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Algorithm 下
알긴 안다며 대충 얼버무린 대답과 달리 재광은 연우와 잘 아는 사이였다. 아직도 꾸준히 연락하는 대학 동기 채팅방에 있는 유연우가 ‘그’ 유연우라고 하면 이 이상의 설명은 필요치 않을 테다.
어떤 직원이 말했던 것처럼 친해지기가 어려웠는지는 잘 모르겠다. 재광이 평소 누군가와 친해지려 무수한 공을 들이는 편은 아닌 탓이다. 연우와는 같이 다니던 동기들 덕에 자연히 가까워졌다.
그런데도 불분명하게 대꾸하고 만 이유는 간단했다.
연예인. 그것도 고난과 역경을 딛고 재기에 성공해 탑 티어 자리에 오른 배우니까. 그를 향한 호기심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고, 혹여 몇 마디 잘못 말했다가 되레 연우에게 피해가 갈까 더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회사 사람들에게는 데면데면한 동기 정도로만 언급하고 퇴근 후에는 그를 직접 만나러 온 참이었다.
단체 채팅방에 속한 대학 동기들과의 약속이 바로 오늘이다. 만나기로 한 식당이 있는 건물에 들어선 재광은 막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걸음을 옮겼다.
“어머 세상에. 진짜요?”
몇 발짝 채 떼지도 못한 타이밍이었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민주가 저 앞에 서 있다.
아는 사람이라도 만났는지 환하게 반색을 하며 누군가와 이야기 중이었다. 재광은 누군지 모를 뒷모습과 민주를 번갈아 보며 계속해서 발을 놀렸다.
“어! 김재광! 야 빨리 와 봐.”
거리가 좁혀들자 민주도 이쪽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신나게 조잘거리다 말고 팔을 길게 들어 올리며 알은체를 한다.
재광은 새삼스러운 인사는 생략하고 순순히 그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저보다 한참 작은 민주의 곁에 서자 기다렸다는 듯 카랑카랑한 음성이 들린다.
“야 너도 기억하지, 혜진이 언니. 이런 데서 다 만난다?”
부르는 대로 다가간 재광은 그제야 다른 이들을 살필 수 있었다. 걸어오는 내내 뒷모습만 보이던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는다.
“….”
“…재광이 오랜만이다. 잘 지냈지?”
싱긋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여자에게 답을 돌려주기까지는 조금의 시간이 필요했다. 재광은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빠르게 눈을 깜빡거렸다. 그런 뒤에야 작은 목소리가 겨우 나왔다.
“…안녕하세요.”
짧은 목례를 하며 자연스럽게 내려간 재광의 시선은 다시 들릴 줄 모르고 허공 어딘가를 맴돌았다.
재광의 전 여자친구다. 그가 스무 살 때 같은 과 4학년이었던 그 누나. 여의주 좋다고 따라다니다가 끄끝내 이어지지 못하고 저와 사귀었던 첫사랑.
헤어진 뒤로는 간단한 소식마저 접한 적이 없었건만 여기서 이렇게 만날 줄이야. 재광은 가슴이 철렁했다.
“으응. 졸업하고 처음이네, 다들. 갑자기 이렇게 만나니까 반갑다.”
당황하기는 저쪽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첫마디로 인사를 건넬 때도 어딘가 어색하더라니, ‘다들’이라는 표현으로 대화 상대를 불분명하게 만든다.
이 자리에 두 사람의 과거를 아는 이는 당사자들뿐이었다. 재광은 첫 이별을 경험하고 실연의 아픔을 동네방네 떠들어대며 추태를 부리긴 했지만, 그때도 상대가 누구인지는 절대 얘기 안 했다.
그래서인지 민주도 둘 사이를 전혀 의심 못 하는 눈치였다.
“김재광, 이쪽 분한테도 인사드려. 언니 남자친구래.”
활달한 말투로 전 여자친구의 현 남친을 소개해주는 걸 보면 말이다. 재광은 녹슨 대문처럼 삐걱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저만치서 걸어올 때부터 민주가 두 명과 마주하고 있단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중 한 사람의 정체를 알아차린 뒤부터는 어떤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던 차였다. 재광은 뒤늦게 전 여자친구의 옆에 찰싹 붙어 선 남자를 봤다.
아마 혜진과 또래거나 한두 살 더 많지 싶었다. 눈높이는 재광과 얼추 맞고, 풍채가 엄청 좋다거나 빈약하지 않은 평범한 체격이었다.
“아….”
문제가 있다면, 그 남자의 얼굴 또한 재광과 비슷한 인상이라는 사실이다. 대쪽 같은 취향의 혜진은 여전히 눈매가 길고 오목조목한 외모를 선호하는 듯했다.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대학 동기들은 몇 번 봤는데 후배들은 처음 봐서 신기하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네요.”
남자는 서글서글한 어투로 인사를 건넸다. 사회생활을 할 만큼 해본 사람 특유의 여유가 배어 나왔다. 사회초년생 재광은 노련하지 못하게 억지 미소를 지었다.
“아, 그러세요.”
딱히 할 말은 없었다. 혜진과 제가 사귀었던 사이가 아니라 해도 그랬을 거다. 몇 년 만에 만난 학교 선배의 남자친구에게 긴히 할 얘기가 있을 리 만무하니까.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너희 학교 다닐 때도 친하더니 아직도 같이 다니는 거 보니까 괜히 내가 흐뭇하다. 만나서 반가웠어. 다음에 기회 되면 또 보자.”
어색하기 그지없는 이 상황은 혜진이 나서서 정리했다. 민주가 덩달아 약속 시각이 다 되었다며 반응한 통에 자연스럽게 그들과 찢어질 수 있었다.
“야, 야.”
뒤늦게 식당 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민주가 재광의 옆구리를 콕콕 찌른다. 조금 전까지 마주하던 두 사람이 꽤 멀어진 다음이었다. 그는 잔뜩 비밀스러운 소리로 말했다.
“근데 혜진이 언니 남자친구 묘하게 너랑 닮지 않았냐? 말 하고 싶었는데 실례일까 봐 참느라 혼났네.”
역시나 재광만이 느낀 바는 아니었나 보다. 주관적인 감상, 혹은 피해 의식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닮은 구석이 있었다고 생각하니 재광의 기분이 더 착잡해졌다.
????
재광과 동기들이 만나기로 한 식당은 룸 형식으로 공간이 분리된 곳이었다. 어딜 가도 알아보는 사람 많은 연우 때문에 이들의 모임은 늘 프라이빗한 장소에서 이루어졌다.
뜻하지 않은 만남으로 맘이 가라앉은 재광은 눈앞에 있는 반가운 얼굴들에만 집중하려 애썼다. 다행히 자리에 앉자마자 정신없는 대화가 오갔다.
“그럼 그거는 언제 개봉해? 재밌겠다.”
“내년 초? 아마도? 나중에 시사회 초대권 나오면 줄게.”
“아 이런 거 당연하게 받으면 안 되는데. 사양은 안 할게. 미리 감사!”
가장 먼저 화제의 중심이 된 사람은 단연 연우였다. 얼마 전 영화 촬영을 마친 기념으로 모인 터라 관심이 그리로 쏠리는 게 당연했다. 활발한 성격의 민주는 적극적으로 대화를 이끌었다.
“야 김재광, 너는 회사 다니기 어떠냐? 의주 오빠 어때? 잘 맞아?”
한바탕 연우의 안부를 나눈 다음에는 자연스럽게 재광의 근황이 화두에 올랐다.
재광은 도수가 제법 높은 증류주를 한입에 털어 넣고 쓴 입맛을 다셨다. 그러잖아도 전 여친의 등장에 착잡한데 의주 얘기까지 꺼내려니 기분이 한층 더 가라앉았다.
“몰라. 그냥 김민광보단 낫다고 생각하면 그럭저럭 받아줄 만해.”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입 밖으로 낼 수 있는 내용은 이 정도가 전부였다. 너희가 아는 그 여의주와 내가 뜨거운 밤을 보냈다고는 차마 얘기할 수 없는 것이다.
자체 심의를 거치고 하는 말에 동기들이 안타까운 듯 웃었다. 재광의 괴팍한 형을 알기에 이 정도만 말해도 어떤 심정인지 대략 이해하는 눈치였다.
“야 그래도 니네 형보다 나으면 다행이긴 한데, 의주 오빠 진짜 좀 이상하긴 해. 예전에 연우 너한테도 초면에 대뜸 들이댔지 않아?”
민주가 묻자 나란히 앉은 도원과 연우가 동시에 “아…” 이도 저도 아닌 소리를 냈다. 신이 나서 말을 잇는 것은 민주의 몫이었다.
“아니 갑자기 와서 진짜 사람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어떻게 이렇게 생겼냐고 그랬다니까? 말로만 들으면 별거 아닌 거 같지? 실제로는 너무 가까이서 그래가지고 키스라도 하는 줄.“
생생한 묘사를 듣던 재광은 조용히 오늘 회의 때 들은 말을 떠올렸다.
- 내가 드물게 인정한 얼굴…?
인정을 그런 식으로 했던 모양이다.
그런 행동을 한 사람이 의주라면 더는 놀랍지도 않았다. 그는 재광을 처음 봤을 때도 그랬으니까.
좀처럼 속내를 알 수 없는 빤한 눈으로 부담스럽게 쳐다봐 내심 어쩔 줄을 몰랐던, 혹은 불쾌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다.
“그때 도원 오빠가 떼어 놔서 그만뒀지, 안 그랬음 얼마나 더 그러고 있었을지 예상도 안 된다.”
민주의 얘기에 도원(a.k.a 껌딱지)은 슬며시 웃는 게 다였다. 천성이 순해 빠진 인간이라 그 정도는 별거 아닌 해프닝으로 여기고 마는지도 몰랐다.
“그 선배는 그렇다 치고, 일은? 일 자체는 잘 맞아? 원래 보안 쪽에 더 관심 있었잖아.”
남 이야기에 영 소질이 없는 도원은 금세 말을 돌렸다.
옆에 앉은 연우의 앞접시에 튀김을 덜어주며 가볍게 물은 터라 화제 전환이 자연스러웠다. 연우 또한 튀김을 집어 들다 말고 멀뚱멀뚱 재광을 봤다. 대답을 기다리는 거다.
“뭐, 아예 처음 접하는 건 아니니까 할만은 해요. 어쨌든 사수도 있으니까 도움 받을 수도 있고. 근데 이것도 앞으로는 또 모르죠.”
할 만하다는 서두와 달리 모호한 마무리였다. 도원은 순간 의문스러운 표정을 했다.
“왜 몰라?”
지난주 내내 바빠서 정신이 없었다는 그는 재광의 서류 합격 사실을 잊은 눈치였다. 옆에 있던 연우가 재광을 대신해 “다른 데 서류 합격했다 그랬잖아” 하고 답했다. 도원은 그제야 아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계속 준비하고 있는 거야?”
“해야죠. 이왕 붙었는데 포기하면 아깝잖아요. 퇴근하고 나서 틈틈이 인적성 준비하고 있어요.”
답하는 재광의 말투는 쿨했으나 속내는 그렇지 못했다. 아까워서가 아니라 유일한 희망으로 삼아 절실하게 매달리는 중이었으니까.
꼭 합격하고 싶다고 얘기하는 게 자존심 상해서는 아니다. 다만, 그토록 직장을 옮기려 하는 이유를 설명할 자신이 없을 뿐.
대충 둘러댈 얘기를 찾기도 귀찮아 태연한 척 구는 게 최선이었다. 다행히 누구 하나 어설픈 대답이라 의심하는 이는 없었다.
“그래, 이왕 준비했는데 붙으면 좋지. 자, 잔 듭시다. 김재광 최종 합격을 위하여 건배!”
민주가 회식깨나 주도해본 솜씨로 건배를 권하자 다들 순순하게 잔을 들었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테이블 중앙에서 잔이 부딪힌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말끔히 술을 털어낸 다음에는 물 흐르듯 새로운 주제가 떠올랐다.
“아, 참. 아까부터 말하려고 했는데 연우 소식 물어본다고 까먹고 있었네.”
안주로 입가심을 하던 도원과 연우의 시선이 동시에 민주를 향했다. 그는 지금 생각해도 놀랍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을 이었다.
“아니, 아까 식당 바로 앞에서 혜진이 언니 만났잖아. 왜 그, 우리 1학년 때 졸업반이던 언니요. 엠티 때 오빠랑 연우 같은 조였지 않나?”
민주가 구체적인 상황을 제시하며 기억을 되살리자 두 사람도 곧 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재광은 썩 달갑지 않은 이야기에 안주로 나온 튀김만 괜히 들쑤셨다.
“남자친구랑 같이 있더라구요. 갑자기 이런 데서 만난 것도 신기한데, 곧 결혼한대요.”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재광이 ‘결혼’ 소리에 휙,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민주는 아는 사람의 결혼 소식이 놀라운 듯 세월의 야속함을 논했으나 재광은 그 이상으로 충격을 받은 모양새였다.
인적성을 앞두고 컨디션 관리를 위해 조절하던 재광의 음주량이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냥 남자친구인 줄로만 알았건만 결혼이라니. 재광은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혼란에 휩싸였다.
있어서 안 될 일이라 여기는 건 아니었다. 저보다 세 살 많은 누나가, 어엿한 성인이 자신의 인생 계획을 세운다는데 전남친이란 이유로 관여할 권리는 손톱만큼도 없으니까.
아니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진짜 신기한 거 뭔지 알아요? 예비 신랑이요. 왠지 모르게 김재광이랑 닮은 거 있죠. 나 진짜 깜짝 놀랐네.”
자신과 비슷한 인상의 남자와 평생을 함께할 결심을 했단 사실에는 기분이 이상했다. 곧은 얼굴 취향은 그쪽의 사정이고, 이전에 사귄 사람 입장에서는 마냥 순수하게 축하해줄 마음이 들지 않을 정도로 기묘하게 받아들여졌다.
찜찜함을 떨치지 못한 재광은 막 따른 술을 단번에 비웠다. 입맛이 속사정만큼이나 쓰다.
노력에 노력을 거듭해서 취향까지는 어찌 인정한다 치자. 그래도 자꾸만 거스러미처럼 거슬리는 부분이 있었다.
“근데 잘 생각해보면 김재광보다는 의주 오빠에 더 가까운 얼굴 같기도 하고.”
그래, 그거다. 왜인지 재광과 비슷해 보이던 결혼 상대는 따지고 보면 의주의 분위기와 더 닮았다. 날카로운 눈매부터 시작해 전체적인 인상 모두 다.
‘씨발!’
홀로 찝찝하게 여기던 사실을 타인의 입으로 전해 들으니 더는 견딜 수가 없다. 재광은 금방 비운 술잔을 또다시 채웠다.
도수 높은 증류주가 식도를 데우며 콸콸 넘어갔다. 의주를 향한 인식이 조금은 나아지면서 한동안 잘 묻어뒀던 피해 의식이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 얘 여의준가 뭔가 그렇게 따라다니더니 결국엔 똑같이 생긴 애랑 사귀는 거 봐.
- 영계가 좋긴 한데, 그래도 여의주가 키도 더 크고 남자 냄새가 더 나긴 하지.
친구들의 말에 혜진은 그저 취향이라며 딱 잘라 대답했지만, 재광은 사귀는 내내 여의주의 그림자에 갉아 먹혔다. 실제로 만나본 적도 없는 의주를 얼마나 미워하고 질투했던가.
의주의 망령이 덮칠 때마다 그래도 사귀는 건 자신이란 사실로 위안 삼았었다. 어디까지나 취향이라고 하니까. 이런 외모를 선호하되 개개인의 매력을 보았을 거라고. 여의주 대신이 아니라 김재광으로 봐줬을 거라고 습관처럼 되뇌었다.
그런데 결혼한다는 사람이 자신보다 의주에 가까운 모습이라니. 자신이 의주 대신이었다는 사실을 그런 식으로 확인받은 것만 같았다.
벌써 6년 전의 일이라 이젠 미련 같은 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나 보다. 속이 쓰려도 너무 쓰리다.
첫 사랑. 첫 연애. 그리고 마지막 연애.
사귄 기간이 대단히 길지는 않았으나 가진 순정을 모두 내어줘서인지 인제 와 또 상처를 받고 만다. 온 마음 다해 좋아했으나 상대방은 자신을 누군가의 대타로 보고 있었다면 그만한 배신감도 또 없을 터였다.
이런 자신이 찌질하고 미련스럽고 쪽팔려도 어쩔 수 없었다. 부정적인 감정이 주체할 수 없이 부풀었다.
하지만 이 열등감과 피해 의식과 미련 따위를 눈앞의 이들에게 터놓을 수도 없었다. 이 자리에서 재광의 착잡함을 달래줄 거라고는 오로지 술뿐이다. 재광은 잔이 가득 찬 꼴을 못 보고 술을 따르는 족족 입가로 가져갔다.
“뭐야, 얘 왜 이래. 취준 하면서는 술 좀 줄이더니 이제 취업했다 이거야? 막 마시네?”
친구들이 오래간만에 듣는 선배 소식을 두고 대화를 하는 동안 그야말로 미친놈처럼 술을 퍼부은 재광의 눈은 벌써 풀려 있었다. 문득 흐트러진 재광의 모습을 발견한 민주가 식겁하며 잔을 빼앗았다.
“아 뭐, 줘.”
“아직 인적성도 안 봤는데 막 나가냐? 너 내일 출근해야 될 거 아냐, 작작 마셔.”
“내가 다 큰 성인이 돼서 술도 맘대로 못 마시냐?”
내일의 저를 생각해 말려 봐도 들어먹질 않는다. 빼앗긴 잔을 되찾으려 뻗은 손이 가만 있어도 붕붕 흔들릴 만큼 취한 주제에 어서 잔을 내놓으라 성화다. 보다 못한 도원이 민주를 거들고 나섰다.
“그래, 재광아. 내일 속 안 좋아서 어쩌려고 그래. 오늘은 이만하자.”
“형까지 왜 그래요, 섭섭하게 진짜.”
세상 서운한 얼굴을 한 재광은 잔뜩 성이 난 행색을 하더니 불시에 술병으로 손을 뻗었다.
잔이 없으니 나발이라도 불 요량인 듯했다. 얌전히 상황을 관전하던 연우가 간발의 차로 술병을 낚아챘다. 그랬더니 이제는 흡사 우는 것 같은 모양새로 마른세수를 한다.
“와 진짜…. 외롭다 외로워. 세상에 내 편은 하나도 없어.”
취중임을 고려하더라도 쓸쓸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그에 마음이 약해진 연우가 자신의 잔에 물을 따라 재광에게 내밀었다.
어차피 술에 먹힌 상태라 뭘 먹어도 술 냄새가 나 대충 넘어갈 수 있을 거란 계산이었다. 그러나 재광의 미각은 아직 마비가 안 된 듯했다.
“으악, 미친놈아!”
연우가 내민 술(사실은 물)을 곧장 입에 털어 넣더니 그대로 주르륵 뱉어버리는 거다. 옆에 앉은 민주가 기겁하며 냅킨을 뽑았다. 젖은 턱부터 상의를 닦아주는 손길이 상당히 거칠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자리를 더 유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상대적으로 멀쩡한 정신인 세 사람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민주는 재광의 겉옷과 짐을 챙겼고, 도원은 몸을 못 가누는 재광을 붙들었으며, 연우는 계산서를 들고 먼저 룸을 나섰다.
“아니 왜. 나 더 마시고 싶은데! 안 취했다니까? 나 기분 좋아서 그래. 응?”
가게 밖으로 나와서도 재광은 진정할 줄을 몰랐다. 안 간다고 버티는 모습을 한심하게 바라보던 민주는 혀를 끌끌 찼다.
“저 새끼는 학교 다닐 때랑 지금이랑 변한 게 하나도 없어.”
타고난 아량이 넓은 도원은 어색하게 웃으며 재광의 편을 들었다.
“취업 준비한다고 그동안 맘고생 많았잖아. 오랜만에 마시니까 그럴 수 있지.”
대리기사를 부르느라 한 걸음 크게 떨어져 있던 연우는 한숨만 푹 내쉬었다.
“재광아!”
그리고 조금 뒤, 도원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터져 나왔다. 저보다 훌쩍 큰 그에게 기대다시피 하던 재광이 벌떡 몸을 일으킨 탓이다.
불시에 일어나 도로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걸음이 빨랐다. 도원이 반사적으로 따라가 붙잡았으나 소용은 없었다.
“어디 가, 재광아.”
“아아, 아니 형 저 뭐 좀 확인할 게 있어가지구요.”
“대리 불렀어. 좀 있음 오니까 같이 타고 가자.”
“아니야, 아니야. 중요한 일이라서 그래요.”
흐리멍덩하게 풀린 눈을 부릅떠가며 자신이 멀쩡하다는 어필을 한 재광은 거침없이 도로를 향해 팔을 흔들었다.
순식간이었다. 마침 지나가던 택시가 멈춰 서고, 재광은 여태 몸도 못 가누던 모습이 거짓인 것처럼 잽싸게 뒷좌석에 올라탔다. 가차 없이 닫히는 문 앞에 선 도원만 솜사탕 씻은 너구리처럼 허망한 꼴이 됐다.
“기사님, 출발해주세요.”
남의 안색을 살필 겨를이 없는 재광은 출발을 재촉할 뿐이었다. 그의 요구대로 잠시 정차했던 택시가 금세 속력을 내며 밤길을 달렸다.
재광이 갑작스럽게 폭주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만취한 정신에서의 굿 아이디어.
‘여의주랑 닮은 게 아닐 수도 있잖아?’
의주의 실물이 아니라, 막연히 떠오르는 이미지 때문에 착각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막상 의주를 대면했을 때 아까 본 남자와 별로 닮지 않은 모습이라면 두 발 편히 뻗고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술에 녹진하게 풀린 재광의 눈동자가 불현듯 빛났다.
????
의주는 소파에 길게 누워 있었다. 배 위에는 노트북을 올려놓고 스피커폰 모드로 통화를 하는 중이었다.
“야이 씨, 그걸 지금 나한테 오류라고 말하는 거냐?”
액정에 뜬 이름은 민선호였다. 인상을 팍 쓴 의주는 대놓고 짜증스러운 티를 내며 키보드가 부서져라 엔터를 쳤다.
밤중에 난데없이 전화해 업무 얘기를 하는 것까지는 아무렇지 않았다. 회사의 유일한 개발자로서(재광은 아직 0.3인분이라 제외한다) 칼같이 9 to 6만 일하겠다는 건 욕심이지 않나.
더군다나 뭔가가 잘못됐다고 하면 천재 여의주 님의 자존심에 큰 스크래치였다. 그렇기에 빠른 수정으로 완벽한 서비스를 유지할 수 있다면 자던 중 컴플레인이라도 쌍수 들고 환영인 사람이 의주다.
하지만 지금은 얘기가 달랐다. 대뜸 전화해 “야 아까 친구가 우리 앱 엄청 느렸었다던데 서버에 문제 있는 거 아니야?” 하는 거다.
아까란 언제며 무엇이 느렸으며 느리다는 기준은 또 무엇인지. 책임감을 갖고 확인해보려 해도 뭐 하나 확실한 정보가 없다.
― 저녁에 커플 캘린더 쓸라 그랬더니 느려서 그냥 안 했다던데?
“저녁이 누구한텐 다섯 시고 누구한테는 여덟시 오십 분이라고 내가 몇 번을 말하냐. 트래픽도 문제없고 지금도 정상적으로 돌아간다고요, 대표님.”
― 진짜 멀쩡해? 이상했던 기록도 없고?
“아니 대략적인 시간대라도 알려줘야 뭘 확인하지. 초저녁부터 지금까지 로그 싹 다 보고 있으라고? 유저가 몇인데, 민선호 양심 좀. 그 친구 1세대 스마트폰 쓰는 거 같으니까 기변 추천한다.”
개발자한테는 이처럼 짜증나는 순간이 또 없으나 의외로 흔한 상황이었다. 주어도 없이 무조건 “안 돼요”, 맥락 없이 일단 “해주세요”, 기타 방해 요소는 생각지 않고 “느려요”.
의주는 그중 마지막 케이스를 가장 싫어했다.
로딩 시간이 3초를 넘어가면 그때부터 안달 나는 게 요즘 사람들이지 않나. 할 수 있는 것들은 죄 압축해 잘나가는 앱들 평균 로딩 시간에 맞춰놨건만 부가 설명도 없이 대뜸 “느려요” 하면 그것만큼 골 때리는 게 없었다.
특히 속도라는 게 변수도 많은 부분이라 더 답이 없었다. 데이터 잘 안 터지는 지하 주차장에서 했는지, 성능 떨어지는 휴대전화로 온갖 앱을 동시에 돌렸는지, 사람 바글바글한 콘서트장이었는지. 실행 환경을 알지 못하면 이쪽에서도 해결 방안을 찾을 수 없었다.
― 야. 암만 친구여도 고객인데 너 폰이나 바꿔라 그러냐?
“아, 어쩌라고. 없는 문제라도 만드냐, 그럼?”
슬슬 열이 오른 의주가 이를 바득 갈며 대답했다. 낌새를 알아차린 선호는 “그런 게 아니라…” 하며 의주를 달래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어진 말은 넓은 실내 가득 울리는 기계음에 묻히고 말았다.
초인종 소리였다. 화면이 켜진 월패드를 멀찍이 쳐다본 의주는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그때까지도 뭐라 떠들어대는 선호에게는 단호하게 굴었다.
“일단 끊어, 인마.”
상대방 의사는 확인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통화를 마친 그는 월패드 가까이 다가갔다.
“엥.”
화면을 들여다보던 낯빛이 의아한 기색으로 물든다. 그러면서도 손가락은 망설임 없이 문을 열어줬다.
재광이다. 밤늦은 시간에 난데없이 왜 찾아왔는지는 모르겠으나, 의주는 조금 전까지 짜증내던 걸 모조리 잊고 흥미 도는 안색을 했다. 집 앞에서 다시 한번 초인종이 울리길 기다리는 얼굴이 밝았다.
“야, 광. 갑자기 무슨 결심이 서서 여기까지 왔어.”
현관에서 대기하고 있던 의주는 가까이서 발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벌컥 문을 열었다. 갑작스럽게 문이 열리는데도 놀란 기색 하나 보이지 않은 재광은 되레 열린 문을 더 넓게 열어젖히며 당당히 안으로 들어섰다.
“뭔데. 왜 그러고 서 있는데.”
그러나 아무런 말도, 행동도 않고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정확히는 눈앞의 의주를 쳐다보기만 했다.
저보다 10cm가량은 큰 그를 올려다보기만 하는 거다. 도무지 의중을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덤덤한 겉모습과 달리 속은 복잡했다. 실제로 보면 혜진의 결혼 상대와 닮지 않았기를 바라며 온 거였는데.
닮았다. 실제로 보니 확실히 자신보다는 의주와 더 닮은 사람이었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처참한 기분…이어야 할 것 같지만 왜인지 재광은 실없이 새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같이 좀 웃지?”
난데없이 쳐들어와 사람을 뜯어보더니 이젠 피실피실 웃기까지.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 의주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불퉁하게 말하자 재광이 천천히 입술을 뗐다. 목소리가 나오기 전, 그 잠깐 사이에 터진 호흡을 타고 짙은 술 냄새가 풍겼다.
“팀장님.”
“어, 그래. 왜.”
친구들도 다 알 만큼 의주가 좋다고 쫓아다니던 첫사랑 누나는 의주와 닮은 재광과 사귀었고, 결혼마저 의주와 비슷한 인상을 지닌 남자와 한다. 그런데도 그 누나는 정작 의주의 손 한번 잡아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재광은? 손을 잡았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고 온몸을 부대낀 전력이 있었다. 심지어 의주는 한 번으로 끝낼 관계로 치부하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결국, 그의 관심을 사고 더 긴밀한 관계가 된 건 재광이라 할 수 있었다.
“저랑 자요.”
재광은 평소의 가치관대로 사고할 수 없을 만큼 고장이 나 있었다. 멀쩡한 그라면 절대 입 밖에 내지 않을 소리를 내뱉고도 아주 의기양양한 모습이다.
겉으로만 그랬을까. 속으로는 쾌재도 불렀다.
누나가 그렇게 목매면서도 털끝 하나 건드려보지 못한 여의주랑 나는 잤다고. 그리고 또 잘 거라고. 그러니까 내가 이겼다고!
여기서 의주가 조선 시대 부럽지 않을 유교적 신념을 지녔다면 재광을 말려볼 수라도 있었겠지만 당연하게도 그럴 리는 없었다. “미쳤어?” 혹은 “왜 이래?” 따위의 반문은 사치였다.
“진짜?”
의주는 눈을 빛냈다. 혹여 무를세라, 물음표를 내던지기 무섭게 재광의 손목을 잡아끄는 행동이 잽쌌다.
의주에게는 이 상황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가만둬도 밖으로 새나가려 버둥거리던 먹잇감이 제 발로 굴러들어왔잖은가. 굳이 너 후회한다고 뜯어 말려가며 정신 차리게 해줄 필요가 있느냐 묻는다면 대답은 당연히 “아니요”다.
지금은 도덕적 훈화 말씀이 필요한 순간이 아니라 그 짜릿하던 밤을 다시 한번 경험해볼 수 있는 절호의 찬스니까!
술에 취해 내린 섣부른 판단이래도 어쨌든 재광 본인의 선택이었다. 주취 감경? 말도 안 되지. 어엿한 성인이라면 술에 취해 벌인 일이라도 감당할 줄 알아야 한다.
반항 없는 재광의 손목을 잡은 의주는 잔뜩 신난 걸음으로 침실 문을 열었다. 비틀거리면서도 용케 넘어지지 않은 재광이 한 발자국 뒤에서 순순히 따라 들어왔다.
“아!”
재광은 보기보다 더 취한 것 같기도 했다. 제법 빠른 의주의 걸음을 잘 따라잡더라니, 무릎께 침대가 걸리자 그대로 고꾸라져버린다. 의주는 재밌어 죽겠다는 듯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단순히 재광이 넘어진 게 우스꽝스러워서가 아니었다. 철푸덕 나자빠진 재광이 제 나름대로 몸을 가누겠다고 팔을 받치고 일어난 자세가 유별난 게 문제였다.
모로 엎어진 재광은 간신히 상체를 일으켰다. 꼭 인어 공주의 시그니처 포즈처럼 비스듬한 자세였다. 다소곳하게 다리를 모으고서 풀린 눈으로 의주를 올려다보는 게 꼭.
글로 배운 유혹을 어설프게 실천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작게 웃은 의주는 이내 침대 위로 올라갔다. 얌전히 모은 재광의 다리 양옆으로 무릎을 세우고 천천히 몸 위를 기어올랐다. 간신히 상박을 세우고 있던 재광의 자세가 무너져 등이 온전히 매트리스에 닿는다.
재광의 겉옷을 벗겨낸 의주의 손은 미끄러지듯 티셔츠 안으로 들어갔다. 술기운 때문인지 유난히 열 오른 피부가 곧장 손안에 감겨든다. 매끄럽고 탄탄한 감촉에 의주가 흡족한 미소를 띠었다.
옆구리를 길게 훑자 재광의 몸에 바짝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진다. 의주는 더 집요하게 지분대며 손을 위로 가져갔다. 단단한 갈비뼈를 지나 가슴에 다다르자 움찔대던 이전과 달리 재광이 눈에 띄게 허리를 비튼다.
“흐으….”
숨처럼 새어 나오는 신음은 덤이었다. 의주는 볼륨감 없는 가슴을 가볍게 그러쥐며 재광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었다.
예민한 살갗을 타고 뜨거운 숨결이 올라오자 재광이 고개를 비틀며 뒤로 젖혔다. 그 탓에 목빗근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의주는 꼭 놀리듯이 쭉 뻗은 근육을 혀로 길게 핥았다.
진득한 자극에 놀란 재광이 일순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만족스러운 반응이었던지 할짝거리며 목을 타고 올라간 의주가 기꺼운 얼굴로 입술을 맞댔다.
하루아침에 털끝 하나 보이지 않을 곳으로 도망을 쳐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굴다가 제 발로 찾아오더라니.
재광은 확실히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의주가 유도하기 전에 알아서 입을 벌리는 거다. 그러면서 의주의 날갯죽지를 감싸 안는 동작이 퍽 자연스러웠다.
의주는 슬며시 벌어진 재광의 입술을 감쳐물며 부드럽게 혀를 밀어 넣었다. 마중하듯 꿈틀대는 재광의 혀를 짓궂게 피했더니 등 뒤에 감긴 팔에 곧장 힘이 들어간다.
깊은 입맞춤을 조르는 듯한 행동이 조금은 귀엽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었다. 웃음을 참지 못한 의주의 가슴이 작게 진동했다.
놀리는 것도 잠깐이었다. 보채는 행동에 순순히 혀를 내어주자 기다렸다는 듯 의주를 옭아맨 재광이 진득하게 표피를 맞댔다. 자잘한 돌기들을 느끼며 문지를 때마다 입안 온도가 점점 더 올라간다. 느릿하지만 질척한 마찰음이 선명하게 귓가를 울렸다.
“하아, 하….”
빈틈없이 맞물린 입술이 떨어진 것은 조금 뒤였다. 입천장을 타고 저 안쪽의 점막까지 깊게 혀를 찔러대던 의주가 잠시 고개를 물렀다.
재광은 젖은 입술을 다물 생각도 못 하고 가쁜 숨을 토해냈다. 무의식적인 행동이겠지만, 꼭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듯 한 번씩 입을 벙긋거린다. 그때마다 닦이지 못한 타액이 얇은 선으로 이어지다 끊기길 반복했다.
의주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잠시 갈등했다. 저 입술 사이로 혀가 아닌 다른 걸 처박고 싶다는 욕구가 문득 치솟는다. 키스만으로도(내내 몸을 어루만지기는 했지만) 이만큼 흥분하는 재광에게 더 굵고 큰 것을 물리고 싶었다.
“야, 광. 너 진짜 내가 많이 봐주는 거야.”
하지만 그만뒀다. 여기서 대뜸 눈앞에 좆을 디밀어도 재광은 얼떨떨하게 받아들이고 말겠지만, 남자 경험이라곤 이제 고작 두 번째인 그에게 무리한 요구는 하지 않기로 했다.
“이렇게 아량 넓은 상사가 어디 있어. 그치.”
자신의 넓은 마음에 심취한 그는 곧 가슴까지 밀려 올라간 재광의 티셔츠 자락을 위로 죽 잡아당겼다. 숨을 고르며 멍하니 누워 있던 재광이 팔을 들어 제 옷을 벗기는 걸 돕는다.
순간적으로 들렸다가 침대로 풀썩 떨어지는 몸을 감상하던 의주는 픽 웃었다.
청개구리 심보가 고개를 쳐드는 중이었다. 재광이 이전보다 훨씬 능동적으로 굴자 괜히 더 애를 태우고 싶다. 의주는 고개를 숙여 유륜 주변을 지긋하게 핥으면서 손으로는 재광의 바지 버클을 풀었다.
“아…. 으응.”
금세 속옷 안으로 들어간 의주는 한 손 가득 재광의 볼기를 쥐었다. 제법 힘을 주자 탄탄한 살결이 터질 것처럼 손안에 가득 들어온다. 움켜쥔 손에 힘을 풀자 곧장 부드럽게 풀어지는 탄력이 좋았다.
입술은 상체 곳곳을 배회하고, 손은 집요하게 엉덩이를 맴돌았다. 더욱 깊게 팔을 밀어 넣어 허벅지 뒤쪽의 여린 살까지 쓰다듬자 재광이 다급하게 의주의 어깨를 민다.
그러나 의주는 그 뜻을 모르는 것처럼 굴었다. 오히려 유두를 혀로 튕기며 더 자극했다. 손은 허벅지 뒤에서 안으로, 더 은밀한 곳까지 더듬어가고 있었다.
“흐읏.”
가슴팍을 타고 내려간 입술은 곧 아랫배를 맴돌았다. 여느 때처럼 진하게 물고 빠는 게 아니라 입술 끝으로 닿는 촉감만 주는 애무였다. 예민한 부위에 최소한의 자극만 유지하자 그게 더 사람을 안달 나게 한다.
단순히 간지러운 듯하면서도 단전에서부터 묵직함이 올라오게 만드는 접촉이었다. 판판한 아랫배에 촉촉한 입술이 살짝살짝 닿았다 떨어질 때마다 재광은 자꾸만 다리를 오므리려 들었다.
물론 뜻대로 할 수는 없었다. 가동 범위를 좁히는 속옷이 걸리적거려 금세 하의를 벗겨낸 의주가 재광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저 역시 금세 나신이 된 그는 허벅다리를 벌리고 가운데 들어앉았다. 덕분에 재광이 방어적으로 굴 때마다 의주의 골반을 조이는 격이 됐다.
의주는 제 몸에 착 달라붙은 재광의 다리를 길게 매만졌다. 아킬레스건이 도드라진 발목을 타고 올라가 탄탄한 종아리를, 부드러운 허벅지 뒤쪽의 살갗을 작정하고 간질인다. 얄궂은 손길은 기어이 엉덩이 사이의 골로 이어졌다.
“아…! 으읏, 응.”
미끄러지듯 자연스럽게 둔덕을 지난 손끝은 회음 주변을 더듬었다. 주름 하나하나 모두 셀 것처럼 꼼꼼하고 집요한 움직임이었다. 금방이라도 안으로 밀려들어올 듯하면서도 끝내 바깥만 맴돌아 애를 태운다.
하지만 의주는 젤도 콘돔도 꺼내지 않은 상황이었다. 즉, 당장 재광의 몸 안으로 밀고 들어갈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약 올리듯 뒤를 맴돌 때마다 재광이 온몸을 비틀었다가 달싹였다가, 끝내는 허리를 튕겨댔다.
“아, 좀 그만….”
더 이상 파고들지 않고 감질나게 주변만 배회하자 재광의 얼굴이 터질 듯 붉어졌다.
낮은 전류를 흘려보내듯 온몸이 저릿한데, 확실한 자극을 주질 않으니 더 견디기가 힘든 모양이었다. 몸 구석구석을 만지며 쇄골 즈음 입술을 묻던 의주가 불쑥 고개를 들었다.
“그만 뭐?”
원하는 게 있다면 직접 얘길 해보라며 종용하는 목소리였다. 말을 마치기 무섭게 쇄골 아래 얇은 피부를 빨아들이자 금방 목을 꺾던 재광이 끙끙대며 입을 열었다.
“…언제, 넣을 건데요.”
자꾸만 뒤를 간지럽히기만 하고 진전이 없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묻는다. 의주는 축축하게 적시던 피부에 이를 콱 박아 넣었다. 재광의 입술 새로 읏, 하는 탄성이 터졌다.
“광아, 급해?”
“….”
“빨리 박아주면 좋겠어?”
둥그스름하게 모양이 잘 잡힌 볼기를 꽉 쥐며 묻자 귀까지 새빨개진 재광이 눈을 꼭 감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애매하게 겉만 자극해 괴로운 쾌감만 얻느니 제대로 박히는 게 낫겠다는 판단일 테지만, 의주는 먼저 해달라는 의사를 밝히는 모습이 맘에 쏙 들었다.
어지간해서는 부끄러운 감정을 느낄 일 없는 의주로서는 저와 꼭 닮은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게 신기했다. 신기한데 보기 좋고, 재밌었다. 그래서 더 놀려주고 싶지만….
재미를 겸해 혈류를 빠르게 하는 것도 사실이라 이만 뜻을 들어주기로 했다. 젤을 꺼내 들고 넉넉하게 짜내는 의주의 얼굴이 자비로웠다.
흥건한 젤을 손가락 위에 대충 펴 바른 그는 끈질기게 만져대던 주름 근처를 가볍게 눌렀다. 미리 입구를 넓히듯이 살을 벌리며 주변에 젤을 묻히자 체온과 다른 서늘함에 움찔거리던 재광이 곧장 앓는다.
“흐으, 그냥, 빨리… 읏!”
이번에도 의주가 주변만 더듬거리며 시간을 끌 줄 알았던 듯했다. 재촉하려던 목소리가 불시에 몸 안으로 들어온 손가락에 뚝 끊겼다.
일주일가량의 시간이 지나긴 했으나 한 번 열린 몸이라고. 재광의 안이 의주의 손가락을 제법 수월하게 받아들였다.
그때도 술에 취해 긴장이 풀려 처음치고 어렵지 않긴 했다. 하지만 그에 비해서도 더 매끄러웠다.
길게 밀려들어간 의주의 가운뎃손가락은 빙글빙글 돌며 안을 넓혔다. 손짓이 반복될 때마다 젤이 녹으며 한층 부드럽게 움직인다. 이윽고 손가락이 하나 더 늘어나고, 의주는 손가락 사이를 벌리며 입구의 공간을 더 확보했다.
“으응, 흣! 아…!”
하나씩 늘어나기 시작한 손가락은 어느새 네 개가 됐다. 구멍이 팽팽하게 벌어질 만큼 깊게 쑤시자 재광의 앓는 소리도 더 커진다. 의도적으로 전립선 부근을 몇 번씩 건드린 터라 중심도 발딱 서 꺼떡였다.
“광아 혼자만 좋으면 어떡해. 나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의주는 등허리를 훑던 손으로 재광의 성기 끝을 가볍게 들추며 말했다. 눈을 꼭 감고 아랫입술을 질끈 물던 재광이 호흡 가득한 목소리로 받아쳤다.
“그럼, 흣, 넣든가요. 아, 아!”
몇 글자 되지도 않는 대꾸건만 그 사이에도 부지런히 안을 찔러대자 결국 탄성으로 끝맺음이 되고 만다. 붉게 상기된 재광의 뺨을 가볍게 어루만진 의주는 곧 녹은 젤로 축축하게 젖은 손을 빼냈다.
내벽을 가득 채우던 것이 훅 빠져나가자 뒤가 빠끔거리며 천천히 오므라든다. 충분히 적셔놓은 터라 주변이 온통 반들반들해 보였다. 순식간에 이물감이 끊기자 숨을 몰아쉬는 재광의 가슴팍이 크게 들썩였다.
의주는 허벅지 안쪽 살을 강하게 잡아 벌렸다. 한껏 벌린 다리 때문에 반대로 엉덩이가 더 모여 붙는다. 그 사이로 콘돔을 씌운 제 성기를 비비던 그는 막 닫힌 입구를 예고 없이 뚫고 들어갔다.
“하, 아윽…!”
흐물흐물하게 풀려 호흡을 가다듬던 재광이 바짝 긴장했다.
손가락에 비할 수 없는 묵직함이 배 속을 찌르자 불시에 단단한 살덩이를 받아들인 몸이 맥없이 위로 밀린다. 습관처럼 고개가 뒤로 넘어갈 때는 의주가 빠르게 하관을 잡아 재광이 저를 보도록 만들었다.
만족감이야 더 말할 것도 없이 차고 넘쳤다. 그러나 오로지 제 몸짓에 흔들리는 재광을 보면서부터는 더 이상 웃음이 날 여유도 없었다.
기다란 눈매는 반쯤 풀어져 엷은 속쌍꺼풀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그 아래 볼은 발갛게 열이 올랐다. 통통한 입술은 얼마나 깨물어댔는지 혈색이 선명했다. 아래로 밀어붙이는 힘이 버거운 듯 벌어진 입술 새로 혀가 비친다.
저와 닮은 얼굴을 샅샅이 뜯어보던 의주는 몸을 낮게 숙여 재광의 입술을 덮쳤다. 부드럽게 감싸며 파고드는 키스를 할 줄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꼭 재광을 잡아먹을 듯이 굴었다.
취한 정신에 일을 벌인 재광마저도 당황스러울 만큼 거친 입맞춤이었다. 입술을 뜯을 것처럼 강하게 물었다 놓더니 이내는 뿌리를 뽑을 것처럼 재광의 혀를 세게 빨아올렸다.
“으, 흣, 으읍!”
버거운 신음마저 입안으로 먹혀들었다.
의주의 흐름을 억지로 따라가는 재광의 뒤통수는 위로 들린 지 오래였다. 그 탓에 목덜미가 빳빳하게 굳어 더 힘들었다. 의주의 어깨를 붙든 손끝이 바들바들 떨리자 낌새를 알아차린 그가 곧 재광의 가슴을 눌렀다.
“하아, 하…. 갑자기 왜, 이래요.”
간만에 편히 몸을 뉜 재광이 달뜬 목소리로 물었다. 무리해서인지 더 붉어진 뺨을 쓰다듬던 의주는 특별한 억양 없이 답했다.
“광아 운동 좀 해. 이 정도로 힘들면 어떡해.”
평소처럼 얄밉고도 실없는 소리를 하면서도 마주하는 눈길만은 뜨거웠다. 전혀 농담으로 들리지 않을 만큼 굳은 얼굴이다. 흥분이 고조될수록 짐짓 화가 나 보이는 그는 곧장 다시 입술을 붙였다.
커다란 손이 재광의 뺨을 가볍게 눌러 입을 벌렸다. 저항 없이 벌어지는 입술 새로 혀를 박아 넣는 동작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말 그대로 박아 넣는 행위였다. 진득하게 혀를 얽고 입안을 헤집던 이전의 키스와는 전혀 달랐다. 입맞춤보다는 삽입에 가까운 움직임이었다. 깊숙이 혀를 밀어 넣었다가 빼는 동작이 반복되자 아래 깔린 재광이 하릴없이 의주의 등만 긁어내렸다.
쉴 새 없이 마찰하는 아래는 찰박거리고, 틈이 막힌 입안은 질척거렸다.
의주는 재광을 위아래로 몰아붙이면서도 아직 모자란 모양이었다. 허리 아래로 움직임은 더 거세지고, 입안을 찌르는 혀는 더 깊게 밀려들어갔다.
“으응, 흡…!”
위에서 아래로, 아래서 위로 쏟아지고 올라오는 자극들이 아랫배 부근으로 죄 몰려드는 듯했다. 눈을 질끈 감고 모든 행위를 받아들이던 재광은 끝내 안 되겠는지 힘 들어가지 않은 주먹으로 의주의 등을 쳤다.
그러나 듣지 않은 의주는 오히려 입천장 끝까지 혀를 박아 넣고 말캉한 점막을 짓눌렀다. 순간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을 받은 재광의 눈가에 생리적인 눈물이 고인다. 기다란 눈매 끝이 짓무른 뒤에야 의주가 고개를 들었다.
“아아! 응, 아…! 으읏!”
위나 아래, 둘 중 하나만 놓아준다면 그래도 살 것 같았는데. 다 오산이었다. 의주가 입술을 놓아주자 뒤를 찌르는 감각이 더욱 선명하게 퍼진다.
힘주어 치받는 움직임에 스팟이 눌릴 때마다 눈앞에 빛 가루가 부서지는 것만 같았다. 머릿속에서 터진 불꽃의 잔해가 눈앞으로 쏟아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재광은 제가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 구분조차 하지 못하고 의주의 팔뚝만 절실하게 붙잡았다.
“흐으, 그만…. 아, 아!”
가운데로 몰리던 열감이 절정으로 치닫자 의주의 팔뚝을 쥐던 손도 자연스럽게 떨어져 나갔다.
재광은 피가 몰려 꺼떡거리는 자신의 성기를 쥐려 했다. 부풀만큼 부풀어 손끝만 가져다 대도 금방 사정할 터였다. 그렇기에 얼른 쏟아내 압박감을 해소하고 싶은 욕구가 컸다.
“광아, 또 먼저, 가게?”
하지만 예민한 표피에 닿기도 전에 손이 붙들렸다. 의주는 빠르게 붙잡은 재광의 손목을 슬금슬금 타고 내려가 손가락 사이사이를 단단히 옭아맸다.
“아파, 아파요. 흣! 아아, 아…!”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중심부가 투박하게 흔들리고 있으니 아플 만도 했다.
그러나 의주는 완고했다. 맞잡은 손을 재광의 머리 부근까지 올려 결박하듯 누르는 것이다. 남은 한 손도 곧 대칭을 이뤄 매트리스 위에 널브러졌다.
재광이 특별히 뼈가 가늘거나 왜소한 체격은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큰 의주에게는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재광의 양 손목을 가벼이 한 손에 틀어쥔 그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에 집중했다.
“아! 으으, 응, 흣! 아, 아아!”
얼마 가지는 못했다. 의주가 속도를 늦춰 짓뭉개듯 안을 휘젓자 보기만 해도 위태롭던 재광의 것에서 팟, 하고 정액이 튀었다. 한계까지 몰리다가 더는 참을 방도가 없어 터지는 모양새였다.
아랫배가 경련하며 내벽이 콱 조여든 것도 동시였다. 부드럽게 풀렸던 내부가 배 속에 든 살덩이를 본뜨듯 감겨들자 의주도 더는 당할 재간이 없었다. 빠듯하게 조이는 안을 몇 번 더 밀고 들어간 그는 힘 풀린 재광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사정했다.
안쪽 깊게 박아 넣고서 체액을 쏟아내자 재광의 안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더 조여들 수 없을 것 같던 내벽이 또다시 의주의 것을 콱 무는 것이다. 콘돔을 씌우지 않았더라면 쏟아낸 정액을 모조리 빨아들일 수도 있을 듯한 움직임이었다.
“….”
한동안은 거친 숨소리만 오갔다. 재광이 단정한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눈을 감자 눈가에 입술을 붙이던 의주가 곧 귓바퀴를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그는 지친 기색 역력한 재광의 뺨을 그러쥐며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손 안 대고 가니까 어때?”
좋다고 새된 소리를 내며 박힌 건 사실이지만, 재광은 이런 대화를 아무렇지 않게 나눌 만큼 개방적이지 못했다. 할 거 다 하고 나자 금방 낯이 뜨거워져 담담히 대꾸할 엄두가 안 난다.
그래서 고개를 돌려 외면하려 했으나 이미 얼굴이 붙잡힌 상태라 그럴 수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원망스러운 눈길만 보내자 의주가 입매를 올려 웃는다.
“이렇게 뒤로 잘 느끼면서 왜 남자를 안 좋아했어.”
“….”
“여자 만난 시간이 아까워서 어떡해.”
재광은 당장이라도 그딴 소리 하지 말라며 바락 대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아직까지 품고 있던 살덩이가 몸을 빠져나가는 순간 “아흣” 하며 몸을 바르작거리는 바람에 그럴 타이밍마저 놓치고 말았다.
“팀장님 진짜….”
“나 진짜?”
“…싫어요.”
결국엔 객기만 부렸다. 온전한 거짓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사람 면전에 대고 이런 얘기를 할 만큼 모진 성격은 아닌데. 이도 저도 못 하게 되자 괜한 심술을 부린 것이다.
사용한 콘돔을 묶어 버리던 의주는 대놓고 와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로 꼴 보기 싫다는 듯 눈까지 감아버리는데도 조금의 타격도 입지 않은 모습이었다.
“나 싫어?”
되묻는 목소리는 밝다 못해 신이 난 눈치였다.
그럴 만도 했다. 조금 전까지 밑에서 신음만 잔뜩 흘리던 이가 섹스를 마치고 너 싫다고 하면 그게 진지하게 들릴 리가 있나. 바로 사정하게 두지 않고 시간을 끌어 삐친 정도로만 보인대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근데 내 몸은 좋지.”
재차 묻는 목소리는 쓸데없이 간질거렸다.
“오밤중에 생각나서 찾아올 만큼.”
귓가에 낮게 울리는 음성에 고개를 비틀던 재광은 도로 눈을 떴다. 긴 눈매가 엷게 속쌍꺼풀을 접으며 천천히 뜨인다. 코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의주가 곧장 눈을 맞추며 웃었다.
대답을 듣자고 던진 물음은 아니었으나 들은 거나 다름없었다. 의주가 또 한 번 위에 올라타며 입을 맞추자 재광이 습관처럼 입술을 벌린 것이다. 이보다 더 솔직한 답은 또 없을 테다.
의주는 눈을 똑똑히 뜨고 가까이서 재광의 얼굴을 감상했다. 나른하게 눈꺼풀을 내리며 제 혀를 받아들이는 표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자극적이었다. 자상하게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던 의주의 손이 어느새 재광의 가슴으로 향했다.
손가락을 넓게 벌려 큼직하게 문지르다가 엄지로 유두를 누르자 맞물린 입안에서 막힌 신음이 터진다.
반응이 빨랐다. 이미 한바탕 섹스를 하고 달아올랐으니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흉곽을 크게 주무르며 입안의 여린 살을 헤집자 재광의 상체가 움찔대며 들린다.
그 틈으로 손을 밀어 넣은 의주는 천천히 허리를 세우며 재광의 등을 받쳤다. 밀어낼 생각 없는 재광은 순하게 딸려 올라왔다.
두 사람은 마주 앉은 자세로 입술을 겹쳤다. 그러는 동안 한 차례 체액을 쏟아낸 중심부가 또 한 번 단단해지기 시작한다.
“좀만 일어나 봐.”
입술을 뗀 의주는 제 허벅지 위에 자리한 엉덩이를 가볍게 두드렸다. 재광이 눈앞에 보이는 어깨를 조심스럽게 짚고 몸을 일으킨다. 의주는 존재감을 과시하는 제 것을 잡아 재광의 뒤에 맞췄다.
앉으라는 말은 하지도 않았다. 대신 허리를 감아 아래쪽으로 당기자 재광이 알아서 그 위로 내려앉았다.
“흐으, 읏….”
이미 실컷 의주를 받아낸 몸이라 삽입이 쉬웠다. 다만 천장을 보고 누웠을 때보다 깊이감이 훨씬 더 잘 느껴질 뿐.
재광의 목이 저절로 뒤로 꺾였다. 조금만 움직여도 자극이 심해 몸이 자꾸만 멈칫거렸다. 의주가 도드라진 목젖에 입 맞추며 허리를 감아올렸다.
“흣, 으읏, 아…!”
단단히 받쳐주는 팔 덕분에 조금은 더 움직여볼 용기가 난 모양이었다. 몸을 달싹거리는 재광의 입술 새로 쉴 새 없이 소리가 새어 나온다.
사실상 크지 않은 움직임이었으나 의주에게 가해지는 자극도 적지 않았다. 작은 동작에도 안을 찌르는 감각을 더 크게 느낀 재광이 뒤를 콱콱 조여온 탓이다. 재광은 끙끙대면서도 꾸준히 일어났다 앉기를 반복하며 의주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이번만큼은 의주도 저와 꼭 닮은 얼굴을 욕심내지 않았다. 도무지 감당이 안 되는지, 재광이 제 어깨에 이를 박아 넣는데도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뒷머리를 부드럽게 감싸 더 편히 기댈 수 있도록 했다.
대신 허리 아래로는 자비가 없었다. 점점 힘에 부친 재광이 내리찧는 속도가 떨어지자 곧장 밑에서 위로 쳐올리기에 이른다. 직접 움직일 때보다 훨씬 더 격한 동작에 놀란 재광의 상체가 온전히 의주에게로 쏟아졌다.
“아, 아아! 너무 빨, 라요. 읏!”
그를 이리로 이끈 혜진이나 혜진의 결혼 상대는 머릿속에서 잊힌 지 오래였다. 아랫배를 들쑤시는 묵직한 감각과, 눈앞에서 무언가가 터지는 착각이 일 만큼 강한 쾌감이 재광의 심신을 점령했다.
재광이 눈도 못 뜨고 벅찬 내색을 하자 의주는 어쩐 일로 순순히 속도를 늦췄다. 얄궂은 괴롭힘은 아까 한 번으로 족한 듯했다. 대신 조건을 내건다.
“그럼, 하, 네가, 해야지.”
제가 멈추는 대신 재광이 알아서 움직이란다. 의주의 어깨에 이마를 처박고 있던 재광은 으으, 하고 앓았다.
그게 싫다는 뜻은 아니지 싶었다. 잠시간 숨을 고르며 가만히 있던 재광의 허벅지에 반듯한 근육이 선다.
금방이라도 몸을 띄울 듯 다리에 힘이 들어갔으나 쉽지는 않은 듯했다. 망설이던 재광은 곧 앉은 자리에서 하체를 움직였다.
자의로 삽입을 지속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는지 허리를 돌리는 것이다. 의외로 유연한 움직임이었다. 조금 어설프기는 하지만, 왜인지 그 어설픈 모습이 의주를 더 미치게 했다.
말을 타듯 앞뒤로 부드럽게 허리를 뭉개던 재광은 안에 자극이 올 때마다 온 내벽을 조이며 의주의 성기를 감쌌다. 귀두부터 음낭 바로 위까지 꽉 붙들고서 흔들어대니 의주로서도 무감하게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아…! 흐, 으읍!”
의주는 기어이 제 어깨에 기댄 얼굴을 끌어왔다. 뒷머리를 거칠게 헤집으며 고정한 뒤에는 곧장 입술을 삼켰다. 얽혀드는 혀와 함께 뜨거운 숨이 서로의 입안에서 섞였다.
몇 번씩 호흡을 주고받는 동안 재광의 움직임이 현저히 떨어졌다. 입맞춤에 혼이 나가서는 아니고, 금방이라도 또 분출할 것 같은 욕구가 올라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사린 것이다.
의주는 채근하지 않았다. 대신 제가 치받는 쪽을 택했다. 재광이 안쪽 깊이 찌르고 들어오는 살덩이에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의주의 등만 꽉 끌어안았다. 체위의 특성상 의지할 곳이라곤 이뿐이라 별다른 대안이 없었다.
사정감이 올라오는 건 의주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스퍼트를 올리며 한 손으로 재광의 것을 감쌌다. 위아래로 가볍게 훑자 팽팽하게 부풀었던 성기에서 곧장 액이 터져 나온다. 의주의 허리를 감고 있던 재광의 다리가 작게 경련했다.
다리뿐만이 아니었다. 절정에 달한 쾌감을 느끼며 무의식중에 뒤를 한껏 압박하자 간발의 차로 의주가 파정했다. 여전히 재광의 안에 저를 찔러 넣은 상태로.
“아….”
한차례 뒹군 뒤 새 콘돔을 꺼낸 기억이 없다는 건 그 순간에 떠올랐다. 의주는 의미 없는 소리를 뱉으며 제 위에 늘어진 재광의 상체를 들어 올렸다. 술에 취한, 더불어 성감에 취한 재광이 용케 몸을 가누며 무릎을 세워 일어났다.
손자국이 남은 허벅지를 타고 희뿌연 정액이 흐른다. 느리고, 진득하게.
“….”
그 광경을 가만히 쳐다보던 의주는 말이 없었다. 조용한 건 물론이고 표정까지 사라진 그는 재광이 다시 주저앉으려 할 때가 되어서야 말문을 열었다.
“이리 와 봐. 빼줄게.”
재광을 돌려세운 의주는 조금 전까지 들쑤시던 구멍에 손가락을 쑥 집어넣었다. 별안간 또 자극을 당한 재광이 아흣, 숨을 토하며 앞으로 고꾸라진다. 그 덕에 엎드린 자세로 의주에게 엉덩이만 내밀고 있는 꼴이 됐다.
재광은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제 모습이 수치스럽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들 줄을 몰랐다. 그러나 의주는 제 흔적을 긁어내면서 시종일관 뜨거운 눈길로 재광의 둔부를 훑었다.
정확히는 손가락으로 안을 헤집을 때마다 희멀건 한 액을 쏟아내는 구멍을 봤다. 뜨거운 눈길만큼이나 강렬한 욕망이 의주의 안에서 들끓었다.
누구에게도 이 모습을 공유하고 싶지 않았다. 재광이 이렇게나 흐트러질 수 있단 사실을 혼자만 알고 싶었다. 이 몸 깊숙이 흔적을 남기는 것도 오로지 자신뿐이었으면 했다.
충동적으로 든 욕심이라기엔 몹시도 확고하고 강렬한 욕구였다. 제가 뱉어낸 체액을 남김없이 빼낸 의주는 끝내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와, 나….’
이제까지는 들쑥날쑥하지 않은 기복이 좋고, 건드리는 대로 욱하는 게 귀엽고, 저와 닮은 얼굴이 매력적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이제는 다른 남자와 재광이 단둘이 있는 게 거슬리고, 이 곁에 오로지 저만이 남고 싶어진다.
‘김재광 좋아하네.’
인정은 빨랐다. 저 자신에게 가장 관심이 많은 의주였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신에게 관심만 많을까, 스스로의 감정에 확신도 넘친다.
그간 호기심으로 포장했던 감정의 실체를 깨달은 의주는 숨처럼 웃었다.
????
의식은 어렴풋이, 그리고 천천히 돌아왔다.
‘죽자. 죽어.’
킹사이즈 침대 한편. 반듯하게 누운 재광은 이제 막 뜬 눈을 질끈 감으며 속으로 읊조렸다. 미쳤지 진짜, 술 끊어야지 등등. 순식간에 엉겨드는 생각들로 맘이 소란했다.
실수라 치고 외면하는 것도 한 번일 때나 가능한 얘기였다. 어제 일은 어떤 변명을 갖다 붙여도 미친 짓 외에는 설명이 안 된다.
섹스 파트너가 되자는 소리에 미쳤냐고 질색한 게 고작 일주일 넘은 일이다. 타 기업 서류 합격 소식을 듣고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발견하기 전까지 얼마나 마음을 썩였던가. 이제 겨우 의주의 얼굴을 태연하게 볼 수 있게 됐는데 그새를 못 참고 또!
‘왜. 왜! 대체 왜!’
재광은 당장이라도 이불을 걷어차고 발버둥 치고 싶은 심정을 꾹 눌러 참았다.
극한의 자괴감이 온몸을 휘감는다. 어제의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를 똑똑히 기억하는 까닭이다. 우연히 첫사랑 누나를 만났고, 그 누나의 결혼 상대가 의주와 인상이 비슷하다는 사실에 열등감이 폭발해 제 발로 여기까지 걸어 들어왔다.
만취하지 않았더라면 부리지 않았을 치기, 라고 하면 너무 그럴싸하고.
그냥 재광은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찌질해 견딜 수 없이 창피했다. 다 지난 일. 그것도 강산이 절반은 바뀔 만큼 시간이 흐른 일을 지금까지 가슴에 담아두고 이런 짓을 벌이다니. 제 맘이었는데도 차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 무슨 생각으로 의주와 자겠다 마음먹었는지도 선명히 기억나 더 미칠 것 같았다.
그렇게나 좋아하고 쫓아다닌 사람의 털끝 하나 못 건드린 그 누나와 달리 저는 의주와 잔다고. 그러니 자신의 승리라 여긴 개논리였다.
‘이기긴 뭘 이겨! 왜 이겨 대체!’
정작 상대방은 제가 어디서 뭘 하는지도 모르고 있었을 거다. 약혼자와 즐겁게 데이트를 했든, 집에서 편안히 쉬었든 했겠지.
그러니까, 결국엔 재광 혼자 찌질하게 열등감으로 똘똘 뭉쳐 실체 없는 그림자와 싸워댄 격이었다.
자기 위안 삼아 남 탓으로 돌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술에 취한 사람이 자자는데 그걸 쏠랑 받아먹냐고, 말려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그런 원망도 할 수가 없었다.
상대가 여의주였다. 술 취해 처음 섹스를 하고 아무렇지 않게 파트너 제안을 하던 인간이다. 제안만 했을까. 말도 안 된다며 거절당한 뒤에는 아쉬운 내색까지 했다.
그런 그가 제 발로 찾아와 자자고 말하는 저를 말릴 리 없다는 건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맨정신이라서가 아니다. 만취해 판단력이 흐려진 상태에서도 의주가 자신을 거절하지 않을 걸 알기에 당당히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거다. 그러니 어젯밤 일어난 사고와 관련해 원망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자신뿐이었다.
- 이렇게 뒤로 잘 느끼면서 왜 남자를 안 좋아했어.
- 여자 만난 시간이 아까워서 어떡해.
느끼기는 또 왜 그렇게 잘 느꼈는지. 이젠 그것조차 혼란스러웠다. 이제는 남자와의 섹스가 처음이 아니라고 당연하게 의주를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었던 것도 우습기 짝이 없다.
‘뛰어내릴까, 그냥.’
받아들이기만 했냐고. 의주 위에 앉아 허리를 돌리던 기억에는 이대로 창문을 깨고 나가고픈 심정이 됐다.
“….”
진정은 빨랐다. 고른 숨소리로 보아 의주는 아직 깊게 잠든 듯했고, 그렇다면 여기서 몰래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무엇 하나 정리가 되질 않는 지금 상황에서는 의주와의 대면만 피해도 조금은 숨통이 트일 듯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재광은 아주 조심스럽게 이불을 들췄다.
곁눈으로 계속해서 의주의 눈치를 살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막 다리를 땅에 내려놓던 순간에는 매트리스가 조금 흔들린 것도 같았으나 다행히 의주는 미동이 없었다.
“야, 광.”
그러나 겉보기에만 그랬던 모양이다. 온전히 몸을 일으킨 재광이 제 옷가지를 찾으려 방을 둘러보던 타이밍. 의주가 멀쩡한 목소리로 재광을 불렀다. 꼭 리모컨 쥐고 주무시는 부모님처럼 여전히 눈을 감고서였다.
재광은 크게 움찔거렸다. 그러나 별다른 대답은 하지 않았다. 저쪽에서도 애초에 답을 기대한 부름은 아니었는지 알아서 말을 잇는다.
“너 또 나 먹고 버리냐?”
늘 그렇듯 진지한 낌새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가볍다 못해 새털 같은 뉘앙스다. 더군다나 감정 없이 몸만 섞자던 사람이 하는 말로는 어울리지도 않았다. 그러니 대충 흘려듣고 헛소리 말라 넘겨도 아무 상관이 없었을 텐데.
“…씻으려고. 씻고 싶어서요.”
재광은 잔뜩 멍청한 말투로 변명만 하고 말았다.
몰래 빠져나가려던 계획이 들켜 당황한 탓이다. 하는 수 없이 방에 딸린 욕실로 걸음을 옮기면서, 그는 애꿎은 입술만 깨물었다.
창밖으로 들어오는 빛을 단서 삼아 예상컨대, 동이 튼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았다. 그런데 이 시간에 대뜸 씻으려 일어난다고? 누가 봐도 요상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다.
그리고 지금 재광은 요상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저벅저벅 욕실로 들어서 샤워기를 틀었다. 의주의 얼굴을 또 어떻게 봐야 할지. 속을 끓이느라 심란한 얼굴이 금세 물줄기에 젖었다.
따끈한 물에 원활히 도는 혈류처럼 머리도 잘 돌아가게 됐다면 좋을 텐데.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없었다. 몸이 개운해지는 동안 머릿속은 답 없이 복잡해지기만 했다.
재광은 한층 침울한 안색으로 욕실을 나섰다. 그래도 정신이 조금 말짱해지긴 했는지, 이제야 침대 아래 널브러진 제 옷가지들이 제대로 보인다.
재광이 멋대로 구겨진 옷들을 하나씩 주워 입기 시작하자 의주가 슬그머니 일어나 침대 헤드에 기대앉았다.
“집에 가게?”
그냥 여기서 출근하면 편할 걸 왜 굳이 집에 가려 하는지 모르겠다는 말투였다. 불시에 튀어나온 목소리에 놀란 재광이 애써 초연한 소리를 냈다.
“가야죠. 말도 없이 외박했는데.”
“출근은 할 거고?”
이번에 들려온 의주의 음성에는 대놓고 의심이 묻어났다. 창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빛이 전부인 터라 표정까지 세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마 가는 눈을 뜨고서 흘겨보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 왜. 사표라도 쓰려고 했어?
지난 사건이 있고 난 뒤, 도저히 회사에 갈 용기가 안 나 미적대던 그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재광은 그런 게 아니라고 발뺌했으나 역시 의주는 믿지 않은 듯했다. 이번에야말로 재광이 꽁무니 빼고 도망쳐버릴지도 모른다 여기는 게 분명했다.
“…네.”
그래서 더 확실하게 답한다고 한 건데, 생각보다 자신 없는 말투가 튀어나왔다. 어둠 속에서 단단히 팔짱을 끼고 앉은 의주가 곧바로 대꾸했다.
“그래놓고 안 오면 너희 아파트 엘리베이터 광고판 해킹해서 ‘돌아와요. 재광 씨’ 띄울 거야.”
진지함이라곤 죽었다 깨나도 찾을 수 없는 언사였으나 재광은 그래서 더 등골이 오싹했다.
저 인간이라면 아무렇지 않게 그런 일을 벌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천재 여의주 님 광고판 해킹 기록 경신! 따위의 소릴 해대면서.
“해요, 한다고요.”
옷을 다 갖춰 입은 재광은 울며 겨자 먹기로 확답을 줬다.
????
의주는 순순히 재광을 보내줬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유예였다. 당장 대화를 나누기엔 무리니 나중에 각 잡고 얘기하자는 뜻일 테다.
재광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는 바. 죽을상을 하고 집에 들어왔다. 안 가면 진짜 광고판에 제 이름이 뜨려나, 그런 생각을 실없이 하면서였다.
“잘한다, 잘해. 요새 말도 없이 외박이 잦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기 무섭게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꽂혀든다.
이 집에서 마주칠 사람이야 뻔했다. 재광의 형, 민광이다.
그는 일인용 소파에 앉아 뒤통수를 보이고 있었다. 이 시간까지 재광을 기다리고 있었던 건 당연히 아닐 테고, 조깅 나가는 시간과 재광의 귀가 시간이 우연히 겹친 것 같았다.
“뭔 상관.”
재광은 불퉁하게 받아쳤다.
언질도 없이 안 들어오는 건 형이 저보다 더했다. 그러다 보니 도통 표현이 곱게 나가질 않는다. 더군다나 지금 같이 속이 시끄러울 때는 말 섞어 봐야 열만 받을 게 뻔해 빨리 자리를 피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네가 클럽 갔다 첫차 타고 들어오는 대딩이냐? 손톱만 한 회사 나부랭이 들어가더니 여유가 철철 넘친다?”
하지만 민광은 쉽게 재광을 놔주지 않았다. 재광은 짜증스럽게 인상을 구기며 젖은 머리카락을 마구잡이로 헤집었다.
스물여섯 먹도록 저런 형 밑에서 컸지만 정말 모를 일이었다. 저 혼자 독차지하던 사랑, 둘째 태어나며 절반 뚝 떼어줬다면 그게 불만인가보다 할 텐데 그것도 아니잖은가. 장남이라고 온갖 편애 다 받은 건 저면서 매사에 재광을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다.
“너 내가 얘기했지. 인턴이라고 정직원 전환 무조건 되는 것도 아니라고. 뭐라도 제대로 해야 거기라도 붙어 있는 거지, 직장인 감투 썼다고 방탕하게 놀고만 다니면 아이고 좋다 하고 받아주겠냐?”
“그런 거 아니라고. 알지도 못하면서 지랄이야.”
“지랄? 지라알? 이 새끼 형한테 말 꼬라지 봐라.”
순화가 안 되고 툭 튀어나와 버린 진심에 민광이 발끈했다. 지금까지 고고하게 소파에 앉아만 있더니 벌떡 일어나 재광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재광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한숨만 푹 내쉬었다. 그런데, 어라.
“얼씨구.”
가까이 다가온 민광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실소를 흘린다. 재광보다 훨씬 큰 키와 덩치를 가진 그는 한참 아래까지 시선을 내려 제 동생을 길게 훑어봤다.
“꼴에 연애 한번 시끄럽게 하네.”
누가 봐도 갓 씻고 들어온 재광의 행색을 보고 한창 불타는 연애를 하는 중이라 오해한 거다.
재광은 무어라 반박하려다가 말았다. 붕어처럼 뻐끔거리다 만 입술을 굳게 다물고서 제 방문을 여는 게 다였다.
솔직한 맘으로, 차라리 그랬으면 싶었다. 민광의 말대로 혈기를 감당 못 해 날을 지새우고 이 시간에 들어왔다면 그게 훨씬 나을 듯했다. 하지만 그 생각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여의주와 연애? 그것만큼 미친 소리도 또 없을 것이다. 재광은 잠깐이나마 든 뻘생각을 지우려 거칠게 도리질을 쳤다. 침대 위로 뛰어드는 행동에 지친 티가 역력히 묻어났다.
“아으….”
서 있던 자세 그대로 엎어진 재광은 짧게 앓았다.
의주와 처음 잔 날처럼 두들겨 맞은 듯 온몸이 아픈 건 아니지만 미약한 근육통이 남아 있었다. 평소에 취할 리 없는 자세로 움직인 탓인지 허벅지를 타고 올라오는 뻐근한 감각이 제법 선명했다.
“등신, 머저리, 찌질이.”
이불에 얼굴을 파묻은 재광은 자기 자신에게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축 늘어졌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을 만큼 후회가 밀려들건만, 눈치 없는 몸뚱이는 밤사이의 쾌락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더 짜증이 났다.
????
재광은 지하철 쇠기둥에 매달려 있었다. 금방 땅으로 푹 꺼진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안색이었다.
정신 나가 저지른 일을 차치하더라도 기본적인 피로가 너무 심했다. 늦은 밤 의주를 찾아가 거사를 두 번이나 치른 뒤 잠들었고, 첫새벽부터 일어나 집에 돌아갔으니 그럴 만도 했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형과 말씨름을 했고, 복잡한 속사정 때문인지 쉽게 잠들지도 못해 제대로 눈을 붙일 새도 없었다.
몸이 버티다 못해 까무룩 잠든 10분 정도가 추가 수면의 전부였다. 자다 깼다 한 탓일까, 그 짧은 휴식이 꿀 같기는커녕 피로만 더 몰고 온 느낌이었다.
동태 눈깔로 애매한 허공만 쳐다보던 그의 정신을 깨운 것은 짤막한 진동이었다. 그마저도 귀찮은 듯 미동도 않던 재광은 나무늘보 부럽지 않은 속도로 겉옷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여의주 팀장님
어디야? 오고 있어? 데리러 가?오전 8:15
가고 있어요.오전 8:18
여의주 팀장님
진짜? 빨리 와. 보고 싶어♥♥♥♥♥♥♥♥♥♥♥♥♥♥오전 8:19
출근하겠다고 대답만 해놓고 도망갈까 봐 어지간히 의심스러운 모양이었다. 득달같은 물음에 덤덤히 대꾸해준 재광은 생각지 못한 하트의 향연에 인상을 썼다.
“으.”
저도 모르게 육성으로 질색하는 소리를 내자 앞 좌석에 앉은 승객이 흘끔 쳐다보는 게 느껴진다. 재광은 아무 일 없었던 듯 낯 뜨거운 하트만 재차 확인했다.
처음 자고 난 날에도 “자기야”라며 저를 놀려대던 의주였다. 이 하트도 그와 같은 맥락일 테다. 그저 화면 안에 갇힌 텍스트일 뿐인데도 의주가 얼마나 신나서 보냈을지 눈에 보이는 것 같아 소름이 돋았다.
의주의 입장에서는 신날만도 했다. 지속적인 관계를 제안할 때는 단칼에 잘라놓고 약 일주일 만에 자자고 찾아온 저를 보고 얼마나 재밌었을까.
어쩌면 재밌다는 표현마저도 사치일지 몰랐다. 가소롭고 우습고 헤퍼 보였을지도 몰랐다.
‘또 한 번 술 입에 대는 날엔 내가 개다, 개.’
이를 으득 간 재광은 결국 별다른 대답 없이 의주와의 메신저 창을 껐다. 개는 잘못이 없으니 쓰레기로 정정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휴대전화를 도로 주머니에 집어넣은 그는 다시 쇠기둥에 매달려 섰다. 머리를 툭 기대고 축 늘어져 있자 얼마 지나지 않아 앞자리 승객이 일어선다.
“저기요, 앉으세요.”
아무래도 맥아리 없이 서 있는 모습이 어디 아픈 사람처럼 보이기라도 했나 보다. 다른 때 같았더라면 괜찮다 이야기하고 마다했을 재광이지만, 오늘만큼은 고개를 꾸벅 숙여 고맙단 인사를 전하고야 말았다.
아직 살아 있는 인류애 덕에 한결 편한 출근길을 보내게 된 재광은 자리에 몸을 붙이자마자 뻑뻑한 눈을 감았다. 이대로 내릴 때까지 한숨 자면 좋겠는데. 쌓인 피로와 별개로 잠이 들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죽상을 하고 출근길에 올랐지만 조금 뒤 의주를 마주할 생각을 하면 벌써 막막해 속이 갑갑했다.
그런 기분인 것도 당연했다. 두 번째니까. 또 없던 일로 치자는 건 씨알도 먹히지 않을 테고, 재광이 생각할 때도 그건 말이 안 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더 혼란스러웠다. 몸만 주고받는 사이(그것도 남자와)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 같은데 벌써 두 번이나. 횟수로 치자면 그 이상을 뒹굴어놓고 아무 사이가 아닌 것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어릴 때부터 주입식으로 교육받은 보수적인 사상의 대충돌이었다. 육체적인 관계를 사랑하는 이들 사이의 성스러운 결합으로만 볼 것이냐, 그보다 먼저 제 행실에 책임질 줄 아는 의젓한 성인이 될 것이냐.
재광은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한숨만 깊게 내쉬었다.
살면서 이런 문제로 고민하게 될 날이 올 거라고 감히 상상이나 했을까.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잠들어 종점까지 가버리고 싶었다.
????
주인공은 원래 마지막에 나타나는 법이라며 늘 출근 시간을 꽉 채워 들어오던 의주는 오늘따라 빠르게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보다 이른 등장임에도 해끔한 낯이었다. 전 재산을 코인에 꼬라박았다가 떡락한 사람 같은 재광과는 영 딴판인 얼굴이다.
보고 싶다며 하트로 도배한 메시지를 보낼 때부터 티가 나긴 했다만, 신이 나 죽겠는 모양이었다. 정작 재광이 정기 다 빨린 모습으로 들어섰을 때는 왔냐며 눈만 크게 끔뻑이는 게 전부더니 그 뒤로는 업무를 보면서도 간간이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중간중간 억지로 집중하려 애쓰는 재광을 쳐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몰래 훔쳐보지도 않고 대놓고 살폈다. 그것도 흥미 가득한 미소를 짓고서.
재광과는 아직 어떤 대화도 나누지 않았지만, 의주도 알기에 그랬다.
남자와, 그것도 마음도 없는 사람과 어떻게 계속 몸을 부대끼냐고 반문하던 재광이지 않던가. 포장하자면 보편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고리타분한(어디까지나 의주의 시각에서) 그에게 간밤의 사건은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쳤을 터였다.
의주는 그게 너무너무 기대됐다.
- 너 또 나 먹고 버리냐?
진지함이라곤 벼룩의 간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말이었으나 재광은 그 정도에도 금세 변명을 했었다. 제대로 얘기를 꺼냈을 때는 과연 어떤 모습일는지. 의주는 조금이라도 빨리 확인하고 싶었다.
“오늘 저랑 재광 씨랑 둘이 점심 먹을게요. 다들 식사 맛있게!”
컴퓨터 시계가 정각으로 바뀌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전혀 예상 못 한 소리에 재광이 고개를 휙 돌려 의주를 본다. 지금껏 목에 깁스를 한 듯 모니터만 보고 있더라니, 시선이 돌아오는 속도가 엄청났다.
“야, 광. 뭐해. 빨리 일어나. 늦어.”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한마디를 더하자 이번에는 재광의 얼굴이 의아함을 가장한 경악으로 물든다.
어디에 늦는다는 건지. 정확히는 무슨 짓을 했기에 늦을 일이 생긴 건지 가늠할 수 없어 두려워하는 표정이었다.
“자기야 빨리.”
그 얼굴에 대고 의주가 속삭였다. 여태 움직임이 없던 재광은 총알처럼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주는 흥을 감추지 못하고 빠른 속도로 걸었고, 재광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되 너무 멀어지지 않도록 겨우겨우 걸음을 뗐다.
“뭐예요. 갑자기 왜 이런 데를….”
의주가 앞장서 도착한 곳은 회사에서 멀지 않은 식당이었다. 재광이 다른 직원들에게 전해 듣기로는 거래처와 미팅할 때 자주 이용하는 장소라고 했다. 즉, 방이 분리되어 있어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기에도 괜찮다는 의미였다.
재광이 이곳에 직접 발을 들이기는 처음이었으나 분위기 정도는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직장인이 점심 한 시간 대충 때우자고 올 만한 식당은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얼떨떨한 어조로 물었더니,
“우리 중요한 얘기 해야 되잖아.”
…란다.
‘아니, 중요한 얘기가 맞긴 맞는데….’
재광은 생각마저 끝맺지 못하고 직원의 안내를 따라 발을 뗐다.
‘그래도 자네 마네 하기에는 너무 좋은 데 아닌가.’
끊긴 생각은 룸에 들어가 앉은 뒤에야 마저 할 수 있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인테리어가 더욱 고급스러운 인상을 주는 식당이었다.
음식은 또 어떻고. 각자의 앞에 놓인 우드 트레이에는 한식이 소담스럽게 담겨 나왔다.
정갈하게 놓인 그릇들을 멍하니 보던 재광은 더욱이 난감한 기분이 됐다. 이런 기품 있는 요리를 앞에 두고 나눌 이야기는 절대 아닌 것 같아서다.
“일단 좀 먹고 얘기하자.”
열두 시 땡 치자마자 서둘러놓고 정작 음식이 나올 때까지 말이 없던 의주의 첫마디였다. 재광이 생각하기로는 먹으면서 하나 먹고 하나 술술 넘어갈 리 없을 것 같았지만….
결국엔 그러자 하고 말았다. 제가 주도할 자신이 없는 대화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얌전히 입 다물고 밥이나 욱여넣는데, 당장이라도 체할 줄 알았던 예상과 달리 잘 넘어가긴 했다. 대체로 자극적이지 않은 메뉴 구성이라 숙취 중에도 받아들이기 부담이 없었고, 기본적으로 맛 자체가 좋았다.
“이거 더 먹어.”
의주는 별안간 그렇게 말했다. 불편할 법한 상황에서도 복스럽게 잘만 먹는 재광에게 제 몫의 작은 그릇 하나를 내민다. 얕게 팬 그릇에는 건드린 흔적도 없는 멸치볶음이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어느새 밥공기의 3분의 2가량을 거덜 낸 재광은 양 볼을 불룩하게 채운 상태로 의주를 봤다. 입안에 음식이 가득해 대꾸는 못 했으나 무슨 의도로 이러는지 묻는 눈빛만은 선명했다.
의주는 저와 꼭 닮은 기다란 눈매를 지그시 쳐다보며 재차 입을 열었다.
“야, 광. 나 어때?”
난데없는 질문에 재광의 미간이 좁혀든다.
재광은 앞선 의주의 물음을 자연스럽게 몸에 관한 이야기로 받아들인 차였다. 그렇기에 불만스러운 심정을 감출 길이 없었다.
‘밤새 좋다고 얽히고설킨 거 뻔히 알면서 그런 건 왜 캐물어?’
자신을 난감하게 하려는 의도로 해석해 감정이 더 나빴다. 그런 와중에도 부지런히 턱짓을 하느라고 볼록 솟은 볼이 유연하게 움직였다.
대놓고 아니꼬운 티를 내는데도 의주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오히려 더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말을 이었다.
“나는 이만하면 자상하고 다정하고 훌륭하다고 생각해.”
“그러시겠죠.”
앗. 이건 실수.
열심히 씹던 음식물을 꼴딱 넘긴 때와 의주의 말이 끝난 시점이 잘 맞아떨어져 마음의 소리가 밖으로 새고 말았다. 재광은 흠칫거리며 입을 막았으나 의주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아. 내가 그냥 머리가 좋은 게 아니라 기억력도 좋거든. 그래서 뭐 하나 쉽게 까먹질 않으니까 딴 사람들한테 다정할 수밖에 없어.”
흔하디흔한 의주의 자기 자랑이지만, 사실 이건 재광에게 금시초문인 소리는 아니었다.
- 항상 자기만 잘났다는 태도라서 딱 이기적일 줄 알았는데 은근히 사람 챙길 줄도 알고 섬세하더라고요.
입사 첫날이던가. 벌써 가물가물해진 재광의 기억 속에는 여자 직원이 한 얘기가 남아 있었다. 확실히 의주가 남을 챙기는 섬세한 성격인 것보다는 그저 기억력이 좋다는 쪽이 설득력 있었다.
그 때문에 재광이 고개를 약하게 끄덕거리자 저쪽에서 눈을 번뜩인다. 기대에 가득 찬 낯짝을 보아하니 제가 다정한 사람이라는 말에 동의한 줄로 안 모양이었다. 의주는 뜸 들이지 않고 입술을 뗐다.
“그래서 말인데, 재광.”
“네.”
“이왕 이렇게 된 거, 우리 사귀자.”
“네에?”
진짜 사람 여러 번 놀라게 한다. 재광은 입사 이래 가장 경악한 얼굴로 의주를 봤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 아니, 저. 아….”
재광은 생각지도 못한 발언에 말 한마디조차 제대로 꺼낼 수 없었다.
당연히 의주가 파트너 제안을 반복할 거라 예상했던 탓이다. 한 번 고사해놓고 또 같은 사고가 일어났으니 이번에는 더 호락호락하지 않은 태도를 보일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갑자기 사귀자고? 잠자리 두 번 만에 얘기가 이리로 튈 줄은 꿈에도 몰랐다.
“무슨 소리냐니. 사귀자니까? 너랑 나랑 둘이.”
앉은 자리에서 혼비백산하는 재광과 달리 의주는 진지했다. 진지한 척 재광을 약 올리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솔직히 처음 잤을 때만 해도 저를 빼다 박은 얼굴을 보며 하는 기분은 어떨까, 하는 호기심이 지배적이었다. 막상 해보니 그 이상으로 만족스러웠기에 지속적인 관계를 제안했던 거고.
그때만 해도 단순 유흥으로만 인식했던 게 사실이다. 앞으로도 종종 하자는 말만으로 기겁하는 재광 때문에 더한 이야기는 하지 못했지만, 그 당시 의주의 생각은 그랬다.
재광이 여자를 만나든 남자와 사귀든 상관없다고. 그저 저와 종종 몸만 나누면 그만이라고.
하지만 소원대로 또 한 번 해본 다음부터는 마음이 달라졌다. 정확히는 재광의 안에 쏟아낸 자신의 체액을 손수 빼내면서 든 생각이었다. 재광의 그런 모습을 다른 사람도 볼 수 있다는 게 싫었다.
오로지 자신만이 재광의 곁을 지키고 싶었다.
“남자친구. 애인하자고. 사내 커플.”
저를 빼닮은 얼굴이며 기복 없는 성격, 감이 좋은 몸이나 속궁합까지. 재광과 관련해서라면 떠오르는 모든 게 다 좋으니까. 그러니까 사귀고 싶었다. 누구도 넘보지 못할 긴밀한 사이가 되고 싶었다.
“말이 돼요, 그게?”
비록 재광은 그 합리적인 결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지만.
“왜 안 돼? 그때 네가 사귀지도 않는 사람이랑 어떻게 섹스만 하냐며. 오히려 사귀면 그런 것도 다 해결되고 더 좋은 거 아니야?”
“아니 왜 중요한 건 빼놓고 말씀하세요. 좋아하지를 않잖아요. 좋아해야 사귀죠.”
“맞다. 너 나 싫다 그랬지.”
의주는 아무렇지 않게 받아쳤으나 재광은 역할을 잃은 지 오래인 젓가락을 가만히 내려놨다.
- 팀장님 진짜….
- 나 진짜?
- …싫어요.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는 사실에 절망해 그런 세세한 일화는 잊은 참이었다. 불현듯 스치는 그 날의 기억에 내심 미안해진 재광은 조용히 입을 닫았다.
그날 유독 의주가 밉고 싫은 건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사람 면전에 그런 소릴 내뱉을 필요까지 있었나 싶은 것이다.
그러나 의주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런 말을 들은 당시에도 웃어버렸던 그는 여전히 해끔한 낯으로 대꾸를 이었다.
“하기야 사람이 너무 완벽하면 거리감도 느껴지고, 질투도 나고 그래서 막 싫고 그럴 수 있어.”
“아, 그때는 제가….”
“근데 내 몸은 좋잖아. 사귀는 사이에 정신적 교감은 그렇게 중요시하면서 육체적인 건 왜 등한시해? 몸이 좋아서 사귀면 안 되는 거야?”
솔직히 이건 여의주 연애사에 길이 남을 일이었다. 제가 싫다는 사람을 이렇게까지 구슬려본 적은 여태껏 없었으니까.
그러나 일단 곁에만 둘 수 있다면 그다음은 자신 있었다. 시작이 어찌됐든 결국엔 제게 빠져들게 할 자신이. 의주는 계속해서 재광을 설득했다.
“난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몸도 엄연히 그 사람의 매력 포인트라고. 몸에 끌리는 게 나빠?”
아주 그냥 청산유수다. 깊게 고민하지 않고 들리는 대로만 듣자면 꼭 틀린 말도 아닌 것 같았다. 아마 남의 일을 두고 그렇게 얘기한다면 재광도 금세 고개를 끄덕거리고 말았을 테다.
하지만 이건 엄연한 제 일이지 않던가. 의주의 얘기가 일부 맞다 쳐도 절대 동의해선 안 될 사안이었다. 재광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입이 바쁜 상대방을 봤다.
“아니잖아. 성욕도 어엿한 인간의 본능인데 끌릴 수도 있지.”
“아니, 그래도요….”
“그래도는 뭐가 그래도야. 너도 결국엔 거기 끌려서 좋았던 거잖아.”
“….”
“욕구가 뭐야. 해소하라고 있는 거야. 근데 그걸 외면만 하고 인정을 안 한다? 나는 그것도 자기 자신을 소중히 돌보지 않는 거라고 봐.”
술 취해 몸을 나눈 얘기가 자기애 실현까지 흘러갈 줄이야.
와중에 말은 어찌나 번드르르하게 하는지. 확신에 가득 찬 자기주장이라 더욱 그럴싸하게 들렸다. 멘탈이 반쯤 나간 재광은 열변을 토하는 의주에게 조금씩 휘말리고 있었다.
“내 몸이 원하는데 왜 굳이 참아? 참으면, 대체할 뭔가가 있기는 해?”
재광의 정곡을 찌른 포인트는 ‘대체할 뭔가’라는 대목이었다.
연애는 첫사랑 누나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고, 이후에는 복학한 뒤 신입생 하나와 썸을 타긴 했으나 더 발전하지 못하고 끝났다.
그 뒤로는? 취업 준비에 모든 걸 올인하며 즐거움이란 걸 모르고 살았다. 초반에나 손장난 좀 치며 간간이 즐겼지, 올 탈락이라는 막다른 길에 다다라서는 마음이 조급해 그런 즐거움을 누릴 새도 없었다.
“….”
어쩌면 그랬기에 의주와의 관계에 더 흥분하며 매달렸는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그의 말대로 재광은 여태 성욕에 무심하되, 그걸 다른 방향으로 해소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앞으로도 다르지 않을 터였다. 대체재를 찾기로 맘먹는다 해서 단박에 찾아질 리 없잖은가.
다시는 이런 상황에 놓이지 않도록 연애를 해야겠다 다짐한대도 마찬가지였다. 당장 맘 잘 맞는 상대를 만날 수 있단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언제 어디서 샐 줄 모르는 바가지가 되느니 한 사람과 질펀하게 뒹구는 게 나을까?
재광은 의주의 침대에서 눈을 뜨던 지난날의 기분을 상기했다. 혀를 깨물까, 창문으로 뛰어내릴까 고민하던 기억이 되살아나자 퍼뜩 정신이 든다.
“아뇨. 그래도 이건 아니에요.”
“아, 왜!”
강연이라도 하듯 자신의 견해를 부지런히 늘어놓던 의주는 대놓고 아쉬운 내색을 했다. 제 가치관도 가치관이지만, 재광을 구슬리기 위한 수작이었음이 여실히 드러나는 얼굴이었다.
“머리든 맘이든 받아들여지지 않는데 어떡해요.”
“몸은 받아들이잖아.”
“아, 쫌!”
쉴 틈 없이 몸이니 성욕이니 하며 몰아붙이자 급기야 재광이 잔뜩 질린 소리를 낸다. 의주는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썩 오래 가는 정적은 아니었지만.
“야, 광. 근데 있잖아.”
조금 뒤 도로 입술을 뗀 의주의 태도는 이전과 사뭇 달랐다. 강하게 제 의견을 펼치며 역설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답지 않게 조심스러운 목소리를 낸다.
재광은 되레 더 불안한 눈빛으로 그를 응시했다.
“네가 아무리 햇병아리여도 20대 중반의 어엿한 성인이잖아.”
“…그런데요.”
“처음엔 둘 다 분위기에 휩쓸렸다 쳐도 어제는 분명히 네가 먼저 그러자고 했다?”
“….”
“자기가 한 행동에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질 줄 아는 게 진짜 어른이지 않을까?”
그럼 그렇지. 작전을 바꿨는지 한층 나긋나긋한 말투로 재광을 달랜다.
누가 보면 정말 끈질기다고 혀를 내두르겠지만, 의주에게는 이게 당연했다. 무매독자이자 3대 독자로 온 집안의 예쁨을 받으며 자란 터라 저 하고 싶은 건 다 해온 탓이다. 제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있으면 승부욕이 돋아 어떻게든 성취를 해내고야 마는 성미였다.
다행히 작전을 바꿔 어르자 이전보다 효과가 있는 듯했다. 정신없이 몰아붙이기보다는 책임감을 자극하는 편히 재광에게 더 잘 먹혔다. 의주는 멈칫거리는 재광의 눈치를 보며 한술 더 떴다.
“나 싫다는 부하 직원한테 정기만 빨리고 팽 당하는 건 너무 비참한데.”
전략적으로 재광이 찔릴 법한 얘기를 끌어올리자 아니나 다를까 뜨끔하는 게 훤히 보인다.
의주는 비적비적 새려는 미소를 감추며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했다. 그대로 눈만 끔뻑거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재광이 착잡하게 마른세수를 한다.
“시간 좀….”
“응?”
“생각할 시간을 좀 달라구요.”
재광은 고개를 푹 숙이고 눈가를 가린 상태였다. 내뱉는 음성은 앓는 소리에 가까웠다.
“…저한테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란 말이에요.”
덧붙일 때는 의주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극구 싫다는 마음만은 돌려놨으니 이만하면 퍽 괜찮은 소득이었다. 의주는 꼭 아량을 베푸는 것처럼 굴었다.
“그래, 그럼. 신중한 건 좋은 거지.”
????
일단 시간을 벌어놓고 회피하려는 의도는 아니었건만. 공교롭게도 의주와의 식사 이후 재광이 고민에 빠져 있을 시간은 없었다.
구차한 변명도 필요치 않았다. 바빴다. 그것도 엄청.
의주가 신규 앱 기능 테스트에 집중하면서 재광에게 인수인계되는 업무가 늘어난 탓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데이팅의 유지 보수였다. 이용자가 많다 보니 자잘하게 보고되는 오류들이 있어 하나씩 쳐내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그마저도 의주가 거르고 걸러 재광이 해결할 수 있는 것들만 넘겨주는 식이긴 했다. 그러나 유능한 풀스택 개발자 아래서 일하다 보니 재광도 덩달아 프론트와 백을 오가느라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다.
덕분에 퇴근 시간을 훌쩍 넘겨가며 업무를 처리한 다음, 집에 가면 그때부터는 인적성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물론 의주의 사정은 그보다도 더했다. 원래도 많은 업무를 떠맡고 있던 그는 점심마저 자리에서 샌드위치로 때울 만큼 여유 없이 일했다. 그래서인지 재광에게 언제까지 고민할 거냐 재촉하지도 않았다.
“야, 광. 자동 로그인 풀렸던 거 다시 확인해봤어?”
“네. 이제 잘 돼요.”
사건에 연루된 당사자들이 모두 바쁘다 보니 말 섞는 걸 민망해할 틈도 없었다. 모든 대화는 꼭 필요한 내용으로만, 빠르고 간결하게 오갔다.
아홉 시가 한참 넘은 시각. 사무실에는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모두가 바쁜 시기라 꽤 늦게까지 남아 있던 직원들도 대부분 자취를 감춘 뒤였다. 타닥거리는 소음 사이로 불쑥 사람의 목소리가 끼어든다.
“야 너 몸 사리면서 해라. 밥이라도 제대로 먹으면서 해, 좀.”
대표실에서 막 나온 선호였다. 붙박이처럼 자리를 지키는 의주에게 툭, 말을 내뱉자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의주가 영혼 없이 받아쳤다.
“먼저 퇴근하시는 대표님이 하실 소리는 아닌 거 같네요.”
“야이 씨, 미안해서 하는 말을 꼭 그렇게 받지.”
“아, 방해되니까 그냥 조용히 꺼져. 퇴근 한 번 요란하게 하네.”
많은 양의 업무도 천재의 숙명이라 받아들이며 즐기던 천하의 여의주지만, 그도 요즘 같은 수준의 격무에는 버틸 재간이 없는 듯했다. 편하면서도 제법 날이 선 말투로 답하자 선호가 허공에 눈을 흘기다 말고 관심을 돌렸다.
“재광 씨도 수고해요. 아직 인턴인데 이렇게 고생시켜서 미안해요.”
“아니에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대표님.”
재광도 1초가 아까운 건 마찬가지였으나 대표의 매너를 무시할 만한 짬은 안 됐다. 벌떡 일어나 허리를 꾸벅 숙이자 선호가 그럴 필요 없다며 손사래를 친다.
“아무튼 그럼 저는 이만 갑니다. 좀만 더 고생해줘요.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요.”
인사가 길어 봐야 방해만 될 뿐임을 아는 선호는 부러 더 서둘러 나가는 기색이었다. 재차 허리를 숙여 인사한 재광은 그제야 자리에 도로 앉을 수 있었다.
선호마저 돌아간 사무실은 적막이었다. 내부 곳곳에 불이 꺼져 평소보다 훨씬 어두웠고, 그래서인지 바쁘게 두드리는 키보드 소리가 훨씬 요란하게 들렸다.
유난히 넓고 휑해 보이는 공간. 남은 사람은 의주와 재광, 단둘이었다.
요즈음 한창 바빴다지만 그 점을 고려해도 퇴근이 늦었다. 벌써 열 시를 바라보는 시각. 모니터 하단에 뜬 시간을 확인한 재광은 이미 바닥 친 집중력을 끌어올리려 애썼다.
데이팅의 인기 컨텐츠인 커플 캘린더가 말썽이었다. 새로운 테마 업데이트 준비를 다 마쳤는데, 테스트 툴을 몇 개씩 돌려도 이상이 없던 게 막상 적용만 하면 기기에서 출력 오류가 나는 거다.
이런 경우에는 답이 없었다. 될 때까지 하나하나 건드려보고 고쳐가는 수밖에. 비록 오늘 내내 매달려놓고도 속 시원한 방법을 찾지는 못했다만.
앞으로 30분 이내에 운 좋게 해결을 하고 집에 간다 해도 도착하면 열한 시는 넘을 터였다. 씻고 옷을 갈아입고 잡다한 집안 정리를 하다 보면 30분은 또 훌쩍. 기업 인적성 검사 공부까지 해야 하는 입장이라 재광의 마음이 조급했다.
온종일 코드와 씨름하고 있었더니 이제는 코드의 역할을 이해하기보단 스펠링만 눈에 들어올 지경에 이르렀다. 자꾸만 흐트러지는 집중력에 거칠게 도리질을 친 재광은 눈에 잔뜩 힘을 주고 모니터를 노려봤다.
“아…!”
짤막한 비명이 조용한 사무실을 울린다.
장시간 모니터만 바라보느라 건조해진 눈을 부릅뜬 게 화근이었다. 속눈썹이 들어간 건지, 단순히 마른 안구에 자극이 간 건지. 갑작스럽게 강한 통증이 일었다.
“뭐야, 왜 그래?”
여태 얌전히 일만 하던 재광이 뜬금없이 괴로워하자 의주도 곧장 상황을 물었다. 괴로이 눈을 질끈 감은 재광은 아픈 눈을 손으로 감싸고서 겨우 답했다.
“갑자기 눈이 아파서. 아….”
“나 이거 있는데. 써.”
의주가 ‘이거’라 칭한 물건은 점안액이었다. 그는 일회용으로 포장된 인공 눈물을 똑 떼어 흔쾌히 내밀었다.
그러나 재광은 돌아볼 여유조차 없는 모양이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서 아픈 눈만 감싸고 있다. 결국은 쯧, 혀를 찬 의주가 하는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갔다.
“봐봐. 많이 아파? 뭐가 들어간 거야 뭐야.”
“모르겠어요.”
의주가 가까이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재광이 고개를 들 줄을 모르자 알아서 인공눈물을 개봉한 의주가 고집스럽게 아래를 향한 턱을 쥐었다.
억지로 남의 얼굴을 들어 올린 그는 눈을 감싼 손을 먼저 거둬냈다. 그리고 고통에 짓무른 눈가를 벌려 인공눈물을 두어 방울 떨어뜨렸다.
불시에 들어온 점안액에 놀란 재광은 곧바로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자 길게 찢어진 눈꺼풀 아래로 액체가 주르륵 흘러내린다.
“고맙습니다….”
재광은 도로 눈을 뜨기도 전에 감사 인사부터 했다.
아닌 게 아니라 효과가 있었다. 인공 눈물인지 실제 눈물인지는 모르겠으나 한바탕 쏟아내고 나니 한결 편한 것이다.
“이제 괜찮아?”
의주가 다시금 물은 것은 재광이 물기 남은 뺨을 대충 훑어낼 때였다. 아주 자연스러운 손길로 하관을 잡아 들어 올리더니 저를 보게 만든다.
“엄청 빨갛네.”
충혈된 눈을 보고 1차원적인 감상을 말하는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러면서도 젖은 눈가를 엄지로 훑어주는 손길만은 부드러웠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불시에 두 번이나 얼굴을 잡힌 재광이 경기하듯 떨어져 나갔다. 상체를 뒤로 빼 의주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기만 한 상태라 두 사람의 시선은 줄곧 닿아 있었다.
“….”
“….”
급격히 분위기가 이상해진다. 재광은 눈길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연신 눈동자를 버벅거렸고, 의주는 꽤 진지한 낯으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늦었으니까 대충 마무리하고 얼른 가.”
삽시간에 어색해진 기류를 정리한 쪽은 의주였다. 그는 여전히 건조한 어투로 그렇게 말하고는 조용히 제자리로 돌아갔다.
“…네.”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답하는 재광의 귀가 새빨갰다.
그래도 조금 전까지는 스펠링을 읽을 정도의 정신머리는 남아 있었는데. 이제는 코드가 덩어리져 보일 뿐, 전혀 읽히질 않았다.
이전까지는 의주와 단둘이 사무실에 남았다는 것조차 의식을 못 하고 있었다. 풀리지 않는 오류에만 급급해 누가 언제 갔는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조금 전 일로 인해 둘만 남았단 사실이 문득 껄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이미 겪어본 적 있는 상황이었다. 불시에 의주가 턱을 쥐면, 잠자리에서 굳이 제 얼굴을 고정하고 쳐다보던 모습이 생각나 이루 말할 수 없이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그래도 점심시간에 국물이 튀어 사달이 났을 때는 수습해줄 다른 사람들이 있어 모면이 가능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두 번째인 이 상황에서는 의주도 제가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알았을 것 같아 더 몸 둘 바를 모르게 된다.
차라리 의주가 평소처럼 굴었다면 더 나았을 거였다. 대놓고 “왜, 설레?” 라든가, “밤에 보니까 섹시해?” 따위의 소리를 지껄였다면 재광도 질색하며 넘어갈 수 있었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조금 전 의주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과로에 실없는 농담을 칠 기운도 없었던 건지, 잠깐 흐른 정적에 덩달아 홀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보기 드문 의주의 예민한 모습에 재광이 더 당황스러워진 것만은 분명했다.
‘안 돼. 집중하자, 집중.’
여전히 덩어리로만 보이는 코드를 멍하니 응시하던 재광은 가볍게 제 뺨을 쳤다. 시간은 금세 또 흘렀고, 이대로는 공부할 시간마저 모조리 소모해버릴지도 몰랐다.
나중에 후회 않으려면 지금 정신을 똑바로 차리는 게 급선무였다.
????
재광의 마음과 달리 시간은 잘만 흘렀다. 한 번 집 나간 집중력은 돌아올 줄을 몰라, 목표로 한 시간이 진작 지났는데도 업무는 제자리였다.
재광의 생각에도 늦어도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오늘 해결책을 못 찾더라도 이만 정리하고 일어나야 내일 간신히 사람 몰골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너 아직도 안 갔냐?”
마침 재광을 발견한 의주가 툭, 말을 건다.
“이제 곧 가려고요.”
“어차피 중요한 건 내가 다 하는데 뭘 아직까지 잡고 있었어.”
평소와 다름없이 가벼운 말투를 내는 것으로 보아, 의주도 어느 정도 중요한 일을 끝내고 여유가 생겼지 싶었다. 재광은 별다른 대답하지 않고 어설프게 웃어넘기기만 했다.
“야, 광. 안 출출하냐? 야식 먹고 갈래? 잘하는 족발집 아는데.”
밤늦은 시간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 일에만 몰두했으니 허기가 지는 것도 당연했다. 점심때 고봉밥 한 그릇 거덜 내고 간식까지 주워 먹은 재광도 배가 고픈데, 꼴랑 샌드위치로 요기한 의주가 멀쩡할 리 있나.
하지만 의주는 재광이 뭐라 말문을 트기도 전에 말을 바꿨다.
“아니다. 늦었는데 거기까지 가기도 귀찮다.”
정말 세상만사 귀찮은 양 길게 기지개를 켜면서 그런다. 재광은 딱히 보일 반응이 없어 그냥 뚱한 얼굴로 그를 보고만 있었다.
“그냥 탕비실 라면이나 먹고 가야겠다.”
“…같이 먹고 가요.”
“진짜?”
“갖다 드릴게요. 남은 일 있으면 마저 하세요.”
의주는 “나 그런 거 시키는 사람 아닌데” 라면서도 흔쾌히 호의를 받아들였다.
따지고 보면 호의보다는 측은지심에서 기인한 행동이었다. 사적으로 앙심이 남은 것과는 별개다. 한 끼도 제대로 못 때운 사람이 이 시간까지 일하다가 혼자서 처량하게 컵라면을 먹는다고 생각하면 너무 안 됐지 않은가.
재광은 거기다 대고 “쌤통이다, 혼자 불쌍하게 컵라면이나 먹어라!” 할 만큼 모난 성품은 되지 못했다.
거기에 평생을 심부름꾼으로 살아온 차남의 피도 한몫했다. 손윗사람 수발을 드는 건 군대에 가기 전부터 이미 몸에 배어 있었다. 즉, 대단한 뜻은 없는 행동이라는 거다.
재광은 탕비실에 들어서 자연스럽게 수납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렇게 늦게까지 야근을 하는 것도 처음인 데다, 점심 따박따박 잘 주는 회사라 사무실에서 컵라면을 먹어본 적은 없었다.
그래도 드나든 시간이 있어 어디 있는지 정도는 꿰고 있었는데….
왜인지 늘 있던 자리에 컵라면이 없다. 당당하게 제가 가져다주겠다며 들어왔건만 정작 라면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꼴이 된 재광은 볼을 긁적거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아.”
다행스럽게도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꺼내놓은 건 누가 다 먹은 듯싶고, 대신 캐비닛 위에 여분이 쌓여 있었다.
그러나 난관의 연속이었다. 이것저것 안 쓰는 물건들을 다 처박아놓는 용도로 사용되는 캐비닛은 깊이와 너비. 심지어 높이까지 흔히 볼 수 있는 것보다 컸다.
게다가 누가 정리를 한 건지 컵라면은 겹겹이 쌓아놓은 다른 짐 위에 있어 쉽게 닿질 않았다.
재광이 유달리 큰 키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냥 작지만도 않건만. 팔을 쭉 뻗으면 닿을 듯 닿지 않는 높이였다. 혹시 밟고 올라갈 만한 게 있나 하고 둘러봐도 발판이 되어줄 만한 물건은 안 보였다.
“뭐 하는데 이렇게 오래 걸리나 했더니. 야, 광. 너 작아서 저기 안 닿는 거야?”
하는 수 없이 재차 팔을 길게 뽑아보는데, 별안간 가벼운 목소리가 입구에서 들린다.
재광이 체감한 것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기다리다 못한 의주가 직접 들어온 차였다. 그는 웃음을 숨기지 않고 다가왔다.
“작은 거 아니고 저게 높은 거거든요.”
키는 남자에게 또 하나의 자존심. 곧바로 반박하자 의주가 여유롭게 웃는다.
“아 그러세요?”
“진짜예요. 저 평균보다 커요.”
비록 미세한 차이일지라도 이건 정확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었다. 재광이 힘주어 말하자 의주가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꼭 그렇다고 치자는 듯한 동작이었다.
의주는 곧 캐비닛 가까이 다가섰다. 눈높이가 재광보다 10cm가량 높았다.
“귀엽다, 귀여워. 이것도 못 내려서 혼자 끙끙대고 있어쪄요?”
재광이 안간힘을 써도 잡힐 듯 말 듯 하던 컵라면은 의주의 손에 허무할 만큼 쉽게 잡혔다. 부러 혀 짧은소리를 내가며 놀리자 닭 쫓던 개 심정으로 캐비닛 위를 올려다보던 재광이 휙, 뒤를 돌아본다.
“안 끙끙댔거든요!”
바락 언성을 높일 때까지는 몹시 가벼운 분위기였는데.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공기의 흐름이 묵직해진다.
“….”
“….”
그저 자존심을 지키고자 반박하려던 것뿐이건만, 예상보다 의주가 너무 가까이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바로 옆에 그의 얼굴이 있다. 이대로 재광이 5cm만 물러서면 등이 의주의 가슴에 맞닿을 듯한 거리였다.
인공 눈물을 넣어주던 아까의 상황이 다 정리된 줄로만 알았으나 아닌 모양이었다. 아직도 그 여운이 남은 게 분명했다. 장난기 다분하던 대화가 일시에 끊기고, 단단히 얽힌 시선만 오고 갔다.
둘 중 누구도 물러설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꼭 뭔가에 홀린 것처럼 서로의 눈만 쳐다봤다.
조금의 시간이 더 흐르자 타는 듯한 갈증을 느낀 재광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 탓에 울대가 움직인다. 의주는 기다란 눈을 슬며시 내리깔고 크게 일렁이는 목덜미를 쳐다봤다.
그것도 잠시. 속쌍꺼풀을 접으며 올라온 눈동자가 또다시 재광의 눈을 향했다.
“….”
두 사람 모두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리고 눈길을 오롯이 받아들이던 재광이 버벅거리며 시선을 피한 순간, 의주가 보이지 않는 선을 넘듯 거리를 좁혀 입술을 겹쳤다.
짧은 입맞춤이었다. 가볍게 입술을 물었다가 금방 놓아주었으나 재광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크게 물러서거나 피하지도 않는다. 빤한 시선으로 의주를 바라만 봤다.
재광은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취하기는커녕 술은 입에도 안 댔는데도 의주의 입술이 닿은 게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 번 더 부딪치고 싶은, 이보다 더 깊게 닿고 싶은 욕망마저 드는 것 같았다.
몸이 기억하고 있어 반사적으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아니면 최근에 숨 돌릴 틈 없이 바빠서 정신이 나가버린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야심한 시각이라 욕구가 폭발하기라도…?
아무리 고민해 봐도 답은 알 수 없었다. 다만, 머리로는 이 이상 허락해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 정작 그렇게 행동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재광은 굳은 듯 서 있었다. 그러자 짧게 입 맞추고 떨어진 의주가 다시 한 번 다가서 입술을 맞댔다.
컵라면을 가볍게 팽개친 손이 올라와 재광의 어깨를 온전히 돌려세운다. 손길에 얌전히 이끌린 재광은 눈꺼풀을 내려 떨리는 눈동자를 감췄다.
의주와의 키스가 처음은 아니지만 오롯하게 서서 하기는 처음이라 그런지 낯설었다. 아니, 낯설기보다는 불편했다. 누워서, 혹은 그의 다리 위에 앉아서만 해본 터라 약 10cm의 차이가 꼭 벽처럼 느껴졌다.
제 의지와 상관없이 자꾸만 고개가 들리고, 의주는 꼭 저를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뒷머리를 안정감 있게 받쳐주는 의주의 손이 아니라면 금방이라도 목이 힘없이 꺾여버릴 듯했다.
그래서인지 유난히 숨이 찼다. 양팔을 늘어뜨리고서 입술을 내어주던 재광은 허공을 배회하던 손을 들어 의주의 어깨를 가볍게 밀었다.
의주는 순순히 물러났다. 대신 자신의 어깨를 밀친 손을 붙들었다. 손끝을 타고 올라와 손목을 꽉 쥐고서 달아오른 눈빛으로 재광을 본다.
“…갈래?”
어디를 가자는 거냐고. 그런 질문을 할 만큼 재광이 순진하지는 않았다. 모텔이든 호텔이든 의주의 집이든. 어딜 가든 그 두 글자가 의미하는 바는 같을 터였다.
재광에게는 기회였다. 홀린 듯 저질러버린 이 미친 짓을 바로잡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 그렇기에 답을 미루고 갈등하던 그는 곧 결단을 내렸다.
“….”
입술 새로 내는 소리는 없었으나 고개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천천히, 그래서 더 뚜렷한 동작이었다. 의주가 기다렸다는 듯 꽉 붙든 손목을 끌고 탕비실 바깥으로 나갔다.
다급하게 짐을 챙겨 나와 지하 주차장으로 향하면서. 이제는 익숙한 의주의 차 조수석에 올라타면서도 재광의 혼란은 가시지 않았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의주를 따라가고 싶었다. 그와의 관계가 어떤 기분인지를 알아서 더 하고 싶은지도 몰랐다.
정말 큰일이었다. 제가 원래 이렇게 욕구에 약한 사람이었나, 저 자신을 돌아보면서도. 이번에 저지르면 영영 돌이킬 방법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 차에서 내릴 생각이 들질 않았다.
재광은 꼭 뭔가에 홀린 것처럼 앞 유리 너머로 번지는 불빛만 응시했다.
주석
[1] CTO: Chief Technology Officer. 최고 기술 책임자. 회사 내 기술, 개발 관련 분야 전체를 담당해 총괄하는 책임자.
[2] 풀스택 : 풀스택 개발자(Full Stack Developer). 국내에서는 사용자에게 직접 보여지는 부분을 담당하는 ‘프론트 엔드’와 서버, API등을 담당하는 ‘백엔드’를 모두 다룰 수 있는 개발자를 일컫는 의미로 사용된다.
[3] readme : 프로젝트 관련 정보를 담은 문서. 사용 설명서, 지침서 같은 역할을 한다.
[4] 코드 리뷰 : 개발자가 작성한 코드를 다른 개발자가 검토하여 오류 가능성을 찾아내고 이를 반영하는 과정.
[5]주석 : 해당 코드가 어떤 동작을 하는지 설명하는 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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