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 회: [데이트] -->
혜연은 킹스맨의 주인공인 에그시가 정말로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과연 자신이 그와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저렇게 행동할 수 있었을까? 아니, 못 할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없는 용기를 지니고 있었다. 에그시는 매사에 과감하고 저돌적이며, 또 용감했다. 그러나 혜연은 그러지 못 했다. 그녀에겐 과감히 행동할만한 용기가 없었다.
문득 에그시가 부럽다고 생각했다.
There is nothing noble in being superior to your fellow man. True nobility is being superior to your former self Ernest Hemingway.
타인보다 우수하다고 해서 고귀한 것은 아니다. 과거의 자신보다 우수한 것이야 말로 진정으로 고귀한 것이다.
영화를 보는 도중에 해리 하트가 인용한 헤밍웨이의 말이 혜연의 가슴을 크게 두드렸다. 그리고 그 말은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올 때까지 그녀의 가슴을 울렁이게 만들었다. 좋은 말이다. 혜연은 그렇게 생각하며 멍하니 엔딩 크레딧을 바라보았다.
“재밌네. 이만 일어날까?”
영화가 끝나자, 그 남자가 만족한 듯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혜연이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보곤 좀 당황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뭐야? 이게 그렇게 슬픈 영화였어? 해피엔딩이잖아.”
“아, 아니요. 그게 아니에요.”
혜연은 손바닥으로 눈물을 훔쳤다. 그러나 아까부터 계속 울렁이는 감정의 여운이 그녀를 한동안 쥐고 흔들었다.
“좀 있다가 일어나자.”
그는 이리 말하며 혜연이의 손을 잡아주었다. 이에 흠칫, 저도 모르게 몸을 떤 혜연이었지만 이내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숨을 골랐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울렁이는 감정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어?”
그렇게 울렁임이 완전히 멎을 때쯤, 크레딧의 화면이 전환되었다. 에그시다. 에그시가 해리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주점에 나타나서 멋지게 양아버지를 혼내는 장면이 엔딩 크레딧 이후에 나왔다.
Manners maketh man.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
주점의 문을 잠그며 해리가 했던 말을 똑같이 해주는 에그시의 모습이 어쩐지 해리를 쏙 빼닮아 오소소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앉아있길 잘했네.”
문득 그가 이리 말하며 씩 웃어보였다. 정말로 잘 됐다는 듯이 말이다.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 이 말대로 남자의 매너 넘치는 행동이 정말로 그 때 봤던 그 남자가 맞는지 헷갈리게 만들었다. 정말로 저 남자가 자신을 강간했던 그였던 걸까?
혹시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
혜연은 한동안 그 남자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하나둘씩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영화관 밖으로 나가자, 혜연이도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와 함께 영화관 밖으로 나갔다.
∴ ∵ ∴ ∵ ∴
영화관을 빠져나온 나는 미리 예약해둔 식당으로 혜연이를 데려갔다. 혜연이는 이런 식의 데이트가 처음인 모양인지, 꽤 허둥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나 식당 안으로 들어가 종업원에게 미리 예약한 자리로 안내 받을 때는 어쩐지 안절부절 못 해하는 모습까지도 보여주었다.
“왜 그래?”
나는 짐짓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이며 혜연이에게 물음을 던졌다. 그러자 그녀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는 입을 열었다.
“여, 여기……. 비싸지는 않나요?”
“비싸기야 하지. 왜? 부담스러워?”
“소, 솔직히……. 그래요.”
끄덕끄덕, 고개를 끄덕이며 솔직하게 속내를 밝히는 혜연이다. 정말이지, 깜짝깜짝 놀랄 정도로 착한 아이다. 분명 천성이 이런 것이겠지.
“괜찮아. 내가 사주고 싶어서 사주는 거니까.”
“왜, 왜요?”
혜연이가 항변하듯 조그맣게 물음을 던졌다. 내가 너무 잘 해주니까, 아무래도 적응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도 그럴 것이 2주 전까지만 해도 나는 혜연이를 강제로 범했었다. 게다가 그 때의 강간 영상을 빌미로 1년의 계약까지도 만들었다.
이 모든 게, 상당히 충동적으로 이루어진 일이긴 했지만……. 요 일주일동안 혜연이와 살을 맞부딪치고 지내다보니 점점 그녀가 좋아졌다. 결혼하고 싶을 정도다. 만일에 혜연이가 아직 고등학생이 아닌 성인이었다면 덜컥 청혼이라도 했을지도 몰랐다.
나는 담담히 혜연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사과하고 싶어서.”
그러면서 내가 혜연이의 손을 잡자, 그녀는 제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손을 빼내려고 했다.
“사, 사과하고 싶으시면……. 절 놔주세요.”
“그러면 날 안 만나줄 거잖아.”
“…….”
이런 내 말에 입술을 꾹 다무는 혜연이다. 그래도 그다지 나쁜 반응은 아니었다. 예전 같았으면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곧바로 ‘네.’라고 대답했을 텐데, 요 며칠간 꾸준히 부닥치다보니 미운 정이라도 붙은 모양이었다. 나는 한동안 혜연이의 손을 붙잡고 있다가 이내 놓아주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양 손을 테이블 아래로 내리며 안도의 숨을 폭 내쉬는 혜연이다.
똑똑.
“손님, 주문하신 음식 나왔습니다.”
문득 방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와 함께 종업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들어오세요.’라고 말한 뒤에 등받이에 편히 등을 기댔다. 그러자 곧 방 문이 열리며 음식이 올려져있는 수레를 끌고 들어오는 종업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후, 음식이 담겨져 있는 접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종업원은 ‘그럼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라는 말과 함께 방을 나가주었다.
이걸로 더 이상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것이다. 내가 따로 종업원을 호출하지 않는 이상 말이다. 속으로 질 나쁘게 웃어 보인 나는 포크를 들며 입을 열었다.
“자, 식기 전에 먹자.”
이리 말하며 내가 먼저 음식에 손을 데자, 혜연이도 느릿느릿하게 수저를 들어 스프를 떠먹기 시작했다. 여전히 경계하는 기색이 있긴 했지만, 그것도 잠시. 음식 맛을 한번 보더니 곧 마음에 든 모양인지 식사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하긴 그도 그럴 것이 늦은 시간이 이루어진 식사다. 더욱이 아침 일찍서부터 외출을 한 탓에 식사도 제대로 못 했을 것이다. 물론 영화를 보는 도중에 팝콘을 먹긴 했지만, 팝콘은 계속 내가 들고 있었던 탓에 제대로 먹지도 못 했던 혜연이었다.
‘그나저나 귀엽네.’
상대가 아직 미성숙한 여고생이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아무것도 잘 모르는 어수룩한 아이라서 그런 건지 행동 하나하나가 마냥 귀엽게 느껴졌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여성으로서의 매력이 떨어진다는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여성스러움을 따져본다면 20대 여성보다도 혜연이 쪽이 더 우위에 있을 것이다. 음식을 먹는 중간 중간 혀로 아랫입술을 핥는다던가, 물을 마실 때마다 달싹이는 목젖은 나로 하여금 강한 성욕을 느끼게 만드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꽤 즐거운 식사 자리라고 할 수 있었다. 손에 꼽을 정도였다.
‘잘 먹네.’
마음 같아서는 스테이크를 한 입에 먹기 좋을 정도로 썬 뒤에 이것도 먹어보라며 그릇에 놓아주고 싶었지만, 아직 그 정도까지 친밀도를 쌓은 것은 아니었기에 꾹 참았다. 지금 그 행동을 하면 도리어 역효과가 날 것이다.
나는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며 혜연이가 식사를 끝낼 때까지 기다렸다.
“저……. 더 안 드세요?”
문득 혜연이가 나를 쳐다보며 물음을 던졌다. 아무래도 내가 식사를 멈춘 게 마음에 걸린 모양이었다.
“난 충분히 먹었어.”
이런 내 말에 혜연이는 한동안 주저주저하는 태도를 보이다가 이내 자기 또한 수저를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저도 됐어요.”
“왜? 더 안 먹고?”
“아까 팝콘을 좀 많이 먹었나 봐요.”
그 말에 나도 모르게 그만 풉 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혜연이는 영화를 보는 내내 팝콘에는 거의 손도 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는 역시, 내 손에 팝콘에 들려있었다는 것 때문이겠지. 덕분에 레모네이드만 쪼옥쪼옥 빨며 영화를 감상한 혜연이었다.
나는 탁자 위에 올려져있는 물 잔을 들어 한 모금 들이켠 뒤에 슬쩍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러자 자연스레 혜연이의 몸이 뒤쪽으로 밀려났다. 물론 시선 또한 내 눈이 아닌 다른 곳으로 향했다.
“불편해보이네?”
“처, 처음이라서…….”
“뭐가?”
“이렇게 다른 사람이랑……. 단 둘이서 밥 먹는 건요.”
이건 또 의외다. 나는 조금 놀란 눈을 하며 혜연이를 바라보았다.
“한 번도 없어? 엄마하고 이렇게 외식한 적도 없는 거야?”
“네? 아, 아니요. 저는 그, 그러니까……. 이렇게 남자랑 단 둘이서 먹는 걸 말한 거예요.”
당황한 목소리로 말을 덧붙이는 혜연이다. 그나저나 남자랑 이렇게 밥을 먹는 건 처음이라니……. 그럼 학창 시절 내내 연애 한번도 안 해봤다는 걸까? 나는 잠시 몸을 일으킨 뒤에 혜연이의 옆자리로 가서 앉았다.
“…….”
그러자 움찔 몸을 떨며 안쪽으로 슬슬 도망치는 혜연이다. 그렇게 안쪽으로 들어가 봐야 맞닥뜨리는 건, 결국 벽뿐일 텐데? 옅게 웃음을 터트린 나는 좀 더 혜연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아, 저기……."
드디어 혜연이의 입술 사이로 곤란하단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괜찮아. 조용히만 하면 아무도 모를 거야.”
이 말에 혜연이는 재차 주위를 확인하고는 평소처럼 내 손에 몸을 맡겼다. 그러자 혜연이 특유의 달고 희미한 피부 냄새가 내 코를 간질이며 기분 좋게 만들어주었다.
============================ 작품 후기 ============================
*부자라고 하긴 좀 그렇지만... 주인공이 30대라는 설정입니다.
*혜연이 어머니는 혜연이 공략 후에 나옵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