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162화
예상했던 것처럼 백서휘 일행은 태양극염진에 막혀 고전을 면치 못했다.
‘주술사가 화경에 비견되는 경지라고는 해도 이상할 정도로 강해. 용암지대가 저놈들에게 힘을 주고 있기 때문인 건가?’
주술사는 용암지대의 넘치는 화기(火氣)와 진법으로 뽑아낸 부하들의 기운을 섞어서 초고위계 주술을 쉬지 않고 날리는 중이었다.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모용중광에게서 전음이 날아왔다.
『지금 국면을 타개할 방법 같은 거 없소?』
『그런 방법이 있다면 진작 썼을 거란 생각은 안 드는 거야?』
『그러면 지금이라도 생각해봐야 하는 것 아니오?』
『둘 중 하나만 이루어져도 쉬워질 것 같은데…….』
『둘 중 하나? 어떤 걸 말하는 거요?』
『용암지대에서 끌어오는 화기나 진법으로 뽑아낸 부하들의 기운만 차단해도 지금보단 편해질 거야.』
『진법 때문이면 전문가에게 물어보는 거 어떻소?』
『전문가? 누구?』
『제갈 군사를 말하는 거요.』
『진법을 자세히 살피려면 전면으로 내세워야 해서 위험해. 자칫 잘못하면 제갈진천이 죽게 될 거야.』
『우리가 보호하면 되잖소.』
지금까지 그렇게 당해놓고 주술사가 얼마나 위험한지 모른다니.
백서휘는 작게 한숨을 내쉰 후 왜 안 되는 건지 설명을 해주었다.
『……그러면 우리끼리 계속 이렇게 버티고만 있어야 한다는 거요?』
『지금은 그 방법 말고는 없어.』
모용중광의 입에서 탄식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잠시간 고민하던 백서휘는 공략법으로 생각하고 있는 걸 그에게 말해주기로 마음먹었다.
『방법이 하나도 없는 건 아니야. 있긴 있어.』
『그럼 그 방법을 쓰면 되는 거 아니오?』
『실전에서 내 뜻대로 한 번도 써보지 못해서 그래. 매번 내 통제를 벗어나서 일이 벌어졌거든.』
『그래도 지금 희망은 그것밖에 없는 것 아니요?』
『그래, 희망은 이것뿐이야.』
『내가 어떻게든 시선을 끌어볼 테니까 뭐든 써서 주술사를 죽이고 진을 부수시오.』
모용중광이 현란하게 보법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가서는 화 속성 주술사 측 무인들을 견제했다.
백서휘는 왼쪽 눈에 용인화를 쓰기 위해 눈을 감았다.
몸속에 흐르는 용의 피가 왼쪽 눈을 향해 가는데 이전과는 느낌이 달랐다.
예전에는 팔팔 끓는 물이 혈관을 타고 흐르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적당히 차가운 얼음이 미끄러지는 느낌을 받았다.
얼음이 부드럽게 이동하다 왼쪽 눈에 도달했다.
놀라운 건 통증이 조금도 발생하지 않았다.
‘이게 차력술의 힘인가!’
괜히 다른 존재의 힘을 쓰고 지식을 받는 게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엄청나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눈동자의 바로 위에 무언가가 덮이는 느낌이 들었다.
이상하단 생각이 들어 눈꺼풀을 올리니, 기운의 양부터 움직임까지 이전보다 더 또렷하고 자세하게 보였다.
지금 주술사는 진을 이루는 무인들에게서 기운만 뽑아내는 게 아니라, 무인들의 몸을 여과기로 만들어 용암지대의 화기를 순환시키고 있었다.
화기가 무인들의 몸을 한 바퀴 돌며 순환할 때마다 몸집이 커지고 질도 화정(火精)에 비견될 만큼 좋아졌다.
‘짜증 날 정도로 영악하군.’
주술사가 화기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무인들의 몸을 통해 이동하는 방법을 선택한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은밀성이 늘어나서 술법이 완성될 때까지는 어떤 술법인지, 얼마나 위력적인지를 알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이러니 내가 기를 쓰고 움직여도 반 박자 늦게 인지하지.’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를 알았으니 이제 행동으로 보여줘야 할 때였다.
백서휘는 화기로 이루어진 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 구천현현보를 밟았다.
‘한 발자국만 더 가면……. 제기랄!’
집채만 한 불덩이가 자신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왔다.
‘아까부터 나만 노리네. 내가 위협적이긴 한 건가?’
가장 위협적인 적을 먼저 제거하려는 속셈으로 보였다.
백서휘는 방어 준비를 할 시간을 벌기 위해 미친 듯이 구천현현보를 밟았다.
‘유천, 균천, 창천, 번천, 창천, 양천…….’
휘리리릭!
불덩이는 백서휘를 계속 따라다녔다.
호신강기를 믿고 맞붙어야 하나 싶었을 때, 백서휘는 불덩이의 중심에 무언가가 있다는 걸 발견했다.
용안을 통해서만 알아차릴 수 있는 걸 보면 기운의 흐름과 어떤 연관이 있어 보였다.
더 자세히 보니 여러 빛을 띤 정체 모를 것들이 복잡하게 얽혀있었다.
‘계속 피하기만 할 수는 없어. 생각할 시간도 없고. 일단 맞아보고 그다음에 정체를 밝혀보자.’
백서휘는 호신강기를 단단히 만든 후 강검의 무리가 담긴 회천만일의 초식을 펼쳤다.
콰아아아앙!
백서휘가 피분수를 내뿜으며 저 멀리 날아갔다.
“백 관주!”
모용중광은 백서휘와 무인들을 번갈아 보며 갈팡질팡하다 진법을 향해 달려들었다.
채채채챙!
모용중광은 부탁하지 않았는데도 자신이 회복할 시간을 벌기 위해 열심히 검술을 펼쳤다.
쿵쿵쿵!
바위를 두 개나 몸으로 부수고 나서야 날아가는 걸 멈출 수 있었다.
‘죽겠군.’
진짜 죽을 정도로는 아니지만 각오하고 맞은 것치고는 되게 아팠다.
백서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피가 섞인 침을 퉤 하고 뱉었다.
‘주술사를 먼저 노리는 것보다는 진법을 이루는 놈들부터 죽여야겠어.’
진법을 이루는 놈을 죽이면 화기가 필요한 만큼 순환하지 못할 테니 술법의 위력이 줄어들 게 될 거라 예상됐다.
그리고 위력이 줄어들면 술법의 복잡하게 얽혀있던 것들의 정체를 파악하는 일이 더 수월해질 것 같았다.
‘화기의 순환도 방해할 수 있으니 일석삼조겠지.’
채채채채챙!
모용중광은 무인들과 검격을 교환하면서 기감으로 백서휘의 상태를 살폈다.
백서휘가 일어난 걸 확인한 그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백 관주! 회복이 끝났으면 어서 와서 도와주시오!”
“알았어!”
백서휘는 전력으로 달려가 함께 무인들을 상대했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폭발이 일어나더니 모용중광이 피를 한 움큼 토해내며 날아갔다.
‘모용중광이 했던 것처럼 나도 시간을 벌어야겠다.’
백서휘는 무인들의 몸을 탄 화기가 순환하려 할 때마다 공격해서 기운에 손실이 있게 만들었다.
자꾸 비슷한 일이 벌어 상대측에서도 자신에게 기운의 유동을 알아내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때마침 모용중광이 회복돼서 다시 복귀했다.
백서휘는 모용중광의 보조를 받으며 태양극염진을 이루는 무인들을 침착하게 죽여 나갔다.
그때 이전보다는 크기가 좀 작아진 불덩이가 백서휘를 향해 날아왔다.
이번에는 술법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며 결과를 모두 봤기에 방어 준비도 제대로 할 수 있었다.
거기다 화 속성 주술사가 누군지까지 특정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 저놈들에게 반격만 제대로 날리면 됐다.
‘개자식! 가만두지 않겠어!’
이미 방어 준비가 철저히 되어 있었던 백서휘는 불덩이의 중심에 있는 것을 끝까지 뚫어져라 바라봤다.
‘잠깐, 이거 설마……!’
눈앞에 있는 놈들을 상대하면서 알게 된 것들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불덩이의 중심에 있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이건 술법을 만들어 낸 화기이고 그 옆에 엮인 건 주술사의 상단전에서 나오던 거였어. 그리고 이건…….’
중심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술법의 구성요소였다.
작은 깨달음을 얻고 나니 주술사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감이 왔다.
‘무작정 술법에 검을 휘두르지 말고 정확히 구성요소만 베어버린다면 어떨까?’
자신이 아는 한 가장 절삭력 있는 것은 검강이 담긴 검이었다.
그런 검강으로 정확히 구성요소만을 베어버린다면 술법을 무력화시킬 수 있을지도 몰랐다.
‘구성요소 자체가 비물질적인 것들이라 실패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한번 해보자.’
백서휘는 자신에게 날아드는 불덩이의 구성요소를 정확히 노리고 검강이 담긴 검을 휘둘렀다.
스각!
구성요소가 깨끗하게 베이자 술법은 세상에 더 존재하지 않고 그대로 소멸해버렸다.
‘돼, 됐다!’
화 속성 주술사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우연이라고 생각했던 그는 다시 한번 술법을 준비했다.
자신감이 붙은 백서휘는 무인들을 죽이면서 화 속성 주술사가 쓸 술법을 예의주시했다.
‘온다!’
백서휘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사선으로 검을 내리그었다.
서걱!
다시 한번 술법이 사라지자 주술사는 우연이 아님을 직감했다.
그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좌우로 흔들렸다.
‘자, 이제 어쩔 거지? 또 술법을 쓸 거냐?’
백서휘는 힐끗힐끗 화 속성 주술사를 보면서 무인들의 목숨을 아주 천천히 앗아갔다.
초조해진 화 속성 주술사는 이번에는 불덩이가 아니라 불로 이루어진 벽을 만들었다.
불로 된 벽은 백서휘의 시야를 가리면서 화 속성 주술사가 어떤 행동을 하는지 감추었다.
‘이까짓 벽 따위!’
백서휘는 불로 된 벽의 구성요소를 깨끗하게 베었다.
그 순간, 화 속성 주술사의 몸이 갑자기 이글거리는 불로 변하더니 서쪽 하늘로 날아갔다.
‘이렇게 도망치게 두면 안 돼!’
백서휘는 붉은 궤적을 그리며 날아가는 화 속성 주술사를 잡기 위해 어검비행을 펼쳤다.
그걸 본 화 속성 주술사는 기겁하며 비행 속도를 계속 높여갔다.
‘더 빠르게! 더 빠르게!’
백서휘도 화 속성 주술사를 따라잡기 위해 최대한의 힘을 발휘했으나 한계가 있었다.
‘이러다 놓치겠어! 뭐라도 해야 하는데……. 아!’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백서휘는 격공장을 날리기 시작했다.
화 속성 주술사는 화려한 비행 기술을 발휘해 격공장을 피하면서 그에게 불덩이를 날려 반격했다.
백서휘가 불덩이를 베어낼 때마다 화 속성 주술사와의 거리가 확확 벌어졌다.
그렇다고 안 없애기엔 불덩이의 위험도가 너무 컸다.
“백서휘 죽어라!”
화 속성 주술사는 있는 대로 불덩이를 만들어 흩뿌렸다.
백서휘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그가 날린 불덩이를 하나하나 없앴다.
모두 소멸시키고 따라가려고 화 속성 주술사 쪽을 바라봤다.
쫓기 힘들 정도로 거리가 벌어져 있었다.
백서휘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세 사람이 기다리는 곳을 향해 날아갔다.
돌아가면서 그는 다른 무인들을 찾기 위해 꼼꼼히 지상을 살폈다.
그러다 반가운 얼굴이 어딘가로 이동하는 걸 보게 됐다.
“황천익!”
깜짝 놀란 황천익은 소리가 난 하늘을 보기 위해 고개를 치켜올렸다.
그곳에는 서서히 지상으로 내려오는 백서휘가 있었다.
황천익은 신선을 보듯 백서휘를 바라봤다.
“다 방법이 있지. 그보다 다른 사람들 본 적 있어?”
“많이 봤다네.”
“어디서, 얼마나 많이 본 건데?
“큰 무리는 아직 본 적 없지만 대여섯 명으로 이루어진 작은 무리는 숲에서 여럿 봤네.”
“숲?”
“저쪽으로 계속 가면 울창한 숲이 있다네.”
백서휘는 화 속성 주술사가 누굴 찾아간 건지 알게 됐다.
‘목 속성 주술사를 찾아갔나 보네.’
화 속성 주술사를 향한 분노는 사그라지지 않아서 그런지, 숲에 불을 지르고 싶다는 생각이 계속 났다.
백서휘의 몸에서 유형화된 살기가 피어올랐다.
“이, 이보게. 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진정하게.”
“아!”
백서휘는 살기를 갈무리하고 진지하게 불을 지르는 게 어떤지 다시 한번 생각해봤다.
‘다른 무인들이 죽을 수도 있으니 숲에 불을 지르는 건 보류해야겠군.’
황천익이 백서휘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많은 일이 있었지.”
백서휘는 황천익에게 대충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설명해줬다.
“다른 무인들을 찾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건가?”
“나중에 암중단체 같은 곳에서 중원을 쳐들어오면 방어할 놈들이 없으니 내가 많이 바빠지겠지.”
“그러면 다른 무인들을 한곳에 모을 필요가 있겠군.”
“그렇지.”
“정파와 사파를 한곳에 모아두면 무조건 싸움이 벌어지게 될 것 같은데.”
“그게 걱정이긴 해. 뭔가 좋은 방법이 있으면 좋을 텐데…….”
“그 제갈진천이란 자에게 물으면 방도가 나오지 않겠는가.”
“좋은 생각이네. 빨리 가서 그놈한테 물어봐야겠다.”
백서휘와 황천익은 함께 모용중광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