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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유 모녀-51화 (51/54)

< -- [모녀] -- >

"왜요? 왜 안 되는데요?"

"혜연아……."

"엄마는 되고 왜 저는 안 되는 건데요?"

어느덧 혜연이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저도 좋아하는 사람쯤은 알아볼 수 있다고요!"

그 외침에 일순 부인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제발 정신 좀 차려, 혜연아! 저 남자는 널 강간한 남자야!"

"그게 뭐 어때서요? 이젠 상관없잖아요!"

마치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소리치는 혜연이다. 그리고 이런 혜연이의 태도에 부인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혜연을 쳐다보았다. 그 모습을 보아하니, 두 사람 모두 자기 뜻을 굽힐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아무래도 이쯤에서 내가 나서서 해결을 보는 게 좋을 듯이 싶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나는 최대한 점잖은 목소리로 모녀의 주의를 끌었다.

"……혜연이가 성인이 된 뒤에도 계속 저를 좋아하고 있다면, 그 때 가서 혜연이가 원하는 대로 하게 해주는 겁니다."

"하게 해준다면요?"

"연애든 결혼이든, 뭐든 지요."

이런 내 말에 부인은 집 안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크게 소리쳤다.

"미쳤어요? 결혼이 무슨 어린애들 장난도 아니고, 어떻게 그런 말을……! 아직 혜연이는 어리다고요! 그런데 어떻게 그런 무책임한 말을……!!"

"혜연이를 돌봐줄 여력은 충분히 됩니다."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부인은 얼굴까지 새빨갛게 붉히며 소리쳤다.

"그럼 대체 뭐가 문제입니까, 부인?"

"혜연이는 아직 고등학생이라고요!"

"그러니까 혜연이가 성년이 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것이 아닙니까."

"이해할 수 없어요. 정말로 뻔뻔해요! 정말……."

이리 소리친 부인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동시에 나를 쳐다보는 시선에서 원망과 미련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것을 딱히 무어라 콕 집어서 이야기할 수는 없었지만 그냥 그렇게 느껴졌다.

나는 천천히 부인과 혜연이를 번갈아보고는 입을 열었다.

"혜연아, 잠깐 방에 들어가 있어 줄래?"

이런 내 부탁에 혜연이는 한동안 나와 자기 엄마를 번갈아보더니, 곧 '네.'라는 말과 함께 얌전히 방에 들어가 주었다.

이걸로 거실에는 부인과 나, 이렇게 둘 밖에 남지 않았다. 조심히 걸음을 옮긴 나는 부인의 몸을 끌어안아주었다. 그러자 움찔 몸을 떨며 내 몸을 미약하게 밀쳐내는 부인이다.

"어떻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요?"

"……."

"저, 저는……. 저는 어떻게 하라고요? 남편도 잃고, 딸도 잃게 되어버리면……. 저는……. 게다가 당신이 절 이렇게 만들어버렸는데, 당신마저도 없어지면 저는 정말로……. 흐윽."

기어코 울음을 터트리고만 부인은 어깨를 가늘게 떨며 흐느꼈다. 이에 나는 무어라 말을 하기 보다는 한동안 부인의 등을 토닥여주기를 선택했다. 계속, 계속해서 부인이 울음이 그칠 때까지 말이다.

"흑……."

이렇듯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부인도 서서히 감정이 진정되는 모양인지 울음을 그친 뒤에 나를 올려다보았다.

"왜 하필 우리 혜연이였던 거예요? 하필이면 왜 혜연이를 강간했던 건가요?"

"우연이었습니다. 정말로 우연이었을 뿐입니다."

"당신은 정말로 쓰레기예요."

이리 말을 내뱉으며 내 가슴을 주먹으로 두어 차례 거세게 두드린 부인은 이내 천천히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

"……저한텐 이제 혜연이 밖에 없어요."

"알고 싶습니다."

"남편이 제게 이혼 서류를 내밀었을 때, 모든 게 사라지는 것만 같았어요. 끔찍해서……. 이게 꿈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죠."

"……."

"거기에 혜연이까지 그 사람에게 빼앗길 거라고 생각하니……. 죽을 것만 같았어요. 숨이 컥컥 막혀오는데, 너무나도 끔찍했어요."

그 때가 떠오르는 모양인지, 부인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내가 부인의 머리와 등을 가볍게 어루만져주자 곧 그 떨림도 잦아들었다.

"……혜연이만큼은 훌륭하게 키워내자고 생각했어요. 훌륭하게……. 아버지가 없더라도 훌륭하게요. 그런데 그걸……. 당신이 망쳤어요."

원망어린 목소리로 나를 힐난하는 부인이다.

"죄송합니다."

그 말에 도무지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이제까지 고등학교를 잘 다니고 있던 멀쩡한 여고생 하나를 억지로 범해서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린 것이었으니 말이다.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정말로 미안하다면 혜연이를 놔줘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왜죠? 왜 혜연이를 제게서 빼앗아 가려고 하는 건데요!"

라고 소리치며 내 가슴팍을 두 주먹으로 강하게 두드리는 부인이다. 한 번, 두 번 내 가슴팍에 부인의 작은 두 주먹이 맞닿을 때마다 그녀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져오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뭐라 딱히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그런 느낌이 들었다.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저도 혜연이와 마찬가지로……. 혜연이와 만나는 동안 좋아하게 되어버렸습니다."

나는 내 진심이 부인에게 전해질 수 있도록 최대한 감정을 실어서 말했다. 그리고 이런 내 말에 부인은 우뚝 양 손을 멈추더니, 곧 이마를 내 가슴팍에 기대며 입을 열었다.

"그럼 저는요? 저는……. 저는 뭔데요?"

"부인?"

"저도 좋아하는데……. 저는 어떻게 하라고요?"

이리 물음을 던지며 어린아이처럼 흐느끼는 부인이다. 함께 지낸 일주일 동안 부인도 혜연이 못지않게 나를 진지하게 생각해주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실제로도 부인은 나와 만나는 내내 항상 즐거운 듯이 미소를 띠워주고 있었다. 게다가 의외로 취미라던가, 입맛이 잘 맞아서 늦은 밤중에도 곧잘 나가서 놀곤 했었다.

마치 20대 젊은 커플처럼 말이다. 천천히 숨을 들이켠 나는 내 품에 안겨있는 부인을 내려다보았다. 부인이 싫냐고 묻는다면 그건 절대로 아니었다. 혜연이만큼이나 좋아하고 있었다. 그 정도로 부인은 무척이나 사랑스런 여성이었으니 말이다.

"주희 씨."

"……."

"저도 주희 씨가 좋습니다. 혜연이만큼이나 부인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그럼……. 차라리 저하고 결혼해요. 혜연이는……. 더 좋은 사람을 볼 수 있을 테니까……. 혜연이는 아직 젊으니까……. 하지만 저는 벌써 마흔이고, 그 쪽도 서른이니까 차라리 이렇게 결혼하는 편이 더 나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리 말하던 부인은 돌연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까, 마치 자신이 딸의 애인을 빼앗으려는 못된 엄마처럼 비추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부인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혜연이와 내 결혼을 반대했었으니 말이다.

이 상황이 마치 하나의 희극처럼 느껴졌다. 나는 부드럽게 웃음을 터트리며 부인의 몸을 꼭 끌어안아주었다.

"결혼은 상관없습니다."

"네?"

"두 사람 다 제가 데리고 살 테니까요."

"두, 두 사람 다라니요!"

더없이 놀란 목소리로 소리치며 나를 쳐다보는 부인이다. 이에 나는 부인의 손을 꼭 붙잡아주며 입을 열었다.

"안 될까요?"

"하, 하지만 그건……. 말도 안 돼요! 절대로 안 돼요."

"왜 안 된다는 겁니까? 혹시 부인은 저와 사는 게 그렇게나 싫으신 겁니까?"

"싫을 리가요! 하지만……."

부인은 살포시 눈을 내리깔며 말끝을 흐렸다. 무슨 말을 해야 될지, 선뜻 결단이 내려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보아하니, 아주 가망성이 없어 보이지는 않았다. 여기서 조금만 더 밀어붙인다면 충분히 가능할 듯이 싶었다.

"부인과 혜연이, 둘 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나는 내 손에 잡혀있는 부인의 손을 재차 강하게 꽉 붙잡으며 이리 말했다.

"……그러니까 주희 씨. 절 믿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그 말……."

부인은 잠시 내 손에 붙잡혀 있는 자신의 손과 나를 번갈아보더니, 곧 흑색 눈동자로 나를 빤히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믿어도 되는 건가요?"

이윽고 떨어진 그 물음에 나는 옅게 웃음을 터트리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 작품 후기 ============================

다음편 에필로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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