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一章 ベルシュタィンの?
「폐하…… 기다려주세요, 안토니우스 폐하!」
군사회의실에서부터 연와색 융단이 길게 깔린 복도를 빠른 걸음으로 달리며 엘레노어는 앞에 걸어가는 금발의 청년을 뒤쫓았다. 성 안에서는 평소같은 갑옷이 아닌 보라색 실크드레스를 입고 있었기에 달리기가 쉽지 않았다.
(정말…… 성 안에서도 갑옷을 입고 있어야하는건데!)
드레스 속으로 비쳐보이지않도록 같은 계열의 색으로 맞춰입은 속옷 안쪽에서 넘쳐흐를듯이 출렁거리는 젖가슴을 손으로 누르면서 마음속으로 혀를 찼다.
(아, 정말! 아무리 입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니까, 이런 옷은!)
드레스뿐이 아니었다. 손목과 발목, 목 주위에서 환한 존재감을 내보이는 액세서리들도 여전히 어색했다. 귀족답게 몸을 장식하기위해선 필요할지 모르지만 기사로서 뜻을 세운 자신에겐 별로 내키는게 아니었다.
「……잠시만, 잠시만 멈춰주세요…… 안토니우스 폐하!」
몇 번이나 외친 후에야 귀에 들렸는지 청년은 뒤돌아보고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으응……? 아, 엘렌. 아름다운 나의 엘렌…」
엘레노어는 예상치못한 말에 당황하며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지만, 곧 원래의 얼굴표정을 되찾기위해 헛기침하며 말을 이었다.
「그, 그런 말씀은……그보다 방금 있었던 군사회의의 건입니다!」
허리에 손을 올리자 풍만한 젖가슴이 튀어올랐고, 얇은 드레스 천으로 둘러싸인 멋진 엉덩이도 크게 흔들리며 요염한 볼륨감을 과시했다. 단정하지만 긴장된 표정에 맞춰 청옥석같은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을 발했다. 도톰한 입술은 촉촉한 윤택이 흘러넘쳐 마치 꽃봉오리처럼 사랑스러웠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폐하?」
드레스의 등이 깊게 파인 탓에 드러난 새하얀 피부를 충분히 숨길고도 남을만큼 길고 선명한 붉은 머리카락이 어깨에 흘러내린걸 쓸어넘기며 엘레노어는 입술을 가볍게 혀로 적시고 나서 입을 열었다.
「북방산맥에 사는 야만족들은 무력은 약하지만 궤계에 능숙합니다. 소탕뿐이라면 따라가는 장군들로도 충분하겠지만 암살의 위험도 생각하셔야합니다. 원정군을 인솔하는 폐하의 옥체를 지키기 위해선 엄선된 기사들…… 그 중에서도 단장이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본인을 데려가달라는 뜻같은데, 기사단장 엘레노어 루크텐타크 자작?」
「뭐… 그런 뜻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만………」
말끝이 흐려지자 국왕 안토니우스 벨슈타인은 곤란하다는듯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는 안되는 이유를 아까 설명했잖아. 이번 원정의 목적은 너의 힘을 빌리지않고 나의 무위를 과시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다시 한번 고려해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풀이 죽어 어깨를 늘어뜨린 엘레노어가 애원하듯 쳐다보았으나 국왕은 고개를 저었다.
「게다가 잘 알고 있겠지만 우리 벨슈타인의 검인 너마저 성을 비운다면 남방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그 나라가 어떻게 움직일지 걱정도 되고」
남쪽에서 대륙의 패권을 노리는 강국 메드락을 떠올리자 엘레노어의 얼굴도 긴장되었다. 그것은 잊혀지지않는 2년 전의 일이었다.
(내가 이 나라와……그리고 안토니우스와 만나게 된 전쟁……)
2년 전, 조국을 전쟁으로 잃고 자신의 실력부족을 뼈저리게 느낀 엘레노어는 대륙을 떠돌아다니며 기량을 연마하고 있던 중 벨슈타인에서 새로운 전쟁에 말려들었다. 불가침조약을 맺고있던 메드락의 갑작스런 침공을 받은 벨슈타인의 기사들은 준비태세가 갖춰지지않은 상태로 전쟁에 임하게되었다. 그리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기사단의 지휘를 맡고있던 당시의 국왕은 병상에 누워있는 상황이었고, 뒤를 이은 안토니우스의 지휘로는 패전에 패전을 거듭할 뿐이어서 적군은 금방이라도 성까지 밀어닥칠 기세였다.
「그때쯤이었지. 용병모집 공고를 보고 엘렌이 성에 온 것이……」
「네, 그렇습니다…… 잘 기억하고 계시네요」
대부분의 용병들도 패배가 뻔하다 생각하고 도망가던 상황에서 엘레노어는 단지 한마디만 했다.
「움직일 수 있는 병력은 어느 정도입니까?」
「메드락에 비해 10%밖에 안되는 병력만 있을뿐인데, 그런데도 너는 전혀 겁먹은 기색없이 지휘를 맡겠다고 나섰지…… 그리고 기적적인 승리를 가져왔고」
「그땐 자신감과 의욕만 과잉이어서…… 생각만해도 부끄럽습니다……」
그때는 그저 자신의 실력이 얼마나 향상되었는지 그걸 확인해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전쟁의 승패같은건 상관없으므로 어떻게 되던 자신은 곧바로 모습을 감춰버리겠다는, 다소 무책임한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승리한 나는 다른 기사들로부터 쏟아진 환호와 갈채때문에 억지로 성에 돌아오지않을 수 없었고… 그런 나를 이 분이 기쁘게 맞아주시며 후대해주셨지......)
국민들 앞에서 구국의 영웅이라며 크게 칭찬받고 이 나라에서 귀족의 지위까지 수여받았던 그 날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좋은 집과 안정적인 고정수입을 얻은데다가, 벨슈타인왕가의 사람들은 따뜻하게 대해줬지…… 게다가 안토니도……)
자작이란 지위와 함께 부여받은 영지를 다스리고 검술을 연마하다가 야만족과 싸움이 일어나면 소환에 응하는 생활속에서 만난 사람들의 따뜻함은 조국을 잃은 후 허무함으로 가득 차있던 엘레노어의 마음속에 천천히 스며들었다. 그리고 성을 방문할 때마다 자신을 환대해주는 안토니우스의 배려도 처음엔 거북하고 어색하게만 여겨졌지만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결심했지…… 이 나라는 결코 내 조국처럼 되게하지 않겠다고……)
조국을 잊은 것은 아니지만 지금의 엘레노어에겐 벨슈타인이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기에 어떠한 적들이 쳐들어오더라도 호국의 검이 되어 지켜내겠다고 다짐하고 다짐했다.
「그러니까, 엘렌.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서 나도 이 나라를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그리고 너에게 잘 어울리는 남자라는걸 사람들 앞에 증명해보이고 싶고……그러기위해선 너의 도움없이 원정에서 성공해야 돼」
진지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그렇게 말하면 더 이상 고집피울 수 없다. 단념한듯 한숨을 내쉰 엘레노어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폐하…… 그럼 부디… 무사히 돌아오셔야해요……」
「걱정하지마…… 이렇게 아름다운 약혼자를 놔두고 난 죽지 않을테니까. 사랑하는 엘렌, 이리와…… 」
「……」
부드럽게 손이 잡혔다고 생각된 순간 그대로 잡아당겨지며 국왕의 품안으로 안겨들어갔다.
「이, 이러시면 안됩니다, 폐하. 여긴 사람들의 눈이…… 게다가 이런 장소에서 엘렌이라고 부르시는건 삼가하셔야… 아아……」
「괜찮아, 우리 둘 뿐인걸……」
부드러운 그의 손길이 등과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쓰다듬었고, 귓가엔 감미로운 입맞춤이 퍼부어졌다.
「사랑해, 엘렌……」
(아......안토니… 저도요......)
며칠 후면 안토니우스는 원정길에 오른다. 그동안 그의 따스함을 잊지않도록 엘레노어도 왕의 등을 팔로 감싸고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채 몸과 마음을 행복으로 채웠다.
퀼트대륙의 남쪽. 대륙을 가로지르듯 쭉 뻗어있는 나리아스산맥 아래를 넓게 지배하는 왕국 벨슈타인은 남북 양쪽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다. 북쪽에는 산맥 여기저기에서 널리 세력을 펼치며 왕국과 대적하는 야만족인 숲의 부족들. 그리고 남쪽에는 바다를 끼고 있는 대국 메드락.
2년 전에 메드락으로부터 침략당한 것을 잊을 수 없는 벨슈타인의 젊은 왕 안토니우스는 머지않은 장래에 일어날 그들과의 대규모 전쟁을 염두에 두고 후방의 문제거리를 없애기위해 2개월의 기간을 잡고 북방원정을 떠났다.
「이제 겨우 열흘이 지난건가… 휴우, 아직 한참 남았구나……」
근위기사단장의 집무실에서 글라스를 기울이는 엘레노어는 연보라색 드레스에 싸인 늘씬하게 뻗은 긴 다리를 꼬은채 걸터앉은 의자를 흔들며 중얼거렸다.
「무사히 돌아오셔야 핱텐데…… 그런데 2개월만에 끝날까……?」
글라스에 들어있는 내용물을 빙글빙글 돌리면서 누구에게라고 할 것도 없이 계속 혼자말을 했다. 술에 취한 것은 아니었다. 글라스에 들어있는 붉은 액체는 알코올이 전혀 들어있지 않은 평범한 포도주스였다.
「저기, 엘레노어? 매일매일 술을…… 아니 주스를 상대로 혼잣말하는건 그만 하는게 어떻겠어요?」
기가 막히다는듯한 여성의 목소리가 한숨에 섞여 날아왔다.
「어…… 아, 저, 리제롯테양, 이런 실례를………」
「물론 걱정하는 마음은 잘 알지만…」
응접용 소파에 앉아있는 여성 리제롯테는 우아한 미소를 띠운채 곤란하다는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륙에선 보기힘든, 촉촉한 윤기가 흐르는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트린 그 모습에선 요조숙녀의 분위기가 전해져왔다. 가늘고 긴 눈매 속의 붉은 눈동자는 미래를 바라보는듯 촉촉했고, 얇은 입술에는 기품과 요염함이 배어있었다. 긴 치마로 다리를 가린 고급스러운 드레스는 균형잡힌 바디라인을 드러내며 가슴부위의 자그마한 틈새로 도자기같은 광택이 흐르는 매끈매끈한 피부를 내비쳤다.
그런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내면에는 국왕의 부재중 내정을 맡을정도로 지혜가 흘러넘쳤다. 재색겸비라는 표현이 그야말로 잘 어울리는 그녀는 국내 귀족중 맨 앞자리를 차지하는 파렌하이트가문의 수장이었다.
「폐하께서 왜 우리들에게 성을 지키는 임무를 맡기셨는지 잘 알고 계시잖아요. 그런 당신이 이런 모습이라면…… 대체 나라는 어떻게 지키려는건가요?」
「그, 그건 잘 알고 있습니다! 그저… 걱정이 되서…… 2개월 넘게 떨어져있던 적이 지난 2년 동안 한번도 없었거든요……」
무심결에 속마음을 드러낸 엘레노어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하지만 상대방이 연상의 여성인데다 평소 의지하는 인물이라 말을 멈추지않았다.
「사실은 지금 당장이라도 말을 달려 뒤쫓아가고 싶습니다! 하지만…… 폐하께서 저를 호국의 검이라고 불러주신만큼 거기에 부응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참고 기다리는 중입니다………」
「어머나? 그렇군요…… 어떤 남자에게도 지지않을만큼 강하고 늠름한 기사님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상은 이런 아가씨라니…… 다른 기사들이 이 사실을 알면 어떻게 생각할까요?」
「이, 이런 모습을 보여줄 바엔 차라리 죽어버릴거에요!」
「그건 뭐, 폐하께서 막으실텐데…… 호호호」
킥킥거리며 놀려대는 미녀의 말에 귀까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숙였다.
「일년 반 전만 해도 이런 모습을 보게 될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역시 바뀌는거에요, 여자라는건…」
「아, 저…… 그것은… 그것도 안토니덕분에………」
고개를 숙인 채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뭔가를 확인하듯 고개를 몇 번 끄덕이다가 부끄러운듯 슬쩍 쳐다보는 그녀의 반응을 리제롯테가 만면에 미소를 띠며 바라봤다. 그것은 조롱이나 비웃음이 전혀 없는, 자애로 가득 찬 온화한 미소였다.
(이 분은 내가… 그런 말을 했었는데도 변함없이…… 이런 다정한 모습을 보여주다니……)
그렇게 생각하며 과거의 자신을 다시 떠올렸다. 일년 반 전, 그 사건이 일어났을 무렵이었다.
(리제롯테양이 저지른 부정을 내가 규탄했었는데…… 그 일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불안한 마음에 엿보듯 그녀에게 시선을 던지자 마치 그녀의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한 것처럼 리제롯테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호호, 뭔가 걱정되는 얼굴이네요…… 아마 폐하의 일이 아니라 그 때의 일이 신경쓰이나봐요? 하지만 안심해도 돼요. 그 일에 대해서 나는 아무런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아요. 오히려 감사하고 있는걸요, 엘레노어」
방긋 미소짓는 그녀는 일년 반 전, 어떤 정책을 수립했었다. 장기적으로 보면 국민생활이 근본적으로 개선되는 것이었지만, 단기적으로는 국민들에게 큰 부담을 주는 것이었다. 리제롯테는 반발을 억누르기위해 국민에게 큰 영향력을 끼치는 상인집단에 사주하여 자신의 정책을 추진하려고 했었다.
(우연히 그 사실을 알게 된 안토니에 의해 그 정책은 중단되었고…… 그 결과 리제롯테양의 가문은 많은 특권을 박탈당했지. 게다가 그 상인집단은 뇌물수수죄로 전재산을 나라에 몰수당하는 바람에 몰락해서 가족들도 뿔뿔히 흩어졌다고 들었는데……)
자신이 했던 일이 정말 옳은 일이었는지 지금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런 염려를 눈치챘는지 눈 앞의 미녀귀족이 입을 열었다.
「정치무대에서 내려오면 여러 특권을 잃는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런데도 폐하께선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이렇게 부재중인 성의 집무까지 맡겨주셨으니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부족한 능력이나마 나라를 위해 당연히 바쳐야지요」
사심이 깃들지않는 당당한 표정으로 하는 그런 말을 듣자 자신이 신경쓰는게 오히려 그녀에게 상처주는 것이 아닐지 걱정될 정도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리제롯테양이 부재중 업무를 맡고있는 이 나라를 외적으로부터 지키는 일에 진력하겠습니다」
「호호호, 고마워요, 엘레노어. 그 모습을 보니 역시 믿음직스럽네요. 그렇지만 너무 무리하지는 말아요………」
「예…… 아, 아앗…! 무, 무슨…」
장난스럽게 눈을 빛내는 리제롯테가 우아한 걸음걸이로 마루위를 미끄러지듯이 다가와 껴안더니 양손을 뻗어 갑자기 엘레노어의 엉덩이를 덥석 움켜잡았다.
「뭐…… 뭐하시는거에요!」
당황한 표정으로 소리지르지만 자신보다 나이많은 상대를 밀칠 수도 없어서 몸을 경직시킨채 그냥 서있었다.
「역시 멋진 몸이네요. 호호호… 이런 몸에 조그마한 상처라도 나면 폐하께서 슬퍼하실테니까 소중하게 간직하세요. 사랑하는 사람이 멀리 있으니 욕구를 주체하긴 어렵겠지만……」
「주, 주체 못할 일은 특별히 없어요! 원래 폐하께선 혼전에 그, 그런 건 하시지 않으시기 때문에 아직, 그…… 그러니까……」
「헤에, 그래요? 아까워라…… 이렇게나 좋은 감촉인데… 흐으으음……」
평소에도 여러번 계속되어왔던 성희롱 비슷한 스킨십. 여성 특유의 교묘한 손놀림으로 거침없이 엉덩이를 어루만지며 주무르자 너무나도 부끄러운 나머지 온몸에서 식은 땀이 배어나왔다.
(아, 아앗...... 빨리, 빨리 놔주세요...!)
양초의 길이가 절반으로 줄어들만한 시간동안 마음껏 엉덩이를 주무르는동안 숨이 거칠어지며 의자에 기댄 엘레노어에게 리제롯테가 미소를 보냈다.
「흐응, 이정도라면 이 나라를 마음놓고 맡길 수 있겠네요」
「어, 어떻게 그런 결론을…… 이제 그만…… 그만 하세요!」
가쁜 숨을 내쉬며 눈을 치켜뜨고 새빨갛게 된 얼굴로 소리치자 흑발미녀는 땀이 배인 얼굴로 천천히 뒷걸음질쳤다.
「그럼…… 오늘은 이정도만… 외로운 기사님께 너무 강한 자극이었을려나?」
「하아, 하아…… 파렌하이트공, 저도…… 참는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호호호… 그럼, 다음에 봐요」
치마자락을 살짝 걷어올리고 경쾌하게 방을 나서는 리제롯테를 보며 엘레노어는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저분은 정말, 장난이 너무 심하시다니까……」
피부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매끄러운 감촉에 등과 엉덩이의 감각이 예민하게 반응했고, 저항도 못하고 자극을 받은 탓에 허벅지를 촉촉히 적실정도로 배어난 땀이 이제야 느껴졌다.
「하아… 목욕을 한번 더 해야겠네……」
국가내정관리에 대해서는 탁월한 재능을 갖고있는 분이 이런 성격의 소유자란게 참 아쉬웠다. 하지만,
(그래도 이분이 계시니까 폐하가 돌아오실 때까지 걱정할건 아무것도 없어)
어이없다는 생각과 그래도 안심된다는 생각이 반반씩 섞인 한숨을 쉬며 테이블 위의 촛대를 손에 든 엘레노어는 목욕탕으로 향했다.
사태가 급변한 것은 그날 밤이었다.
「큰일났습니다! 루크텐타크 자작님!」
「무슨 일이냐! 지금은…… 아직 새벽인데…… 무슨 일이지!」
거칠게 문이 열리는 소리와 동시에 뛰어들어온 기사의 외침에 엘레노어는 선잠에서 깨었다. 여기는 기사단의 당직실. 심야경계근무를 마치고 침대에 누운게 두세시경이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달의 위치를 보면 시간이 많이 지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이런 시간에 기사가 당황한 모습으로 급히 달려올만한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
「국경의 요새에서 급보가 도착했습니다! 이틀전에 요새가 함락되었고 메드락의 대군이 이쪽으로 밀어닥치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뭐… 라고? 폐하께서 원정가신지 얼마 안되었는데!)
너무나도 신속한 적의 행동에 놀란 마음을 추스리고 바로 지시를 내렸다.
「국경에서부턴 행군으로 3일정도 걸리니까 하루밖에 여유가 없다! 빨리 기사들에게 알려 아침까지 출전준비를 마치도록!」
「예, 알겠습니다!」
기사가 달려나간 것을 확인하고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안에 옷을 받쳐입은 후, 왕가의 문장이 정교하게 새겨진 은색 갑옷을 몸에 대고 벨트와 이음쇠로 고정한다음 마지막으로 갑옷 안으로 말려들어간 머리카락을 꺼내 크게 흔들었다. 불타는듯한 붉은 머리가 찰랑거리며 은색 갑옷과 강렬한 대조를 이뤘다. 맑은 금속성을 울리며 갑옷과 같은 은색의 허리띠를 장착하자 아래에 입고있던 검은색 미니스커트가 가볍게 흔들리며 근육이 탄탄하게 잘 발달한 긴 다리를 타고 바람이 살짝 올라왔다.
「폐하……그리고 나의 고향이 된 벨슈타인의 백성이여…… 부디 내게 힘을…」
간절히 기원하며 벽에 걸어둔 검을 손에 들었다. 칼자루에도 역시 방어구같이 왕가의 문장이 정교하게 새겨져있었다. 이것들은 모두 귀족지위와 함께 나라에서 수여받은 소중한 무기였다.
「무슨 일이에요, 엘레노어? 성안이 어수선하고 분주하네요」
「아, 리제롯테님. 안그래도 곧 보고드리려고 했는데…」
성 안의 소란때문에 잠에서 깬건지, 아니면 아직 잠들기 전이었는지 새하얀 피부가 비쳐보이는 연분홍색 네글리제에 숄만 걸친 리제롯테가 당직실의 문가에 서서 걱정 가득한 얼굴로 들여다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인가요? 혹시, 폐하의 신변에 무슨 변고라도……」
「아니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자세히 설명드릴 시간은 없습니다만, 며칠안에 적이 도달할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리제롯테님께선…」
그정도만 듣고도 모든 것을 파악한 잠옷차림의 미녀는 굳은 표정으로 의견을 내놓았다.
「알겠습니다. 백성의 피난과 성 안의 일은 내게 맡겨요」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럼 일이 다급한지라...」
거의 성인남자의 키만한 대검이 손에 묵직하게 감기는 친숙한 감촉을 확인한 엘레노어는 걸음을 내딛었다.
(2년전의 교훈을 잊었단말이지…… 재미있군. 좋아, 한번 더 깨닫게 해주지! 감히 이 나라를 쳐들어오는 너희들의 어리석음을!)
챙~! 챙~! 티이잉! 티이잉!
무수한 군마들과 기사들이 뒤섞여 혼란한 전장은 벨슈타인성으로부터 반나절정도 행군하면 도착하는 대초원이었다.
「이야아아아압! 어서 돌아가는게 좋을거다, 메드락 놈들아!」
북방원정에 절반정도의 기사들을 보낸 벨슈타인의 병력은 성의 방어를 위해 3분의 1 정도의 기사를 남기고 왔기때문에 메드락이 동원한 대군에 비하면 수적으로 약 5분의 1 정도에 불과했다. 얼마 안되는 전투병력들이 이동하느라 피곤이 쌓이지않도록 엘레노어는 성에서 별로 많이 떨어지지않은 이 초원을 전장으로 선택해 전투준비를 끝낸 어제부터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의도대로 병사들은 지친 기색없이 불퇴전의 기세로 메드락과 싸웠고 엘레노어의 투혼에 사기충천하여 적의 대군과 호각지세를 이루었다.
「엘레노어님에게 뒤쳐지지마라! 모두 용감하게 나아가라! 목숨을 아끼지마라!」
각 소대의 대장들은 기사단장인 그녀에게 뒤질새라 병사들을 격려하고 말을 달리며 창을 휘둘렀다. 그런 모습을 곁눈질하고 씨익 웃은 엘레노어는 초원에 북적거리는 적군을 날카롭게 노려보고 올라탄 말에 박차를 가했다.
「돌격! 적들의 심장에 우리의 무서움을 새겨주자!」
전광석화처럼 날카롭고 무시무시한 맹공에 기가 꺽인 적의 군대가 일제히 물러서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놔주면 벨슈타인의 호국의 검이라고 불리기에 부끄럽다.
「도망치게 놔둘까 보냐! 모두 죽여주마! 이 하찮은 것들!」
사람이 쓰는 무기라고는 전혀 생각되지않는, 철괴같은 대검이 바람을 찢듯이 가르자 절대 닿을 리가 없는 거리라고 안심하고있던 메드락의 병사들은 자신의 팔과 몸통이 분리되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되었다.
「이, 이, 이럴수가……」
「귀신…… 저 여자는, 귀신이다……」
믿어지지않는 광경에 눈이 휘둥그레진 적들은 공포에 떨며 그런 말을 남기고 쓰러졌다. 양 옆에 쌓여가는 시체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엘레노어는 더욱 기세를 몰아 말을 달려 또다른 적의 부대로 돌진했다.
「자, 다음 상대는 누구냐! 나의 검의 제물이 되고 싶은 사람은 다 덤벼라!」
「히이익! 도, 도망쳐라!」
「저런 괴물은 상대할 수 없잖아!」
동료의 참사를 목도한 적병들은 걸음아 날 살려라하며 앞다투어 도망치기 시작했다.
(추격해야하나……? 아니, 복병이 숨어있을 수도 있어……)
여기는 이쯤에서 물러나고 본진 부근의 난전을 진정시켜야겠다고 판단한 엘레노어는 대검을 내리고 뒤로 돌아 외쳤다.
「좋아, 본진으로 돌아가서 태세를 정돈하고 그 후에 난전을 제압한다!」
「예, 알겠습니다! 」
일사불란한 대답을 듣고 대오를 정렬해 본진을 향해서 달렸다. 하지만 돌아온 엘레노어를 맞이한 사람은 어두운 안색의 기사였다.
「루, 루크텐타크 자작님…… 저…」
「무슨 일이지……? 아니, 안에서 듣기로 하지. 너희들은 잠시 쉬도록!」
그 표정에서 불길한 예감을 느낀 엘레노어는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린후 자신의 막사에 들어갔다.
「아, 엘레노어! 무사하군요, 다행이에요…… 저, 그런데 미안해요……」
그녀의 품에 달려든 사람은 뜻밖에도 성을 지키고 있어야 할 흑발미녀였다.
「아, 아니! 리제롯테양, 어째서 여기에…… 성과 백성들은?」
자신의 품에 안긴 그녀의 어깨를 안고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리제롯테가 얼굴을 들었다. 그러나 그 얼굴은 초췌했고 눈물이 맺힌 눈동자 위의 속눈썹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미안, 미안해요…… 내 힘이…… 부족해서, 그래서……」
「어떻게, 그런 일이…… 설마……」
당장이라도 눈물이 흘러내릴듯 비애로 가득 찬 그녀의 표정과 말에 여기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적군이, 성벽을 넘어…… 기사들은 피난가는 백성들을 유도하느라 눈치 못채고…… 백성들이 미처 다 피하지 못해서, 그래서……」
아연실색한 엘레노어에게 리제롯테는 어떻게 말해야할지 모르겠다는듯 더듬으면서 성의 상황을 알려줬다.
「그래서 기사들에게는 저항하지 말라고 전해두었습니다…… 나는 이 사실을 당신에게 알리려고 서둘러서…… 미, 미안해요…… 흐흐흑……」
「리제롯테양, 진정하시고……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연약하게 떨리는 미녀의 어깨를 안고 침통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할 뿐이었다. 핏기가 사라진 입술은 바들바들 떨렸고 눈동자의 초점은 맞지 않았다. 가슴 속은 후회로 가득 찼다.
(이런 실수를…… 책임을 져야할 사람은 오히려 나야…… 그런데, 어떻게……?)
성의 방비계획을 제대로 세우지 않은걸 후회하면서도 납득되지 않는 점들이 떠올랐다. 그중 하나는 어떻게 적군이 성벽까지 와서 그것을 넘을수가 있었는지였다. 국경에서 성까지 오는 길들은 모두 봉쇄했고, 병사들이 두눈을 빛내며 지키고 있었다. 그 그물에 걸리지않고 성에 도달하려면 우리가 모르는 지름길이 있든지 혹은,
(내통자……설마, 누가……?)
말단기사들과 국민들까지 의심하자면 용의자는 한도 끝도 없다. 그렇다고 귀족계급이나 거기에 준하는 인물들은 그런 짓을 저지를만한 이유가 없다.
(북방원정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밖에는 생각이 안되는데…… 우리가 놓친 길이 있는 걸까……)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생각을 해도 어쩔 수 없기에 그저 고개만 흔들뿐이었다.
그와 동시에 떠오른 또 하나의 의문. 성을 함락했다는 성명을 빨리 발표해야 할 메드락이 조용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이유는 대강 예상되었다.
(정보의 신빙성…… 이건 리제롯테양이 직접 전해준 것이니까 사실이 확실해…… 그렇다면 우리의 반응을 기다리겠다는 건가…… 제길!)
이대로 전력이 바닥날 때까지 싸움을 계속하면 메드락도 많은 군사를 잃겠지만 벨슈타인도 백성과 성을 되찾을 기회를 잃게 된다. 어느 쪽이 더 손해인지는 비교해 볼 필요도 없다.
「리제롯테양, 제 생각엔 차선책을 강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휴전을 요청하러 가야하니, 회담 준비와 동시에 교섭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만……」
「네…… 그, 그렇네요…… 힘들겠지만 우리……」
뒷말을 잇지 못하는 리제롯테는 옷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막사 밖으로 나갔다.
「그래요, 폐하가 돌아오실 때까지…… 우리끼리 어떻게든 견뎌내기로 해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녀의 그런 마음을 헤아리며 엘레노어는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후후후, 드디어 만나게 되었군, 엘레노어. 내가 메드락의 왕, 오반이다. 올바른 결단을 내리고 이런 회담장소까지 마련해 준 것에 대해 아주 감사하게 생각하네」
건장한 체구의 대머리 남자가 원탁의 정면에 걸터앉은채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는 얼굴에 웃음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도 신경이 쓰이지않을만큼 엘레노어는 곤혹스러운 표정이었다.
(이건…… 뭐야, 도대체…… 어떻게 된거지? 왜……?)
리제롯테가 준비한 회담장소는 이전에 점령한 벨슈타인의 성이었다. 최상층에 위치한 덕에 창문을 통해 성벽아래의 모습을 모두 내려다볼 수 있어서 타국과의 회담에서는 항상 이용되는 회담실. 그것까지는 문제없었다. 성벽아래에선 메드락의 기사들이 활개치고 다니며 백성들의 외출을 금하고 있었다. 벨슈타인의 기사들은 성문밖에 펼쳐진 초원에서 무기를 빼앗긴채 구금된 상태였다. 하지만 그것도 패전국의 처우라는 면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납득되었다. 문제는 지금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 중에서도,
「어머나? 왜 그래요, 엘레노어?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멍한 얼굴이네요…… 호호호, 안돼요, 회담장소에서 패전국 국왕의 대리가 그런 태도라니. 청산유수처럼 말을 해도 일이 잘 될까 말까한데」
기분나쁘게 웃음을 터트리며 적국의 왕과 함께 원탁의 저쪽 편에 앉아있는 흑발미녀의 존재였다.
「도, 도대체…… 이건 무슨 농담입니까…… 리제롯테양!」
「어머어머, 농담이라니요? 나는 메드락 귀족의 대표자격으로 이 교섭자리에 앉아있는거에요.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어요?」
자신의 고함에도 기가 죽기는 커녕 아무렇지않은듯 미소짓는 리제롯테의 모습에 말문이 막혔던 엘레노어는 곧바로 솟구치는 분노에 어금니를 빠드득 갈면서 마음속에 품고 있던 의문을 던졌다.
「당…… 당신이, 내통자였나요, 리제롯테양?」
「호호호, 정답입니다. 너무 뻔한 질문이잖아요, 엘레노어」
가슴 안쪽에서 분노가 들끓어올라 참을 수 없었다. 용서할 수 없다. 하지만 동시에, 믿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싹텄다. 그런 생각들을 모두 지우고 감정에 호소하며 외쳐보았다.
「어째서지요…? 당신과 나 둘이서 이 나라를 지키자고… 폐하가 안계시는동안 둘이서 잘 지키자고 했었잖아요? 그것을 잊었나요……? 어째서……」
하지만 말의 기세는 이미 꺾여있어 말끝이 흐릿해졌다. 게다가 리제롯테가 배반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 못하고 있었기에 생각도 따라주지 못했다.
「어째서냐고 묻는다면 흐음…… 그렇다면 나도 하나 물어볼께요, 엘레노어, 당신은 왜…… 내가 당신에게 감사하고 있다는 그런 농담을 믿었어?」
입술은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미소를 띠고 있었다. 하지만 가늘게 뜬 두 눈은 전혀 웃고있지 않았고 차가움만 가득한 붉은 눈동자는 마음을 뚫어버릴듯 했다.
「그, 그게…… 무슨 뜻……」
「2년 전이에요…… 당신이 갑자기 나타나 눈 깜빡할 사이에 구국의 영웅이 된 그때부터 일이 어긋나기 시작한거에요」
그녀는 등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메이드에게 와인을 가져오라 시키고는 말을 이었다.
「당신도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때 나와 폐하 사이에는 혼담이 오가고 있었어요」
「네에? 리제롯테양과 안토니가……?」
배반자인 상대방의 말을 듣고 싶진 않지만, 지금 내용은 도저히 흘려넘길 수 없는 것이라 자기도 모르게 두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그 모습을 보니 역시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네요. 뭐, 알면서도 그런 태도로 나에게 접근했다면 정말 뻔뻔하고 대담한 짓이었겠지만……」
글라스에 담긴 와인으로 입술을 적신 그녀가 입꼬리를 올리며 씨익 웃었다.
「이미 예물을 보낼 날짜도 정해져 있었지만 전쟁이 나는 바람에…… 그리고 전쟁이 끝나니까 폐하께선 당신에게 열을 올리더군요. 결국에는 귀족작위까지…… 그래서 나는 상당히 초조해졌어요. 이대로 가면 귀족사회에서 우리 가문의 위치도 위험해질 것 같았고……」
「그래서, 그런 무리한 수를…」
누구에게라고 할 것도 없이 중얼거리는 엘레노어를 향해 리제롯테가 탄식했다.
「뭐, 그런거에요. 결과적으로 부정이 표면화되면서 혼담은 없었던 것이 되었어요. 뭐, 그런 일은 상관없어요. 문제는 그 후 당신의…… 아니, 안토니우스의 행동이에요!」
「??」
거기서 처음으로 그녀의 마음속에 감춰져있던 증오의 감정이 부풀어오르는 것을 눈치챈 엘레노어는 몸이 흠칫 떨리는걸 느꼈다.
「잊었다고 하진 않겠지요? 그 정책은 내가 나름대로 국민들을 위해 고심끝에 만든거에요. 그런데 그것을 당신이 막았고, 그 후로 일년 후 즉, 지금으로부터 반년전에 안토니우스는 마치 자신이 고안한 정책인양 대대적으로 공포하고 시행했어요. 전쟁으로 얻을 수 없는 국민의 지지를 타인의 공로를 슬쩍 훔쳐서 얻으려고…… 위정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꼴사납고 야비한 행동은 비웃음만 얻을뿐인데…」
「아, 아니에요…… 폐하께서는, 단지 국민을 위해서……」
글라스를 들고 있던 손이 움직인순간 붉은 액체가 얼굴에 쏟아졌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어요. 다른 사람의 정책을 제멋대로 도용하는 어리석은 군주에게 이 나라를 맡길 수 없다고…… 당신과 안토니우스를 몰아내고 이 나라를 내가 다스려야겠다고 결심했고, 그 계획의 첫 단계가 지금 이 상황이에요. 이제 조금은 이해가 되었겠지요?」
악의를 그대로 내보이던 표정의 움직임은 어느샌가 사라졌고 지금 리제롯테의 얼굴에는 처음과 다름없는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런…… 그런 사적인 원한 때문에 백성들을 전쟁에 빠트렸다고 말하는거에요!」
얼굴에 끼얹어진 와인을 손 등으로 닦으며 분노에 찬 비난을 터트렸다. 하지만 당사자는 전혀 개의치않는지 빈 글라스를 우아한 동작으로 테이블에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사적인 원한이라고만 생각한다니 내 심정을 전혀 이해 못하는군요. 뭐, 이해할거라고는 기대도 안 했지만」
그것에 대해선 더 얘기할 생각이 없다는듯 그녀가 말을 내뱉자마자,
「환담은 그만하면 되었을듯 한데? 그런 것보다 양국간에 맺을 조약내용을 정해야하지않겠나? 그건알고 왔겠지, 엘레노어?」
「크으으윽…… 알고 있다…… 그런건…」
대화를 막는 오반의 말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성벽아래에는 백성들이, 전장에는 기사들이 인질로 잡혀있다.
(제기랄, 나 혼자 이런 자리에 앉게 될 줄은……)
회담장소에 벨슈타인측은 자기 혼자뿐. 하지만 메드락측은 국왕인 오반과 리제롯테, 그 외에 두 명의 기사가 더 있고, 문 너머 복도에도 몇몇 기사들이 대기하고 있는 상태. 심지어 방금 전의 메이드조차 오반이 데려온 메드락사람이었다.
(어쨌든, 폐하를 대신하여 이 나라를…… 백성을, 지키지 않으면……)
비록 주위는 온통 적들뿐이지만 기죽지않기위해 자세를 바로잡고 큰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그, 그러면…… 먼저 국민들의 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이런 어렵고 난처한 상황은 전쟁터에서도 몇 번이나 경험했었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어떻게든 회담을 유리하게 진행하려고 얘기를 시작하자 갑자기 오반이 말을 막듯이 입을 열었다.
「아, 조약의 내용에 대해서는 이쪽에서 준비해왔다」
「뭐라구요…? 아, 아니… 그 말은?」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된다. 조약의 초안을 준비했을 뿐이니까」
오반이 눈짓하자 리제롯테가 한권의 양피지를 꺼내 탁자 위에 펼쳤다.
「내가 너를 위해서 준비한 조약이다. 자세히 읽어보도록」
즐거워보이는 그의 어투와 표정이 오히려 마음의 불안을 더 키웠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에 압도당하지 않기위해 엘레노어는 가슴을 쭈욱 펴고 양피지를 손에 들었다.
「그럼,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마 벨슈타인에 불리하게 작성되었겠지만, 불합리한 내용은 막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다. 그런 것들을 고치기 위해 한 글자도 놓치지않으려고 온 신경을 집중했다. 하지만 곧,
「이, 이게…… 뭡니까……!」
분노가 치민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붉게 변했다. 양피지를 든 손이 바들바들 떨리며 양피지를 꽉 움켜잡았다. 문장들을 계속 읽으면 읽을수록, 너무 황당해서 믿어지지않는 내용들은 점점 과격해져서 자신의 눈이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바보같은 조약내용이……)
가까스로 얼굴을 들어올리리자 이 조약을 들이댄 여자귀족과 적국의 왕은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으면서 능글맞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마음속에서 뭔가 툭 끊어지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이… 이……」
거기에 쓰여있는 내용은 도저히 종전조약이라고는 생각되지않을정도로 파렴치한 최악의 내용이었다. 끝까지 모두 다 읽은 미녀기사는 격앙된 눈빛으로 우레같은 노성을 질렀다.
「리제롯테, 당신……! 도대체 무슨 작정입니까!」
이따위 것을 생각해 낸 여자에게 경의를 보일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 엘레노어는 경칭을 생략하고 부들부들 떨며 노려봤다.
「이, 이런……… 어처구니없는 내용을, 내가 승낙할거라고………」
분을 못 이겨 세게 내려진 원탁에 놓인 양피지를 향해 시선을 돌리며 분노의 원인인 흑발미녀가 킥킥킥 웃었다.
「어머, 당신에 관한 조항이 신경쓰이나요? 이해하기 어렵다면 간단히 요약해줄께요」
「하하하… 그렇게 해라, 리제롯테. 저 잘난 체하는 여자한테 자신의 입장을 깨닫게 해 줄 좋은 기회니까!」
(이, 이 놈들…… 비열하게시리……)
북받치는 분노와 굴욕감을 주체할 수 없었다. 입술이 바들바들 떨려 입을 열 수도 없었다. 리제롯테는 그걸 무언의 승락이라고 여겼는지 자신이 쓴 조약내용을 크게 읽기 시작했다.
「간단한 내용이에요. 우선 이 조약은 안토니우스가 귀국할 때까지의 임시조약이에요. 추후에 정식으로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는 벨슈타인은 나 리제롯테 파렌하이트가 통치하며, 국민들의 생활은 보장된다는 내용이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읽기를 잠시 멈추고 차가운 시선을 던진 미녀가 마음속의 악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사악한 미소를 짓고 다시 읽기 시작했다.
「벨슈타인은 패전의 증거로 호국의 검인 엘레노어 루크텐타크를 정식조약체결때까지 국종창부(??娼婦)로서 메드락에 대여한다…… 어때요? 알기 쉬운 설명이지요?」
「헛소리 하지마!」
격앙된 엘레노어가 책상을 세게 내려쳤지만 그 소리에도, 그녀의 분노에도 오반과 리제롯테는 동요하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런 태도에도 한층 더 화가 난 엘레노어는 원탁을 넘어 달려드려고 했다. 하지만,
「아아앗! 이거 놔……! 당신들, 그만 두지 못해!」
엘레노어의 움직임을 눈치챈 메드락의 기사들이 먼저 몸을 움직여 좌우에서 그녀의 몸을 억눌러 기선을 제압하고 억지로 의자에 앉혔다. 뿌리치고 일어서려했지만 어깨와 허리를 누르고 있는 남자들의 힘에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머, 무서워라. 하지만 그렇게 흥분한다고 될 일은 하나도 없어요」
「그 말대로다, 계집. 너가 날뛰면 날뛸수록 누가 피해를 입게될지 생각해보는게 어때, 응?」
비열하게 히죽거리는 두사람의 말에 몸이 굳었다.
(설마, 백성들을……)
창 밖을 쳐다봤지만 성을 점령하고있는 메드락의 기사들에게 특별한 움직임이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저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백성들은 저항도 못하고 바로 몰살당할 것이다. 벨슈타인의 지배가 목적인 리제롯테가 바라는 일은 아니겠지만 방금 말한 것처럼 최우선표적이 자신이고, 자신을 압박하기 위해서 강경책을 선택하지 않을거라고 자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이런걸…… 받아들이겠다는 말을 어떻게……)
눈 앞에 놓인 양피지의 내용을 다시 훑어보자 마음 한편이 무녀져내리는듯 했다. 그런 갈등을 눈치챈 리제롯테가 유혹하듯 속삭였다.
「당신이 메드락의 국종창부가 된다는 것에 동의하고 서명만 한다면 백성들에겐 아무 해도 없을거에요. 게다가 이 조약은 임시에요…… 아무리 전쟁에서 승리했다해도 국왕이 없는 나라를 빼앗았다가는 주변 제국들의 반감만 사게 되니까요. 그리고 여기 쓰여있는대로 안토니우스가 돌아오면 이 임시조약은 곧바로 파기하고 회담을 열어 새로운 조약을 체결할거에요. 즉, 당신과 국민들은 그때까지의 인질이라는거지요…… 당신은 그동안 참고 인내할건지, 안 할건지 그것만 선택하면 돼요」
(그런건 나도 알아……! 나도 잘 알지만…… 크으으윽…!)
국종창부. 퀼트대륙 남부의 제국에 널리 알려져있는 최저의 직업. 일찌기 높은 신분의 가문이 몰락했을때, 새롭게 권력을 잡은 사람이 기존의 권력자들을 숙청하면서 여자들에게 내리는 벌이 이것이었다. 국종창부가 되는 여자는 그 나라와 그 나라에 속한 모든 사람들의 소유가 되어 모든 명령에 따라야만 한다. 주변 제국에서는 공용창녀라고도 불리며 나라의 지배자가 바뀔 때마다 많은 여자들이 그 비천한 신분로 전락했다고 전해들었다. 하지만 최근 몇십년동안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내, 내가…… 창녀가 되다니…… 이런, 이런 바보같은 일이……)
자신의 몸을 파는 최저의 직업. 게다가 메드락의 소유가 되면 어떤 취급을 받을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공포에 사로잡혀 심장이 두근거리고 숨이 가빠졌다.
「…… 결정내리기 힘든 모양인데, 그럼 우선 열명정도 시범을 보여줄까?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한 엘레노어가 조약을 맺지않은 결과라고 발표하고 말이야」
「뭐라고! 아, 안 돼! 기다려요…… 서, 서명을… 할테니……」
양피지 근처에 준비되어있던 펜에 손을 뻗는 오반의 입술에 씨익 미소가 지어졌다.
지금 말한 것이 공갈일 가능성도 있지만,
(나는, 이 나라를…… 백성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될…… 책임이 있다!)
덜덜덜 몸이 떨리고 눈 앞이 흔들렸다. 하지만 안토니우스가 돌아올 때까지 이 몸 하나로 이 나라를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그 약속을 이제 와서 어길 수는 없는 일이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 나라와 백성들을 지켜야했다. 안된다는 말은 입이 찢어져도 해서는 안되었다.
(아아…… 미안해요, 안토니…… 더 이상 나는, 귀족이 아니에요……)
그에게 어울리기엔 아직 부족하지만 어느정도는 가까워진 신분의 차이가 이 서명으로 인해 무너진다는 원통함에 입술을 깨물면서 겨우 서명을 마쳤다.
「했어요…… 이제 벨슈타인의 백성들은……」
「그들은 지금 그대로… 아니, 지금 이상의 생활을 보장하겠어요. 그럼 서명한걸 확인할까요……? 호호호, 좋아요」
저 얇은 양피지에 자신의 운명을 맡겼다고 생각하니 미칠 것만 같았지만 국왕 대리로서 최소한의 일을 한 것이라고 위안을 삼았다.
「당신 이름의 서명과 가문의 날인을 분명히 확인했어요. 그런데 조약내용을 제대로 보긴 본거에요? 비록 안토니우스가 돌아오더라도 이 임시조약을 파기하고 새로운 조약을 체결하기 전에 본인이 국종창부로 계속 있길 원한다면 이 조약은 영구적인 효력을 갖는다고 쓰여있는데?」
「흥, 그럴리는 절대 없으니까 그런건 상관없어요!」
그렇게 고함치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리제롯테는 양피지를 둥글게 말아 품 안에 소중하게 넣었다.
「그 자신감, 끝까지 유지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그럼, 오반 폐하?」
「흐음! 후후후, 기다리다 지쳤다…… 거기 너희들, 저년을 눌러라」
기름기 잘잘 흐르는 두꺼비같은 얼굴으로 웃는 오반을 본 순간 혐오감에 온몸이 떨렸다. 그러나 반응을 다 내보이기도 전에 기사들이 엘레노어를 의자에서 끌어내려 마루에 상체를 억눌렀다. 무릎꿇은채 엉덩이를 높이 쳐든 부끄러운 모습이 되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뭐, 뭐하는 거야, 갑자기? 이거 놓치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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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제 맘대로의 의역, 오역, 편역이 난무하니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야문 밖으로는 유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