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167화
장사 근방까지 왔을 때 문득 든 생각이 있었다.
‘내가 부재중일 때 다들 뭘 하면서 지낼까?’
한 명, 한 명 얼굴을 떠올리며 상상하다 보니 궁금증이 커졌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몰래 한번 관찰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몰래 갈 수가 있나?’
장사에 사는 사람 중에 자신의 얼굴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원래 얼굴로 장사에 발을 들이밀면 그 즉시 하오문에 자신이 돌아왔다는 사실이 알려질 가능성이 컸다.
‘그럼 얼굴을 바꾸면 되잖아?’
천환역형공으로 얼굴을 평범하게 바꾸고 장사로 진입했다.
가만히 서서 거리를 둘러보는데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도 없고, 쏟아지는 시선도 없었다.
‘역용하길 잘했어.’
백서휘는 가족들이 기다리는 집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집 근처에 도착하니 백은하의 기합 소리가 들려왔다.
‘제대로 수련하고 있는지 궁금하네.’
성실하게 수련하는 것?
좋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올바르게 수련하는 것.
백날 수련해도 방향성이 잘못됐다면 그 노력은 무가치했다.
백은하의 노력이 허사가 되지 않았으면 했다.
‘그러려면 잘못된 점을 알려줘야 하는데…….’
역용한 얼굴로는 집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렇다고 역용을 풀면 나름의 장고 끝에 결정한 ‘암행’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게 된다.
‘몰래 잠입하는 수밖에 없겠어.’
백서휘는 은형잠종술을 펼친 상태에서 가볍게 도약해 담벼락을 넘었다.
땅에 착지했는데도 경지에 이른 보신경 실력 덕분에 소리가 나질 않는다.
당연하게도 자신이 잠입한 사실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재밌네.’
암중단체의 본진도 아니고 자신이 사는 집에 몰래 들어왔을 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설레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백서휘는 지금 같은 기분이 계속되길 바라며 연무장 쪽으로 걸어갔다.
‘어라? 저건…….’
우염상이 정수련과 함께 소꿉놀이를 하고 있었다.
흥미가 생긴 백서휘는 걸음을 멈추고 잠깐 살펴봤다.
“수, 수련아, 진짜 이걸 하라는 게야?”
우염상은 턱받이를 손에 든 채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정수련을 바라봤다.
“아이참! 엄마라고 하라니까요. 어떤 아기가 그렇게 말해요.”
정수련이 아주 똑부러지게 말했다.
“그, 그래도 이건 좀 심한 것 같은데…….”
“싫으면 하지 마세요. 혼자서도 놀 수 있으니까요.”
“끄응.”
우염상은 큰 결심을 한 듯한 얼굴로 턱받이를 목에 둘렀다.
“이러면 되는 게야?”
“여기에 아기처럼 누우세요.”
“아, 아기처럼?”
“빨리요.”
“알았다.”
우염상은 벌러덩 대자로 누웠다.
“아니, 이렇게 말고 아기처럼요.”
“이거 말고 다른 놀이를 하는 게 어떻겠느냐? 망치질하기나 뜨거운 곳에서 오래 참는…….”
“저는 다른 거 안 하고 소꿉놀이만 할 거예요.”
자포자기한 우염상은 옆으로 눕더니 엄지손가락을 빠는 척하며 새우처럼 등을 구부렸다.
“됐느냐?”
“말투도 바꿔요. 아기처럼.”
“으, 응애!”
백서휘는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어 급히 연무장으로 이동했다.
연무장에는 백은하가 베기와 찌르기를 수련하고 있었다.
이전에 수련을 봐준 덕인지 자세가 흐트러지지는 않았다.
‘좋아졌군.’
백은하를 보면 처음 만났을 때와 다르게 올바른 방향으로 수련을 한 태가 났다.
‘다행이군. 더 지켜보지 않아도 되겠어.’
백은하를 봤으니 이제 정하진을 볼 시간이었다.
정하진이 집에 있을 때면 항상 있는 집무실을 찾아갔다.
‘없네? 어딜…… 아! 지금 학무관에서 업무를 볼 시간이구나.’
저녁이 되려면 한참이나 시간이 남았으니 정하진을 보려면 학무관으로 가야 했다.
정하진을 보고, 겸사겸사 사범들이 수업을 어떻게 진행하는지 볼 생각으로 학무관으로 이동했다.
‘어디를 먼저 갈까.’
‘남’에 불과한 사범보다는 ‘가족’인 정하진을 먼저 보는 게 훨씬 나았다.
집무실 앞까지 도착한 백서휘는 무심결에 문을 밀어서 열려고 했다.
그러다 자신이 지금 잠입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깜짝 놀라 손을 거둬들였다.
갑자기 문이 열리면 정하진이 놀랄 게 분명했다.
‘들킬 수도 있으니까 매형은 그냥 다른 때에 보자.’
그때 누군가가 계단을 밟으며 집무실이 있는 층으로 올라왔다
‘저자는?’
새로 온 사범이라고 했던 ‘조서’가 집무실을 향해 다가왔다.
몇 번 보지도 않았는데 그의 얼굴이 익숙했다.
‘어디서 본 거지?’
생각해보면 자신과 조서는 마주칠 일이 없었다.
가짜 지남침과 장보도의 일로 자신은 잠시 장사를 떠났고, 조서는 관원들을 가르쳤을 테니까.
착각을 너무 심하게 했다고 생각하며 조서의 뒤에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조서가 문을 열고 집무실로 들어가자 백서휘도 따라 들어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무슨 염치로 오셨소?”
정하진이 매섭게 조서를 쏘아보며 날이 바짝 서 있는 말을 했다.
“그간 있었던 일을 설명해 드리고 부관주님께 사죄하러 왔습니다.”
“그간 있었던 일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듣고 싶지 않구려.”
조서는 갑자기 무릎을 꿇으며 정하진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사죄하려 해도 소용없소. 아니, 사죄도 받지 않을 예정이니 어서 집무실에서 나가주시오.”
정하진이 지금처럼 격렬히 화내는 걸 보는 건 처음이었다.
조서가 아주 단단히 잘못을 저지른 게 분명했다.
‘어떤 문제인지 한번 들어봐야겠다.’
쿵쿵쿵!
조서가 머리를 바닥에 세 번 찧었다.
그의 이마에서 나온 핏방울이 광대뼈와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다시는 이번 같은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안 나가시오?”
“부관주님 진짜 급한 일이라 말도 하지 못하고 이곳을 떠난 겁니다. 부디 용서를 해주십시오.”
“다른 사람을 불러야 나갈 것이오?”
“……용서해 주신다면 당분간 무보수로 일하겠습니다.”
돈 얘기가 나오니 새빨갛던 정하진의 얼굴이 평상시의 낯빛으로 돌아왔다.
“얼마나 무보수로 일할 것이오?”
“그 기간은 부관주님에게 맡기겠습니다.”
정하진은 한참을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1년 동안 무보수로 일하시는 게 어떻겠소?”
“1년은 너무 긴…… 아, 아닙니다. 1년 동안 열과 성을 다해 무보수로 일하겠습니다.”
조서가 머리를 바닥에 쿵쿵 찧었다.
‘1년간 무보수로 일하겠다고?’
백서휘가 미간을 찌푸린 채 조서를 바라봤다.
사범이 되어 학무관의 지원으로 의식주가 해결된다고 하더라도 1년 동안 무보수로 일하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조서는 고민을 크게 하지 않고 정하진의 제안을 수락했다.
‘왜지?’
계속 사범 자리에 붙어 있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게 분명했다.
‘아무리 봐도 수상한 놈이지만 여기서 내쫓는 것보다는 시야 안에 두고 딴 짓 못 하게 하는 쪽이 나으니…….’
딴 짓을 하면 그대로 잡아다가 고문을 해서 뭐든 토해내게 만들면 되리라.
“용건은 끝났소?”
“끝났습니다.”
“그럼 나가보시오.”
화가 풀리지 않은 건지 정하진은 빙하처럼 차갑게 축객령을 내렸다.
조서는 정중히 인사한 후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흐르는 피를 소매로 훔쳤다.
“의방에 가야겠네.”
백서휘는 그를 따라갈지 아직 보지 못한 다른 이들을 보러 갈지를 두고 아주 잠시간 고민했다.
‘지금 상황에선 저놈을 쫓는 게 맞겠지.’
조서와 자신 사이에 거리를 두고 천천히 쫓아갔다.
무력 수준의 차이가 어마어마하게 나서 들킬 염려는 없지만 그래도 혹시 몰랐다.
‘진운 같은 능력을 지닌 놈이 있을지도 모르니 조심해야지.’
두 시진이 넘게 계속 쫓아다니는 데도 조서는 수상한 짓을 하지 않았다.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백서휘는 제갈선우와 남궁민을 발견했다.
“관주님은 언제 돌아오실까요?”
“떠난 지 꽤 됐으니 일은 다 해결하셨을 테고, 아마 지금쯤이면 장사 근방에 계실걸?”
남궁민의 기운을 북돋아 줄 생각으로 제갈선우는 긍정적으로 이야기했다.
“오셨을 수도 있겠네요?”
“가능성 있지. 관주님 경공 실력이 엄청나게 뛰어나다는 거 너도 알잖아.”
“와 계신다면 왜 우리한테 오지 않으시는 건지…….”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두 사람은 잡담을 나누며 천천히 도화루 쪽으로 걸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두 사람이 주렴을 걷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가 앉을 곳은…… 저기네요.”
두 사람은 점소이의 안내를 받지 않고 오룡단원 중 나머지 셋이 기다리는 자리로 갔다.
“왜들 그렇게 죽상이야?”
제갈선우가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오늘 유난히 힘들었거든요.”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러는 건데?”
“거동수상자 쫓다가 놓쳐서 힘만 뺐어요.”
황보정석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거동수상자?”
“우리가 수련하는 모습을 몰래 훔쳐보는 놈이 있더라고요. 무례하게 뭐 하는 짓이냐고, 남의 수련을 지켜보면 안 되는 거 모르냐고 말하러 가는데…….”
“말하려는데?”
“도망을 치더라고요.”
“이상하다 싶어서 혼내주려고 뒤쫓아갔는데 막다른 골목에서 사라졌어요.”
“잡아서 캐묻지 못했으니 정체도 모르고, 뭐 때문에 그런 건지도 모르겠네?”
“그렇죠.”
황보정석이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제갈선우가 범인을 추리하기 위해 생각에 잠기려던 찰나, 가만히 있던 남궁민이 흥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제갈 형! 우리도 있지 않았어요? 그 수업 지켜보던 사람이요!”
“그 사람이 거동수상자라고?”
“수업 끝나고 애들한테 물어보니까 하나같이 다 모르는 사람이라던데요?”
“그럼 거동수상자가 맞긴 한데…….”
“도대체 뭐 때문에 그런 걸까요?”
“우리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려고 그런 게 아닐까?”
“확실히 그것도 가능성은 있죠. 이젠 우리도 알게 됐지만, 관장님에게는 적이 있으니까요.”
백서휘의 얼굴이 석상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혼천회에서 보낸 놈인가?’
만약 맞다면 그놈들을 잡거나 정체를 알아내기 전까지는 무조건 장사에 붙어 있어야만 했다.
‘좀 더 자유롭게 움직이려면 놈들의 정체를 알아내야 돼.’
백서휘는 기감을 최대한으로 넓힌 후 장사 시내를 돌아다녔다.
‘상업 구역은 이쯤하고 주택들이 모여 있는 곳을 찾아다녀 보자.’
그때 상당한 수준의 고수들이 한곳에 모여 있는 걸 발견했다.
일정 경지 이상의 고수는 오며 가며 본 덕분에 이름과 얼굴을 대강 알고 있었다.
‘처음 보는 놈들이야.’
생전 처음 보는 고수들이 집단을 이루고 있는 게 백서휘의 입장에선 의심스러웠다.
‘문을 부수고 들어갈까?’
백서휘는 잠시 고민하다가 홀로 잠복근무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무작정 기다리는 것보다는 정보 수집을 하는 게 낫겠어.’
백서휘는 가볍게 뛰어 지붕 위로 올라왔다.
그다음 청력을 한계까지 증폭시켜 안에서 뭐라고 말하는지 듣기 시작했다.
“작전 결행일은 예정대로 진행되는 겁니까?”
“더 빠르게 진행한다.”
“그럴 이유가 있습니까?”
“황제 폐하께서는 무림을 통제할 무기를 빠르게 얻길 원하신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작전 결행일을 일주일 앞으로 당기게 됐다.”
“그럼 내일 진행하는 겁니까?”
“그래, 우리는 내일 화령철장 우염상을 다시 감옥으로 데려간다.”
백서휘는 책임자로 추정되는 자의 목을 들은 이후에야 거동수상자의 정체를 알아냈다.
‘설마 금의위?’
황제나 금의위나 아직도 무림을 통제하겠다는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