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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른 김에 왕까지-17화 (17/42)

17화

검을 닦던 폴의 손이 우뚝 멈추어 섰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하지만 이내 폴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다시 대검을 닦기 시작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게임?”

폴이 시치미를 뚝 떼고서는 하하, 하고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기린의 눈에는 보였다. 폴의 입가가 잔뜩 긴장한 채 떨리고 있는 것을. 기린은 확신했다. 폴이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기린은 의자를 당겨 폴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말해줘요, 폴. 사실대로 모두 다. 나는 이 게임에 ‘빙의’된 건가요?”

“…….”

“폴. 폴이 말해주지 않으면 나는, 난 오늘부터 집 안에만 틀어박힌 채 아무것도 안 하고 허송세월 보낼 거예요! 누구하고도 이어지지 않은 채, 스테이터스도 엉망으로 찍고! 백수 엔딩 볼 거라고요!”

기린의 선언에 당황한 폴이 허둥지둥했다.

“그, 그것만은!”

“그러니까 사실대로 말해줘요.”

기린이 진지한 눈빛으로 폴을 응시했다. 폴은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내더니 커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나.”

폴은 닦고 있던 대검을 옆으로 치워놓더니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기린은 폴이 뭘 걱정하는지 이미 다 안다는 듯이 얼른 대답했다.

“포우 없어요. 제가 아까 시장에 심부름 보냈거든요. 사과가 먹고 싶다고 아침부터 엄청 졸라 댔어요.”

“포우가 없다니 그건 다행이군.”

폴은 말을 고르듯이 입소리를 내며 쩝쩝거리다가 기린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래. 네가 알고 있듯이 이건 ‘게임’이야. 그리고 난 이게 게임이라는 걸 알고 있어.”

“역시나.”

“그리고 너는 이 게임에 ‘빙의’된 게 맞아. 내가 널…….”

“이 게임 속으로 끌고 들어왔죠.”

“맞아.”

폴은 커다란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서는 기린의 눈치를 살폈다.

“나를 원망하지 않아?”

“원망할 게 뭐 있어요. 어차피 빙의된 거 잘 살아봐야겠다는 마음뿐인데. 그리고 엔딩을 보게 되면 나갈 수 있는 거 아닌가요?”

“그건 그래. 기린 네가 엔딩만 본다면…… 언제든지 게임에서 나갈 수 있어.”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폴은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게임에서는 벌써 몇 달이 지났지만, 실제 시간으로는 두어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을 거야. 시간의 흐름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네가 잘만 한다면, 부모님이 여행에서 돌아오시기 전에 현실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그것도 다행…… 어? 근데 저희 부모님이 여행 가신 건 어떻게 알았어요?”

“으윽, 그, 그게…….”

폴이 말을 더듬으며 시선을 돌리자 기린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그를 노려보았다.

“날 스토킹한 거예요?!”

“어쩔 수 없었어! 이 게임을 잘, 훌륭하게, 무엇보다 엔딩까지 포기하지 않고 플레이해줄 사람을 찾아야만 했으니까!”

“어째서요?”

“그건…….”

폴은 잔뜩 주눅이 든 채, 어깨를 좁혀 몸을 옹그렸다.

“나는 이 게임이 게임이라는 유일한 자각을 지닌 이 게임의 ‘신’이야.”

“신? 폴이 ‘신’이라고요?”

“그래.”

기린은 매우 당황스러웠다. 이런 대답은 정말 상상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포우에게 듣기로는 나는 하늘에서 선택받은 아이라 이 집에 왔다고 들었는데…….”

“그래, 그 ‘선택’도 내가 했다는 컨셉이지.”

폴이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게임의 컨셉으로 따지자면, 나는 ‘신’인데 무언가 보람을 찾고 싶어져서 너, 그러니까 ‘플레이어’를 선택하게 돼. 그래서 ‘신’인 나는 집사인 포우에게까지 정체를 숨기고 이 집에 퇴역 군인으로 위장해서 인간 아이인 너를 직접 양육하게 되지. 그런 컨셉이야.”

“아하.”

기린은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원래대로라면 나도 게임 속 NPC이다 보니, 이게 게임이라는 걸 눈치채지 못했어야 해.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이게 게임이라는 자각이 생기더군. 아마도 내가 ‘신’이라는 NPC여서 오류가 생긴 것 같아.”

“흠흠. 근데 그게 나를 여기로 빙의시킨 거랑 무슨 관계가 있어요?”

“그게 말이지.”

폴은 땅이 꺼져라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이 ‘육성(性)시뮬레이션’이라는 게임이 망겜이라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지는 바람에 게임을 플레이하는 사람들이 손에 꼽을 정도로 없어졌어. 벌써 몇 달째 플레이어가 한 명도 없었지. 그로 인해 게임 속 캐릭터들이 애욕과 애정에 굶주려 발버둥 치게 된 거야. 그 모습을 지켜보다 그만…… 그들이 너무 외로워 보여서 너를 데려오게 되었어.”

“헐.”

그런 이유로?

기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폴을 물끄러미 바라다보았다.

“내가 이 게임을 플레이하지 않을 수도 있었잖아요.”

“그럴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어.”

“왜요?”

“기린 네가 19금 BL 게임에 진심이라는 걸 알고 있었거든. 적확한 플레이어를 찾기 위해 내가 얼마나 애를 썼다고.”

“헐…….”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나를 스토킹한 거지?

기린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폴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폴이 재빠르게 양손을 내저었다.

“오해하지 마! 가끔 밖으로 나가서 피시방에서 비엘 게임 후기나 플레이 영상을 찾아보며 조사를 한 것뿐이야. 한국에 정발된 게임은 물론, 정발되지 않은 게임까지 어디를 가든 민기린, 네 후기가 있기에 내 시야에 들어온 거지.”

“엇. 내가 그렇게 열심히 플레이를 했던가?”

“그렇다니까! 상위 1%였다고!”

기린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하긴. 내가 좀 비엘 게임을 많이 플레이하긴 했지.

“그런데…… 비엘 게임을 플레이하는 사람 중엔 여자도 많은데, 왜 여자가 아니라 남자인 나를 고른 거예요?”

“이 게임에 ‘빙의’가 되어야 하니까. 여자보다는 남자가 나을 거라고 생각했어. 게다가 모든 플레이어를 골고루 공략해주려면 무엇보다도 성욕에 집착이 강하고, 여러 사람과 섹스를 해도 괜찮을 만큼 도덕심이 낮아야 했고…….”

“뭐요?! 그럼 내가 모럴이 없는데다가 밝히는 인간이란 이야기예요?”

“얼추 맞잖아! 다른 사람을 데려왔다가 자기 스타일의 공략캐만 죽어라 파면 어떻게 해? 그럼 다른 캐릭터들은 여전히 외로움에 허덕이게 되잖아!”

“으음…….”

그것도 맞는 말이기는 하네.

기린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여태까지 궁금했던 것들을 하나씩 묻기 시작했다.

“그럼 내가 이 게임 내에서 게임 오버가 되면 어떻게 돼요? 얼마 전에도 토끼형 하급 몬스터에게 공격을 당해 죽을 뻔했다고요.”

“아아,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 죽은 시점부터 다시 플레이가 될 거거든. 물론 죽을 땐 좀 아프겠지만.”

“으윽, 아픈 건 싫은데……. 그럼 죽지 않도록 노력을 해야겠군요.”

“그래 주면 더 고맙지.”

“그럼…… 제가 할 일은, 특정 공략캐 하나만 공략할 게 아니라 이 게임에 나오는 모든 공략캐들을 골고루 공략해줄 것……. 인가요?”

“그래, 맞아. 역시 이해가 빠르네.”

“그럼 결국 누구랑 이어지게 되는 거예요? 그건 상관없어요? 최종적으로는 반드시 누굴 골라야 하잖아요.”

“그건 뭐, 네 마음이겠지?”

폴이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엔딩을 보기 전까지 모든 공략캐들을 골고루 행복하게 해주다가 마지막에 누군가를 고르는 건 별로 상관없어. 어차피 엔딩을 보기는 봐야 하니.”

“그럼 최종적으로 내 직업 엔딩과 공략캐 엔딩을 같이 보는 거죠?”

“맞아. 직업 엔딩은 반드시 나지만 하트 상태에 따라서 어쩌면 공략캐 엔딩은 나지 않을 수도 있어.”

“흐음……. 생각보다 복잡하네요.”

기린은 팔짱을 끼며 생각에 잠겼다. 모든 공략캐들을 골고루 만져 줘야(?)하지만 너무 균일하게 하트를 쌓다 보면 결국 누구하고도 엔딩이 안 날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기린은 고민에 빠졌다.

그 모습을 본 폴이 말했다.

“마음에 드는 공략캐가 이미 정해져 있을 것 아니야?”

“마음에 드는 공략캐?”

기린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제일 먼저 머릿속에 마왕이 떠올랐지만, 이내 그의 얼굴이 흐리게 사라지고 성기사와 라이오넬의 얼굴이 떠올랐다. 기린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모르겠어요……. 하트를 쌓다 보니 모든 공략캐들이 마음에 들기 시작했어요.”

“이야, 그거 참으로 잘된 일이네! 계속 그렇게 공략캐들을 공략해줘.”

폴은 기린의 손을 덥석 쥐었다.

“정말 너를 데려와서 다행이야, 기린. 이로써 다시금 캐릭터들이 행복하게 될 거야!”

“과연 그럴까요.”

기린이 미간을 찌푸리자 폴이 거세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 게임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섹스’인 걸! 공략캐들이 섹스를 하면 게임의 평화도 찾아올 거야. 네가 오기 전까지 얼마나 긴장감이 감돌았는지 몰라. 다들 예민해져서 누가 툭 건드리기만 해도 폭발할 지경이었다고!”

“그 정도까지…….”

“플레이해보니 그렇게까지 엉터리인 게임은 아니지? 응?”

폴이 간절하게 물었다. 기린은 폴의 시선을 피했다.

“으음……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뭐, 엉터리여도 좋아! 네가 엔딩만 봐 준다면!”

폴은 꽉 붙잡은 기린의 손을 위아래로 거칠게 흔들어 댔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 게임에 의문이 생기면 뭐든지 내게 물어봐. 내가 알고 있는 건 모두 답해 줄게!”

“알았어요.”

기린은 한숨을 폭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이번 달 스케줄을 짜 볼까요?”

“좋아!”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난 폴이 스케줄 창으로 커서를 옮기자 기린과 폴 앞에 거대한 스케줄 창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어떻게 할래?”

“음.”

기린은 잠시 고민을 했다.

“스테이터스 창 한 번만 볼게요.”

“그래.”

기린이 스테이터스 창을 커서로 클릭하자 여태까지 기린이 쌓은 스테이터스가 나타났다.

「체력 79

근력 58

기품 82 (빛의 드래곤 단검 효과 +50)

지능 12

검술 3

감수성 86

도덕성 101

신앙 222

매혹 533

매력 732

스트레스 52

성스러움 48 (빛의 드래곤 단검 효과 +34)」

기린은 스테이터스 창을 들여다보며 턱을 문질렀다.

“스테이터스가 너무 치우쳐 있지 않나요? 도덕성하고 신앙이 너무 높은 것 같은데.”

“이대로라면 ‘신부’ 엔딩을 보겠구나.”

“엑, 신부요?!”

기린은 죽을상을 지었다. 라이오넬과 함께 이 나라의 신부로 부임하게 되면 그 꼴사나운 ‘고해 성사’ 이벤트를 이어나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물론 엔딩을 보면 현실 세계로 다시 나갈 수야 있겠지만…… 어찌 되었건 그런 ‘평이한’ 엔딩은 사양이었다. 신부 엔딩은 이런 게임에서 제일 쉬운 엔딩, 그리고 뻔한 엔딩에 속했으니까.

기린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신부 엔딩은 싫어요.”

“생각해놓은 엔딩이 있어?”

“비웃지 않을 거죠?”

“내가 플레이어를 왜 비웃어.”

“‘프린세스’ 엔딩을 보고 싶어요.”

“호오, 꿈이 대단한걸?”

폴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껄껄 웃었다.

“‘프린세스’ 엔딩이라면 이 게임의 정석 진 엔딩이네. 그러려면 지능과 매력, 기품을 더 쌓아야겠는걸?”

“역시 그렇죠?”

“음. 그렇다면 나는 수업을 추천해.”

폴이 수업 카테고리를 클릭하자 기린이 지금 들을 수 있는 수업들이 나열되었다.

「검술.

수학.

발레.

신학.

점성술.」

“이 중에서 어떤 걸 들을래? 기품과 매력을 동시에 쌓으려면 발레가 좋겠지만, 지능을 쌓으려면 수학이 좋겠고…….”

“아, 저는 검술을…….”

“응? 검술?”

폴이 의외라는 듯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기린은 수줍게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사실…… 저번 휴식에서 성기사님을 만났거든요. 검술 수업을 듣기로 약속을 했어요.”

“오오, 그래? 성기사와 인연이 있다는 말이지? 그럼 이번에는 성기사를 공략하는 것도 좋겠군. 성기사는 말을 잘 듣는 플레이어를 좋아하니까.”

폴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검술 수업을 스케줄 첫째 주에 채워 넣었다. 기린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느 쪽으로 스탯을 쌓아야 유리할지 감이 안 잡혔는데, 폴이 도와주니 그나마 다행이네요. 리셋이 불가한 게임이니 공략도 볼 수가 없고. 일단은 감으로 갈게요!”

“좋아. 훌륭한 마음가짐이야. 자, 그럼 이다음도 수업을 들을래?”

“으음……. 어떻게 하지?”

기린은 힐끔, 골드 창을 쳐다보았다. 골드 326. 수업을 듣고 나면 100이하로 떨어질 게 분명한 숫자였다.

기린은 폴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아르바이트를 해야겠죠?”

“오오! 그렇게 말해준다면 나야 좋지.”

폴은 기린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르바이트 카테고리를 선택했다. 기린의 눈앞에 아르바이트 창이 떠올랐다.

「<아르바이트 목록>

농장 8G

집안일 1G

성당 2G

여관 4G

레스토랑 5G」

“어떤 걸 할래? 농장과 성당에서는 아르바이트를 해보았으니, 다른 곳에서 해볼래?”

“흐음.”

기린은 고민이 깊어졌다. 앞으로도 수업을 매달 한 주씩 들으려면 아직은 골드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기품이 떨어지는 게 아쉽지만, 일단 농장 아르바이트를 할게요.”

“정말이야?!”

폴이 반색을 하며 눈을 반짝였다. 기린은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좋아요?”

“아, 너무 티 났나? 헤헤.”

폴이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으며 농장 아르바이트를 스케줄 두 번째 주에 채워 넣었다. 기린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매주 성당에 가는 걸로 라이오넬, 아니 신부님과 약속을 했지만……. 이번 주는 골드가 간당간당하니 어쩔 수 없죠. 휴식 주에 가서 이야기하면 라이오넬도 이해해 줄 거예요.”

“그럼 마지막 주는 휴식이고……. 좋았어. 이대로 실행할까?”

“네.”

“그럼 이번 달도 잘 부탁해!”

폴이 실행 버튼을 누르자 사위가 어그러지며 공간이 좁혀 들어가기 시작했다. 폴은 솥뚜껑처럼 커다란 손을 흔들어 기린을 배웅했다.

“잘 다녀와~”

기린도 손을 들어 폴에게 인사를 했다.

“이따가 봐요!”

***

기린이 눈을 뜨자, 그곳은 왕궁에 마련된 검술장이었다. 기린은 쭈뼛대며 학생들이 서 있는 곳으로 가서 섰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이번에는 아는 얼굴이 하나도 없었다.

“레오나르도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레오나르도는 검술 수업을 듣지 않는 것 같았다. 그때, 저벅저벅 발소리가 나며 왕궁 안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학생들 모두 긴장한 표정으로 허리를 곧추세웠다. 기린도 학생들 사이에 껴서 자세를 바로잡았다.

“모두들 모였나?”

왕궁에서 나온 인물은 성기사였다. 성기사를 발견한 기린의 얼굴이 밝아졌다. 성기사도 기린을 힐끔 쳐다보고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약속대로 왔구나, 하는 표정이었다. 기린은 성기사의 호감을 얻은 것 같은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좋다. 오늘은 처음 온 학생도 있으니 복습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다. 모두 앞에 놓인 검을 쥐도록.”

학생들이 일사불란하게 검을 쥐자 기린도 검이 꽂혀있던 곳에서 검을 하나 빼 들었다. 아무런 무늬도 없는, 둔탁한 모양의 장검이었다.

“검을 쥘 때는 자신이 편한 손으로, 엄지손가락을 안쪽으로 쥐지 않게 조심하며 쥔다. 엄지손가락을 안으로 쥐면 검을 휘두르다가 손가락이 부러질 수도 있으니 주의하도록.”

“옛!”

기합이 잔뜩 들어간 학생들이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기린도 한발 뒤늦게 목소리를 높였다.

“네!”

“그럼 앞에 놓인 짚 인형을 공격해 볼까? 내가 돌아보며 자세를 잡아주도록 하겠다.”

다른 학생들은 이미 수업을 몇 번 들은 적이 있는지 검을 휘두르며 짚 인형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기린은 어리바리하게 주위를 둘러보다가 이내 되는 대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얏, 얍!”

대충 검을 휘둘렀는데도 짚 인형이 부서지며 지푸라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오호, 잘 되는 건가?”

“아니, 자세가 엉망이야.”

어느새 기린의 등 뒤로 다가선 성기사가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 기린은 어깨를 움찔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성기사가 칼을 쥔 기린의 손을 잡았다.

“자, 팔은 앞으로 쭉 뻗고. 다리에 힘을 주고. 축이 흔들리면 안 된다. 모든 게 무너져.”

“네, 넷!”

“다시 한번 휘둘러봐.”

“얏!”

“좋아, 아까보다 훨씬 좋아졌어.”

성기사의 칭찬에 기린은 기분이 한껏 좋아졌다. 기린은 성기사가 시키는 대로 칼을 이리저리 휘둘렀다. 그때, 기린의 옆자리에서 칼을 성의 없이 휘두르던 학생이 칼을 바닥에 내동댕이치며 볼멘소리를 냈다.

“아~ 칼은 무겁기만 하고! 하나도 재미없네.”

기린은 고개를 돌려 그 학생을 쳐다보았다. 지루하다는 표정이 만면에 가득한 학생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더니 바닥에 털썩 엉덩이를 붙이고 주저앉았다. 성기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일어나시죠.”

“왜 그래야 하지?”

성기사가 학생에게 존댓말을 썼다! 하지만 학생은 성기사를 노려보며 반항을 했다. 오히려 긴장을 한 건 기린이었다.

‘이크. 성기사한테 저래도 되나? 아무리 돈을 내고 수업을 듣는 학생이라지만…….’

기린은 반항을 하는 학생을 살펴보았다. 금색과 갈색이 뒤섞인 얼룩덜룩한 머리 색은 흡사 얼룩 고양이 같았다. 눈빛은 반항기가 철철 넘쳤고, 얼굴에는 짜증이 흘러 넘쳤다.

얼룩 고양이를 닮은 학생은 어깨를 돌리며 성기사에게 짧게 명령했다.

“이봐, G. 와서 내 어깨나 주물러 봐.”

-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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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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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악

헉 진짜 1황자...? 난 그냥 신분높은 싸가지없는 귀족인줄....

2021.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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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jahy****

1황자인가...?

2021.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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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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