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최면, 거창한 서막
오옷?
업적에 강화시스템까지 특전으로 붙었는데 거기에 또 하나를 더준다고?
뭔가 2+1 끼워팔기 같은 느낌이 나긴 하는데..
하긴 내가 그토록 찾아해매던 순수하고 깨끗한 정기의 소유자랬으니 왠지 아쉬운 건 그녀쪽이 아닐까싶긴했다.
그러니 한계치의 능력을 사용하고도 나를 위해 무리해서 특전을 더 준다는 것 아니겠는가?
내 생각을 읽은 루시아가 빈정 상했는지 토라진 표정으로 핑거스냅 자세를 취했다. 그 새치름한 모습마저 어느 종족의 공주가 한다고 생각하니 어여뻐 보이고 귀엽기 그지없다.
"흥. 그럼 됐어. 어차피 계약자가 실패하면 나야 갈아치우면 그만이니까. 오만한 계약자는 나도 필요 없어."
그녀의 토라짐을 달래기 위해 앞손을 지고 허리를 과장되게 굽히며 말했다.
"아, 아뇨! 아닙니다! 너무 받고 싶어요! 고귀하신 루시아님께서 내리시는 은총을 어느 누가 거부하겠습니까요오ㅡ!"
대가리를 박으라면 박을 자신도 있었다. 말 한 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도 있지 않던가. 뭐, 지금은 반대로 말 한 마디에 천냥 빚을 지게 생겼지만.
능력은다다익선이 아니라도, 분명 특전은 다다익선임이 확실할 것이다. 휴대폰을 사니 마일리지에 할인혜택에 무선이어폰에 고급케이스를 준다고 하면 다 받는 것이 당연한 거 아니겠는가?
고로 뭐든 받아야했다.
다행히 루시아가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풋. 귀여운 구석도 있구나. 그럼 특전 하나를 더 하사할 터이니 자세한 건 전언으로 알아보도록해. 그럼, 3일 뒤에 보지."
보지?
"..."
ㅡ절레절레.
ㅡ딱!
*****
"…죄송해요."
루시아가 어미이자 여왕인 루키아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를 고했으나 그녀의 붉은 눈동자엔 분노와 고뇌가 가시질 못했다.
"루시아.. 대체 왜 그런 실수를 저지른 게냐.. 그정도는 입문 과정에서도 배우는 것이거늘, 어미의 간곡한 부탁이 있었음에도 설마 학업을 게을리 했던 것이냐? 금기능력에 대해선 수십 번을 반복해서 배웠을 것인데 말이다!"
그녀의 언성이 커지자 루시아가 조아렸던 머리를 급하게 가로 저으며 다시 고했다.
"아, 아니옵니다! 그저.. 그저… 깜빡했을 뿐이에요…"
순간 루키아의 붉은 눈동자가 화륵, 타오른다. 그녀가 권좌의 팔걸이를 내려치자 성내에 그 진노한 소리가 가득 울려퍼졌다.
ㅡ쾅!
"깜빡?! 그 찰나의 무지함으로 너의 안위는 물론이고 종족의 안위까지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을 어찌 깜빡한다는 말이냐ㅡ!!"
"죄, 죄송합니다.."
난생 처음 보는 어미의 진노한 모습에 루시아는 잔뜩 풀이 죽어 그저 고개를 조아리고 있을 뿐이었다.
감히 저 권좌를 쳐다보지도 못할 정도로 무서웠고 그녀가 내뿜는 아우라는 살갗에 닿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지릴 지경이었다.
그치만 그녀는 반박할 수도, 그 진노한 아우라를 피할 수조차 없었다.
여왕 루키아의 분노가 왜 그런 것인지를 뼈저리게 이해하고, 후회하고 있었으니까.
루키아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계약을 파기할 수조차 없거늘… 이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그녀가 사랑스런 딸이자 제 1 공주 루시아를 걱정스레 내려다보았다.
최면술.
금기시 되는 능력이자, 수 천년 전에 종족의 존위를 위태로이 만들었던 그 능력은 일명 `격세난전`이후 모든 서큐버스들에게 금지된 능력이었다.
아니, 정확힌 계약자에게 부여할 수 있는 능력 중에서 금지된 능력이었는데 그 금기를 지금 자신의 사랑스런 딸이 깨버린 것이다.
"하아… 개탄스럽군. 계약자에겐 절대 비밀로 해야한다. 알겠느냐. 루시아."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녀의 계약자가 서큐버스에게도 최면이 통한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지만, 언제 계약자가 깨우쳐 제 2차 격세난전을 일으킬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녀의 근심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자신의 사랑스런 딸에게 혹여나 위해가 되는 일이 일어난다면 스스로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그녀는 지끈거리는 머리에 권좌에서 일어나 싸늘히 제 딸을 내려다보곤 몸을 돌려 홀 뒤편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제 딸을 다그친다해서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저,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염원하는 수밖에.
'조금 더.. 신경썼어야했는데.. 내 실수야.. 하아…'
*****
"으음."
가상세계에서 깰 때보다 머리에서 느껴지는 몽롱함과 두통이 조금 더강렬하다. 욱씬대는 머리에 양손으로 관자놀이를 꾸욱 누르며 몸을 일으켰다.
ㅡ킁킁.
좆 같았던 골방의 케케묵은 악취가 왠지 모르게 정겹게 느껴진다.
잠깐, 이제 진짜 현실로 돌아온 건데 언제로 돌아온 거지? 죽기 직전인가?
급히 휴대폰을 꺼내 날짜를 확인해보았다.
만약 그녀가 얘기한 또 하나의 [특전]이라는 것이 과거로의 회귀라면 좆창인생 뒤바꿀 수 있는 절호의기회가 될 지도 모른다.
"음. 아니네."
날짜는 8월 1일.
가상세계와 마찬가지로 죽기 하루 전 날로 돌아와있었다. 회귀는 회귀지만 딱히 쓸모없는 회귀랄까.
시간은 달랐다.
가상세계에선 오후 12시에 깨어났었었는데, 지금은 발정난 개쉑끼들도 울다 지쳐 잠에 들었을 새벽 5시였다.
그나저나 딱히 회귀가 특전도 아닌 것 같은데, 그녀가 말한 특전이 뭐지?
그때, 이젠 익숙한 묘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ㅡ오이오이, 반갑다고.
[ ..최면술 시스템이 활성화됩니다. ]
음, 능력 시스템이야 원래 있던 거고.
[ 제 1 공주 루시아의 특전, 업적 시스템이 발현됩니다. ]
업적도 마찬가지.
[ 제 1 공주 루시아의 특전, 강화 시스템이 발현됩니다. ]
강화도 기존 특전이었고.
[ 제 1 공주 루시아의 특전, 돋보기 시스템이 발현됩니다. ]
오.. 오?
돋보기 시스템은 처음 들어보는데, 아마 저게 그녀가 말한 마지막 특전인 듯했다. 돋보기라면뭔가를 확대해서 볼 수 있다는 건가?
[ 돋보기 시스템은 상대를 3초간 주시할 시 자동 발현되는 시스템으로 상대의 '성관념'과 '성감대'를 통찰할 수 있습니다. ]
오호라..
뭐..
딱히 대단한 특전은 아니네..?
목숨 +1 정도는 해주지..
애석하게도 있으면 좋고 없으면 마는, 딱 그 정도의 특전인 듯싶다. 성관념을 확인하든 안 하든 내게 점찍힌 여자는 이제 모조리 내 육노예 인형으로 전락할텐데 말이다.
아마 최면 선택으로 능력의 한계치까지 썼다했으니 딱히 대단한 특전을 주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도 뭔가 상대의 섹스어필과 성감대를 염탐할 수 있다는 건 야릇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에 좋을 것 같긴 했다.
이를테면, 한떨기 요조숙녀 같은 우리반 반장이 성관념으로 거칠게 강간 당하고 싶은 판타지가 있다면 그것에 맞춰 최면을 걸면 365일 1년 내내 반찬투정없이 맛나게 질 식사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뭐, 쨌든 있으면 쓸만한 특전이긴 하겠네."
[ 첫 번째 업적, 최면을 1회 사용하세요. ]
[ 보상으로 포인트 1개가 지급됩니다. ]
"읏차."
다시 자리에 누워 퍼질러졌다.
최면 1회 사용이라, 당장 대상이 없으니 나중에 학교가서 적당한 때에 써볼 생각이다. 급할 것 없다. 이제 실전이니 신중을 기하면서 모든 액션을 취해야한다.
실전에선 쾌락성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안전성이었다. 하루이틀 정기구슬을 못 채웠다해도 당장 죽는 건 아니랬으니 말이다.
난 시야 좌측 하단에 반투명한 창을 주시했다.
[ 정기구슬 : ○ ]
[ 정기량 : 0 % ]
[ 정기흡수율 : 10 % ]
[ 스태미너 : 10 ]
[ 음경 강화 : 미강화 ]
[ 고환 강화 : 미강화 ]
[ 71 : 50 : 42 ]
상태창을 보니 실전이라는게 실감이 난다.
인실좆이라는 말이 있다.
인생은 실전이다, 좆만아라는 뜻인데 백 번의 가상세계 속 시뮬보다 한 번의 실전이 중요한 내 상황과 아주 찰지게 들어맞는 표현이다.
[ 71 : 49 : 52 ]
텅빈 정기구슬과 실전에 돌입하자 생긴 카운트다운이 사채업자마냥 독촉하는 것 같았다.
니미, 카운트다운이 있으니 이상하게도 마음이 조급해진다.
아직 71시간이나 남았는데도 말이다.
"하긴.. 그래도 있는게 좋겠지. 시간엄수는 약속의 기본이니.."
우선 눈을감았다.
오늘은 월요일이기에 등교하는 날이다.
아침 7시, 동이 트고 개쉑들이 짖어대기 시작하면 대충 씻고 학교로 가기 위해 산 등반을시작해야한다.
남은 시간은 2시간.
그전에 대강 복수계획과 나의 음란하게 빛날 스쿨 섹스 라이프에 대한 계획을 세워보기로 했다.
..
..
..
는 개뿔.
잠들어버렸다.
2번의 섹스 유흥에 후유증이 있는 모양이다.
거기다 쓋팔 알람은 설정도 안 되어 있어서 벌써 아침 8시가 되어있었다.
난 육두문자를 내뱉을 새도 없이 서둘러 대충 머리에 물을 적시고 곧장 집을 나서야했다.
그치만 지각을 피하긴 어려워보였다. 산을 등반하는데 꼬박 1시간이 걸린다. 그렇기에 적어도 7시 10분에는 출발해야하는데 이미 7시 40분이 되어가니 노답인 것이다.
그렇다면 버스를 타야하는데, 버스 비로 돈을 써버리면 양아치쉑끼들의 심부름에 쓸 돈이 없게 된다.
단돈 천원이라도 있어야 덜 맞는데..
"아니, 쉬발 잠깐만?"
이 무슨 개븅신 같은 생각이지?
최면술이 있는데 이 무슨 또라이 같은 걱정이람.
이제 찌질했던 과거는 청산이라고, 등신아.
서둘러 버스정류장에 도착했고, 잠시 후 버스가 도착했다. 버스타고 등교하는게 대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이 낡고 각진 초록색 버스에 오르기가 그렇게 어려웠는데.
다소 심숭생숭한 마음으로 자리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곳은 현실이고 이제부터 능력을 어떻게 잘 쓰냐에 따라 지옥이 될 수도 있고 천국이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다소 전운도 감돌았다.
시작부터 등신짓으로 말아먹는다면 얼마나 한심스럽고 비참하겠는가.
'시뮬레이션을 했어야하나..'
막상 현실이 닥치니 조금 후회가 되긴 했다.
시뮬레이션으로 테스트를 통해 장단점 파악을 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사전 연습을 하지 못한 것이 조금 후회되긴 했으나 어차피 이젠 이 버스처럼 지나간 일일 뿐이다.
그렇기에 후회란 쓸 데 없는 미련은 차창 너머 지나가는 나무들처럼 흘려보내기로 했다.
ㅡ끼익.
학교 정문앞에 도착한 난 몽둥이를 손바닥에 탁탁치며 근엄하게 서있는 학주에게 목례인사를 하고 정문을 통과해 작은 운동장을 거닐었다.
긴장감에 심장이 두근댄다.
아니, 설레임인가?
피식피식, 실소가 삐져나오려는 걸 보니 긴장감은 아닌 듯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삼삼오오 모여 조잘대며 등교하는 여자 아이들.
웃음과 함께 투닥대면서 등교하는 남자 아이들.
휴대폰을 보거나 이어폰으로 노래를 듣거나 책을 보며 등교하는 아이들.
모두가 생전 그대로였다.
이 평범한 세상에서 오직 나 혼자만 바뀌어버린 것이다.
그것도 압도적인 능력을 가진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