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자. 받아둬라.”
“이게 뭐예요?”
“단검이다.”
기린은 성기사가 내민 검집을 내려다보았다. 왕가의 문장과 드래곤이 새겨진 작은 단검 자루가 번쩍거렸다.
“이걸 왜 저한테…….”
“이 언덕에 또 오르고 싶다면 반드시 이걸 지니고 오도록. 내가 매번 목숨을 구해줄 수는 없으니까.”
기린은 성기사가 내민 단검을 머뭇거리며 받아 들었다. 그러자 스테이터스 창에 변화가 생겼다.
「빛의 드래곤의 송곳니로 만든 단검
공격력 +72
기품 +50
성스러움 +34」
우와, 공격력이 72나?! 기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 우와! 빗자루보다 더 세다!”
“빗자루?”
성기사가 눈살을 찌푸리며 팔짱을 끼자 기린이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앗, 아니에요! 하하!”
“고작 빗자루 따위와 단검을 비교하면 되나. 이건 빛의 드래곤에게 난 송곳니로 만들어진 성스러운 단검이다. 웬만한 몬스터는 단칼에 베어 넘길 수가 있지. 물론 아까 그 토끼형 하급 몬스터 같은 것도 말이야.”
“오오……. 빛의 드래곤에게 난 송곳니로 만들었다면, 혹시 성기사님은 빛의 드래곤을 죽이신 경험도 있으세요?”
“빛의 드래곤을? 내가?”
그러자 성기사가 턱을 치켜들며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어둠의 드래곤이라면 모를까. 빛의 드래곤은 우리 기사단의 상징이다. 우리는 그 드래곤을 매우 성스럽게 여기고 있지. 죽인다니 말도 안 돼. 그 송곳니는 어린 드래곤의 유치를 얻어 만든 거다.”
“아하, 유치.”
“드래곤의 평균 수명은 만 년. 천 년이 되면 어린 드래곤의 유치가 빠지는데, 그때를 맞추어 얻게 되었지.”
“네?! 천 년이요?! 그, 그, 그렇게 중요한 물건을 저한테 주셔도 돼요?”
단검을 받아들고 있는 기린의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성기사가 피식 웃었다.
“아예 주는 게 아니다. 네가 네 몸을 스스로 보호할 수 있을 정도의 검술 실력을 갖추게 되면 돌려주도록.”
“과연 그런 날이 오기는 할지…….”
“내가 강제로라도 그렇게 만들어주지.”
성기사는 망토를 한 번 휙 휘두르더니 기린에게서 몸을 돌려세웠다.
“다음 주부터 검술 수업에 참여하도록 해라!”
“네에?!”
“거절의 대답은 듣지 않겠다. 문답 무용! 무조건 참여하도록.”
언덕을 내려가던 성기사가 어깨 너머로 기린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기다리고 있겠다.”
기린은 멀뚱멀뚱 선 채로 멀리 사라져가는 성기사의 뒷모습만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문득 눈길이 성기사가 주고 간 단검에 닿았다. 기린은 성스러운 드래곤의 단검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이렇게 소중한 걸…… 왜 내게 준 거지……?”
혹시…… 성기사도 슬슬 내게 마음이 생기는 건? 야겜의 주인공 법칙에 따라 내게도 기회를 주는 건가?
기린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렇게만 된다면 완전 최고 아니야?! 저 냉동 참치 같은 성기사까지 꼬셔 넘길 수 있다면 말이야!”
기린은 단검을 척, 하고 허리춤에 찼다. 꽤나 잘 어울리며 태가 났다. 기린은 신이 나서 폴짝폴짝 뛰어대며 언덕을 내려왔다.
다음으로 갈 곳이 있었다. 라이오넬과 이리 뒹굴, 저리 뒹굴하며 또 잔뜩 음기를 채웠으니 마왕에게 가서 식사를 대접할 시간이었다.
***
“마왕님!”
기린이 뒷골목으로 들어오면 반갑게 마왕을 찾았다. 오늘도 어김없이 쓰레기통 위에 앉아 있던 마왕이 기린을 발견하고는 그 위에서 풀쩍 뛰어내렸다.
“오오, 나의 백성. 민기린!”
“식사 드리려고 왔어요.”
“기다리고 있었다.”
기린은 저벅저벅 마왕을 향해 다가갔다. 그때, 갑자기 마왕이 인상을 찌푸리며 기린에게서 황급히 뒷걸음질을 쳤다.
“으윽……?!”
“엇, 왜 그러세요, 마왕님?”
기린이 비틀거리는 마왕에게 다가가려고 하자 마왕은 거칠게 손을 휘저으며 대뜸 소리부터 내질렀다.
“다가오지 마!”
“네, 네에?!”
“으윽…… 이 기운……!”
마왕은 고통스러운 듯이 코를 싸매며 기린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그리고는 기린을 마치 적이라도 되는 듯이 노려보았다.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냐!”
“제, 제가요? 제가 무슨…….”
“이 기운……! 분명 성기사의 기운이야……!”
마왕이 으르렁대며 기린을 노려보았다. 그제야 기린은 아차 싶었다. 기린은 저도 모르게 허리춤을 짚었다. 허리춤에 차고 있는 단검 자루에서 푸르고 영롱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 이게…….”
“마왕인 내게 반응하는 거겠지. 몬스터들을 해치우기 위해 만들어진 검이니까.”
마왕이 사납게 이를 갈며 기린에게서 주춤주춤 멀어졌다.
“어째서 네가 성기사의 검을 가지고 있는 거지?”
“그, 그게…….”
“거짓말할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마라! 사실대로 털어놓지 못할까!”
“저기, 저는 정말 마왕님을 해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냥…….”
기린이 더듬대며 말을 이어갔다. 마왕이 이렇게 불같이 화를 내는 건 처음이었다. 왠지 속이 상하고 억울해서 기린은 눈물이 핑 돌았다. 마왕에게 미움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마왕은 기린이 처음 점찍은 공략캐인걸!
“정말 오해예요! 바람이 많이 부는 언덕에 갔다가 성기사님, 아니 성기사를 만났어요! 제가 몬스터에게 공격당해 죽을 뻔한 걸 살려주셔서…… 그래서 혹시 또 몬스터가 나올 수 있으니 이걸 가져가라며 제게 주신 것뿐이에요!”
기린이 억울해하며 마왕을 향해 허리춤에 차고 있던 단검을 내밀었다. 마왕은 그 단검을 경계하며 몸을 뒤로 더욱 물렸다.
“성기사가 자기 칼을 너에게 그냥 내주었다고?”
“네! 저도 그게 의문이긴 하지만.”
“이상한걸.”
마왕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조심스럽게 기린을 향해 다가섰다. 마왕이 기린이 가지고 있는 단검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단검이 더욱 환하게 발광하며 마왕의 접근을 막아냈다. 빛이 손끝에 닿자 마왕은 고통스러워하며 손을 황급하게 물렸다.
“윽…….”
“괜찮으세요?”
“음…… 뭐 괜찮다.”
마왕은 큼큼, 헛기침을 하고서는 칼에게서 멀리 떨어져 섰다.
“난 네가 성기사와 내통하고 내 목숨까지 완벽하게 끊어놓으려고 온 줄 알았다.”
“설마요! 제가 왜 그런 짓을 하겠어요?”
“모르지. 난 힘없는 마왕이고, 성기사는 이 왕국의 최강자니까. 게다가 성기사는…….”
마왕은 뒷말을 흐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가 문득 무슨 생각이 난 건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다, 됐다. 지금 한 말은 잊어라.”
‘으응……?’
기린은 뭔가 수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성기사는 자신의 어머니가 마계에 끌려가 죽임을 당하셨다고 했고, 마왕은 성기사에 대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그렇다면…… 성기사와 마왕 사이에 무언가 있다는 뜻?!
‘오호! 흥미진진해지는데? 또 이렇게도 얽히는구나!’
기린이 눈을 반짝이며 군침을 삼켰다. 참으로 입맛이 싹 도는 시나리오가 아닐 수 없었다.
마왕은 기린을 힐끔 쳐다보고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네가 그 콧대 높은 성기사와 친분이 있다니 이거 의외인걸.”
“친분이라고 하기엔 뭐하고…… 그냥 얼굴만 아는 사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 그건 또 아닌가?”
“무슨 사이든 간에, 어찌 되었건 잘되었다.”
마왕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씩 미소를 지었다.
“뭐가 잘 되었어요?”
“여태껏 성기사에게 접근을 하지 못해 내 힘을 돌려받는 일은 꿈도 꾸지 못했는데. 나의 백성인 네가 성기사에게 접근할 수 있다니. 이것이 잘된 일이 아니면 뭐가 잘된 일이란 말이냐! 하, 하, 하, 핫!”
“네? 제가요?”
마왕은 기린의 손을 덥석 잡으려고 하다가 푸른빛을 뿜어내는 단검을 보고는 다시금 주춤주춤 물러섰다.
“그래! 이대로 성기사의 환심을 사서 그가 봉인한 내 힘을 돌려다오.”
“너무 어려운 일인데요?!”
“민기린!”
별안간 마왕이 큰 소리로 기린을 불렀다. 깜짝 놀란 기린이 허리를 바짝 곧추세웠다.
“네, 넷!”
“나의 백성인 그대가 나를 위해 일을 해주지 않으면 누가 그 일을 해주지? 그대는 나를 위한 사람인가, 아니면 성기사를 위한 사람인가?”
“저, 저는…….”
기린은 망설였다. 얼마 전이었다면 기린은 망설임 없이 “마왕님의 사람이요!”하고 대답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바람이 많이 부는 언덕에서 있었던 일 때문인지 왠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마왕이 기린 앞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마, 마왕님?!”
“이렇게 부탁하마. 나를 도와다오, 민기린.”
“이, 일어나세요!”
“지금 상황에서 성기사에게 가장 가깝게 접근할 수 있는 건 그대뿐이야. 그대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나는 평생을 이 쓰레기장 같은 뒷골목에서 보내게 되겠지. 부디 나를 불쌍하게 여겨 성기사가 봉인한 내 힘을 돌려받는 데 힘써 주지 않겠나?”
“어어…….”
기린은 머뭇거리며 눈동자를 위로 밀어 올렸다. 힐끗, 마왕을 쳐다보니 마왕은 마치 비에 젖은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기린을 바라다보고 있었다.
‘으윽. 저 눈빛은 반칙 아니야?’
“민기린…….”
마왕의 눈길이 더욱 초롱초롱 빛이 났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톡! 하고 떨어져 나올 것 같았다. 기린은 두 눈을 꼭 감으며 고개를 휙 돌렸다.
‘보면 안 돼, 저 눈빛을 보면……!’
하지만 기린은 욕망을 참지 못하고 눈을 가늘게 뜬 채 한 번 더 마왕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이때다 싶었던 마왕이 마구잡이로 눈빛을 쏘아댔다. 마치 눈빛으로 공격을 하는 것만 같았다.
‘으윽! 더 이상은…… 한계야……!’
“아, 알겠어요! 도와드릴게요! 도와드리면 되잖아요!”
기린은 마침내 마왕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하고야 말았다. 마왕의 얼굴이 환하게 피어났다.
“그게 정말인가?!”
“어쩔 수 없죠. 그런 눈빛을 보내시는데 제가 언제까지 거절할 수가 있겠어요.”
“호오, 역시 내 필살 눈빛 공격은 아직 안 죽었나 보군.”
“필살, 뭐요?”
“무시하시게. 하하하핫!”
……이거 왠지 당한 기분인데.
기린은 투덜거리며 마왕을 일으켜 세웠다. 마왕은 바닥에 꿇었던 무릎을 펴며 기린을 향해 밝게 웃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하네, 나의 백성 민기린! 최대한 성기사에게 가까이 접근해서 그가 내 봉인한 힘을 어디에 숨겨뒀는지부터 알아내도록 해.”
“어렵네요.”
“내 힘이 봉인된 곳만 알면 내가 밤에 몰래 왕궁으로 침입해 훔칠 수도 있는 거니까.”
“과연. 지금의 마왕님이 그 일을 해내실 수 있으실까요? 문지기한테 발각되어 맞아 돌아가실 것 같은데요.”
“어허!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보지 말고!”
마왕이 오른발을 쿵쿵대며 씩씩거렸다. 마왕을 놀리던 기린이 키득거리고 웃자 마왕은 체통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벌게진 얼굴로 다시금 목을 가다듬었다.
“큼, 큼. 어찌 되었든 그대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는 거야.”
“알겠어요.”
“풍문으로 들어보니 성기사는 검술 수업을 맡고 있다던데. 자네가 그 수업을 들어보면 어떨까? 일단 검술 수업에서 뛰어난 재능을 선보이고 성기사의 관심을 얻게 되면…….”
마왕이 주저리주저리 이야기를 늘어놓자 기린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며 삐딱하게 벽에 기대섰다.
“뛰어난 재능이요? 마왕님은 제가 검술에 조금이라도 재능이 있어 보이세요?”
그러자 마왕이 당혹스러워하며 허둥지둥했다.
“어흠. 그, 그야 그렇게 보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일단 검술 수업은 들어볼게요. 약속한 것도 있고.”
“약속? 누구랑? 뭘?”
“아무것도 아니에요.”
여기서 검술 수업을 듣기로 성기사와 이미 약속했다는 걸 굳이 털어놓을 필요는 없겠지. 또 성기사와 내통하는 게 아니냐는 괜한 오해만 살 수가 있었다. 기린은 입을 다무는 쪽을 선택하고는 태연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럼 저는 다음 주부터 검술 수업을 듣도록 할게요. 그리고 그다음 주에는 늘 그래왔듯이 성당 아르바이트를 하고, 휴식 주에는 마왕님께 돌아와서 식사를…….”
“아. 그러고 보니 그것도 말하려고 했다.”
마왕이 기린의 말을 끊어냈다. 기린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를요? 하실 말씀 있으세요?”
“식사를 얻어먹는 마당에 이런 투정까지 하기는 미안하지만 말이야. 꼭 말해야겠어서…….”
“잉? 뭔데요?”
마왕은 힐끔힐끔 기린의 눈치를 보다가 마음을 다잡는 듯이 심호흡을 크게 하고는 큰 소리로 외쳤다.
“맨날 신부의 음기만 먹자니 질려! 이제 다른 음기도 먹고 싶어!”
“네에?!”
어린애 반찬 투정 같은 소리에 기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상상도 못 한 화제였다. 마왕은 두 눈을 질끈 감은 채로 계속해서 소리쳤다.
“맨날 같은 것만 먹다 보니까 약발도 떨어져! 이제 별로 음기가 충전되지도 않아! 다른 음기 먹고 싶어! 다른 놈! 색다른 거!”
“헐…….”
기린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입소리를 내자 마왕이 기린을 향해 몸을 돌려세웠다.
“내 꼴이 우습다는 거 알아. 그대가 다른 이랑 정사를 나누었다고 해서 질투까지 해놓고, 이제 와서 또 다른 이의 음기를 받아 오라니. 내 말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어. 하지만…… 이왕 먹는 거라면……!”
마왕은 두 주먹을 불끈 쥔 채로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기린은 마왕의 감정을 읽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는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기린은 저도 모르게 “풉!”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왜, 왜 웃지?”
마왕이 자존심이 상한 듯한 표정으로 기린을 바라보며 물었다. 기린은 깔깔거리고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마왕님이 너무 귀여워서 웃는 거예요, 오해하지 마세요. 하하하!”
“내가 귀여워……?”
“알겠어요. 노력해 볼게요. 흐음. 그럼 누구의 음기로 해야 하나…….”
라이오넬이 아니라면, 그다음으로 가장 하트 개수가 많은 건 왕자인 레오나르도였다.
‘레오나르도와 섹스를 해야 하나? 레오나르도는 내가 하자고 하면 금방 베드 인할 것 같기는 한데……. 하지만 레오나르도는 왠지 안 땡긴단 말이야. 귀엽기는 하지만 완벽하게 내 스타일도 아니고. 그럼 누구랑 해야 하지?’
기린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지금까지 밝혀진 다섯 명의 공략캐들 가운데 신부와 왕자를 제외하고 나면 하나는 발기 부전인 마왕, 다른 하나는 접근조차 쉽지 않은 성기사, 그리고 마지막은 집사인 포우였다.
‘포우도 내가 부탁하면 바로 베드 인할 것 같기는 하지만…… 포우와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는 게 영 부담스럽고. 어디 다른 데서 음기를 얻을 데 없나?’
그 순간, 기린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인물이 있었다. 그이의 느끼하고 부담스러운 목소리가 기린의 귓전을 울렸다.
‘쭈인님~!’
“으윽, 소름!”
척추를 타고 온몸에 쫙! 하고 소름이 돋아 기린은 저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아냐. 아무리 그래도 왕은 싫어. 너무 징그럽잖아!’
기린은 생각을 정리하며 마왕에게 말했다.
“어떻게든 제가 다른 인물을 찾아볼게요. 지금 당장 떠오르는 사람은 없지만…… 어떻게든 되겠죠!”
“오오. 부탁하네, 민기린!”
“그래도 당분간은 신부님 음기만 가져올 수도 있어요. 아예 식사를 하지 않으시는 것보다는 드시는 게 나을 테니 그거라도 챙겨올게요.”
“알겠네.”
“그럼 오늘은 이만…….”
“다음번에는 그 칼은 꼭 두고 와. 그 칼 때문에 오늘 식사는 공쳤군.”
“죄송해요.”
기린은 마왕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뒷골목 바깥으로 나섰다. 마왕이 손을 흔들며 기린을 배웅했다.
***
“다녀왔…… 으잉?!”
지친 몸을 이끌고 기린이 집에 돌아오니 거실 테이블 앞에 폴이 앉아 있었다. 기린은 꼭 물어야 하는 질문이 있다는 것도 잊은 채, 반가운 마음이 제일 먼저 들었다.
“아버지! 대체 어딜 갔다가 이제 오신 거예요!”
“오오,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린아.”
고개를 들어 기린을 바라보는 폴은 무척 지쳐 보였다. 깜짝 놀랄 정도로 얼굴이 수척해져 있어서 기린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아버지. 무슨 일 있으셨어요? 안색이 너무 안 좋아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갑자기 며칠 동안 들어오지 않아서 내 걱정 많이 했지?”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대체 어딜 갔다 오신 거예요.”
“길드에서 퇴역 군인들에게 몬스터 퇴치 임무를 부여했다. 이미 왕궁 근처까지 몬스터 무리가 들이닥쳤다고 하더구나. 그래서 미리 말도 못 하고 아침 일찍 다급하게 나갈 수밖에 없었어. 그래도 하루 이틀이면 돌아올 줄 알았는데…… 몬스터 무리가 쉼 없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게릴라 작전을 수행하느라 돌아올 수가 없었단다.”
폴이 커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마왕이 사라진 뒤로 우두머리를 잃은 몬스터들이 제멋대로 날뛰며 왕궁을 더더욱 위협하고 있어. 어찌 보면 마왕이 있을 때보다 지금이 더 몬스터가 많아진 것 같아.”
“…….”
“아, 이런 말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밀이다. 최강자 G 님을 부정하는 말이 되니, 이런 말을 했다는 게 알려지면 나는 분명 지하 감옥에 갇히게 될 거야.”
폴이 애써 미소를 내보였다. 폴은 의자에 앉아 커다란 대검에 묻은 짙은 검은색의 몬스터 피를 닦아내고 있었다.
말을 꺼내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기린은 반드시 폴에게 물어볼 것이 있었다. 기린은 의자 하나를 끌어와 폴의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폴이 고개를 들어 기린을 바라다보았다.
“응? 무슨 할 말 있니?”
“네, 있어요.”
“그래. 해 보거라.”
스륵, 스륵 하고 폴이 대검을 문지르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기린은 작게 심호흡을 하고는 운을 뗐다.
“아버지, 아니 폴은 이게 게임이라는 거 알고 있죠?”
- 다음 화에 계속
최신순 인기순
댓글(3)
0/500자
등록
csmx**
왕..,,저만 끌리나요
2021.08.14
신고
좋아요
으악
다음판은 성기사 기대중 흐흐
2021.05.10
신고
좋아요
jahy****
반찬 투정하는 마왕님...
2021.05.08
신고
좋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