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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른 김에 왕까지-30화 (30/42)

30화

아르고와의 대화가 끝나고 난 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기린은 퀭한 모습으로 왕궁에 출근을 했다.

왕궁 기사단이라고 해봤자 말단인 기린이 도맡아서 하는 일은 별 것 없었다. 평화롭기 짝이 없는 왕궁에는 ‘기사단’이라고 불리는 수비병들이 사실상 필요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성기사가 몇 년 전에 마왕을 봉인해 버렸고, 지금은 하급 몬스터 몇 마리만이 왕국 외곽에 나타나는 상황이니까. 그 하급 몬스터들도 힘이 부족하기에 왕궁까지는 감히 진격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외곽 수비대들의 손에 의해 처리되는 꼴이었다.

왕궁 기사단이 된 뒤로 아르바이트는 아예 못 하게 되었다. 물론 왕궁에서 버는 급료가 여느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기는 했기에, 폴과 포우는 오히려 싱글벙글거렸다. 안타까운 건 아르바이트는 물론 수업조차 듣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수업을 들을 시간에 근무를 서야 했으니까. 아직 못 들어본 수업이 많은데, 기린은 못내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지금이라면 ‘발레’ 수업도 즐거운 기분으로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말단 기사로 들어간 기린이 왕궁에서 하는 일은 대체로 정원에 물 주기, 높은 곳에 올라가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닦기, 높으신 분을 만나러 왕궁에 들어왔다가 길을 잃은 백성들에게 길 안내, 어슬렁어슬렁 순찰하기, 수다 떨기, 창고에 쌓여 녹이 슬어가는 무기들 닦기 등 허드렛일이 대다수였다. 가끔은 언제나 일손이 부족한 왕궁 부엌에 들어가 양파 껍질을 까고, 감자를 깎고, 설거지를 하며 이런저런 잡일을 돕기도 했다.

한가로운 왕궁의 하루는 대충 그런 식으로 흘러갔다. 애초에 왕궁 기사단에 신입 기사가 들어온 것조차 성기사가 마왕을 봉인한 뒤로 처음 있는 일이라고 했다.

기린은 하품을 쩍쩍해대며 슬렁슬렁 왕궁 복도에서 순찰을 보고 있었다. 순찰이라는 건 말만 그럴 뿐이지, 실상은 가만히 있으면 잠이 쏟아져서 이리저리 아무 데나 쑤시고 다니며 걷기라도 하는 중이었다.

창문을 통해 쏟아지는 햇볕이 따사로웠다. 기린은 어디 구석에 가서 창을 세워두고는 벽에 기대앉아 잠을 청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왕궁 기사단에는 반차 시스템 같은 거 없나, 흐아암~”

기린은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해대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잠이 그득한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반차? 그게 뭐지?”

때마침 성기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린은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성기사가 무뚝뚝한 얼굴로 기린을 쳐다보고 있었다.

“많이 피곤한가 보군. 간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잤나?”

“아, 네. 좀 일이 있어서…….”

“흐음.”

성기사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기린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마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눈빛에 기린은 자기도 모르게 성기사의 시선을 피해버리고 말았다.

“기사단 일에 차질이 있을 만큼 중요한 일이 뭐지? 왕궁을 수호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다고.”

성기사가 쏘아붙이자 기린은 잔뜩 주눅이 들어 어깨를 움츠렸다.

“죄, 죄송합니다.”

“뭐, 하긴…… 쯧. 민기린 너만 그런 게 아니니까.”

입소리를 낸 성기사가 못마땅하다는 듯이 창문 밖을 내려다보았다. 기린도 그를 따라 창밖을 내다보았다. 왕궁의 정원이 훤히 보였다. 정원 벤치에는 왕궁 기사 몇몇이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아예 정원 풀밭에 대자로 드러누워 잠을 자는 이도 있었다.

성기사는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상황이 저러니…… 오히려 잠을 참고 있는 네가 대견할 정도다.”

감사하다고 해야 하나? 기린은 슬쩍 성기사의 눈치를 보았다. 기린의 눈길을 눈치챈 성기사가 기린을 돌아보았다.

“왜 그러지? 할 말이 있나?”

“아뇨, 아뇨. 그런 거 없어요.”

“그래.”

성기사는 창문에서 몸을 돌리더니 창틀에 몸을 기대 세웠다.

찬란한 햇빛이 쏟아져 내려와 성기사의 정수리를 반짝반짝 물들였다. 그의 은빛 머리가 반짝거리는 모습은 마치 태양에게 신성한 세례를 받는 것만 같았다.

넋을 잃고 성기사를 바라보던 기린의 입술 새로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가 흘러나갔다.

“정말…….”

“응?”

“아름다우시네요. 늘 생각해왔지만.”

“뭐라고?”

그런 말은 태어나 처음 듣는다는 듯이 성기사가 미간을 찌푸리며 기린을 쳐다보았다. 기린은 성기사를 물끄러미 바라다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실례가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정말 아름다운 용모에요, 성기사님은.”

“감히 내게 그런 말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성기사가 허리를 곧추세우며 기린을 위엄 있게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하핫!”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민기린. 너는 말이지, 정말 웃기는 녀석이다.”

기린의 눈이 보름달만큼 커졌다. 성기사가 그렇게 밝고 환하게 웃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웃는 얼굴은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을 때보다 훨씬 더 근사했다.

“잘생겼다는 말을 아무한테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요?”

“내게 그런 말을 하는 건 네가 유일해.”

성기사가 턱을 쓰다듬으며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내가 무서워서 다들 그런 말을 못 하는 건가?”

“그럼 성기사님은 본인이 잘생겼다는 자각은 있으세요?”

“나도 거울은 보니 말이다.”

성기사가 어깨를 들썩이며 팔짱을 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꽤 수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지.”

“와…… 자뻑 쩔어.”

“뭐가 쩔…… 그게 무슨 소리지?”

“아니에요.”

기린은 키득대며 성기사의 옆에 바짝 다가가 섰다.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니 의외로 성기사님도 재미있는 구석이 있으시네요.”

“내가?”

“네. 엉뚱한 구석도 있으시고.”

“내가 엉뚱하다니. 그런 말도 처음 듣는다.”

성기사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기린이 키득키득 웃었다. 어쩐지 성기사가 더욱 가깝게 느껴졌다. 성기사가 이렇게 긴장을 풀고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던가? 기린은 성기사가 이제 자신을 좀 더 친근하게 느끼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내심 좋아졌다.

“있잖아요.”

“뭐지?”

“계속 여쭤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물어봐도 되나요?”

“말해봐라.”

“성기사님은 언제부터 레오나르도, 아니, 그러니까 제2 왕자님을 좋아하셨어요?”

“……뭐?”

이크. 너무 오버했나?

성기사는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차가운 표정으로 기린을 노려보았다. 세상에 그딴 불쾌한 질문은 처음 듣는다는 표정이었다. 성기사의 매서운 눈빛에 주눅이 든 기린이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그러자 성기사가 피식, 하고 코웃음을 쳤다.

“그래. 궁금할 수도 있겠지. 너는 왕자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으니.”

“아니…… 그런 뜻으로 물은 게 아니었는데.”

“좋아, 말해주지. 누군가에게 이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도 처음이다.”

성기사는 벽에 다시금 몸을 편안하게 기대더니 두 다리를 부드럽게 꼬았다.

“레오나르도 왕자님을…… 처음 만났을 때, 왕자님은 아직 열 살의 꼬맹이였지.”

기린이 경악했다.

“설마 그때부터 좋아하신 건?!”

“그럴 리가! 나를 뭐로 보고!”

성기사가 덩달아 경악하며 소리를 쳤다. 식겁하는 성기사를 보고서야 기린은 안심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렇죠? 휴. 놀래라.”

“내 이야기를 듣겠다는 거냐, 말겠다는 거냐?”

“들어요, 들을 거예요!”

기린이 경청하겠다는 포즈를 취하며 눈을 반짝거리자 성기사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왕자님은 언제나 밝고 명랑하셨지. 어머니를 잃은 지 얼마 안 된 나에게도 어찌나 다정하셨는지……. 참으로 햇살 같은 분이시다. 예나 지금이나.”

성기사는 손바닥을 펼쳐서 창문 새로 넘실넘실 들어오는 햇살에 비춰보았다. 햇살은 성기사의 손바닥 안에 그득하게 담겼다. 하지만 성기사가 손을 꽉 쥐어보아도 그 안에 잡혀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성기사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레오나르도는 성기사에게 있어 이런 존재였다. 어디에나, 늘 따스하게 존재하지만 누구에게나 동등한. 특별히 나를 위해 더 따뜻하지는 않은. 잡으려야 잡을 수 없는 존재.

‘정녕 이 감정이 사랑일까?’

성기사는 고개를 들어 왕궁 복도 천장을 올려다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기린에게 속마음을 들키기는 했지만, 성기사는 여전히 이것이 사랑인지 아닌지 헷갈리기만 했다. 어쩌면 이 감정은 동경에 더 가까울지도 몰랐다. 나와 정반대의 인간에게 이끌리는…… 그와 비슷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동경심.

성기사는 여태껏 사랑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레오나르도에게 특별하게 품은 감정을 사랑이라고 이름 붙인 것뿐일지도 몰랐다.

성기사가 햇볕을 꽉 움켜쥔 채로 속삭이듯이 말했다.

“사실은 잘 모르겠다. 내가 정말로 왕자님을 좋아하는 것인지.”

“좋아하면 좋아하는 거지,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요?”

“글쎄다.”

성기사가 피식 웃으며 기린을 쳐다보았다.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기다란 은빛 머리칼이 찰랑이며 쏟아져 내렸다.

“나는 너처럼 솔직한 성격이 아니라서 그럴지도 모르지.”

“…….”

기린은 어쩐지 성기사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애정의 감정을 느끼면서도 그게 사랑인지 아닌지 확신하지 못한다니. 그보다 더 안타까운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기린은 성기사의 꽉 쥔 주먹을 잡아주고 싶어졌다. 기린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성기사의 손을 움켜쥐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성기사님!”

왕궁 기사단 중 한 명이 다급하게 달려와 성기사를 찾았다. 예사롭지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눈치챈 성기사가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섰다.

“무슨 일이지?”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왕궁 기사단 전부를 불러들이셨습니다.”

성기사는 기린을 돌아보았다. 기린도 어느새 긴장한 듯이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가지, 기린.”

“네. 성기사님.”

기린과 성기사는 저벅저벅 걸어 왕궁 홀로 향했다.

***

“이런 일은 처음이야.”

칼레나 왕국의 왕인 유클리드가 매우 긴장한 표정으로 왕좌 앞을 서성거리며 중얼거렸다. 성기사는 나란히 서 있던 대열을 이탈하여 왕 앞으로 한걸음 다가섰다.

“폐하. 대체 무슨 일이시기에 그러십니까?”

“별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너무 급작스러워서 말이지. 자네와 기사단의 의견을 듣고 싶어서 불렀네.”

“하문하시지요.”

성기사가 예의 바르게 한쪽 무릎을 꿇어 바닥에 대며 말했다. 유클리드는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게 말이지. 갑자기 옆 왕국인 페르진의 왕이 우리 왕국에 방문을 하겠다고 연락을 해왔지 뭔가.”

“예? 페르진 왕국의 왕이요?”

“그래. 그것도 당장 며칠 뒤에 당도한다고 하는구먼. 벌써 출발을 했다고 하네.”

유클리드의 말에 성기사도 꽤나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말을 들은 기린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페르진 왕국이라면 아르고의 나라! 그런데 그 나라의 왕이 행차를 한다고? 마침 아르고가 내게 오겠다고 한 시일에? 이거 심상치 않은데? 호, 호, 혹시 아르고가 페르진의 왕?!’

기린의 가슴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진짜로 아르고가 옆 나라 왕이기라도 하면 어쩌지? 그럼 나는 ‘이국의 왕비’ 엔딩도 볼 수 있는 거야?! 으아! 어, 어쩌지?!’

기린이 김칫국을 마시는 순간 성기사가 입을 열었다.

“방문의 목적은 뭐라고 합니까?”

“그저 평화를 위한 만남이라고 하던데…….”

유클리드가 턱을 쓰다듬으며 의미심장한 소리를 냈다. 성기사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마왕을 봉인하기 전까지 대립하던 나라입니다. 마왕을 봉인한 후에는 평화 협정을 맺었지만…… 한 번도 그 나라의 왕이 우리 칼레나를 찾아온 적은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이렇게 급작스럽게는 더욱이요.”

성기사와 유클리드는 페르진 왕국에서 무언가 꿍꿍이를 가지고 이 나라를 방문하는 건 아닌지 우려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기린은 아르고가 나쁜 마음으로 이 나라를 방문하려는 게 아님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들처럼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나서서 ‘그 사람은 나를 보러 오는 거예요! 걱정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하고 말해줘야 하는 건 아닌지가 도리어 고민이 되었다.

“페르진 왕국의 ‘젠’ 왕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갑작스레 우리 칼레나를 방문한다는 걸까.”

“응? 젠? 아르고가 아니라?”

유클리드의 중얼거림에 기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기린의 되물음을 들은 유클리드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르고? 그게 누구지?”

“아닙니다. 폐하. 제가 그냥 혼잣말을…….”

기린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페르진의 왕 이름이 아르고가 아니라 젠이었단 말이야? 그럼 아르고는…… 대체 어떤 인물이지? 왕을 설득해서 옆 나라에 찾아올 만큼 힘이 있는 사람? 아니면…… 그냥 이 전부가 정말 우연인 걸까? 어쩌면 게임 속이니까…… 또 이 엉망진창 밸런스 게임이 마음대로 이벤트를 벌이는 걸 수도 있어.’

기린은 스스로 답을 찾으며 고개를 연신 끄덕거렸다.

유클리드는 성기사와 한참 동안 더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결론은 역시 ‘페르진 왕국 왕의 마음을 알지 못하겠다.’ 였다. 일단 오고 있는 사람들을 막을 수는 없으니, 유클리드는 다급하게 연회를 준비하도록 지시했다. 더불어 왕궁 기사단에게는 마음을 놓지 말고 여느 때보다 더 확실하게 경비를 설 것을 명했다.

***

페르진 왕국의 행차가 올 때까지 기린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냈다.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연회 준비는 매우 신속하게 이루어졌지만, 규모는 성대했고 만찬은 화려했다.

유클리드는 마치 뽐내기라도 하듯이 칼레나 왕국 최고의 요리사들을 불러내 요리를 맡겼다. 당연히 광장의 레스토랑 요리사도 불려와 요리를 했다.

깨끗하게 치워진 왕궁 홀에는 커다란 식탁이 여러 개 들어왔고, 수백 개의 의자가 줄지어 나란히 준비되었다. 정원사들은 왕궁과 왕국 곳곳을 다니며 모아온 탐스럽게 피어난 꽃송이들로 홀을 아름답게 꾸몄다. 왕궁 사용인들은 번쩍번쩍 윤이 날 정도로 대리석 바닥을 닦고, 먼지 한 톨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깨끗하게 홀을 청소했다. 은 식기를 어찌나 말끔하게 닦아댔는지 거울처럼 얼굴이 비칠 정도였다.

유클리드는 다소 긴장한 표정으로 왕궁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연회와 만찬 준비에 참견을 해댔다. 그는 꽤나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 있는 페르진 왕국의 왕과의 만남이었으니까.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다가왔다.

페르진 왕국의 행차가 도착한다고 전해진 그날, 아침부터 왕궁 기사단은 왕국 외곽에서부터 왕궁으로 들어서는 길목까지 정확한 거리를 두고 길게 늘어서 페르진 왕국의 행차를 맞이할 준비를 마쳤다. 기린은 왕궁으로 들어서는 중간 즈음 거리에 자리를 잡고 서 있었다.

긴 창을 들고, 번쩍이는 갑옷을 입은 채 위엄 있게 서 있는 왕궁 기사단을 백성들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이미 그들 사이에서도 페르진 왕국의 왕이 온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터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백성들은 저마다 기대 반, 걱정 반의 얼굴로 웅성거리며 행차가 지나갈 길목 근처로 모여들었다. 젊은 여자들과 어린아이들 중에는 환영의 뜻을 알리는 붉은 꽃잎을 잔뜩 담은 바구니를 든 이들도 있었다.

기린은 자신을 경외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백성들의 시선을 받으면서 어쩐지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진짜로, 현실 세계에서도 왕궁 기사단의 일원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기린은 자기 곁으로 다가와 조심스럽게 갑옷을 만져보는 아이들에게 상냥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멀리서 누군가가 말을 타고 다급하게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왕궁 성문 앞에 서 있던 성기사가 그 기사를 맞이했다.

“도착했습니다.”

기사가 말하자 성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성기사는 자기 곁에 선 다른 기사에게 빠르게 귓속말을 소곤거렸다. 폐하를 모셔오라는 뜻이었다. 그 기사는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다급하게 성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성벽 위에서 우렁찬 팡파르 소리가 울려 퍼졌다.

‘드디어!’

기린은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허리를 더욱 꼿꼿하게 폈다. 저 멀리서 은은하고 이국적인 향유의 향이 퍼지기 시작했다. 기린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고개를 쭉 뺀 채 행차가 다가오는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수백 필의 흰 말, 낙타와 코끼리는 보석으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화려하게 치장을 하고 있었다. 동물들 위에 올라탄 기사들은 초승달처럼 휘어진 칼을 허리에 차고는 매서운 눈길로 칼레나 왕국의 왕궁 기사단을 노려보았다.

백성들의 입에서 “우와…….”하는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페르진 왕국의 왕 또한 칼레나에게 절대 위엄으로 지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행차는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길었다. 기린은 자신의 곁을 지나치는 페르진 왕국의 사람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샅샅이 훑었다. 이 중에 분명 아르고가 있을 테였다. 자신과 똑같은 황금색 눈동자를 지닌.

그때, 어느 백성 하나가 손가락을 높이 치켜들며 소리쳤다.

“저기! 페르진의 왕이야!”

기린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백성이 가리킨 곳으로 향했다. 무려 코끼리 네 마리가 이끄는, 족히 3M는 넘을 것 같은 거대한 가마 위에 올라탄 한 남자가 우아하게 칼레나의 백성들에게 손을 흔들며 다가오고 있었다.

기린은 그 남자의 나른하고 여유가 넘치는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가마가 기린의 곁을 지나칠 때, 기린은 페르진의 왕과 시선을 똑바로 마주쳤다.

어둡고 짙은 피부. 온정이 가득해 보이는 미소. 그리고 자신과 똑같은 황금색 눈.

페르진의 왕도 기린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렇게 아르고와 기린은 서로를 단박에 알아보았다.

-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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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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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블린

빠른 마주침 좋아요~^^!ㅎㅎ

2021.05.08신고6

으악

크으으으으 또 구르러가자

2021.05.11신고3

seul******

아르고 너무 내 튀향

2021.09.03신고좋아요

acorn

2021.08.14신고좋아요

얘들아 사랑을 해라

이쏴

2021.05.09신고좋아요

NOLZA

2021.05.09신고좋아요

그렇게됐다

헐랭 모야모야 우째되는겨!

2021.05.08신고좋아요

BOMTOON

3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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