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35화 마족 기지
“흐아아아앗차!!!”
이른 아침, 온 몸의 뼈를 으스러뜨릴 것처럼 쭉쭉 개운하게 기지개를 켰다.
<회복 금지> 기질이 생긴 뒤로 잠을 자더라도 피로가 제대로 풀리질 않아서 매번 자고 일어나는 것도 고통스러웠지만, 이제 상쾌한 아침을 맞을 수 있게 됐다.
어젯밤 분신들에게 아래 구멍들을 가차 없이 공략 당했었지만 그 기분도 말끔하게 사라졌다.
짝! 짝!
나는 손바닥으로 내 얼굴을 연거푸 때렸다. 이제 결전의 때가 왔다. 정신 바짝 차리고 루나를 죽이러 가야한다.
우선 무기를 점검해봤다. 다행히 장도와 소태도를 소환할 수 있었다. 전에 얻은 <마검> 스킬의 영향인지 도신 주변에 검은 오라가 생겨 있었다.
설마 마검이라고 마족한테 안 통하는 건 아니겠지. 조금 불안한 느낌이 들었지만, 시도조차 안 해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만약 안 통한다면 앞으로도 영영 탈출할 가능성이 없다는 거니, 육변기든, 완전한 마족이든, 돌이킬 수 없게 돼버리기 전에 빨리 결판을 내야한다.
후우....
그렇긴 하지만, 비참해도 아직은 네 발로 기어 다녀야 한다. 나는 심호흡을 한 뒤, 방을 나섰다.
“라유, 오늘도 찾아갈게.”
지나가던 마족이 내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그래~ 오빠~ 꼭 찾아와~”
그래 씨발, 반드시 찾아와라. 머리통을 열 등분 내줄 테니.
나는 잔뜩 긴장한 뒤 사령관실 문을 열었다. 들어서면서 방에 루나 말고 다른 마족이 있는지 확인했지만, 그녀 혼자인 거 같았다.
“응? 뭐하는 거양~”
나는 문을 닫은 뒤 곧바로 일어서서 장도를 소환했다. 미적거릴 시간이 없다. 그녀가 내 몸을 만지기 시작하면 반항할 기회를 잃는다. 속전속결로 호위가 오기 전에 끝장낸다.
나는 그녀에게 곧장 대시해서 달려갔다. 그러나 예전보다 내 속도가 훨씬 느려진 게 느껴졌다. 그녀는 가볍게 내 공격을 피하고 날 비웃었다.
“흐응~ 그러려고 마족들한테 보지를 활짝 벌리고 있었던 거구나~ 반항적인 펫은 싫은뎅~”
그녀가 손가락을 퉁기자 헬하운드 몇 마리가 소환됐다. 곧 소란을 듣고 고위 마족들이 들이닥칠 것이다. 그럼 끝장이다.
<선풍>
나는 헬하운드에게 검기를 날렸지만 역시 레벨이 낮아서 대미지가 낮고 압도도 없어서 한 방에 안 죽었다.
하지만 헬하운드를 움츠러들게 하기엔 충분했다. 나는 그 틈을 타 루나에게 대시했다.
<공간 왜곡>
부웅!
분명 그녀를 베었다고 생각했는데 내 검이 엉뚱한 곳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녀가 마력으로 빛나는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웃었다.
“한 번 이겼다고 또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야? 지금 네 레벨로는 공간 왜곡을 뚫을 수 없어~”
휙! 휙!
나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 공격을 몰아쳤다. 하지만 그녀의 말대로 헛수고였다. 예전과 달리 내 검이 그녀의 몸에 전혀 닿지 않았다.
쾅!!
“사령관님! 무슨 일입니까!”
씨발! 기어이 호위병들이 문을 부수고 방에 들어오고 말았다.
“야~ 문을 부수면 어떡해~ 나중에 혼난다~”
호위병들은 루나에게 꾸벅 절을 한 뒤, 상황 파악을 하고 나에게 칼을 향했다.
니미, 이제 어떡하지.
뒷걸음질 치며 달아날 궁리를 해봤지만 도저히 가망이 보이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무기를 버리고 목숨을 구걸해 볼까?
차라리 자살을 할까?
아니 도망이나 자살은 안 된다. 루나가 영혼 결속된 오나홀을 가지고 있는 이상, 그녀를 죽이지 않고 도망치는 건 상황을 전혀 해결해주지 못한다.
“에라! 해보자!”
나는 소리 지르고 정신을 집중했다. 호위병들이 즉시 내게 들이닥친다.
제발 늦지 말아라!
호위병의 칼이 내게 닿기 직전 스킬 시전이 끝났다. 내가 시전한 건 바로 <분신>이었다. 루나의 등 뒤에서 두 명의 내 분신이 장도를 들고 소환됐다.
“으응?”
그녀가 제대로 대처하기 전에 분신들이 그녀를 베어 버렸다.
“꺄악!”
나는 정말 간발의 차이로 마족의 검 하나는 막았지만, 다른 하나는 그대로 배에 박혔다.
“커헉!”
다행히 즉사할 정도는 아니었다.
“사령관님!”
마족 하나가 사령관을 지키기 위해 돌아갔다. 한 명이라면 이기지는 못해도 내 몸 간수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년 빨리 조져!”
나는 분신들에게 명령했다. 분신들은 루나가 주문을 시전할 틈을 주지 않고 연거푸 그녀를 베기 시작했고, 호위병이 그녀에게 도착했을 때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목을 베어버릴 수 있었다.
그러자 내 몸에 힘이 흘러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그리웠던 내 레벨.
<레벨 드레인 효과가 사라졌습니다.>
<레벨 상승 104 -> 185>
호오, 그동안 쌓아둔 경험치 때문에 1레벨이 더 올랐다.
구멍이 뚫려서 고통스럽던 배에서 통증이 사라지는 게 느껴진다.
후우....
나는 다시 충만해진 내 기운을 충분히 만끽하며 심호흡했다. 마족화와 마검의 영향일까, 예전보다 훨씬 더 강해진 게 느껴졌다.
내 분위기가 달라진 걸 눈치 챈 호위병들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방을 나가려고 했다.
“야.”
“네?”
갑자기 존댓말이냐.
“니들은 이제 다 뒤졌어.”
엉거주춤하고 있는 호위병들의 목을 분신들이 쳐 버렸다.
그리고 나는 레벨을 다시 돌려받은 덕분에 주르륵 올라가는 시스템 메시지들을 확인했다. 대부분 잃어 버렸던 스킬들을 다시 사용할 수 있게 됐다는 메시지였으나, 새로 생긴 메시지도 있었다.
<직업 진화 : 마족화로 인해 ‘검사’ 직업이 ‘파멸의 검사’로 진화했습니다. 모든 스킬의 공격력과 범위가 증가합니다.>
<스킬 진화 : ‘최종 오의 암향부동’이 ‘인마 오의 유아독존’으로 진화했습니다.>
<인마 오의 유아독존>
<무수히 많은 검기로 넓은 범의의 적을 공격하는 스킬, 공격당한 적은 마기에 오염되어 회복 불가능 상태가 된다.>
<스킬 진화 : ‘인살의 자세’가 ‘인멸의 자세’로 진화했습니다. 인간형에 대한 추가 피해량이 더 증가했습니다. 앞으로는 마족에게도 효과가 적용됩니다.>
호오, 마족화가 진행된 덕분에 기존보다 훨씬 더 강해졌다. 죽어라 고생한 대가였다.
예전에는 차분하고 고요한 호수 같은 힘이 몸을 채웠다면, 지금 더 폭발적이고, 역동적인 힘이 느껴졌다. 파치 거센 해일 같은 힘이 몸 안을 휘몰아치는 느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
<영혼 결속이 해제되었습니다.>
오나홀과의 연결이 해제됐다. 이제 난 완전한 자유다. 내가 정말 오랜만에 옷을 소환해서 입자, 분신들도 똑같이 옷을 챙겨 입었다.
“자아, 한 번 놀아볼까.”
그리고 분신들과 함께 보이는 족족 다 죽이고, 다 부수고 다녔다.
“하하! 오빠들! 도망 다니지 말고 나 좀 보라구!”
“으악! 사, 살려줘!”
하는 김에 전진기지 역할을 못 하도록 건물도 전부 부수고 다녔다. 그러다가 그 방에 도착했다. 육변기들이 잡혀 있는 방.
방에 들어가기 전, 입구에서부터 고약한 냄새가 내 코를 찔렀다. 난리 통에 마족들은 모두 도망가 버리고 여자들만 남아 몸을 비틀고 있었다.
“하앙....흐응....”
그녀들은 이 난리 통에도 쾌감에 사로잡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아마 정신을 조작하는 마법에 빠져 있거나, 약에 취해 있는 거겠지.
“후우....원망은 하지 마. 이게 최선이니까.”
나는 잠깐 심호흡을 한 뒤, 그녀들을 전부 죽여 줬다.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그녀들을 풀어주고 알아서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는 것보다, 차라리 죽여서 리스폰을 시켜주는 게 낫다.
대충 정리를 하고 나니 기지가 텅텅 비었다. 루나가 죽었다는 것과, 내가 힘을 되찾았다는 소식이 퍼지자 한 놈도 남김없이 도망쳐 버린 것이다.
후우....이제 갈까.
나는 개운하면서도 약간 찝찝한 마음이 들었다. 복수도 끝냈고, 어쩌다보니 레벨도 1 더 올랐고, 이것저것 성장도 하긴 했는데, 머리에 난 뿔이 마음에 걸렸다. 한 뼘 정도 솟아나 있었기 때문에 모자 같은 거로 가릴 수도 없었다.
하지만 피부색은 인간의 것 그대로였기 때문에 대부분은 아바타로 생각하고 넘겨버릴 것이다. 그러길 바라는 수밖에 없다.
나는 기지를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어서 재기 불가능한 상태로 만들어 둔 뒤 도시로 돌아왔다. 도시는 언제 마족들에게 점령당했냐는 듯 일상으로 돌아가 있었다. 조금 특이한 게 있다면, 고층 빌딩에 걸려 있는 스크린에서 예전 내 모습이 방송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13번 도시의 아이돌 이라유다냥! 나와 같이 도시를 지키자냥!”
다시 봐도 낯이 뜨거워진다. 혹시라도 주변 사람들이 알아볼까 무서워 고개를 숙였다.
아니 씨발, 전쟁이 끝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저걸 달아놓고 있나.
그러나, 뭔가 이상한 게 느껴졌다. 영상의 일부는 분명 내가 맞았는데, 일부는 내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단순히 내가 기억을 못 한 거라고 하기엔, 영상 속의 여자가 내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조금 더 유심히 살펴보니 다른 여자가 나처럼 분장하고 영상을 계속 찍고 있는 거였다.
맙소사, 저 꼴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었다니.
그녀도 내가 그랬던 것처럼 알몸에 플러그만 두 개 끼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 아이돌처럼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춤을 추기도 하는 등, 완전 아이돌 활동을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나와 똑같이 배꼽 아래 성노예의 각인이 새겨져 있어서 나와 꼭 닮아 보였다.
분명 뭔가 꼬투리를 잡혀 억지로 저러고 있는 거겠지. 설마 스스로 하고 싶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걸 왜 내가 감당해야 하지?
씨발, 쟤가 저러고 있으면, 사람들은 내가 아직도 저러고 있는 걸로 알 것이다. 그럼 팬이랍시고 귀찮은 날파리들이 달려들 텐데, 진심으로 아무리 비싸더라도 성형 아이템을 고민해봐야겠다.
나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열차 역으로 갔다. 노선표를 보니 다음 도시는 게임 컨셉의 도시였다.
으윽, 거긴 존나 가기 싫었는데.
열차를 너무 저렙 때만 타고 말았다보니 노선표까지 외우지는 못했다.
게임 도시는 말 그대로 게임을 할 수 있는 도시다. 가상현실 안에, 또 다른 가상현실 게임이 있다.
이 게임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이 자체적으로 개발한 게임들이 모여 있는, 일종의 커스텀 게임 도시라고 생각하면 된다.
도시 자체가 상당히 인기도 많고, 발전도 많이 돼 있고, 새로운 게임도 꾸준히 나오는 곳이지만, 정말 가기 싫은 이유가 있다.
바로 모든 아이템을 랜덤 뽑기로 뽑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전에 투기장 포인트로 열차표와 통행권을 사야 했던 시스템은 여기에 비하면 양반이다. 게임에 참여하면 랜덤 뽑기 티켓을 주는데, 그걸 사용하면 지정된 아이템 중 하나가 나온다. 문제는 통행권이나 열차표는 꽝에 해당하는 물건이라는 것이었다.
가뜩이나 랜덤 뽑기 안에 들어가 있는 아이템도 많은데, 무수히 많은 꽝 중, 그 두 개를 뽑아야 한다. 게다가 통행권이랑 열차표는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없기 때문에 아예 그 아이템을 빼버린 랜덤 뽑기들도 있다. 그래서 통행증과 열차표가 들어 있는 랜덤 뽑기 티켓을 주는 게임을 찾은 다음, 그걸 계속 돌아야 하는 것이다.
그럼...한....0.1퍼센트 정도 되려나.....
후우.....
긴 한숨이 절로 나왔다.
보통은 통행증을 뽑기로만 뽑을 수 있다는 게 문제가 안 된다. 이 도시에 들어왔다가 마음에 안 들면 원래 있던 곳으로는 자유롭게 돌아갈 수가 있으니까. 그리고 그곳에서 다른 도시로 가든 비행기를 타든 하면 되니까. 오로지 열차로만 일방통행으로 새로 뚫으면서 나아가야 하는 나한테만 이렇게 좆 같은 거였다.
차라리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서 동쪽 길로 갈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미 많이 와버렸다. 아직 절반도 못 가긴 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당한 게 아까워서라도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 뭐 확률이 대순가, 나오거나, 안 나오거나, 반반이지 뭐.
나는 다음 도시로 향하는 열차를 탔다.
이번에야말로!
나는 객실에 들어서자마자 문과, 창문과, 천장, 의자 아래, 등등 개미 한 마리라도 들어올 구멍이 있는지 꼼꼼하게 점검했다.
아니, 열차를 탈 때마다 범해진다는 게 말이 되나? 열차에 버그 걸려 있는 거 아니야? 다른 사람들도 당하는 거야? 나만 당하는 거야?
그리고 이번에는 절대 잠들지 않게 팔짱을 끼고 의자에 앉아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마족 기지를 박살내느라 살짝 지치긴 했지만, 그래도 <회복 금지> 기질이 사라져서 푹 잔 덕분에 졸리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게 피할 수 없는 내 운명인 건지,
내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알몸인 내 분신 두 마리가 멋대로 소환돼, 내 양 옆에 섰다. 그녀들은 단순히 알몸이기만 한 게 아니라, 사타구니에 거대한 자지도 달고 있었다.
<욕망의 화신>
<당신의 분신이 욕망의 화신으로 진화했습니다. 당신이 분신을 소환하지 않아도, 이따금씩 스스로 발현돼 당신을 범할 것입니다.>
하아....씨발.....하다 하다....이젠.....
내가 한탄하고 있을 때, 그녀 중 하나가 내 뿔을 확 잡아 채, 개처럼 엎드리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