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171화
“이, 이놈! 여긴 황제 폐하께서 친히 명령을 내리셔서 만든 시설이다. 네가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연구 시설 책임자가 뒷걸음질하며 으름장을 놓았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협박하는 그가 우스워 백서휘는 피식 웃었다.
“그게 두려웠으면 동창을 그 꼴로 만들지 않았지.”
“서, 설마 동창의 내시들을 죽인 범인이…….”
“나야.”
연구 시설 책임자는 백서휘가 협박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란 걸 깨달았다.
“사, 살려다오. 살려만 주면 뭐든 하겠다.”
“내 질문에 거짓 없이 숨기지 않고 대답해 주면 생각은 해볼게.”
“저, 정말이냐?”
“그렇다니까.”
“뭐, 뭐든 질문해라. 저, 전부 대답해 주겠다.”
“여기 말고 다른 연구 시설은 없는 거지?”
“내가 알기로는 그렇다.”
“왕진, 오지서, 구의진 이 셋 말고 여기에 연관된 사람이 또 있어?”
“그분들과 황제 폐하를 제외하면 이 일에 연관된 사람은 없다.”
“그럼 너랑 그 넷만 없으면 이 연구에 대해 아는 사람이 모두 사라진다는 거네?”
“그, 그렇…… 서, 설마 나를…….”
서걱!
연구 시설 책임자의 목을 자르는 것으로 동굴 안에 있는 모든 이를 처치했다.
“마무리하고 창고로 넘어가야겠다.”
연구 설비들을 부수고 도면까지 다 태운 후에 창고로 넘어갈 생각으로 출입구로 갔다.
“어? 뭐야.”
퇴로를 막기 위해 부숴뒀던 곳이 조금씩 뚫려가고 있었다.
밖에 있던 금의위와 황군들이 안쪽으로 들어오기 위해 돌무더기들을 치우는 듯했다.
백서휘는 잠시 멈춰 서서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검강이 깃든 검을 던졌다.
콰아앙!
귀청을 때리는 굉음과 함께 앞을 막고 있던 돌무더기들이 사라졌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에 금의위와 황군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계급이 어딜 가지 않는지 지휘관으로 있는 천호가 가장 먼저 정신을 차렸다.
“공격! 모두 가지고 있는 암기로 저놈을 공격하라!”
“충!”
금의위는 창검이 아니라 품속에서 꺼낸 암기들을 발사했다.
타타타타타탕!
콩 볶는 소리가 나는 것과 동시에 장침이 사방에서 날아들었다.
묵룡갑의 능력을 믿고 있지만, 수십 차례 공격을 받으면 어찌 될지 몰랐다.
백서휘는 지체하지 않고 바로 독령에게 명령을 내렸다.
‘신순을 발동해!’
『네!』
백서휘의 전신 혈도에서 빠져나온 기시들이 장침들을 쳐내기 시작했다.
카카카카카캉!
위력적으로 날아오던 장침들이 맥없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적들이 믿기지 않는 눈으로 백서휘를 바라봤다.
천호는 백서휘가 초절정 경지 이상의 무인이란 걸 알아차렸다.
“우리만으로는 저놈을 잡지 못해. 그러면…….”
천호가 아무도 모르는 이곳에 지휘관으로 부임한 건 충심도 충심이지만 판단력이 좋아서였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다 가장 발이 빠른 부하에게 전음을 보냈다.
『너는 이대로 밑으로 내려가 북경에 알려라. 연구 시설에 문제가 생겼다고.』
『충!』
발이 빠른 금의위는 눈치를 보다 뒤로 빠졌다.
백서휘는 이미 이 근방의 모든 걸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파악하고 있었기에 바로 변화를 알아차렸다.
‘저놈을 죽여야겠네.’
금의위의 발이 빨라봤자 백서휘의 검이 날아다니는 속도만 못했다.
질풍처럼 날아든 검이 소식을 알리러 가는 놈의 목을 베고 돌아왔다.
그 광경을 본 천호는 백서휘에게서 살아남는 건 불가능하단 결론을 내렸다.
“모두 장전되는 대로 저놈을 공격해라!”
천호는 잠깐 고민하더니 품속에서 다른 것보다 한 치 반 정도 더 긴 암기를 꺼냈다.
그 암기는 지휘관에게만 주어지는 특별한 것으로 다른 것보다 위력과 속도가 조금 더 강했다.
“무조건 맞춰야 한다.”
천호는 천천히 백서휘를 겨누었다.
긴장을 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부담이 되어서 그런 걸까?
암기를 잡은 천호의 오른손이 파르르 떨려왔다.
“침착하자.”
천호는 숨을 가다듬으면서 왼쪽 팔뚝 위에 암기를 올려놓았다.
팔뚝이 지지대가 되어 암기가 고정되었다.
장침이 백서휘를 꿰뚫길 바라며 천호는 엄지손톱 모양의 막대를 눌렀다.
딸깍!
장침이 장전되는 소리가 들리며 쏠 준비가 끝났다.
숨을 참아 미세한 흔들림을 줄인 천호가 다시 엄지손톱 모양의 막대를 눌렀다.
타아앙───!
콩 볶는 소리가 크고 길게 나면서 천호가 쥐고 있던 암기가 터져 버렸다.
천호는 오른손이 순식간에 걸레짝이 되었음에도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백서휘를 향해 날아가는 장침에 온 신경이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암기에서 발사된 장침보다 얇고 짧았지만, 날아가는 속도는 비교가 안 되게 빨랐다.
“제발……!”
캉!
기시가 천호가 쏜 장침을 때렸지만, 장침에 담긴 힘은 줄지 않았다.
카캉!
뒤이어 날아간 열 개의 기시를 맞았음에도 장침은 꿋꿋하게 날아갔다.
화경에 이른 무인의 공격도 아니고 겨우 암기 따위가 열 개의 기시를 견뎠다는 사실에 독령은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다.
그리고 그 감정은 백서휘에게 전해졌다.
‘잘 좀 해봐.’
『단 한 방으로 저 장침의 맥을 못 추게 만들겠습니다.』
각성이라도 한 것인지 독령은 이제껏 실패만 했던 기술을 성공시켰다.
음기가 깃들고 경력(勁力)까지 담긴 기시가 장침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날아갔다.
파앙!
기시에 담긴 경력은 장침이 앞으로 나아갈 대부분의 힘을 줄였고, 깃든 음기는 얼어붙게 하여 장침의 무게를 무겁게 만들었다.
장침은 실 끊어진 인형처럼 맥없이 땅에 떨어졌다.
자신감을 찾은 독령은 다른 장침에도 음기와 경력이 동시에 담긴 기시를 날렸다.
쨍그랑! 쨍그랑!
장침이 땅바닥에 떨어지며 내는 소리를 들으며 백서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저놈들에게 기시를 쏴봐도 되겠습니까?』
‘그래.’
신이 난 독령은 양기와 경력이 동시에 담긴 기시를 사방으로 흩뿌렸다.
기시에 맞은 금의위와 황군의 몸이 활활 불타오르면서 여기저기로 날아갔다.
한바탕 펼쳐진 지옥도에 천호가 넋을 잃고 백서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해도 되잖소!”
백서휘의 시선이 천호에게로 향했다.
“뭘 그만해도 된다는 거지?”
“우리를 죽이는 것 말이오.”
“그렇겐 안 되겠는데.”
“도대체 무슨 이유로 우리를 죽이는 것이오!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여기서 그나마 머리가 좀 돌아가는 놈이 네놈 같은데, 아직도 사태 파악이 안 되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내가 저 동굴에 있다가 나온 걸 봤으면 대충 이유를 짐작했을 거 아니야.”
“……우리가 무림을 통제할 무기를 만들려 했기 때문이오?”
“그래.”
“그럼 이만해도 되잖소! 우리는 이 암기를 만드는 법 같은 건 모른단 말이오!”
“아닐 수도 있잖아.”
“정말 모르오! 모른단 말이오!”
“몰라도 죽어야 돼. 내 얼굴을 봤잖아.”
“그 말은 우리를 진짜 다 죽이겠다는 얘기구려.”
“그래.”
지휘관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더니 내공을 담아 외쳤다.
“모두 도망가라! 도망가서 여기에서 있었던 모든 일을 황제 폐하께 보고해라!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컥!”
금의위들과 황군들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가 사방팔방으로 도망갔다.
“피곤하게 됐네.”
백서휘는 작게 중얼거리더니 의념으로 검을 조종하기 시작했다.
검은 번갯불처럼 빠르게 움직이며 백서휘를 제외한 모든 인간을 죽였다.
계급이 높고 낮은 것과 상관없이 백서휘가 조종하는 검에 공평하게 죽었다.
‘저놈이 마지막인가?’
기감을 발휘해 살아 있는 자가 있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생기(生氣)를 가진 자는 목에 검이 겨눠진 놈 말고는 모두 죽고 없었다.
“사, 살려주십시오. 제게는 늙어서 거동이 불편하신…….”
“아버지나 어머니가 있고 너만 믿는 아내도 있으며 자식도 있겠지. 알아.”
“아, 아신다면 살려주시는 겁니까?”
“그럴 리가 없잖아.”
“구천을 떠도는 귀신이 되어…….”
“날 저주하겠다는 놈이 한둘이 아닌데도 지금까지 아무 탈 없이 살아 있는 걸 보면 귀신이란 거 생각보다 별거 아닌 존재인가 봐.”
“지옥에나…….”
푸욱!
백서휘는 검을 회수하고 뒤돌아서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찝찝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배워먹은 게 칼 쓰는 법이고, 문제를 해결하는 법도 칼질하는 것 말고는 몰랐다.
‘금의위랑 황군 몇 죽이는 것으로 그들보다 많은 무림인이 살 수 있다면 이러는 게 맞아.’
백서휘는 창고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한 번에 다 태우려면 준비를 좀 해야겠는데…….’
백서휘는 창고 건물 주변에 불에 타기 좋은 천이나 종이, 마른 나무 등을 놓았다.
‘독령.’
『네!』
양기가 담긴 기시가 주변에 놓아둔 인화성 물질에 불을 붙였다.
화르르륵!
창고들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조금 시간이 지나니 콩 볶는 소리가 나면서 장침이 날아왔다.
암기가 불에 타면서 오작동이 일어나는 모양이었다.
백서휘는 적당히 지켜보다가 산에 불이 옮겨붙는 걸 보고는 북경으로 돌아갔다.
* * *
자금성에 있는 심처 중의 심처에서 황제와 왕진은 밀담을 나누었다.
“아무리 스승님이라도 이리 자주 찾아오시면 제가 곤란합니다.”
“폐하께 보고드릴 일이 있어서 찾아뵐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보고드릴 일이 기쁜 소식이라면 말씀하시고 아니라면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왕진은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
“……나쁜 소식인가 봅니다?”
“예.”
황제가 한숨을 크게 내쉬더니 왕진에게 말하라고 손짓했다.
“소오태산 전역에 불이 났습니다. 간밤에 비가 내려 꺼지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까지 불타고 있었을 겁니다.”
“그게 사실입니까? 그곳에 있던 장인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황제가 벌떡 일어나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기 개발을 맡은 장인들 모두가 죽었습니다. 금의위와 황군 역시 모두 목숨을 잃었습니다.”
너무나 참담한 소식이기에 왕진은 피 끓는 목소리로 말했다.
충격을 받은 황제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화, 황제 폐하!”
“괜찮습니다. 잠시만, 아주 잠시만 저에게 시간을 주십시오.”
약 일각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충격에서 조금 회복한 황제가 입을 열었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건지는 아십니까?”
“소오태산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신에서 자상과 절상이 발견된 걸 보면 정체 모를 단체의 습격을 받은 것 같습니다.”
“정체 모를 단체의 습격이면…… 다른 누군가가 우리의 계획을 알아차렸다는 겁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그 반역자 놈들의 구족, 십족을 멸하려면 정체를 알아내는 게 급선무겠습니다.”
“저와 다른 두 명의 힘에 금의위와 동창의 힘을 합치면 금방 알아낼 수 있을 겁니다.”
“금의위와 동창에겐 따로 명령을 내리겠습니다.”
“다른 두 사람에겐 제가 폐하를 대신해 말을 해놓도록 하겠습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의 명을 최대한 빨리 전하려면 저는 이만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가보십시오.”
왕진은 조용히 자금성을 빠져나와 본인의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는 오지서와 구의진이 목이 빠지도록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네.”
“괜찮습니다. 그보다 황제 폐하께서는…….”
구의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충격을 받으시긴 했지만 금방 회복하셨소.”
“우리는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다시 처음부터 연구해야 하는 겁니까?”
오지서가 조금은 격양된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는 이제 소오태산을 습격한 놈들을 추적해야 하네.”
“단서가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놈들을 추적…….”
쾅!
문이 갑자기 부서지며 날아들더니 세 사람을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