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체 주인공은 모든 시점 모든 기억을 전부 가지고 있지만 루토, 엔젤 촉수, 기타 등등 분리 의식들은 자기가 맡은 임무 부분에서만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고 나머지 여타의 기억들은 집단의식으로 접속해서 열람해야 취득할 수 있습니다. 186회
Chater 5 : 감춘 자들
“나도 자네만한 아들 녀석이 하나 있어. 그 녀석 생각하면 자네도 남 같지가 않아!”
“하하..”
“그 녀석은 내가 번 돈을 펑펑 쓰기만 하는데.. 아주 걱정이야! 이번에 돌아가면 자네 이야기를 해야겠어. 너만 한 나이에 한 상단을 감당하고 있는 친구도 있다고..”
“별로 좋아할 것 같진 않습니다만..”
“그래도 쓴 소리는 해야지! 나는 그 녀석의 애비니까 두고 볼 수는 없어.”
오랜 시간이 흐른 것은 아니었지만 알톤과 레이는 상당히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주로 알톤이 이야기를 하고 레이가 옆에서 말상대를 해주는 것의 반복이었다.
워낙 알톤이 애주가이기도 하며 대식가였기에 음식을 쩝쩝거리며 이야기를 듣는 것은 곤욕이었지만 레이는 끝 까지 알톤의 옆을 지켰다. 그래서일까? 알톤은 레이를 상당히 맘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
“혹시 크게 어려운 일이 생기면 나에게 말해. 내 자네 부친과의 거래로 이득을 본 걸 생각하면 한 두 번은 도와줄 수 있으니까.”
“그 말 5번째 하시기는 했지만.. 그래도 감사합니다.”
“그래그래.. 아 내가 지난 번 상행을 갔을 때 말이야..”
알톤의 이야기가 시작되려고 할 때.
띠리링- 띠링- 뚝.
돌연 들려오던 음악이 멈췄다.
- 손님 여러분 안 쪽 회의장에 자리가 준비 되었습니다. 상단주님께서 여러분을 뵙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중앙에 위치한 통로를 통해 회의장으로 이동해주십시오.
아름다운 여성의 목소리가 안내를 시작한다.
이것은 음성 전송 마법을 사용한 것이었다.
상인들은 색다른 느낌의 안내에 감탄하며 안내에 따라 홀의 중앙 통로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우리도 어서 가자고!”
알톤 역시도 레이의 등을 두들기며 상인들의 뒤를 따르려고 했다.
“네..넵!”
알톤의 솥뚜껑만한 손이 등을 침에 깜짝 놀라는 것 같은 모습으로 걷기 시작한 레이는 한 쪽 손을 등 뒤로 돌려서는 손가락을 작게 튕긴다.
“커억..!”
“알톤님?! 괜..괜찮으십니까?”
갑작스럽게 알톤이 배를 움켜쥐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는다.
“갑자..기! 속이.. ”
“안..안내인!”
“우욱..!”
창백해진 얼굴로 헛구역질까지 하는 알톤, 레이가 황급히 부축한 사이 안내인과 함께 온 치료사가 알톤의 상태를 보고는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과음을 하신 것 같습니다. 마나를 흘려 보니 위장 내에 문제가 생기셨습니다. 음식물이 역류해서 그러시는 겁니다.”
“그..그럴 리가 내가 이보다 10배를 더 먹어도 괜찮은 사람..우욱..!”
“약을 드시고 휴식을 하셔야 합니다.”
“중..요한 회의가 있단 말이외다..!”
알톤이 소리쳤지만 치료사는 이 상태로는 회의를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며 고개를 저었다.
“걱정하지마십시오. 제가 회의 내용을 기억해놨다가 전달해드리겠습니다.”
“이..이런 고맙..우욱..!”
“어서 모셔라. 골드 애플 상단주님께서 상태가 심각해 보이시니.”
레이의 말에 황급히 고개를 숙인 치료사와 안내인은 끙끙거리며 알톤을 부축해 다른 방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잠시 멈춰 서서 그 모습을 본 레이는 허공을 응시하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상인들이 사라진 통로로 걸어간다.
통로 끝에 나온 방 안에는 거대한 원탁이 있었다.
상석이 존재하지 않는 모두가 공평함을 상징하는 것이 원탁이다.
상인들은 모두 똑같다는 주최자의 의도였다.
각각의 놓여있는 의자 앞으로 자신의 상단을 나타내는 천을 발견한 상인들은 각자의 정해진 자리에 앉았다.
초대된 상인들은 총 40여명뿐이었으나 모두 중견 상단 이상의 거물들이다. 사실상 이노센티아 신성 교국의 상계를 좌지우지 하는 이들이 이 자리에 전부 모였다고 볼 수 있다.
툭. 툭. 툭.
잠시 후 일정한 음율의 소리와 함께 한 노인이 회의장 안으로 들어섰다.
“가득 찼군.”
만족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리는 노인.
굽어있는 허리와 자글자글한 주름 그리고 하얀색으로 탈색된 긴 수염까지 세월의 흔적이 가득하다. 겉으로 보기엔 특별할 것도 없는 곱추 노인이지만 그 눈빛만큼은 어린 소년의 그것처럼 또렷한 빛으로 빛났다.
작은 체구에서 연륜과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무시할 수 없는 분위기 같은 것이 존재한다.
“다들 먼 길 오느라 고생하셨소. 본인은 상인길드 길드장이자 골드핸즈 상단의 단주를 맡고 있는 샤일록 핸드슨이라고 하오. 뭐 부끄럽게도 이 노구를 모르는 사람은 이 자리에 없겠지만.”
노인 샤일록이 말을 멈추며 눈짓을 보내자 뒤에 있던 안내인이 재 빨리 나와 의자를 빼낸다. 샤일록의 자리는 원탁의 위 쪽 중앙. 원탁에서 따로 상석은 없지만 그 위치는 들어온 상인들로 하여금 자연스레 샤일록에게 시선이 집중되게 하는 자리였다.
“시간이 곧 금이니까.. 거두절미하고 바로 회의를 시작하겠소.”
샤일록이 선언하자 모두 웅성거림을 멈추고 샤일록의 눈과 귀에 집중했다.
10대 상단 중에서도 가장 거대한 규모를 가지고 있는 골드 핸즈의 상단주가 하는 이야기다.
그것이 곧 이득으로 이어질지도 모르는 만큼 한 마디도 흘려들을 수 없는 것이다.
“..하여 신흥 상단인 텐타클에서 모든 상권들을 가져가고 지속적으로 상계를 장악해 나가고 있어. 이에 대한 피해 현황을 알아보고자 하오. 한 사람 씩 얘기해보시구려. 솔직하게 얘기할수록 이야기는 빨리 끝나겠지.”
샤일록이 말을 끝내자마자 여기저기서 상인들이 자신들 상단의 피해상황을 말하기 시작했다.
주로 텐타클 상단이 상권을 빼앗아가 자신들이 팔던 물품을 독점하고 심지어는 주변 가게들과 상행들까지 전부 끌어 들인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자연스레 회의장 내의 분위기는 텐타클 상단에 대한 분노로 과열되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됐군.’
때가 되었다 생각한 샤일록은 본론을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하여 텐타클 상단의 독주를 막고자 하오. 우리 상인 길드에선 텐타클에 손을 내밀었지만 그들은 우리를 무시했소. 이대로 있다간 남아있는 상권마저 전부 빼앗길지도 모르는 바 대책을 마련할 생각이오.”
“대책이라 하면..?”
“허수아비를 세운다. 즉 우리 상인길드와 10대 상단 그리고 여러분들의 상단의 지원을 받는 ‘임시 상단’을 내세워 텐타클 상단과 경쟁하는 것이오.”
웅성웅성..
샤일록의 말에 상인들은 저마다 옆 자리에 앉은 다른 상인들과 귓속말을 하거나 의견을 나누며 입을 멈추지 않았다.
모든 상단들의 지원을 받는 상단이란 것이 어떤 파급력을 불러올지 모두 주판을 굴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클로버 상단의 상단주 잭 하우어입니다. 임시 상단에 대한 추가 설명일 필요할 것 같습니다만..”
“알겠소. 왜 상인 길드가 직접 상대하지 않고 허수아비를 내세우는가 하면. 텐타클 상단이 감추고 있는 힘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서요.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도 영주 가문의 지원이라는 매우 까다로운 힘을 가지고 있는데 이 노구는 텐타클 상단이 또 다른 힘을 숨기고 있다고 확신하오.”
“그럼 임시 상단을 내세워.. 최대한 피해를 줄여 텐타클을 제압한다. 이 말이십니까?”
“그렇소. 그래서 말인데 이번 회의에서는 그 임시 상단이 될 상단을 정하고자 하오.”
“상단을 정한다..? 아니 어찌하여 기존의 상단을 정한다는 것입니까? 그럼 그 정해진 상단은 피해를 볼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한 상단주의 말처럼 임시상단으로 선정된 상단은 텐타클 상단과의 전쟁에 전면으로 나서게 되니 고기 방패의 역할을 하게 된다.
단순히 임시상단을 통해 손해 없이 지원만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던 상단주들은 누군가 총대를 메어야 한다는 사실에 불안한 눈치를 보였다.
특히 중견상단주들의 경우 더욱 표정이 좋지 못했다. 적어도 10대 상단이 나설 일은 없으니 비교적 세력이 작은 자신들, 중견상단이 그 일을 맡게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이기 때문이었다.
탁-!
“모두 조용!”
그 때 샤일록이 지팡이를 찍으며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에 당황하던 상인들의 입이 멈추며 잠시 장 내에 침묵이 흐른다.
“아무런 위험 없이 일을 진행할 수 는 없어. 상인이란 이들이 왜 그것을 모르는 것이오? 이 일이 분명 위험하기는 하겠지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시오. 상인길드 소속의 모든 상인들의 지원을 받는 다는 것은 힘을 키울 기회가 된다는 것이나 다름없소!”
“그럼 골드 핸즈 상단에서 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누군가 던진 말에 샤일록은 날카로운 눈으로 상인들의 면면을 보고는 말했다.
“나도 정말 그러고 싶소. 하지만.. 골드 핸즈를 포함한 10대 상단은 애초에 임시 상단을 맡을 수가 없소. 만약 10대 상단 중 한 곳을 임시 상단으로 내세웠다가 텐타클에게 역으로 잡아먹히게 된다면 그 때는 다른 방법을 세우기도 전에 텐타클 상단의 커진 힘에 전부 집어 삼켜지게 되겠지.”
“그런..!”
상인들은 샤일록의 말에 ‘그럼 중견 상단들은 고기 방패가 되어도 된다는 거이냐!’라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샤일록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입을 열 수 없었다.
수 천 종류의 물품의 거래와 운송을 취급하는 10대 상단 중 하나가 무너진다는 것은 관계를 맺고 있는 중소상단들 역시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그런 상단이 텐타클에게 잡아먹히게 된다면 상계의 기둥이 무너지게 된다.
“그래서.. 일단 자원자를 받도록 하겠소. 임시 상단으로서 텐타클 상단과의 전쟁에서 선두에 설 상단과 상단주는 일어나 주시오.”
샤일록의 말이 끝났지만 상인들은 서로 눈치만 볼 뿐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샤일록의 말처럼 성공만한 한다면 중견 상단주에서 새로운 대 상단의 주인이 될 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그 리스크가 너무나도 크다.
거래의 이득이라는 확률에 걸고 상행을 하는 상인들이지만 실패해서 전부를 잃는 도박 같은 일은 결코 하지 않는다.
“끌끌..”
샤일록은 그런 상인들의 모습에 ‘요즘 젊은 것들은..’이라고 생각하며 혀를 찼다.
만약 자신이 중견 상단주였다면 샤일록 그는 정말로 나설 위인이었다.
“자원자가 없소..?”
다시 한 번 샤일록이 재촉을 하였을 때.
스윽. 탁.
원탁에 앉아 있던 이들 중 한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 젊은 청년이군.”
순간 샤일록의 눈이 일어난 청년의 얼굴과 복장을 빠르게 훑는다.
관상을 살피고 옷에 달린 상단의 상징인 브로치를 발견한다.
“하버 상단의 대표시로군. 내 하버 상단은 기억하고 있지. 초청장은 보냈지만 이 자리까지 방문기 쉽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도전 의식이 넘치는 젊은 친구가 오다니! 모두 젊은 상인의 용기에 박수라도 쳐줘야 하지 않겠소?”
짝짝짝
아직 청년, 레이 하버가 무슨 말을 꺼내지도 않았건만 샤일록은 하버 상단을 인정해주는 동시에 하버 상단이 그 임시 상단을 맡을 것 같은 분위기를 유도했다.
조금 망설이는 마음을 가지고 있던 이라도 상단주들이 자신을 보며 박수까지 쳐주고 있는 상황에서 쉽게 물러서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 이 노인네가 말이 많았군. 어디 하버 상단의 상단주인 청년의 말 좀 들어볼까?”
샤일록은 인자한 할아버지와 같은 레이를 쳐다봤다.
“저..저는 하버 상단의 레이 하버입니다. 임시 상단 이야기를 하기 전에..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샤일록 상단주님.”
“흐음 궁금한 거라? 뭐든 물어보시구려. 내 곤란한 내용만 아니면 무엇이든 답해줄 용의가 있으니.”
“혹시 이 자리에 초대받은 모든 상단주 분들이 모인 것인지 궁금합니다..”
“흐음..”
샤일록은 숨을 내쉬며 생각에 잠겼다.
상황을 예상하고 그에 맞춰 유리하게 선점해나가는 것이 장기인 샤일록이었지만 레이의 질문은 너무나 뜬금 없었다.
“그건 왜 물어보는 것이오? 하버 상단주.”
“만..약에라도 참석하지 않은 상단주 분이 계시고.. 텐..텐타클 상단에 불기라도 한다면 나중에 적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 돼서..”
레이의 말에 여기저기서 작은 코웃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미 텐타클 상단이 공공의 적인 상황에서 텐타클 상단의 붙을 상단주가 있을 리 없다.
그런 상황조차 모르는 레이의 아둔함에 비웃음을 보내는 것이다.
유약해 보이는 레이의 말투와 몸짓에 속으로 평가를 내린 샤일록이었지만 방금의 말에 과연 이 청년을 허수아비로서 이용할 수 있을까란 고민까지 들었다. 허나 다른 이가 나서지 않은 이상 대책은 레이 밖에 없다.
“걱정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소 하버 상단주. 이 자리에는 이노센티아 전역의 중견급 이상 상인들이 모였고 내가 초청한 이들 중에는.. 아! 골드애플 상단주가 잠시 상태가 좋지 못해 빠진 것 말고는 전부 참여했으니 말이오.”
“그렇군요.”
‘분..위기가 바뀌었다..?’
아주 미세한 순간의 차이. 레이가 대답한 그 순간 샤일록은 레이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상인이 사람을 상대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능력은 그 사람에 대한 통찰, 관상을 보는 것이다. 샤일록은 이에 대한 능력이 상인들 중 최고라 할 수 있었다.
다른 상인들은 전부 레이의 순간적인 변화를 느끼지 못했지만 샤일록은 분명 보았다.
‘내가 잘못 판단한 것인가..?’
샤일록은 레이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자세히 살폈다.
‘창백한 피부에.. 눈동자가 보이지 않는 실눈.. 긴 흑발..잠깐? 이 얼굴 분명 어디선가 보았어!’
분명 과거에 본 적 있는 얼굴이란 직감이 들었으나 안개라도 낀 것처럼 정확히 누구인가는 떠오르지 않는다.
건망증으로 놓고 볼 수도 없는 것이 샤일록이 자랑하는 것은 한 번 상을 살핀 얼굴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기억한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레이의 얼굴은 누구인지 떠오르지 않았다.
“자자! 하버 상단주 뭘 그리 겁을 먹고 그러시나? 앞으로 큰일을 할 사람인데 말이야!”
“하하! 하버 상단주야 말로 우리 모두의 의지나 다름없지! 암 그렇고말고!”
그 때 주변에 있던 상인들이 레이 하버를 향해 친한 척을 하며 말을 건넸다.
흐름상 레이가 임시 상단의 단주 역할을 맡을 것으로 보이니 벌써부터 달라붙기 시작하는 것이다.
레이가 성공한다면 대 상단의 단주와 인맥을 다지는 것이고 실패 한다 해도 온갖 지원을 받을 임시 상단이니 옆에 떨어지는 콩고물을 받아먹을 수 있다는 판단이 선 것이다.
“임시 상단.. 그 이야기는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은 오늘 모두 이 자리에서 죽을 것이니 이뤄질 수 없는 일이지요.”
“..?”
마치 오늘 아침은 무엇을 먹었냐는 식의 평온한 얼굴로 가볍게 내뱉은 말이었지만 그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하..하버 상단주? 내가 지금 잘못 들었나? 무슨 말을..”
“여러분은 모두 이 자리에서 죽을 거라 하였습니다.”
“..지금 농담이라도 하는 건가? 아니면 술이나 분위기에 취해 사리 분별을 하지 못하는 겐가?! 하버 상단주 큰일을 맡게 되어 흥이라도 샘솟았나 본데.. 이 자리에는 하버 상단주보다도 연륜이 넘치고 오랜 시간 상단을 경영해온 어른들만 있어!”
주제 파악하라는 경고였지만 레이는 천천히 손을 올려 끼고 있던 모노클을 벗어 땅에 떨어트리며 한 손을 올렸다.
곤란하다는 웃음에 가려져 있던 눈이 뜨이고 그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눈동자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심연과도 같은 검은 동공의 안에는 푸른 청염이 빛나며 타오르고 있었다.
그 눈을 마주치자 점차 안으로 빨려 들어가며 청염이 몸을 태우는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난다. 숨조차 똑바로 쉴 수 없는 미지의 압박감이 몸을 짓누른다.
차르륵.. 차르륵..
그와 동시에 어디선가 사슬을 끄는 것 같은 소음이 들려왔다.
쩌저적..!
레이의 등 뒤 공간이 벌어지며 검은 안개가 흘러나오며...
촤르륵-!
검은 안개의 주위로 사슬들이 생성된다.
투둑..
사슬이 스치고 지나가자 레이의 머리를 하나로 묶고 있던 노끈이 풀리며 검은 흑발이 펼쳐진다.
‘뭐..뭐야 무슨 일이냐고! 말이 안 나온다..!’
‘몸..을 움직일 수 없어?!’
상인들은 자신들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불길하면서도 기괴한 현상에 당장 자리를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레이의 눈을 마주한 순간 이미 손가락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태로 바뀌어 버렸다.
몸이 석상이라도 된 것 같은 현상에 그저 눈동자만을 굴리며 레이의 모습을 살피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 그럴리가!”
그 때 샤일록의 탄식과도 같은 목소리가 침묵을 깨트린다.
“말을 하다니.. 죽음을 느꼈나?”
레이는 입을 움직이는 샤일록을 보며 전과는 전혀 다른 중압감의 무표정한 얼굴로 흥미롭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 레이를 보며 샤일록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긴장했다.
무려 10대 상단의 일좌를 차지하고 있는 상단주 샤일록이 사람을 상대하며 기세에 밀린 것이다.
허나 레이.. 아니 눈앞에 있는 존재는 10대 상단의 상단주라는 배경이 전혀 통하지 않는 자였다.
‘전혀 몰랐다.. 어떻게 몰라 볼 수가 있단 말이냐..! 그 소름 돋는 눈동자를! 아 내가 죽을 때가 되었구나..’
몇 번이나 스스로 자책하며 어렵게 고개를 들어 레이를 마주본 샤일록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성..검 바트레이 경.. 당신이 어째서..이곳에..?”
순간 장내에 돌덩어리라도 떨어진 것 같은 충격음이 스쳐 지나갔다.
아니 정확히는 상인들의 머릿속에는 샤일록의 말이 그렇게 들렸다.
제 2사도 성검의 바트레이.
반신이나 다름없는 태초룡을 잡은 인간을 뛰어넘는 괴물.
다른 사도들과 다르게 공식선상에서도 모습을 보이지 않고 암중에 행동한다는 그 성검 바트레이가 자신들의 앞에 서있는 것이다.
어째서 바트레이를 못 알아봤는가? 바트레이를 한번이라도 봤던 이들이라면 그 모습을 잊지 못한다고 했었다. 어두운 중압감과 창백한 피부는 죽음을 떠올리게 하고 그 공허한 시선은 상대를 위축하게 만든다.
허나 방금 전까지 자신을 레이 하버라고 소개했던 청년은 아무런 의심이 들지 않을 정도로 그 나이대의 어리숙한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지상에 강림한 사신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공포스러우며 오랜 세월을 살아온 시간마저 느껴진다.
그 연기력부터가 꺼림칙함과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잠깐.. 그런데 우릴 죽이겠다고?’
‘성검 바트레이 경이 우리를?!’
단순히 바트레이의 존재감에만 질려있던 상인들은 뒤늦게 바트레이가 자신들을 죽인다고 선언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핏덩이나 다름없는 젊은 상인의 협박이라면 웃어넘길 수 있지만 그것이 교국 최강의 성검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정말로 그 장난스러운 손짓 한 번에도 이곳에 있는 상인 모두의 목숨이 날아갈 수 있는 것이다.
촤르륵... 촤르륵..-
그러는 사이 바트레이의 등 뒤로 검은 안개가 더욱 커져 방 전체를 감싸며 은색의 쇠사슬이 뱀처럼 공중을 유영하며 상인들의 근처를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촤르륵..
그 중 하나의 쇠사슬이 바트레이의 손바닥 위에 멈춘다.
그 쇠사슬에는 장검이 묶여져 있었다. 바트레이의 손 바로 위에서 장검을 감은 채 흔들리는 사슬은 그 손이 내려지는 순간 그대로 날아가 상인들의 목을 꿰뚫을 것만 같았다.
“어째서 입니까..? 교국에서 저희를 죽이라 한 것입니까?”
“..말할 것은 없다.”
샤일록의 물음에 고저 없이 대답한 바트레이는 천천히 손을 움직이려고 했다.
“텐..텐타클 상단은 밀림의 재앙과 관련이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취급하는 물건의 추적을 위해 행보를 조사해봤습니다! 그것은 분명 교국에 해를 끼칠..!”
이대로 있다가는 꼼짝없이 죽을 것 같다는 위기감에 샤일록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정보를 그 입으로 뱉어내기 시작했다. 그 어떤 상인들조차 알지 못했던 정보다.
“저희가..! 아니 저 혼자서라도 그 텐타클.. 재앙의 씨앗들을 막아내겠습니다!
샤일록은 바트레이가 이 정보에 관심을 갖고 자신을 살려주기를 원했지만..
“그래서 죽는 거다 너희들은.”
-서거억-!
바트레이의 손바닥이 땅을 향함과 동시에 사슬이 휘둘러지며 검이 주변을 베고 바트레이의 손바닥 위로 돌아온다.
단순히 무언가 휘둘러졌다는 것만 알 수 있을 정도로 빠른 움직임이었고 상인들 역시 검의 움직임을 보지 못한 듯 저마다 놀라는 표정만을 짓고 있었다.
툭. 툭. 툭. 툭. 툭.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 얼굴이었다.
몸에서 분리되어 땅으로 떨어지는 상인들의 머리들 그 위로 분수처럼 뿜어진 피가 덧칠한다.
점차 피에 젖어가는 샤일록의 얼굴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재앙의 마물을 저지하겠다고 하는데 어째서 바트레이가 자신들을 죽이려하는 지 알 수 없다는 얼굴이다.
“...”
말없이 장내의 모습을 보고 있던 바트레이는 뒤로 돌아 검은 안개 속으로 걸어 들어가 그대로 사라졌다.
이노센티아 신성교국 소속 유력상인들의 회의장에는 오로지 목 없는 시체들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작품후기]
아 로제짱 까지 등장시키고 싶었는데..
레이 하버, 바트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