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165화
‘왜 술법이 소멸하는 건지 그 원리를 모르나 보네.’
알았다면 주술사들은 지금과 같은 선택을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혹시 모르니까 용안으로 한 번 더 살펴보자.’
백서휘의 홍옥빛 눈동자로 주술사들이 합쳐진 융합체를 바라봤다.
융합체는 예상했던 것처럼 비물질적 요소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단순한 구조란 걸 확인했으니 거리낄 게 없어졌다.
이제 맘 편히 융합체를 공격해도 될 것 같았다.
“여유로워 보이는구나.”
“단칼에 죽일 수 있겠단 생각이 드니 자연스럽게 여유로워지더라고.”
“‘우리’를 단칼에 죽일 수 있다고?”
“그래.”
“우리를 죽일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설령 회주가 온다 한들 이 상태의 우리를 죽이진 못해!”
융합체가 격분하여 소리치자 이공간 곳곳에 천둥 번개가 쳤다.
“그건 두고 보면 알게 되겠지.”
“건방진!”
“나 정도 되면 건방 떨 만하지.”
“그렇게 자신 있다면 이걸 막아봐라.”
융합체가 오른손에 정체 모를 구체를 하나 만들었다.
구체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예사롭지 않았다.
백서휘는 홍옥빛 눈동자로 구체를 노려봤다.
구체 내부에서 오행의 기운이 순환 상생하며 힘을 키워가는 게 보였다.
‘시간을 조금 더 주면 강환을 뛰어넘을지도 모르겠어.’
강환 이상의 파괴력을 낼 수 있는 기술이란 걸 알게 됐지만 두려운 마음은 딱히 들지 않았다.
‘얼마든지 베어버릴 수 있어서 그런 거겠지.’
백서휘는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가만히 서서 융합체를 지켜봤다.
이상이 생기기라도 한 건지 갑자기 융합체가 인상을 팍 쓰면서 신음을 흘렸다.
‘무슨 일이지?’
오행기(五行氣)를 계속 집약시키는 것에 한계가 있었던 것 같았다.
괴로워하던 융합체는 더 견디지 못하겠는지 백서휘를 향해 구체를 던졌다.
쐐애애액!
구체는 날아오는 와중에도 담겨 있는 힘이 조금씩 커져 갔다.
‘괜히 자신감을 보인 게 아니었군.’
백서휘는 속으로 감탄하며 검강이 깃든 검을 사선으로 내리그었다.
구체의 근본을 이루는 결합 구조가 검강에 의해 깨끗이 잘려 나갔다.
구체는 조금의 흔적도 남기지 않고 그대로 소멸했다.
“어, 어떻게…….”
융합체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백서휘를 바라봤다.
“베어버렸다.”
“벤다고 베어지는 게 아닐 텐데, 설마 사술?”
“주술사가 무인한테 사술이라고 말하는 건 좀 웃기지 않아?”
백서휘는 어처구니없단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다 갑자기 구천현현보로 전력으로 발휘해 거리를 좁혔다.
“흡!”
융합체는 구체를 마구잡이로 날리면서 멀리 도망갔다.
백서휘는 피할 수 있는 건 피하고, 벨 수 있는 건 베면서 그를 끝까지 쫓았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됐다!’
백서휘는 융합체가 공격 범위로 들어온 걸 확인하자마자 일검관천의 초식을 펼쳤다.
검강이 깃든 검이 융합체의 몸을 두부처럼 부드럽게 찔러 들어갔다.
검이 박힌 상태에서 백서휘는 그대로 경천신뢰 초식을 펼쳤다.
그러자 벼락이 내리치듯 검이 빠르게 내리그어지며 융합체의 근본을 이루는 구조를 베어버렸다.
융합체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끄아아아악!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칼질.”
“뭐, 뭐라고?”
“칼질했다니까.”
“어떻게 이런 일이…….”
기로 이루어진 융합체의 몸이 서서히 스러지기 시작했다.
그들이 예상한 죽음은 이렇게 허무하지 않았다.
“이게 무슨 일이지?”
원수를 갚고 선천진기가 소진되어 서서히 죽는 걸 계획했다.
그런데 이렇게 원수의 제자에게 상처 하나 내지 못하고 단칼에 죽는다니…….
이래서는 안 된다.
최소한 저놈을 불구로 만들고 죽어야만 했다.
그래야 저승에서 스승님을 봤을 때 노력은 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다섯 주술사는 의지를 하나로 모아 흩어지려는 기를 붙잡아 억지로 순환시켰다.
“너희들 지금 뭐 하냐?”
대놓고 자폭할 준비를 하는 걸 보니 어이가 없었다.
어처구니가 없어진 백서휘는 검강이 깃든 검을 빠르게 뽑아 휘둘렀다.
가뜩이나 줄줄 새던 기가 더 빠르게 빠져 나갔다.
다섯 주술사는 허락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공허하고 덧없구나.”
“죽기 싫어! 죽기 싫다고!”
“그래도 인간의 모습을 한 채 죽고 싶었는데…….”
“스승님, 죄송합니다. 그래도 노력은 했어요.”
“어머니!”
백서휘는 유언을 남기는 다섯 주술사를 뒤로하고 모용중광과 종리혁에게로 걸어갔다.
모용중광과 종리혁은 서로에게 몸을 기댄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다 끝났으니까 일어나.”
“조금만 쉬었다 가면 안 되오?”
모용중광이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그대로 소멸되고 싶으면 계속 쉬어도 상관없어.”
“그게 무슨 말이오?”
“벌써 잊은 거야? 이공간은 주인이 죽으면 안에 있는 것들과 함께 소멸되어 버려.”
종리혁과 모용중광이 깜짝 놀란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다 같이 소멸당하고 싶지 않으면 이리로 다른 무사들을 데려와.”
“아, 알겠소.”
모용중광과 종리혁이 사라졌다가 다른 무인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어디로 가면 밖으로 갈 수 있소?”
“저기로.”
“……우리가 먼저 가겠소.”
“아니, 우리가 먼저다.”
모용중광과 종리혁이 이공간을 나가는 순서로 싸우려고 했다.
으르렁거리는 그들을 보며 백서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정파 한 명, 사파 한 명 이렇게 짝지어서 나가.”
“그쪽은 안 나갈 거요?”
“나는 혈교나 마교놈들 오지 않나 지키고 있을 테니까 먼저들 나가.”
백서휘의 진심과는 거리가 먼 대답이었다.
다른 인간들을 내보내는 건 안전을 위해서였다.
‘혼천회 측에서 출구를 지키고 있을지도 몰라.’
백서휘의 속마음을 모르는 종리혁과 모용중광은 진심으로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고맙소.”
“고맙다.”
“인사는 그만하고 얼른 나가.”
백서휘는 귀찮다는 듯한 얼굴로 어서 가라고 손을 저었다.
잠시 후, 정파 한 명, 사파 한 명씩 짝을 지어 나가는데 밖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어쩐지 이럴 것 같더라니…….’
혼천회가 노릴 수 있는 절호의 때가 지금밖에 없긴 했다.
그럴 만한 것이 이쪽은 출구가 작아 통과하는 인원이 필연적으로 소수일 수밖에 없었다.
그에 반해 지키는 쪽은 넓은 공간에서 다수의 인원으로 공격하는 것이 가능했다.
‘소멸 문제 때문에 이공간에 계속 있을 수도 없는데.’
오지도 가지도 못하는 것이 딱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지금의 상황을 반전시키려면 자신이 나서야만 하는데, 문제는 자신이 지금 만전의 상태가 아니라는 거였다.
다섯 주술사와의 치열한 전투로 인해 육체와 정신 모두에 피로가 쌓여 있었다.
독령이 내력을 계속 순환시켜 피로를 해소하고 있지만, 완전한 상태로 회복되려면 시간이 좀 걸릴 듯싶었다.
‘이 난국을 타개할 방법은 없는 건가?’
아직 자신이 찾지 못했을 뿐, 언제나 정답은 있다고 믿었다.
그 믿음이 통한 걸까?
백서휘는 정답이 될 만한 방법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차력술이라면 지금의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어!’
자신과 계약한 존재는 무려 용신(龍神) 아난타였다.
그가 힘을 빌려준다면 밖에 있는 적들을 상대하는 걸 넘어 학살할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힘을 빌릴 수 있는지 한번 봐 볼까.’
백서휘는 아난타가 주입해 준 지식을 이용해 힘을 빌릴 수 있는지 알아봤다.
‘존재감이 흐릿한 걸 보면 아직은 힘을 주기가 힘든가 보네.’
제물로 대신 줄 수 있는 것을 따져봤지만 마땅한 것이 나오질 않았다.
‘죽음을 각오하고 밖으로 나가서 싸우는 수밖에 없겠어.’
그때 동쪽에서 혈교 무리가, 서쪽에서 마교 무리가 나타났다.
정파와 사파의 무인들이 그들을 보며 자기들끼리 대화를 나누었다.
“저놈들이 그 유명한 마교도인가?”
“아니, 그쪽은 혈교라네.”
“그러면 옷이 빨간 쪽이 혈교, 옷이 검은 쪽이 마교라는 거야?”
“그래.”
“우리 지금 위험한 거 아니야? 저 둘이 지금 동맹을 맺은 것 같은데…….”
정파 무인이 백서휘를 슬쩍 보고는 입을 열었다.
“백 관주가 해결해 줄 거야. 나는 그렇게 믿어.”
혈교와 마교를 상대 안 할 수가 없는 환경이 저도 모르는 사이 만들어졌다.
어차피 아난타의 힘을 빌리려면 두 무리를 싹 쓸어야만 했다.
백서휘는 긴장된 얼굴로 두 무리를 번갈아 봤다.
‘아무래도 술법을 쓰는 데 능한 혈교 쪽을 먼저 죽이는 게 좋겠어.’
백서휘는 의념이 담긴 검을 있는 힘껏 혈교 쪽으로 던졌다.
바람을 가르며 날아간 그의 검은 혈교 무리 속을 헤집고 다니며 혈교도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됐겠지.’
혈교 무리를 모두 죽이니 아난타의 힘을 쓸 수 있는 최소 조건이 채워졌다.
최대 조건도 한번 채워 볼까 생각으로 마교 쪽을 보니 강자가 두 명이나 있었다.
하나는 진가의 가주 진소운이었고, 다른 하나는 태상가주 진백호였다.
‘쉽지 않겠어.’
그때였다.
진소운과 진백호가 흉흉한 기세를 풍기며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
‘투덕거릴 시간 없어.’
백서휘는 모용중광과 종리혁에게 일각 후에 밖으로 나오라는 전음을 날리고 출구로 달려갔다.
‘조금만 더 가면…… 됐다!’
밖으로 나온 백서휘는 주위를 둘러봤다.
셀 수 없이 많은 고수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죽어라! 백서휘!”
“네 목은 내 거다!”
“백서휘 목은 내 거야, 이 자식아!”
시장바닥도 아닌데 여러 사람의 말소리가 뒤섞였다.
듣기 힘들었던 백서휘는 인상을 팍 쓰며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아난타!”
혈관을 돌아다니는 용혈들이 움직이며 백서휘를 완전히 용인(龍人)으로 바꾸어 놨다.
그의 피부에는 비늘이 덮였고 관자놀이에서는 사슴뿔이 길쭉하게 솟아올랐다.
손톱은 칼날처럼 날카롭게 변하고, 손가락은 좀 길고 얇아졌으며, 엉덩이에는 이제껏 없던 기다란 꼬리가 생겨났다.
‘이게 끝인가 보군.’
완벽히 용인(龍人)으로 변신한 백서휘가 양 떼에 뛰어드는 늑대처럼 고수들 속으로 파고들었다.
“죽어라! 백서휘!”
백서휘가 진짜 ‘용조수(龍爪手)’로 달려드는 적의 얼굴을 할퀴니 머리가 사라졌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근력이 강해진 것 같았다.
“포상금은 내 거다!”
사방팔방에서 백서휘를 노리고 공격에 들어왔다.
백서휘는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고수들 사이로 수많은 흐름이 만들어졌다가 사라졌다.
그 흐름을 유심히 살펴 보니 앞으로 이들이 어떤 식으로 공격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보인다!’
백서휘는 흐름을 타고 공격을 피하면서 혼천회 소속의 적들을 인정사정없이 죽였다.
출구 근처에 있는 적을 거의 다 죽였을 때가 되니, 이공간의 출구에서 진소운과 진백호가 튀어나왔다.
“늦었잖아.”
“우릴 기다렸나?”
백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이유로?”
“죽이기 좋은 상대라서.”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그딴 망발을 하느냐!”
“진가의 태상가주 진백호잖아.”
“알고도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진백호의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실제로 그쪽이 약한 건 사실인걸?”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법이다!”
“한번 보자고. 누구 말이 맞는지.”
백서휘가 용인화 된 상태로 싸울 자세를 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