좋은 게 아니라 기억력도 좋거든. 그래서 뭐 하나 쉽게 까먹질 않으니까 딴 사람들한테 다정할 수밖에 없어.

기억력이 좋다더니 이 정도일 줄이야. 그냥 가장 가까이에 있는 반찬이라 자주 집어먹었던 걸 보고 몇 번이나 챙겨줄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 은근히 사람 챙길 줄도 알고 섬세하더라고요.

- 나 몇 번 설렜잖아.

재광은 의주에 관한 직원들의 이야기를 이제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잖은가. 정작 한집에 사는 핏줄은 평생 동생이 뭘 좋아하는지 관심을 가져보려 한 적도 없건만, 정작 악연이라 여겨온 남은 잠깐의 행동만 보고도 그걸 기억해 챙겨주고 있었다.

단순히 뛰어난 기억력 때문이라 하더라도 내심 감성을 자극하는 행동인 것만은 분명했다. 그게 터무니없는 헛다리였대도 말이다.

“안 좋아해?”

“아니요, 안 좋아하는 건 아니고….”

맘 같아서는 제대로 잘못 짚었다고 놀려주고 싶지만 차마 그러지 못한 이유도 그래서였다. 재광은 이도 저도 아닌 대답만 하며 밥을 한 숟가락 크게 떠 입안에 넣었다.

재광이 말을 줄이자 식탁 위로 짧은 정적이 찾아든다. 이대로라면 분위기가 금방 어색해진대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의주의 웃음소리가 짤막한 침묵을 깼다.

“야, 광. 너 고작 이 정도에 감동 먹은 거야?”

쓸데없이 눈치는 빨라서 금세 정곡을 찌른다. 속으로 그렇게 느끼더라도 곧이곧대로 표현하고 싶은 맘이 없는 재광은 애써 태연한 척 굴었다.

“그냥 밥 먹은 건데요.”

물론 의주가 거기에 장단을 맞춰줄 리는 없었지만.

“더 먹고 싶은 거 있으면 형아가 가져다줄 테니까 많이 먹어. 너무 감동해서 눈물 젖은 밥 먹지 말고 천천히 꼭꼭 씹어서. 알았지?”

적당히 모르는 체해주면 조금 오버해서 진짜 울컥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의주는 기어이 한술 더 떠 재광이 냉정을 찾게 도왔다.

“아, 여의주 님 이렇게 꼼꼼하고 다정해서 남자 여럿 울리긴 했지. 이게 또 천성이라 쉽게 바뀌지가 않네. 연애를 2년을 쉬어도 변함이 없어. 너무 다정해서 큰일이야.”

재광은 뭐라 대꾸하는 대신 밥을 우물거리며 한심한 눈길을 보내는 게 다였다.

상대방이 내심 감동한 것도 득달같이 알아차리는 의주가 그 눈빛의 의미를 모를 리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선택적 눈치를 발휘했다.

“야, 광. 반할 거 같으면 그냥 맘 놓고 반해. 끌리는 건 어쩔 수 없지. 암 그렇고말고.”

“밥 좀 드세요.”

결국 침묵으로 일관하던 재광이 입술을 떼기에 이른다. 그는 손수 의주에게 숟가락을 쥐여주며 조용히 할 것을 정중히 부탁했다.

의주는 그 짧은 새에도 잠깐을 못 참고 재광의 손등을 간질이며 장난을 걸었다. 잽싸게 손을 빼낸 재광이 한층 깊어진 경멸의 눈길을 보낸 뒤에야 온전한 식사시간이 됐다.

????

의주는 참 알다가도 모를 인간이었다. 편견 가득한 시선으로 보며 못마땅한 감정을 품다가도 불쑥불쑥 좀 괜찮나, 싶게 만드는 구석이 있는 거다.

그런 생각을 할라치면 금세 깐족거리는 통에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긴 하지만, 그래도 꽤 자주 예상치 못한 면모를 보이는 것만은 분명했다.

지금만 해도 그랬다. 여의주 님께서 하사하신 밥상을 받았으니 뒷정리 정도는 당연히 해야 한다며 등을 떠밀어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의주는 재광을 철저히 손님으로 취급하며 빈 그릇에 손도 못 대게 했다.

“야, 광. 이리 좀 와 봐.”

의주의 목소리는 한창 이어지던 물소리가 끊긴 뒤에야 흘러나왔다.

재광이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을 때였다. 손윗사람 호출에 반응이 빠른 그는 순순히 전원을 끄고 부엌으로 갔다.

설거지를 다 마친 의주는 여전히 싱크대 앞에 서 있었다. 하도 다급하게 손짓하는 통에 재광이 덩달아 걸음을 빨리해 다가섰다.

“뭔데 그렇게 급히… 아!”

그리고 곁에 서기 무섭게 턱이 붙들리고 말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재광이 크게 움찔거렸으나 의주는 개의치 않았다. 한 손으로 재광의 하관을 우악스럽게 쥐고서 순간 벌어진 입술 사이로 무언가를 쑥 집어넣는 것이다.

빠르기만 할 뿐, 조심스럽거나 부드러운 동작은 아니었다. 그 바람에 재광의 입안에 들어간 나무 숟가락이 이에 부딪혀 둔탁한 소리를 냈다.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아기 새처럼 받아먹은 꼴이 된 재광은 뭐라 따지지도 못하고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입안의 것을 씹는 그의 표정이 오묘했다.

“맛있어?”

끈적하게 입안에 남은 무언가는 다디달면서도 씁쓰름한 향을 겸비하고 있었다. 재광이 평소에 단 음식을 썩 좋아하지도 않는 편이라, 맛있느냐 묻는다면 그저 그렇다고 답할 법한 그런 맛이다.

“이게 뭔데요.”

“이거? 꿀인삼. 아니, 맛이 어떻냐니까?”

“꿀이랑 인삼 맛이에요. 달고 써요.”

간결한 평에 잔뜩 실망한 내색을 한 의주는 고개를 설설 저으며 유리병 뚜껑을 닫았다. “쓴 거 싫은데” 하고 중얼거리는 꼴로 보아, 재광을 기미의 용도로 불러다 쓴 듯했다.

아마 실망한 원인 또한 지극히 간단한 평 때문이 아니라 쓰다는 반응에서 비롯된 게 틀림없었다.

“집에서 보내준 거 아니에요? 맛이라도 보시지.”

유리병을 미련 없이 내려놓는 모습을 본 재광이 말했다.

답지 않은 오지랖이지만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어화둥둥 장남 바람 불면 날아갈까, 툭 치면 부러질까. 형에게 지극정성인 부모님을 지금껏 봐온 탓이다.

직접 몇 시간씩 푹 곤 곰탕, 용하다는 한의원에 몇 달씩 대기를 걸어 맞춰온 보약, 웃돈까지 얹어 좋은 놈으로 구한 홍삼을 달인 진액까지.

말로는 곰탕 한 그릇, 보약 한 채로 간단히 설명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 노고를 필요로 하는지. 재광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알기만 할까. 한참 치기가 치솟던 고등학교 시절에는 형에게 보내려던 보약을 한 팩 빼먹다 걸려서 부모님께 등짝을 맞았고, 몇 달 전만 해도 냉장고에 못 보던 유리병이 있어 한 숟가락 맛봤다가 형에게 조인트를 까였다.

그만큼 송수신인의 호응이 중요하단 의미다.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게 그걸 재광의 입에 넣어주고 저는 맛도 안 보다니. 졸지에 보양한 재광은 그 태도가 신기했다.

“한입 더 먹을래?”

그러나 의주는 여전히 시도해볼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먹어볼까 말까 고민하는 기색 하나 없이 재차 재광의 뺨을 붙들고 본다.

불시에 얼굴이 또 잡힌 재광이 이번에는 꽤 거칠게 그의 손을 뿌리쳤다.

“아니 근데 그거 좀.”

의주는 손길을 거절당하고도 민망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똑 닮은 눈만 동그랗게 뜨며 “응?” 하고 물었다.

“얼굴이요. 그렇게 잡지 마시라구요. 그, 할 때는 상관없긴 한데 그래도 평소에는 좀….”

잠자코 재광의 말을 듣던 의주가 별안간 크게 웃었다.

재밌었다. 하지 말라고 행동을 말리면서 거는 조건이 ‘할 때’는 상관없다니. 사귀지도 않으면서 몸만 섞는 관계는 절대 있을 수 없다던 재광의 언사치고는 너무 요망했다. 와중에 호기롭게 말을 꺼내놓고 끝을 맺지 못하는 건 귀엽기도 했고.

의주는 대체 왜 웃는지 이해 못 하는 재광을 앞에 두고 이만 웃음기를 지웠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파안대소하던 얼굴이 짐짓 심각해진다.

“야, 광.”

“….”

“거기가 성감대야?”

“그게 지금 무슨!”

재광은 세상 억울한 얼굴이면서도 반박은 제대로 못 했다. 내 성감대가 얼굴인 게 아니라 네가 내 얼굴을 보고 꼴리는 게 문제라고. 그런 얘길 솔직히 하기에는 아직 재광의 철판이 턱없이 얇았다.

그래도 뜻은 충분히 전했다고 생각했는데. 의주는 보란 듯이 재광의 턱을 재차 쥐었다.

그간 요구에 잘 응해준다 했더니 이건 또 무슨 짓인가 싶은 재광이 인상을 팍 썼다. 의주는 가까이서 얼굴을 마주하며 싱긋 웃었다.

“할 때는 상관없다며.”

그렇게 말하고는 곧장 재광의 입술을 덮었다.

의주는 한바탕 재광의 입안을 헤집었다. 씁쓰름하게 남은 인삼의 향이 채 가시기도 전이었다. 쓴 게 싫다던 그는 솔직하게 인상을 구기면서도 쉽게 물러서지는 않았다.

급한 몸짓에는 조금 뒤 제동이 걸렸다. 속절없이 밀리던 재광의 다리 뒤편에 식탁이 걸리면서였다. 요란하게 가구 끌리는 소리가 나고, 약한 마찰에 놀란 재광이 그대로 멈춰 섰다.

잘 받아주던 상대가 굳어버리자 의주도 덩달아 멈췄다. 아주 잠시였다. 흘긋 부딪힌 가구를 본 그는 뒤에 걸린 게 뭐든 상관없다는 양 곧장 재광의 뒷목을 감쌌다.

오히려 단단하고 넓은 상판이 반가운 것처럼 보이는 태도였다. 의주는 상체에 힘을 실어 재광의 어깨를 누르려 들었다.

“자, 잠깐.”

자신의 몸에 가해지는 힘을 재광이 못 느낄 리 없었다. 누가 봐도 저를 식탁 위에 눕히려는 시도다. 당황한 그는 허둥대며 의주를 붙잡았다. 제 목 뒤를 감싼 손목과 눈앞에 보이는 어깨. 그냥 잡히는 대로 잡고 봤다.

“왜.”

“…안 돼요, 여기서는.”

이 넓은 집에 멀쩡한 침실을 두고. 하다못해 푹신한 가구만 몇인데 왜 하필 식탁이란 말인가. 재광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더군다나 오늘은 오랜만에 일찍 퇴근한 날이라 시간도 널널했다. 재광도 인적성 시험이 끝난 차라 일찍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다. 즉, 있던 자리에서 급히 해결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거다.

“싫은 거 안 하기로 했잖아요.”

재광은 절실한 눈빛으로 달래듯 말했다. 그러자 의주가 얕은 한숨을 쉬며 어쩔 수 없이 수긍한다. 말 대신 몸으로.

“악! 아, 왜 이래요!”

재광은 의주에게 밀리고 밀리다 결국 식탁 끄트머리에 걸터앉은 자세였다. 그런데 불쑥 몸이 허공으로 들린다. 허리께를 파고든 의주가 그를 짐짝처럼 둘러멘 탓이다.

순식간에 몸이 접혀 의주의 등과 마주한 재광은 어쩔 줄을 몰라 발버둥을 쳤다. 그에 의주는 엉덩이를 찰싹 치며 가만히 있으라는 신호를 줄 뿐이었다.

그래도 대한민국 평균 신장(※중요: 조금 더 큼)에 보통 체격을 가진 성인 남자건만. 버둥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의주는 제법 안정적인 자세로 저벅저벅 부엌을 나섰다.

“아니 왜 하필 여기….”

과정이 조금 요란할지라도 어쨌든 마음을 바꿨으니 됐다 생각하던 찰나였다. 긴 다리로 거실을 가로지르던 의주의 걸음이 금세 멎는다.

침실이 아닌 창가였다. 정확히는 커다란 창 앞에 놓인 안락의자 앞. 재광은 어느새 의자에 앉은 꼴이 됐다. 불안감에 발발 떠는 눈동자가 선명하게 들여다보였다.

크게 양보해 거실이라 치자. 그래도 3인용 소파가 버젓이 있는데 왜 하필 1인용 안락의자인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재광이 다급하게 의주의 팔뚝을 붙들자 그가 씨익 웃으면서 그런다.

“재밌잖아.”

의주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널찍한 의자 끄트머리에 무릎을 걸쳤다.

커다란 스네일 체어였다. 재광의 몸은 큼직한 곡선 구조를 따라 자연스럽게 반쯤 누운 자세가 됐다. 그 끝에 무릎을 접어 중심을 잡은 의주는 깊게 상체를 숙여 끊긴 입맞춤을 이었다.

‘이 미친놈이 기어이 미친 짓을…!’

…한다고 생각하는 재광도 진득하게 파고드는 키스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당장 입안으로 밀려들어오는 혀를 감당하느라 어느새 머릿속이 하얘진다.

금방 입안을 빠져나갈 듯하던 혀가 또다시 깊게 처박히길 수차례. 재광은 몇 번씩 농락을 당하면서도 입안을 가득 채운 살덩이를 마다하지 않았다.

이제는 옷 속으로 들어오는 의주의 손도 익숙했다. 재광은 가슴을 지분대는 손길에도 멈칫거리거나 움찔대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대담하게 의주의 셔츠 안으로 손을 밀어 넣어 그의 등줄기를 타고 올라갔다.

재광이 견갑 인근을 부드럽게 매만지자 잠시 입술을 뗀 의주가 바람 새는 소리로 웃었다. 그는 꼭 마음껏 만지라고 허락하듯이 셔츠를 벗어 던졌다.

그런 뒤 재광의 상의 밑단을 죽 끌어올리자 의자에 푹 기대 누워있던 몸이 살짝 들리며 옷을 벗기는 걸 돕는다. 벗고 벗기는 행위에는 일절 협의가 없었는데도 죽이 척척 잘 맞아떨어졌다.

“흐… 읏!”

의주의 손과 입술을 제법 의연하게 받아들이던 재광도 아래를 감싸는 감각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다급하게 바지 속을 파고든 커다란 손이 성기를 투박하게 주무르자 숨이 턱 막히듯 넘어간다. 동시에 목이 뒤로 훅 꺾이자 솔직한 반응에 만족한 의주가 재광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의주는 의자 끝에 걸터앉았다가 아예 바닥으로 내려갔다. 재광의 바지와 속옷까지 말끔히 벗겨낸 뒤였다. 다리가 낮은 의자 앞에 무릎을 세워 앉은 그는 등받이에 폭 파묻힌 재광의 발목을 제 쪽으로 끌어내렸다.

부드러운 섬유에 쉽게 미끄러진 재광의 몸은 의자의 둥근 곡선으로 인해 완만히 말린 상태였다. 끝이 가볍게 올라온 구조물을 따라 하복부 아래가 슬며시 들린 자세다. 넓게 벌린 다리 사이에 자리 잡은 의주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숙였다.

“흣! 하아, 아….”

가볍게 주무르는 손길에 단단해진 재광의 것이 한순간 의주의 입에 먹힌다. 겪어본 적 없는 감각에 흠칫한 재광이 하릴없이 등받이 부여잡았다.

엄밀히 따지자면 완전히 처음은 아니었다. 만취해 의주와 처음 잤을 때, 그때도 의주는 거리낌 없이 재광의 중심을 물었었다. 다만 놀리려는 목적이라 이만한 자극을 느낄 수 없었을 뿐.

지금은 확연히 달랐다. 성기 전체를 감싼 의주의 입안은 뜨겁고, 축축하고, 또 미끄러웠다. 의도적으로 볼 안쪽을 좁혀 빨아들일 때마다 예민한 표피에 들러붙는 점막이 묘한 압박감을 불러일으킨다. 재광은 그저 앓는 수밖에 없었다.

“으으, 응, 아, 아읏!”

의주가 손으로 매만질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그의 고개가 위아래로 흔들릴 때마다 재광의 아랫배에 힘이 바짝 들어간다. 부드러운 의자 커버만 배회하던 재광의 손이 어느새 의주의 머리칼을 파고들었다.

일부러 그러는지 어쩔 수 없는 건지 재광으로서는 모르겠지만, 살 기둥을 빨아올릴 때마다 질척하게 울리는 소리가 외설적이었다. 목을 비틀어가며 앓던 재광은 저도 모르게 손에 잡히는 머리카락을 꽉 쥐었다가 지레 놀라 떨어져 나갔다.

의주는 가볍게 웃었다. 여전히 재광의 것을 물고 있어 소리는 나지 않았으나 상박의 가벼운 떨림으로 보아 웃음이 터진 게 틀림없었다. 그는 힘없이 늘어진 재광의 손을 찾아 손가락 사이를 맞춰 잡았다.

“아아…! 흐, 으응!”

그러면서 입안을 콱 조이자 재광의 몸 전체가 들썩거린다. 느낌이 강하게 올라오는지 의자 양옆에 걸쳐놓은 허벅지 안쪽에도 근육이 확 섰다.

곁눈으로 꼼꼼하게 반응을 살핀 의주는 금방이라도 뱉어낼 듯 기둥을 길게 빨았다. 그리고는 귀두만 머금고서 유연하게 혀를 놀리기 시작한다. 갈라진 틈까지 집요하게 간질이자 맞잡은 재광의 손에도 바짝 힘이 들어갔다.

“흐으, 아, 자, 잠깐…만요. …아!”

이번에야말로 절정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재광이 조금 더 명확하게 제게서 의주를 떨어뜨리려는 뜻을 내비친다. 잡았던 손마저 놓고 어깨를 밀어내는 거다.

의주는 그게 무슨 뜻인 줄 알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제 어깨에 올라온 손을 거둬내며 재광의 성기를 깊게 품은 상태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재광은 싫다는 듯 도리질을 쳤으나 상대가 놓아주지 않는 이상은 당해낼 방법이 없었다.

“흣, 아, 아아…!”

결국은 의주의 입안에 토정하고 말았다.

아래서부터 허리를 타고 올라와 온몸을 긴장케 하던 감각이 가시자 몸이 축 늘어진다. 재광이 풀린 눈으로 아래를 봤다.

똑바로 시선을 마주한 의주가 보란 듯이 울대를 일렁이며 체액을 삼킨다. 민망함을 견디지 못한 재광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버렸다.

오랜만에 맛보는 자극에 재광이 벌써 늘어졌지만,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의주는 의자 옆 협탁에서 젤과 콘돔을 꺼냈다.

‘작정했구나.’

늘어진 재광은 어이가 없어 헛숨을 내뱉었다.

그저 충동적으로 저를 이 자리에 처박은 게 아니라 집에 불러들일 때부터 여기서 할 생각이었던 거다. 그러지 않고서야 서랍에서 저런 물건들이 튀어나올 리 없었다.

그러나 굳이 저항하지는 않았다. 그러기엔 이미 한 발을 뽑아냈고, 몸은 나른했다. 재광은 둥근 등받이에 푹 기대 의주가 하는 대로 내버려 뒀다.

그러는 사이, 의주는 가볍게 재광의 둔덕을 훑다 말고 불시에 뒤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이제 막 긴장을 푼 재광의 몸에 또다시 힘이 들어간다.

그래도 직전에 파정한 탓인지 너무 빡빡하지는 않았다. 젤과 함께 미끄러져 들어간 손가락은 수월하게 안을 오가며 길을 넓혔다.

“아…!”

의도적으로 스팟을 건드릴 때는 어김없이 재광의 몸이 움찔거렸다. 아랫배 부근에 입 맞추던 의주는 그 반응이 만족스러운 듯 더 깊게 살갗을 빨아들였다.

어느새 안을 오가는 손가락의 개수가 늘었다. 한바탕 쏟아내고 늘어졌던 재광의 성기도 지속적인 자극에 반쯤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다. 팽팽하게 늘어난 구멍에서 손가락을 완전히 빼낸 의주는 그제야 자신의 바지 버클을 풀었다.

완전히 벗어 던질 시간도 아까웠다. 단단하게 부푼 중심이 드러날 만큼만 옷을 내린 그는 능숙하게 콘돔을 씌웠다. 짧은 새 다물리고 있는 입구에 귀두를 맞추는 동작이 빨랐다.

“하, 으읏!”

손가락에 익숙해져 흐물흐물 풀린 듯하던 내벽은 단단한 기둥이 들어오자 금세 조여들었다. 넣는 족족 주변을 에워싸며 안으로 더 빨아들인다. 꼭 기다린 것처럼 받아들이는 느낌에 의주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끝이 들린 의자 구조 때문에 더 야릇해 보이는 효과가 있었다. 재광은 그저 곡선을 따라 누운 것뿐이지만 의주의 시야에는 그게 꼭 삽입이 편하도록 하체를 들어 올린 것처럼 보였다. 도드라진 골반을 탁 틀어잡은 그는 곧 앞뒤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아… 흐, 읏! 아으….”

안을 가득 채운 의주가 온 내벽을 짓누르자 재광은 공연히 앓았다. 아래를 휘젓는 감각만으로도 미치겠는데, 정확한 지점을 누를 때는 어쩔 줄을 모르게 된다. 몇 번을 해도 적응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한 느낌이 온몸을 타고 퍼졌다.

“으윽….”

강하게 치받는 행위에는 숨이 턱 막혔다. 완전히 눕지 못하고 반쯤은 앉은 자세라 그런지 유난히 의주의 움직임이 버거웠다. 재광은 등받이와 의주 사이에 끼어 자꾸만 몸이 접히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의주와의 섹스에 적응한 재광은 부러 그와 눈을 맞추려 애썼다. 이것도 몸을 가누지 못하게 되면 소용없어지겠지만, 그래도 이성이 남아있을 때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었다.

의주가 원하는 건 몸이지만 제 얼굴 또한 목적이라는 걸 아는 까닭이다.

아니, 솔직히 자신의 몸이 그에게 주는 즐거움이 얼마큼인지는 잘 모르는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쏙 빼닮은 이목구비만으로도 의주를 충분히 흥분시킬 수 있다는 걸 알기에 재광은 되도록 상대방을 마주하려 애썼다.

“하, 진짜, 너는….”

확실히 잘 통했다. 육체적 스킬이 모자란 것쯤은 몇 배로 커버하고도 남을 만큼.

의주는 진득하게 눈길을 맞추며 가볍게 웃었다. 제 몸짓에 따라 속절없이 흔들리면서도 다 풀린 시선을 꿋꿋이 제게 두는 요망함이 귀여워 죽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흥분에 달뜬 눈매가 판판하게 굳었다.

“하으… 흣!”

곧바로 상체를 수그린 의주는 재광의 피부에 입술을 묻었다. 가볍게 빨아들이는 듯하다가 이를 콱 박아 넣자 구조물을 따라 둥글게 말려있던 재광의 몸이 가볍게 뜬다. 입안에 든 살갗을 혀끝으로 간질일 때는 허리가 비틀거렸다.

의주가 재광의 안을 드나드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내부도 더 부드럽게 풀렸다. 세게 박아 넣을 때는 꽉 잡았다가 나갈 때는 미끈하게 풀어주는 움직임이 자연스러웠다.

속궁합이 착착 들어맞으니 흥분이 가미되어 속도가 올라가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녹은 젤은 찰박거리고, 끝까지 박아 넣으며 재광의 둔부에 부딪힌 고간이 야릇한 마찰음을 낸다.

“아, 아아! …읏!”

재광은 이제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의주가 치받는 힘에 온몸이 위로 밀렸다가 내려오기를 반복한다. 점차 속도가 붙어 시야가 흔들리자 더는 눈을 뜨고 있을 여력도 없었다.

“하아, 하….”

그런데 문득, 의주가 예고 없이 속도를 늦춘다.

조금만 더 하면 다시 한번 사정할 수 있을 것 같은 타이밍이었다. 불쑥 느려진 움직임에 재광이 꼭 감았던 눈을 떴다.

“왜, 흐으, 왜요. 아…!”

몰아치는 움직임도 버겁지만 이 순간 재광에게는 느릿하게 안을 들쑤시는 편이 더 괴로웠다. 빠르게 할 때는 전립선을 누르는 감각만이 짜릿하게 느껴진다면, 이 경우에는 몸 안쪽까지 깊게 들어왔다 나가며 닿는 모든 부분에 세세한 자극이 왔다.

급격히 오른 사정감을 조절하는 눈치도 아니었다. 지금쯤 흥분이 극에 달해 재광의 얼굴만 보고 있어야 할 의주는 웬일인지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누가 보면 화가 났다고 오해할 법한 표정을 하고서.

아랫배 부근이었다. 속도를 늘어뜨린 의주는 제가 들어갈 때마다 양감이 살아나는 재광의 하복부를 진득하게 쳐다봤다. 느릿하게 움직이자 깊게 들어갔다 나오는 움직임이 살갗 위로 선명하게 드러난다.

판판한 피부 위로 음영이 잡힐 때마다 이미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진 성기가 부피를 더하는 것만 같았다. 의주는 잔뜩 흐트러진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고서 재광의 골반 부근을 더 세게 틀어쥐었다.

“흐으, 아, 으읏!”

죽어나는 건 재광이었다. 이제는 속을 끝도 없이 간지럽히는 것만 같은 움직임을 버티기가 힘들 지경이다. 거의 울먹거리는 소리를 내다 말고 괜스레 입술만 질끈 물자 곧 의주가 배 위로 손을 얹었다.

“윽…!”

불시에 당한 일격과도 같았다. 아랫배를 예고 없이 짓누르자 재광이 숨넘어가듯 고개를 꺾었다. 꽉 막힌 신음이 겨우 새어 나온다. 의주는 그제야 눈을 맞추며 물었다.

“아파?”

재광은 당장 쌍욕이 나오려는 걸 꾹 눌러 참았다. 그러잖아도 꽉 들어찬 아래를 그렇게 누르면 멀쩡하겠냐고. 쏘아붙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으나 꽉 눌린 배에서부터 올라오는 압박감에 그토록 긴 말은 뱉을 엄두가 안 났다.

그 정도로 어마어마한 압박을 가하고 있으면서 말투는 꼭 머리카락을 꼬집는 듯해 의주가 더 얄미웠다.

“아!”

재광은 대답 대신 꽉 쥔 주먹으로 의주의 팔뚝을 내리쳤다. 그제야 아랫배를 지그시 누르던 손이 떨어져 나간다. 의주는 원망스럽게 노려보는 재광을 마주하며 무게감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이런 데는 취미 없어.”

정확히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갑작스러운 주먹질에 가학적인 성향을 연관 지은 게 틀림없었다. 재광은 받아칠 기운도 없어 그냥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았다.

“읏! …아아!”

물론 곧바로 아래턱이 붙들려 의주를 마주해야 했지만.

호기심 해결은 다 한 모양이었다. 의주는 다시 속도를 높여 재광의 안을 깊숙이 찔러댔다. 실없는 소리에 선 것도 금방 죽을 것 같았건만. 정직하게도 느끼는 곳이 몇 번씩 짓눌리자 금세 숨이 달뜨고 만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힘에는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넓게 벌린 다리를 팔랑거리며 마구 흔들리던 재광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졌다.

그 위로 내려앉는 의주의 숨소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잠시간 넓은 집안에는 둔탁한 마찰음과 목을 긁는 숨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하읏, 아아, 아! 아…!”

먼저 사정한 이는 재광이었다. 꼿꼿하게 힘이 들어간 몸 곳곳을 어루만지던 의주가 성기를 붙잡자 더 버티지 못한 그가 정액을 분출했다. 가볍게 흔드는 손길에는 남은 한 방울까지 울컥울컥 새어 나와 기둥을 타고 흘렀다.

의주도 머지않아 재광의 안에서 파정했다. 뒤를 채운 살덩이가 체액을 토해내며 얕게 움직일 때마다 재광이 덩달아 움찔대며 안을 조였다.

의도하지 않은 행동임을 알기에 의주는 더 기가 막혔다. 여운을 즐기듯 몇 번 가볍게 허리를 흔들던 그는 곧 재광의 안에서 완전히 빠져나왔다.

“하아, 하….”

커다란 의자에 늘어진 재광은 빠르게 가슴을 들썩거리며 숨을 고르는 중이었다. 고개를 비스듬히 숙이고서였다. 의주는 의자에 짓눌리지 않은 뺨을 가볍게 문질렀다. 꼭 수고했다고 말하는 듯한 손길이었다.

재광의 볼에 잠시 머무르던 손은 이내 협탁 위에 놓인 티슈로 향했다. 넉넉히 뽑은 티슈는 금방 축 처진 몸에 닿았다.

“야, 광.”

발가벗은 몸에 남은 정액을 닦아내면서, 의주는 평소와 다름없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딱히 돌아오는 대답이 없는데도 알아서 말을 잇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거밖엔 방법이 없어.”

“….”

“우리 그냥 사귀자.”

힘 풀린 눈으로 애써 의주를 째려본 재광은 제 몸 위를 배회하는 티슈를 빼앗아 들었다. 대답도 아까워 그냥 무시하는 거다.

그도 그럴 게, 진정성이라곤 조금도 와닿지 않는 고백이었다.

아니, 고백이라는 표현도 아깝다. 그냥 섹스 끝에 담배 말리는 사람이 있듯이 루틴처럼 하는 말 같았다. 처음에야 웬 뚱딴지같은 소린가 싶어 놀랐지, 이제는 일일이 반응하느라 쓰는 에너지도 아까웠다.

“와, 너무해. 이제 반응도 안 해주네.”

하지만 부러 서운한 내색을 하는 것까지는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자신의 배 언저리를 닦아내던 재광은 툭, 무심한 투로 대꾸했다.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그런 말 좀 하지 마요.”

“좋아한다니까? 너는 내 맘을 너무 몰라주는 경향이 있어.”

저런 소리를 퍽 당당하게도 한다. 재광은 눈만 한 번 흘기고는 이만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둥글게 말린 형태의 의자에 푹 기대 있다가 일어나기란 쉽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온몸에 긴장을 하다 풀어져서 그런지 상체를 들어올리기 무섭게 다시 널브러지고 말았다.

“야, 광. 내가 너 운동 좀 하라 그랬지.”

의주는 비웃음을 참지 않았다. 그러나 득달같이 놀리면서도 선뜻 손을 뻗었다.

“그런 거 할 시간도 없었거든요.”

부루퉁하게 답한 재광도 거절하지 않고 그 손을 잡았다.

손바닥이 맞닿기 무섭게 의주가 힘을 실어 팔을 당긴다. 재광의 몸이 순순히 딸려와 어느새 의자 끄트머리에 걸터앉은 모양새가 됐다.

그때까지도 바닥에 앉아 있던 의주는 재광의 뒷머리를 제 쪽으로 당겼다. 입술을 포개는 행위가 제법 자연스러웠다.

조금 전 고백을 하고 거절한 사이답지 않게 꽤 달콤한 키스였다. 진득하게 혀를 옭아매고 빨아대며 타액을 섞던 두 사람은 꼭 약속이나 한 것처럼 동시에 떨어져 나갔다.

“….”

한 차례 입맞춤을 나눈 뒤에도 재광은 여전히 의자 위였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맨몸으로 앉아 있는 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의주는 조금 뒤 먼저 입을 열었다.

“야, 광.”

“왜요.”

“혼자 하는 거 보여주면 안 돼?”

당연히 재광에게는 말도 안 되는 요구였다. 그렇기에 고민할 필요도 없이 딱 잘라 거절하면 그만인데.

왜 그 순간 앞으로 하라는 건지 뒤로 하라는 건지를 구분하려 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재광은 저도 모르게 든 생각에 얼굴을 화르륵 붉혔다. 혹여 이런 고민을 했다는 걸 들키기라도 할까 봐 필요 이상으로 퉁명한 대꾸가 나간다.

“거울 보고 혼자 하시든가요.”

애써 태연한 척 굴면서도 눈을 마주할 용기까지는 나지 않았다. 그래서 재광은 보지 못했다. 거울 보고 혼자 하라는 말에 눈을 번뜩이는 의주를.

????

부엌에서의 입맞춤으로 시작해 거실로, 정리가 되나 싶을 즈음 다시 침실로.

집안에서 참 부지런히도 움직였다 싶었다. 노곤하게 누운 재광은 느릿하게 눈을 끔뻑거리며 천장을 봤다.

“….”

꼭 혼자 손장난을 친 뒤 현타를 맞은 기분이었다. 한창 바쁠 때는 급하게 한 발 뽑고 헤어지는 와중에도 그저 인적성 준비와 남은 업무 생각뿐이었던 것 같은데. 여유가 생기니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엄밀히 따지면 의주와 지속해서 몸을 나누겠단 결정을 내린 이후, 이번처럼 작정하고 관계를 맺기는 처음이었다.

그러니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다시 멀쩡한 연애를 할 수 있을까’ 따위의 고민이 드는 것도 영 이상한 일은 아니라는 거다. 재광은 저도 모르게 의주 아래서 거친 숨을 몰아쉬는 제 모습을 상상해보다 급히 지웠다.

“야, 광.”

의주는 자괴감에 빠지려는 재광을 건져 올렸다. 가슴까지 올려 덮은 이불 아래서 큼지막한 손이 배를 가로질러 옆구리에 도달한다.

예민한 부위에 대고 손가락으로 연주하듯 두드리자 재광은 슬며시 옆으로 몸을 뺐다. 손길을 피하려다 의주에게 더 붙게 되는 아이러니한 광경이었다.

“왜요. 말해요.”

의주는 옆구리를 간질거리던 걸 관두고 아예 재광의 상체를 끌어안았다. 재광도 이번에는 피하거나 말릴 생각이 없는 듯했다. 덤덤한 대꾸에 의주가 이내 입을 연다.

“늦었는데 갈 거야?”

단순히 의사를 묻는 투는 아니었다. 물음표를 내던지기 무섭게 재광의 어깨며 목덜미에 입술이 붙는다. 누가 봐도 가지 말라고 얘기하는 행동이다.

그 뜻은 재광도 잘 알았다. 매번 제게 운동 좀 하라며 타박할 만큼 체력이 타고난 인간이라, 가지 말고 더 붙어먹자는 의미로 이러는 게 분명했다. 명확한 의도를 알아차린 재광은 그제야 의주를 밀어냈다.

“가야죠. 이제 외박 어렵다니까요.”

그러자 의주가 숨김없이 서운한 내색을 한다.

“우리 광은 싫은 것도 많지. 식탁에서 하는 것도 싫대, 외박도 안 된대. 너무하다.”

일부러 더 불쌍한 목소리를 낸다는 것쯤이야 재광도 당연히 알지만, 의주가 이런 태도로 나오면 마음 한편이 찔리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둘 사이에 있어 ‘싫다’, ‘안 된다’의 표현을 하는 쪽은 늘 본인인 탓이다.

재광으로서는 단순히 눈앞에 놓인 상황에서 자신의 의사를 밝힌 것뿐이긴 했다. 그러나 밖에서 턱을 간질이지 말라든가, 목덜미를 만지지 말라든가 하는 등의 요구를 이 관계를 이어가는 조건처럼 내건 것도 사실이었다.

더군다나 남의 말이라곤 귓등으로도 안 들을 것 같은 의주가 용케도 하지 말라는 건 안 했지 않던가. 하지 말란 것만 쏙쏙 피해서 다른 짓을 하는 게 문제지만, 그래도 말을 하면 들어는 줬다.

그러면서도 정작 본인은 재광이 저와만 엮일 것을 바란 게 다였다. 그마저도 재광에게는 당연한 소리라 딱히 들어주고 말 게 없었다.

“그게 너무하면….”

애초에 재광이 의주를 곤란하게 하거나 그가 질색할 만한 행동을 한 적 없는 것도 맞다. 하지만 여태 저의 일방적인 요구만 있어 왔다 생각하면 불쑥 민망해지는 것도 어쩔 수가 없었다.

엄연히 합의를 본 사이에 모든 걸 제 구미에만 맞추기도 이상했고.

“뭘 원하는지 말씀하시면 되잖아요. 절충이라는 게 있으니까.”

그래서 말했더니 순순히 밀려났던 의주가 이불 속에서 또다시 꿈틀꿈틀 몸을 붙인다. 그는 반듯하게 누운 재광의 어깨에 고개를 턱하니 얹고 나서야 입술을 뗐다. 거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수준이었다.

“그럼 우리 사귀….”

“그거 말고요.”

비록 한마디 온전히 끝마치지도 못했지만.

재광은 칼같이 말을 끊었다. 어디까지나 섹스 파트너로서 원만하기 위해 절충하자는 거였지, 중대한 결심으로 인정한 이 관계를 뒤흔들자는 뜻은 아니었으므로 굳이 다 들을 필요는 없었다.

의주 또한 기분 나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말허리가 댕강 잘리고도 불만을 품기는커녕 오히려 끝맺지 못해 아쉬운 표정이었다. 그는 단호하게 말을 쳐낸 뒤 얌전히 다물린 재광의 입술을 손끝으로 톡 건드렸다.

“일할 때는 네, 네 하면서 퇴근만 하면 다 안 된대.”

“안 사귀고 이러자는 거는 팀장님이 먼저 꺼낸 얘기였잖아요. 몸만 주고받자고 했으면서 이러는 건 너무 모순이에요.”

초반에만 해도 어지간한 건 다 참고 넘기더니 이제는 말대꾸도 제법이다. 의주는 같이 받아치는 대신 조금 전까지 부지런히 움직이던 입술을 물었다.

자연스럽게 열리는 틈으로 살덩이를 밀어 넣으면서는 터지려는 웃음을 참느라 곤욕이었다. 재광은 의주의 고백이 모순이라 했지만, 의주가 느끼기에는 재광의 태도만큼 모순적인 것도 없었다.

심플하게 몸만 섞자는 말에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펄쩍 뛰더니 인제 와서는 누구보다 칼같이 선을 긋고 있지 않나.

심지어 사귀자는 말을 잘라버린 게 조금 전이건만 그새를 못 참고 달려드는 키스에는 고분고분 응수하고 마는 거다.

의주는 그게 여전히 재밌었다. 재광이 예상 못 할 방향으로 샐 때마다 맘속에서 뭔가가 튀었다.

한마디로 정의할 수는 없으나 이거 하나만은 확실했다. 불쑥불쑥 튀어 오르는 그것은 호기심, 흥미, 재미 등등. 의주가 긍정으로 여기는 감정들을 한데 모아놓은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니 재광이 더 좋아질 수밖에.

“…이제 진짜 가야 돼요.”

얌전히 입맞춤에 응하던 재광은 입안에서 울리는 질척한 마찰음이 짙어질 때가 되어서야 의주의 어깨를 밀었다.

금방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날 기미였다. 쉽게 물러난 의주는 아쉬운 마음을 한가득 담아 젖은 재광의 입술만 한번 할짝거리고 말았다.

????

의주는 택시 타고 가겠다는 재광을 굳이 따라나섰다. 하필이면 사귀자 어쩌자 해댄 다음이라 재광은 내심 부담스러운 눈치였으나 의주의 고집이 이겼다. 내 팀원 내가 챙기겠다는데 그게 문제냐 묻는 말에 차마 반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정말로 심플하게 몸만 부대끼면 될 줄 알았는데. 회사 동료, 특히 상사와 부하 직원으로 엮인 사이라 그런지 불쑥불쑥 애매해지는 순간들이 있었다.

뭐, 차로 데려다주는 것쯤은 엄청나게 불편한 호의도 아니긴 했다. 의주와 재광의 집이 무리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먼 거리도 아니었고.

결국 재광은 익숙한 동작으로 조수석에 앉았다.

“야, 광. 근데 너 학교 다닐 때 많이 놀았어?”

몇 마디 실없는 얘기를 끝으로 차 안이 조용해진 찰나였다. 정면 너머로 신호를 확인하며 핸들을 꺾던 의주가 묻는다. 그는 대답이 돌아올 새도 없이 홀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지 않고서야 멀쩡히 회사까지 다니는 아들한테 이렇게 빡빡할 리가 없을 거 같은데. 다 큰 자식 하루 외박하는 게 뭐 큰일이라고.”

“….”

“대형 사고 하나 치고 개과천선한 거야?”

성질 뭐 같은 형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자 꼬박꼬박 집에 들어간다고 하면 과연 의주는 이해할 수 있을까.

아마도 아니겠지만, 지금은 그런 가정조차 할 수 없었다. 조수석에서 이렇다 할 대답 한마디가 들리지 않는 탓이다.

“그래도 대답은 좀 해주…. 참 나.”

이제 대꾸도 안 해주나 싶어 슬쩍 곁눈질한 의주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분명 차에 탈 때까지만 해도 쌩쌩해 보였던 재광은 어느새 조수석 시트에 푹 기대 잠들어 있었다.

“체력하고는.”

아마 다른 누군가였다면 득달같이 깨웠을 거다. 속에 없는 말로라도 상사 차에 얻어 타서 자는 게 어딨냐며 타박을 하고도 남았을 텐데. 비스듬히 고개를 떨어뜨리고 곤히 잠든 재광의 얼굴을 보니 차마 그마저도 못 하게 된다.

저와 똑같이 생겨놓고 체력은 한참 못 미쳐서 그새 잠들다니. 의주는 그게 참 하찮으면서도 신입에겐 벅찼을 최근 스케줄을 알기에 면박을 줄 생각은 안 했다. 대신 놀고 있는 오른손을 뻗어 재광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시선은 한산한 도로만 넓게 내다보고 있었다. 허용되는 최대치의 속력으로 달리던 차의 속도가 슬며시 떨어졌다.

“야, 광. 일어나.”

하지만 배려는 딱 거기까지였다. 의주는 재광의 집 앞에 도착하자 바로 그를 깨웠다. 이대로 더 재우면 좋겠지만, 차에서 불편하게 자는 것보다는 올라가서 편히 자는 게 나을 것 같아서다.

“아…. 죄송해요. 잠들었었나 봐요.”

몽롱한 안색으로 깨어난 재광은 곧장 안전벨트를 풀었다.

시간이 늦었으니 자신이 얼른 내려주는 게 의주에게도 좋을 거란 판단이었다. 같은 맥락으로 서둘러 조수석 손잡이를 당기는데, 의주의 목소리가 불쑥 귓가를 울린다.

“죄송하면 뽀뽀라도 한 번 해주고 가든가.”

“….”

“아, 물론 진짜로 뽀뽀하라는 건 아니고 혀는 써야….”

5cm가량 열렸던 조수석 문이 도로 닫혔다. 탁,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에 의주의 말도 끝맺음을 못 하고 끊겼다. 재광은 잠기운이 남은 와중에도 뚜렷하게 눈을 흘겨 의주를 봤다.

“…그런 건 나중에 사귀는 사람한테나 해달라고 하세요.”

뒷말은 안 해도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러니 제게는 섹스 파트너로 그어놓은 선을 넘는 발언은 하지 말라는 뜻일 테다. 말귀를 알아먹은 의주는 불쾌한 기색 없이 받아쳤다.

“이것도 하지 마?”

불과 몇십 분 전만 해도 자꾸만 혼자 뭔가를 요구하는 게 민망했건만. 이렇게 되면 재광도 어쩔 수가 없었다. 의주를 또렷이 보던 얼굴이 위아래로 가볍게 흔들린다. 의주가 푸스스 웃음을 터뜨렸다.

- 얼굴이요. 그렇게 잡지 마시라구요. 그, 할 때는 상관없긴 한데 그래도 평소에는 좀….

코드 짜놓는 꼴만 보자면 그렇게 자유분방할 수가 없는데, 이 관계에 있어서만큼은 정확했다. 얼굴을 쥐는 것도 잘 때는 허락을 해주겠다던 그때와 지금이 별반 다르지 않은 상황인 거다.

아까까지만 해도 한바탕 일을 치른 다음 키스를 하자 재광은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그런데 지금은 말을 꺼내는 것만으로도 하지 말란다. 이것도 몸을 섞을 때만 베푸는 아량인 모양이었다.

“야, 그래도 사람 사인데 어떻게 정확히 딱 자르냐?”

딱히 서운하다고 느끼진 않지만 일부러 아쉬운 기색을 더한 말투였다. 그러나 재광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자르는 게 맞는 사이 아니에요?”

끝까지 옳은 소리만 한다.

재광으로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김재광 인생에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던 섹스 파트너도 어영부영 현실이 되어버렸지 않나. 의주에게는 꼭 아닌 척하면서(때로는 대놓고) 능구렁이 마냥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끄는 재주가 있었다.

의주의 말처럼 딱 자르고 맺는 게 애매한 관계이니만큼 선을 확실히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얼마나 휘말릴지 모른다는 게 재광의 확고한 견해다.

“그래?”

의주는 이전처럼 화려한 언변으로 반박하거나 무작정 떼를 쓰지 않았다. 다만 빙긋 웃을 뿐이었다.

청개구리 심보였다. 재광이 자르는 게 맞다고 하자 의주는 오히려 더 그의 곁에 철썩 붙어 있고 싶어졌다.

그런 속내를 어렴풋이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재광은 순간 뒷목에 바짝 힘이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덕분에 차에서 내릴 때는 퍽 찜찜한 마음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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