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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른 김에 왕까지-8화 (8/42)

8화

기린과 왕은 깜짝 놀란 눈으로 열린 문 쪽을 바라다보았다. 그곳에는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왕자가 서 있었다.

왕자는 침대로 저벅저벅 다가와 기린을 향해 기대어 있던 왕을 거칠게 밀어냈다. 왕은 뒤로 나동그라지며 다급하게 바지춤을 추켜올렸다.

“와, 왕자!”

“레오나르도?!”

“이게 대체 무슨 짓이세요, 아바마마!”

왕자가 소리쳤다. 왕은 당황한 표정을 애써 숨기며 근엄한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했다.

“그건 내가 물을 말이오, 왕자! 짐의 내실에 갑자기 뛰어 들어오다니! 이게 무슨 무례인가!”

“이제 와서 근엄한 척하시려고 해도 소용없어요, 아바마마!”

왕자는 눈물이 맺힌 눈으로 왕을 노려보았다.

“밖에서 다 들었어요!”

“다 듣다니 무얼?!”

“아바마마가 기린 씨에게 애걸복걸하는 소리요! 저는 이제 아바마마의 정체를 알아요!”

“으헉?!”

왕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당혹스러웠는지 왕은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다. 기린은 침대에 벌렁 드러누운 채로 두 눈만 끔뻑이며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상황이 재미있게 돌아가네?’

그 순간, 왕자가 침대에 누운 기린에게로 다가오더니 허리춤에 달고 있던 작은 칼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기린을 향해 높이 들어 올렸다. 기겁한 기린이 소리쳤다.

“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예요, 레오나르도?!”

“히얍!”

왕자가 기합을 넣으며 칼을 휘둘렀다. 질투에 눈이 멀어 나를 죽이려고 하는 건가?! 기린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순간 밧줄에 묶여 있던 손이 자유로워지는 걸 느꼈다. 기린은 조심스럽게 다시 눈을 떴다. 왕자는 기린의 손목을 묶고 있던 밧줄을 잘라낸 것이었다. 기린은 손목을 어루만지며 침대에서 주섬주섬 일어나 앉았다.

“난 또…… 고, 고마워요…….”

“…….”

레오나르도는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바닥에 나동그라졌던 왕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왕자. 이 무례는 궁중 법도에 어긋난 것이오! 아무리 왕자라도 짐의 내실에 허락 없이 함부로 발을 들일 수는…….”

“그만 하세요, 아바마마. 아바마마도 허락 없이 기린 씨를 덮치려고 하셨잖아요!”

“느헉?!”

왕자가 단호하게 쏘아붙이자 왕은 대꾸할 말을 잃은 채 얼어붙어 버렸다. 왕자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있는 기린을 일으켜 세웠다.

“아바마마께 너무나도 실망했어요! 저에게는 그리도 예절과 예법을 강요하셨으면서, 아바마마는 실은 이런 분이셨던 거군요?”

“와, 왕자 그것은…….”

“대체 제게 왜 그러셨던 거예요? 엄격하고 근엄했던 아바마마의 이미지가 와장창 깨졌어요!”

“끄으윽…….”

왕은 신음하며 허리를 굽혔다. 본모습을 들킨 것이 생각보다 엄청난 충격이었는지 왕의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왕은 무릎을 짚은 채로 헉헉 숨을 몰았다.

“지, 짐은…… 그저 이 나라를 잘 다스리고 또 후계를 잘 잇고 싶었던 것뿐이오.”

“알아요. 하지만 그것과 저를 왕궁에 가둬두시려고 한 것은 무슨 관계가 있죠?!”

“왕자가 바깥세상을 너무 일찍 알았다가 나처럼 이상 성욕자가 되어 한심한 성욕을 품게 될까 봐……!”

“왕궁에 가두고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못 나가게 하신 것만으로도 머리가 돌아버릴 것 같았어요! 게다가 바깥세상 좀 구경했다고 모두가 아바마마처럼 이상 성욕을 갖게 되지는 않는다고요!”

“뜨헉!”

오, 레오나르도 말 잘하는데.

기린은 자기도 모르게 감탄을 하였다. 왕자는 기린의 어깨를 감싸 쥔 채로 그를 바깥으로 이끌었다.

“나가요, 기린 씨. 더는 여기 있지 말아요. 여기 계속 있다가는 아바마마께 어떤 큰일을 당할지 몰라요.”

“그럴까요?”

기린은 옳다구나 기쁜 마음으로 왕자를 따라 내실 바깥으로 나섰다. 그러면서 어깨 너머로 뒤를 힐끔 바라보았더니 아직도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왕이 머리를 짚으며 휘청거리는 것이 보였다.

‘왕자에게 내세우던 왕의 위엄은 끝이 났군,’

생각보다 폭력적이었던 상황이었다. 야겜에서 이런 시나리오까지? 기린은 놀란 감정을 숨기기 위해 표정 관리를 해야 했다.

넓고 긴 복도를 걸어 나가며 왕자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왕자의 곁을 따라 걸으며 기린은 자꾸만 그의 눈치를 보았다.

‘왜 아무런 말이 없지?’

왕자는 무언가 깊게 생각에 빠진 표정인지라 무어라 말을 붙이기에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기린 또한 말없이 왕자를 따라 걷기만 했다.

복도 중간까지 오자 마침내 왕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기린 씨.”

“네?”

“설마…… 정말 그대로…….”

“응? 무슨 소리예요?”

“그대로 아바마마께 안길 생각은 아니었던 거죠?”

왕자가 울먹울먹한 얼굴로 기린을 돌아다보았다. 왕자의 머리 위로 호감도 스테이터스가 떴다. 4번째 하트가 불안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여기서 대답을 잘해야지 저 하트를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때, 기린의 눈앞에 선택지 창이 떠올랐다.

「뭐 어때요. 닳는 것도 아니고. 한 번쯤 시도해볼 수도 있죠.」

「아뇨. 그럴 생각 없었어요.」

이야, 이거 너무 쉬운 선택지 아닌가?

기린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두 번째 선택지를 골랐다.

“아뇨. 그럴 생각 없었어요.”

이건 기린의 진심이었다. 아름다운 공략캐들이 널리고 깔렸는데 첫 경험을 왕과 하다니?! 기린은 결단코 그럴 생각이 없었다.

기린의 대답에 왕자가 강아지 같은 두 눈을 치켜뜨며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정말이죠?”

“네.”

기린이 부드럽게 웃자 왕자의 입가에도 겨우 미소가 감돌았다.

“휴…… 다행이다.”

왕자가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트 수로 이미 왕자의 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기린은 짐짓 모르는 척 물었다.

“뭐가 다행이에요?”

“앗, 아니 그게…… 그러니까…….”

당황한 왕자가 얼굴을 붉히며 기린에게서 시선을 피했다.

‘오호. 엄청 귀여운데? 이대로라면 첫 경험은 왕자랑 할 수 있겠어.’

기린은 마음속에서 왕자의 순위가 쑥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작은 키에 작은 덩치. 금발에 녹색 눈. 기린이 대놓고 좋아하는 공략캐의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왕자는 그 모든 것을 뛰어넘을 수 있을 만큼 귀여운 매력이 있었다.

‘이런 당돌하고 귀여운 왕자라면…… 안길 수도 있을 것 같아.’

기린은 그렇게 생각했다. 무엇보다 ‘왕자’라는 신분이 가장 매력적이었다.

‘이대로 ‘왕자비’ 엔딩을 봐? 어차피 이런 게임의 진짜 히로인은 왕자잖아. 왕자와 결혼해서 진짜 ‘프린세스’가 되는 게 진정한 왕도니까!’

기린은 남몰래 마왕(어둠의 세계)의 프린세스가 되는 것과 왕자(정석의 밝은 세계)의 프린세스가 되는 엔딩을 견주어 보았다. 어느 쪽도 마음에 들었다.

‘첫 엔딩으로는 정석 엔딩도 나쁘지 않지. 암.’

기린은 조용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때, 복도 끝에서 누군가가 저벅저벅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왕자와 기린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그쪽을 바라다보았다.

“엇?”

“G?”

왕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이의 이름을 불렀다. 성기사는 날카롭고 매서운 붉은 눈을 반짝이며 왕자를 향해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왕자님.”

“G. 무슨 일이야?”

“국왕 폐하의 내실에서 소란이 일어났다고 하여 가보는 중이었습니다. 이제 보니 소란의 주범은 왕자님이셨던 것 같군요.”

“응. 내가 그랬어. 미안해. 아바마마는 충격을 받으시고…… 아니, 어쨌든 지금 내실에 계셔.”

“제가 가봐야 할까요?”

“음…… 아니. 가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아.”

왕자는 성기사를 G라고 불렀다. 아무래도 성기사가 자신을 이름으로 불러도 괜찮다고 인정한 인물 중에 하나가 왕자인 듯싶었다.

‘나는 언제쯤 성기사를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까? 아니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지금까지 공략캐 중에 가장 어려운 공략캐인 것 같아…….’

기린은 성기사를 쳐다보며 은연중에 그런 생각을 했다. 기린이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성기사가 눈을 들어 기린을 쳐다보았다.

“죄수 민기린. 너는 다시 지하 감옥으로 들어간다.”

“네?!”

“뭐라고? 안 돼, G!”

왕자가 성기사와 기린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기린 씨는 아무런 죄도 없어!”

“죄가 없기는요. 왕자님을 무단으로 숨기고 저에게 보여주지 않은 죄가 있지 않습니까.”

“그건 죄가 될 수 없어! 기린 씨는 나를 위해서……”

“게다가 국왕 폐하께서 죄수 민기린에 대한 사면을 명하지 않으셨습니다. 죄가 없다는 게 밝혀지기 전까지는 죄수는 그저 죄수일 뿐입니다.”

성기사가 단호하게 말했다. 왕자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이대로 물러나나 보구나.’

기린은 하는 수 없이 성기사 앞으로 나아가 밧줄이 풀린 양 손목을 내밀었다. 성기사는 기린의 손목을 묶기 위해 허리춤에서 밧줄 하나를 더 꺼내어 들었다. 그 순간, 갑자기 왕자가 둘 사이에 다시 한번 끼어들었다.

“아냐. 이 건은 내가 처리하겠어.”

“무슨 말씀이신지요, 왕자님.”

“내 독단으로 처리하겠다는 말이야. 아바마마의 허락은 필요 없어.”

왕자는 그렇게 말하며 허리를 바로 곧추세웠다.

“G. 지금 당장 죄수 민기린을 사면하겠다.”

“예? 하지만 왕자님…….”

“왕자의 명령이다. 듣도록 해.”

“…….”

성기사는 밧줄을 손에 든 채로 어리둥절하게 왕자를 바라다보았다. 기린은 왕자의 단호함에 깜짝 놀랐지만, 자신보다 더욱 놀란 건 성기사인 듯싶었다. 아마도 성기사 또한 왕자의 이런 단호한 모습은 태어나 처음 보는 것 같았다.

“그러다 국왕 폐하께 꾸중이라도 들으시면…….”

“상관없어.”

왕자가 딱 잘라 말했다.

“아바마마께서도 이 건에 대해 이견이 없으실 거야. 기린 씨는 위험한 인물도 아니잖아? 나를 숨겨줬다는 죄밖에 없는걸. 사실 G도 그게 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잖아.”

“그거야…….”

성기사가 말을 흐리며 기린을 힐끔 쳐다보았다. 대체 무슨 수로 왕자님까지 구워삶은 거냐고 따져 묻는 듯한 눈빛이었다.

‘나도 몰라요.’

기린은 어깨를 들썩이며 성기사의 눈을 피했다.

성기사는 하는 수 없다는 듯이 기린의 앞을 막았던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리고는 꺼냈던 밧줄을 다시 허리춤으로 되돌려 놓았다.

“……알겠습니다. 왕자님 말씀을 듣도록 하지요.”

“고마워, G.”

왕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센 척을 했지만, 그도 어지간히 긴장하고 있던 게 분명했다. 기린은 왕자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고마워요, 레오나르도. 덕분에…….”

“레오나르도라니! 감히 이 나라의 왕자님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리다니!”

성기사가 버럭 화를 내며 허리춤에 차고 있던 레이피어에 손을 가져다 올렸다. 놀란 기린이 머리를 감싸 쥐며 몸을 움츠렸다.

“히익!”

“하지 마, G! 내가 이름으로 불러도 된다고 허락했어. 우리는 친구니까.”

“친구요? 하등한 백성과 고귀하신 왕자님이 친구라고요?”

“그래. 그러면 안 돼?”

왕자가 기린을 보호하듯이 그의 앞에 나섰다. 성기사와 왕자 사이에 잠시간 불꽃 튀는 신경전이 이어졌다. 하지만 이내 성기사가 커다란 한숨을 내쉬며 레이피어에 올렸던 손을 내렸다.

“정말…… 나중에 국왕 폐하께 어떤 꾸중을 들으셔도 저는 모릅니다.”

“이제 그 일은 내가 알아서 해. G는 신경 쓰지 마.”

왕자가 확고하게 말했다. 기린은 자기도 모르게 왕자의 망토를 부여잡았다.

“진짜 고마워요, 레오나르도.”

“별말씀을요.”

하마터면 야겜에서 섹스 한 번 못해보고 저 무시무시한 성기사에게 머리가 잘려 나갈 뻔했네. 기린은 휴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G. 잠깐 자리 좀 비켜줄래? 기린 씨랑 할 이야기가 있어.”

“제 앞에서 하시면 안 되는 이야기인 겁니까?”

“응. 안 돼. 그러니까 저기 멀리 가서 서 있어.”

왕자가 휘휘 손을 내저어 성기사를 내쫓는 시늉을 했다. 성기사는 끄응, 하고 신음하더니 결국 왕자가 시키는 대로 저 멀리 떨어져 섰다. 기린은 눈을 깜빡이며 왕자를 바라다보았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예요?”

“그게…….”

왕자는 어느새 단호했던 모습을 거두고 수줍음을 많이 타는 소년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왕자는 몇 번이고 성기사가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확인하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기린 씨.”

“네?”

“저는…… 기린 씨가 좋아요.”

“……네?”

갑작스러운 고백. 이런 시나리오도 존재하는 건가? 혹시 이대로 엔딩까지 고속 진행?! 기린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러자 왕자가 기린의 손을 와락 부여잡았다.

“처음 본 순간부터 반했어요. 저와 같이 시장을 좋아하고, 사람들을 좋아하는 모습…… 게다가 지하 감옥에 갇히는 수모까지 감수하며 저를 숨겨주신 것까지. 전 기린 씨가 좋아요. 아주 홀딱 반했어요.”

“아아…….”

왕자의 기습 고백에 기린의 가슴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비록 게임 속이었지만, 누군가에게 이런 진정선 있는 고백을 받아본 것은 난생처음 있는 일이었다.

‘VR 게임이라 그런가? 너무 현실적으로 느껴져…… 다른 야겜에서 고백을 받았을 때랑은 비교도 안 되게 떨리는데? 아니 아니, 너무 진짜 같아.’

기린은 왕자에게 붙들린 손을 꼼지락거리며 무어라 대답을 해야 할까 망설였다. 하지만 왕자는 기린의 대답을 듣고자 고백을 한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갑작스러우시겠죠. 저도 이 자리에서 당장 대답을 듣고 싶은 건 아니에요. 다만…… 제가 기린 씨를 좋아한다는 사실만 알아주시면 고마울 것 같아요.”

“레오나르도…….”

“이제 곧 제 생일이 다가와요. 그러면 저도 완벽한 성인이 되니까…… 그때 대답을 듣고 싶어요. 괜찮을까요?”

왕자가 두 눈을 귀엽게 치켜뜨며 물었다. 아아, 저렇게 깜찍한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거절을 말을 할 수가 있겠냐고! 기린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아요.”

“고마워요, 기린 씨.”

왕자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저기, 레오나르도.”

“네?”

“레오나르도도 저를 ‘기린 씨’ 말고 ‘기린’이라고 불러주세요. 저만 이름으로 부르니 어색해서요.”

“그래도 돼요?”

“물론이죠.”

레오나르도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로 말했다.

“좋아. 이제부턴 기린이라고 부를게.”

“좋아요.”

“이야기는 이제 끝나셨습니까?”

어느새 다가온 성기사가 날카로운 눈으로 기린을 쏘아보며 왕자에게 물었다. 왕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이제 기린을 왕궁 밖으로 데려다줘.”

“알겠습니다.”

성기사는 왕자에게서 기린을 인도받아 왕궁 바깥으로 데려갔다.

복도를 걸어 왕궁 바깥으로 향하는 동안 성기사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왕자와 있을 때와는 다른 차갑고 어색한 침묵이었다.

마침내 두 사람은 성문 바깥으로까지 나오게 되었다.

‘빛이다! 맑은 햇살!’

기린은 자기도 모르게 기지개를 켜며 맑은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셨다.

“후아……! 공기가 달다, 달아!”

“……놀랍군.”

성문 바깥에 다다랐을 때야 성기사가 입을 열었다. 기린은 성기사를 돌아보았다.

“뭐가요?”

“대체 왕자님을 어떻게 설득한 거지? 게다가 신부님에 국왕 폐하까지…….”

“그건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왜긴 왜겠어. 내가 이 게임의 주인공이니까 그렇지.’

하지만 기린은 짐짓 모르는 척 어깨만 들썩거렸다.

성기사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기린을 바라다보았다.

“내가 모르는…… 무언가의 기품이나 매력이 있는 건가?”

“글쎄요.”

“흠.”

성기사가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기린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기린은 그런 성기사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내가 너를 너무 과소평가했나 보군.”

성기사의 붉은 눈이 번뜩였다.

‘과소평가했고말고. 엄연히 나는 이 게임의 주인공인데.’

기린이 자랑스럽게 허리를 폈다. 성기사의 눈빛에 재미있다는 기색이 순간 스쳐 지나갔다. 성기사는 기린을 따라 허리를 쭉 펴며 말했다.

“좋다. 나도 너를 이제까지와는 다른 눈으로 지켜보도록 하지.”

그러자 성기사의 머리 위에 떠 있던 하트에 변화가 생겼다. 마이너스 두 개를 찍었던 푸른 하트가 사라지며 하트 스테이터스가 텅 비었다.

‘이, 이 뜻은?!’

“앞으로 잘 부탁한다, 민기린. 왠지 너와 더 자주 보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

성기사의 입가에 눈에 띌 듯 말 듯 애매한 미소가 떠올랐다. 차갑고 냉철한 얼굴에 비치는 미소의 기운. 그것은 기린의 심장을 제대로 저격했다.

‘윽…… 이건 반칙이잖아!’

검은 장발 머리가 아니라 은발 머리라는 것을 빼면, 사실 기린의 취향은 마왕보다는 성기사 G에 더 가까웠다.

‘츤데레 설정까지, 너무 완벽하잖아!’

마왕의 힘을 봉인한 성기사. 그리고 그 성기사를 쓰러트리고 자신의 힘을 돌려받기를 원하는 마왕. 기린은 벌써부터 둘 사이에서 크나큰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라. 나와 더 말을 섞고 싶다면 다음부터는 기품을 더 높이도록.”

성기사는 그렇게 말하며 휙 몸을 돌려 왕궁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기린은 그가 사라져가는 뒷모습을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이제 성기사와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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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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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s_*******

댓글 왜 없지 ㅠ 저만 웃긴가요 ㅜ

2021.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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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벨러

제로부터 시작하는 성기사와의 호감도...

2021.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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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hy****

바깥세상 구경한다고 아바마마처럼 되진 않는다구욬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미치겟닼ㅋㅋㅋㅋㅋ

2021.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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