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 1. Hello, World! (1/21)

일러두기

-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지명, 기업, 사건 등은 실제 현실과 관련 없는 허구입니다.

-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표준어문규범을 준용하지 않고 작성된 부분이 있습니다.

1. Hello, World!

― 현재 시각은 오전 7시 20분이며, 오늘은 섭씨 21도로 화창한 날이 될 것 같아요. 다음은 오늘의 뉴스입니다….

아담한 방 안에 상냥한 기계음이 울려 퍼진다. 세상모르고 자던 재광은 여전히 감은 눈으로 팔만 뻗어 머리맡을 더듬었다. 화면 한 번 바라보지 않고 습관처럼 버튼을 누르자 주요 뉴스를 읊던 인위적인 목소리가 뚝 끊겼다.

재광은 금방이라도 다시 잠들 듯한 얼굴이었다. 휴대전화를 들어 올린 손마저 도로 침대 위에 널브러뜨리고 고른 숨을 내쉬는 안색이 나른하다.

물론 잠시였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결심이라도 한 듯 번쩍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동작이 빨랐다. 방을 나선 걸음은 곧장 욕실로 이어졌다.

그런데 웬걸. 이미 욕실 안에서는 물줄기 쏟아지는 소리가 한창이다. 목을 비스듬히 꺾은 재광의 표정이 잔뜩 짜증스럽게 일그러졌다.

“아, 나 이 시간에 일어난다고 했잖아! 오늘부터 출근한다니까?”

치미는 감정을 가득 담아 높인 언성이 물소리를 가볍게 이긴 듯했다. 문 너머로 들려오는 대답이 빨랐다.

“어쩌라고. 그렇게 급하면 네가 먼저 일어났어야지.”

출근 시간까지 여유가 한참 남았으면서 굳이 이 시간에 씻는 저 인간은 재광의 형이다. 재광보다 세 살이 많은 그는 부모님이 장남이라고 어화둥둥 해줬더니 세상 모든 게 제 중심으로 돌아가는 줄 안다.

‘배려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새끼.’

속으로 빠득 이를 간 재광의 긴 눈매가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첫 출근임을 고려해 조금 더 일찍 일어났으나 누구 덕에 씻지도 못하고 있으니, 이대로는 지각을 못 면할 듯싶었다.

그래도 인턴이 첫 출근에 지각은 좀 아니지 않나. 내심 불안해진 재광은 택시라도 타면 가망이 있을까 속으로 셈하는 중이었다. 한동안 물줄기가 끊이지 않을 것 같던 욕실이 조용해지나 싶더니 벌컥 문이 열린다.

“코딱지만 한 스타트업 가면서 유세는.”

젖은 몸으로 허리춤에 수건 한 장 두르고 나온 남자는 가소롭다는 양 눈을 흘겼다. 마주한 얼굴은 재광의 이목구비와 상반된 모습이었다.

재광이 얇은 쌍꺼풀에 긴 눈매를 필두로 오목조목 단정하고 깔끔한 인상을 준다면, 그의 형은 정반대였다. 전체적으로 짙고 화려한 느낌. 외모만 봐서는 남남이라고 하는 게 더 말이 될 것 같았다.

“지각 안 하려는 건 유세가 아니라 당연한 거거든요.”

“예, 공채 줄탈락하고 간신히 스타트업 인턴으로 출근하는 김재광 씨의 대단한 의지에 큰 박수 드립니다.”

아침 댓바람부터 기를 쓰고 시비를 걸어대는 걸 보면 영락없는 친형제긴 하다만.

무시와 조소로 점철된 말에도 재광은 별말 없이 눈만 한 번 흘기고 말았다. 바톤 터치하듯 욕실 안으로 들어서 닫는 문도 얌전히 달칵 잠겼다.

형(‘새끼’는 묵음으로 처리한다)은 원래부터 그랬다. 장남이라고 떠받들어진 어린 시절부터 변함없이 저런 태도였다.

차라리 장남 감투만이 유일한 자랑거리였다면 쌍방으로 무시하고 말았을 테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형은 대학 졸업과 동시에 덜컥 대기업에 합격해 부모님께 꽃바구니를 안겨준 수재라. 상하반기 공채에 줄줄이 탈락한 재광은 더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 아직 서류 결과 다 나온 거 아니잖아. 좀 더 기다려보지 그래?

- 첫 직장에 스타트업은 힘들지 않겠어?

대학 동기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신생 기업 인턴 제안을 받아들인 것 역시 그 때문이었다.

원래도 자신을 하찮게 보던 형의 멸시를 더는 못 참겠다 싶었던 거다. 말이 좋아 취업 준비생이지, 실상 10개월가량 백수로 지낸 동생을 향한 눈빛에는 늘 한심함이 어렸다.

그뿐일까. 나름대로는 정보 얻고 자소서 쓰며 바쁜 생활을 했으나 겉보기에 집에서 논다는 이유로 온갖 집안일에 형 뒤치다꺼리까지 도맡아야 했다.

4년간의 기숙사 생활에 군대 2년까지. 장장 6년을 형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있던 재광은 간만에 맛보는 혈육의 부당함을 차마 더 견딜 수가 없었다.

늘 한심하다는 눈길을 보내는 형에게 저도 사람 구실 한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이왕이면 보란 듯이 자립도 하고 싶은데, 이 지옥에서 나가려면 돈도 필요했다.

그런 재광에게 정직원 전환이 가능한 스타트업 인턴 자리는 절호의 기회와도 같았다. 가능한 한 무조건 큰 데서 시작하라는 IT업계의 정설을 단숨에 거스를 만큼 절실한 마음이었다.

“야, 첫날이라고 멍청하게 있지 말고 망삘이다 싶으면 바로 발 빼. 하기야 둔해 빠져서 네가 그런 낌새를 알겠냐마는.”

그런 절실함을 알 리 없는 형은 나가는 순간까지도 망언이었다. 이왕 출근하는 거, 잘 다녀오란 인사면 족할 것을 꼭 안 해도 될 소리까지 덧붙인다.

그런 소릴 꼭 해야겠냐고. 따지고 싶은 맘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재광은 속으로만 쯧, 혀를 차고는 조용히 현관을 나섰다. 참고 넘어가는 게 가장 편하고 효율적인 방법임을 일찍이 깨달은 탓이다.

재수 없는 언사가 하루 이틀 일도 아니다 보니 대단히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냥 무표정한 얼굴로 지하철역을 향해 타박타박 걷는데, 문득 가방 안에서 진동이 울린다.

무심코 휴대전화를 꺼낸 재광은 헛웃음을 쳤다.

장남

쥐콩만 한 회사라고 거지 같이 입고 다니지 말고 옷 좀 사 입어.

300,000원을 받으세요.

받기

오전 8:11

형이다. 끝까지 말 한마디 곱게 하는 법은 없으면서 찔리긴 하는지 돈은 턱턱 쏜다. 정말 잔소리 값 계산만은 철저한 인간이라고. 그리 생각한 재광은 기다란 눈을 반쯤 내리깔고 화면을 응시했다.

묵묵히 받기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이 잽쌌다.

????

회사는 스타트업 기업들이 밀집한 오피스 단지에 있었다. 706호. 미리 전달받은 호실을 찾은 재광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봤다.

낭만인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지문 인식기 위에 걸린 현판이었다. 또박또박 각진 글자로 쓰인 사명이 아크릴판 안에 깔끔하게 들어 있다.

낭만인이라는 회사 이름은 생소하지만 재광도 전혀 모르는 곳은 아니었다. 데이트 코스를 짜주는 앱 ‘데이팅’의 개발사다.

앱 자체도 예약 서비스나 커플 캘린더를 제공하며 다방면으로 폭을 넓히는 중이었고, 유저들의 반응도 좋아 꽤 인지도가 있는 기업이었다.

‘누가 알아? 노란 메신저처럼 어마어마하게 커질지.’

망삘이니 뭐니. 아침에 형에게서 들은 말이 자꾸만 의식됐다. 재광은 애써 마음을 다독이며 심호흡을 했다.

건물 앞에서만 해도 담담한 기분이었건만 그래도 첫 출근이라고 긴장감을 완전히 떨칠 수가 없다. 호출벨을 누르는 손끝에 제법 힘이 실렸다.

“갑자기 또 무슨 바람이 불어서 벨을…. 어?”

굳게 닫힌 문이 열리는 속도는 빨랐으나 반응은 영 이상했다. 동그란 안경을 쓴 남자가 초면에 대뜸 짜증스러운 소리를 내더니 별안간 벙찐 얼굴을 하고 눈만 끔뻑이는 것이다.

재광은 멀뚱히 상대방을 보다 말고 결국 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저, 오늘부터 인턴으로 출근하기로 한….”

“아! 아아! 아, 네. 아, 알아요. 들어, 들어오세요.”

여전히 어디 하나 고장 난 것처럼 대꾸한 남자가 버벅거리는 동작으로 비켜섰다. 덩달아 얼떨떨한 기분이 된 재광은 주춤주춤 안으로 발을 들였다.

내부는 깔끔했다. 스타트업이라고 해서 유별나게 자유롭고 개성 넘치는 분위기는 아니고, 다닥다닥 붙은 책상과 매쉬 소재의 의자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평범한 사무실이었다.

재광을 자리로 데려다준 남자는 이제야 정신을 좀 차렸는지 한결 자연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세팅은 다 해놨다고 하던데, 팀이 다르다 보니까 저는 잘 몰라서요. 이따 개발 팀장님 오시면 아마 설명해주실 거예요.”

“네, 고맙습니다.”

재광은 예의상의 인사를 전할 뿐이었다.

이로써 처음 만나는 사이에 감도는 미묘한 어색함도 자연스럽게 마무리될 줄 알았다. 그런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려던 남자가 휙 몸을 돌리더니 또다시 말을 꺼낸다.

“저기, 근데….”

“네?”

“아, 아니에요. 오늘따라 다들 출근이 좀 늦네요. 그래도 좀 있으면 다 올 거예요. 편하게 계세요.”

하하. 글자 그대로 읽는 듯한 딱딱한 웃음이 말끝을 장식한다. 영 미심쩍은 태도였으나 초면에 따져 묻기도 뭐했다. 재광은 매끈한 눈매 안으로 눈동자만 휘릭 굴렸다.

“좋은 아침입니다!”

잔뜩 어색하게 굴던 남자의 말대로 조금의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이 한둘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아, 오늘 새로 온다던…. 어?”

그리고 새로 발을 들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재광을 보고 의아한 내색을 했다. 그나마 “어?” 하고 마는 정도면 양반이고, 누군가는 맛조개처럼 파티션 위로 고개를 길게 빼더니 “와, 대박” 하며 다시 수그러들기도 했다.

그런 반응이 몇 번씩 반복되자 무던히 자리를 지키던 재광도 점차 기분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학교 소개로 따낸 인턴 자리라지만 이렇게까지 구경거리 취급을 당할 필요가 있나 싶은 것이다.

‘텃세를 이런 식으로 부리는 거야 뭐야.’

아무리 지랄맞은 형에게 단련된 재광이래도 이런 식의 대우는 마냥 참고만 있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한 번만 더 그러면 대체 뭐 때문에 그러는지 물어나 봐야겠다 벼르던 중이었다.

“김재광 씨, 맞죠?”

기막힌 타이밍에 누가 다가와 말을 건다. 재광은 여전히 무덤덤한 표정으로 제 앞에 선 사람을 쳐다봤다.

“안녕하세요. 낭만인 대표 민선호입니다. 오늘부터 인턴으로 출근하신다고 얘기 들었어요.”

앉은 자세로 고개만 멀뚱히 들고 있던 재광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간단히 악수를 나눈 대표는 조금 뒤 손을 놨다.

“여 팀장은 아직이에요?”

직원들이 있는 쪽을 향해 묻자 어디에선가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대표는 슬며시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하곤 짧게 쯧, 혀를 찼다. 그러나 곧 표정을 달리하며 재광을 봤다.

“이력서로 보기는 했지만 실제로 보니까 훨씬….”

직속 상사가 여태 감감무소식이라 대충 시간이나 때워줄 모양이었다. 그러나 말을 끝맺기도 전에 맥이 뚝 끊기고 만다.

“CTO 출근 완료. 다들 좋은 아침입니다.”

조용한 사무실에 누군가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며 들어온 탓이다. 재광은 예사롭지 않은 멘트를 치며 등장한 사람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아….”

도톰한 입술 새로 작은 탄식이 흘러나온다.

대단한 구경거리라도 되는 양 자신을 보고 가던 시선들이 무슨 의미였는지, 방금 대표가 제게 하려던 말은 뭐였는지. 존재만으로도 그 모든 걸 설명해주는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CTO[1]출근 완료―를 외치며 위풍당당하게 들어온 남자는 재광과 꼭 닮은 얼굴이었다.

엷게 쌍꺼풀이 진 기다란 눈매, 코끝의 각이 선명한 코, 입술산이 뚜렷하고 도톰한 입술까지. 닮은 수준이 아니라 똑같이 생겼다. 당장 아침에 본 혈육보다 더 혈육 같을 만큼.

하릴없이 아랫입술을 깨문 재광은 속으로 읊조렸다.

‘여의주다.’

여의주. 소름 돋을 만큼 닮은 얼굴을 한 남자의 정체를, 재광은 이미 알고 있었다.

재광과 의주의 인연(혹은 악연)을 설명하려면 재광이 스무 살 때. 그러니까 대학에 막 입학할 무렵으로 거슬러 가야 한다.

수능에서 평소 모의고사 성적보다 훨씬 좋은 등급을 받은 재광이 기대 이상으로 좋은 학교에 입학해 한참 들떠 있을 즈음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참석한 새내기 배움터에서 선배 하나가 그런 말을 했다.

- 우리 과에 너랑 똑같이 생긴 오빠 있어.

그때까지만 해도 재광은 본인이 흔한 얼굴이겠거니 하고 넘겼지만 막상 개강을 하고 보니 장난이 아니었다.

- 야, 여의주 닮았다는 애가 누구냐?

- 헐. 의주랑 똑같이 생겼다더니 진짜네.

- 너희 가족 중에 여 씨 없어? 핏줄 아니야?

그사이 소문이 쫙 퍼졌는지, 신입생 환영회에서는 선배들이 너도나도 재광을 찾아댔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너구나!” 하며 아는 척하는 건 예사, 굳이 재광이 앉은 자리에 찾아와 다른 테이블로 끌고 가기도 부지기수였다.

덕분에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술을 들이붓고 길바닥에서 잠든 일은 아직도 재광에게 지울 수 없는 흑역사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정작 두 사람은 학교에서 마주친 적이 없었다. 재광이 입학할 당시에는 의주가 휴학 중이었고, 의주가 복학했을 때는 재광이 군 생활 중이었다.

재광이 군복무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온 건 의주가 졸업한 뒤였다. 그의 공백기 동안 의주와 함께 학교생활을 한 동기와 후배들은 재광을 보고 의주 형(또는 오빠)과 꼭 닮았다며 여전히 신기하다는 시선을 보냈다.

그렇듯 대학 생활 4년을 꼬박 의주의 존재에 시달린 재광은 그를 향한 감정이 고울 수가 없었다.

물론, 의주에게 확실한 반감을 갖게 된 이유는 따로 있었지만.

스무 살. 남중 남고를 다니며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는 데만 관심이 있던 재광은 대학에 입학한 뒤 처음으로 여자친구를 사귀었다.

같은 과 4학년 선배였다. 엠티 때 친해진 걸 계기로 연락을 주고받다가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 씨씨는 여러모로 번거롭다는 이유로 비밀 연애를 했지만 딱히 그게 불만스러운 적은 없었다.

조용하던 연애에 파동이 생긴 것은 사귄 지 100일을 갓 넘기고 상대방의 친구들을 만났을 때였다. 어쩐지 다들 어색하게 인사를 하기에 첫 만남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말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 얘 여의준가 뭔가 그렇게 따라다니더니 결국엔 똑같이 생긴 애랑 사귀는 거 봐.

- 그니까. 나 얼굴 보자마자 닭살 돋았잖아. 저 얼굴이 그렇게 좋아? 야 너 이거 집착이야 집착.

- 야 그래도 꿩 대신 닭인데 그게 영계면 좋은 거 아니야?

- 영계가 좋긴 한데, 그래도 여의주가 키도 크고 남자 냄새가 더 나긴 하지.

재광이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잠시 자리를 비운 참이었다. 금방 볼일만 보고 자리로 돌아가는데 대화 소리가 제법 멀리까지 들렸더랬다.

의주와 동기인 여자친구는 자신의 취향을 그런 식으로 매도하지 말라며 선을 그었으나 이미 늦은 타이밍이었다. 익숙하게 흘러나오는 여의주 이름 석 자와 그 뒤로 이어지는 반응들은 재광의 가슴에 큰 스크래치를 냈다.

차마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었다는 티는 못 냈다. 오히려 아무 일 없었단 듯 평소처럼 굴었다. 하지만 담담한 외면과 달리 속에서는 틈만 나면 여의주의 그림자가 망령처럼 재광을 덮쳤다. 첫 이별을 경험할 때까지 쭉.

“여 팀장님 지각이 너무 본격적이시네요?”

조금 전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던 대표는 당당하게 등장한 의주의 기세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도 그럴 게 벌써 출근 시간이 30분가량 지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대놓고 지적을 당한 의주는 조금도 기가 눌린 기색이 없었다.

“주인공은 원래 늦게 등장하는 법이죠.”

어이없는 대꾸에 재광이 되레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눈동자를 굴렸다.

방황하던 눈동자가 정착한 곳은 멀찍이 보이는 파티션 너머였다. 아침에 문을 열어준 남자가 머리를 빠끔히 내밀고서 대표와 의주를 작게 손짓한다. 큼직하게 벌린 입 모양이 ‘친구, 친구’ 했다.

아마 두 사람이 친구 사이라는 뜻일 테다. 익숙지 못한 분위기에 지레 긴장했던 재광은 알아들었다는 사인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는 사이 의주가 말을 이어나갔다.

“근데 저는 그래도 되죠, 대표님. 왜? 나는 여기 CTO니까. 낭만인 유일의 개발자로서 퇴근 시간 없이 일하고, 오는 길에도 짬짬이 노트북으로 이슈 확인은 다 했으니 이 정도면 지각이라고 하기도 좀 그렇지 않나요?”

자신에게는 특별 대우를 해줘야 한다고 당당하게 요구하는 말이 빨랐다. 이러는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닌지, 대표는 알아서 스킵해 듣고는 짧은 대꾸만 했다.

“이제 유일 아니에요.”

단호한 말투에 의주가 일순 의문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러더니 곧 “아아” 하며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굴었다. 그는 그제야 대표의 곁에 서 있던 재광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호기롭게 등장한 의주가 재광을 발견한 뒤 입을 다물자 온 사무실이 조용했다. 기이한 정적이었다. 재광은 괜히 뭘 잘못한 사람처럼 눈동자만 도륵도륵 굴렸다.

학교에서 먼저 인턴 제안으로 연락을 줬으니 같은 과 선배가 재직 중인 것쯤이야 특별할 게 없지만, 하필 그게 의주일 줄이야. 상상해본 적 없는 상황이라 적잖이 당황스러운 기분이었다.

의주는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이쪽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런 표정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왠지 모르게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되는 묘한 기운이 있다. 재광은 뻣뻣하게 서 있다 말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인턴으로 일하게 된 김재광입니다.”

개인적으로 감정이 썩 좋지 못한 상대지만, 어디까지나 당사자를 실제로 겪어본 적 없이 막연하게 지닌 반감이었다.

더군다나 이제부터는 의주가 제 상사지 않던가. 싫어해 봐야 좋을 게 하등 없었다. 그래서 먼저 의젓하게 인사를 건넸는데….

“….”

의주는 여전히 말이 없다. 끈질기게 속내 모를 표정으로 쳐다만 보고 있을 뿐이다.

재광으로서도 전혀 이해 못 할 반응은 아니었다. 저만큼이나 의주도 재광의 이름을 숱하게 들었을 테니까. 학교에 있을 때는 코빼기도 보질 못하다가 대뜸 회사에서 만났으니 얼떨떨한 게 당연했다.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조용할 일이냐고. 사람 민망하게.’

재광은 속으로 구시렁거리면서도 겉으로는 태연하게 의주의 눈을 마주했다. 소문으로만 들을 때는 그래 봐야 닮은 꼴 연예인들 수준일 줄 알았는데. 직접 보니 소름 돋게 닮긴 했다. 같은 피가 흐르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의주의 고집스러운 침묵 앞에서 재광의 사고만 바쁘게 굴러갔다. 그리고 가만 보면 눈매는 저쪽이 더 날카로운 것 같다고, 그런 생각을 할 즈음이 되어서야 의주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근데 혹시….”

느릿하게 말을 꺼내는 표정이 진지하다. 조금 더 날카로운 인상인 것치고는 제법 감미로운 목소리였다.

“미칠 광(狂) 쓰는 건 아니죠?”

덩달아 진지한 눈길로 그를 마주하던 재광이 도톰한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기다란 눈매의 윗부분이 판판한 직선을 그렸다.

‘뭐라는 거야, 용 구슬이.’

하마터면 기가 차서 웃을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초등학교 시절, 미칠 광(狂)이라는 한자의 존재를 처음 안 친구들이 놀려댄 이후 이런 소릴 듣긴 처음이었으니까.

‘그렇게 신중한 표정으로 이딴 말을 한다고?’

상사를 싫어해 봐야 뭐 하겠냐, 하고 심보를 고쳐먹던 재광의 속에서 의주를 향한 호감도가 마이너스로 급락했다.

“아닌데요.”

저도 모르게 불퉁한 대꾸가 튀어 나간다.

순간 아차 싶기는 했다. 생 초짜 인턴이 팀장과의 첫 대면부터 너무 건방지게 군 건 아닌지 신경이 쓰인 거다.

“아니구나.”

다행히 의주는 아무 생각도 없어 보였다. 반말인지 혼잣말인지 모를 소리로 맹하게 중얼거리고는 곧바로 제 자리를 찾아 들어간다.

곁을 무심하게 지나칠 때 보니 의주가 재광보다 10cm는 더 큰 듯했다. 널찍하게 벌어진 어깨라든가, 제법 두툼한 흉곽이 건장 그 자체다. 자연스럽게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재광은 그마저도 못마땅해 작게 혀만 쯧, 찼다.

- 여의주가 키도 더 크고 남자 냄새가 더 나긴 하지.

몇 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그 말이 또다시 머리를 맴돌았다.

????

“재광 씨, 회의실에서 좀 보죠.”

어수선하던 분위기가 갓 정돈된 참이었다. 의주가 나직한 소리로 말문을 텄다. 다들 업무를 시작해 사무실이 조용한 탓인지 목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아, 네!”

재광이 눈치껏 노트와 필기구를 들고 일어설 때, 의주는 이미 그를 지나치고 있었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걷자 등 뒤로 급한 걸음이 따라붙는다. 아직 사무실 구조에 익숙하지 않은 재광이 쪼르르 따라오는 게 뻔해, 의주는 굳이 돌아보지 않았다.

의주가 향한 곳에는 불투명 시트지 처리가 된 문이 세 개쯤 줄지어 있었다. 모두 회의실이기는 하지만 개중 한 곳만 번드르르한 모습이었고, 나머지는 소규모 미팅에 필요한 최소한의 시설만 갖추고 있었다.

의주는 그중 가장 크고 좋은 회의실 문을 열었다. 입구에서 상석으로 옮기는 걸음걸이에 익숙함을 뛰어넘은 의기양양함이 묻어났다. 단순히 큰 키와 건장한 체격 때문이 아닌, 사람 자체가 지닌 아우라였다.

여의주는 원래 그랬다. 제가 쓰는 모든 것은 무조건 가장 좋고 크고 화려한 것이어야만 했고, 최상급으로 준비된 것들을 이용하는 게 당연한 인간이었다.

아마 천성일 것이다. 의주가 손이 귀한 집에 무매독남 3대 독자로 태어나 온 가족의 기대와 사랑을 받으며 자란 건 사실이지만, 제게 쏟아지는 관심을 버거워하기는커녕 늘 만족스러워했으니 이 정도면 타고났다고밖엔 설명이 안 됐다.

차라리 집안에서만 떠받들어주는 귀한 아들이었으면 그의 오만이 일상이 되지는 않았을 테다. 하지만 의주는 비상한 머리를 타고나 1등을 밥 먹듯이 했고, 훌쩍 큰 키와 체격에 걸맞게 운동 신경도 좋았다.

지(智)와 체(體)를 완벽히 겸비하고 있으니 덕(德)쯤이야 조금 유별나대도 문제 될 게 없었다. 의주는 언제나 자신이 손대는 모든 분야에서 승승장구했다. 소위 말하는 또라이 기질도 천재라면 조금씩 지니고 있는 괴짜 같은 면으로 포장됐다.

능력과 운. 모든 게 따라주니 제 입맛대로 재밌는 것만 골라 하며 살아도 뭐라 할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 너는 그냥 거울 보고 너랑 사귀어. 이럴 거면 나랑 왜 만나니?

아. 취소. 연애는 예외였다.

그마저도 의주는 자신의 그릇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대방의 문제라 생각했기에 엄청난 상처를 받거나 대단한 실패의 기록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연애가 끝나면 그를 대체할 만한 흥밋거리를 잽싸게 찾아 나섰다.

반면 재광은 어떻던가. 평범한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어딜 가든 중심에 서기보단 들러리 역할에 익숙한 인물이었다. 너무 화려하고 좋은 것들은 그에게 오히려 부담이었다.

이번에도 그랬다. 둘이서 이용하기에 딱인 소규모 회의실을 제치고 굳이 가장 큰 곳을 차지하는 의주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탓에 회의실에 따라 들어서는 걸음마저 주춤거렸다.

재광은 회의용 테이블 앞에 다다라 잠시 고민하는 내색을 했다. 그는 이내 의주에게서 한 칸 공백을 두고 의자에 몸을 붙였다.

“….”

그런데 어쩐 일인지 의주는 아무런 말이 없다. 덕분에 재광만 불편해 죽을 지경이다. 불러놓고 말이 없는 것만으로도 가시방석 같은데,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눈길은 줄곧 진하게 이쪽을 향하고 있어 더 난감했다.

피하자니 피할 이유가 없고, 계속 마주 보자니 저와 똑 닮은 얼굴을 감상하는 게 곤혹스럽다. 그 탓에 재광은 어설프게 눈동자만 굴렸다. 조금의 공백 뒤, 의주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우와.”

“….”

“진짜 올 줄은 몰랐네.”

또, 또. 혼잣말도 반말도 아닌 애매한 말투에 재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개인적인 감정이 좋지는 못하지만, 당장 오늘 하루 출근하고 그만둔다 해도 지금 이 순간 의주가 상사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니 성의껏 대화에 응할 마음가짐 정도는 되어 있었다.

그런데 잔뜩 뜸 들여놓고 하는 말이 진짜 올 줄 몰랐다는 거라니. 의중을 알 수 없는 건 물론이요, 이제는 제가 인턴으로 출근한 이 상황까지 파악이 잘 안 됐다. 솔직한 맘으로는 비꼬는 것처럼 들리기도 해서 기분도 퍽 상했다.

하지만 재광이 누구던가. 바르게 달린 입술로 삐뚠 소리만 지껄이는 형 밑에서도 엇나가지 않고 바르게 자란 대한의 차남이다.

상대방의 의도가 뭐든 간에 예의를 지킬 만한 사회성은 있다 이 말이다. 불퉁하게 튀어 나간 일전의 “아닌데요” 발언은 어디까지나 실수였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재광은 말끝을 흐리며 넌지시 물었다. 재광에 비해 날카로운 의주의 눈매가 끔뻑 감겼다 뜨인다.

“아아, 인턴 하나 꽂아달라고 윤 교수한테 전화했다가….”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빠르게 대꾸하던 의주의 목소리가 별안간 끊긴다. 그는 의미 없이 목덜미를 긁적거리다가 말을 계속했다. 이런 것까지 설명해야 한다니,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초면이긴 한데, 그래도 선후배 사이니까 이 정도는 편하게 얘기할게요. 대놓고 윤 교수라고 부르는 건 아니니까 쪼르르 가서 이르지 말고.”

“…네.”

“아무튼 뭐, 윤 교수랑 나랑 각별한 사인 건 알죠?”

이번에도 대답은 순순했다.

“아, 네.”

재광이 알기로, 두 사람 사이가 각별하다 한들 혈연이나 지연 같은 끈끈한 정으로 얽힌 관계는 아니었다. 다만 지도교수와 학생 사이에서 유별난 에피소드가 있었을 뿐.

전설이라기엔 따끈따끈하고, 그냥 지나치기엔 헉 소리 나는 일화였다. 재광이 복학하자마자 전해 들은 소식이었으니 몇 년 안 된 일이다.

졸업 전 마지막 성적을 받은 의주는 윤 교수 과목에 이의 신청을 했었다. 그러나 윤 교수는 이의를 받아들이는 대신 “직접 서버를 해킹해 점수를 정정한다면 인정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결과는? 당연히 성공. 의주는 가뿐하게 A+를 따냈다.

대학 서버 유리라는 비난이야 많지만, 의주와 재광의 모교는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이미 10여 년 전에 불법 해킹으로 성적 날조 사건에 휘말린 적이 있는 터라 보안 강화에는 누구보다 열심이었다.

특히 두 사람이 졸업한 정보보안학과를 유망 학과로 밀어주는 실정이라, 교내 보안에 들이는 예산만도 적지 않기로 유명했다.

즉, 일개 학생이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과제는 아니었다는 뜻이다. 직접 수정하랬다고 진짜로 시도하는 배포를 갖는 것 역시 쉽지 않고.

그러니 그 일화가 입에서 입을 타고 전해지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아마 올해 신입생들도 입학하자마자 신화처럼 의주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터였다. 그 사실은 재광도 인정하는 바지만….

자신의 일화를 알고 있다는 재광의 반응에 몹시도 흡족해하는 의주의 낯짝을 보니 이제라도 괜히 모르는 척하고 싶어진다.

의주는 턱을 오만하게 치켜들고서 씨익 웃었다. 그리고는 여유 가득한 동작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치. 모를 리가 없지. 그만한 일은 학과 역사상 처음이었으니까.”

재광이라면 누군가 먼저 자신의 업적을 언급했을 때 운이 좋았다며 겸손을 피울 것 같은데. 의주에게서는 겸손의 기역자도 보이지 않았다. 턱하니 쳐든 면상 위로 뻗은 콧대가 천장까지 치솟을 모양새다.

재광은 상대방이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작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감히 예상하건대 저 인간,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성향을 지닌 게 틀림없었다.

“아무튼 뭐, 그런 사이니까….”

잠시 뒤, 한껏 올라가 있던 의주의 어깨가 제자리를 찾았다. 우쭐한 과거 행적에 푹 빠져 있더니만 본론을 잊지는 않은 듯했다. 화제를 원래대로 돌려놓는 목소리가 시원시원하다.

“이 정도는 부탁해도 되겠다 싶어서 윤 교수한테 전화했더니 특별히 봐놓은 후배라도 있냐고 하더라고요.”

재광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 호응했다. 표정에는 왜인지 모르게 석연치 못한 기운이 남아 있었다.

점 찍어둔 후배가 있느냐는 윤 교수의 물음은 그러려니 할 수 있었다. 개발이라는 게 아무래도 보안이 중요한 일이라 따로 공고를 내지 않고 알음알음 인재를 데려가는 일이 왕왕 있는 탓이다. 졸업 전 재광의 동기들도 어느 선배가 연락을 해왔더라며 고민하기도 했었다.

다만 재광은 그 질문에 어쩌다 자신의 이름이 나왔는지가 궁금했다. 의주가 제 존재를 알고 있었다 쳐도 함께 일을 해보고 싶단 생각이 들 만큼의 교류는 없었으니까.

교류만 없었을까. 학교에서는 머리칼 한 올 본 적도 없는 관계다. 그런 사이에 회사로 불러들일 이유가 뭐였는지. 재광으로서는 좀처럼 가늠이 안 됐다.

“딱히 생각나는 애들도 없고 해서 나 닮았다던 애는 요즘 뭐 하냐 그랬지. 윤 교수가 알아보겠다 그러고 별 연락 없더니 결국 이렇게 됐네요?”

새털같이 가벼운 어조로 얘기한 의주는 양손을 어깨 옆으로 활짝 벌리고 으쓱거렸다. 그러니까, 실없이 던진 말 한마디에 이 상황이 벌어졌다는 거다.

하기야 인턴 하나 들이는 데 뭐 대단한 꿍꿍이라도 있었겠냐마는. 취업이 절실했던 재광에게는 단순 해프닝에 불과한 이 이야기가 다소 허무하게 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 제가 온다는 거 알고 계셨던 거네요.”

어쩐지 판박이 같은 얼굴을 보고도 놀란 기색 하나 없이 대뜸 뻘소리부터 하더라니. 예상한 일이었기에 그런 반응도 가능했던 듯싶었다.

재광이 덤덤히 내던진 말에 의주는 경쾌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당연하죠. 이력서, 직접 보냈잖아요?”

“아….”

재광은 박 터지는 소리만 냈다. 방금 자신이 한 얘기가 얼마나 바보 같았는지 깨달은 것이다.

저야 꼴도 보기 싫은 형 때문에 취업이 급급해 어떤 선배가 다니는 회산지 물을 겨를도 없었다지만, 회사에서 기본 정보도 모르는 인턴을 덜컥 받아들일 리는 없었다. 그러니 형식적이나마 이력서도 받은 걸 테고.

재광이 잠시 망각한 이력서는 의주의 손에 들려 있었다. 꼬리가 뾰족한 눈매 안으로 눈동자가 부지런히 굴러다닌다. 읽는 속도가 고스란히 들여다보일 만큼 선명한 움직임이었다.

신상 란을 보고 있는지 혼잣말로 “가까운 데 사네” 중얼거리던 의주는 이내 발딱 고개를 들었다.

“2남 중 차남?”

“네. 형 있습니다.”

조금 전까지 이력서를 훑느라 바쁘던 눈길이 재광에게 꼿꼿이 꽂힌다. 유난스러울 만치 재광의 얼굴을 뜯어보더니 한다는 소리가,

“재광 씨는 형이랑 나랑 둘 중에 누구랑 더 닮았어요?”

란다. 여태 얼굴 가지고는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기에 신경 안 쓰나 했더니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갑작스럽게 면접 분위기라도 되는 줄 알고 지레 긴장했던 재광은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 되어 답했다.

“형이랑은 안 닮았어요.”

“오. 신기하네.”

리듬감 있게 고개를 끄덕인 의주가 다시금 이력서로 시선을 박았다.

딱히 할 일이 없는 재광은 서류를 향해 수그러든 의주의 정수리만 쳐다봤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퍼뜩 의주의 눈길이 돌아온다.

“이력서 보는 데 시간이 좀 걸리죠? 솔직히 대표 준다고 프린트할 때 대충 본 게 다거든요. 내가 읽기는 처음이라.”

이번에야말로 재광의 낯에 의구심이 떠올랐다. 도대체 뭘 보고 저를 인턴으로 받아들였는지 알 수 없어서다.

너무 바빠 면접도 생략한다기에 자기소개서가 퍽 마음에 들었나 했다. 그런데 이력서를 지금에야 제대로 보고 있다면 그것도 말이 안 되는 가정이었다. 진짜 이름, 나이, 출신 학교만 보고 채용한 셈이지 않나.

‘아무리 학연으로 따낸 자리래도 그렇지. 이게 가능하다고?’

아침부터 망삘이니 뭐니 나불거리던 형의 말이 불현듯 머리를 스친다. 의문을 품은 재광의 눈두덩이 얕게 일그러졌다.

“…뭐 하나만 여쭤 봐도 돼요?”

“음?”

“면접도 안 보셨고, 이력서도 지금 처음 보시는 거면은요. 저를 왜… 출근시킨 거예요?”

일손이 필요해 먼저 학과에 도움을 청했다고 한들 성에 안 차는 사람까지 억지로 채용해야 하는 건 아닐 터였다. 그런데 이 상황은 성에 차고 말고를 살피지도 않은 격이라 재광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둘 사이에는 어떠한 교류도 없었지 않던가. 근데 뭘 믿고?

잔뜩 혼란스러워하는 낯을 코앞에 둔 의주는 태연했다. 오히려 반듯하게 편 손날을 턱 아래 척 가져다 대며 단호하게 답한다.

“이런 얼굴을 가진 사람이 일을 못 할 리는 없으니까?”

그러더니 순식간에 엥? 하는 표정이 된 재광을 보고 실없이 웃었다.

“반은 농담이에요.”

재광은 반씩이나 진담이라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 어떻게 대꾸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벙긋거리는 사이, 의주가 알아서 말을 이어나간다.

“이력서고 면접이고 일일이 뜯어 봐서 뭐하겠어요.”

“예?”

“어차피 경력 없는 거 빤히 알고 데려오는 거잖아. 바쁜 시간 쪼개서 이거저거 캐물으면 인턴한테 없던 실력이 하루아침에 막 생기고 그러나?”

의주는 진심으로 질문의 의도를 이해 못 하는 기색이었다. 차라리 학교에서도 괜찮은 인재라 군말 없이 보내준 거 아니겠냐며 너스레를 떨었다면. 그랬다면 재광도 어색하게 웃어넘기기나 할 텐데, 이 솔직함 앞에서는 차마 할 말이 없었다.

의주는 멍청히 눈만 끔뻑거리는 재광을 보며 조금 더 단단한 투로 자신의 견해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어느 회사에서 신입 뽑는데 엄청난 실력자를 기대해요. 이거저거 많이 해봤다고 이력서 몇 줄 써놔도 실무 들어가면 다 백지일 거 뻔한데.”

“….”

“아. 물론 나 같은 사람은 초반부터 월등히 잘하긴 하지. 근데 이건 진짜 드문 케이스고, 보통은 누굴 데려와도 가르쳐서 키워야 하는 건 마찬가지니까 애먼 데 시간 쓰기는 아깝다는 게 내 입장.”

미리 준비한 얘기 같진 않건만 말이 이어지는 속도가 빨랐다. 일순 머리가 멍해진 재광은 이 와중에도 지 자랑이구나― 정도의 감상으로 이어지는 얘기를 들었다.

“뭐, 가르치려면 말귀라도 잘 알아먹는 애 정도는 골라내는 게 맞긴 해. 근데 그걸 서류 쪼가리 보고 아나? 성적 난다 긴다 하는 놈들 중에 일머리 없는 놈 얼마나 많게?”

“….”

“면접 봐도 똑같애. 이미 번드르르하게 준비해온 말만 듣고 어떻게 판단해? 어차피 괜찮은 신입 뽑는 건 다 운이야. 그러니까 적어도 뭘 배웠는지 확실히 아는 학교 사람 쓰는 게 낫겠다 싶었던 거지.”

“….”

“얼마나 큰일 시킨다고 생 신입 뽑는 데 심혈을 기울이겠어. 그럴 시간에 내 할 일 하기도 바쁜데.”

이렇다 할 반응 없이도 의주는 혼자 신명나게 떠들어댔다. 아마 이 자리에서 재광이 꾸벅꾸벅 졸고 있어도 알아차리지 못할 듯한 기세였다. 그만큼 자신의 이야기에 심취해 있던 그는 별안간 매끈한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자기주장을 강하게 내세울 때와는 확연히 다른 안색이었다. 도톰한 입술을 헙, 하고 감쳐문 의주가 미간을 좁히며 짐짓 심각한 눈빛을 했다.

“스타트업이니까 엄청 중요한 업무 맡을 줄 알고 온 건 아니죠?”

여태 몇 달은 본 상사처럼 자연스럽게 반말을 지껄이더니만 퍼뜩 정신이 들었는지 존댓말로 묻는다. 길어지는 이야기에 반쯤 동태 눈깔을 하고 있던 재광은 버벅거리며 도리질을 쳤다.

“아뇨. 말씀하셨다시피 인턴이라 작은 일부터 차근차근 배운다는….”

솔직한 말로는 내로라하는 기업들 줄줄이 탈락하고 조급한 마음에 도망치듯 온 게 맞지만. 이만하면 잘 둘러댔다는 게 재광의 속내였다. 비록 문장을 깔끔하게 맺지는 못했을지라도.

“그치. 배움의 자세가 되어 있으면 그걸로 됐다 이거예요. 어차피 중요하고 어려운 일? 그런 건 다 내가 하거든. 왜? 나는 여기 CTO니까.”

그래도 일장 연설 초반에는 청자로서 마땅한 리액션을 해줘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들었던 듯도 한데. 지금 재광은 그런 생각도 접고서 느릿하게 눈이나 감았다 뜨는 게 전부였다. 스스로에게 도취된 의주에게는 자신의 추임새마저 방해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또 어중이떠중이 풀스택[2]들이랑은 다르거든요. 우리 앱 써봤어요?”

“아, 예. 잠깐.”

“써봤으면 알겠네. 그렇게 유저 불만 적은 앱 찾기도 힘들어요. 기능이 적지가 않은데 사용법은 또 얼마나 간단해. 기회 돼서 해보면 알겠지만, 이런 구성이 쉬운 일이 아니라니까요.”

“아….”

“나중에 나랑 작업해보면 알 텐데, 내가 또 코드 짜는 게 기가 막히게 깔끔하거든요. 어떻게 채용됐든 간에 여러모로 배울 건 많을 테니까 안심해요.”

말의 속도가 느려지는 것으로 보아 이제는 의주의 자기 자랑도 끝나지 않을까 싶었다. 내심 기대를 품은 재광은 네, 하고 대충 대꾸하고 말 생각이었으나 단 한 글자를 입 밖으로 내기도 전에 기대가 와장창 무너진다.

“괜히 의욕만 앞서서 잘하려고 하다 꼭 사고 치니까 굳이…. 아, 아니다. 사고 뭐, 쳐요. 그맘때 치는 사고야 어지간한 건 내 선에서 간단히 정리될 테니까 걱정할 것도 없겠네. 그냥 편하게 다녀요.”

고개를 가볍게 까딱거리는 동작에서 거만한 기운이 물씬 풍겼다. 재광은 괜히 혀를 빼꼼 내밀어 마른 입술을 축였다.

참으로 희한했다. 상사가 저만 믿고 편하게 일하라는데, 그게 전혀 든든하지 않고 재수가 없다.

애초에 경력이라곤 없는 인턴 사원을 안심시키는 의도라기보다는 위대한 여의주의 능력을 과시하고자 이쪽의 무경력을 이용한 낌새라 그런 감정이 드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심지어 재광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언사를 똑같이 생긴 얼굴로 쉬지 않고 떠들어대니 적지 않은 위화감까지 들어 더 복잡한 기분이었다.

그뿐이 아니다. 저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인간이라 낯설면서도 왜인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이 들어 더 소름 끼쳤다.

“여태 취업 안 하고 있었던 거 보면 딱 알잖아요. 어디 대기업이라도 준비하다 안 된 걸 텐데, 그래도 여기가 규모는 작아도 다니기에는 나쁘지 않은 수준이니까 한번 잘 해봐요.”

그리고 그 익숙함의 근원을 깨닫고 나서는 깔끔하게 차려입은 셔츠 아래로 털끝이 삐쭉 섰다.

본인이 가지고 있는 능력에 푹 빠져 오로지 자신만이 세상의 중심인 인간. 재광은 그런 사람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뒤통수 한 대 대차게 때려주고 싶은 친형의 낯짝이 섬광처럼 뇌리를 스친다.

아. 아무래도 이 회사생활, 쉽지 않을 듯했다.

????

직장인의 오전은 짧다. 첫 출근인 재광도 벌써 이 사실에 동의하고 있었다.

회의실에서 의주의 자기 자랑을 한바탕 듣고 나와 readme[3] 파일 잠깐 열어봤더니 그새 점심시간이었다. 거북목이 되도록 파일 내용에 집중하던 재광은 어깨를 톡톡 치는 다른 직원의 기척에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조금은 어색하면서도 나쁘지만은 않은 분위기였다. 식당까지 5분가량 걸으며 들은 바로는, 원래 점심 식사는 자유로운 편이나 오늘은 새로운 얼굴이 있어 다 같이 먹는 거란다.

‘다 같이’라고 해도 4인용 식탁 세 개면 충분한 인원이었다. 재광은 의주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래도 같은 팀이라 붙임성 있게 굴려 한 건 아니고, 빈자리를 채우려다 보니 그렇게 됐다.

똑같이 생긴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앉자 직원들의 시선이 흘끔흘끔 이쪽을 향한다. 일사불란하게 자리를 채우더라니, 낌새로 보아 아무래도 모종의 의도가 있는 배치인 듯했다. 불편하게 살피는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의주는 진중하게 메뉴만 살폈다.

“와, 두 분 진짜 먼 친척도 아니에요? 저 아침에 완전 깜짝 놀랐잖아요.”

모두의 눈빛이 뜻하던 바는 주문을 마친 다음에야 육성으로 터져 나왔다.

아침에 문을 열어준 장본인이자 점심시간이라며 재광의 어깨를 두드린. 더불어 식당에 오는 동안에도 대화를 주도한 남자 직원이었다.

재광의 옆에 앉은 그는 도리질을 치듯 의주와 재광을 번갈아 봤다. 동그란 안경알에 조명이 반사돼 만화처럼 번쩍거렸다.

“그만 좀 물어 봐요. 아니라고. 남남이라고.”

대답은 의주가 했다. 그만 좀 하라고는 해도 딱히 지겹거나 진저리를 치는 뉘앙스는 아니었다. 오히려 재광에게 저 잘났단 소리를 늘어놓을 때보다 더 편하게 흘러나오는 말투였다.

직급의 차이는 있지만 꽤 친근한 사이지 싶었다. 장난식의 타박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남자는 얇은 안경테를 추켜올리며 말을 더했다.

“남남이면 그게 더 신기한 거 아니에요? 저 진짜 아침에 누가 벨 눌러서 비디오폰 봤다가 빼박 팀장님인 줄 알았다니까요.”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재광은 요상하기 짝이 없던 그의 첫마디를 떠올렸다.

- 갑자기 또 무슨 바람이 불어서 벨을…. 어?

처음 보는 사이에 짜증이 짙다 했더니. 여의주가 버젓한 지문 두고 난데없이 벨을 눌러 사람을 오라 가라 하는 줄 알았던 듯했다. 이제야 상황을 이해한 재광은 혼자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도플갱어 그런 게 진짜 있나 봐요. 대박 신기.”

“도플갱어는 무슨.”

호들갑을 떠는 남자의 말에는 이번에도 의주가 받아쳤다. 그런 게 어디 있냐고 따져 물을 모양새였으나 뒷말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밑반찬을 놓으러 온 식당 직원이 끼어든 탓이다.

“어머나, 여기는 형제가 같이 회사 다니시나 보다. 둘 다 훤칠하니 너무 잘생겼네.”

누구와 누구라고 콕 집지는 않았으나 여기서 이런 소릴 들을 만한 대상은 의주와 재광뿐이었다. 칭찬 삼아 하는 이야기임이 분명했지만, 재광은 그래서 더 묘한 불만이 생겼다.

살면서 서로 닮은 사람들을 전혀 못 본 건 아니었다. 누가 봐도 거푸집 수준으로 닮은 형제들도 수없이 많지 않나.

당연히 재광의 친구 중에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너 형이랑 똑같이 생겼더라” 하면 기겁하며 “아니거든!” 하고 받아치곤 했다.

단순히 형제와 닮았다는 말이 싫어 버럭 하는 경우도 있지만, 개중에는 진심으로 닮았다는 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 재광은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인데도 제 입으로 안 닮았다는 말 한마디를 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 똑같이 생겼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하나 뜯어보자면 의주 쪽이 더 날카롭고 매서운 인상인 건 맞지만, 그렇다 해서 어디가 닮았냐고 따질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리 얘기해 봐야 원 앤 온리이고 싶은 사회초년생의 치기로밖에 안 보일 테다.

“아이 선생님, 형제 아니에요.”

닮은 건 인정하지만 인정하기 싫은 마음. 그건 의주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잘난 척을 할 때만 해도 세상에서 제일 콧대 높은 사람 같던 그는 의외로 서글서글한 말투를 내어 대꾸했다.

“아이고, 아니에요?”

“잘 봐봐요. 제가 더 잘생겼잖아요. 훨씬 훤칠하죠, 그죠.”

피를 나눈 마냥 꼭 닮았단 사실이 못마땅한 게 아니라 그저 제가 더 낫다는 걸 어필하려는 쪽에 가깝긴 했다.

“에이, 그렇게 얘기하면 이쪽 분이 섭섭하죠.”

“사실인데 뭘요.”

여전히 침묵하는 재광을 빤히 쳐다보는 눈길이 참 곧기도 하다. 형제냐며 묻는 말을 너스레로 받아넘기려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제가 낫다고 생각하는 거다.

“….”

재광은 이번에도 조용히 있었다. 다만 마주친 시선만은 피하지 않고 똑바로 응수했다. 제 형이나 의주처럼 나대는 성격은 못 되는 터라 이게 제 뜻을 전하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사실, 재광이 내심 의주보다는 제가 낫다 여기는 건 아니었다. 키도 몸무게도, 심지어는 성장 과정까지도 평범한 그로서는 자신이 누구보다 잘났다는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익숙지 않았다.

더군다나 최근에는 서류 합격 발표가 나는 족족 탈락하지 않았던가. 그나마 지닌 자존감마저 박살이 난 현시점에서는 어엿한 회사의 CTO를 상대로 감히 제가 낫다는 오만을 떨 엄두가 안 났다.

물론, 의주의 외모가 더 낫다고 인정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반발하는 대신 입만 꾹 다물고 있었다. 그러면서 의미 없이 고개를 비뚜름하게 기울이자 의주가 거울 모드로 따라 움직인다. 눈썹을 까딱거리는 표정에 장난기가 묻어났다.

‘실없이 장난칠 사이는 아닌 거 같은데.’

속으로만 읊조린 재광은 괜히 멋쩍어져 금세 자세를 바로잡았다.

이만 다른 데로 관심을 돌릴 심산이었다. 그러나 의주는 그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막 고개가 돌아가기도 전에 냉큼 한쪽 눈을 찡긋거린다.

난데없이 외간 남자에게 윙크를 받은 재광은 더 이상 감추지 못하고 안면 근육을 일그러뜨렸다. 그러고 나서는 아무것도 못 본 척, 밑반찬으로 나온 멸치볶음이나 씹었다.

부지런히 움직이는 턱 근육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

낭만인 직원들은 대체로 어렸다. 재광보다 세 살 많은 의주가 CTO 자리를 맡았고, 대표 역시 그의 친구라 하니 이것만 봐도 젊은 기업이란 사실은 설명이 다 되는 셈이었다.

사원 중에는 대학을 갓 졸업하자마자 입사한 직원도 있었고, 다른 데서 1년쯤 경력을 쌓고 이직한 이들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상급자와도 나이 차가 크게 벌어지지 않는 편이었다.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친근하게 어울릴 수 있다는 뜻이다. 식사 때만 해도 경직된 느낌이 전혀 없었고, 소소하게 오가는 이야기들도 격의 없이 이루어지는 분위기였다.

“커피 한 잔씩 하고 와요. 저희는 먼저 갑니다.”

그래도 어디서 보고 들은 건 있는 모양이었다. 나이 차가 얼마 안 난다고는 하지만 혹여 사원들이 불편해할까, 상급자들이 식사 후에 먼저 자리를 비켜준다. 대표는 자신의 카드까지 호쾌하게 넘겨줬다.

대표와 의주, 그리고 마케팅 팀장까지. 식사 인원의 4분의 1이 빠져나가자 난 자리가 확실히 느껴졌다. 4인용 테이블 두 개를 붙여 앉은 직원들은 대표의 카드로 주문한 커피를 한 잔씩 앞에 두고 있었다.

“재광 씨, 회사 처음이라 그랬죠.”

뉴페이스다 보니 주된 관심은 재광에게 쏠렸다. 저들끼리만 아는 이야기를 하다가도 문득 이쪽으로 화제가 돌아오는 거다.

“그래도 첫 출근인데 뭐 궁금한 건 없어요?”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출퇴근하는 데는 얼마나 걸리냐, 올해 졸업한 거냐, 개발 팀장이랑 학교 같이 다녔냐…. 한바탕 물어대고 조용해졌다가 다시 질문이 시작된다. 돌아가며 한마디씩 툭툭 던지더니, 이번에는 동그란 안경을 쓴 마케팅팀 남자 직원이 물었다.

재광은 입에 물고 있던 빨대를 마저 쪽 빨았다. 이럴 때 비싼 거 시켜야 한다고 안타까운 타박을 들어가며 주문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다. 씁쓰름한 향이 입안에 감돌 새도 없이 꼴딱 삼킨 그는 눈동자를 위로 휙 굴렸다.

솔직히 어떻게든 직장인 타이틀을 얻고 싶은 마음이 급급해 여기까지 온 거라 유난스럽게 호기심이 동하지도 않았다. 여기는 이게 이렇고 저게 저래요― 하고 알려주면 아 그래요? 하며 듣고 넘길 뿐이었다.

하지만 궁금한 게 없느냐 직접 친절하게 묻는데 이마저도 없다고 넘기는 건 예의가 아닌 듯했다. 재광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그, 여 팀장님은 평소에 어떠세요?”

그나마 이 회사와 관련해 궁금한 거라곤 이게 다였다. 대학 4년 동안 망령처럼 저를 맴돌던 존재였기에 개인적인 감정은 좋지 못했지만….

그래도 알고 싶은 생각이 조금은 있었다.

이제 다 지난 일이긴 하다만, 그래도 제 첫사랑이 좋다고 따라다녔다는 인물 아닌가. 과연 그렇게 쫓아다닐 만한 매력이 있는 사람인지 정도는 궁금했다.

“아아, 여 팀장님이요?”

질문의 판을 깔아준 당사자는 궁금할 만하다는 듯 대꾸하더니 유쾌하게 와하하 웃었다. 습관처럼 안경테를 손끝으로 올린 뒤에야 목소리가 이어진다.

“좀 특이하죠? 근데 또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좀 유치하게 장난 걸거나 그러실 때는 자주 있는데, 저는 젊은 꼰대보다 그게 낫다고 생각해서.”

남자의 맞은편에 앉아 요거트 스무디를 맛깔나게 들이켜던 여자 직원이 동조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는 잘게 갈린 얼음을 아그작 씹으며 거들었다.

“럽 마 셀프의 현신이라고나 할까.”

“예?”

“재광 씨도 아침에 보셨잖아요. 누가 자기 왔다고 그렇게 출근 완료를 외치겠어요. 자기애가 아주 투철하신 분이라니까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양 얘기한 그는 곧 민망하게 웃었다.

“이렇게 말하니까 꼭 욕하는 거 같네.”

덧붙이는 말이 빨랐다.

“사실 개발팀에 사람 들어온 게 처음이라 저희도 직속 상사로 어떤지는 잘 몰라요. 그래도 업무상 얘기 나눠보면 나쁘지 않던데요? 일은 되게 쿨하게 하시는 거 같아요.”

재광의 옆에 앉아 동그란 안경테를 매만지던 남자가 킥킥 웃으며 끼어들었다.

“그것도 방금 얘기한 럽 마 셀프의 연장이잖아요. 말귀 못 알아먹거나 실수해도 절대 화내거나 나무라진 않으시거든요? 근데 그 태도가 약간, 뭐라고 해야 되지.”

남자는 적절한 표현을 찾느라 고심하는 태도였다. 눈을 가늘게 뜨고 아랫입술을 꼬집듯 매만진다. 그러더니 곧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아, 그래!” 했다.

“너희 같은 범인(凡人)들은 그럴 수 있으니 이 천재님이 이해해준다, 뭐 그런 느낌?”

그 말에 테이블을 둘러싸고 있던 이들이 “악! 맞아, 그거!” 하며 박수까지 짝짝 치고 웃는다. 물론 그러고 나서는 너무 시끄러웠던 건 아닌지 주변 눈치를 살피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냥 뭐 어우 밥맛, 하고 넘어갈 수 있는 정도니까요. 그 정도면 괜찮죠.”

밥맛이라고는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어조도 딱히 질색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뒷담처럼 떠들어대긴 했어도 기본적인 호감이 전제가 되어 있다고나 할까. 재광은 가볍게 위아래로 고갯짓을 하며 호응했다.

“저는 코딩 이런 거 하나도 모르지만 실력 좋은 것도 맞는 거 같고.”

그렇게 말한 이는 조금 전까지 요거트 스무디를 부지런히 마시던 직원이었다. 여태 너무 흉만 봤나 싶어 눈치껏 칭찬을 더하는 뉘앙스는 아니었다.

“저는 그쪽 일 잘 모르니까 이거 이렇게 좀 해주세요, 하고 두루뭉술하게 얘기할 수밖에 없잖아요. 근데 그런 거 바로바로 딱 잡아주시더라고요. 그럴 때 보면 진짜 잘하긴 하는구나 싶어요.”

거기까지 얘기하자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다른 직원이 불쑥 끼어들어 말을 얹는다.

“뭐라더라. 무슨 논문으로 상 받아서 대기업 특채로 바로 입사했었다면서요.”

“맞아, 맞아. 저번에 들어보니까 학교 다닐 때도 계속 프로젝트 참여하고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이야기는 한참이나 계속됐다. 대개는 의주의 실력을 뒷받침할 만한 소문들이 주를 이뤘다. 그리고 그 끝은 “그러니 콧대가 높은 것도 당연한 일이지 않겠냐”라는 말로 끝맺음 됐다.

거기까지만 해도 재광은 아무래도 아까 회의실에서 본 의주의 모습이 평소 그의 태도와 다르지 않은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여 팀장님 되게 멋있지 않아요?”

그런데 웬걸. 별안간 지금까지와는 다른 의견이 제시된다.

구석 자리에 앉은 여자 직원이었다. 테이블에 둘러앉은 이들의 시선이 한 번에 그쪽으로 향했다. 갑작스러운 관심이 부담스러운 듯 멋쩍어하던 당사자는 곧 천천히 말을 잇기 시작했다.

“아니 왜, 반전 매력이라고 하잖아요. 제가 뭐 물어보고 그러면 되게 가볍게 얘기하는데, 본인 일할 때 보면 확 집중해서 엄청 멋지던데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며 부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는 건 곧 다들 인정한다는 뜻일 테다. 아니나 다를까, 다른 여자 직원 한 명이 그의 말을 거들었다.

“그런 면이 있긴 하죠. 항상 자기만 잘났다는 태도라서 딱 이기적일 줄 알았는데 은근히 사람 챙길 줄도 알고 섬세하더라고요.”

말끝에는 “나 몇 번 설렜잖아” 하는 너스레가 따라붙었다.

‘그런 것들이 여자들한테 어필하는 건가.’

재광은 이전보다 더 진중하게 대화를 경청했다.

????

하루가 억겁 같았다. 여섯 시 땡 치자마자 칼같이 퇴근했는데도 그랬다. 오늘 아침 회사에 도착하던 기억이 벌써 머나먼 옛날처럼 느껴진다.

사실 한 것도 없었다. 오전에는 의주의 자랑질을 들은 게 전부였고, 식사 후로는 점심 직전 넘겨받은 readme 파일을 마저 살펴봤다. 모르겠으면 물어보라는데, 그것도 어느 정도 파악한 뒤에나 가능한 일이라 결국엔 눈알 빠지게 문서만 들여다보다 온 셈이었다.

그런데도 회사 밖을 벗어나기 무섭게 어찌나 피곤하던지.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는 누구보다도 고된 일을 한 양 기둥에 매달려 왔더랬다. 씻는 것도 미루고 침대에 드러누운 재광은 휴대전화부터 꺼내 들었다.

송민주

김재광 살아 있냐?오후 1:20

도원이 형

출근은 잘 했어?오후 1:21

유연우

맞다 오늘부터 출근이랬지오후 1:21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알림이 수두룩 쌓여 있는 메신저였다. 그중에서도 친한 대학 동기들이 모인 단체 채팅방에 접속하자 종일 오간 대화들이 끊임없이 뜬다. 재광의 안부를 물으며 시작된 이야기는 당사자가 답이 없자 다른 경로로 이탈해 한참 동안 지속됐다.

재광은 빠른 속도로 스크롤을 내리며 말풍선을 대충 훑었다. 이윽고 채팅창 맨 아래까지 도달한 그는 자연스럽게 액정 위로 양 엄지를 올렸다.

쏘리. 괜히 정신없어서 이제 확인했네. 무사 퇴근함.2

오후 6:58

송민주

퇴근 부럽ㅜㅜ

암튼 어때어때? 회사 다닐 만할 거 같음?2

오후 6:58

아직 퇴근을 못했다는 민주만 답이 빨랐다. 1시간여 공백이 있던 대화창인데도 분 단위가 바뀌기 전에 말풍선이 떠오른다. 재광은 휴대전화를 잠시 가슴 위에 올려놓고 천장을 올려다봤다.

다 나이도 비슷하고 분위기도 나쁘지 않은 거 같은데…2

오후 6:59

금방 다시 답장을 쓰기 시작했으나 한 번 말을 줄이고 나니 쉽게 뒤가 이어지질 않는다. 그 탓에 잠시 표현을 고르며 공백을 만들자 참지 못한 민주가 재촉한다.

송민주

같은데 뭐야

뭔데 왜 왜왜

뭐 엄청난 오점이라도 있음?2

오후 7:00

혹여 절친한 친구가 꺼림칙한 회사에 입사했을까 걱정하는 낌새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끝나지 않는 업무 중 잠시 한눈을 팔 화제가 생겨 기쁜 것처럼 보였다.

새삼스럽게 서운해할 일도 아니긴 했다. 민주와는 대학 입학 초부터 지겹도록 붙어 다녔지만, 넘어졌을 때 걱정하며 일으켜 세워주기보다는 요란하게 놀려대며 폭소하는 우정을 나눴기 때문이다.

재광은 “하여간 송민주 이거” 하고 중얼거리며 마저 키보드를 두드렸다.

오점이라고 하기엔 좀 뭐하고

나도 제대로 안 알아보고 가서 이렇게 된 거긴 한데

팀장이 여의주 선배임2

오후 7:02

세 개로 나눠 보낸 메시지는 하나씩 전송되기 무섭게 수신 확인용 숫자가 줄었다. 총 네 명이 속한 채팅방인데 3이란 숫자는 보이질 않고 곧장 2가 된다. 그만큼 돌아오는 반응도 빨랐다.

송민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야 대박ㅋㅋㅋㅋㅋ

너 그 오빠 처음 본 거지 오늘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드디어 본 소감이 어떠냨ㅋㅋㅋㅋㅋ2

오후 7:03

어떻긴 뭘 어때, 소름 돋지. 당장 그렇게 답을 하려던 참이었다. 자음이 난무하는 민주의 답장 아래로 여태 말이 없던 도원이 등장했다.

도원이 형

진짜로?1

오후 7:04

동기이긴 하지만 두 살이 많은 그는 놀려먹느라 혈안인 민주와는 정반대의 성품을 지닌 사람이었다. 이번에도 도원은 간결하게 뜻밖이란 반응을 보이는 게 다였다.

어처구니없게도 이 채팅방에 속한 네 명 중 의주를 겪어보지 못한 이는 재광뿐이었다. 민주야 휴학 없이 곧장 졸업했으니 더 말할 것도 없고. 나머지 두 사람은 재광보다 한 학기를 더 다니고 휴학했던 터라 의주의 복학 시기와 맞물리는 구간이 있었던 것이다.

이 얘기는 곧 이들이 의주에 관해 더 많이 안다는 의미와도 같았다. 재광이 넵, 하고 짤막한 답을 하기 무섭게 말풍선이 밀려 올라간다.

송민주

그 오빠 좀 똘끼 있잖앜ㅋㅋ 야 너 고생 좀 하겠닼ㅋㅋㅋ1

오후 7:06

도원이 형

그래도 고생시킬 정도까진 아닐 거야. 그 선배 조별과제 할 때 보니까 괜찮던데.1

오후 7:07

제법 상반된 평이다. 하지만 짜증나게도 이 순간 재광이 신뢰하게 되는 건 전자였다.

단순히 의주에게 좋지 못한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다. 민주는 있는 그대로 얘기하는 편인 반면, 도원은 천성이 착해 싫은 소리는 못 하는 타입인 까닭이다. 특히 타인을 두고 하는 얘기라면 더더욱.

아무래도 도원의 얘기는 듣기 좋은 위로 정도로 치부하는 게 좋을 듯했다. 재광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액정화면을 주시했다.

아니 근데 뭔가 묘하게1

오후 7:09

우리 형 같다고. 그렇게 얘기하려던 차였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바깥에서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난다. 재광은 눈동자를 굴려 흘긋 문 쪽을 보고는 누운 자세를 고집했다.

“야, 김재광 안 왔냐?”

하지만 그것도 아주 잠시였다. 곧장 불러대는 통에 몸이 먼저 반응해 상체가 벌떡 들린다.

‘반길 사이도 아니면서 찾긴 왜 찾아.’

속으로는 투덜거리면서도 재광의 두 발은 부지런히 거실을 향해 움직였다.

“뭐. 왜.”

“너는 씨, 형이 왔는데 나와 보지도 않냐?”

온종일 거울처럼 닮은 의주와 있다 와서 그런지 닮은 구석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형의 얼굴이 유독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새삼스럽게 혈육의 낯짝을 뜯어보던 재광은 곧 불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피곤해서 좀 누워 있었어.”

“첫 출근에 할 게 뭐 있다고. 남들 수다 떨 때 대충 네, 네 하다가 컴퓨터 앞에서 멍 때리고 왔겠고만.”

지가 뭘 안다고, 싶으면서도 완전히 틀린 얘기도 아니라 말문이 턱 막혔다. 하릴없이 눈만 흘긴 재광은 이쯤에서 먼저 자리를 피할 요량으로 몸을 돌려세웠다. 그러자 등 뒤에서 다시금 목소리가 들려온다.

“야 밥 안 해놨냐?”

취준생 신분으로 집에 붙어 있는 날이 많았기에 집안일을 떠맡고 있던 건 사실이지만, 그 점을 고려해도 거의 맡겨놓은 듯한 말씨였다.

지는 손이 없어 발이 없어. 기분이 상한 재광은 잔뜩 짜증스러운 투로 받아쳤다.

“니가 좀 차려 먹어.”

그러나 객기도 얼마 가지 못한다.

“니이이?”

“나 배 안 고프니까 형 알아서 먹으라고.”

한껏 온순해진 목소리로 재차 답한 재광은 발소리 하나 내지 않고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머릿속으로는 ‘300,000원 받기 완료!’ 문구를 떠올리며 불만스러운 감정을 억눌렀다.

????

“2주년 이벤트 건은 어떻게 되고 있어요?”

낭만인에서는 매주 화요일에 전체 회의를 한다.

아직 직원 수가 많지 않기에 가능한 방식이다. 공지해야 할 사항을 전달하는 건 대개 팀장급에서 이루어졌으나 의견을 내야 하는 일에는 직급 관계없이 자유롭게 발언하는 분위기였다.

끄트머리에 앉아 남들이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던 재광은 대표의 시선을 따라갔다. 대표의 대각선 자리에 앉은 의주가 뜸 들이지 않고 곧장 답한다.

“마케팅 쪽에서 내용은 다 전달받았어요. 구현하는 건 그렇게 복잡하지 않아서 이건 뭐. 재광 씨가 하는 거로.”

그저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살핀다는 생각으로 자리만 지키고 있던 재광은 화들짝 놀라 어깨를 움찔거렸다.

제가 할 일이라는데 정작 자신은 일언반구도 듣지 못했기에 그랬다. 하지만 불시에 언급된 이름에 모두가 이쪽을 주목하는 상황. 얼빠진 모습만 보일 수는 없어 서둘러 표정 관리를 했다.

“오 벌써? 재광 씨, 할 수 있겠어요?”

대표가 해끔한 얼굴로 돌아보며 그런다. 제게 주어진다는 일이 뭔지도 모르는 재광은 자신 있게 그렇다고 해도 될지 잠깐 고민했다. 그러고는 최선을 다 해보겠다는 말로 상황을 모면해보려 했는데.

“당연히 할 수 있지.”

의주가 더 빨랐다.

“내가 눈 감고 발로도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주는 거지, 설마 못 할 거 하라고 시키겠어요? 그래 봐야 결국엔 내 손이 더 가는데. 안 그래요?”

의주와 친구 사이라는 대표는 무어라 대꾸하기 전에 선명한 눈길부터 보냈다. 분명 입술은 꾹 닫혀 있건만 그러시겠죠, 하는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재광에게로 시선을 돌린 대표는 의주를 볼 때와 달리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쨌든 처음 맡는 일인데 잘 해봐요, 재광 씨. 모르는 건 물어서 하면 되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말고요.”

“네. 알겠습니다.”

재광은 아직도 제가 뭘 해야 하는지는 몰랐지만 대답만은 우직하게 했다. 그러고 나자 의주와 불쑥 눈이 마주친다. 재광이 별다른 기미 없이 멀뚱멀뚱 쳐다봤더니 저쪽에서 불시에 한쪽 눈을 찡긋 감는다.

하마터면 헐, 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 나갈 뻔했다. 재광은 괜히 입술 안쪽의 여린 살만 질끈 깨물었다.

벌써 두 번째였다. 의주가 날린 윙크의 의미는 좀처럼 해석되지 않았다. 저번에도 그랬지만 이번에는 더더욱.

눈 감고 발로도 할 수 있는 일이라며 자기 자신을 치켜세워 놓고는 재광의 실력을 믿어서 편을 들어준 양 굴지 않던가. 그것만 해도 어이가 없는데….

똑 닮은 얼굴로 재광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짓을 아무렇지 않게 해대니 그것만큼 곤혹스러운 것도 없었다.

윙크라니. 속눈썹이 들어가지 않는 이상 한쪽 눈만 찡그릴 일이 없는 재광으로서는 이게 대체 무슨 시추에이션인지 도통 모르겠다.

그렇다고 재광이 마주 눈을 깜빡여줄 만큼 뻔뻔한 성품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결국 그는 버벅거리며 고개를 숙여버렸다.

“우리 새로 개발하기로 한 앱은 이제 슬슬….”

그리고 곧 후회했다. 어쩔 줄 모르는 티를 팍팍 내며 눈을 피한 탓에 다시 고개를 들 엄두를 못 내겠는 거다. 슬며시 시선을 들어 올리면 곧장 의주와 눈이 마주칠 것 같았다.

물론 눈 한 번 더 마주친다고 큰일이 나지는 않을 테다. 하지만 부러 회피한 다음의 어색함을 아무렇지 않게 견딜 자신이 없었다.

“이 건은 영업 면에서 좀 더 신경 써주시고요….”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 열심히 회의를 이끄는 대표의 목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다진 재광은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

“….”

아니나 다를까, 기다렸다는 듯 의주와 눈길이 부딪힌다. 낌새로 보아 재광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내내 정수리를 쳐다보고 있었던 듯싶었다. 의외로 장난기 없이 눈을 마주하던 의주는 곧 입매를 끌어올려 웃었다.

찍어낸 듯 닮은 통통한 입술이 보기 좋게 호선을 그린다. 뭐야, 왜 웃어. 재광은 의심스러운 마음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그러자 곧 의주가 소리 없이 입을 벙긋거린다.

부끄러웠어?

목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틀림없이 이 다섯 글자였다. 재광은 슬며시 눈살을 찡그렸다.

같은 남자한테, 그것도 피를 나눈 것처럼 똑같이 생긴 후배한테 대뜸 윙크해놓고 부끄러웠냐니. 이게 무슨 수작인가 싶었다. 재광의 입안에 내뱉지 못한 말이 맴돌았다.

‘왜 저래 진짜.’

????

전달받은 과정이 어쨌든 재광에게 첫 과제가 떨어졌다.

이벤트 응모 페이지를 구성하는 일이었다. 단발성으로 필요한 기능인 데다 딱히 복잡한 요소가 없어 크게 부담되지 않는 업무였다.

의주는 “나라면 자면서도 할 난이도이니 맡겨 보겠다”라고 하면서도 “인턴한테 나만 한 수준을 바랄 수는 없다”며 꽤 넉넉한 기한을 줬다.

덕분에 재광도 부담을 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란 게 원래 복잡한 것이지 않나. 여유로운 기한에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최대한 빠르게 완성하고 싶었다. 당연히 오래 걸릴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여의주의 코를 바짝 눌러주고 싶은 거다.

단순한 치기만으로 부리는 욕심은 아니었다. 그래도 거의 4년 넘게 공부해온 분야이니 충분히 가능성 있는 얘기였다.

엄밀히 따지자면 재광은 개발보다 보안에 더 관심을 두고 있긴 했다만…. 어차피 개발을 알아야 보안도 하는 법이라 못 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이상과 현실은 늘 노선을 달리 한다.

“…어?”

부지런히 키보드를 두드리던 재광의 입에서 개발자 금지어가 불쑥 튀어나왔다. 나름대로 자신만만하게 써 내려간 코드가 실행에서 막힌 것이다.

이벤트 응모에 앞서 이용 내역을 조회했을 때 자동으로 표기되어야 할 이용 건수가 나오질 않았다. 화면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재광은 마우스 왼쪽 버튼을 몇 번씩 딸깍거리다가 멈췄다. 뭐가 문제인지 찾아내려 코드를 살피는 눈빛이 진지했다.

‘맞는데 왜?’

머릿속에는 의문만 가득했다. 매끈한 눈매 사이로 미간까지 좁혀가며 코드를 한 자 한 자 뜯어보는데도 대체 어디가 잘못됐는지 보이질 않는 거다. 이게 아닌가, 의심이 가는 부분을 고쳐보기도 했으나 괜한 에러만 띄우고 도로 돌려놨다.

실무에 투입되기는 처음이나 재광은 다년간의 과제 수행으로 알고 있었다. 이건 직접 입력한 당사자 눈으로 절대 못 찾는다. 그렇다면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건….

의주뿐이다. 재광은 모니터를 향해 고정했던 고개를 슬며시 옆으로 돌렸다.

팀원은 단둘이지만 추후 증원을 고려한 자리 배치였다. 네 개의 책상이 둘씩 마주 붙어 있고, 두 책상의 옆면과 의주의 책상 정면이 맞닿은 형태였다. 재광이 시선을 돌리자 리듬감 있게 탁탁 키보드를 두드리는 비스듬한 얼굴이 보인다.

“….”

재광은 망설이며 눈치를 살폈다. 함께 일하게 된지 이제 고작 이틀이긴 하다만, 그렇다 치더라도 아직 의주가 편하지 않았다.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확실한 건 단순히 상사라서는 아니라는 거다. 저와 이토록 닮은 사람은 처음이라 낯설어 그러는지, 아니면 제 첫사랑이 좋아했던 사람이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 의주는 거울처럼 재광을 따라하고, 회의 중에 근본 없이 윙크를 날려대기도 했다. 의주의 그런 가벼운 행동이 재광의 불편함과 대비되어 되레 간극이 벌어지는 것만 같았다.

“왜. 할 말 있어요?”

갑작스럽게 밀려드는 생각에 멍해진 재광이 흐릿한 눈길을 유지하자, 결국 시선을 알아차린 의주가 먼저 물었다. 재광은 그제야 정신을 깨우고 “아…” 실없는 소리를 냈다.

“저, 잘 안 되는 게 있는데 봐주실 수 있나 하고요.”

내뱉는 목소리는 자못 조심스러웠다. 재광은 직장 생활이 처음이지만, 먼저 사회로 나간 동기들에게 들은 이야기는 꽤 많은 탓이다.

모르면 물어보는 게 당연하긴 하나 자신의 시간을 빼앗긴다는 이유로 불친절하게 구는 사수들도 제법 있는 모양이었다. 특히나 이쪽 업계 일은 코드 하나하나 면밀히 살펴보려면 할애하게 되는 시간이 적지 않아 더 그런 듯했다.

“아, 나 또 그런 거 기깔나게 잡아내지.”

물론 의주에게서는 꺼리는 기색이라곤 요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몸 좀 풀어볼까? 하는 듯이 목을 돌리며 다가온다. 꼭 기다린 것처럼 재빠른 행동이었다.

하기야 뜻밖의 반응도 아니긴 했다. 제 자랑이라면 입이 마르도록 하고도 남을 사람이지 않나. 오히려 남에게 제 실력을 뽐낼 기회가 생겨 신이 날지도 몰랐다.

“뭐가 안 되는데.”

“조회 버튼 누르면 이용 건수가 이쪽에 합산돼서 나와야 되는데 먹통이라서요.”

몇 걸음 걸리지도 않는 거리였다. 훌쩍 다가선 의주가 자연스럽게 마우스로 손을 뻗는다.

키도 덩치도 재광보다 월등해 그런지 손도 크다. 조금 전까지 재광의 손에 꼭 맞게 들어오던 마우스가 의주의 손에서 앙증맞아졌다.

“여기 말하는 거죠?”

“네.”

재광은 순순히 대답하며 의자에서 몸을 띄우려 했다. 어디서 실수했는지 살펴봐야 하니 자리를 비켜줄 심산이었다.

그러나 낌새를 알아차린 의주가 그의 어깨를 지그시 누른다. 눈동자는 바쁘게 모니터를 훑고 있었다.

“됐어요. 이거 뭐 오래 걸리지도 않는 거.”

불편하게 서 있을 재광을 배려해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자신감이었다. 이 정도 간단한 오류 잡아내는 거야 식은 죽 먹기이니 자리를 비켜줄 만큼의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거다.

괜히 움찔거리기만 한 셈이 된 재광은 제 어깨에 올라온 큼직한 손만 한번 쳐다봤다.

손을 향했던 시선은 곧 팔을 타고 올라가 얼굴로 향했다. 원래도 재광보다 날카로운 느낌을 주는 의주의 눈이 꽤 진중한 빛을 띠며 화면을 보고 있었다. 재광은 순간 다른 직원이 카페에서 했던 얘기를 떠올렸다.

- 본인 일할 때 보면 확 집중해서 엄청 멋지던데요?

이런 모습을 보고 그런 말을 했던 걸까. 그런 생각을 하던 차였다.

“재광 씨, 시력 얼마나 나와요?”

손을 내리는 것도 잊고 코드를 분석하던 의주가 입을 열었다. 뜬금없는 질문에 “예?” 하고 만 재광은 이내 차분하게 답했다.

“0.8 정도였던 거로 기억하는데요.”

시력을 측정해본 건 군 입대 전 신체검사가 마지막이긴 하다만, 이후로 특별히 더 안 보인다거나 하는 증세는 못 느꼈으니 아마 아직도 비슷할 터였다.

“그렇구나. 나는 1.2 나오는데.”

재광은 차마 대꾸할 말을 못 찾고 침묵했다. 하다 하다 이제는 시력도 잘났다고 자랑하는 건가 했다.

그러나 본론은 그다음이었다. 마우스에서 손을 뗀 의주가 모니터 한 부분을 검지로 툭 친다.

“그냥도 잘났는데 시력까지 좋아서 이런 거 금방 찾는다니까. 리턴 값이 이상하잖아.”

아. 재광은 얼빠진 소리도 못 내고 입술만 동그랗게 벌렸다.

이런 상황에 부닥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정말이지 도깨비가 장난이라도 친 것 같다. 혼자 암만 봐도 안 보이던 게 남의 눈으로는 손쉽게 찾아지는 거다. 게다가 찾아내고 나면 아까는 왜 그냥 넘어갔는지 이해가 안 될 만큼 어이없는 실수다.

이번에도 그랬다. 기본적인 코드 값을 잘못 매겼다는 걸 알아차린 재광은 민망함에 제 뺨만 문질러댔다. “왜 못 봤지” 하고 작게 중얼거리며 화면만 바라보자 의주가 한마디 덧붙인다.

“설마 뭘로 고쳐야 하는지도 알려줘야 돼요?”

“아뇨. 제가 할게요. 고맙습니다.”

재광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전했다.

예의 바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의주는 픽 웃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재광의 동그란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그래도 제 일이라고, 이 이상의 도움은 청하지 않는 게 꽤 기특한 듯싶었다.

가볍게 머리칼을 흐트러뜨리던 손길은 금방 멈췄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재광이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의주는 곧게 편 어깨로 당당하게 걸어 제자리로 돌아갔다.

“당연히 고마워야죠.”

도로 책상 앞에 앉아서도 목을 빳빳이 세우고 대꾸하는 건 잊지 않았다.

재광은 더 이상의 대답 없이 속으로만 생각했다. 의주가 불편한 이유는 유독 닮은 얼굴도, 사사로운 감정도 아닌 것 같다고.

아무래도 저는 자신감 넘치는 사람에게 호감을 못 느끼는 것 같았다. 더군다나 의주는 저와 닮은 생김새로 제 형 같은 행동을 하지 않던가. 세상에서 제일 엮이기 싫은 사람과 저를 한데 섞어놓은 것 같아 볼 때마다 묘한 불쾌감이 일었다.

????

이렇게 각 잡고 작업에 열중하기는 실로 간만이었다. 재광은 화면에 빨려 들어갈 기세로 모니터에 집중했다.

주변에서 어떤 기척이 나는지 알아차리지도 못할 만큼이었다. 갑작스럽게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에 과하게 움찔거린 재광이 곁을 휙 돌아봤다. 예상보다 훨씬 큰 리액션에 덩달아 놀란 치원이 동그란 안경 너머로 눈을 크게 뜬다.

“왜 그렇게 놀래요? 몰래 나쁜 짓이라도 했어요?”

“아…. 오신 줄 몰라가지고 놀라서.”

그러나 싱거운 대답에 곧 차분해졌다. 치원은 가볍게 웃어 보이고는 한 손에 든 담뱃갑을 흔들었다. 상대방이 짧게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까지 보고 먼저 걸음을 옮긴다.

자연스럽게 따라 일어서려던 재광은 순간 고민에 빠졌다.

오늘로 입사 이틀 차. 재광은 여태 자발적으로 자리를 비워본 적이 없었다. 화장실은 업무 시간 전이나 점심시간, 혹은 다른 이유로 움직일 때 짬짬이 이용했고 그밖에는 굳이 일어설 일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이것도 보고하고 나가야 하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아무래도 의주에게 얘기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별나면 별났지 절대 무던한 타입은 아니니 애매한 문제는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았다. 집에 있는 유난스러운 인간은 언질 없이 집 앞 편의점에 다녀온 것 가지고도 지랄이지 않던가.

“…팀장님.”

재광은 조용한 소리로 의주를 불렀다. 메신저 하며 농땡이라도 피우는 건지 요란스럽게 타자를 치던 의주가 잽싸게 이쪽을 봤다. 그는 대답 대신 눈썹을 크게 들썩이며 용건이 뭐냐 물었다.

“저 담배 한 대만 피우고 올게요.”

혹여 괜한 트집이 잡힐까 봐 미리 얘기하기로 마음먹었으나 막상 솔직히 보고하려니 이게 뭔가 싶긴 했다.

‘그냥 잠깐 자리 비운다고만 할 걸 그랬나.’

말을 마치자마자 후회가 든다.

의주는 별 반응이 없었다. 인턴이 벌써 빠져가지고 업무 중에 담배나 피우러 가냐 타박하지도 않고, 반대로 그런 것까지 보고할 필요 없다며 만류하지도 않았다.

대신 쳐다만 본다. 그것도 아주 빤히. 차라리 그 시간에 코드 하나라도 더 짜는 게 낫지 않겠냐며 쏘아붙이는 게 더 편할 듯한 눈길이었다.

의주는 금방이라도 속을 꿰뚫을 것처럼 재광을 주시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재광 씨는….”

“네?”

“구속당하는 걸 좋아하는 편이에요?”

“예에?”

하마터면 삑사리가 날 뻔했다. 의주의 근본 없는 말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이렇게나 터무니없는 질문을 이 타이밍에 받을지는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덕분에 재광은 입사 이후 가장 큰 리액션을 보였다. “예에?” 하고 묻는 목소리는 제법 컸고, 기껏해야 꿈틀거리기만 하던 이목구비가 크게 확장되기까지 했다.

언어적, 비언어적 요소 모두에서 부정의 답변을 읽은 의주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목덜미를 긁었다.

“아니, 이런 것까지 다 얘기하니까 나는 간섭하고 속박해주는 걸 원하나 했지.”

구속당하는 게 좋다고 했으면 정말로 사소한 것 하나 하나 다 캐물어 줄 기세였다. 범상치 않은 성격의 의주가 맘먹고 속박하기 시작하면 그게 얼마나 집요할지. 재광은 있지도 않을 일을 경솔하게 상상했다가 급히 도리질을 쳤다.

“혹시 찾으실까 봐 말씀드린 건데요.”

찾았는데 없으면 사달이 날까 봐― 라고 하는 게 정확하겠지만. 어찌 됐든 본심에서 동떨어진 소린 아니었다. 재광이 급히 침착을 되찾고 하는 대답에 의주가 여유롭게 고개를 끄덕거린다.

“오케이. 다녀와요.”

이러나저러나 결국엔 담배 한 대도 의주의 허락을 받고 피우러 가는 모양새였다. 재광은 찜찜한 기분으로 걸음을 돌렸다.

“뭐 하느라 이제 나와요?”

생각지 못한 질문에 시간을 많이 뺏기긴 했다. 사무실을 막 나서자 앞서 갔던 치원이 곧장 묻는다. 재광은 대충 둘러댔다.

“팀장님이랑 잠깐 얘기 좀 하느라고요. 먼저 가시지.”

“어차피 노가리나 좀 까려고 가는 건데 혼자 가서 뭐해요. 갑시다, 이제.”

동그란 안경테를 버릇처럼 추켜올린 치원이 먼저 발을 뗐다. 뒤이어 걸음을 옮기던 재광은 손에 쥐고 있던 휴대전화에서 짤막한 진동을 느끼고 슬며시 고개를 숙였다.

지금

[Web발신] [GNH] 1차 서류전형 합격자 발표 지연 안내

휴대전화 화면에 깨알 같은 글씨로 미리 보기 메시지가 떠올랐다. 재광은 대충 훑어만 보고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재킷 주머니에 기기를 집어넣었다. 서둘러 치원의 뒤를 따르는 걸음이 빨랐다.

????

재광이 옥상에서 치원과 시답잖은 얘기를 나누는 동안 의주는 대표실에 와 있었다.

메신저로 사담을 주고받던 대표의 호출이었다. 응접용 소파에 편하게 기대앉은 그는 머그잔을 들고 오는 선호를 멀뚱히 쳐다봤다.

“왜 불렀는데.”

정정. 멀뚱히 보다는 뚱한 쪽이었다. 유능한 여의주 님을 업무 시간에 불러낸 게 영 못마땅한 듯싶었다.

벌써 10년이 넘도록 의주와 친구 사이를 이어가고 있는 선호는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으로 녹차를 내려놨다. 이어 소파에 몸을 붙이는 행동에 여유가 묻어났다.

“별건 아니고. 인턴 들어온 거 어떤가 해서 그러지.”

관점에 따라 해석의 방향이 갈리는 문장이었다. 인턴이 적응은 좀 하는 것 같은지, 혹은 인턴과 일하는 게 어떤지. 둘 중 어느 의미로 알아먹어도 어색하지 않았다. 의주는 그중 전자의 의미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뭐. 재광이?”

조금의 틈도 두지 않고 이름이 흘러나온다. 그 말투가 퍽 자연스러워서 선호가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재광이? 벌써 그렇게 부를 만한 사이야?”

“아니.”

세상 친근하게 이름을 부른 게 직전이건만 선을 긋는 태도는 칼 같았다. 평소에도 변덕이 심한 친구 놈이라지만 이건 또 뭔가 싶어진 선호가 엥, 하고 무게감 없는 소리를 냈다.

잔뜩 의문스러워하는 반응에도 의주는 느긋했다. 조금 전 내어온 녹차를 호호 불어 들이켠다. 그는 입안을 따뜻하게 데우는 차를 충분히 음미한 다음에야 도로 입을 열었다.

“본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씨, 씨 해주는 거지 그냥 이름이 훨씬 익숙하지 않겠냐?”

이번에는 선호가 허허 웃었다.

모르는 얘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벌써 몇 년은 된 일이지만 대학에 갓 복학한 의주가 “대체 김재광이 누군데 나한테 걔 얘기만 하냐”며 짜증을 내던 기억이 아직 선명했다. 당연하게도 여의주 님한테 감히 누굴 비비냐는 뉘앙스였다.

“나는 복학하고 한동안 내 이름이 재광인 줄 알았잖아. 학기 초에 내 이름 모르는 애들이 지들끼리 꼭 그렇게 얘기하더라. 재광이 닮은 선배 있잖아, 그러면서.”

그러니 존칭보다는 친근하게 불리는 이름이 더 익숙한 게 당연하지 않겠냐는 말일 테다. 선호는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그 지겨운 재광이 직접 보니까 어떻디.”

의주는 느릿하게 관자놀이 부근을 문질렀다. 아무런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권태로운 표정을 한 그는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 귀엽지.”

누가 봐도 성의 없는 태도지만 그렇다고 속에 없는 얘기를 하는 건 아니었다. 그 사실을 잘 아는 대표는 어이없다는 듯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의주가 누구던가. 자기애로 똘똘 뭉쳐 세상 모든 게 자신 미만 잡인 인물이다. 저 아닌 타인을 성에 차 하는 경우는 절대 없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에 관해 물었을 때 할 수 있는 대답도 “글쎄” 정도에 그쳤었는데….

재광에게는 귀엽단다.

“이 새끼 지 닮았다고 후하게 쳐주네.”

선호가 생각하기에는 나름의 긍정적인 평이 나올 수 있는 이유가 그것밖에 없었다. 그간 의주의 무관심 속에 스쳐 간 많은 사람과 재광이 다른 점은 그뿐이지 않나.

찍어낸 듯 닮은 외모.

의주라면 제 외양을 닮았다는 사실만으로 인사 평가에 가산점을 주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선호는 귀엽다는 표현이 어디까지나 생김새를 보고 내린 판단이라 여겼다.

굳이 그런 견해를 숨기지 않고 고스란히 담아내자 의주가 되레 의아한 낯을 한다.

“야 얼굴은 귀여운 것보단 잘생긴 쪽이지. 입 아픈 소리 하게 만드네.”

“얼씨구. 그럼 뭐가 귀엽다는 건데.”

“하는 짓이.”

이번에야말로 선호의 안색이 의문스러워진다. 제가 보기에 재광은 사근사근하고 귀염성이 있다기 보다는 무뚝뚝하고 조용히 자기 할 일만 하는 스타일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친한 사람들 앞에서는 다른 성격일 수 있겠지만, 의주 본인의 입으로 친하지는 않다고 했다. 그렇다면 저나 의주나 비슷한 모습을 보고 있다는 건데. 뭘 보고 귀엽다는 건지 도통 알 수 없었다.

“분명히 아니꼬워하는 게 빤히 보이는데 참는다? 근데 참는 티가 다 나. 그때가 딱 귀엽지.”

장난으로 늘어놓는 얘기가 아니다. 재광의 어떤 포인트가 귀여운지 설명하는 의주의 눈에 또렷한 빛이 돈다. 오랜 시간 그를 봐온 선호가 예상하건대, 분명 그 모습이 재밌어서 안 해도 될 짓을 더 했을 거다.

‘하여간 변태 같은 새끼 저거.’

선호는 속으로 중얼거리는 대신 눈빛을 노골적으로 쐈다. 똑바로 눈을 마주한 의주는 전혀 개의치 않고 당당한 모습을 보이다가 불쑥 심각한 표정을 했다.

“근데 재광이가 왜 그렇게 궁금한데.”

혹시나 저를 향한 모종의 관심이 비약적으로 재광에게 튄 건 아닐까 의심하는 게 분명했다. 선호는 질색팔색하며 어깨를 떨었다.

“헛생각하지 마라, 진짜. 나 다다음 달에 여자친구랑 1,000일이다.”

“그럼 뭔데.”

“너 때문에 새끼야. 앱이든 서비스든 계속 늘리려면 그만큼 사람이 필요한데 네가 어디 협업이란 걸 할 줄 아는 놈이냐?”

“오. 필요할 땐 데려다 앉혀놓고 인제 와서 내 탓?”

“탓하자는 게 아니라요, 여 팀장님. 다른 사람이랑 일하는 게 할 만한지 여쭤보려고 한 겁니다. 네?”

마지막 한마디를 더할 때의 선호는 거의 이를 악물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의주는 태평하게 답했다.

“어차피 수준 맞는 사람 찾기는 어려우니까 그냥 뭐. 재광이 정도면 할 만하지. 쓸데없는 소리 안 하고 놀려먹는 재미도 있고.”

그러더니 고개를 비스듬히 꺾으며 눈을 크게 깜빡거린다. 이 정도면 답이 되었냐는 뜻이다.

한 회사의 대표로서 직원을 굽어 살피려다 언짢은 기분이 된 선호는 알겠으니 썩 꺼지라는 듯 성의 없는 손짓을 했다.

“그럼 바쁜 몸은 이만.”

의주는 부러 더 얄밉게 90도로 허리를 접어 인사했다. 그 자세 그대로 뒷걸음질 쳐 문 앞까지 간다. 선호는 어쩌다 저런 놈과 친구가 됐을까. 후회하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내심 안도했다.

의주가 재광을 귀엽다 표현했지 않던가. 그저 장난을 쳤을 때 돌아오는 반응이 재밌다는 뜻일 테지만, 그게 중요했다.

세상에서 제가 제일 잘난 여의주가 주변에 관심을 두는 건 무조건 흥미가 우선이니까.

의주가 할 수 있는 최대치의 호감 표현이래도 손색이 없었다. 이 정도면 당분간 수준 안 맞는 놈이랑 일 못 해 먹겠다고 난동을 피울 일은 없을 테니 다행이라는 게 선호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

직장인의 하루는 늘 같았다. 10분쯤 여유를 두고 출근해서 퍼석한 얼굴로 제 몫의 커피를 준비하고, 어영부영 오전 업무를 마치면 세 시간 만에 점심시간. 가벼운 대화를 나누며 후딱 식사 마치고 담배나 커피로 입가심하고 나면 또 오후. 그러다 퇴근.

출근한 지 일주일도 안 된 재광 또한 다를 바 없었다. 주어진 업무에 몰두하다 보면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그래도 막내이니 일찌감치 출근해 업무를 준비하고, 의주의 자기 자랑을 노동요처럼 듣는 일상의 반복이었다.

그 덕에 적응은 빨랐다. 그리고 오늘도 여느 때와 같은 오후였다. 대표가 갑작스럽게 자신의 방문을 박차고 나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 오늘따라 축축 처지는데 시원한 거라도 한 잔씩 마시고 합시다.

예고 없이 밖으로 나온 대표는 자신의 카드를 높이 치켜들며 그렇게 말했다.

재광이 요 며칠 봐온 선호는 나이보다 더 의젓하고 훨씬 어른스러운 느낌이었건만, 전설의 검이라도 빼 들 듯하는 행동에서는 그가 왜 의주와 친구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자주 이렇게 사주세요?”

덕분에 재광은 공식적으로 바깥바람을 쐬러 나올 수 있었다. 계산은 대표의 카드지만 사다 나르는 건 막내의 몫이기 때문이다.

“자주는 아닌데 그렇다고 또 가끔도 아닌? 그냥 내키면 종종 이러세요.”

재광이 오기 전까지 막내였다던 치원은 가볍게 대꾸하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두 사람 다 양손에 음료 캐리어를 든 상태라 검지만 뻗어 겨우 누르는 모양새였다.

애매한 오후 시간대라 그런지 엘리베이터의 움직임이 빨랐다. 1층 로비에서 출발해 막힘없이 사무실이 있는 층으로 직행한 것이다.

재광과 치원은 사이좋게 사무실로 돌아와 다른 직원들이 주문한 음료를 나눠줬다. 테이크아웃 잔을 책상에 놓아줄 때마다 다들 고맙다는 인사를 한마디씩 전했다.

“재광 씨는 뭐 마셔요?”

의주는 역시나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고 말이다.

두 사람의 자리가 가장 가깝다 보니 의주의 음료를 챙기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재광이 됐다. 그것까지는 아무 거리낌도 없었는데, 불쑥 묻는 소리에 의심의 눈초리부터 되고 만다.

다른 사람이 같은 말을 했다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거였다. 지나가는 소리로 가볍게 물을 법한 내용이니까.

하지만 의주는 달랐다. 스몰토크에 불과한 말투로 물으면서도 얼굴에는 장난기가 그득한 거다. 두 눈도 초롱초롱 빛났다.

“그냥 아이스 아메리카노요.”

하지만 실없는 장난이 내키지 않더라도 한낱 인턴으로서는 순순히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먹금한답시고 또렷하게 들린 말을 무자비하게 씹어 먹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니던가.

그래서 플라스틱 컵을 가볍게 들어 보이며 대답했더니 의주가 대뜸 그런다.

“나랑 바꾸자.”

재광은 “예?” 도 아니고 한층 얼빠진 억양으로 “에?” 했다.

의주는 주문을 받을 때부터 유난스러웠다. 남들이 아바라, 기껏해야 피치 요거트 스무디 정도를 외칠 때 홀로 휘핑 추가에 초코칩 반은 갈고 반은 올리고 시럽은 반 펌프 등등 온갖 옵션 사항을 늘어놓은 것이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음료는 당 폭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재광이라면 절대 먼저 찾아 먹을 일 없는 비주얼이었다.

그랬는데 그걸 인제 와서 재광의 것과 바꿔 먹자니 이 무슨 변덕이란 말인가.

“나 갑자기 카페인으로 머리 팍팍 굴려야 될 일이 생겼단 말이야.”

심지어는 멋대로 굴면서 눈치란 것도 볼 줄을 몰랐다. 오히려 당당하게 요구한다. 재광은 어이없이 쳐다보면서도 선뜻 싫다는 대답은 안 했다.

형 기분에 따라 먹던 것도 뺏겨본 차남의 DNA가 그의 사회생활을 원활하게 만들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요구는 황당하지만 이 정도는 참고 넘길 수 있는 축에 속하는 거다.

“진짜로요?”

여기서 의주가 “빨리!” 하고 재촉하면 군말 없이 제 커피를 넘겨줄 태세였다. 먼저 잔을 건네줘야 하나 고민하는 기색을 읽은 의주는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아니지. 내 입맛에 맞춰서 디테일하게 맞춘 레시핀데 이걸 왜 양보하겠어.”

“아….”

“아쉽지만 오늘은 아아 마셔요. 궁금하면 다음에 따라 주문해보든지 하고.”

“아, 네.”

다른 사람이 본다면 참으로 재미없는 반응이라 할 테다. 이렇게 찔러도 저렇게 때려도 “아, 네” 하는 게 전부지 않나. 그러나 의주는 오히려 이런 반응을 즐기는 것 같았다.

이쯤 되면 재광도 그 사실을 모를 수가 없었다. 불시에 윙크를 당했다가 다시 눈이 마주쳤을 때 굳이 부끄럽냐 물은 것도, 담배 한 대 피우고 오겠다는 말에 구속이니 간섭이니 해댔던 것도. 다 같은 맥락이었던 게 분명했다.

하지만 깨달았다고 해서 어쩔 도리가 있는 건 아니었다. 집에서야 신경을 긁는 형한테 한 번씩 발끈하기라도 한다지만, 회사에서 상사한데 그럴 수는 없잖은가.

‘집이나 회사나 당하고만 살 판잔가.’

재광은 가슴 한쪽이 먹먹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

재광은 대표가 하사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쪽 빨았다.

첫 과제라 긴장해서 그렇지, 알고 보면 앱 이용 내역을 조회한 뒤 이벤트에 응모하는 간단한 내용이라 생각한 게 사실이었다. 그런데 막상 구현해보려니 맘처럼 잘 안 돼 수정을 거듭하는 중이었다.

제가 짠 코드를 질리도록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눈 밑이 금세 퀭해졌다. 카페인으로 잠시 끌어올린 집중력도 금세 바닥이 난다.

재광의 멍한 눈길은 문득 작업표시줄로 향했다. 메신저 아이콘이 부산스럽게 깜빡거리고 있었다.

분명 첫 출근 날만 해도 딴짓은 꿈도 못 꿨었다. 실제로도 집에 돌아가서야 낮 동안 쌓인 메시지를 확인했었지 않나.

하지만 적응이 빨랐다. 며칠 새 재광은 업무 시간 틈틈이 메신저를 주고받는 정도는 그냥 할 수 있게 됐다. 이번에도 아이콘을 클릭해 채팅창을 여는 동작이 빨랐다.

송민주

우리 안 봐? 김재광도 취직했고 연우도 이제 한가해지잖아.1

오후 5:48

친한 대학 동기들이 있는 단체 채팅방이었다. 주로 이 방에 알림을 띄우는 민주가 오늘도 역시나 먼저 말을 걸었다.

언급되는 제 이름을 무심하게 쳐다보던 재광은 건조한 손길로 타닥타닥 답장을 보냈다.

나는 다음 주 화요일에 회식 있어서 그때만 빼고 괜찮음. 1

오후 5:49

송민주

오빠는요? 연우는?1

오후 5:50

도원이 형

나는 다음 주는 어려울 거 같고

연우는 이번 주까지 중요한 일정 다 마무리된다고 했어.1

오후 5:52

연우는 지금도 일하는 중인 모양이었다. 답이 없는 그를 대신해 도원이 연우 몫까지 답장했다.

각자의 일정이 대강 확인되자 채팅창에 더 활기가 붙는다. 맨 처음 말을 꺼냈던 민주의 주도로 날짜와 시간, 장소가 착착 정해졌다.

최종 확정된 내용이 공지로 지정됐을 때는 재광도 살짝 들뜬 기분이 됐다. 그도 그럴 게 마지막으로 본 이후 시일이 제법 지났다.

아마 5월쯤이었을 거다. 재광이 상반기 공채에 탈락하고 삽질하던 때, 한창 바쁘던 연우가 시간이 나 다 같이 모이기로 했었다. 간만에 기분 전환도 할 겸 약속에 나섰던 재광은 반가운 얼굴들을 보고 좋았다가 돌아오는 길에는 못내 우울했던 기억이 있었다.

가장 먼저 취업한 민주는 내로라하는 기업에 입사해 어엿한 판교인이 됐고, 진로를 두고 고민이 많던 도원도 대학원에 진학해 제 몫을 톡톡히 해내는 중이었다. 넷 중 가장 바쁜 연우야 더 말할 것도 없었고.

그러다 보니 꼭 졸업 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잘 놀다가도 왜인지 위축이 됐다. 다들 각자의 길을 잘 가는 와중에 저만 아무런 발전이 없는 것 같아서였다.

물론 지금도 회사 이름을 말하면 알 사람 없는 기업의 인턴일 뿐이지만….

그래도 어엿한 직장이 있는 상태라 그때와는 약속을 잡는 기분부터 달랐다.

“재광 씨, 재광 씨.”

약속을 확정 짓고 가벼운 사담을 주고받을 때였다. 의주가 재광의 이름을 연달아 부른다. 재광은 무심한 표정으로 누구보다 빠르게 Alt+Tab을 눌렀다.

“네.”

“이벤트 그거 오래 걸려요?”

재광에게 준 과제 진행 현황을 확인하려는 듯했다. 재광은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의주를 봤다.

“아뇨. 내일 오전 중에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애초에 주어진 기간이 내일이었으니 오전까지면 꽤 여유를 두고 마감하는 셈이었다. 초중반까지 조금 버벅거리긴 했어도 이후부터는 꽤 작업이 원활했던 터라 재광은 드물게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질문의 의도는 정말로 기간을 확인하고자 함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제 고작 일주일 되어가지만 의주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얘기를 한마디 얹고 싶어 입술이 간질간질한 눈치다.

“아아. 이 시간까지 너무 열심히 해서 혹시 기간이 너무 빡빡한가 했지. 나 같으면 진작 끝내고 놀다가 바로 퇴근했을 거 같아서.”

그 말을 듣고서야 재광의 시선이 모니터 하단으로 향한다. 오랜만에 동기들과 약속을 잡고 이런저런 잡담을 했더니만 그새 여섯 시가 넘었다. 그래 봐야 5분 조금 넘어간 수준이긴 하다만.

“나 다른 사람들이랑 일해본 지 좀 돼서 보통 사람 속도는 감이 잘 안 잡히거든요. 아무튼 지금은 그렇다 치고, 다음에라도 너무 벅차다 싶으면 얘기해줘요.”

“아…. 네.”

“사람들이 일 잘한다 천재다 그러면 앞뒤 꽉 막혀서 소통도 잘 안 될 거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또 융통성이란 게 있잖아. 그러니까 부담 갖지 말고 꼭. 알았죠?”

“네. 그럴게요. 오늘은 하던 것만 정리하고 가겠습니다.”

실력 좋고 손 빠르며 융통성까지 지닌 자신의 완벽함을 늘어놓은 의주는 제법 흡족한 모습이었다. 담담한 재광의 대꾸에 보내는 오케이 사인에서 만족감이 물씬 풍긴다. 재광은 어떤 낌새도 읽지 못한 척 건조한 눈길로 모니터를 응시했다.

아직도 당연하게 저 자신을 치켜세우는 의주의 언사에는 영 적응이 안 됐다. 하지만 퇴근 시간만 되면 종례하듯 꼬박꼬박 있는 일이라, 이것도 직장에서의 사이클이라 여기면 꼴사나운 감정을 차분히 다스릴 수 있었다.

뭐, 퇴근 시간에 이러는 건 꼭 나쁜 일만도 아니었고.

“퇴근, 안 하세요?”

재광은 이만 인사를 하고 나가려다 말고 의주에게 말을 건넸다. 제게는 5분 좀 넘었다고 일이 벅찬지 어쩐지 떠들어대더니, 정작 본인은 자리에서 일어날 기미가 안 보이는 탓이다.

돌이켜보면 재광이 출근한 이래 늘 그랬던 것 같다. 재광에게는 여섯 시가 조금만 넘어도 실력의 차이가 어쩌고, 보통 사람들의 속도가 어쩌고 연설을 하며 퇴근을 재촉하면서 의주 본인은 늘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던 거다.

그동안은 또 자랑 시작이라며 속으로 혀를 차다 도망치듯 사무실을 나서느라 몰랐다. 그러다 오늘 문득 의문이 들어 퇴근 안 하냐 물었더니 의주가 픽 웃는다.

“재광 씨는 햇병아리 인턴이지만 나는 여기 CTO잖아. 최고 기술 책임자. 이게 그냥 이름만 주어지는 게 아니거든. 중요한 일들을 책임지려면 들이는 공도 많고 그런 거 아니겠어요?”

초과 근무를 얼마나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단 한 시간이라도 연일 계속되면 짜증이 날 법도 한데. 의주는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CTO로서 얼마나 대단한 책임을 지고 있는지 그 영향력에 심취한 듯 보였다.

“아. 예.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잠시나마 그를 평범한 직장인으로 보고 괜한 걸 물은 재광은 서둘러 인사를 마무리했다. 히죽 웃은 의주가 잘 가라며 친히 손을 흔들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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