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37화 모래 상자?
부스럭...부스럭....
접속이 완료된 뒤로는 아무런 메시지가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인벤토리 창을 열어봤지만 텅 비어 있었다. 게임 안에서만 쓰는 별도의 인벤토리로 연결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일단은 조금 걸었다.
섬은 열대 우림을 기반으로 만든 거 같았다. 바깥은 부드러운 모래로 덮여 있는 해안가로 둘러 싸여 있고, 안쪽은 나무와 수풀이 가득 우거져 있었다.
또한 야생동물들도 상당히 많이 배치되어 있어서, 간간이 날 보고 도망가는 작은 동물들을 볼 수 있었다.
하아....기분 좋다....
나는 해안가를 걸으며 상쾌한 바닷바람을 쐬고 있었다. 알몸이긴 했으나 부끄럽기는커녕 오히려 해방감에 매우 행복한 기분이 됐다.
그건 그렇고, 뽑기 쿠폰은 어떻게 얻는 거지.
뒤늦게 안내원에게 꼼꼼하게 물어볼 걸 그랬다는 후회가 생겼다. 그래도 아직 여유는 있었다.
개발자 측에서 한 게임이 클리어 되는 시간은 3~4일 정도가 평균이라고 했다. 조금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즐겨도 된다는 말이었다.
나는 한참 걷다가 모래사장 위에 드러누워 버렸다. 햇볕이 뜨겁긴 했지만 기분 좋은 열기가 온 몸을 감쌌다.
천국이구만.....
이렇게 누워 있으니 굳이 쿠폰을 파밍하지 않고 잠시 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스럭....
잠깐 졸았을 때, 뒤쪽에서 무언가가 수풀을 헤치는 소리가 들렸다. 작은 동물이 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나는 일어나서 긴장한 채로 소리가 난 곳을 바라봤다.
“어?”
“어?”
그곳에는 나뭇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은 여자가, 나무 몽둥이를 든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 쟤는 옷을 입고 있네?
내가 잠깐 놀라 있는 사이, 그녀가 곧장 몸을 돌려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나도 모르게 그녀를 쫓았다.
아니, 나는 맨손이고 쟤는 몽둥이도 들고 있는데 왜 도망가지?
본능적으로 쫓기 시작하긴 했으나 이길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금세 그녀를 따라 잡을 수 있었다.
“오, 오지마.”
그녀가 위협하듯 몽둥이를 붕붕 휘둘렀다.
아, 초심자로구만.
한눈에 봐도 전투직은 아닌 거 같았다. 그렇다면 맨손으로도 상대할 수 있다. 저걸 빼앗아서 입으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녀에게 대시해 몽둥이를 피하고 배에 주먹을 꽂았다.
“허윽!”
그녀가 몽둥이를 놓치고 바닥에 꼬구라졌다.
내가 그녀 위에 올라타서 때리려고 하자 그녀가 잔뜩 겁먹은 채로 얼굴을 가렸다.
"히익!“
일단 옷을 뺏기 전에, 물어볼 게 있었다.
“너는 옷 어디서 난 거야?”
“네?”
“나는 알몸인데, 왜 너는 옷이 있냐고!”
“히익! 만들면 돼요, 제일 낮은 거라 처음부터 만들 수 있어요.”
그녀가 부들부들 떨면서 말했다.
나는 잠시 곰곰이 생각했다. 그녀는 아무래도 이 게임 시스템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거 같으니, 지금 당장 옷을 뺏어 입는 것보다 그녀에게 시스템을 배우는 게 나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천천히 일어났다.
“미안해, 난 이 게임이 처음이라 나도 모르게 일단 때리고 봤어.”
그녀가 팔 사이로 눈을 빼꼼 내밀어 날 올려다봤다.
“나도 옷 만드는 것 좀 가르쳐줘.”
<1레벨 나뭇잎 옷을 만들었습니다.>
“어때요! 쉽죠!”
그녀가 활짝 웃어 보였다. 내가 게임을 가르쳐 달라고 하자, 그녀가 언제 맞았냐는 듯이 헤헤 웃으며 내게 이것저것 가르쳐 줬다.
게임 시스템 자체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소재를 얻고 싶은 걸 주먹으로 때리면, 소재가 인벤토리로 들어왔다. 예를 들어 나무를 주먹으로 때리면, 나무 소재가 인벤토리로 들어오는 식이다.
그리고 그 소재로 무엇을 만들 수 있는지 레시피 검색을 한 뒤, 만들면 된다. 굳이 수작업을 할 필요 없이 소재 개수만 맞추면 시스템이 알아서 변환해줬다.
나는 나뭇잎 옷을 걸치며, 그녀에게서 몇 가지 시스템과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 들었다.
일단은 안전한 곳에 집을 만들고 안정적인 생활을 위한 파밍을 해야 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뭔데요?”
그녀가 반색하며 내게 집중했다.
“식사를 하려면 고기를 구해야 하잖아.”
“네! 네! 맞아요!”
“사람을 때리면, 고기가 들어와?”
“.....”
그녀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지며 겁에 질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널 때리겠다는 건 아니고....”
그러자 그녀가 안도하며 대답했다.
“동물을 잡아서 채집하면 얻을 수 있어요. 대신 그냥 먹으면 안 되고 불을 만들어서 익혀 먹어야 돼요.”
“그러면 일단 무기를 만들어야겠네.”
지금 우리가 가진 건 나뭇잎 옷 한 벌씩과, 나무 몽둥이 한 개씩이 전부였다. 그녀의 말을 들으니 뭘 해야 하는지는 알겠는데, 막막했다. 어느 세월에 집을 집고, 어느 세월에 식량을 구하고, 어느 세월에 쿠폰을 파밍하나.
일단 그녀와 나는 뜻이 맞아 같이 다니기로 했다. 그녀는 샌드박스형 게임을 조금 해 본 경험이 있었고, 신작이 나왔다길래 시험 삼아 들어와 본 거였다. 그렇기 때문에 우승에는 관심이 없었고, 시스템과 분위기를 파악할 겸 쿠폰 파밍을 하러 온 것이었다.
나도 우승에는 관심이 없었고 쿠폰만 많이 먹으면 됐으니 협동하는 게 나을 거 같았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섬 곳곳에 파란색 상자가 떨어져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상자에서 제작용 소재들과 뽑기 쿠폰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일단은 가장 간단한 나무집을 만들기로 하고, 담수 근처에 집터를 잡기로 했다. 나무는 정말 흔하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중요한 건 집터의 위치였다.
가급적이면 다른 유저와 부딪히지 않고, 맹수들이 잘 안 다니는 곳을 찾아야 했다.
“그럼 무기부터 만들지?”
“저는 전투직이 아니라서 쓸 수 있는 게 없어요.”
나는 잠시 곰곰이 생각했다. 대충 검 모양새만 나면 되니까, 돌과 나무, 넝쿨을 채집해서 긴 돌칼을 만들었다. 그걸 장착하자 검사 스킬이 사용 가능해졌다.
“이 정도면 되겠지.”
그녀가 신기하다는 듯 날 바라봤다.
“꽤 빨리 배우시네요. 그건 안 가르쳐드렸는데.”
“뭐, 대충 어떤 느낌인지 알겠네.”
우리는 대충 열매를 채집한 뒤 가까운 호수 근처에 집터를 잡았다. 집을 짓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소재를 넣고 집 크기를 정한 뒤, 만들기를 선택하니 그냥 순식간에 뿅 하고 나타났다.
“쉽네, 이 정도면 할 만 하겠어.”
나는 집 안에 들어와서 둘러보며 말했다. 순식간에 만들어진 거 치고는 꽤 아늑했다.
그녀가 집을 지키면서 집 안을 꾸미기로 하고, 싸울 줄 아는 내가 여러 가지를 파밍해 오기로 했다.
불을 만들기 위한 부싯돌과, 생고기를 구해오는 게 주 목표였다.
촤악~ 촤악~
나는 어쩐지 흥이 나서 돌칼로 덤불을 헤치며 걸었다.
생각보다 재밌네.
부싯돌을 구하는 건 쉬웠다. 바위를 손으로 툭툭 치자, 돌멩이 사이에 부싯돌이 섞여서 들어왔다. 간혹 철도 구할 수 있었다.
가급적이면 다 들고 돌아가고 싶었지만 무게 개념이 있어서 돌멩이들은 전부 버리고 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고기를 구하기 위해 야생동물을 찾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가 말하길 아직 장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으니 토끼나 사슴 같은 약한 동물을 잡는 게 좋을 것이라고 했지만, 그러기엔 너무 심심할 것 같았다.
내 레벨이 몇인데, 기왕이면 큰 동물을 만나는 게 좋지.
그래서 돌칼로 수풀을 휘젓고 다니는 거였다. 내 소리를 듣고 맹수들이 찾아올 수 있도록 말이다.
부스럭!
간혹 토끼 같은 게 내가 내는 소리를 듣고 도망치는 게 보였다. 쫓아가면 충분히 잡을 수 있을 거 같았지만, 역시 내키지 않았다.
근데, 이러다가 다른 사람 만나면 어떡하지? 혹시 사람을 죽여도 고기를 파밍할 수 있나?
역시 그러진 않을 것이다. 아무리 쓰레기 게임이어도 인육은 아니지.
부스럭!
또 무언가가 수풀을 헤치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동물은 안 보였지만 무언가가 수풀을 헤치며 움직이는 게 보였다.
꿀꺽!
나는 검을 거머쥐고 긴장했다. 지금까지와는 다르다는 느낌, 동물들은 항상 나에게서 도망쳤지만, 이번의 기척은 슬며시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움직이는 수풀의 범위로 보아 표범 정도의 맹수일 거 같았다.
내가 계속 가만히 있자 기척도 멈췄다. 하지만 나도 움직일 수 없었다. 상대가 뭔지 가늠이 안 된다.
크아앙!
순식간에 그게 뛰어 올라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깜짝 놀라 간신히 옆으로 피할 수 있었다. 겨우 표범 같은 거일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천만에, 그보다 몇 배는 큰 검치호였다. 어떻게 그렇게 납작 땅에 붙어서 움직였던 건지. 그것도 보통 검치호가 아닌지 송곳니가 엄청나게 길었고, 거의 내 돌칼만 했다.
씨발, 이거 이길 수 있나.
검치호가 눈치를 보며 내 주변을 돌다가, 다시 뛰어 들었다. 나는 피하며 검치호의 옆구리를 돌칼로 후려 쳤다.
뚝!
베이기는커녕, 돌칼이 절반으로 끊어져 버렸다.
이 씨발!!
한 대 맞아서 흥분한 검치호가 이제 미친 듯이 날 공격하기 시작했다. 능력치가 약화되긴 했지만, 실제 내 능력치를 기반으로 캐릭터가 만들어진다고 했던 것 때문인지,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할 수는 있었다.
그럼 여기도 안 아픈가 보자!
나는 기회를 노려서 거의 몽둥이나 다름없게 된 돌칼로 검치호의 얼굴을 때렸다. 그러자 검치호의 송곳니 하나가 부러져 땅에 떨어졌다.
저걸 쓰면 되겠다!
나는 잽싸게 송곳니를 주워서 레시피 검색을 했다. 송곳니를 이용한 뼈칼을 만들 수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검치호의 공격을 피하며 나무와 넝쿨을 채집해서 뼈칼을 만들어 장착하는 대 성공할 수 있었다.
에라 이거나 먹어라!
그리고 다시 한 번 검치호의 배를 찌르자 이번에는 성공적으로 관통해 피가 뿜어져 나왔다. 고통 때문에 움찔 한 검치호가 거리를 벌리고 피해 버렸다. 눈치를 보니 내게 화가 나 있긴 하지만, 덤빌 엄두는 못 내고 있는 거 같았다.
다 잡아놓고 놓칠 수는 없지.
이번에는 내가 달려들었다. 검치호가 움찔하긴 했지만 다시 앞발을 들어 나를 공격했다. 나는 앞발바닥도 길게 베어 버리며 검치호의 머리에 달라붙어 뼈칼로 머리를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죽어! 죽어! 죽어!”
검치호가 고통에 몸부림치며 내 온 몸을 발톱으로 긁었다.
“으아아아아아!”
마지막으로 칼을 검치호의 목에 찔러 넣자, 검치호가 몸을 부들부들 떨더니 마침내 움직임이 멈췄다.
흐아....죽는 줄 알았네....
나는 온 몸에서 힘이 빠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잠시 앉아서 쉬자, 거짓말처럼 빠른 속도로 체력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회복약 같은 게 없는 대신 휴식으로 체력을 채우는 방식인 듯 했다.
그런데, 이제 이걸 어떻게 옮긴다.
나는 거대한 검치호의 시체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일단은 다른 소재들 구할 때처럼 때려보기로 하고, 맨손으로 시체를 때리자 안내 메시지가 떴다.
<채집하기 위해서는 날붙이가 필요합니다.>
흐음? 뼈칼이면 되겠지.
시험 삼아 뼈칼로 때리자 인벤토리에 가죽과 생고기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때리자 단단한 뼈, 검치호 이빨, 내장 같은 여러 가지 소재들이 인벤토리를 채웠고, 더 이상 채집할 게 없자 시체가 사라졌다.
호오, 이런 식이구만.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소재가 상당히 많이 나와 인벤토리 무게가 거의 한계까지 차 있었다.
내가 돌아왔을 때 그녀는 집을 꽤나 쓸 만하게 꾸며 놨다. 소재들을 보관할 나무 상자들을 만들어 놨고, 중앙에는 화톳불을 피울 만한 자리도 만들어 놨다. 밤이 되면 켜기 위해 벽에 횃불도 달아놨다.
“오오, 꽤 그럴싸 한데.”
“그쵸! 열심히 만들었다구요. 고기는 구해왔어요?”
나는 그녀 앞에 검치호 고기들과, 내장들을 쏟아 놨다.
“맙소사 왜 이리 많아요? 검치호 고기? 직접 잡았어요?”
그녀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놀랐다.
“별 거 아니더라구.”
“별 거 아니긴요! 검치호는 분명 상위 몬스터 중 하나라고 설명 들었는데!”
그녀는 말은 그렇게 하긴 했지만, 검치호의 뼈와 가죽을 살피며 기뻐하는 게 보였다. 아무래도 상위 소재로 쓸 수 있는 거 같았다.
“난 이거면 돼.”
나는 검치호의 이빨만 손에 들었다. 혹시 모르니 뼈칼을 하나 더 만들어 둘 셈이었다. 그녀도 괜찮다고 했다.
해가 지기 시작하자 엄청난 속도로 주변이 어두워졌다. 도시에서의 밤과는 달랐다. 모든 것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 몇 발자국 앞도 볼 수가 없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집 안으로 들어와 쉬다가 자기로 했다.
“내일은 본격적으로 파밍을 해봐요!”
그녀가 이제 슬슬 쿠폰 상자를 찾으러 다녀도 될 거 같다고 했다. 금속 무기로 무장한 뒤에 돌아다니면 더 안전하겠지만, 굳이 둘 다 채집을 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무기는 나에게만 필요하니까.
또 다시 그녀가 집 근처에서 금속을 채집하고, 내가 쿠폰 상자를 찾으러 다니기로 했다.
“이거 생각보다 재밌네. 나중에 또 하고 싶을 정도야.”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녀도 맞다고 맞장구 쳤다.
우리는 잠시 그렇게 수다를 떨다가 잠들었다.
깊은 밤, 어디선가 부엉이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부스럭거리는 소리도 들리고, 나무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누군가 우리 집 안에서 걷고 있는 것처럼.
나는 순식간에 소름이 끼쳐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누군가가 양 옆에서 내 팔목을 잡아챘고, 못 움직이도록 다리도 잡았다. 한두 명이 아니었다.
“읍....읍.....”
그리고 내 입도 막아 버렸다.
무언가로 눈이 가려지기 직전, 날 내려다보고 있는 대여섯 명의 눈빛을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