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른 김에 왕까지-34화 (34/42)

34화

“나와도 자자.”

달빛이 비쳐 성기사와 기린을 비추었다. 성기사의 얼굴에 드리운 달빛은 평소보다 훨씬 더 고고해 보였다. 그 달빛 덕분인지 성기사의 표정은 평소보다 훨씬 더 읽기 힘들었다.

기린은 조용히 성기사를 바라보며 두 눈만 끔뻑거렸다. 두 사람 사이에는 한참 침묵이 흘렀다.

“제가…….”

침묵을 깨고 운을 뗀 건 기린이었다. 기린은 눈을 커다랗게 뜬 채로 성기사를 응시했다.

“왜요?”

기린의 질문 아닌 질문에 성기사는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침대에 같이 올라갈 상대로 싫다는 뜻인가?’

성기사는 동요하는 마음을 숨긴 채 차갑게 쏘아붙였다.

“누구의 침대든 상관없이 올라가면서 내 침대만은 싫다는 건가?”

“무슨 말이 그래요?”

기린이 울컥 화를 냈다.

“말씀이 심하시네요. 저라고 아무한테나 안기는 게 아니거든요?”

“하지만 내가 아는 한 너는 최소 2명 이상의 남자에게 안겼다.”

“그래서요? 그게 이 나라 평균보다 높다는 거예요?”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러는 성기사님은 그 자리에 앉기 위해서 마왕과도 잤잖아요!”

기린이 부르르 화를 내며 소리치자 성기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기린이 마왕과의 결투 이야기를 알고 있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물론, 아주 유명한 이야기이며 성기사의 위치를 생각하면 모를 수도 없는 일이었기에 별로 놀랄 일은 아니었지만, 성기사는 기린만은 그 일을 알기를 원치 않았다. 아니, 원치 않았다는 걸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기린이 분에 못 이겨 씩씩거렸다. 성기사는 사과를 해야 할 타이밍이라는 걸 알았지만,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

기린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성기사를 노려보았다. 성기사의 머리 위에 뜬, 호감도를 나타내는 하트가 두 개를 꽉 채운 채 번쩍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분홍색으로 빛나야 할 하트가 진한 붉은색으로 보이는 것 같았다. 기린은 의아한 눈빛으로 성기사의 머리 위의 하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색이 좀 이상해 보이는데? 달빛 아래라서 그런가?’

그때, 성기사가 운을 뗐다.

“왜 그러지? 다시 나랑 잘 마음이 생겼나?”

“아니요! 절대 아니요!”

기린이 부르르 치를 떨며 성기사에게 보란 듯이 경례를 붙였다.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저는 엉덩이가 가벼워서 이제 또 다른 남자한테 안기러 가봐야 하거든요!”

기린은 쿵쾅쿵쾅 소리를 내며 성기사를 지나쳐 복도를 걸어갔다. 언젠가 성기사와 자기야 하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처럼 힐난을 받으면서까지 성기사와 섹스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자기가 공략캐면 다야?! 섹시하면 다냐고!’

기린은 화를 내며 왕궁을 빠져나갔다.

성기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기린의 모습과 발소리가 다 사라진 뒤에야 겨우 뒤를 돌아보았다.

***

“아니. 왜 갑자기 나타나서 시비래, 시비는?”

기린은 혼잣말을 구시렁거리며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원래는 집에 가기 전 뒷골목에 들러 마왕에게 ‘식사’를 하게 해줄 참이었는데. 성기사의 말을 듣고 나니 그럴 기분이 싹 가시고야 말았다.

“내가 열 명이랑 자든, 백 명이랑 자든 자기랑 무슨 상관인데? 이게 야겜이라는 것도 모르는 주제에……. 나는 내 역할에 충실할 뿐이라고!”

내가 애욕에 못 이겨 괴로움에 버둥대는 자기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게임에 들어온 ‘구세주’라는 것도 모르면서 말이야! 기린은 성기사의 말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가 왜 갑자기 그렇게 시비를 걸고 들어온 지도 알 수가 없었다.

‘나와도 자자.’

성기사의 목소리가 다시금 기린의 귓가에 맴돌았다. 기린은 그 목소리를 털어내기 위해 붕붕 머리를 흔들어 댔다.

“근데…… 시비를 걸 거면 다른 말로도 걸 수 있는데, 왜 자기랑 자자고 한 거지?”

희한하네. 내가 진짜 자자고 했으면 어쩌려고?

기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에이, 알 게 뭐야. 다 지난 일인데.”

투덜투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걷다 보니 어느새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기린은 대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다녀왔습니다.”

“내 아들! 잘 왔다, 잘 왔어.”

폴이 반가운 목소리로 기린을 반기며 두 팔을 양쪽으로 활짝 벌렸다.

“응? 안 주무시고 계셨어요?”

“그런 좋은 소식을 듣고 잘 수가 있나!”

폴은 기린을 와락 끌어안아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기린은 영문도 모른 채 소리쳤다.

“으아, 아아……!! 왜 그러세요?! 무슨 일인데요?!”

“네가 페르진의 왕에게 프러포즈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단다.”

“아니, 그 소문이 벌써 퍼졌어요?”

“그리고 그 왕의 침실에도 불려갔다 왔다지?”

“그런 소문까지 퍼져요?!”

맙소사.

기린은 손바닥으로 철썩 이마를 내리쳤다. 이 게임은 도무지 비밀이라고는 없는 세계관이었다.

기린은 무심코 구석에 외톨이처럼 서 있는 포우에게 시선을 던졌다. 포우는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기린의 시선을 의식하고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 미소 또한 너무도 쓸쓸하고 슬퍼 보였다.

기린의 머릿속에, 얼마 전 라이오넬과 야외에서 섹스를 했을 때, 폴과 포우에게 들켰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도 포우 표정이 저랬는데…….’

포우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가신 지 오래였다. 오래 웃고 싶어 하는 듯 보였지만, 도저히 그 미소를 유지할 수가 없는 것 같았다. 아무리 눈치 없는 기린이라도 그 정도는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작정이냐, 아들아? 페르진의 왕을 따라갈 생각이니?”

“음…… 아뇨. 엄밀히 따지자면 프러포즈를 받기는 했지만…… 그와 동시에 차였어요.”

“뭐어?!”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도련님?”

기린의 말에 포우의 얼굴에 살짝 화색이 돌았다. 기린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말 그대로요. 프러포즈를 받고, 차였어요.”

“함께 침실에 들어간 이후에?!”

“네.”

“그, 그, 그, 그 말은……!!”

폴이 다급하게 기린의 어깨를 끌어당겨 자기 쪽으로 잡아당겼다. 그러고는 폴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기린의 귓가에 빠르게 속삭였다.

“어떻게 된 거야? 네 섹스 실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텐데?! 페르진의 왕이 네 섹스 실력이 마음에 안 든대? 속궁합이 안 맞았던 거야?!”

기린도 폴만큼이나 낮춘 목소리로 조용히 속삭였다.

“그런 건 아니고요. 오히려 반대예요. 너무 마음에 들어서 저를 놓아준다던데요.”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이런 흐름은 여태껏 한 번도 없었는데……!”

폴은 패닉에 빠진 듯했다. 기린은 그런 폴을 뒤로 한 채 포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포우는 이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포우.”

“네, 도련님?”

“같이 산책하러 가지 않을래?”

***

시원한 밤바람을 맞으며 기린과 포우는 한참 동안 집 근처를 걸었다. 포우는 기린의 눈치를 보며, 얼굴을 힐끔힐끔 훔쳐봤다. 기린이 무언가 먼저 말을 해주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기린은 그와 반대로 너무도 여유로웠다.

기린은 그저 시끄러운 생각에서 벗어나 같이 있으면 마음이 편안한 사람과 시간을 보내고 싶을 뿐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라이오넬과 있었던 일 이후로 기분이 많이 상한 듯한 포우의 마음을 달래주고 싶었다.

“저, 도련님…….”

“응?”

결국 침묵을 참지 못하고 포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포우는 머뭇대며 기린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기린이 대꾸하자, 포우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가 이내 결심한 듯 말했다.

“왜 제게 같이 산책하자고 하셨나요? 혹시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빨리…….”

“아니? 그런 거 없는데. 그냥 요즘 포우가 우울해 보여서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었을 뿐이야.”

“…….”

포우는 고개를 푹 숙였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 떠올라 기분이 더 나빠진 것 같았다. 이제는 기린이 포우의 눈치를 보았다.

“라이오넬과 내가…… 그런 모습을 보여줘서 미안해. 많이 놀랐지?”

“아니요, 저는…….”

포우는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망설이는 것 같았다. 결국 그는 다시 고개를 툭 떨구었다.

“네. 많이 놀랐어요. 물론 도련님이 뭇 사내들에게 사랑을 받으실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런 식으로 제 눈으로 확인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서…….”

“미안.”

“게다가 그때 도련님은…… 너무나도 기분이 좋아 보이셨기 때문에…… 흑……!”

갑자기 포우가 훌쩍거리며 양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기린은 깜짝 놀라 포우의 어깨를 짚었다.

“포우?! 왜 그래, 포우?”

“저, 저, 저는…… 도련님을 좋아해요!”

“응?”

포우가 갑작스러운 고백을 하며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기린은 어안이 벙벙해진 채로 그 자리에 그대로 굳고 말았다.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같이 있는 모습을 본 것도 모자라, 섹스를 하는 모습이라니……! 저는 정말 그 자리에서 라이오넬 신부님을 뿔로 들이받아 죽이고 싶었답니다! 물론 불경한 생각이라는 건 알아요, 하지만 그러고 싶었어요!”

“헐…….”

뿔로 들이받아 죽이다니. 처녀에게 접근하는 남자들을 뿔로 찔러 죽인다는, 유니콘의 전설 같은 말이었다.

‘포우가 진짜 유니콘이긴 유니콘인가 보구나…….’

기린은 당황스러웠다. 하루 만에 두 사람에게서 고백을 받을 줄은 정말 꿈에도 알지 못했다. 기린이 무어라 답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을 때, 포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도련님. 대답하지 않으셔도 돼요. 도련님이 포우에게 집사 이상으로 특별한 감정을 품고 계시지 않다는 건, 누구보다 제가 더 잘 알아요.”

“포우…….”

“저는 그저 도련님을 곁에서 보조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기쁘고 행복해요. 정말이에요.”

“…….”

“도련님은…… 앞으로도 변함없이 저를 이제까지와 똑같이 대해 주시면 돼요.”

기린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좋아하는 상대가 자신과 마음이 같지 않다는 걸 담담히 받아들이면서도, 그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다는 고백을 하려면 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자신의 감정을 삭여야 가능한 일일까.

하지만 동정심에서라도 포우의 마음을 받아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게 포우를 더 슬프게 할 것이라는 걸 기린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기린은 포우의 손을 꼭 쥐었다. 눈물을 흘리느라 상기된 얼굴로 포우가 기린을 쳐다보았다.

“포우. 난 포우에게 항상 고맙게 생각해.”

“도련님…….”

“포우가 없었더라면, 나는 이 칼레나 왕국에서 살아가는 게 더 팍팍하고 힘들었을 거야.”

“도련님……!”

“진심이야. 포우, 정말 고마워. 그리고…… 포우와 같은 감정은 아니지만, 나도 포우를 많이 사랑해.”

“흐윽, 흑…….”

기린의 말에 포우가 오열하기 시작했다. 포우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기린의 어깨에 자신의 머리를 기대어 왔다.

“포우는 그 말이면 충분해요……! 정말 너무, 감사합니다, 도련님…….”

포우의 머리 위에 뜬, 호감도를 나타내는 하트가 천천히 빛나며 여섯 개까지 차올랐다. 기린은 한참 동안 포우의 등허리를 두드려 주며 그를 달랬다.

***

포우와 긴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뒤, 기린은 자기 방 침대에 누워 오랫동안 생각을 했다. 아르고가 자신에게 해주었던 말을. 그리고 자신이 가진, 생각보다 더 위대한 능력에 대해.

‘그래. 아르고의 말이 맞아. 내 능력은 누군가의 ‘배우자’로만 남기에는 너무 대단해. 왕이 되자. 구른 김에 왕이 되는 거야! 모든 공략캐들의 하트를 차지하고 칼레나 왕국의 가장 위대한 왕으로 역사에 길이 남자!’

기린은 두 손을 불끈 쥐며 새로이 결심했다.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모든 공략캐의 사랑을 차지한 칼레나 왕국의 왕. 모든 육성게임의 진정한 ‘진 엔딩’.

“하지만……”

기린은 이내 고민에 휩싸였다.

“그러려면 레오나르도와 왕위 싸움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흠…….”

레오나르도에게 여러모로 상처를 안겨주는 일이 너무 많았던 것 같아서 기린은 내심 걱정이 되었다. 레오나르도에게 상처를 입히고 싶지 않은 만큼, 기린은 레오나르도에게 미움을 사고 싶지도 않았다.

“뭔가…… 레오나르도 또한 납득 가능한 왕위 계승 방법이 있을 텐데 말이야.”

똑, 똑, 똑.

그때, 대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이 한밤중에 대체 누가?’

기린은 몸을 움츠리고 귀를 쫑긋 세웠다. 어쩌면 바람 소리를 잘못 들은 걸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노크 소리는 또다시 들려왔다.

똑, 똑, 똑.

폴과 포우는 이미 깊게 잠이 들어 그 소리를 듣지 못하는 듯싶었다. 기린은 로브를 휙 두른 뒤, 성기사에게 받은 빛의 드래곤 단검을 로브 안에 몰래 숨기고서는 조용히 대문 가까이 다가섰다.

“……누구세요?”

기린이 낮은 목소리로 묻자 반대편에서 누군가가 숨을 집어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민기린?”

“응?”

내 이름을 알아? 날 아는 사람인가?

기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에 삽시간에 경계심이 풀린 기린이 조심스럽게 대문을 열었다.

대문 앞에는 달빛을 등진 채 망토를 뒤집어써 얼굴을 가린 어느 키 큰 남성이 서 있었다. 기린이 물었다.

“라이오넬?”

“……라이오넬?”

망토를 뒤집어쓴 이가 기가 찬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신부님을 말하는 건가? 하, 나 참. 언제 또 신부님까지…… 됐다.”

그이가 망토를 휙 벗었다. 그러자 달빛보다 더 형형하게 빛나는 은빛의 긴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그제야 기린의 눈에 그가 쓰고 있던 망토가 칼레나 왕국의 문장이 그려진 기사단의 망토라는 것이 들어왔다.

기린의 눈이 보름달만큼 휘둥그레졌다.

“성기사님?!”

“그래, 이제야 알아보는군.”

성기사가 붉은 눈을 빛내며 기린을 쳐다보았다. 기린은 대문을 마저 다 열고서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이 밤에 여기는 웬일이세요?”

“…….”

“왕궁에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겼나요? 지금 당장 기사 복으로 환복하고 나올…….”

“아니, 그런 일은 없다.”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가려던 기린을 막으며 성기사가 단호하게 말했다. 기린은 더욱 성기사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알 수가 없어졌다.

“그럼 대체 무엇 때문에…….”

“그게…….”

성기사가 머뭇거리며 말을 하기를 주저했다. 평소의 그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기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성기사님?”

“……사과를 하고 싶어서 왔다.”

“사과요? 무슨…… 아.”

기린은 포우와 산책을 하고 다 털어냈기에 잠시 잊고 있었던, 성기사와의 불쾌한 대화가 떠올랐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사과를 한다 그러냐?’

기린은 팔짱을 낀 채로 문간에 기대섰다.

“왜 마음이 변하셨어요? 성기사님은 사과 같은 거 안 하시는 분이잖아요.”

“나도 잘못했을 때는 사과를 한다. 그래야만 하니까.”

“잘못이라고 생각은 하세요?”

“……물론이다.”

성기사는 눈짓으로 마당 어딘가를 가리켰다. 기린이 밖으로 나와 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기린은 하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집 밖으로 나갔다.

기린이 마당에 자리를 잡고 서자 성기사가 그의 앞에 섰다. 성기사는 착잡한 듯 입술을 깨물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내가 경솔한 발언을 했다.”

“…….”

“그런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너에게 심한 말을 했다.”

“…….”

기린은 팔짱을 낀 채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성기사는 기린이 사과를 받아주고 그를 용서해 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지만, 그 정도로 쉬이 풀릴 화가 아니었다. 사과를 한다고 모두 받아주어야 한다는 법칙이 있는 건 아니니까. 게다가 기린은 성기사가 진심으로 반성을 하고 있는지도 의심스러웠다. 그의 성격상 다음번에 이런 일로 또다시 기린을 질책할 수도 있지 않은가.

“정말 그런 말을 한 걸 후회하세요?”

“물론이다.”

“저는 궁금해요.”

“뭐가 말이지?”

“왜 갑자기 성기사님이 제게 시비를 거셨는지 말이에요. 레오나르도 때문인가요?”

“그건…….”

“제가 레오나르도를 배신하고 있다고 생각하신 건가요? 레오나르도를 두고 바람이라도 피운다고요? 하지만 저와 레오나르도는 사귀는 사이도 아닌걸요.”

“……!”

‘레오나르도와 사귀는 사이가 아니다.’라는 기린의 그 말에 성기사는 가슴에 얹힌 묵직한 바위가 치워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째서 이렇게 시원한 기분이 드는 걸까? 성기사는 스스로도 그 감정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성기사가 더듬더듬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페르진 왕국의 왕과는?”

“네?”

“그는 너에게 프러포즈를 했다. 그런 그의 침실에 들어갔다는 것은…… 그의 프러포즈를 받아들이고 그를 따라 페르진으로 가겠다는 뜻이 아닌가?”

“아뇨.”

기린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저는 페르진으로 가지 않아요.”

“그렇다는 것은…….”

성기사의 목소리가 가볍게 떨렸다.

“이 칼레나에 남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나?”

“네. 저는 아직 여기서 할 일이 많거든요.”

그 순간이었다.

갑작스레 성기사가 기린을 와락 끌어안았다.

-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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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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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블린

포우랑은...안 하나...? 유니콘이면...말이니까 그곳도... ... ...

2021.05.12신고13

뀨뀨?

성기사랑 하자 성기사!!!!

2021.05.12신고6

벨러

난 포우도 좋은데....

2021.05.21신고3

으악

성기사 찐사랑이네......

2021.05.16신고1

seul******

원래 도도하던 캐릭이 무너지는게 맛있지 성기사 냠냠굿

2021.09.04신고좋아요

BOMTOON

3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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