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172화
날아온 문짝에 맞은 왕진, 오지서, 구의진이 고통에 신음했다.
뚜벅뚜벅.
누군가가 방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자 세 사람은 문이 있던 쪽을 바라봤다.
그곳엔 백서휘가 검을 늘어뜨린 채 서 있었다.
“누, 누구냐!”
구의진이 용기를 내어 물었다.
백서휘는 대답하지 않고 세 사람의 얼굴을 확인했다.
다행히도 방 안에 있는 세 사람은 자신이 찾고 있던 이들이 맞았다.
“누구냐고 묻지 않느냐!”
“저자는 우리의 질문에 대답할 생각이 없는 것 같소.”
왕진이 침중한 얼굴로 구의진이 발작하듯 소리치는 걸 막았다.
“누군지 알고 원하는 걸 들어야…….”
“그랬다면 이렇게 아무 말 없이 있지 않고 요구부터 먼저 했을 것이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오.”
“주, 죽음을 받아들이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가만히 있던 오지서가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저자가 얼굴을 다 드러낸 걸 보면 모르겠나? 우릴 살려둘 생각이 없기 때문일세. 그렇지 않나?”
왕진이 말을 하다가 자연스럽게 백서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 난 너희들을 살려둘 생각이 없어.”
“도대체 왜 우리를 죽이려는 건가? 아무런 잘못도…….”
“정말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해?”
백서휘는 오지서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가 어깨로 가져갔다.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러는 건가.”
“여기 모인 세 명에겐 공통점이 있지.”
“서, 설마 무림을 통제할 무기를 만들려고 해서 이러는 건가?”
“그래.”
“더, 더는 연구에 필요한 물자를 지원하지 않겠네. 그러니 목숨을 살려주게나.”
오지서가 무릎을 꿇고 파리처럼 열심히 손을 비볐다.
“그러기엔 너무 늦었어.”
백서휘가 가장 오른쪽에 있는 오지서 쪽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왕진이 조용히 의자의 팔걸이에 붙은 자그마한 단추를 누르며 백서휘에게 질문을 던졌다.
“무림의 뜻이 한데 모인 건가?”
“아니, 무림은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있어.”
“무림이 뜻이 모인 것도 아닌데 행동하는 그쪽은 누구인가? 뭐 때문에 이러는 것이고?”
백서휘는 오지서에게 가다 말고 왕진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냥 가만히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한 거 아니었나?”
“생각이 바뀌었네. 어차피 죽을 마당이니 궁금한 건 다 물어보고 죽자고.”
“좋아, 말해주지. 나는 백서휘다.”
“이름을 알려줬으니 뭐 때문에 이러는 건지도 말해 주겠나?”
“관이 무림을 통제하려는 걸 막으려고 그런 거다.”
“왜 통제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지? 통제되지 않는 힘이 위험하다는 걸 모르는 겐가?”
“당신과 설전하고 싶은 생각 없어.”
“설전하자는 게 아닐세.”
“그럼 뭐 하자는 건데?”
“그저 요즘 명성이 자자한 자네와 이야기가 하고 싶었을 뿐이야.”
왕진에게서 이상한 느낌을 받은 백서휘는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시간을 끌고 있군. 왜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나? 밖에 있는 무사들을 기다리는 거면 포기하도록 해. 이미 다 죽었으니까.”
“시간을 끈 적 없네. 조금 전에도 말했다시피 자네에게 이야기하고 싶고, 궁금증을 풀고 싶을 뿐.”
백서휘가 어이없다는 듯한 눈으로 바라봤다.
왕진은 속내를 감추기 위해 계속 질문을 던졌다.
“우리를 다 죽인 이후에는 어떡할 건가? 엮인 자가 우리만 있는 게 아닌데.”
“황제 폐하를 말하는 거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끌어내리거나 죽일 생각은 없으니까.”
“그 말은…….”
“경고만 해둘 거야.”
“만일 폐하께서 경고를 어기신다면 그때는 어떻게 할 텐가?”
“그건 내가 아니라 폐하께서 선택할 일이야. 질문은 이제 그만 받겠어.”
백서휘는 뚜벅뚜벅 걸어가 오지서와 구의진의 목을 베었다.
“질문이 아니라 내 유언을 들어주는 건 안 되는 건가?”
마지막 남은 왕진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시간을 끌었다.
백서휘는 말없이 검을 휘둘러 그의 목을 베어버리고는 장원을 급히 떠났다.
잠시 후, 북진무사와 금의위는 한발 늦게 장원에 도착했다.
그들은 장원에 벌어진 참상을 보고 입을 다물지를 못했다.
“아직 범인이 남아 있을지 모른다! 샅샅이 수색해라!”
북진무사는 명령을 내리고 왕진과 항상 만났던 장원의 심처로 갔다.
그는 바닥을 나뒹구는 세 사람의 목을 보며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왜 이 셋을……? 설마!”
세 사람의 공통점을 떠올린 북진무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폐, 폐하께서 위험하다. 최대한 빨리 건청궁으로 가야 돼.”
북진무사는 금의위를 이끌고 건청궁을 향해 달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건청궁에 도착한 그들은 황제가 넋이 나간 얼굴로 주저앉아 있는 걸 보게 되었다.
* * *
백서휘가 모든 일을 끝마치고 황가장으로 돌아갔을 그 시각.
장사에 있는 조서는 백서휘의 가족이 사는 장원을 유심히 관찰했다.
“오늘도 보이지 않는군. 확실해. 백서휘는 장사에 없어.”
부재중이란 사실은 이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오래 자리를 비울 줄은 몰랐다.
“이 정도면 백서휘와 그 가족들을 고립시키는 작전을 감행해도 된다고 회에 말해도 되겠지.”
장시간이고 먼 지역으로 원정을 떠난 것 같으니 큰 문제 없으리라 생각했다.
“바로 보고를 올려야겠군.”
조서는 자그마한 종이에 백서휘가 장사를 떠났을 거라 추정되는 날짜와 장사의 현재 상황 등을 적어서 가죽 주머니에 넣었다.
“옴 반사라 하 룬…….”
진언을 외우면서 나무 조각을 허공에 던지니 커다란 매가 나타났다.
조서는 그 매의 다리에 보고서가 담긴 가죽 주머니를 묶었다.
“최대한 빨리 가야 돼.”
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혼천회의 본부가 있는 곳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 * *
“여기가 할아버님이 말씀하신 은공이 사는 곳이에요?”
“그렇단다.”
황천익은 미소 띤 얼굴로 손자를 바라봤다.
손자는 밝은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황천익은 손자와 함께 묵을 객잔을 찾아 돌아다녔다.
“할아버님, 죄송한데 조금만 쉬면 안 될까요?”
손자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구양절맥은 나았지만. 손자의 체력이 또래보다 훨씬 떨어졌다.
뒤늦게 깨달은 황천익은 미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미안하다. 얘야. 네가 힘든 걸 내가 생각 못 했구나.”
“아니에요. 괜찮아요.”
“다음부터는 힘들면 바로 말하거라.”
“네.”
“객잔은…… 저곳이 좋겠구나.”
황천익이 고른 객잔은 적당한 크기의 허름한 객잔이었다.
돈이 별로 없기도 하거니와, 이틀 정도 머물 것이기에 낡은 곳에 묵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황천익은 주렴을 걷으며 손자와 함께 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점소이가 그들을 발견하고는 후다닥 달려왔다.
“이틀 숙박에 식사까지 같이하면 얼마나 드느냐?”
“은자 한 냥만 주시면 됩니다요.”
“더 싸게는 안 되겠지?”
“싸게는 안 됩니다요. 대신 식사 때 제가 주인어른 몰래 화주 하나를 내어드리겠습니다요.”
황천익은 잠깐 고민하다 은자 한 냥을 건넸다.
“식사는 지금 하실 겁니까요?”
“식사로는 뭐가 나오느냐?”
“소면, 만두, 소채볶음이 나옵니다요.”
“다른 건?”
“추가 금액을 내셔야 합니다요.”
황천익이 시선을 손자 쪽으로 옮겼다.
“먹고 싶은 게 있느냐?”
“먹고 싶은 건 없고 잠을 자고 싶어요.”
“그래? 그러면 나 혼자 먹어야겠구나. 식사는 2인분 말고 1인분으로 주는 대신 술을 하나 더 다오.”
“알겠습니다요.”
황천익은 피곤하다는 손자를 객실에 놔두고 1층으로 내려왔다.
먼저 식사하던 사람 중 구석에 있는 무리가 그를 경계 어린 시선으로 바라봤다.
황천익은 관심 없는 척하며 점소이가 가리킨 곳에 앉았다.
아무런 위험이 없다고 느꼈는지 구석에 있는 무리는 경계를 풀고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금 기다리고 있으니 점소이가 금방 요리와 술을 내왔다.
“맛있게 드십시오.”
“그래.”
술을 한 잔 마시며 어떤 식으로 일할지 생각하고 있는데 구석에 있는 자들에게서 ‘백서휘’의 이름이 들려왔다.
‘무슨 일이지?’
백서휘는 이제 황천익의 고용주가 될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의 이름이 이야기 중간에 나오니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누구나 알 수밖에 없는 큰일이 내일부터 계속 벌어질 거고, 그 일이 벌어질 때마다 백서휘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소리치고 다니기만 하면 된다는 거요?”
“그 말을 하면서 아까 나눠준 가방에 있는 종이들도 여기저기 뿌리고 다니면 여기 있는 모든 이들의 빚이 탕감된다.”
황천익은 술을 마시면서 구석에 있는 자들이 하는 말을 엿들었지만 백서휘의 이름은 다시 나오지 않았다.
‘저놈들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황천익이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명쾌한 답은 떠오르지를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구석에 있는 자들은 ‘일어난다는 일’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말하지 않았다.
그냥 누구나 알 수밖에 없다고만 말할 뿐이었다.
‘은인에게 말하면 알아서 조사하겠지.’
황천익의 기억 속 백서휘는 허술하게 일을 처리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그러니 말을 하기만 하면 해결되리라 생각했다.
‘다 먹었군.’
황천익은 구석에 있는 사람들의 의심을 피하고자 술에 취한 척하며 객실에 들어갔다.
“할아버지?”
“아직 안 자고 있었구나.”
“자다가 깼어요.”
“깼다고? 나 때문인 게냐?”
“아뇨. 그냥 눈이 떠졌어요.”
“그래?”
황천익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네가 잘 동안 어딜 다녀올 생각이었거든.”
“제가 걱정돼서 그러시는 거면 괜찮아요. 다녀오려던 곳에 갔다 오세요.”
“그래도 되겠느냐?”
“어디 가는지 말씀해 주시기만 하면 돼요.”
“내일 간다는 학무관이란 곳을 지금 가보려고.”
“왜요?”
“거기서 일할 수도 있으니 좀 살펴보려고 한다.”
“아…….”
“그럼 갔다 오마. 어디 가지 말고 여기에 꼭 있어야 한다.”
“네.”
밑에 있는 이들에게 의심을 받고 싶지 않았던 황천익은 고민하다 창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내렸다.
‘큰일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고용주의 신상에 이상이 생기면 일이 힘들어질 수 있었다.
그때 학무관이라고 적혀 있는 깃발이 바람을 따라 펄럭이는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저곳이 맞다면 조금만 더 가면 되겠어.’
얼마 지나지 않아 학무관에 도착한 황천익은 곤란한 상황에 부닥쳤다.
“그러니까 그대의 말은 지금 백 대협이 이곳에 없단 말이오?”
“네, 잠시 출타하셨습니다.”
“오늘 안에는 돌아오는 거요?”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 아닐 겁니다.”
“이런…….”
황천익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진심으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백서휘가 없는 사이에 일이 터질 거란 걸 알게 되니 그의 표정이 안 굳을 수가 없었다.
“저…… 뭐 때문에 주군을 찾으시는 건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제갈선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쪽이 말하는 주군이 본인의 새로운 고용주가 될 사람인데…….”
“아, 비슷한 처지였군요. 진작 말씀하시지.”
“아니, 중요한 건 내가 잠깐 묵는 객잔에서 심상치 않은 이야기를 들었소.”
“심상치 않은 이야기라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지 알 수 있겠습니까?”
“누구나 알 수밖에 없는 일이 내일부터 계속 벌어질 것이고, 그 일이 백 대협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종이를 정체 모를 인간들이 뿌리게 될 거란 거요.”
“그 말을 어디서 들으셨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제갈선우는 위협 요소가 될 수 있는 일이 벌어질 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