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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촉]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네, 3월 17일 KBS 아침 뉴스 타임을 시작합니다.”
“오늘도 따뜻한 날이 계속 되겠습니다. 다만 오후에는 비가 오는 곳이 있겠고 미세먼지 농도도 높아서 출근길에 마스크 착용을 권고해드립니다.”
“일교차도 크게 벌어지는 만큼 감기에 걸리지 않게 각별히 신경써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오늘의 주요 뉴스입니다.”
“예,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 김무성, 새정치 민주연합 문재인 대표가 오늘 오후 청와대에서 만납니다. 박 대통령은 이 회동에서 중동 순방 성과를 보고하고 공무원 연금 개혁 등, 4대 분야 개혁과 경제 활성화 법안처리 협조해달라고 당부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아침 뉴스를 확인해보지만 별다른 내용은 나오지 않았다. 예를 들어 여고생 강간 사건이라든가……. 이걸로 미루어 보았을 때, 따로 신고를 하거나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경찰에서 비밀리에 수사를 할 수도 있었지만, 딱히 그런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뭐랄까, 여느 때와 다를 바가 없는 일상이다.
“별거 없네.”
입가를 이죽인 나는 텔레비전을 껐다. 달라진 것이 없다. 내가 저지른 범죄가 완벽하게 묻힌 것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안도감이 밀려왔다. 아무도 나를 벌하지 않는다. 나는 완전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무언가 모를 성취감이 내 전신을 강하게 두드렸다. 하면 할 수 있잖아? 나란 놈도 멋지게 저지를 수 있다.
‘또 보고 싶다.’
혜연이를 말이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 나는 책상 위에 올려져있는 카메라로 시선을 던졌다. 또 해볼까? 옛말에 그런 말이 있지 않는가? 처음은 어려워도, 그 다음은 쉽다고 말이다. 분명 처음에 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자연스럽게, 그리고 능숙하게 해낼 수 있을 게 분명했다.
다만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누구를 대상으로 삼을 것이냐?’이었다. 혜연이가 아닌 다른 여학생을 노릴까? 아니면 다시금 혜연이를 노려볼까? 솔직히 말해서 혜연이 쪽이 훨씬 더 구미가 당겼다.
동영상이라는 약점을 쥐고 있다는 점이 유효하게 작용하고 있었지만, 그보다 더 앞서서 역시 그 E컵 가슴은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무려 E컵의 여고생이다. 두 눈 씻고 아무리 찾아봐도 그런 여고생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란 인간은 참으로 운이 좋은 인간이 아닐 수 없었다.
“괜찮겠지.”
싱글벙글 웃은 나는 저녁에 있을 만남을 기대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 ∴
오늘은 아침부터 기분이 기묘했다. 먼저 나간 엄마의 목소리가 귓가에 연신 맴 돌았다. 왜 이렇게 기분이 안 좋은 거지? 혜연은 설거지를 하다 말고 멍하니 정면을 쳐다보았다. 매일 같이 보던 하얀 벽지가 오늘따라 낯설게 느껴졌다. 싱크대 위에 놓인 접시도, 건조대에 걸려있는 빨래도, 심지어 또각거리며 초침을 움직이는 시계조차도 낯설게 느껴졌다. 혜연은 무언가 큰 병에 걸린 사람마냥 몸을 크게 휘청이었다.
“괜찮아……. 괜찮아…….”
바닥에 주저앉은 혜연은 스스로에게 암시를 걸며 몇 번이고 진정시켰다. 지옥 같은 일주일이었지만, 그 남자는 더 이상 자신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 사람은 더 이상 없다. 초인종도 더 이상 울리는 일이 없었다. 애써 숨을 내쉬고 들이쉰 혜연은 힘없이 몸을 일으켰다.
괜찮아. 스스로를 다독이며 설거지를 끝마친 혜연은 학교 갈 준비를 서둘렀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소처럼 행동하자. 비록 내 안의 세계는 무너졌지만, 내 앞의 세계는 무너지지 않았다.
“다녀오겠습니다.”
언제나처럼, 아무도 없는 집 안을 향해 인사말을 던진 혜연은 서둘러 등굣길에 나섰다.
“혜연아!”
아파트 현관을 통해 밖으로 나오자, 저 멀리서 혜연이를 부를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고개를 돌려보자, 여느 때와 다를 바가 없이 환하게 웃으며 달려오는 여학생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 예림아.”
“좋은 아침! 근데 왜 그렇게 울상을 짓고 있어?
“에? 내가?”
조금 놀란 목소리로 혜연이가 묻자, 끄덕끄덕 고개를 격하게 흔들며 대꾸하는 예림이다.
“무슨 일 있었어? 나한테 말해봐! 다 혼내 줄 테니까!”
과장되게 소리치며 양 팔을 이리저리 흔드는 예림이를 보고 있자니, 혜연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 웃었다. 그래, 웃어. 그래야지 우리 혜연이지. 으이구.”
“고마워.”
“얘가 왜 이래? 죽을 때가 됐나?”
다소 익살스럽게 까르르 웃음을 터트린 예림이는 혜연이의 등을 떠밀며 ‘아무튼 늦겠다. 얼른 가자!’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그 등떠밈에 밀린 혜연이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그리며 예림이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어제 그거 봤어?”
“뭐?”
“내가 전에 말한 거 말이야. 일주일 전에도 말했는데, 그새 또 까먹은 거야?”
라며 타박을 준 예림이는 혜연이의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그리고 그 꿀밤에 혜연이가 울상을 지어보이자, 또다시 익살스레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는 예림이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예림이는 짓궂다. 하지만 그 짓궂음이 너무나도 좋다.
혜연이는 예림이에게 ‘재방송으로 꼭 볼게.’라고 말하고는 어느덧 도착한 학교 정문 안으로 들어섰다.
“어? 안녕!”
문득 예림이가 누군가에게 인사말을 건넸다. 누구에게 인사말을 건넨 건가 싶어, 예림이의 시선이 향한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이번 달에 전학을 온 여학생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름이 분명……. 그래, 수연이었다. 정 수연.
“아……. 으, 응. 안녕.”
왜인지 수줍게 대답한 수연이는 속눈썹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평범한 자신과는 다르게 긴 속눈썹이 내려앉은 모습이 솔직히 귀엽고 예뻤다. 전형적인 미인 스타일. 하얀색이 유난히도 강조된 평범한 교복이 무척이나 잘 어울리고, 앞머리를 고정시키고 있는 파란색 머리핀이 전혀 과하지 않다.
제 손가락을 꼼지락대던 수연이는 곧 다시 눈꺼풀을 들어 올려 혜연이와도 눈을 마주했다.
“……아, 안녕. 혜연아.”
수연이의 인사에 혜연은 저도 모르게 당황하고 말았다. 설마하니, 전학생이 자기 이름을 알고 있을 줄은 조금도 예상지 못 했기 때문이었다.
“아, 안녕.”
자기도 모르게 나온 떨떠름한 목소리로 혜연이가 아침 인사를 건네자, 일순 수연이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수연이의 독특한 반응에 고개를 갸웃하는데, 옆에 있던 예림이가 끼어들었다.
“그런데 오늘 비 온대?”
예림이가 수연이의 손에 들려있는 작은 우산을 보며 물었다. 그리고 그 물음에 수연이는 수줍게 웃으며 ‘오늘 일기예보에서 비가 온다고 했거든.’라고 대답했다.
“큰일 났네.”
그 대답은 들은 혜연과 예림이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확실히 하늘은 먹구름이 가득해서 한 바탕 쏟아질 것 같았다. 뒤늦게 예림이는 지금이라도 집에 갔다올까하고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그러기엔 시간이 많이 부족할 것 같았다. 아마도 이대로 간다면 분명 지각 확정일 것이다.
지각이냐, 비냐. 고민하는 예림이의 모습에 수연이가 ‘돌아갈 때, 같이 쓰고 갈래?’라고 물었고, 그 물음에 기다렸다는 듯이 ‘그러자!’라며 천연덕스레 대꾸하는 예림이다.
∴ ∵ ∴ ∵ ∴
17시쯤부터 추적추적 내리던 부슬비가 어느덧 18시에 다다라서는 시원스레 쏟아지기 시작했다. 날짜가 그리 좋지 않다. 우산을 쓴 채로 길가를 서성이던 나는 이내 돌아갈까 싶어서 살짝 몸을 돌렸다. 어차피 오늘만 날이 아니다. 구태여 성급하게 행동할 필요가 없었다.
이러한 생각에서 발걸음을 막 돌리려는 찰나, 저 멀리 한 우산을 같이 쓰고서 길을 걷고 있는 여학생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어딘가 낯이 익다. 잠시 발걸음을 멈춘 채 기다리자, 얼마 안 가서 혜연이의 얼굴이 똑똑히 보였다.
이거 잘 못 했으면 간발의 차이로 놓칠 뻔했다. 히죽, 입가를 끌어올린 나는 혜연이가 다른 친구들과 헤어지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래도 친구들을 혜연이를 아파트 현관에까지 데려다 줄 모양인지, 함께 재잘재잘 떠들며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뭐, 당연한 걸까? 피식 웃음을 터트린 나는 멀찍이 떨어져 걸었다. 그리고 혜연이가 아파트 현관에서 친구들과 인사를 나눈 뒤에 헤어진 것을 확인한 나는 곧장 그 뒤를 따라 아파트 안으로 들어섰다.
“…….”
아무래도 혜연이는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지 않은 모양인지, 우산을 접으며 엘리베이터 앞에 서는 나를 알아보지 못 하고 있었다. 왜 알아보지 못 하는 걸까? 아, 내가 너무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구나. 새삼 모자를 쓰고 있단 걸 기억해낸 나는 모자챙을 만지작거리며 씩 웃었다.
띵.
그리고 그 때 마침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고, 나는 혜연이와 함께 나란히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