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187화
“주 씨에 이름이 윤문?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아니, 설마. 수십 년 전에 궁궐에 불을 지르고 자살했다는 황제가 혼천회의 회주라고?”
백서휘가 거짓말하지 말라는 눈빛으로 충왕문의 문주를 바라봤다.
“그렇다.”
“죽은 사람이 혼천회를 이끌고 있다고 지금 주장하고 싶은 거야?”
“그때 죽지 않았으니까 지금까지 회를 잘 이끄는 거겠지.”
술법에 걸린 탓인지 충왕문의 문주는 아무 감정 없이 덤덤하게 말했다.
“잠깐 정리 좀 해보자. 그러니까 예전에 황제였던 자가 회주고, 그 회주가 어디 있는지를 모르면 본단의 위치도 알 수 없다는 거지?”
“그렇다.”
“지금 말한 것 이상으로 회주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그렇다.”
백서휘는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려오자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화제를 바꾸자. 부정력에 대해 아는 게 있어?”
“슬픔, 공포, 혼돈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에서 기인한 기운을 말하는 건가?”
“회주가 그걸 모으고 있다고 들었는데 사실이야?”
“사실이다. 충술(蟲術)의 극의가 담긴 비전으로 회주를 감시하지 않았다면 알 수 없었을 정도로 은밀히 모으고 있었다.”
“나도 질문 하나 해도 되나?”
구경하고 있던 목인걸이 물었다.
“어떤 걸 질문하려고?”
“부정력을 모은 양에 관해 물어보려고 한다. 얼마나 모았는지 알면 무슨 일을 할지 대강은 알 수 있으니까.”
“음…… 좋아. 한번 물어봐.”
백서휘는 목인걸에게 질문하라고 손짓하며 두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혼천회 측에서 부정력을 얼마나 모았는지 알고 있나?”
충왕문의 문주는 입술을 달싹거리며 뭔가를 말하려다가 매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계량화하기 어렵다면 기준점이 될만한 걸 제시해 주겠다. 평범한 사람은 1에서 10 정도의 기운을 흘리고, 고수가 1백에서 5천 이상의 기운을…….”
목인걸은 일전에 백서휘와 대화했을 때 대충 잡았던 기준점을 충왕문의 문주에게 제시해 주었다.
“마지막으로 감시했을 때가 1년 6개월 전쯤인데 그때 이미 7천만쯤 모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때로부터 시간이 흘렀으니…… 아마 지금쯤이면 8천만쯤 되겠지.”
“정말인가?”
“그래.”
백서휘의 얼굴이 석상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8천만이나 모았다면 부정력의 휘발성 문제는 진작 해결했단 건데…….”
목인걸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무언가를 생각했다.
백서휘가 다시 두 발자국 앞으로 나와 충왕문의 문주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 많은 부정력으로 뭘 하려는 건지는 정확히 모르지?”
“모른다.”
“이놈들은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이러는 거야. 제기랄!”
그때였다.
생각을 끝낸 목인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혼천회 회주가 무슨 일을 할지 알 것 같다.”
“정말?”
“확실하진 않다.”
“그래도 대충이나마 알게 되는 게 어디야. 아무것도 모르는 것보단 훨씬 나아.”
“회주가 목표로 하는 부정력의 양이 얼마나 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최소 1억 이상이라고 가정한다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 이건 생각을 좀 더 하고 말해 주는 게 낫겠군. 이건 너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말을 하려다가 말아.”
“너무 말이 안 되는 일이라 입 밖으로 꺼내는 게 어렵다.”
“그냥 말해.”
목인걸은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말 안 할 거야?”
“할 거다. 할 건데…….”
목인걸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백서휘는 진심으로 그가 말하기 곤란해하고 있다는 걸 느끼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게 조금 기다려주니 목인걸이 무언가 결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진짜 말이 안 되는 이야기지만, 내가 지금 말하는 걸 그들이 시도한다면 우리는 최대한 빨리 회주가 어디 있는지를 찾아야 돼. 때를 못 맞춰서 그를 죽이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뭘 시도할 거라고 예상 중인데? 그걸 얘기해 줘야지.”
“회주는 지금 승천(昇天) 의식을 진행하려고 부정력을 모으는 것 같다.”
“승천 의식?”
“나나 여기 있는 이자나 분야는 좀 다르지만, 같은 술자(術者)다. 그리고 술자들에게는 고릿적부터 전해져 오는 이야기가 하나 있지. 대오각성(大悟覺醒)할 깨달음이 없다 하더라도 거대한 힘이 있으면 인간의 육신을 벗어던져 신(神)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인데…….”
목인걸은 설명을 하면서도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우화등선(羽化登仙)한다는 소리야?”
“그것과는 좀 다르다.”
“뭐가 다른데?”
“승천 의식이 성공하면 절대적인 힘을 가진 신이 된다.”
“아무리 봐도 우화등선이랑 다를 게 없는데?”
백서휘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설명을 잘못한 것 같군. 다시 설명해 주겠다. 아니, 질문을 하나 던지는 게 낫겠군. 이 세상을 다스리는 자가 누구냐?”
“그거야 사람마다 뭘 믿느냐에 다르겠지만 대체적으로 옥황상제를 꼽을 것 같은데.”
“한 가지 질문을 더 하겠다. 만약에 혼천회의 회주가 옥황상제와 동급 혹은 그 이상의 힘을 가진 신적 존재가 된다면 어떨 것 같으냐? 다른 신적 존재와 다르게 인세(人世)에 있으며 세상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유일신(唯一神)이라면?”
너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 백서휘는 믿을 수가 없었다.
말도 안 되는 말하지 말라고 하려는데 목인걸의 표정이 지나치게 심각했다.
“지금 한 말에 조금의 거짓도, 과장도 없어?”
“없다.”
백서휘는 한숨을 내쉬고는 머리를 뒤로 쓸어넘겼다.
“내가 제대로 이해한 거 맞는지 봐봐. 틀리면 그냥 말을 중간에 끊어버려.”
“그러지.”
“제때 막지 못하면 혼천회의 회주는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인간 세상을 다스릴 수 있다는 거지?”
목인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제때가 언제까지야? 의식이 진행된 중간도 포함되는 건가? 내가 의식이 진행 중일 때 난입해서 그놈을 죽이면 그때는 어떻게 되는 거지?”
“천천히 하나씩만 물어봐라.”
“의식이 진행되기 시작하면 무슨 짓을 하더라도 막을 수 없어?”
“‘절대’란 건 세상에 없으니 막을 수는 있겠지. 근데 아주 힘들 거다. 의식 초반이면 모를까 중간이면 이미 인간을 초월한 상태라 평범한 인간인 너는…….”
목인걸은 끝까지 말하지 않고 뒷말을 삼켰다.
“의식이 치러질 때 난입해서 죽일 수 있는 거면 끔찍할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은 아닌 거네.”
“음…….”
“부정력을 못 모으게 하거나 그놈 찾아서 목을 쳐버리면 되는 거잖아? 그렇지?”
백서휘는 일부러 더 긍정적이고 자신감 넘치게 말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좋아, 그럼 일단 시간을 좀 벌어볼까.”
“시간?”
“말뚝을 찾아서 뽑으면 부정력을 모을 시간이 줄어들 거 아니야.”
“그냥 뽑기만 해서는 안 돼. 아예 녹여서 못 쓰게 만들어야 부정력을 모으는 걸 막을 수 있어.”
“중원 전역에 있는 말뚝 중에 절반을 뽑게 되면…….”
“확실히 승산이 있다.”
백서휘는 책 속의 세계에서 나와 오룡단이 있는 휴게실로 향했다.
휴게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오룡단 모두가 백서휘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빠진 사람이…… 없군. 현재 상황이랑 해야 할 일에 대해 알려주겠다.”
백서휘는 얻어낸 정보를 찬찬히 오룡단에게 알려주었다.
“그, 그게 정말이에요?”
“그래.”
“혼천회를 막지 못하면…….”
“끝이다.”
“어, 어떡하죠?”
이야기가 충격적이었는지 남궁민이 공황 상태에 빠졌다.
“……지금은 시간을 버는 수밖에 없겠군요.”
해야 할 일에 대해 말하지 않았는데 제갈선우는 바로 알아차렸다.
“그래.”
“그 말뚝을 찾아서 뽑아 버리기만 하면 되는 겁니까?”
“아니, 뽑아 버리기만 해서는 안 돼. 완전히 다 녹여 버려야만 담겨 있는 술법이 사라져.”
“찾고 뽑은 다음에 녹이기까지 해야 한다면 사람의 수가 꽤 많이 필요하곘군요.”
“모든 걸 총동원할 생각이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만 부정력을 모을 수 있으니 웬만한 도시에는 모두 말뚝이 숨겨져 있을 텐데, 그러면 관주님이 다 동원해도 모자라지 않겠습니까?”
“황제의 힘을 빌리면 돼. 그러면 가능할 거야.”
아무렇지 않게 황제를 언급하는 백서휘를 보며 오룡단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북경에 금와전장의 주인이랑 황제를 만나러 가볼 테니까. 너희들은 무림맹이랑 사도련…… 아니, 그냥 내 이름을 대면 부를 수 있는 놈들 다 모아서 말뚝 찾게 해.”
“알겠습니다.”
휴게실을 나온 백서휘는 그대로 북경을 향해 달려갔다.
중원만이 아니라, 온 세상이 걸린 일이라 휴식이고 뭐고 할 생각이 없었다.
그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달이 걸릴 길을 보름 만에 올 수 있었다.
‘금와전장이랑 하오문 북경 지부는 황제를 본 이후에 들린다.’
백서휘는 새파란 대낮에 자금성의 담을 넘었다.
은형잠종술을 믿고 있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침소로 쓰는 건청궁(乾淸宮)이 여기 어디일 텐데…… 찾았다.’
은밀히 건물 안으로 들어가 봤지만, 황제를 찾을 수는 없었다.
당연히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백서휘는 살짝 당황했다.
‘기감을 넓히자.’
황제의 기운이 어떤 파장을 내뿜고 있는지 잘 알고 있어서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찾았다! 근데 여기는 어디지?’
자금성에 매번 왔는데도 가본 적 없는 곳이었다.
백서휘는 응룡비천신법을 펼쳐 황제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보화전(保和殿)에 도착했다.
오며 가다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 곳이었다.
‘황제가 휴식을 취하거나 가벼운 업무를 보는 곳이라고 했었지. 아직 낮이라 여기 있는 건가 보네.’
슬쩍 기감을 넓혀 안을 살피니 황제는 소수의 신하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여유가 있고 시간이 있다면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줬을 테지만, 지금 백서휘에겐 둘 모두가 없었다.
『긴히 할 얘기가 있으니까 신하들 물려.』
황제가 화들짝 놀라서 주위를 둘러봤다.
신하들은 갑작스러운 그의 돌발 행동을 걱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봤다.
『어서!』
황제는 아주 잠깐 고민하고는 모든 신하를 물렸다.
‘환관들이 남아 있네.’
아무리 환관이 황제의 수족 같은 존재라고 해도 자신의 존재를 신하들에게 공개적으로 드러내기엔 곤란했다.
『환관들 아직 남아 있잖아. 그놈들도 밖에 나가라고 해.』
전음을 할 수 없어 답답한 황제는 한숨을 크게 내쉰 후 환관까지 다 내보냈다.
백서휘는 보화전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은형잠종술을 풀었다.
“오랜만이야.”
“……부탁한 일을 다 했는데 다시 찾아온 이유가 무엇이냐.”
“부탁할 것이 있어서.”
“부탁?”
“당신에게도 아주 큰 영향이 가는 일이니까 부탁을 들어주는 게 좋을 거야.”
“그건 무슨 부탁인지 들어보고 결정하겠다.”
백서휘는 황제에게 부정력과 혼천회의 회주에 관한 모든 걸 설명했다.
“주윤문이라면…….”
“그쪽보다 선대 황제 맞지?”
“맞다.”
“그쪽 할아버지인지 증조할아버지인지가 황위를 찬탈할 때 주윤문을 확실하게 죽이지 못해서 일어난 일이란 건 인정하지?”
“그, 그건…….”
“그쪽 잘못이 크니까 황명을 내려서 부정력을 모으는 말뚝을 제거하라고 해. 알았어?”
“……알았다.”
백서휘는 황제의 눈앞에서 연기처럼 사라졌다.
“자라 같은 자식! 내 기필코…….”
“나 아직 안 갔어.”
“주, 주윤문 그자를 욕한 거니까 오해 마라.”
“바빠서 오늘만 봐주는 줄 알아.”
“아, 알겠다.”
자금성에서 나온 백서휘는 금와전장과 하오문을 잠깐 들렀다가 다시 호남성의 장사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