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161화
백서휘와 제갈중헌의 관계는 친하게 지내는 이웃사촌만도 못했다.
사적으로는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을뿐더러, 제갈중헌에게 자그마한 관심도 가진 적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제갈중헌의 죽음은 아무런 감상도 주지 못했다.
‘두 사람은 나랑 다르겠지.’
슬쩍 옆을 보니 두 사람은 넋이 나간 얼굴로 가만히 서 있었다.
“다들 정신 안 차려?”
모용중광은 제갈진천보다는 더 빨리 정신을 차렸다.
고인과의 관계가 어땠는지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것 같았다.
‘동료가 죽는 것과 아버지가 죽는 것에는 확실히 슬픔의 깊이가 다르지.’
여기가 중원이었다면 제갈진천에게 마음을 추스를 시간을 줬겠지만, 애석하게도 이곳은 이공간이었다.
“제갈진천.”
여러 차례 이름을 불러도 제갈진천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백서휘는 그가 들으라는 듯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가슴에 품은 이야기를 그에게 가감 없이 해주었다.
“아버지가 죽어서 슬픈 건 알겠는데, 네가 이러고 있을수록 너희 가문 사람들이 입을 피해는 커질 거야.”
“가문…….”
부고 소식을 들은 이래 백서휘의 말에 반응을 보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제갈진천은 눈을 몇 차례 깜빡이더니 초점을 맞추고 백서휘를 바라봤다.
“이제 대화할 생각이 드나 보네.”
“……죄송합니다.”
“우보한테 아까 내가 물어보라고 했던 것들 한번 물어봐. 지금 어떤 상황에 부닥쳤는지도 물어보고.”
“알겠습니다.”
제갈진천은 백서휘가 시키는 대로 우보에게 지금 처한 상황과 보이는 지형적 특이점이 뭐가 있는지 물어봤다.
“혈교 놈들에게 쫓기는 중이고 화산(火山)을 오르고 있답니다.”
“화산이면 이 근방에 있다는 거네.”
백서휘는 기감을 최대한으로 넓게 펼친 채 화산을 향해 달려갔다.
반 각쯤 이동했을까?
기감의 끄트머리에 우보로 추정되는 이가 열 명의 인간에게 쫓기고 있었다.
백서휘는 우보로 추정되는 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연속된 전투로 인해 조금 피로했지만, 충분히 감수할 만한 일이었다.
‘늦지 않게 도착했으면 좋겠는데.’
하늘에 염원이 닿은 건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우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우보는 제갈중헌의 시신을 왼쪽 옆구리에 고정하고는 오른손으로 열심히 검을 휘둘렀다.
안타까운 건 그가 그렇게 계속 견제하는데도 혈교 쪽에서는 별로 위협으로 느끼지 않는다는 거였다.
‘제갈중헌의 시신을 땅바닥에 내려두고 싸우거나 아예 들고 오지를 않았으면 지금보다 쉽게 혈교의 무인들을 상대했을 텐데…….’
멍청한 자가 아니니 우보 역시 이 사실을 알고 있을 터.
‘도대체 시신은 왜 들고 온 거지? 아! 상대가 혈교라서 그렇구나.’
혈교는 무공만이 아니라 술법 면에서 굉장히 뛰어난 모습을 보여왔다.
그 술법 중에서 가장 뛰어난 건 그들의 자랑이라고 할 수 있는 ‘강시술’이었다.
만약의 일이지만 우보가 시신을 두고 왔다면 혈교 측에서는 제갈중헌을 강시로 되살려 욕보였을 것이다.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걸 방지하기 위해 우보는 제갈중헌의 시신을 들고 도망친 거로 보였다.
‘망자의 명예까지 지키려고 자기 목숨을 걸다니 진짜 엄청난 충심이잖아?’
백서휘는 그가 마음속에 품은 충심을 계속 이어갈 수 있게 도와줘야겠단 마음을 먹었다.
‘가라!’
혈교의 주술사가 있는 곳을 향해 투창을 던지듯 검을 날렸다.
쐐애애애액!
혈교 쪽 인간들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소리가 난 쪽으로 돌아갔다.
‘늦었어.’
소리에 반응을 보였을 때 이미 백서휘의 검은 당도해 있었다.
‘시작해!’
백서휘의 의념이 깃든 검은 혈교의 주술사를 향해 날아갔다.
진언을 외우던 혈교의 주술사는 다급한 얼굴로 방어하려고 했지만, 검이 찌르는 게 더 빨랐다.
푸욱!
혈교 주술사의 목에서 뿜어져 나온 엄청난 양의 피가 무인들의 얼굴과 상의를 적셨다.
“제기랄!”
“적이다!”
혈교의 무인들은 범인을 잡기 위해 검이 날아온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다 그들은 백서휘의 얼굴을 보게 됐다.
혈교의 신자들 사이에서 백서휘는 굉장히 유명했다.
아니, 유명할 수밖에 없었다.
단 한 사람에게 패배하면서 중원 정복의 꿈이 좌절됐기 때문이다.
“저, 저놈은……!”
“백서휘다!”
우보는 백서휘가 구하러 왔다는 걸 알게 되자 여유를 되찾았다.
“지긋지긋한 놈들. 없애도, 없애도 기어 나와서 사람 기분을 잡치게 만든다니까. 도대체 너희들이 바퀴벌레랑 다를 게 뭐야?”
백서휘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바퀴벌레? 이놈이 감히……!”
“여기서 ‘감히’를 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나뿐이야.”
“뭐?”
“그러니까 죽어라.”
백서휘는 격공장을 날려 건방진 혈교 무인의 머리를 수박처럼 터뜨렸다.
붉은 피와 하얀 뇌수, 뇌를 이루었던 것들이 파편이 되어 사방으로 튀었다.
“조, 조장!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 나도 몰라.”
혈교의 무인들은 죽음이 무서워 백서휘에게 덤비지 못했다.
“용기도 없고 자존심도 없구나. 덤비지 않을 거면 내가 간다!”
백서휘는 검을 조종해 혈교 무인 셋의 목을 한 번에 베어냈다.
조장은 잠시 고민하다 돌격 명령을 내리고 다른 곳으로 도망갔다.
“이야아앗!”
“죽어!”
백서휘는 무심한 얼굴로 난화만천수의 무리가 담긴 격공장을 날렸다.
휙휙휙휙!
격공장을 맞은 혈교 무인들은 사지가 끊어지고 몸통이 둘로 분리되어 죽었다.
‘남은 건 저놈뿐인가.’
백서휘가 조종하는 검이 도망간 조장의 목을 베어버리면서 전투가 싱겁게 끝이 났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백 관주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인사는 나중에 하고 일단 이동부터 하자.”
“예.”
백서휘는 우보의 속도에 맞춰서 제갈진천이 있는 곳까지 이동했다.
“우보!”
“주군!”
우보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제갈중헌의 최후가 어땠는지 전했다.
‘이공간에 관한 정보를 알아보려다가 혈교에게 걸려서 죽었다라…….’
우보의 신체가 보여주는 반응을 보면 제갈중헌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거짓을 말한 게 아니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진실만을 제갈진천에게 전했다.
“……가진바 무력이 부족하여 가주님을 지켜드리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크윽!”
“돌아가시면서 따로 남기신 말씀은 없으셨습니까?”
우보는 말을 하지 못하고 백서휘의 눈치를 봤다.
“내가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긴가? 원한다면 자리를 피해줄 수 있어.”
“아, 그냥 입을 가리고 전음으로 유언을 전하겠습니다.”
“끝나면 말해.”
백서휘가 멀찍이 떨어진 곳에 앉아서 체력을 회복했다.
그동안 제갈진천과 우보는 전음으로 대화를 나눴다.
일각쯤 지났을까.
우보가 백서휘에게 다가왔다.
“끝났나 보지?”
“네, 다 끝났습니다.”
“그럼 이제 앞으로의 일에 대해 상의를 해도 되겠네?”
“얼마든지 하셔도 됩니다.”
백서휘는 일행이 된 이들의 면면을 살폈다.
모용중광이야 화경의 경지에 오른 무인이니 주술사와 싸워도 죽을 것 같지는 않았다.
‘문제는 제갈진천과 우보인데…….’
다 같이 가면 둘을 보호하느라 제대로 싸우지 못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두고 가자니 그래도 죽을 것 같아서 마음이 걸렸다.
‘그냥 둘한테 선택을 맡기는 게 낫겠어.’
운명을 스스로 결정짓게 하는 편이 신경도 덜 쓰이고, 찝찝함도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곳을 탈출하려면 이공간을 유지하는 놈들을 잡아야 한다는 사실을 다들 알 거야. 그렇지?”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가 화산지대니까 여기서 제일 가까이 있는 주술사는 아마 화 속성을 가진 놈일 거야. 그놈한테 가는 것까지는 괜찮은데 싸울 때 아마 문제가 발생할 거야.”
“어떤 문제를 말씀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우보가 손을 들으며 말했다.
“내가 진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너랑 우보가 너무 약해.”
제갈진천과 우보가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백서휘는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다 쏟아내기로 마음먹었다.
“너흴 주술사가 있는 곳까지 데리고 가면 너희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모용중광이나 나나 잘 싸울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그렇다고 두고 가자니 다른 무인들한테 죽을 것 같아서 둘 중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제가 결정하면 되는 겁니까?”
“일단은 네가 저놈의 주군이니까 네게 선택을 맡길게.”
“음…….”
제갈진천은 잠시간 고민하다가 제갈중헌의 유언을 떠올렸다.
‘아버지는 앞으로 백 관주에 의해 무림이 재편될 테니, 백 관주 일파가 되라고 했어. 끝까지 백 관주를 따라간다.’
제갈진천은 무언가 큰 결정을 내린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따라가겠습니다. 그리고 저희도 무인입니다. 보호해주지 않으셔도 저희가 알아서 살아남겠습니다.”
“좋아, 그럼 화속성 주술사가 있는……. 제기랄! 그놈이 어딨는지 아는 사람?”
“진법으로 술법을 구조분석했을 때 모든 주술사의 위치를 알아두었습니다.”
“잘했어. 어디야?”
“불속성 주술사는 저 화산의 정상에 있습니다.”
“확실하지?”
“확실합니다. 믿으십시오.”
제갈진천이 신뢰감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 그럼 정상으로 가자고.”
네 사람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화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제기랄! 원래 재가 이렇게 많나? 숨을 못 쉬겠네.”
백서휘는 무복의 팔 부분을 찢어서 코와 입을 가리자,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행동했다.
‘좀만 더 올라가면 되겠군.’
그때 백서휘의 기감에 대단히 많은 수의 무인들이 잡혔다.
느껴지는 것만으로 분석하자면 혈교나 마교의 인물들은 아니었다.
‘어디 소속이지? 화기가 이렇게 느껴지는 놈들은 태양궁 이후로 처음……. 이놈들 주술사를 보호하기 위해 있는 무인들인가 보네. 저놈들을 살려보내면 어떤 짓을 할지 모르니까 하나도 빠짐없이 죽여야겠어. 그런데 주술사는 어디 있는 거지?’
기감이 꼭대기에 닿았는데도 주술사가 잡히지를 않았다.
이런 경우는 둘 중 하나였다.
진짜 없거나 어딘가에 숨어 있거나.
백서휘는 후자로 봤다.
‘자기가 죽으면 이공간이 깨진다는 걸 알 테니 꼭꼭 숨어서 안 나올지도 모르겠군.’
무인들과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져 왔다.
백서휘는 허리춤에 있는 검을 뽑아 들었다.
“전투 준비!”
긴장한 제갈진천은 꿀꺽 침을 삼키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서 오는 겁니까?”
“그래, 저기서 올 거야. 우리보다 못해도 열 배는 더 많으니까 긴장해.”
“거기서 거기인 놈인데 긴장할 필요가 있소?”
모용중광은 화경의 경지에 오른 자기 실력을 믿는지 아주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였다.
“주술사가 섞여 있을지도 몰라서 그런 거야. 주술사를 적으로 만나면 많이 피곤해지거든.”
주술사와 무인의 조합은 굉장히 효율적이고 무서웠다.
그래서 백서휘는 혈교 쪽과 마주하면 사람을 짜증 나게 만드는 주술사부터 죽이고 봤다.
‘저놈이 주술사네. 조심하라고 말을 해놔야겠어.’
백서휘는 전음으로 무리 속에 주술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무섭게 무인들이 당도했다.
“태양극염진(太陽極炎陳) 개진!”
우보와 제갈진천 때문에 머릿수가 부담스러운 상황에서 상대는 진법까지 쓰려고 했다.
‘쉽지 않겠어.’
백서휘의 얼굴이 석고상처럼 딱딱하게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