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먹구름이 걷히고 새로운 영웅의 탄생을 알리는 청명한 해가 떠올랐다. 뼛속까지 서늘해지던 바람은 멈추고,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따스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왕궁 홀에는 영웅을 반기는 팡파르가 크게 울려 퍼졌다.
“주인님, 주인님! 너무 잘하셨어요!”
유클리드는 위엄이나 체면까지 내던진 채 백성들이 다 보는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펄쩍펄쩍 뛰었다.
“기린! 넌 정말 최고야!”
유클리드 옆에서 가슴 졸이며 이 결투를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레오나르도가 뛰어와 기린을 와락 끌어안았다.
“켁! 수, 숨 막혀, 레오나르도.”
“정말 멋진 승부였어!”
레오나르도가 기린을 안고 빙글빙글 돌며 소리쳤다. 저 멀리서 폴과 포우가 환호성을 지르며 얼싸안는 모습이 보였다. 그 반대쪽에는 팔몬을 비롯한 경호단을 곁에 세운 채 의자에 앉아 있던 아르고가 느긋하게 박수를 치며 껄껄 웃는 모습이 보였다. 라이오넬은 눈물을 철철 흘리며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신께 감사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왕궁 기사단의 단원들이 쓰러진 마왕을 밧줄로 꽁꽁 동여맸다. 그리고 쓰러진 성기사를 부축해 의자에 앉혔다.
“잘했다, 기린…….”
겨우 정신을 되찾은 성기사가 희미한 미소를 보이며 기린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척 들어 보였다. 기린도 성기사를 향해 엄지를 마주 들었다.
유클리드가 의자에 힘없이 앉아 있는 성기사의 손을 꼭 붙잡았다.
“오오, G! 이번에도 너무 수고가 많았다. 마왕을 다시 한번 쓰러트렸구나!”
그러자 성기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보셨지 않습니까. 마왕을 쓰러트린 건 제가 아닙니다. 저기 있는 민기린입니다.”
성기사가 환하게 웃으며 기린을 향해 손을 뻗었다. 모두의 시선이 기린을 향했다. 기린은 왕궁 기사단의 도움을 받아 옷을 챙겨 입던 중이었다. 모든 이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자 기린은 부끄러운 듯이 얼굴을 붉혔다.
“저는…… 그냥 몸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요.”
“그게 더 대단해요, 주인님!”
유클리드가 헉헉대며 답했다. 만일 꼬리가 달렸다면 유클리드는 지금 그 꼬리가 떨어지라 흔들어 대고 있었을 것이다.
그때, 성기사가 의자에서 비틀비틀 일어섰다. 기사단원 두 명이 양쪽에서 그를 부축했다. 성기사가 그중 한 명에게 말했다.
“내 레이피어와 망토를 가져다 다오.”
“예, 성기사님.”
기사단원이 망토와 레이피어를 가져와 성기사에게 바치자 성기사는 그것을 받아들고 기린 앞으로 나아갔다.
“폐하.”
“응? 뭐지, G?”
유클리드의 물음에 성기사는 레이피어와 망토를 그에게 내밀었다. 유클리드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두 눈을 끔뻑거렸다.
“이게…… 무슨 뜻이지?”
그러자 성기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더 이상 성기사의 자리를 지킬 수가 없습니다.”
“뭐?”
유클리드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G! 자네가 아니면 대체 누가 이 왕궁 기사단을 이끈단 말이냐……!”
성기사는 유클리드 앞에 한쪽 무릎을 꿇더니 공손하게 망토와 레이피어를 내밀었다.
“저보다 더 대단한 기사가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성기사가 눈짓으로 기린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기린은 당황한 표정으로 자기 가슴에 손을 얹었다.
“저, 저요?!”
“오오……! 그런 뜻이!”
유클리드는 기뻐하며 손뼉을 짝 쳤다. 그러고는 성기사에게서 레이피어와 망토를 받아들었다.
“그간 수고가 많았네, G. 이제 평범한 왕궁 기사단원으로 돌아가겠구먼.”
“그동안 부족한 저를 받아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무슨 그런 말을. 자네 덕분에 우리 칼레나의 평화가 지켜졌는데.”
유클리드가 인자한 얼굴로 성기사의 어깨를 두어 번 툭툭 두드려주었다. 성기사는 그걸로 모든 보상을 다 받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유클리드는 기린을 향해 돌아섰다. 긴장한 기린이 유클리드를 바라다보았다.
“유, 유클…… 아니 폐하?”
“칼레나의 백성 민기린.”
유클리드가 위엄 있는 목소리로 우렁우렁하게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가 홀 안에 있는 모두가 들을 수 있을 만큼 크게 울려 퍼졌다.
“자네는 어느 날 갑자기 우리 곁에 나타났네.”
“폐하…….”
“그리고 우리의 삶을 아주 많이 뒤흔들었지.”
그 말을 하며 유클리드는 자신의 곁에 선 레오나르도, 성기사를 향해 싱긋 웃었다. 레오나르도는 뺨을 화르르 붉히고, 성기사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기린은 아직도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상황인지 파악되지 않았다. 그때, 유클리드가 성기사의 레이피어를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마왕을 물리친 영웅, 민기린! 그대를 우리 칼레나 왕국의 성기사로 임명한다!”
“네에?!”
“와아아!!”
홀 안에 백성들이 환호하며 저마다 몸에 지니고 있던 물건 하나씩을 하늘로 던져 올렸다. 모자, 손수건, 지갑 등이 홀 천장 높이 솟구쳤다가 다시 바닥으로 떨어졌다.
기린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유클리드를 쳐다보았다. 유클리드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주인님. 한쪽 무릎을 꿇고 앉으세요. 그래야 제가 정식으로 기사 임명을 하죠.”
“하, 하지만 저는……!”
기린이 성기사, 아니 이제 평범한 G가 된 남자를 바라다보았다. G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기린을 향해 눈짓을 했다. 어서 빨리 유클리드가 시키는 대로 하라는 뜻이었다. 기린은 어리둥절한 채로 쭈뼛쭈뼛 한쪽 무릎을 꿇고 유클리드 앞에 앉았다. 그러자 유클리드가 성기사의 레이피어를 높이 들어 기린의 양쪽 어깨, 그리고 머리를 차례차례 두드렸다.
“민기린을 우리 칼레나 왕국의 성기사로 임명한다.”
“민기린! 민기린!”
사람들의 환호가 더욱더 커져갔다. 유클리드는 무릎을 꿇고 앉은 기린의 어깨에 성기사의 망토를 둘러 주었다. 성기사의 정식 망토는 보는 것만큼이나 그 무게가 상당했다. 마치 성기사가 이제부터 짊어져야 할 무게감을 말하는 듯했다.
“이제 일어나세요, 주인님.”
유클리드가 다시 소곤거렸다. 기린이 머뭇대며 일어서자 유클리드가 기린을 향해 레이피어를 내밀었다.
“받으시오, 우리의 새로운 성기사.”
“제가 정말…… 이걸 받아도 될까요?”
“물론.”
유클리드가 다시 한번 레이피어를 기린의 눈앞에 흔들었다. 기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유클리드에게서 레이피어를 받아들었다.
그 순간, 갑작스레 창밖에서 번쩍! 하는 빛이 들더니 기린을 비추는 것이 아닌가?!
“으왓?! 이게 뭐야!”
“무, 무슨 빛이냐!”
“또 마왕의 공격인가?!”
“하지만 마왕은 여기 쓰러져 있는데?!”
사람들이 웅성대는 동안 기린은 황금색 태양 빛에 휩싸였다. 기린의 몸이 저절로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어, 어어?!”
허공에 떠오르며 기린은 저도 모르게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뭐, 뭐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아들아! 위에서 뭐 하는 거냐! 내려와라!”
어느새 군중 속에서 빠져나온 폴과 포우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허공을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기린이 고개를 마구 내저으며 답했다.
“저도 내려가고 싶다고요! 제가 한 게 아니에요!”
“뭐?! 대체 어떻게 된 일……!”
번쩍, 번쩍!
밝은 섬광 같은 것이 두 번 더 기린을 휘감았다. 순간, 허공에 붕 뜬 기린의 등 뒤로 거대한 후광이 비추고 시작했다.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다시금 기린에게 집중되었다.
“우, 우와……!”
기린을 아는 이도, 모르는 이도 모두 입을 떡 벌린 채 기린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순간 기린의 스테이터스 창이 커다랗게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에는 그것을 여기 있는 모두가 볼 수 있었다.
“저, 저건 능력치 창?!”
“아니, 저게 왜?”
사람들이 저마다 웅성대며 수군거렸다. 기린의 스테이터스 창에 기록된 숫자들이 마구잡이로 돌아가며 어지럽게 숫자를 나열하기 시작했다.
띠링, 띠링, 띠링!
마치 게임 룰렛 돌아가는 소리 같은 걸 내며 기린의 스테이터스 창에 새겨진 숫자가 하나하나 멈추기 시작했다.
“체력 99,999……?”
마침 정신을 차린 마왕이 가물가물 눈을 뜨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다음 스테이터스의 숫자가 멈췄다.
“근력 99,999!”
이번엔 폴이 소리쳤다.
“기품 99,999!”
이번엔 포우가.
“지능 99,999!”
이번엔 유클리드가.
“검술 99,999!”
이번엔 아르고가.
“감수성 99,999!”
이번엔 레오나르도가.
“도덕성 99,999, 신앙 99,999!”
이번엔 라이오넬이.
“성스러움 99,999!”
이번엔 G가.
“매혹과 매력이 99,999!”
그리고 이번엔 그 홀 안에 있던 모두가, 마치 경쟁하듯이 입을 모아 소리쳤다.
민기린 올 스테이터스 99,999! 만점!
“와아아아!!”
마치 운동 경기에서 이긴 뒤의 함성 같은 것이 터져 나왔다. 기린은 여전히 허공에 붕 뜬 채로 영문도 모르는 후광을 등에 업고서는 고개만 갸웃거렸다.
“대, 대체 이게 뭔데요!”
“내 생애 이렇게 대단한 능력 지수는 처음 본다! 이런 인물은 여태까지 없었어!”
유클리드가 털썩, 바닥에 양쪽 무릎을 모두 꿇으며 소리쳤다.
“세상에…… 이것은…… 너무나도 완벽해……!”
유클리드의 두 눈에서 감격에 찬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홀에 있던 모두가 유클리드와 같은 심정이었다. 그들 모두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린을 경외하는 시선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르고 또한 환희에 찬 표정으로 앉아 있던 의자에서 내려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유클리드는 무릎걸음으로 기린 앞에 기어가 자신의 머리에 쓰고 있던 왕관을 벗어 내밀었다.
“기린님……! 저희의 왕이 되어주십시오!”
“제, 제가요?!”
그러자 군중을 헤치고 앞으로 나선 아르고가 급하게 소리쳤다.
“칼레나 왕국뿐만이 아니야! 우리, 우리 페르진 왕국도 거느려줘! 역시 너는…… 내 상상 이상의 인물이었어!”
아르고가 가슴이 벅차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허공에 떠올라 있는 기린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그때였다. 기린의 머리 위에 특별한 안내 문구가 떠올랐다.
「<칭호를 얻었다!>
칭호 성기사
칭호 섹스의 황제
칭호 섹스로 천하통일」
뭐,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데?!
기린이 허둥대는 동안 홀 안에 모든 사람들이 기린을 향해 엎드려 절을 올렸다.
“우리의 새로운 왕이시여! 최초로 대륙 통일을 이룩하신 황제 폐하!”
기린은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둘러보았다. 모두가 자신을 향해 엎드린 가운데 단 한 사람만이 꼿꼿하게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폴이었다. 폴은 아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기린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척 들어 보였다.
마왕과의 결투 준비로 정신없이 지내느라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날짜 스테이터스 창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이미 날짜는 엔딩을 볼 시간에 다다라 있었다.
그렇다, 마침내 엔딩이었다. 그것도 ‘프린세스’ 엔딩을 넘어선, 궁극의 ‘왕’ 아니 ‘황제’ 엔딩!
“좋아요, 황제가 되겠어요!”
“와아아!!”
기린이 선언하자 그의 등 뒤에서 비추던 둥그런 후광이 더욱 강렬한 빛을 뿜어냈다. 기린의 몸이 드디어 바닥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기린의 발이 바닥에 닿자마자 엎드려 있던 레오나르도가 달려와 그 앞에 손을 내밀었다.
“기린. 나를 너의 반려자로 삼아줘.”
“응?”
기린이 당황해 눈을 동그랗게 뜨자 레오나르도가 간절한 눈빛으로 애원했다.
“응? 제발 부탁이야……. 황제가 된 너에게 이 나라의 왕자보다 더 잘 어울리는 짝은 없잖아.”
“무슨 말씀!”
그때, 저 뒤에서 아르고가 저벅저벅 걸어 나오며 말했다.
“황제에게는 이국의 왕이었던 나, 아르고가 가장 어울리는 반려자요. 그렇지, 기린?”
“아, 아닙니다!”
조용히 기도를 올리고 있던 라이오넬이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왔다.
“저, 저는 여러분들 중에 처음으로 기린 씨의 능력을 확인한 사람입니다. 반려자는 제가……!”
“아니요! 도련님을 처음 알아본 건 저였어요!”
그러자 폴 옆에 서 있던 포우가 라이오넬을 밀치고 앞으로 나섰다.
“저도 절대 물러설 수 없어요! 도련님, 저를 도련님의 반려자로……”
“아니, 기린의 능력을 일깨워준 건 바로 나였다.”
G가 기린의 앞에 나와 그의 어깨에 손을 지그시 얹으며 말했다. G는 기린의 정수리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며 덧붙였다.
“나는 기린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어. 내가 그의 반려자가 되는 게 옳은…….”
“에잇, 다들 시끄럽다!”
“으응?”
또 누가 남았나? 레오나르도, 아르고, 라이오넬, 포우, 성기사가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이제 정신을 완벽하게 차린 마왕이 밧줄에 묶인 채 씩씩대며 앉아 있었다.
“나를 빼놓고 이야기하지 말란 말이다! 기린은 내 거야! 내 거!”
마왕이 어린애처럼 떼를 쓰며 소리쳤다. 그는 밧줄에 꽁꽁 묶인 채로 기어코 기린의 앞으로 기어 나와 기린을 향해 간절한 눈빛을 쏘아 보냈다.
“기린…… 나를 선택해줄 거지? 널 위해 나라까지 멸망시키려 했던 나를…… 응?”
“저, 저는…….”
“아니야, 나야!”
“나라니까요!”
“나다.”
“나일 수밖에 없지.”
“저, 접니다!”
여섯 명의 공략캐들이 정신없이 소리치며 싸우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동시에 기린 앞에 무릎을 꿇어앉으며 외쳤다.
“나를 선택해줘, 기린!”
아마도 마지막 선택지가 될 창이 기린의 눈앞에 떠올랐다.
「레오나르도
라이오넬
포우
최강자 G
마왕
아르고」
기린은 고민에 빠졌다. 귀엽고 명랑한 레오나르도, 포용력 있고 상냥한 라이오넬, 따뜻하고 다정한 포우, 츤데레 매력이 일품인 G, 처음부터 기린의 원픽이었던 마왕, 환상의 섹스 테크닉을 자랑하는 아르고…….
그 누구도 고를 수가 없었다. 절대로, 한 명만을 고를 수가 없었다.
‘나는 모두를 사랑하는걸!’
선택을 종용하는 듯이 레터 오프너 아이콘이 빠르게 돌아갔다. 기린은 부들부들 떨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누구 하나의 이름을 부르라고 강요하는 듯이 목구멍이 간질거렸다. 무언가 억눌린 듯한 기분이었다.
기린은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입을 뻐끔거렸다. 홀 안에 모든 이가 기린의 입 모양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나, 나는……!!”
억눌린 틈새를 뚫고 기린의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새어 나왔다. 기린은 숨을 크게 들이켜고는 홀이 떠나가라 쩌렁쩌렁하게 소리쳤다.
“여섯 명 다 선택할래!!”
그리고 다음 순간.
기린은 익숙한 자신의 방 안에서 VR 헤드폰을 뒤집어쓴 채 눈을 뜨게 됐다.
***
“이렇게…… 끝이야? 이게 엔딩이라고?”
VR 헤드폰을 벗는 기린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시원섭섭함의 눈물이었다. 기린은 쓱쓱 눈물을 닦아내고는 컴퓨터 화면을 쳐다보았다. 게임의 엔딩 스크롤이 하염없이 올라가고 있었다.
‘이대로 정말 끝이구나…….’
기린은 심호흡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거울 앞에 서서 눈동자를 들여다보니 원래의 갈색의 평범한 눈동자로 돌아와 있었다. 빛나는 황금색 눈동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 벌써 게임 속에 두고 온 공략캐들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시 게임 속으로 들어가고픈 생각은 없었다.
‘새로 게임을 시작하면 다들 나를 기억하지 못하겠지? 처음부터 그 사람들을 다시 볼 용기가 없어…….’
기린은 헤드폰을 정리하고, 폴에게서 받은 USB를 컴퓨터에서 분리했다.
“폴……. 고마웠, 다고 해야 할까요. 어쨌든 나름대로 즐거웠어요.”
기린은 마지막으로 폴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는 USB를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 두었다. 이제 이 게임은 영원토록 이곳에 봉인될 것이다. 이제 다시는 저 게임 속 캐릭터들을 만나지 못하리라.
그때, 현관문 도어 록 열리는 소리가 나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왔다.”
“아빠도.”
“어?”
시간이 그렇게 지난 것인가? 기린은 휴대폰을 들어 날짜를 확인했다. 부모님이 여행을 갔다 돌아오시기로 한 날 아침이었다. 기린은 헤드폰에 눌려 까치집이 된 머리카락을 다급하게 정리하며 현관으로 나갔다.
“다녀오셨…… 으악!!”
부모님의 모습을 본 기린은 기함하고 말았다. 여행에서 돌아온 부모님이…… 하드코어 SM 플레이어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린은 민망함에 고개를 돌리며 손을 마구 내저었다.
“그, 그게 대체 무슨 복장이에요?! 남사스럽게!”
“어머, 어머, 너야말로 남사스럽게 대체 그 옷은 뭐니?”
“네에?!”
기린은 평범한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이었다. 누가 누굴 보고 남사스럽다는 거야, 지금?! 나비 모양 가면에 미사일 브라자, 무릎까지 오는 부츠를 신고 채찍을 든 어머니가 기린을 질책하며 말했다.
“엄마는 너 그런 옷 입고 돌아다니라고 가르친 적 없다! 세상에, 집에 부모가 없다고 이 꼴을 하고서……!! 너 이런 취미 있는 애였니?!”
“예에?!”
“그래! 아빠도 너 그렇게 가르친 적 없다! 대체 그 꼴이 뭐냐?! 어이구, 동네 창피해서 원.”
가죽 하네스 사이로 가슴 털이 삐죽삐죽 삐져나온 아버지가 혀를 차며 기린을 타박했다. 어머니는 부츠를 신은 채 집 안으로 들어오며 눈물까지 글썽였다.
“내가 애 교육을 잘못시켰지! 흐윽……!”
“여, 여보!”
아버지가 다급하게 어머니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왔다. 아버지는 축 처진 엉덩이가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티 팬티를 입고 있었다.
“뭐,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안방 문이 닫히는 소리에 기리는 번쩍 정신이 들었다. 뭔가 잘못된 게 분명했다. 기린은 휴대폰을 꽉 쥔 채로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기린이 밖으로 나가는 소리가 들리자 어머니의 비명이 들려왔다.
“그 난잡한 꼴로 어디 가! 당장 거기 안 서?!”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오니, 그곳에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자동차와 함께 말이 끄는 마차가 돌아다녔고, 편의점이 있던 자리에는 과일 가게가, 세탁소가 있던 자리에는 수상한 상인이 좌판을 깔고 있었다.
게다가 사람들은 기린처럼 ‘평범한’ 복장을 입은 것이 아니라 하나같이 어머니나 아버지처럼 하드코어 코스튬을 입고 있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어리둥절한 채로 서 있는 기린을, 반쯤 헐벗은 복장을 한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며 지나갔다. 세상 저런 민망한 옷차림은 처음 봤다는 듯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때, 기린의 눈에 들어온 건물이 있었다. 저 멀리 새로 지은 번쩍번쩍한 고층 아파트 단지가 보여야 할 자리에 있는 건…….
“칼레나…… 왕궁?”
“역시 단박에 알아보는구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와 기린은 얼른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곳에는 씩 웃는 폴이 서 있었다.
“안녕, 오랜만.”
“오랜만이라뇨! 우리 헤어진 지 이제 겨우 십 분…… 아니, 그보다는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폴!”
그러자 폴이 눈썹을 팔자로 내리며 팔짱을 꼈다.
“네가 엔딩을 본 지 실제 시간으로는 몇 분 지나지 않았겠지만, 인 게임에서는 3개월이나 지났어. 모든 공략캐들이 너를 그리워하며 시름시름 앓아가고 있어서 내가 힘을 써서 현실 세계에 게임을 이식했어!”
“뭐, 뭐라고요?!”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래?!
하지만 폴은 기린이 그러든지 말든지 그의 어깨에 척 어깨동무를 했다.
“아, 그리고 말이야. 이제는 나도 이 세계의 신, 그만하고 싶어서.”
“네에?!”
“내 직책이 사실 ‘섹스의 신’이라고 말해줬었던가?”
“아뇨?! 말 안 해줬었는데요?”
“기린. 다음 너의 목표는 이 세계의 신이 되는 거다!”
“싫어요!!”
기린이 소리쳤지만 폴의 귀에 들릴 리 난무했다.
그 순간, 저 멀리 대로를 따라 커다란 마차 한 대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기린~!”
마차 안에서 레오나르도가 몸을 반쯤 꺼내 놓은 채 기린을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러자 그 반대쪽 창이 열리며 성기사와 아르고가 얼굴을 내밀었다. 마부 자리에는 포우가, 그 옆자리에는 라이오넬이 앉아 있었고. 하늘에서는 검은 불꽃이 휩싸인 마왕이 천천히 허공을 날아오고 있었다.
폴은 그들 쪽을 향해 기린의 등을 떠밀며 힘차게 외쳤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 민기린!”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