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른 김에 왕까지-18화 (18/42)

18화

학생이 찌뿌둥한 얼굴로 어깨를 돌리자 성기사가 굳은 얼굴로 그를 향해 다가섰다.

기린은 성기사가 어깨를 주무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이건 좀 심하지 않느냐’고 일갈을 할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모든 건 기린의 예상을 빗나갔다.

성기사는 학생 뒤편에 자리를 잡더니 그의 어깨를 정성껏 주무르기 시작했다!

“헐?!”

기린은 그 광경을 넋을 놓고 쳐다보았다. 하지만 다른 학생들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계속해서 짚 인형을 향해 칼만 휘두를 뿐이었다.

‘어, 어째서?! 게다가 왜 저 학생은 성기사를 G라고 부르지? 생각보다 큰 인물인 건가?!’

기린이 넋을 놓고 자신을 쳐다보는 걸 눈치챈 성기사가 기린을 대차게 노려보았다.

“뭐 하는 거지? 검술 연습은 안 하나?”

“핫, 네, 네넷!”

기린은 허겁지겁 칼을 들어 올리고 짚 인형을 향해 칼을 휘둘러댔다. 그러면서도 어깨 너머로 자꾸만 힐끔힐끔 시선이 가는 걸 어찌할 수가 없었다.

성기사는 학생의 어깨와 팔을 정성스럽게 주무르며 말했다.

“시원하십니까?”

“어어, 그래. 좀 낫네. 다리도 주물러 봐.”

학생이 다리를 쭉 뻗자 성기사의 손이 그의 다리로 옮겨갔다. 기린은 혀를 내둘렀다.

‘내가 보고 있는 게 꿈은 아니지? 설마…… 내 다리도 주물러주나? 돈 내는 학생에게는 그런 서비스도 해주는 거야?’

그러나 이내 기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냐, 그럴 리가. 저 학생이 생각보다 중요한 인물인 게 틀림없어. 어떤 사람인 거지?’

기합 소리와 칼 휘두르는 소리가 가득한 검술장에서 얼룩 고양이를 닮은 학생은 성기사의 안마를 받고 있었다. 기묘한 광경이었다. 기린은 신경을 끄기로 하고 짚 인형을 향해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그때, 왕궁 안에서 요란한 팡파르 소리가 들려왔다. 검을 휘두르던 학생들이 모두 고개를 치켜들고 소리가 난 쪽을 쳐다보았다. 기린도 마찬가지였다. 기린의 눈앞에 창이 하나 떠올랐다.

「이벤트」

‘이벤트라고? 무슨 이벤트?’

기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 궁금증을 해소해주려는 듯이 성기사가 입을 열었다.

“레오나르도 왕자님의 성인식이 시작되려나 보군.”

성기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이어갔다.

“오늘 검술 수업은 여기서 마치겠다. 성인식 구경을 갈 사람은 어서 가보도록. 나도 참석을 해야 하니.”

성기사는 손을 뻗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있던, 얼룩 고양이를 닮은 학생을 일으켜 세웠다.

“왕자님도 가보셔야죠.”

‘왕자!’

기린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렇다. 그 얼룩 고양이를 닮은, 반항기 넘치는 학생은 분명 레오나르도가 말했던 그의 형일 것이다.

제1 왕자는 쯧, 하고 입소리를 내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성인식 한번 요란하게 하네. 왕위 계승자의 성인식은 뭔가 다른가? 꼭 나까지 가 봐야 해?”

“물론이죠. 동생분의 성인식이질 않습니까. 가서 축하해 주셔야지요.”

“칫.”

제1 왕자는 언짢은 듯이 몇 번이고 혀를 찼다. 하지만 이내 모든 걸 포기하고서는 성기사를 따라 왕궁 안으로 슬렁슬렁 걸음을 옮겼다.

학생들은 칼을 정리하고 서둘러 성인식이 열리는 곳으로 뛰어갔다. 모두 성인식이 잘 보이는 앞자리를 차지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기린도 서둘러 칼을 원래 있던 곳에 꽂아놓고는 학생들의 뒤를 따라 뛰어갔다.

***

성인식이 열리는 왕궁 문 바깥에는 이미 사람들이 잔뜩 모여 버글버글했다. 기린은 그 틈새를 파고 들어가려 노력했지만, 사람들의 벽에 막혀 무용지물이었다. 기린은 하는 수 없이 뒷자리에 자리를 잡고서는 까치발을 들며 성인식 장면을 보려고 애를 썼다.

성인식이 열린다고 해서 그런지, 분위기는 밝고 경쾌했다. 사람들은 그 분위기에 휩쓸려 모두가 밝은 얼굴로 웅성거리고 있었다.

팡파르 소리가 다시 한번 울렸다. 화려한 휘장이 둘러진 이벤트 창이 한 번 더 기린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레오나르도의 성인식 이벤트」

“와!”

기린은 흥분했다. 까치발을 더욱 높이 들며 사람들 사이를 요리조리 헤집어 봤지만, 앞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이 그리 쉽게 자리를 비켜줄 리가 없었다.

“왕자의 성인식에 참여해준 백성들이여. 짐이 감사 인사를 전한다.”

이 왕국의 왕, 유클리드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아무래도 마이크를 쓰고 있는 것 같았다.

‘마이크? 대체 이 게임의 시대 배경이 언제인 거야…….’

“그럼 거두절미하고, 바로 왕자의 인사를 듣도록 하겠다.”

“흠, 흠. 이렇게 나의 성인식에 모여 주어서 고맙소, 백성들이여.”

레오나르도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퍼져 나갔다. 레오나르도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걸걸하게 들린 건, 기린의 착각이었을까? 아니면 마이크의 음향 때문이었을까? 기린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내 그 의문을 사라지고 없었다.

레오나르도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올해는 내가 마침내 스무 살이 된 해, 그리고 오늘 내 생일, 성인식을 통해 나는 명실상부 완벽한 성인이 되었소. 그대들이 너른 눈으로 너그럽고 따스하게 바라봐 준 덕에 나는 오늘 이날까지 무사히 살아남아 성인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하오. 그대들의 사랑과 관심에 감사를 전하오.”

“와아!”

백성들의 환호가 터져 나왔다. 기린도 그 사이에 껴서 휘파람을 불고 탄성을 내질렀다. 키가 그리 크지 않았던 기린이 아무리 까치발을 들어도 저 멀리 단상에 서 있는 레오나르도와 유클리드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성기사의 푸른 망토가 휘날리는 것은 똑똑히 보였다. 그리고 성기사 옆에 부루퉁한 얼굴로 지루한 듯이 하품을 하며 서 있는 제1 왕자의 모습도.

레오나르도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번쩍 양팔을 들어 올리는 모습이 보였다.

“오늘은 모든 왕국의 가게가 공짜로 백성들에게 음식을 나눠주기로 했소! 내가 성인이 된 기념으로 쏘는 것이니 모두 함께 즐겨주길 바라오!”

‘쏜다고? 왕자치고는 저렴한 언어네.’

기린은 레오나르도의 성정을 생각하며 키득거리고 웃었다. 백성들의 환호가 더욱 커졌다.

성인식은 즐거운 분위기 속에 진행이 되었다. 백성들은 레오나르도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감탄하며 박수를 보냈다. 기린도 성인식을 즐겁게 즐겼다.

성인식이 끝나자, 백성들이 여기저기로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기린은 덩그러니 혼자 남아 방금 전까지 레오나르도가 서 있던 단상 위를 바라다보았다.

왕가의 문장으로 장식된 휘장이 아름답게 휘날리는 높은 단상을 보고 있자니 레오나르도가 정말 보통 인물이 아니라 이 왕국의 왕자라는 것이 실감이 났다.

“자……. 오늘은 수업도 일찍 끝났고. 시간이 남는데 뭘 하면 좋지?”

기린은 고민에 빠졌다. 이왕 왕궁까지 온 것, 오늘도 기품을 쌓기 위해 문지기랑 대화를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좋아! 문지기와 친분 쌓기다!”

기린은 저벅저벅 왕궁 성벽 근처로 걸어갔다. 언제나 늘 보던 그 얼굴의 문지기 두 명이 왕궁 문 앞에 서 있었다. 기린이 다가가 공손하게 인사를 하자 문지기가 반갑게 기린을 맞이했다.

“오, 오랜만이네. 어서 와, 기린.”

“안녕하셨어요?”

“너 못 본 새 기품이 많이 높아졌구나. 그럴 줄 알고 우리가 선물을 준비했어.”

문지기 둘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다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기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선물이요?”

“우리처럼 낮은 기품의 사람들보다는 더 높은 기품을 지닌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윗분들에게 너에 대한 이야기를 해두었어.”

문지기가 성문을 막고 있던 기다란 창을 치우며 기린 앞에 길을 터주었다.

“들어가 봐. 그분들이 기다리고 계셔.”

“와! 감사합니다.”

기린은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서는 왕궁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기품이 더 높은 인물이라니. 누구랑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걸까? 근위 대장? 왕궁 학자? 아니면…….’

기린은 두근대는 마음으로 왕궁 문을 통과했다. 그러자 그의 눈앞에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가 주르륵 창에 떠올랐다.

「근위대장

장군

왕궁 학자

성기사」

“뭐야?! 4명이나?!”

기린은 깜짝 놀라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단 한방에 성기사까지 다가가는 길이 열린 것이다!

“아하. 성기사와는 이런 식으로 애정을 쌓는 거구나. 하긴, 다른 방법으로 성기사를 만나는 일이 가장 어려웠지.”

납득한 기린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기린은 또 다른 고민에 빠졌다.

“일단 근위 대장을 먼저 만나? 아니면 곧장 성기사에게 고고?”

흐음. 턱을 만지며 고민을 하던 기린이 철썩, 무릎을 내려쳤다.

“모 아니면 도다! 성기사에게 고고!”

기린은 커서를 옮겨 성기사를 클릭했다. 그러자 기린의 다리가 제멋대로 움직이며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했다.

성기사는 왕궁 홀로 이어지는 복도에 홀로 서 있었다. 기린은 그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성기사님.”

기린이 그를 부르자 성기사가 고개를 돌려 기린을 바라보았다.

“아, 민기린. 이제 나와 대화를 할 수 있을 만큼 기품이 많이 쌓였군. 내가 준 단검 덕분인 것 같지만.”

“앞으로도 기품을 많이 쌓아서 성기사님께 부끄럽지 않은 대화 상대가 될게요.”

기린의 대답에 성기사가 눈썹 하나를 꿈틀거렸다. 그리고는 흐릿한 미소를 띠었다.

“제법 예의 바른 소리를 하는군. 좋아. 마음에 들었다.”

“감사합니다.”

성기사는 복도 창문에 삐딱하게 기대서더니 기린을 향해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나와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어서 왔지?”

“글쎄요. 이런저런 이야기요? 사는 이야기라든지…….”

“흥. 시시하군. 오늘 첫 검술 수업은 어땠나? 들을 만했나?”

“네. 아주 재미있었어요.”

“재미라. 다음부터는 난도를 높여야겠군. 검술은 재미있어서는 안 되는 학문이야.”

이크, 괜한 소리를 했나?

성기사가 심각한 표정을 짓자 기린이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자 이내 성기사가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하하!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농담이다.”

기린은 가슴이 제멋대로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성기사가 저렇게 웃을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니. 맑게 웃음을 터트리는 성기사의 얼굴은 이 게임 그 누구보다도 아름답고 고아했다.

기린은 성기사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행히 성기사도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다. 그러던 중,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앗, 기린?”

처음 듣는 걸걸하고 낮은 목소리였다. 기린은 고개를 돌렸다.

“응?”

그곳에는 낯선 이가 서 있었다. 족히 190cm는 훌쩍 넘을 것 같은 키, 떡 벌어진 어깨, 튼튼한 가슴팍, 눈부시게 반짝이는 어깨까지 내려오는 황금색 고수머리, 여름 한 자락을 베어서 심어놓은 듯한 연둣빛 눈동자…….

기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 세요?”

“뭐? 누구냐니? 날 못 알아보는 거야?”

낯선 이가 울상을 지었다. 기린은 당혹스러웠다.

“네? 누구시기에 저를……. 엇?”

기린은 순간 성기사를 돌아보았다가 깜짝 놀랐다. 성기사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낯선 이를 향해 인사를 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기사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기린에게 쏘아붙였다.

“기린, 이 녀석. 레오나르도 왕자님을 잊은 것이냐?!”

“에엥?!”

기린은 깜짝 놀라 성기사와 낯선 이, 아니 레오나르도라고 불린 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낯선 모습이 된 레오나르도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눈두덩이가 붉어진 채 두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기린은 당황했다.

“레, 레오나르도?!”

“그래, 나야…….”

레오나르도가 훌쩍거리며 눈가를 훔쳤다.

“성인식을 치루고 오늘에서야 완벽한 성인이 되었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친구를 못 알아보는 건 너무 하잖아.”

“이, 이건 성인이 된 정도가 아닌데?!”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잖아!

기린은 레오나르도의 얼굴을 다시 한번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옅어진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자니 이 사람이 레오나르도라는 게 실감이 나는 듯도 했다. 연한 연둣빛 눈동자는 마치 파충류의 그것을 바라보는 듯했다.

‘망할 게임. 성인식을 치렀다고 한들 캐릭터를 못 알아볼 정도로 성장시키는 게 어디 있어?! 포우는 그런대로 알아볼 수 있기라도 했지. 이건 그림체가 완전히 다르잖아, 그림체가!’

기린은 속으로 씩씩대며 그렇게 생각했다. 귀엽고 깜찍했던 레오나르도를 생각하니 기린도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헐……. 나의 귀여운 레오나르도는 가버렸구나. 하지만…….’

기린은 훌쩍 커버린 레오나르도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훑어보았다. 기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 모습도 나쁘지 않은데? 아니, 오히려 이쪽이 더 내 취향이야.’

기린은 자기도 모르게 휘파람을 불었다. 레오나르도의 밝고 약간은 소심한 성격에 그렇지 못한 성난 몸이라니. 아주 기린의 취향 저격이었다.

“미안해, 레오나르도. 사과할게. 그건 그렇고 어른이 되니까 아주 멋있어 졌는걸?”

“헤헤, 그래? 옷을 좀 갈아입어 봤어. 이제 흰 타이츠는 입지 않아!”

기린의 칭찬에 금방 기분이 좋아진 레오나르도가 기린 앞에서 빙그르르 몸을 돌렸다. 몸에 절묘하게 맞는 옷 덕분에 레오나르도의 새 몸(?)이 아주 멋들어지게 태가 났다. 기린은 자기 앞에서 빙글빙글 돌며 옷 태를 보여주는 레오나르도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응, 응. 아주 좋아. 멋있어!”

“고마워!”

한쪽 무릎을 꿇고 있던 성기사가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기린의 어깨를 툭, 하고 한 번 쳤다.

“언제 왕자님과 더 친한 사이가 된지는 모르겠지만, 왕자님의 성함을 함부로 부르는 것까지 모자라 이제는 말까지 놓다니. 아주 건방지군, 민기린.”

성기사의 붉은 눈이 차갑게 빛이 났다. 기린은 이크, 싶었다.

‘성기사 앞에서는 존댓말을 썼어야 했나?’

그러자 레오나르도가 나섰다.

“G. 그만해. 나의 하나뿐인 친구를 괴롭히지 마. 기린은 내게 있어 둘도 없이 소중한 사람이야. 앞으로 G도 그런 대우를 해줬으면 좋겠어.”

레오나르도가 제법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성기사는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왕자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예. 알겠습니다.”

성기사는 잘 훈련받은 충견처럼 레오나르도의 명령을 받아들였다. 기린이 덧붙여 말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실수하지 않게 저도 조심할게요. 걱정 마세요.”

“그렇게 말한다면 믿을 수밖에 없겠군.”

성기사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갈 테니 친구분과 계속 이야기 나누시죠, 왕자님.”

“응, 고마워, G.”

레오나르도가 방긋 웃자 성기사는 발뒤꿈치를 붙여 공손하게 한 번 더 인사를 올리더니 저벅저벅 왕궁 복도를 걸어 어디론가 사라졌다. 기린은 사라져가는 성기사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때, 레오나르도가 기린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저기, 기린!”

“응?”

기린이 뒤를 돌아보자 레오나르도는 어쩐지 수줍은 듯한 얼굴로 그를 바라다보았다.

“할 이야기가 있는데…….”

“응, 해봐.”

“아니, 여기서 이야기하기는 그렇고. 장소를 바꾸었으면 좋겠어.”

“그래?”

무슨 심각한 이야기기에 그러지?

기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는 이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겠어. 어디로 갈 건데?”

“왕궁 정원으로 가고 싶어.”

레오나르도가 길을 앞장서며 신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기린은 레오나르도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복도를 걸어 왕궁 뒤쪽으로 빠져나가서도 한참을 걸었다. 마침내 정원에 다다르자 그곳에는 만개한 장미꽃들이 붉은색, 분홍색, 흰색 꽃잎을 펼친 채 두 사람을 맞이했다.

기린은 태어나 이렇게 많은 장미꽃을 본 적이 없었다. 저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우와. 멋있다!”

“그렇지? 왕궁 정원사들이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해 가꾸고 있어.”

레오나르도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기린은 허리를 숙여 장미꽃의 향기를 맡았다. 장미꽃 특유의 매력적인 향이 기린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향도 엄청 좋다.”

“응. 어마마마께서 향이 좋은 장미꽃들을 좋아하셨거든. 그래서 일부러 정원사들이 향이 많이 나는 장미 나무들만 골라 교배를 시켰다고 해.”

“그렇구나. 그러고 보니 왕비님 이야기는 처음 듣네?”

기린이 고개를 들자 레오나르도가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어마마마는…… 몇 해 전에 돌아가셨어.”

“아.”

왠지 그럴 것 같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정말 그렇다고 하니 기린의 표정도 함께 어두워졌다.

“미안해. 괜한 걸 물었나 봐.”

“아냐, 괜찮아. 기린은 이 나라의 백성이면서 모르는 게 많구나.”

“으, 으응. 먼 곳에 있는 기숙 학교에서 자라다 얼마 전에 여기에 왔거든.”

‘휴. 처음 플레이할 때 폴에게 설정을 들어 놓아서 다행이다.’

기린은 자기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화제를 돌리기 위해 기린이 밝은 목소리를 꾸며내며 물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야?”

“아, 그게 말이지.”

레오나르도가 머뭇거리며 기린에게 다가섰다. 그러더니 갑자기 기린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엇, 왜, 왜 그래, 레오나르도?!”

당황한 기린이 레오나르도를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덩치가 커진 레오나르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레오나르도가 올곧은 눈으로 기린을 바라보며 속삭이듯이 말했다. 기린도 이내 긴장이 되었는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레오나르도가 기린을 향해 오른손을 내뻗었다.

“나랑 정식으로 교제해 주지 않을래?”

-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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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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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악

쉽게 받아주지마!!!! 더 많은 애들이랑 굴러야지!!

2021.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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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jahy****

두번째 공략이다아아

2021.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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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ㅍㅅㅍ

귀여운 성격과 그렇지 못한 덩치

2021.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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