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Error (2/21)

2. Error

다행히 재광은 미리 얘기한 대로 다음 날 오전까지 과제를 마감할 수 있었다. 다만 코드 리뷰[4]가 월요일로 밀려 완전히 일을 마쳤다고 하기에는 좀 모자랐다.

그래도 입사 이후 첫 주말이니 회사 일은 잊고 늘어지게 쉴 요량이었다. 그 첫 단계가 바로 출근 시간을 뛰어넘은 늦잠이다.

어렴풋이 정신이 든 재광은 감은 눈앞이 밝다는 사실에 큰 만족감을 느끼며 이불을 더 끌어당겨 안았다. 모로 누워 웅크린 자세가 더없이 편안해 보였다.

의식이 조금 돌아오기는 했으나 이대로 조금만 더 누워 있어도 금방 다시 잠들 듯한 나른함이 온몸을 장악했다. 굳이 아침 댓바람부터 일어나야 할 이유도 없으니 조금 더 숙면을 취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바람은 오래 가지 못했다. 이물질처럼 끼어든 목소리가 재광의 휴식을 와장창 깨 놓는다.

“야, 김재광 일어나 빨리.”

누군지 확인할 것도 없이 재광의 형이다. 민광은 노비가 숨 돌리는 꼴 못 보는 못된 양반처럼 득달같이 재광을 깨웠다.

“주말인데 나 좀 자자.”

재광이 순순히 응하지 않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 써버리자 자연스럽게 긴 다리가 올라와 엉덩이를 퍽퍽 찬다.

“빨리 일어나라고. 안 일어나?”

재차 닦달하는데도 재광은 쥐죽은 듯 반응이 없었다. 그러자 민광이 비장의 카드를 꺼낸다.

“하나, 둘….”

여기서 셋까지 안 일어나면 그야말로 좆 된다. 성질머리 드러운 민광이 둘 반, 둘 반의반까지 셀 리도 없으니 그야말로 최후의 통첩이라 할 수 있겠다.

오랜 시간 그의 방식에 적응해온 재광은 불통의 의미로 뒤집어쓴 이불을 휙 걷어 내렸다.

“아, 아침부터 왜 그러는데!”

스프링마냥 상체를 튕겨 올리며 외치는 목소리에 짜증이 가득했다. 다른 때 같았더라면 어디서 짜증이냐고 금방 기를 죽였을 민광은 어째 잠잠했다.

“됐고, 그냥 빨리 나가.”

그럼 그렇지. 짜증 따위에 신경 쓸 겨를도 없을 만큼 급한 용건이 있는 거다. 재광은 통통하게 부은 눈두덩을 겨우 들어 올리고 제 형을 올려다봤다.

“이제 눈 떴는데 나가긴 뭘 나가.”

“아 여자친구 오기로 했으니까 빨리 나가라고.”

“형이 나가서 만나든가. 사람 쉬는데 주말 아침부터 진짜.”

“이미 오라고 했으니까 나가라고 얼른. 너랑 마주치는 거 싫으니까.”

재광의 선에서 할 수 있는 최대치의 반항이었으나 통하지는 않았다. 콩알만큼 남은 자존심이라도 지키려 버텨보지만, 이마저도 여의치가 않다.

곧장 다시 들리는 튼실한 다리에 재광은 하는 수 없이 침대 아래로 내려왔다. “진작 그럴 것이지” 하는 형의 목소리를 귓등으로 들으며 욕실로 향하는 걸음이 비척거린다.

구질구질한 변명이라도 하자면, 날아드는 다리가 무서워서는 아니었다. 그저 이해하기 싫어도 이해되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두자. 재광의 입장이래도 여자친구가 형과 마주치는 건 절대 원하지 않았을 테니까.

“응, 자기야. 그러게 데리러 간다니까 왜 힘들게 혼자 와.”

재광이 귀찮아 죽겠는 동작으로 겨우 씻고 나왔을 때, 민광은 거실 소파에 앉아 통화 중이었다. 단잠 자는 사람 험악하게 깨워서 쫓아내는 주제에 세상 누구보다 달콤한 말씨를 한다. 듣기만 해도 역한 소리에 재광이 구역질하는 시늉을 했다.

“아, 다 왔어? 그쯤이면 10분 정도 걸리겠다. 내가 내려갈게, 이따 봐요. 응.”

그런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상냥하게 통화를 이어가던 민광은 제 동생을 향해 홉뜬 눈을 부라렸다. 그 눈빛이 꼭 ‘10분 정도 걸릴 테니 너는 어서 꺼져라’ 하는 것만 같았다.

‘드러워서 살겠나 진짜. 이놈의 집구석 나가준다, 나가 줘.’

묵음으로 투덜거린 재광은 깊은 한숨을 몰아쉬며 옷을 갈아입었다.

침대에서 내려온 후로는 협조적으로 굴었는데도 민광의 성화는 집을 나서는 순간까지 계속됐다. 2분 안으로 사라지라느니, 열한 시까지는 들어올 생각도 말라느니. 당부할 말이 뭐 그렇게 많은지 몰랐다.

그 덕에 재광은 기상 20분 만에 피로한 낯빛으로 집을 나서야 했다.

하도 등을 떠밀어대기에 일단 나오긴 했다만 막상 갈 데는 없었다. 하릴없이 아파트 인근을 배회하기 시작한 그는 휴대전화에 시선을 박고 느릿느릿 걸었다.

혹시 오늘 시간 되는 사람? 나랑 놀아주라.1

오전 10:19

송민주

나 지금 본가 왔는데. 1

오전 10:20

도원이 형

미안. 나 지금 랩실이라;;

연우는 새벽에 들어와서 아마 자고 있을 거야. 1

오전 10:23

시간 되는 친구 있으면 불러내볼까 했지만 택도 없었다. 다들 각자의 사정으로 바쁜 모양이었다.

물론 최우선의 후보들이었으니 또 누구 없나 살펴보자면 한 명쯤 불러낼 사람은 찾을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재광은 연락처 목록을 살피다가 금세 그만뒀다. 집에서 쫓겨나 만날 상대를 물색하는 자신이 지지리 궁상처럼 느껴진 탓이다.

그래서 그냥 걸었다. 누가 봐도 갈 곳 없는 사람처럼 터덜터덜.

의식 없이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보니 같은 곳만 빙빙 돌아 아직도 동네를 벗어나지 못한 참이었다. 그러잖아도 심기가 불편한데, 별안간 웬 차가 클랙슨까지 요란하게 울려댄다.

금방 지나가겠거니 하고 마는데도 빵빵거리는 소리는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재광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한껏 찌푸리고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인도 쪽으로 바짝 붙어 천천히 바퀴를 굴리는 차가 한 대 보인다.

“맞네, 재광!”

스르륵 내려가는 조수석 창문. 그 너머의 얼굴은 의주였다.

“…팀장님?”

재광은 잔뜩 의아한 안색이 되어 의주를 응시했다. 몇 초가 지나자 멈췄던 사고가 제대로 굴러가며 어렴풋한 기억이 떠오른다.

- 가까운 데 사네.

출근 첫날, 이력서를 살피던 의주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었다. 혼잣말이었기에 재광은 별다른 대꾸하지 않고 넘어갔지만, 무의식적으로 당연히 회사와 집 사이의 거리를 뜻하는 거라 믿었다.

그런데 지금 이런 식으로 마주친 것으로 보아 의주 본인이 사는 곳과 가깝다는 의미였던 듯했다.

모든 게 자기중심으로 돌아가는 사람임을 고려하면 이쪽이 더 그럴싸한 추측인 것도 같았다. 가까이 산다 치면 지금의 우연한 만남도 설명이 되고.

재광이 저쪽을 알아보고 걸음을 멈추자 차도 함께 정차했다. 의주는 흥미 가득한 표정으로 창문 밖을 내다봤다.

“황금 같은 주말에 뭘 그렇게 방황하고 있어.”

“제가요?”

“그럼 누가. 지금 100미터 떨어져서 봐도 갈 곳 없는 사람이야.”

그동안에도 자주 반말을 섞어 쓰긴 했으나 그래도 존댓말의 빈도가 반쯤은 됐던 것 같은데. 회사 밖으로 나온 탓인지 의주는 대놓고 말을 놨다.

당연하다는 듯 행해지는 반말에도 재광은 딱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상사인 데다 나이도 저쪽이 더 많으니 그 정도야 그러려니 할 수 있는 거다.

다만, 의주의 말마따나 “황금 같은 주말에 갈 곳 없는 사람”이 맞다는 게 싫었다.

“그냥 잠깐 바람 쐬러 나온 거예요.”

사는 동네에서 잠깐 정처 없이 걷는 건 흠이 될 일도 아니건만 재광은 괜스레 둘러댔다. 희한한 포인트에서 자존심을 세운 이유는 아마 목적 없이 동네를 배회하는 스스로가 처량하게 느껴진 탓일 테다.

“바람을, 쐬러? 맞은 거 아니고?”

누가 들어도 둘러대는 말이긴 했다. 의주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골리듯 묻자 재광의 눈매가 판판하게 굳는다.

솔직한 낯빛을 하면서도 별말 않는 태도에 의주가 와하하 웃었다. 그는 이내 대단히 인자한 표정을 지으며 느긋하게 손짓했다.

가까이 오라는 의미다. 간신히 목소리만 들릴 정도로 거리를 유지하고 있던 재광은 순순히 차 쪽으로 다가섰다.

“나는 좋은 데 가거든.”

의주는 인영이 가까워지기 무섭게 말했다. 극비라도 되는 양 조용한 목소리였다.

‘어쩌라고.’

하마터면 재광은 육성으로 그리 말할 뻔했다. 입술까지 벙긋거렸으나 간발의 차로 앞선 이성이 목구멍을 꽉 닫았다.

“아, 네. 그러세요.”

대신 영혼이라곤 없는 껍데기로 응수하자 의주가 다시 한번 웃는다. 이전처럼 호탕한 느낌은 아니고, 숨을 토하듯 가벼운 소리였다.

“운전하기 심심한데 같이 가자.”

정말이지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이다. 만난 지 이제 고작 일주일 된 상사와 부하 사이에서 우연한 만남을 계기로 같이 주말을 보내는 게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심지어 재광은 살갑게 엉겨드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오히려 질색하는 기색을 심심찮게 드러내는 편이지.

즉, 대학 시절 서로의 꼬리표가 되었던 인연을 계기로 내적 친밀감이 있대도 선뜻 사적 만남을 제안하기는 힘든 사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의주는 그냥 한번 던져보는 말이 아닌 듯했다. 재광이 이건 또 뭔 소린가 싶어 눈만 끔뻑거리자 그새를 참지 못하고 또 재촉을 한다.

“아, 빨리. 여기 정차 오래 못 해.”

흘긋 손목시계를 들여다본 다음에는 늦겠다며 성화였다. 빨리 결정을 내리라는(본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의미로 클랙슨까지 짧게 끊어 눌러댄다.

요란하고 방정맞은 소리는 주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충분했다. “뭐야, 시끄럽게” 하며 툭 던지고 가는 말들이 재광의 귀에 또렷하게 꽂혀든다. 이 상황을 빨리 해결해야겠다는 압박감이 불쑥 밀려왔다.

결국 재광은 얼마 가지 않아 조수석 문을 열었다. 원치 않는 관심에 취약한 그가 현시점에서 내릴 수 있는 최선의 판단이었다.

궁지에 몰려 급하게 내린 결정이긴 하나 어쩔 수 없었다. 제가 그토록 꺼리는 여의주라지만 선택권이 많지 않은 게 사실이지 않나.

혼자서 반나절 넘게 방황하고 다닐 자신은 없었다. 홀로 카페와 식당을 오가며 억겁 같은 시간을 견디는 것도 일이었고, 하다못해 만화방 같은 데서 종일 퍼질러 잔다 해도 열한 시까지 내리 잘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러니 조금 내키지 않더라도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았다. 의주를 향한 감정이 좋지는 않지만 뭐, 상관없었다.

세상에서 감정 제일 안 좋은 인간과 한집에 살기도 하는데 주말 하루쯤이야 어떠랴 싶었다.

????

“….”

급한 결정은 그만큼 빠른 후회를 몰고 왔다.

재광이 안전띠를 매고 정확히 10분 뒤였다. 예정된 시간에 늦는다며 성화하던 의주가 별안간 커피를 사 가자며 차를 세웠다.

카페에 들어가 주문을 하고 음료를 받아드는 일련의 과정에는 무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 밖의 것들이 문제였다.

주말이라 유독 붐비는 카페에 들어설 때부터 적지 않은 눈길이 흘끔흘끔 두 사람을 향했다. 식당 아주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형제라 오해를 하는지 어떤지는 몰라도 신기하게 보는 것만은 분명했다.

재광은 그게 못내 부담스러웠다. 그동안은 회사 사람들 안에 묻혀 있어 조금이나마 시선이 분산되는 느낌이었는데, 단둘이 붙어 다니려니 집중도가 남다른 것이다. 구경거리를 자처한 듯해 기분이 썩 좋지 못했다.

주문한 음료를 손에 들고 카페를 나설 때까지도 그랬다. 출입구에서 마주친 사람이 두 사람의 얼굴을 차례로 훑고 지나갔다. 악의라곤 없이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이란 건 재광도 알지만, 그런 반응이 거슬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차로 돌아온 재광은 묵묵히 안전띠를 매며 고민에 빠졌다.

아까는 그저 반나절 때울 만한 일이 급급해 무턱대고 차에 올라탔으나 지금에 와서 보니 이건 아닌 것 같았다. 의주가 말하는 ‘좋은 데’가 어딘지는 몰라도 결국 종일 신기하다는 눈빛을 받으며 돌아다니게 될 것 아닌가.

그런데 여기서 번복을 하자니 이 또한 마음에 걸렸다. 어영부영 커피까지 얻어 마시게 된 터라 이대로 먹튀하는 모양새가 되는 탓이다. 하지만 그래도….

“저기, 팀장님. 죄송한데요.”

재광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카페에서 나와 10여 분을 더 달린 뒤였다. 정면을 응시한 의주는 “응?” 하고 간단하게 대꾸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저 그냥 근처에 내려주시면….”

알아서 돌아가겠다고. 그렇게 말하려던 차에 의주가 푸스스 웃으며 말을 끊는다.

“왜. 사람들이 종일 쳐다볼까 봐?”

의주는 갑작스러운 재광의 심경 변화에 무엇이 기폭제 역할을 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속이 꿰뚫린 재광은 굳이 변명하지 않고 수긍했다.

“네.”

“뭐 그런 걸 신경 써. 다 잘생겨서 쳐다보는 거야, 잘생겨서.”

재광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곁을 돌아봤다.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는 의주는 “잘난 얼굴 빳빳하게 딱 들고 자랑해야지, 왜 숨어?” 하고 덧붙였다.

재광은 께름칙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게 재광은 스물여섯 해를 살아오며 제 얼굴이 잘생겼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한다 해도 만취 상태에서 근거 없는 자신감이 솟아날 때나 겨우 해볼 법한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꽁꽁 감추고 다닐 만큼 못났다고 여기는 것도 아니지만, 그의 생각에 자신의 외모는 그냥 딱 평범 그 정도였다.

“그건 좀….”

그렇다고 의주처럼 자신감이 넘치는 편도 아닌 데다가 칭찬에 익숙한 타입도 아니었다. 그래서 이도 저도 아닌 소리로 말끝을 흐리자 의주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옆을 돌아본다.

아주 잠깐이었다. 운전 중인 의주는 금세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으나 눈이 마주친 찰나의 안색에는 분명 황당함이 가득했다.

역시나 의주는 어이없다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뭐가 좀? 그 위에 내려서 거울을 좀 봐봐. 이목구비 균형 잘 맞지, 막 화려하진 않은데 딱 깔끔해서 보기 좋지. 빠지는 게 뭐가 있어?”

객관적으로 봐도 찍어낸 듯 닮은 얼굴이라, 재광의 부정이 곧 자신에 관한 부정이라 여긴 모양이었다. 의주는 눈매가 얼마나 매력적이며 콧대는 또 선이 얼마나 유려한지 눈, 코, 입 하나하나 뜯어가며 열변을 토했다.

재광은 흐린 눈으로 창밖만 내다보며 대충 네, 네― 하고 장단을 맞췄다. 맥아리 없이 탁 풀린 목소리에 힘이 실린 것은 조금 뒤의 일이었다.

“잠깐만요.”

“뭐, 왜.”

“지금 고속도로 탄 거예요?”

의주가 잘생긴 외모에 대한 타당함을 열정적으로 늘어놓는 동안 덩달아 열심히 달리던 차가 고속도로에 접어들었다. 문득 그 사실을 깨달은 재광이 답지 않게 언성을 높여 물었으나 의주는 차분했다.

“응. 이렇게 가는 거 맞는데 왜?”

이젠 내릴 기회마저 잃어버린 재광은 창문에 머리만 콩 박았다. 시간 때우겠다고 목적지도 묻지 않고 덜컥 타버린 자신이 등신이라 생각하면서.

????

부지런히 달리던 차가 멈춰선 곳은 경기 외곽에 있는 한 식당이었다.

오전 일찍부터 나온 터라 딱 점심 즈음 도착했다. 동네 어귀를 어슬렁거리다 별안간 여기까지 오게 된 재광은 잔뜩 얼떨떨한 기분으로 차에서 내렸다.

“다 왔다고. 지금 들어간다, 들어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주차 천재라며 자화자찬하던 의주는 그새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뉘앙스로 보건대 아마 먼저 도착한 상대인 듯했다. 늦는다며 재광을 재촉하다가 돌연 커피를 사는 여유까지 보이더니, 결국엔 늦은 모양이었다.

여태 얼떨떨한 상태였던 재광은 그래서 더 당황했다. 좋은 데 간다느니, 운전하기 심심하다느니. 그 정도로만 이야기를 하기에 혼자서 뭔가를 하러 가는 길에 저를 끼워 넣은 거라 여겼었다. 그런데 재촉하는 누군가가 있다니. 일행이 있었던 것이다.

재광은 매사에 무덤덤한 편이라 딱히 낯을 가리거나 새로운 사람을 어려워하지는 않지만, 제가 껴도 되는 상황인지는 조금 걱정됐다.

더군다나 시간 약속에 늦어 퍽 좋지만은 않은 분위기일 거라 생각하니 더더욱 조심스러운 마음이 된다.

“제가 가도 되는 자리예요?”

그래서 물었더니 막 통화를 마친 의주가 요만큼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당연하지.”

재광은 곧장 돌아오는 대답을 듣고서야 쓸데없는 질문이었음을 깨달았다. 일행에게 미리 얘기해놓아서 당연한 게 아니라, 여의주 님이 데려온 건데 누가 뭐라 하겠냐는 말투였기 때문이다.

미심쩍긴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지역의 경계를 벗어나 어딘지도 모를 이곳까지 왔으니 무턱대고 돌아가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재광은 하릴없이 의주의 뒤를 따라 걸었다.

“어? 재광 씨?”

그리고 식당 안에서 낯익은 얼굴들을 마주했다. 재광을 알아보고 먼저 알은체한 사람은 마케팅 팀장이었고,

“미친놈아 재광 씨를 여기 왜 데려와!”

살가운 인사 대신 정겨운 욕설부터 날린 이는 대표였다.

“왜? 오면 안 돼? 극비 회동이야?”

“그게 아니라 주말이잖아. 주말에 직원을 여기까지 왜 데리고 나오냐고.”

“나는 직원 아니냐?”

“네가 그냥 직원이냐?”

언성을 높여가는 투덕거림에 재광만 꿔다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됐다. 덕분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눈동자만 데룩데룩 굴리고 있자 유일하게 차분함을 유지하던 마케팅 팀장이 의자를 빼준다.

“앉아요, 그러고 있지 말고. 야, 니네도 그만해. 다른 손님들도 있는데 쪽팔리게.”

그제야 아웅다웅하던 두 사람이 조용해졌다. 조금 전까지 의주를 타박하던 대표가 금세 젠틀한 목소리를 내며 재광에게 묻는다.

“여 팀장이 불러냈어요?”

“아, 아뇨. 우연히 만났는데 어쩌다 보니까 이렇게….”

“그런 거면 다행이고요. 우리 그렇게 개념 없이 주말 근무시키고 그런 회사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아요.”

열정을 빌미로 주말에 일하는 게 당연하다 여기는 꼰대 회사인 줄 알까 봐 그게 마음 쓰인 듯했다. 선호는 그렇게 생각 않는다는 재광의 답변을 듣고서야 한결 편한 안색을 했다.

“사정이야 모르지만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까 맛있게 먹고 가요. 어차피 밖인데 그냥 아는 형들이랑 밥 먹으러 왔다 생각하고.”

선호의 말에 마케팅 팀장이 한마디 거든다.

“맞아요. 어차피 의주랑은 학교 선후배라면서요.”

청자로 재광을 염두에 두고 하는 소리였으나 눈은 의주가 빛냈다.

“맞아. 그런 의미에서 말 좀 편하게 할게, 재광아.”

재광은 저를 배려해주려는 얘기들에 답할 겨를도 없이 맞은편에 앉은 의주를 봤다. 여기 오는 내내 신나게 반말을 해댔으면서 뭘 또 새삼스럽게 그러나 싶었다.

“그러세요.”

무게감 없는 대답이 담담하게 흘러나왔다.

사실 이 자리는 낭만인에서 개발한 앱 ‘데이팅’의 업데이트를 위한 답사였다. 포털 사이트에 특정 지역 맛집을 검색했을 때 쉽게 나오는 가게들의 정보는 앉아서도 충분히 수집할 수 있지만, 선호는 그 이상을 필요로 했다.

영업 기밀이자 꼼수였다. 기본적으로는 널리 알려진 정보로 데이터를 채우면서도 한두 가지씩 새로운 것을 끼워 넣는 것이다. 그러면 방대한 양을 지니되 가진 자료의 퀄리티는 훨씬 좋아 보이는 효과가 있었다.

그렇다고 매 주말을 이런 식으로 보내는 건 아니고. 대개는 선호가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하며 자연스럽게 정보를 취득했다. 그러다 여자친구의 사정이 여의치 않게 되면 동업자 격인 친구들과 회동을 하는 것이다.

오늘은 어쩌다 보니 새파란 인턴까지 합세하게 됐다만, 어쨌든 이 모임의 본 목적은 그랬다.

“근데 분위기가 너무 토속적이지 않냐? 손님들 연령대도 꽤 높은 거 같은데 우리 앱 쓰는 사람들이랑은 안 맞을 듯?”

“연애 초반이나 기념일 같은 때 예쁘고 사진 찍기 좋은 데 찾아다니지, 좀 만나다 보면 꼭 그렇지도 않잖아.”

다들 오랜 친구 사이라 그런지 업무상 나누는 대화도 꼭 사담처럼 흘러나왔다. 음식을 기다리며 가게를 둘러보던 마케팅 팀장이 의견을 제시하자 대표가 곧장 반박한다.

그리고 따라놓은 물이나 홀짝거리던 의주가 불쑥 끼어들었다.

“민 대표님 여자친구분이랑 무드 잡아본 지 좀 됐나 봐요? 감 잃었네.”

장난삼아 신경을 긁으려 하는 소리였다. 선호가 가볍게 눈을 흘겼다.

“뭐래. 편한 건 편한 거고 여전히 뜨겁거든요? 감 잃은 건 너겠지. 2년을 수절하고 있는 놈이 누구한테 지금.”

“푸핫. 야, 밖에만 나가도 사람들이 나를 가만두질 않는데 무슨….”

반격을 당한 의주는 자신의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 설명하려 슬슬 시동을 거는 모양새였다. 낌새를 알아차린 선호가 “아무렴 그러시겠죠” 하며 미리 말을 끊었다.

타이밍 좋게 주문한 음식이 나와 분위기를 환기하기에도 제격이었다. 하지만 여자친구와의 사이를 의심당한 선호는 아직 앙금이 다 가시지 않은 듯했다.

“새끼야 너는 먹지 마. 힘쓸 데도 없는 게 이거 먹어서 뭐 할라고.”

돌판에 정갈하게 담긴 장어구이를 보자마자 의주에게 핀잔을 준다.

물론 그 정도의 말이 의주에게 타격이 될 리는 없었다. 그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먹을 건데?” 하며 젓가락을 들었다. 큼직하게 잘린 장어구이 한 조각을 입에 쏙 집어넣는 동작이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켁.”

대신 뒤늦게 수저를 들던 재광만 사레가 들렸다.

정력에 좋은 음식으로 대표적인 장어를 앞에 두고 “힘쓸 데”라니. 가리키는 바가 너무 분명하지 않은가. 어엿한 성인이지만 대놓고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성격이 아닌 재광은 제법 당황했다.

난데없이 터져 나오는 기침에 선호도 아차 싶은 눈치였다. 저들끼리 있을 때야 볼 거 못 볼 거 다 본 사이라 뭐든 터놓는다고 해도 재광은 아니지 않던가. 상사들에게 둘러싸여 음담패설 비슷한 소릴 듣는 상황이 편할 리 없었다.

“아, 미안해요. 우리끼리는 그냥 하는 소리라 나도 모르게….”

서둘러 사과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과받는 당사자인 재광 대신 의주가 먼저 대답한다.

“조심 좀 해, 민 대표. 재광이 부끄럼 많은 친구야.”

선호와 재광은 마치 짠 것처럼 동시에 의주를 돌아봤다.

선호는 저를 향한 사과가 아닌데도 끼어드는 의주가 어이없어 그랬고, 재광은 저더러 부끄럼이 많다 표현하는 의주에게 불만스러운 마음이 들어 그랬다.

- 부끄러웠어?

재광은 이미 의주에게서 비슷한 말을 들어본 경험이 있었다. 회의 시간에 난데없이 윙크를 당해 시선을 피한 뒤의 일이었다.

부끄러움이 많다는 게 나쁜 표현이 아니란 건 재광도 잘 안다. 하지만 의주에게서 듣는 그 말은 묘하게 속을 뒤틀었다.

사소한 행동(혹은 언사) 하나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숙맥 취급 같아서다. 재광은 당황스러워할 만한 빌미를 먼저 제공해놓고 순진한 어린양 보듯 하는 태도가 퍽 불만스러웠다.

“그냥 침이 잘못 넘어간 거예요.”

그래도 이제는 일주일쯤 봤다고 말대꾸도 할 줄 알게 됐다. 그래 봐야 “그래쪄요?” 하는 의주의 혀 짧은 소리에 금세 말문이 막히고 말았지만.

상황은 밥이나 먹자는 마케팅 팀장의 말이 있고서야 정리됐다. 물론 의주는 그 뒤로도 깐족거리고 싶어 근질거리는 모습이긴 했다. 하지만 밥상머리 앞이라 그런지 용케 참고 넘어가는 기색이었다.

의주는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대신 재광의 앞에 밑반찬으로 나온 멸치볶음만 슥 밀어주고 말았다. 별안간 앞으로 내밀어지는 그릇을 흘끔 본 재광은 별말 없이 식사에 열중했다.

의주가 잠잠해지자 식사 분위기도 곧 평범해졌다. 마케팅 팀장과 대표는 업무상 대화와 사담을 오가며 조곤조곤 떠들었고, 의주는 간간이 끼어들면서도 제법 얌전히 제 몫의 밥을 비웠다. 그 틈에서 재광은 착실히 청자의 역할을 했다.

“참, 근데 재광 씨는 애인 있어요?”

멀뚱히 앉아 밥만 먹는 인턴에게 맘이 쓰였는지 대표가 불쑥 묻는다. 재광은 입안의 음식물 때문에 곧장 답하지 못하고 턱짓만 더 부지런히 했다. 그사이에 선호가 자신의 질문을 부연했다.

“아니 뭐 이상한 거 물으려는 건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요. 아, 아닌가? 이것도 실롄가?”

힘쓸 데가 있니 없니 하던 아까의 대화가 내심 걸리는 듯했다. 변명부터 하던 선호는 혹여 요즘 친구들에게 무례한 질문이었을까 걱정하는 내색을 했다.

재광은 잘게 씹은 밥알을 꿀꺽 삼키고서야 입을 열 수 있었다.

“아뇨, 괜찮아요. 여자친구 없어요.”

선호는 정말로 순수한 궁금증이었다는 듯 “아 그래요?” 했다. 마케팅 팀장 또한 취업 준비 중이었으면 만날 시간도 없었겠다며 한마디 거들었다. 그리고 의주는.

“….”

아무런 말 없이 재광을 쳐다봤다.

그냥 쳐다보는 건 당연히 아니고. 무표정한데 왜인지 모르게 흥미가 가득 도는 눈빛으로 봤다. 재광과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싱긋 웃는데, 그게 왜 무서운지 모를 일이었다.

목 뒤에 바짝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낀 재광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시선을 피했다.

????

인정하긴 싫지만, 재광은 의주 덕에 시간 한번 알차게 보냈다.

장어구이를 메인으로 잘 차려진 상차림을 싹싹 비운 다음에는 뷰 좋다는 인근 카페에 가서 디저트를 먹었고, 남는 시간에는 요즘 알음알음 인기를 얻고 있다는 숲길도 갔다.

그걸로 끝이었느냐 하면 NO. 그러고 나니 저녁때라 네 사람은 인근 지역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거기서 퓨전 파스타까지 맛본 뒤에야 귀갓길에 오를 수 있었다.

중간중간 이동할 때마다 재광은 의주의 차에 같이 탔다. 그러다 보니 마지막으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차에 올라탈 때는 조수석 문을 여는 동작이 꽤 익숙해 보였다.

도로 위, 재광은 줄곧 창밖을 내다보다 말고 문득 고개를 내렸다. 휴대전화를 꺼내 들고 잠깐 화면을 켰다 끄는 행동은 누가 봐도 시간을 확인하는 모습이었다.

곁눈으로 그를 살핀 의주가 가벼운 말투로 묻는다.

“왜. 빨리 가야 돼?”

예정된 일정이 있어 조급한 마음에 시계를 들여다본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반대였다.

- 열한 시 전까지 들어올 생각 하지 마라.

민광이 으름장을 놓은 시간까지 아직 여유가 많은 것이다. 서울의 주말 교통체증을 고려하더라도 10시 반쯤이면 집 근처에 도착할 듯했다.

이미 커피를 두 잔이나 마셨는데 또 카페에 가야 하나, 고민하던 재광은 무던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니요. 빨리 갈 필요 없어요.”

그래놓고는 괜히 찔려 흠칫거렸다. 그런 거 아니라고만 해도 됐을 것을 굳이 빨리 가지 않아도 된다 덧붙이다니.

빨리 가 봐야 혼자 방황할 게 뻔해 이대로 시간을 끌고 싶은 본심이 은연중에 묻어나온 대답이었다. 혹여 처량한 신세를 의주에게 들킬까 불안감이 엄습한다.

아니나 다를까, 의주는 어깨를 잘게 떨며 킥킥거렸다. 신호에 걸린 틈을 타 곁으로 돌아오는 눈길에 장난기가 그득하다.

“바람맞은 게 아니라 집 나온 거였어?”

그냥 나온 것과 쫓겨난 건 엄연히 다르지만, 전자로 받아들여지는 편이 자존심에 더 무해했다. 재광은 긍정의 뜻으로 침묵했다. 그러면서도 아침의 상황을 떠올리면 열이 받는지 한층 부루퉁해진 안색이었다.

의주는 순식간에 바뀌는 낯빛을 보며 더 크게 웃었다.

“왜? 형이랑 싸웠어? 다 커서 집 나올 만큼 싸우기도 하나 보네.”

이력서를 들여다보며 확인한 신상정보를 아직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재광의 방황을 곧바로 형과 연관 짓는 걸 보면 말이다.

꽤 날카로운 지적이었으나 재광은 어떤 대답도 않고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의주의 말마따나 싸우기라도 했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늘 작은 발악 끝에 되로 얻어맞는 패턴이라 가슴에 쌓인 한만 일만 이천 봉이었다.

“팀장님 형제 없으세요?”

대신 재광은 역으로 질문했다. 서열에 민감한 남자 형제 사이에서 집을 나올 만큼 치고받고 싸운다는 게 가능하다고 보는지 묻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의주는 저에 대한 관심으로 해석한 듯싶었다. “오, 질문이란 걸 할 줄도 아네” 하는 말로 서두를 연다.

“나는 딱 보면 몰라? 얼굴에 귀하게 자랐다고 써 있잖아. 삼대독자 외아들.”

마침 신호가 바뀌어 의주의 얼굴이 도로 정면을 향했다. 그 탓에 표정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는 없었지만 대단한 사실이라도 되는 양 뿌듯해하는 기색이 역력히 드러나는 음성이었다.

“아. 네.”

재광은 설렁설렁 받아쳤다. 애초에 제 상황을 알아줄 거라고 기대한 적은 없지만, 의주의 형제 관계를 알고 나니 설명해줘도 이해하지 못할 게 뻔해 더 이상의 말은 줄이는 게 낫겠다 싶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의주의 차는 부지런히 달렸다. 몇 마디 실없는 대화가 더 오가고 나니 어느새 낯익은 거리가 창밖으로 보인다.

휴대전화로 시간을 한 번, 익숙한 풍경을 한 번 번갈아 본 재광은 시트에 늘어져 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저 저쪽 횡단보도 앞에서 내릴게요.”

예상대로 열 시 반이 겨우 넘은 시각이었다. 집 근처에서 수상하게 서성대며 방황하느니 조금 걷는 게 낫겠다고 판단한 재광은 일부러 집과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내리기로 했다.

재광의 집이 어딘지 정확한 위치를 알 리 없는 의주는 별다른 의심 없이 차를 세웠다. 갓길에서 내린 재광이 곧장 문을 닫으려다 말고 상체를 숙인다. 그러자 차 안의 의주와 눈이 마주쳤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본인이 원한 건 아니었으나 어쨌든 신세를 진 셈이었다. 생각보다 불편하지도 않아서 제법 편하게 있다 오기도 했다. 그 덕에 막연히 지니고 있던 의주에 대한 반감도 어느 정도 사그라진 게 사실이었다.

그래서 솔직하게 감사 인사를 전하자 씨익 웃은 의주가 엄지와 검지를 곧게 펴 턱 아래 착 가져다 댄다. 그러더니 찡긋, 또 윙크를 날린다.

저와 똑같은 얼굴이 능글맞게 윙크를 하는 모습은 몇 번을 봐도 영 적응이 안 됐다. 이건 고마운 마음과는 별개로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었다.

“….”

재광은 별다른 반응 없이 단호하게 조수석 문을 닫았다.

????

나름대로 느긋하게 걸었으나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재광이 집에 도착했을 때는 열한 시가 되기까지 15분가량이 남은 시점이었다. 건물 앞에서 잠시 고민하던 그는 곧 안으로 발을 들였다.

민광이 엄포를 놓은 것보다는 이른 시간이었으나 이만하면 다 놀았을 거란 판단이었다. 아예 외박을 요구했다면 차마 들어갈 엄두를 못 냈겠지만, 굳이 시간을 정했다는 건 그 전에 돌아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는 뜻일 테니 이 정도 오차는 허용될 것 같았다.

“…어?”

그런데 아니었나 보다. 집 앞에 도착해 막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르려던 재광은 벌컥 열리는 문에 놀라 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거칠게 열린 문틈으로는 처음 보는 여자의 얼굴이 튀어나왔다. 그쪽에서도 불청객의 등장에 제법 놀랐는지 눈을 커다랗게 뜨고 굳어 있었다. 그러더니 곧 뒤로 고개를 휙 돌린다.

“자기야 왜? 뭐 있어?”

이어 안쪽에서는 민광의 목소리가 들렸다. 답지 않게 사근사근한 말투는 다시 들어도 역했다. 재광은 차마 여자친구를 보는 표정까진 알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며 다음 상황을 기다렸다.

“밖에 누가 있어서.”

“뭐? 누가.”

워낙 흉흉한 세상이라 그런지 재광을 오밤중에 남의 집 앞 서성거리는 괴한으로 오해한 듯싶었다. 여자가 소리를 낮춰 속닥거리자 민광이 곧장 그를 제 뒤에 감추고 밖으로 나왔다.

“누군데 이 시간에 남의 집 앞에서….”

여자친구 앞이라고 더 힘을 준 모양새였다. 키도 덩치도 큰 놈이 목소리 쫙 깔고 험악한 억양으로 말하며 나온다. 재광은 제 형임을 빤히 알면서도 내심 쫄아서 승모근에 바짝 힘을 줬다.

“너 뭐냐?”

그쯤 되자 민광도 제 동생을 알아보고 어이없단 말투로 그랬다. 재광은 잠시나마 자신이 쫄았다는 사실을 들키기 싫어 부러 더 반항적인 목소리를 냈다.

“뭐긴 뭐야. 이제 집에 들어오는 거지.”

잠자코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여자는 이제야 낯선 이의 존재를 확실하게 인지한 듯했다. 그는 민광의 뒤에 숨어 있다 말고 불쑥 튀어나와 인사를 건넸다.

“아 동생분이시구나. 안녕하세요!”

남자친구의 형제를 멋대로 의심하고 경계했던 게 퍽 민망한 모양이었다. 억지로 더 밝게 웃으며 활발하게 구는 티가 난다.

“동생 있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너무 안 닮아서 눈치를 못 챘어요. 죄송해요.”

상대방이 이렇게 나오면 재광으로서도 어쩔 도리는 없었다. 졸지에 괴한 취급을 당한 건 기분 나쁘지만 저쪽에서 오해를 하는 것도 전혀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아니에요.”

그래서 재광도 적당한 말로 대꾸하고 말았다.

어쩔 도리가 없는 건 민광도 마찬가지였다. 여자친구가 먼저 나서 살갑게 알은체를 하니 왜 거기 서 있어서 사람을 놀라게 하느냐고 마음껏 면박을 주기도 어려운 것이다.

그는 내키지 않는 눈길로 재광을 노려보면서도 입술만은 꾹 다물고 있었다.

“시간이 늦어서 아쉽네요. 다음에 정식으로 인사드릴게요. 밥이라도 같이 먹어요.”

세 사람 중 기묘해진 분위기를 만회해보려 애쓰는 이는 여자 한 명뿐이었다. 제법 상냥하게 건네는 말에 재광이 덤덤히 대답했다.

“네, 그럼 조심히 가세요.”

특별히 달가워하지도,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무시하는 뉘앙스도 아니었다. 오히려 밥이라도 같이 먹자는 말을 귓등으로 흘린 것치곤 제법 성의 있는 목소리였다.

여자도 더 시간을 끌 생각은 없는지 웃으며 목례를 하고는 재광을 지나쳤다. 그보다 체격이 월등히 좋은 민광이 그 뒤를 쫄쫄 따라나서며 눈을 한번 부라린다.

아마 제 고귀한 여자친구한테 더 상냥하게 굴지 않았다는 이유일 터였다. 재광은 욕하는 게 분명한 눈길을 휙 피하고서 곧장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고는 다시금 잠기는 도어록 소리를 배경음 삼아 소파에 몸을 던졌다.

근면 성실한 청년이라면 집에 들어오자마자 말끔히 씻고 잘 채비를 하는 게 맞겠지만, 그러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오랜만에 긴 외출을 해서 그런지 몸이 천근만근이다. 찝찝함이고 뭐고 일단은 좀 늘어지게 누워 있고 싶었다.

“야 김재광. 너 내가 열한 시까지 오지 말라 그랬지.”

그러나 꿀 같은 휴식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여자친구 마중을 나갔던 형이 금세 돌아온 탓이다. 하도 유난이기에 집까지 동행이라도 하려나 했더니만 고작 요 앞까지만 데려다주고 온 것 같았다.

“아 또 뭐.”

“내가 일부러 시간도 알려줬는데 왜 먼저 와서 마주치고 지랄이야. 그리고 너 태도가 그게 뭐냐?”

“내가 뭘 어쨌다고.”

“너 민망할까 봐 나중에 밥이라도 같이 먹자고 말 걸어주고 하는데 조심히 가세요? 잔말 말고 꺼지라는 거야 뭐야.”

너 같이 꼬인 놈이나 그렇게 받아들이는 거라고. 그리 생각한 재광은 소파에 딱 붙었던 몸을 미적미적 일으켜 앉았다.

“그런 뜻으로 한 말도 아니고 그렇게 받아들이지도 않았을걸? 혼자 넘겨짚어서 생사람 잡고 있어.”

“이 새끼 봐라?”

“솔직히 아침 댓바람부터 자는 사람 깨워서 내보냈으면 이만큼 버티다 들어온 거로도 고마워해야 되는 거 아니냐?”

“고맙기는 개뿔. 네가 집에 있어 봐야 뭐 대단한 일 한다고. 보나 마나 만날 친구도 없어가지고 만화방 같은 데서 종일 쳐 자다 왔을 거면서 생색내고 자빠졌네.”

재광은 더 이상의 반박 대신 고개만 설설 저었다. 무슨 말을 해도 들어먹질 않는 인간이니 더 진을 빼 봐야 저만 손해라는 계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자리를 피할 심산으로 소파에서 일어섰다. 그랬더니 이제는 싸가지 없이 형이 얘기하는데 듣는 시늉도 안 한다며 성화다.

재광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고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의주가 제 얼굴로 형 같은 행동을 한다고 생각했던 건 취소하기로 했다. 저 잘난 맛에 푹 빠져 사는 건 같지만, 적어도 의주는 자신을 치켜세우되 남을 깎아내리진 않는다. 철저히 자기 자신의 고귀함만 입이 마르도록 떠들어대는 것도 엄청난 재주였다.

의식의 흐름이 거기까지 미친 재광은 별안간 어이없다는 듯 픽 웃었다.

그토록 싫어하던 여의주가 낫다는 생각마저 들게 하다니. 김민광 지랄도 참 어마어마하다 싶었다.

????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됐다. 재광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자신의 자리에 철썩 붙어 있었다.

바른 자세로 유심히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멍을 때리는 중이었다. 재광에게 넘어온 첫 과제는 이미 그의 손을 떠났고, 이후로는 별다른 오더가 없었기 때문이다.

회사생활에 차츰 적응하고 있다고는 하나 아직 이 한가로움을 즐길 만한 짬은 안 됐다. 다들 각자의 일로 바빠 보이는 가운데 홀로 멀뚱히 있으려니 이 또한 재광에게는 고역인 것이다.

“재광, 이리 와 봐.”

그런 와중에 의주가 재광을 부른다.

주말의 일이 재광뿐만이 아니라 그에게도 어떠한 영향을 미친 모양이었다. 그래도 재광 씨, 하고 불러주던 호칭이 부쩍 짧아졌다.

재광이 그런 변화에 일일이 기분 나빠하고 불쾌해할 위인은 아니었다. 그는 호칭의 변화 따위 알아차리지 못한 사람처럼 담담한 얼굴로 의주의 곁에 가서 섰다.

“….”

그런데 어째 의주는 말이 없다. 제가 먼저 불러놓고는 곁에 와 선 재광 대신 그의 빈 책상만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재광은 의주가 무슨 실없는 장난이라도 치려는 줄로만 알았다. 그 탓에 긴장을 풀고 잠자코 기다리자 곧 다시 목소리가 들려온다.

“재광.”

“네?”

“평소에 정리 정돈을 못 하는 스타일은 아닌 거 같은데.”

사람을 불러놓고 앉았던 자리만 노려보고 있더라니, 그새 주변 정리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살피고 있었던 듯했다.

의주의 말대로 재광은 평소에 공간을 난잡하게 쓰는 편이 아니었다. 딱히 정리 정돈을 잘해서라기보다는 물건을 늘어놓는 것마저 귀찮아 애초에 벌려놓질 않는 쪽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현재 재광이 배정받은 자리도 깔끔했다. 이거저거 올려둔 소지품 없이 회사에서 기본으로 제공된 사무용품만 덜렁 놓여 있었다.

“….”

재광은 대꾸 없이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입사 일주일 차. 이제는 의주의 뜬금없는 소리가 본론으로 들어가기 위한 시동이라는 걸 아는 탓이다. 의주는 여태 재광이 봐온 사람 중 특이한 축에 속했지만 행동거지의 패턴만은 단순해 파악이 쉬웠다.

“근데 코드는 왜 이래?”

그리고 역시나. 사소한 잡담 같던 말이 곧 일로 이어진다. 의주가 이것 좀 보라는 듯 가리킨 화면에는 재광이 작성한 코드가 띄워져 있었다.

이번에 구현한 이벤트 페이지는 재광 나름대로 꽤 만족한 결과물이었다. 반나절이긴 하지만 주어진 시간보다 빠르게 끝내기도 했고, 그 시간 안에 발견한 오류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만하면 첫 과제의 성과로는 나쁘지 않다는 게 본인의 평가였다.

제가 만족한 과제였다 한들 의주에게까지 칭찬을 들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한 적은 없었다. 자화자찬으로 필리버스터를 하면 혼자서도 사흘 밤낮을 꼬박 이어갈 그에게 일개 인턴 나부랭이의 작업물이 성에 찰 리 없지 않나.

그만큼 어느 정도는 예상한 결과였다. 그런데도 막상 눈앞에서 못마땅해 하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나나 되니까 이걸 알아먹지, 다른 사람들이랑 일하려면 이거 거의 주석[5] 천지여야 돼.”

의주는 믿을 수 없단 얼굴로(당연히 부정적으로) 화면을 들여다보며 시종일관 고개를 설설 저었다.

“이대로 입력하면 컴퓨터야 지 알아서 받아들이겠지. 그래도 결국 사람이 보고 해야 되는 일인데 가독성이 이렇게 떨어지면 나 정도 되지 않고서야 쉽게 손 못 대지 않겠어? 세상 모든 개발자가 나 같은 것도 아닌데?”

재광은 묵묵히 입을 다물었다. 크나큰 실수를 한 건 아니니 죄송하다고 하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인턴이 서툰 게 당연하지 않느냐 따질 수도 없으니 할 수 있는 건 침묵뿐이었다.

“이거 좀 봐봐.”

그러는 사이 의주는 다른 창을 하나 더 띄웠다. 자신이 직접 작성한 코드였다. 여태 조용하던 재광은 “아…” 실없는 소리만 냈다.

확실히 달랐다. 재광도 저 나름대로 알아먹기 쉽게 하겠다고 애를 썼지만 의주가 정리해놓은 코드에는 전혀 비할 바가 못 됐다. 언뜻 봐도 한눈에 들어올 뿐만 아니라 장황한 라인 없이 간결함 그 자체다.

어정쩡하게 옆에 서서 그 내용을 하나하나 뜯어볼 수는 없었으나 대충 봐도 느낌이 왔다. 저건 작성자가 아닌 누가 봐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겠구나.

“알지, 알지. 보면 감탄이 나오지. 근데 박수 치라고 보여주는 거 아니고 코드 정리는 이렇게 하는 거라고 보여주는 거니까 다음번에는 신경 좀 써 봐.”

재광은 토 달지 않고 순순하게 “네, 알겠습니다” 했다.

의외로 간단한 리뷰라는 생각이었다. 비록 남들이 알아먹기 힘들며 가독성이 좋지 않다는 지적을 듣기는 했다만, 첫 작업물에 이 정도의 평가라면 이외에는 괜찮았다는 거 아닌가 싶어 내심 흡족했다.

“아무튼 그건 그렇고, 조회해서 결과 값 불러오는 부분 있잖아. 이런 식으로 짜면 100퍼 꼬인다.”

하지만 그럴 리가 있나. 본론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

업무도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아무래도 지난주에는 입사 첫 주라 의주가 꽤 봐준 모양이었다. 코드 리뷰가 끝나면서부터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어나더 레벨을 자처하는 게 괜한 자신감은 아니었는지, 의주는 알아먹기 힘들다면서도 코드를 콕콕 짚어가며 오류 가능성을 귀신같이 찾아냈다.

솔직히 이번에는 재광도 조금 감탄했다. 곧이곧대로 티 내지는 않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실없는 말장난이나 치며 저를 골려 먹을 때와는 영 딴판인 의주를 보았기 때문이다.

주변 정리를 잘하니 마니, 보통 사람은 알아먹니 마니. 시답잖은 소리를 하는 것도 그때가 다였다.

본격적으로 리뷰에 들어가면서부터는 눈빛부터 달라졌다. 고작 인턴 하나 옆에 세워두고 이야기하는 건데도 컨퍼런스 발표라도 하듯 똑 부러진 말투는 덤이었다.

그리고 그 대단한 리뷰 이후부터는 재광이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오류 가능성이 제기된 부분들을 하나하나 고치고 테스트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코드를 수정한다고 그게 또 마음대로 단박에 되는 것도 아니어서 갖은 애를 쓰느라 고생이었다. 제일 먼저 지적당한 가독성을 손보는 데도 꽤 품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이틀도 후딱이었다. 모니터와 물아일체가 될 기세로 자리에 붙어 있던 재광은 입사 당시보다 한층 핼쑥해진 몰골로 회식에 참석했다.

“우리가 한창 바쁠 때여서 환영이 늦었어요. 재광 씨, 늦었지만 입사 축하합니다!”

대표가 환영 인사로 포문을 열자 여기저기서 환영한다며 한마디씩 더했다. 선호의 말마따나 다들 바빠 정신이 없는 시기였으나 회식 분위기만큼은 피로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밝았다.

“재광 씨, 술은 좀 해요?”

다 같이 건배를 한 직후였다. 소주 한 잔을 단번에 털어 넣는 재광을 보고 마케팅 팀장이 물었다. 재광은 입가심으로 물을 한 모금 마시고서 대답했다.

“아…. 아뇨. 잘은 못 마십니다.”

왠지 모르게 방어적인 뉘앙스였다. 마케팅 팀장은 하하 웃으며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막 먹이려고 물어본 게 아니라 무리하지 말고 조절하라고 물어본 거니까 긴장 풀어요.”

“아아, 네.”

재광은 덩달아 웃으며 대꾸했다.

사실 잘 못 마신다는 듯 이야기한 건 대충 둘러대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소주 두 병까지는 거뜬했고 그 이상 가야 취기가 좀 도는 정도였으니까. 심지어 대학 시절에는 술자리에서 제법 늦게까지 살아남는 일도 많았다.

다만, 주량을 조절하지 못했을 때 후폭풍이 컸을 뿐.

술과 관련한 재광의 최초 흑역사는 여의주 닮은꼴로 이리저리 끌려다니던 신입생 환영회 때였다. 요령 없이 주는 대로 다 마시고서 결국 길바닥에 주저앉아 숙면을 취했더랬다.

첫 이별을 당했을 땐 또 어떻고. 혼자 묵묵히 막걸리를 푸다가 순식간에 취해 너희는 캠퍼스 커플 같은 거 하지 말라며 열변을 토했다.

그것만 했으면 다행이지. 취했다며 이만 가자는 동기들에게 안 간다고 생난리를 피우다가 결국 실연당한 걸 고래고래 광고하며 기숙사까지 질질 끌려간 기억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뭘 해도 이해해주는 학생 신분이 아니었다. 술 정도는 알아서 조절하고 멀쩡한 이미지로 사회생활을 원활히 하고 싶었다.

더군다나 취업 준비를 한답시고 술을 멀리한 기간도 꽤 된 탓에 되도록 폭음은 피할 심산이었다.

그런데 어째 마음처럼 되기는 쉽지 않을 모양이었다.

오래간만에 마신 소주는 몹시도 달았다.

????

술맛도 좋고 분위기도 좋았다. 평소에도 유쾌한 편인 직원들은 술이 들어가자 더욱더 쾌활하게 굴었다.

회식이 업무의 연장이라고는 하나 이 자리에서만큼은 격의라는 게 느껴지지 않았다. 대표님, 팀장님― 호칭은 그리 부르면서도 오가는 말들에는 벽이 없었다.

“재광 씨 술 잘 못한다더니 잘 마시네. 완전 멀쩡한 거 같은데?”

소소한 이야기 하나에도 깔깔거리며 편하게 마시다 보니 재광도 제법 술을 들이켰다. 술은 잘 못한다는 대답으로 방어적인 태도를 보인 초반과는 전혀 다른 행보였다.

마케팅 팀장이 그 점을 지적하자 재광은 민망한 듯 목덜미를 문질렀다.

“아니에요. 겉으로만 그렇고 좀 취했어요.”

정체를 숨기던 주당처럼 보일까 봐 괜히 하는 소리는 아니었다. 재광은 확실히 제 계획보다 많은 양을 마셨다.

차라리 위협적으로 부어라 마셔라 하는 분위기였다면 마케팅 팀장의 말마따나 무리하지 않고 적당히 내뺐을 터였다. 그러나 가벼운 대화를 주고받으며 오가는 술잔에는 당할 재간이 없었다. 정신 차려보면 주변의 속도에 맞춰 함께 잔을 기울이고 있었던 거다.

지그시 깨물어본 입술에서는 저릿한 감각이 느껴졌다. 취기가 돈다는 증거다. 오래간만의 음주라 그런지 취하는 속도가 더 빠른 듯했다.

재광은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 눈에 또렷이 힘을 줬다. 제 술버릇을 잘 아는 탓이다.

여기서 속절없이 취해버리면 답이 없었다. 한 학기 이상을 비밀로 유지해온 연애 사실도 술 취해 다 까발린 전적이 있지 않던가. 지금 이 자리라면 여의주의 면상에 대고 내 첫사랑이 널 좋아했었다며 열폭해버릴지도 몰랐다.

“아 뭐야. 여의주 님 안 계시다고 금세 분위기 죽었어?”

그런 속을 알 리 없는 의주는 굳이 자리를 비집고 들어와 재광의 옆에 앉았다.

통화를 하러 잠시 나갔다 들어온 참이었다. 한바탕 이어지던 수다가 잠시 잦아든 틈에 돌아온 그는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며 테이블을 눈으로 쫙 훑었다. 알코올의 쓴맛이 싫어 음주를 즐기지 않는 의주에 비해 다들 제법 취한 낯을 하고 있었다.

“팀장님은 누구 전환데 그렇게 벌떡 일어나서 받으러 가셨어요?”

마침 눈이 마주친 치원이 물었다. 그러자 다른 직원들의 시선이 모조리 의주에게로 향한다. 회식 중 자리를 피한 전화 통화라니. 다들 간질간질한 연애사를 기대하는 게 틀림없었다.

“아 그거 엄마 전화였는데, 꿀인삼 해서 보냈다고 갈색 되면 먹으래요.”

한순간 반짝반짝하던 눈빛들이 순식간에 꺼졌다. 치원 또한 김이 팍 샌 목소리로 “전 또 여자친군 줄 알았잖아요” 했다.

“다들 상상력이 되게 풍부하시다. 쟤가 어떻게 연애를 해요.”

불쑥 끼어든 이는 대표였다. 자아도취 해 남의 맘 헤아리는 방법이라곤 모르는 놈에게 연애가 가당키나 하냐는 의미였다. 비록 이렇다 저렇다 설명을 더 하진 않았지만 그 말을 들은 다수가 인정한다는 양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기야 여 팀장님은 자기애가 충만하시니까 그렇긴 하겠네요. 딴 사람한테 관심이 있어야 연애도 하는 거니까.”

치원이 선호의 말에 동의한다는 취지로 대답했다. 맞은편에 앉아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의주는 곧장 “아닌데?” 반박하며 날카로운 눈매를 동그랗게 떴다.

“아니라고요?”

“응. 나 요즘 재광한테 관심 엄청 많아.”

그렇게 말한 의주의 고개가 바로 옆에 앉은 재광에게로 향한다.

솥뚜껑만 한 손을 양 볼에 척 하니 붙여 꽃받침을 하고서였다. 옆에 앉은 직원과 건배를 하고 막 잔을 비운 재광은 별다른 표정 없이 의주를 봤다.

지켜보던 다른 사람들은 그럼 그렇지, 하는 뜻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관심 있다는 상대가 저와 꼭 닮은 재광이지 않던가. 이 또한 자기애를 벗어나지 못한 관심사라 여기고 마는 듯했다.

꼭 틀린 해석은 아니었다. 재광이 의주와 도플갱어 수준으로 닮은 외모를 하지 않았더라면 이만큼 관심이 갈 일도 없었을 테니까.

단지 닮은 얼굴에서 기인한 호기심이 남들이 보는 것보다 크고 깊을 뿐이었다.

커다란 덩치로 앙증맞은 꽃받침을 하던 의주의 손은 어느새 재광의 뺨에 가 있었다. 의주의 돌발행동에는 누구도 놀라워하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얼굴이 붙들린 재광도 마찬가지였다. 의주의 뜬금없는 행동에 그새 익숙해진 건 아니고, 술기운에 멍해진 탓이 컸다. 재광은 자꾸만 초점이 나가려는 눈에 간신히 힘을 주며 시선을 마주했다.

“재광.”

“….”

“너 왜 이렇게 볼이 쫀득쫀득해? 찹쌀떡 같다.”

시답잖은 소리를 진지하게 내뱉는 의주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그러나 취기가 오른 재광은 의주의 형형한 눈빛을 알아차리기는커녕 허락 없는 스킨십에 기분 나빠할 겨를도 없었다.

의주에 관한 얘기가 오가는 동안 옆에 앉은 직원과 급하게 건배를 몇 번 한 게 화근이었다. 머리로는 더 마시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내밀어지는 잔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속도를 맞췄더니 금세 취기가 올랐다.

입술 끝이 얼얼하던 정도에 그치던 아까와 달리 이제는 정신이 통째로 몽롱했다. 그 바람에 재광은 질색하는 내색도 못 했다. 그저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은 손길로 의주의 손을 밀어내는 게 전부였다.

순순히 손을 뗀 의주는 바람 새는 소리로 웃었다. 심심한 반응은 좀 아쉽지만, 평소와 달리 흐트러진 재광의 모습이 새로워 여전히 관심이 가득한 안색이었다.

“재광, 취했어? 누가 이렇게 먹였어?”

그렇게 묻는 뉘앙스는 걱정보다 놀리는 쪽에 가까웠다. 취한 와중에도 의주를 향한 반감은 남아 있는지, 재광이 부러 눈에 힘을 주며 대꾸했다.

“안닌데여. 안 치해써여.”

마케팅 팀장에게 얘기할 때만 해도 취했다더니, 지금은 안 취했단다.

재광의 머릿속에서는 똑 부러지게 “아닌데요, 안 취했어요” 했을 테지만 입 밖으로 나온 소리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누가 봐도 더 마실 수 있다고 집에 안 가겠다 버티는 취객의 그것이다.

“아아, 안 취했어요?”

의주는 그를 놀리듯 정확한 발음으로 말꼬리를 잡았다. 재광은 그러잖아도 흐린 눈을 흘기며 아니꼬운 티를 냈다. 그리고 정확히 10분 뒤.

쿵.

테이블 위에 재광의 고개가 떨어졌다.

????

“다 왔습니다.”

대리기사가 주차를 마친 다음 뒤를 돌아본다. 뒷좌석에 편히 기댔던 의주는 느긋하게 상체를 세우며 재킷을 뒤졌다.

“수고하셨습니다.”

형식적인 인사를 건네며 비용을 지불하자 곧 대리기사가 자리를 떴다.

의주도 곧장 차에서 내리려고 했다. 시간이 늦은 데다 술까지 마셨더니 피로가 곱절로 밀려오는 기분이었다. 빠르게 뒷문 손잡이에 손을 올렸던 그는 이내 “아 맞다” 하며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뒷좌석 한쪽에는 재광이 널브러져 있었다.

“아주 세상모르고 자네.”

의주는 작게 읊조리고는 고민하듯 이마 언저리를 긁었다.

재광을 여기까지 데려온 데는 타의가 더 크게 작용했다. 같은 팀이기도 하거니와 집도 같은 방향이라는 이유로 다들 한마음이 되어 의주에게 그를 떠넘긴 것이다.

의주도 딱히 못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쫀득한 볼을 테이블에 짓눌러가며 잠들긴 했지만, 집에 가다 보면 알아서 깰 테니 그때 차를 돌려 데려다주면 그만일 거라 예상한 거다.

그러나 재광은 잠시도 깨질 않았다. 집이 어디냐고 흔들어 깨워 봐도 묵묵부답이었고, 찰흙을 뭉치듯 얼굴을 일그러뜨려도 잠깐 인상을 쓸 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의주의 집이었다. 지하 주차장의 퀴퀴한 공기를 느끼며 갈등하던 의주는 곧 할 수 없다는 듯 재광의 겨드랑이 밑에 팔을 끼워 넣었다.

아마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이 날씨에 차에서 자고 입 돌아가 봐야 정신을 차린다고 내버려 뒀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눈을 꼭 감은 얼굴마저 저와 똑 닮아 외면할 수가 없었다. 의주는 긴장감이라곤 없는 몸을 제 등에 둘러업었다.

다 큰 남성이 축 처진 무게가 가벼울 리는 없었으나 그래도 들 만했다. 내려달라고 발광이라도 했으면 고생깨나 했겠지만 곤히 잠든 상태라 미동도 없어 수월했다.

의주는 이 비싼 등에 업힌 소감을 질리도록 캐묻겠다는 다짐을 하며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섰다.

“아….”

거침없이 침실로 간 의주는 불현듯 짧은 탄성을 뱉었다. 재광이 힘없이 처져 있었단 사실을 간과하고 침대에 내려놓은 탓이다. 부드럽게 슥 흘러내리던 재광의 몸이 끝내 쿵, 하고 묵직하게 나가떨어졌다.

탄탄한 매트리스에 부딪히는 소리가 제법 컸다. 이 정도면 충격이 적지 않을 듯해 서둘러 재광을 살피는 의주의 동작이 빨랐다. 그는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상체를 가볍게 숙이고서 재광을 들여다봤다.

“으으….”

예상은 틀리지 않은 것 같았다. 여태 죽은 듯 잠들었던 재광이 슬며시 앓는 소리를 내며 인상을 찡그린다. 그러고는 어딘가 불편한 양 몸을 뒤척거리더니 곧 천천히 눈을 떴다.

“드디어 깼어?”

의주가 생각하기로는 한잠 푹 잤으니 술도 어느 정도 깼을 줄 알았다. 그래서 평소와 같은 말투로 가볍게 물은 건데, 재광의 반응은 영 시원치 않았다.

“….”

기다란 눈매 안으로 버벅거리며 움직이는 눈동자가 아직도 흐린 빛을 띤다. 상황 파악을 하려 부지런히 머리를 굴리기보다는 그냥 멍한 정신으로 눈에 보이는 걸 마냥 보고만 있는 눈치였다.

“맛이 갔….”

게다가 맨정신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도 한다. 재광은 손을 올려 제 위에 있는 의주의 얼굴을 더듬었다. 생각지 못한 대담한 손길은 천하의 여의주마저 당황하게 만들었다.

“…네, 완전히.”

물론 잠시였다. 끊긴 말을 마저 이은 의주는 잠자코 제 얼굴을 내줬다.

어디까지 하나 지켜볼 심산이었다. 의외의 행동에 잠시 놀랐을 뿐, 이제는 이 상황이 재밌는지 입꼬리가 솔직하게 올라갔다.

재광은 몽롱한 눈을 하고서 더듬거리는 손길로 꼼꼼하게 의주의 얼굴을 훑었다. 엷게 속쌍꺼풀이 진 기다란 눈부터 시작해 빙긋 올라간 입매까지 섬세하게 손끝으로 간질인다. 그런 다음에야 술 냄새 가득한 호흡을 뱉으며 입을 열었다.

“개똑같네 진짜.”

꿈을 꾸듯 아득한 목소리였다. 격한 어휘와 달리 호기심 많은 어린아이의 말투 같기도 했다.

회사에서와는 전혀 다른 태도에 의주가 재밌다는 듯 웃었다. 그러느라 슬며시 입술이 벌어지자 여태 그의 얼굴 위를 맴돌던 손이 아랫입술을 꾹 누른다.

재광의 손끝은 좀처럼 의주의 얼굴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금방이라도 거둘 듯이 굴다가도 끈질기게 더듬었다. 평소에 뭘 해도 뚱하던 행동만 보면 손길도 투박할 것 같은데. 의외로 부드럽고 섬세한 터치였다.

몇 번씩 살갗을 스치는 손길이 계속되자 마냥 웃어버리고 말던 의주의 눈빛도 조금씩 달라졌다. 진지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구미가 도는 표정이다. 그는 조금씩 몸을 낮춰 재광에게로 가까이 얼굴을 내렸다.

“언제까지 만질 건데.”

속삭이듯 묻자 술기운에 먹힌 재광이 그런다.

“닳아요?”

평소의 재광이라면 하지 않았을 당찬 언사였다. 의주는 숨처럼 웃음을 흘렸다.

“아니. 더 해보라고.”

그렇게 대답할 때는 침대 끝에 걸터앉았던 몸이 이미 재광의 위에 올라와 있었다. 가까이서 재광의 눈을 마주한 의주는 잠시간 말없이 시선만 주고받았다.

“….”

“….”

조금 전까지만 해도 더 해보라더니. 의주는 제 뺨 언저리를 맴돌던 재광의 손을 슬며시 감싸 잡았다.

이쯤 되면 술에 취한 재광도 공기의 흐름이 뜻하는 게 무엇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그는 잡힌 손을 빼낼 생각을 안 했다.

대신 저와 닮은 눈매를 마주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크게 일렁이는 목울대를 지켜보던 의주는 조금 더 과감하게 거리를 좁히고 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았다. 도톰한 입술이 말캉하게 맞물리자 의주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맞다. 의주는 재광을 처음 본 순간부터 쭉, 이러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꼭 한 번쯤은 저를 쏙 빼닮은 재광과 이런 짓을 해보고 싶다는 그런 마음이.

의주는 재광의 입술을 위아래 번갈아 감쳐물었다. 입술 사이로 부드럽게 물었다가 매끄럽게 놓아주는 짧은 키스였다.

재광은 시선을 내리깔고서 의주가 하는 대로 마냥 내버려뒀다. 그야말로 순순한 태도였다. 간을 보듯 가벼운 입맞춤 뒤에 뜸을 들이던 의주는 밀어내거나 불쾌해하지 않는 그의 반응을 보고는 다시 한번 입술을 겹쳤다.

의주는 조금 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굴었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문 그는 반항 없이 열린 재광의 입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이번에는 재광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상대방이 무언가 자극을 주기도 전에 유연하게 혀를 섞는다. 예상치 못한 움직임에 잠시 멈칫거리던 의주는 곧 피식 새려는 웃음을 삼키며 마음껏 입안을 휘저었다.

“으응….”

재광의 반응은 솔직했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나도록 혀를 섞을 때는 비스듬히 내리깐 시선으로 풀린 눈을 하더니, 의주가 깊숙이 혀를 밀어 넣어 점막을 훑자 눈을 감으며 앓는 소리를 낸다. 꼭 감은 눈가로 단정한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의주는 그 모습을 다 지켜보고 있었다. 여유롭게 내리깐 눈꺼풀 아래로 빛이 선명한 눈동자가 재광의 얼굴을 속속들이 뜯어봤다.

혀를 옭아맬 때 나른하게 풀리는 표정이라든가, 여린 살을 건드릴 때 약하게 일그러지는 눈가 따위를 모두.

온몸에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기다란 눈매에 쭉 뻗은 콧대, 입술산이 또렷하고 도톰한 입술까지. 뭐 하나 빼놓지 않고 모조리 닮은 재광이 반응할 때마다 머릿속이 뜨거워지고, 그 열은 곧 하체로 이어졌다.

의주만의 사정은 아닌 듯했다. 깊게 입안을 찔러댈 때마다 움찔거리며 긴장하던 재광이 저를 깔고 엎드린 몸 위로 팔을 둘렀다.

그런 다음부터는 거의 입맞춤을 조르는 모양새로 매달렸다. 숨통을 틔워주려 입술을 뗀 잠깐 사이에도 못 참겠다는 듯이 금세 의주의 입술을 물어왔다.

의주는 그 반응이 퍽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꼭 상을 주듯 혀를 내어줬다. 재광은 입안을 채운 살덩이를 달게도 빨아댔다. 입술 새로 집어넣은 건 혀인데, 꼭 중심부가 빨리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그만큼 흥분되는 행위였다. 의주는 꼭 입을 더 벌리려는 것처럼 재광의 양 볼을 꽉 쥐고서 혀를 더 깊게 박아 넣었다.

목구멍까지 밀어 넣을 기세로 처박은 혀는 뜨겁고, 손안에 감겨드는 차진 피부의 감촉은 매끄러웠다. 느낄 수 있는 모든 감각을 최선을 다해 자극당하는 기분이었다.

당연하게도 그중 가장 큰 자극은 달뜬 기색이 역력한 재광의 얼굴이었고.

축축한 마찰음은 덤이었다. 몇 번이고 진득한 소리가 귓가를 울린 다음에야 두 사람은 서서히 입술을 떼어냈다. 고개를 비틀어가며 물고 빨았더니 어느새 젖은 입술이 탱탱하게 부어올랐다.

재광은 반쯤 넋이 나간 안색으로 여전히 제 위에 자리한 의주를 봤다.

“…팀장님.”

달뜬 호흡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의주를 부르는 목소리는 나른했다. 부름에 답하지 않은 의주가 밑으로 내려가 목덜미를 물자 재광의 고개가 뒤로 꺾인다. 잠시간 가쁜 숨을 토하던 그는 곧 말을 이었다.

“설마, 게이예요?”

목 아래쪽에 이를 콱 박아 넣던 의주는 참지 못하고 호쾌하게 웃었다. 정말이지 취한 재광은 한 치 앞도 예상할 수가 없다.

의주는 재광이 무슨 짓이냐며 주먹을 날리면 얌전히 맞아주려고 했고, 후다닥 도망간다면 굳이 잡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게이냐니. 진득하게 타액을 나눈 뒤에 이런 질문이 돌아올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그래서 재밌었다. 미리 계산해둔 경우의 수를 벗어나는 재광이 몹시 흥미롭고, 그래서 더 만족스러웠다. 의주는 흡족한 감정을 숨기지 않고 곧장 답했다.

“응. 못 들어봤어? 완벽한 남자는 다 게이라고.”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성 지향성을 고백하는 목소리는 가볍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조금 전까지 입술을 맞댄 재광은 제법 충격을 받은 모양새였다. 여태 젖어 번들거리는 입술을 벙긋거리며 아무런 대답을 못한다.

피차 술이 들어갔으니 사고 정도로 여기려고 했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뭐. 당황스러운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굳은 재광을 집요하게 내려다보던 의주는 손가락 끝으로 그의 볼을 가볍게 톡, 두드렸다.

“좋았지.”

코앞에 의주의 얼굴을 두고도 멀찍이 시선을 던지듯 멍한 눈을 하던 재광이 초점을 찾았다. 매끈한 눈매 안에서 진한 빛의 눈동자가 버벅거리며 움직인다. 취한 와중에도 차마 좋았다고 수긍하는 일은 쉽지 않은 듯했다.

“알아, 나도 좋았어.”

의주는 알아서 대답을 받아들였다.

재광은 이마저도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그 틈을 타 다시금 목덜미를 무는 의주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뿐이었다.

재광은 뭔가를 깊게 사고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제 위에 올라탄 사람이 의주라는 것도, 의주가 직장 상사라는 것도 인지하고 있으나 그래서 어떤 대처를 해야 하는지까지는 이어지지 못했다.

술에 녹진하게 녹아내린 몸은 이성보다 욕구에 착실히 반응하는 중이었다.

그도 그럴 게, 재광에게는 이토록 몸이 다는 일 자체가 오랜만이었다. 첫사랑 누나가 처음이자 마지막 연애 상대였으니 오랜만이라는 말로도 다 표현이 안 되는 수준이다.

그뿐일까. 취업 전선에 뛰어들면서는 연일 실패를 맛보고 모든 의욕을 상실해 손장난마저 뜸했다. 그 탓에 이 순간의 육체적 자극이 더 크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간만에 느끼는 짜릿한 쾌감을 마다할 결단이 차마 서질 않는다.

그러한 이유로 재광이 얌전히 있는 사이, 목선을 타고 내려간 의주는 쇄골 즈음 입을 맞췄다.

부드럽게 살갗을 빨아올리던 입술은 곧 가슴께로 향했다. 말아 올린 티셔츠 아래, 판판한 가슴 위를 가볍게 훑어내리던 입술이 곧 돌기를 머금었다.

“아, 흐읍….”

혀로 느릿하게 유륜을 훑다가 유두를 건드리자 터져 나오던 신음이 금세 먹힌다. 키스할 때는 마음껏 앓더니, 입을 막아주는 게 없어 그런지 재광이 스스로 아랫입술을 깨물며 금방이라도 터지려는 탄성을 삼켰다.

가슴팍에 고개를 묻던 의주는 슬며시 눈동자만 올려 그를 확인했다. 그러더니 곧 손을 뻗어 잇새에 물린 재광의 아랫입술을 빼낸다. 코웃음을 치며 내뱉는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너는 소리도 참네.”

재광이 무어라 답할 시간은 없었다. 말을 마친 의주의 손이 곧장 바지 버클을 풀었기 때문이다.

바지와 속옷을 단숨에 끌어 내린 그는 축 늘어져 있던 재광의 다리를 양옆으로 세우고 그 가운데 자리를 잡았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중심부 바로 아래 몸을 붙인 의주가 무릎을 세워 자세를 잡자 누워서 꼼짝 않던 재광이 불현듯 다급한 목소리를 낸다.

“자, 잠깐만요.”

“응?”

“왜 제가 아래… 그니까 밑에… 아니, 왜….”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더듬거리고는 있으나 뜻을 못 알아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왜 제가 자연스럽게 바텀의 역할을 하게 되는 건지 항의라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의주는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야, 내가 너보다 크니까.”

주어는 확실치 않지만 어떤 단어를 가져다 붙여도 말이 됐다. 키도 덩치도, 하다못해 손 크기도 모두 의주가 더 크지 않던가. 재광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어 괜히 입술만 삐죽거렸다.

“작은 고추가 더 맵댔거든요.”

무엇 하나 의주를 이길 수 있는 게 없으니 뭐라도 반발을 해보는 거다. 평소와 달리 꽤 성실한 말대꾸에 의주가 한쪽 입꼬리를 비죽 올려 웃었다. 그리고는 제 손으로 벗긴 재광의 하체를 향해 불쑥 몸을 숙였다.

“읏! 뭐 하는, 거예요.”

그간의 자극으로 제법 단단해진 재광의 성기가 순식간에 의주의 입안에 갇혔다. 거리낌 없이 재광의 것을 감싼 그는 볼 안쪽을 조여 음경을 길게 빨아올렸다.

귀두 끝이 내뱉어질 때는 사탕이라도 빠는 것처럼 쪽, 하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의주는 잔뜩 짓궂은 눈으로 재광을 보며 입을 열었다.

“안 매운데?”

“그건 안 작거든요!”

얄궂은 한마디가 자존심을 단단히 건드린 듯싶었다. 여태 침대에서 몸을 뗄 줄 모르던 재광이 발딱 상체를 일으키며 언성을 높인다.

“그래, 안 작아.”

의주는 느긋하게 웃고는 재광의 어깨를 눌러 눕혔다.

순순히 밀려 누우면서도 재광은 영 불안한 안색이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영락없이 뒤를 내주고 말 텐데, 그것만은 내키지 않는 게 분명했다.

속내를 알아차린 의주는 어르고 달래듯 얼굴 곳곳에 입맞춤을 퍼붓다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아픈 거 싫어.”

“누구는 좋아요?”

“근데 나는 안 아프게 할 수 있으니까. 응?”

그러면서 손으로는 가슴을 살살 쓸어 대니 정상적 사고가 불가능한 재광으로서는 더 버틸 재간이 없었다. 한껏 예민해진 피부를 더듬다가 유두를 비트는 손짓에 으응, 하고 꼭 대답 같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협탁을 뒤져 젤과 콘돔을 꺼내든 의주는 어느새 제 옷까지 벗어 던지고 모든 준비를 마쳤다. 손 위로 젤을 죽 짜낼 때는 투명한 점액보다 의주의 눈이 더 투명하게 반짝거렸다.

의주의 손은 곧장 재광의 뒤로 향했다. 젤을 묻히지 않은 손으로 볼기를 잡고 주물럭대더니 불시에 회음 주변을 더듬었다. 젤로 축축해진 손이 구멍 주변을 꼼꼼하게 맴돌았다.

“아…! 간지, 러워요.”

처음 느끼는 감각에 긴장한 재광이 간지럽다며 허리를 비튼다. 의주는 대답 대신 제 입술을 물려주며 끈적하게 뒤를 만져대던 손가락을 안으로 쑥 밀어 넣었다. 맞물린 입술 새로 밭은 숨이 터졌다가 이내 먹혔다.

남자와의 관계는 처음인 재광이지만 생각보다 수월했다. 아마 술에 취해 긴장이 풀린 몸 덕분일 테다. 의주의 손이 피부를 맴돌 때마다, 난생처음인 이물감을 느낄 때마다 움찔움찔 힘이 들어가긴 해도 제법 유연하게 잘 받아들이고 있었다.

충분한 양의 젤도 제 역할을 톡톡히 했다. 미끈하게 안으로 밀려들어간 손가락이 젖을 리 없는 내벽을 적시며 조금씩 공간을 늘려나갔다. 가볍게 밀어 넣은 손가락은 점차 그 수를 더해가며 입구를 풀었다.

“하…. 아, 아아!”

빡빡하게 들러붙던 내벽이 제법 풀어지자 의주는 곧장 전립선을 찾아 건드렸다. 몸 안을 드나드는 생소한 감각에 기껏해야 끙끙 앓는 소리를 내던 재광이 이번엔 참을 생각도 못 하고 신음을 터뜨린다.

의주는 표정 없이 그 얼굴 내려다보며 손을 더 빠르게 움직였다. 팔에 힘줄이 선명해질수록 재광의 목이 뒤로 꺾였다. 의주는 별말 없이 재광의 고개를 받쳐 저를 보게 만들었다.

안을 자극할 때마다 일그러지는 눈매가, 쾌감을 견디지 못해 몇 번씩 깨물어 부푼 입술이. 저를 빼닮은 얼굴이 흐트러지는 모습이 너무도 자극적이었다. 기대보다 훨씬 더.

이렇게 되니 의주의 아랫도리 사정도 더는 평온할 수가 없었다. 손수 벗겨놓은 재광의 몸을 구석구석 더듬을 때부터 이미 발기해 있었지만 이제는 아래가 무거울 지경에 이르렀다. 축축한 소리를 내며 안을 오가던 손을 빼낸 그는 재광의 허벅지를 더 넓게 벌리며 제 몸을 맞췄다.

“하, 하아…. 읏, 아윽!”

이미 터질 듯 부푼 살덩이를 밀어 넣자 겨우 반쯤 들어갔는데도 재광이 턱 막힌 소리를 내뱉는다. 무리하지 않고 성기의 반쯤만 넣었다 빼길 반복하던 의주는 재광의 허리춤과 가슴팍, 그리고 팔뚝 따위를 길게 어루만지며 감각을 분산시켰다.

그리고 어느 정도 안정이 됐다고 느낀 순간.

“아아…!”

반쯤 걸쳐 있던 성기를 그대로 끝까지 박아 넣었다.

“으으, 잠깐, 아, 안 돼요. 하, 아아….”

재광의 판판한 가슴이 빠르게 오르내렸다. 제대로 된 움직임도 없이 그저 밀어 넣었을 뿐인데도 안을 가득 채운 부피감이 버거운지 밭은 숨을 내쉰다. 갈 곳을 잃은 손이 매트리스 위를 쉼 없이 더듬었다.

의주는 침대 위를 방황하는 손을 잡아다 입 맞췄다. 그런 뒤 제 어깨 위에 올려주고는 더욱더 부지런히 재광의 몸을 어루만졌다.

손대는 곳마다 착착 감겨드는 살의 감촉이 좋았다. 회식 자리에서 충동적으로 볼을 어루만졌을 때도 느꼈지만, 정말이지 손이 갈 수밖에 없는 피부다. 매끄럽고 부드럽고, 또 탄탄하다.

보기와 달리 꽤 민감한 편인지 조금만 힘주어 쥐었다 놓으면 금세 손자국이 남아 욕구를 더 불러일으켰다.

뺨에서 목을 타고 가슴으로, 또 허리로 이어진 의주의 손길은 이내 도드라진 장골로 향했다. 뼈를 감싼 살갗을 엄지로 가볍게 훑자 재광의 허벅지 안쪽에 바짝 힘이 들어간다.

의주는 곧 골반을 단단히 틀어쥐고 슬며시 몸을 뒤로 뺐다. 끝까지 처박혔던 중심부가 빠져나가자 재광의 입술 새로 흐으, 앓는 소리가 샌다.

분명 손가락이 편하게 드나들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풀었다고 생각했건만, 막상 성기가 들어가자 내벽이 빡빡하게 들러붙어 의주에게 가해지는 자극도 적지 않았다. 낮게 신음한 그는 입구에 귀두만 살짝 걸쳐놓고서 넣을 듯 뺄 듯 작은 움직임을 반복했다.

그것도 잠시였다. 매트리스 위에 팽개친 젤을 다시 집어 든 의주는 무심한 얼굴로 내용물을 더 짜내고는 무게를 실어 하체를 붙였다. 묵직하게 밀려들어간 살 기둥이 내벽 깊숙이 치닫자 재광이 상체를 비틀며 끙끙거렸다.

그래도 이전보다 훨씬 움직이기가 편했다. 들어가고 나오는 족족 표피에 달라붙는 내벽도 빡빡하기보다는 미끈하게 느껴졌다. 뒤를 들락날락하는 행위가 반복될수록 움직임이 부드러워진다.

“하아, 하…. 아아…!”

금방이라도 넘어갈 듯 숨을 몰아쉬던 재광도 제법 안정을 찾았다. 여전히 깊게 박아 넣을 때는 뒤를 콱콱 조이긴 하지만, 그 정도야 성감을 높이는 자극 정도로 받아들이기 충분했다.

의주는 재광의 반응을 살피며 느릿하게 움직이던 하체에 점점 더 속도를 붙였다.

점점 달아오르는 체온에 녹은 젤은 의주가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찰박거리는 효과음을 더했다. 누가 들으면 뒤로 젖기라도 한 줄 알 만큼 적나라한 소리다. 그에 민망해진 재광이 목을 비틀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허락할 수 없는 행동인 모양이었다. 한시도 놓치지 않고 얼굴을 들여다보던 의주가 곧장 그의 턱을 잡아 정면으로 돌려놓았다. 배 속을 들쑤실 때마다 꼭 감은 눈 아래로 정갈한 속눈썹이 파들파들 떨린다.

“재광아, 하….”

“응, 으응, 네.”

“눈 떠봐, 나 봐.”

말처럼 쉽지 않은 요구였다. 속절없이 흔들리는 몸을 타고 올라오는 감각이 몹시도 생소하고 짙었기 때문이다.

몸 안에서 찌르르 울리며 퍼지는 쾌감은 성기의 표피만을 자극하는 것보다 훨씬 컸다. 밑을 찌를 때마다 중심에서부터 퍼지는 감각이 짜릿하다 못해 온몸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이미 감은 눈앞에서는 불규칙한 섬광이 튀었다. 의주의 어깨 위로 둘렀던 팔은 어느새 시트 위로 널브러져 애꿎은 이불자락만 비틀어 쥐었고, 성감을 견디다 못해 곱은 발끝이 애처롭게 허공을 방황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의주의 말을 듣기 싫어서가 아니라 들어줄 수가 없었다. 오로지 쾌감에 점령당한 몸은 재광의 의지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의주가 몸을 붙여오면 힘없이 밀려났다가, 의주가 물러서면 제자리를 찾았다.

“응? 재광아, 나 봐봐.”

흥분한 건 저도 마찬가지면서. 의주는 재광의 마음을 조금도 모르는 양 굴었다. 눈 뜰 새 없이 느끼느라 바쁜 걸 알면서도 저를 봐달라고 보챈다.

강도를 더해가는 자극에 어찌할 바를 모르던 재광은 꽉 닫았던 눈꺼풀을 겨우겨우 한쪽씩 들어 올렸다.

그러는 중에도 의주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그 탓에 일그러진 눈매까지 가다듬을 겨를은 없었다. 흡사 괴로운 것처럼 좁혀든 미간이 좀처럼 펴질 줄을 모른다.

하지만 의주는 이 정도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지금 제 얼굴이 딱 저런 모습일까 생각하면 이미 터질 듯한 중심에 더 피가 몰리는 기분이었다. 간신히 보이는 눈동자와 마주한 순간부터는 재광의 안을 드나드는 행위에 더 가속이 붙었다.

“아, 아아, 흣! 아, 아!”

이 순간 의주는 본인이 재광의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게 싫지 않았다. 되도록 더 깊게, 끝의 끝까지 제 몸을 박아 넣고 싶은 욕구가 치민다.

그는 곧 재광의 다리를 들어 자신의 어깨 위로 올렸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침대 위에 붙어 있던 허리가 들린다. 더 단단하게 골반을 틀어쥔 의주는 위에서 아래로 내리꽂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찰박거리던 젖은 소리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한 마찰음이 공기 중을 울렸다. 허리가 들린 불안정한 자세로 한층 거센 자극을 받아들여야 하는 재광은 어찌할 바를 몰라 이불을 쥔 손에 힘만 꽉 줬다.

의주가 힘주어 하체를 치받을 때마다 온 장기가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그저 괴롭기만 하다면 밀어내기라도 할 텐데,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선명한 감각은 자꾸 야릇한 소리만 뱉게 했다.

“흐으, 응, 흑….”

점점 더 강해지는 자극에 끝내 재광의 눈가가 짓무르고 만다.

“아아, 재광아 제발.”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찡그리는 표정에 의주의 눈이 형형한 빛을 띠었다.

볼기 양옆이 쏙 패도록 힘주어 안을 들쑤시자 단단하게 부풀어 꺼떡대던 재광의 앞에서 프리컴이 줄줄 새기 시작했다. 지그시 아랫입술을 눌러 물던 의주는 곧장 손을 뻗어 뜨겁게 달아오른 기둥을 감쌌다.

“아…. 아아!”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이미 한계까지 치달은 재광의 것은 손길이 닿자마자 진한 정액을 터뜨렸다.

성기를 가볍게 잡고 흔들자 새어 나온 체액이 기둥을 타고 주르륵 흐른다. 남은 양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마다 안에서는 내벽이 움찔대며 뒤가 잔뜩 조여들었다.

“하아… 하.”

순간적으로 온몸을 긴장하며 체액을 쏟아낸 재광은 고개를 한껏 뒤로 꺾고서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절정으로 가는 얼굴을 똑똑히 감상한 의주가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낮게 읊조렸다.

“하… 씨발.”

재광의 턱을 쥐는 의주의 손아귀에 강한 힘이 실린다. 어디로도 피할 수 없게 재광의 얼굴을 정면으로 단단히 고정한 의주는 한층 빠르게 허리를 쳐올렸다. 먼저 파정한 재광은 반항 없이 붙들려 있었다.

“흐응, 읏! 빨리…. 빨, 리, 해요. 아! 아아!”

분명 사정 전까지만 해도 이보다 더한 쾌감은 없을 것만 같았는데. 막 정액을 배출하고 예민해진 몸에 빠르게 박아대자 금세 또 버거워진다. 이제는 정말로 괴롭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숨김없이 요구한 것도 그래서였다. 의주는 말 대신 몸으로 대답했다. 무서우리만치 굳은 얼굴을 하고서 똑똑히 시선을 마주하며 안을 헤집는다.

혹여 재광의 고개가 돌아갈까, 단단히 턱을 고정하고서였다. 검지를 입술 새로 집어넣자 재광이 본능처럼 손가락을 빨았다.

거의 동시였다. 재광이 입안에 들어온 손가락을 진득하게 빨자 배 속에서 의주의 것이 꿈틀대며 미묘한 온기가 느껴진다.

“아….”

재광이 멍하니 입을 벌리자 기다란 의주의 손가락이 번들대며 빠져나왔다. 의주는 차마 아래를 빼낼 생각도 못 하고 긴장이 풀린 그의 얼굴만 들여다봤다. 힘이 빠진 재광의 기다란 눈매 안으로 그와 꼭 닮은 의주의 모습이 비친다.

“재광아, 너 진짜….”

“….”

“사람 돌게 한다.”

어이가 없는 듯이, 혹은 얼이 빠진 듯이 하하 웃어버린 의주가 참을 수 없는 것처럼 곧장 다시 재광의 입술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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