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생각
"이야아... 여름도 이젠 본격적이구만."
서재의 창문으로 보이는 눈부신 풍경을 보면서 내 담당편집자인 A군이 중얼거렸다.
"응?"
A군의 말에 나는 컴퓨터 키보드를 치던 손을 멈추고, 잠시 창밖의 풍경에 눈을 돌렸다.
북향의 서재의 창문에서는 강한 햇빛은 들어오지 않았지만, 뒷마당의 나무들의 푸른 잎사귀들이 바람에 흔들리면서 눈부신 빛을 반짝반짝 반사시키고, 한쪽에서는 이웃의 어린애들이 수영복차림으로 즐거운 듯이 호스의 물을 끼얹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이 어두운 서재에서 작품을 쓰고 있는 나에게, 먼 옛날의 소년시절을 생각나게 했다.
"이런 날씨 좋은 날은 다 때려치우고 바다라도 가고 싶은데 말이죠."
내 마음에 꼬마 장난꾸러기 시절의 뜨거운 기분이 살아나는 듯했다.
"선생님도 변함없이 글쓰는 건 순조로우신 것 같고, 올해 여름휴가때는 취재 겸해서 따님과 해수욕이라도 가시죠?"
A군은 벌써부터 잔뜩 나와 있는 배를 어루만지면서 장난스러운 눈으로 나를 보았다.
"하하하하, 그거 괜찮은 생각인데.... 그러고 보니 자네도 딸이 있다고 들은 것 같은데, 어때, 자네도 아이들 데리고 놀러가지 그래?"
"아~아, 우리집은 별로.... 딸도 머리가 굵어지면서 요즘은 가족끼리 어딜 간다든가 나랑 어디 놀러가는 건 별로 안좋아해요. 뭐, 이 배를 보면 그럴 수밖에 없지만, 아빠로서 좀 쓸쓸하기는 하죠, 하하하하."
그렇게 말하면서 A군은 배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그러고 보니 선생님의 따님은 지금도 선생님과 쇼핑을 가는 것 같은데, 따님도 꽤 나이를 먹었을 텐데도.... 야아, 정말 효녀네요.."
"아니, 아무래도 홀아비니까 조금 응석받이로 키워서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무슨 소리세요, 정말 좋은 딸이잖아요. 하지만 마리양도 요즘 정말 여성스러워지고 있데요...."
한마디 지나가는 말처럼 한 그 '한마디'가 나를 철렁하게 만들었다.
역시 A군은 편집자였다. 편집부 제일의 애처가에다, 일에도 수완을 보이는 그의 날카로운 관찰력에 나는 조금 동요했다. A군은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딸 가진 부모'로서의 고민같은 것을 나에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아~아, 우리 딸도 요즘 철렁할 정도의 모습을 보이는 일이 있어서 아빠가 봐도 복잡한 기분이라니까요. 뭐, 우리 딸을 아무리 자랑해 봤자 마리양에게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팔불출이라.... 저 딸이 저렇게 성장해서 다른 남자에게 그 몸을 보일 걸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는 때도 있어요."
"흠.. 분명 자네 생각이 마음에 와닿기는 해."
나는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맞장구를 쳤다.
"이렇게 말은 해도 그 기분을 어떻게 할 수도 없으니까, 요즘은 딸의 어릴 때의 앨범을 열심히 들여다보면서 혼자 한숨을 쉬기도 해요. 얼마나 한심스러운 아빠인지.."
그렇게 말하면서 A군은 창피한 듯이 뒤통수를 긁었다.
"이런이런, 같은 딸을 가진 아빠로서 자네 말에 완전히 공감해. 하지만 자네 경우에는 멋진 부인이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지 않은가."
"아, 이런 죄송합니다. 나도 모르게 쓸데없이 입을 놀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A군은 큰 배를 집어넣으면서, 진지한 얼굴로 나에게 사죄했다.
"뭘, 신경쓰지 않아도 돼. 나야말로 엉뚱한 소리를 했군.....그럼, 같은 힘든 환경을 가진 아빠로서, 가족을 위해 일에 열중해야지."
나는 빙긋 웃으면서 A군의 어깨를 툭 하고 쳤다.
A군은 수다장이이면서도, 나와는 마음이 맞아서 서로 일하면서 원고가 늦은 적은 한번도 없다. 나는 그 일은 잊어버리고 모니터만 보면서, 오늘 쓸 예정 분량까지 묵묵히 키보드를 치기 시작했다.
2시간 후.
A군은 편집부에 돌아가고, 나는 혼자 거실에서 옛날 앨범을 보고 있었다. 아내가 죽은 이후 옛날 것은 그다지 보지 않게 되었었는데, 아무래도 A군의 말이 마음에 와닿고 있었던 걸까.
거기에는 딸의 어릴 적의 모습이 있었다.
나는 팔불출인걸까.(아니, 딸과 그런 관계를 가진 이상, 틀림없이 나는 누구보다도 확실한 팔불출이다) 그때부터 딸의 귀여움이 눈에 확 띄고 있었다.
초등학교때의 딸은 머리를 길게 기르고 있었지만, 둥근 얼굴이나 부리부리하게 큰 눈은 지금과 똑같다. 사진에서의 딸은 언제나 오똑한 코를 세우고 조그만 입을 크게 열고 얼굴 전체로 웃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지금은 그때보다도 코가 더 오똑해진 것 같다.
외동딸로 쭉 엄마없이 커 와서일까. 딸은 어릴 때부터 사람을 슬프게 하는 우는 얼굴을 사람들 앞에서 절대 보이지 않는 아이였다. 사람들 앞에서도 당당하게 나서던 처와 꼭 닮은 듯하다. 싸움을 해도 지는 일이 없는 모습이 있는 반면 옷차림은 언제나 귀여운 것을 좋아해서, 그때에는 빨래와 상처가 언제나 가득이었다. 이웃 아줌마에게 가서 고생고생하면서 바느질하는 법을 배워 오던 일이 지금도 확실하게 생각이 난다.
초조를 맞았던 것이 아마 초등학교 5학년때였던가. 그때는 가끔 만나는 기자중에 여기자가 하나 있어서 그녀에게 처리를 부탁했던 기억이 있다. 그때부터 서서히 얌전해지기 시작하더니, 지금에 와서는 나에게 있어 '여자'로 탈피해 있었다.
나는 앨범을 보면서 확실한 결의를 다졌다. 이제 나는 마리 없는 인생은 생각할 수 없다. 다른 딸들처럼 언젠가 다른 남자에게 빼앗기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다.
나는 앨범에서 눈을 떼고 열려 있는 방문으로 보이는 옆방의 불단에 눈을 돌렸다. 거기에는 아내가 언제나처럼 웃는 얼굴을 나에게 향하고 있었다.
"친딸과 관계를 가진 나를 경멸하고 있겠지..... 지옥에 떨어지기 전에 사죄하러 갈테니까 그 때까지 기다려 줘요...."
사진의 아내의 얼굴이 기분탓인지 슬퍼 보였다. 나는 깊은 한숨을 쉬면서 그대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있잖아 있잖아, 마리, 잠깐 이거 봐봐!"
"왜그래, 미찌꼬?"
그때, 마리는 중학교때부터의 친구인 다께다 미찌꼬와 쇼핑을 하면서 길을 걷던 중이었다.
미찌꼬의 앞의 윈도에는 호화로운 색깔과 무늬의 원피스와, 투명하게 비칠 듯한 스카이블루에 하얀 프릴이 붙은 비키니 등 여름용품과 여자 수영복들이 자기들의 계절이 이르렀음을 자랑하고 있었다.
"야~아, 이거 정말 귀엽다~아. 아, 이쪽건 어때? 너무 어른스러운가?"
"흐~응. 하지만 미찌꼬라면 O.K야. 몸매 좋지, 얼굴도 마리랑 달리 어린애 같지 않구 말야."
"흐흥, 그~으래?"
미찌꼬는 활짝 웃으면서 즐거운 듯했다.
분명 미찌꼬의 몸매는 고교생으로서는 상당히 글래머였고, 얼굴도 마리와 비교하면 훨씬 섹시했다.
여자아이들이 보기에 보기 드문 미인 2인조였지만, 마리는 미찌꼬의 쾌활하고 구애받지 않는 성격에 끌렸고, 미찌꼬는 마리의 안에 잠재된 강한 마음에 끌려서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반이 다르면서도 만나는 것을 계속해 왔었다.
"마리야말로 몸매가 굉장하니까, 저런 거 어때~ ?"
"에엣~~ !?"
미찌꼬가 가리킨 것은 검정 단일색으로, 배부분이 크게 파여있는 하이레그의 원피스였다.
"잠깐... 저런 거 너무 대담하지 않니?"
마리는 창피스러운 듯이 얼굴을 붉히면서 조심스럽게 수영복을 가리켰다.
"무슨 소리 하는거야. 마리 넌 언제까지 파더콤플렉스일꺼니. 저런 거 입고 네쪽에서 확~ 헌팅하는 거야."
"우~~~웅. 하지만 마리는 아직 애인만들기 싫어....."
마리는 우물쭈물하면서 두손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그걸 보면서 미찌꼬는 이런이런 하면서 후우 하고 한숨을 크게 쉬었다.
"마리야 잠깐 봐.... 너 또 남자애 하나 차버렸지?"
"알고 있었어....!?"
"당연하지. 이 몸 미찌꼬는 이래뵈도 동네 모든 소식을 알고 있잖니..... 있잖아, 그렇게 아빠가 좋아?"
"응..... 하지만 이거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돼. 미찌꼬니까 솔직하게 말하는 거지만..."
마리는 미찌꼬에게 약점을 잡힌 듯이 귀까지 빨개졌다.
"물론 아무한테도 얘기 안할거야. 하지만.... 마리 아빠 몇번인가 본적이 있지만, 한마디로 말해서 그렇게 핸섬하지도 않고, 소설가라서 머리는 좋겠지만 왠지 분위기 있는 타입도 아니고...."
"너무해~ 그렇게까지는 말하지 않아도 되잖아."
마리는 입가에 조금 미소를 남기면서도 진지한 표정으로 미찌꼬를 쳐다보았다.
"아하하, 미안미안. 하지만 지금도 이런 마리를 좋아하는 남자는 우리 반에도 많아.
거기에 이번에 차버린 B반의 쥰 군이야말로 그렇지 않니? 쥰 군 부드러운데다 핸섬해서 하급생들한테는 팬클럽이 생겨 있을 정도로 인기있다구."
"우~~웅...... 하지만 쥰군은 그렇게 부드럽게 보이지 않았어.... 왠지 차갑고, 너무 자신만만하고.... 마리는 그렇게 말하는 타입은 사람은 싫어."
"그럼, 아빠는 엄청나게 부드러운가보네?"
"응. 정말 친절하다고 생각해..... 하지만 화낼 때는 정말 무서워. 음식을 남기거나, 어른을 무시하거나 할 때는 얼굴모양이 바뀌는 게 아닐까 싶게 무섭게 변해."
"흐~~응. 마리는 아빠의 그런 면이 좋은거야?"
"그것 뿐만은 아냐. 소설을 쓸 때의 아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집중하고 있어서 너무 멋있어! 거기다 말야, 아빤 지금까지 엄청나게 재혼 얘기가 많았었는데, 전부 거절했었어. 그 정도로 죽은 엄마를 사랑한다는 게 멋있다고 생각 안해?"
어느샌가 마리의 눈동자는 반짝반짝 빛나면서, 마치 사랑하는 연인을 자랑하는 것처럼 미찌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미찌꼬는 그런 마리의 표정을 보면서 이런이런 하고 중얼거리면서 어깨를 움츠렸다.
"졌다 졌어.. 그 정도로 좋아하는 마리의 아빠도 행복하네.... 있잖아, 마리. 그정도로 좋아한다면 이번 여름에 아빠를 유혹하는 게 어때?"
"에에~ ?"
아무리 친구인 미찌꼬라고는 해도 '이미 유혹했다'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어쨌든 마리는 어쩔 줄 몰라하면서 미찌꼬의 말에 놀라고 있었다.
"좋잖아, 아무튼 좋아하는 거지? 친아빠랑 금지된 사랑을 불태우는 여름... 우와... 로맨틱하네."
"그런 로맨틱은...."
"오랜만에 부녀끼리 해수욕을 간다, 거기서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어른의 섹시함을 가질 정도로 성장한 외동딸을 발견. 그 차림에 철렁한 아빠는 그날 밤 둘이서 묵는 호텔방에서 부녀관계를 초월한 사랑의 확인을..... 꺄하하하하... 살 떨려..!!"
"...... 미찌꼬. 사람을 장난감 만들어 놓고 그렇게 즐겁니?"
"에~~에? 화났어?"
"으응, 몰라!"
마리는 귀엽게 얼굴을 붉히면서, 쇼윈도우에서 떠나 뚜벅뚜벅 가게의 출구를 향해 걸어갔다.
"어...어어, 미안미안. 마리 기다려~~ "
황망히 뒷모습을 쫓는 미찌꼬.
두 여고생은 잠시 뒤 손에 든 물건을 흔들면서 하나는 다른 하나를 잡아 끌고, 하나는 가지않으려고 버티다가 잡아 끄는 쪽이 또 하나를 끌고 가게의 복작대는 사람들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