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160화
‘회천만일!’
백서휘는 온 힘을 담아 검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쳤다.
콰아앙!
진무룡은 팔을 교차해 검을 막아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힘을 완벽히 흘려내지 못했다.
그가 뒤로 몸을 날리며 신음하는 사이, 모용중광은 공격을 계속 받아내느라 여유가 없어 꺼내지 못했던 왼손에 들 검을 뽑았다.
“이 쌍검으로 네놈을 징치해 주겠다.”
진무룡은 모용중광이 여유를 부린다는 게 맘에 들지 않았다.
“살판났군. 살판났어. 지금까지 계속 밀리기만 하다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겨우 여유로워져 놓고 그런 말이 입에서 나오나? 부끄럽지도 않아? 내가 당신이었으면 지금 수치스러워서 얼굴을 들지도 못했을 거야.”
모용중광은 어금니가 부서지도록 이를 갈며 피가 안 통할 정도로 세게 검병을 움켜쥐었다.
“진가의 핏줄답지 않게 혀가 요사스럽네. 진가의 자손이 맞긴 한 거야? 아무리 봐도 출생의 비밀이 있는 것 같은데…….”
백서휘는 도발을 하며 모용중광이 체력을 회복할 시간을 벌었다.
“우리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군.”
“내가 뭐 틀린 말이라도 했나?”
“직계가 아닌 자는 가전무공을 배울 수 없다.”
“다들 속아서 가르쳐준 거 아니고?”
“도발이라고 할 만한 게 그런 것밖에 없다면 그냥 덤비기나 해라. 네놈들의 질긴 목숨을 내가 아주 끝장을 내 줄 테니까.”
“그러지.”
시간을 끌만큼 끌었으니 이젠 다시 전투에 나설 때가 됐다.
백서휘는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면서 구천현현보를 밟았다.
쭉쭉 앞으로 나아가던 그가 어느 순간 좌측으로 빠지더니 별안간 발지의천 초식을 펼쳤다.
당하는 입장에서 발지의천 초식은 아래에서 올려 치는데 머리 위에서 짓누르는 압력이 느껴지는 기묘한 초식이었다.
“제길!”
진무룡은 두 사람이 동시에 공격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를 악물고 짓누르는 압력에 대항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결국, 진무룡은 아주 잠시지만 몸의 중심이 흔들려 균형을 잃고 말았다.
“징치해 주마!”
기회를 엿보던 모용중광이 달려와 난도질하듯 검을 미친 듯이 내리쳤다.
진무룡은 전력으로 보법을 밟고, 주먹으로 쳐내고, 사방팔방으로 몸을 날리면서까지 저항했지만, 두 사람의 공격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는 모든 공격을 피하고 막을 수 없단 걸 인정했다.
마음가짐을 바꾼 그는 치명적인 공격만 피하고 나머지는 허용하면서 백서휘와 모용중광에게 반격했다.
‘차라리 도망을 가지.’
백서휘는 진무룡이 멍청한 선택을 했다고 생각하며 다시 한번 회천만일의 초식을 펼쳤다.
정상일 때도 힘을 흘리지 못했던 초식이었다.
지금처럼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는 견디지 못할 게 분명했다.
‘정답이었군.’
진무룡은 고통을 어떻게든 이겨내고, 충격도 흘려보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그리고 실패의 결과는 당연하게 진무룡의 죽음으로 귀결되었다.
“헉! 헉! 헉!”
모용중광이 숨을 헐떡이면서 그대로 주저앉았다.
일반적인 고수의 싸움도 그렇겠지만 화경의 경지 이상의 고수들 간의 싸움은 찰나의 순간에 어떤 판단을 내리느냐에 따라 삶과 죽음이 좌우된다.
그렇기에 싸움이 끝났을 때 피로도가 일반적인 무인과의 싸움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컸다.
물론, 백서휘에겐 일부만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그 역시도 피로도가 쌓이긴 했지만 심하진 않았다.
“잠깐 여기서 쉬고 있어.”
“어딜 가려는 거요?”
“갔다 와서 말해 줄게.”
백서휘는 한주희가 있는 곳을 향해 전력으로 응룡비천신법을 펼쳤다.
땅을 박찰 때마다 주변의 풍경들이 뒤로 휙휙 지나갔다.
‘보인다!’
한주희는 일곱 명의 혈교 무인에게 공격당하는 중이었다.
혈교의 주술사로 보이는 여자와 열 명의 무인은 이미 죽었는지 누워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힘겹게 막아내고 있지만, 이후에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아. 네 초식 내지는 다섯 초식 내로 한주희는 무너진다.’
문제는 머릿속으로 계산해 보니 기를 쓰고 달려도 네댓 초식 내에 한주희의 앞에 도착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거였다.
‘그렇다고 포기할 내가 아니지.’
사람을 구하면서 적을 죽인 일이 꽤 있다 보니 어지간한 상황은 다 겪어봤다.
지난 일들을 반추해 보니 바로 머릿속에 방법이 떠올랐다.
‘일단 저놈들의 관심을 나한테로 돌려야 돼.’
백서휘는 한주희에게 내공으로 귀를 보호하라는 전음을 날렸다.
왜 그러냐고 물어볼 법도 하지만 지금 한주희에게 그런 정신이 없었다.
그녀는 시키는 대로 내공으로 귀를 보호했다.
그걸 본 백서휘는 성대에 내공을 집중하여 파사(破邪)의 공능을 지닌 호왕후(虎王吼)를 펼쳤다.
“크헝헝!”
혈교의 무인들의 입과 귀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들은 인상을 쓰며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봤다.
관심을 돌리는 데는 성공했지만, 혈교 무인까지 거리가 꽤 남아 있었다.
“흐아앗!”
백서휘는 관심을 계속 끌려고 일부러 더 크게 기합 소리를 내며 검을 던졌다.
바람을 가르며 날아가던 검이 소용돌이처럼 회전하기 시작했다.
혈교의 무인들은 동시에 ‘이기어검술’이란 단어를 떠올렸다.
그리고 이어진 생각은 지금 달려오는 백서휘는 절대 이길 수 없는 강자란 것이었다.
혈교 무인들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다들 공황 상태에 빠져 아무것도 못 했지만, 한 명은 예외였다.
가장 나이 든 자는 경험이 많은지 악당으로서 노련한 모습을 보였다.
“저년을 잡아!”
“예?”
“저년을 인질로 잡으라고! 에잇!”
고막이 찢어져 명령을 제대로 알아먹지 못하자 나이 든 혈교 무인은 본인이 나서서 한주희를 인질로 붙잡으려고 했다.
한주희는 거리를 벌리기 위해 전력으로 보법을 밟았다.
덕분에 검이 날아들 때까지 시간을 버는 것이 가능했다.
백서휘가 의념으로 조종하는 검이 근접하자 나이 든 혈교 무인은 한주희를 인질로 잡는 걸 포기했다.
“그, 그냥 갈 테니 보내줘! 주, 죽은 건 우리 쪽 사람밖에 없잖아!”
혈교의 나이 든 무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검을 이리저리 휘둘렀다.
“싫어.”
쐐애애액! 푸우욱!
백서휘가 의념으로 조종하는 검은 나이 든 혈교 무인의 가슴을 꿰뚫고 지나갔다.
나머지 혈교 무인들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도망쳤다.
백서휘는 그들의 목을 베고 등을 꿰뚫어 모두 죽였다.
“관주님, 고마워요. 덕분에 살…….”
한주희가 말을 끝까지 다 뱉지 못하고 졸도해 버렸다.
백서휘는 그녀의 명문혈에 진기를 불어넣어 어디에 이상이 있는 건지 확인했다.
내공을 많이 소비해서 지친 것일 뿐, 다른 큰 문제는 없었다.
백서휘는 한주희를 업은 채 응룡비천신법을 펼쳐 모용중광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용중광의 얼굴까지 보일 만큼 가까워졌다.
‘다른 사람이 있네. 누구지?’
조금 더 가까이 간 백서휘는 같이 있는 인물이 누군지 바로 알아차렸다.
제갈세가의 소가주이자 무림맹에서 군사로 일하고 있는 제갈진천이었다.
두 사람은 심각한 얼굴로 대화를 하는 중이었다.
어찌나 집중했는지 그들은 자신이 가까이 오는 것도 몰랐다.
“뭘 그렇게 심각하게 얘기해?”
“맹주님이 이곳이 어딘지 알고 있느냐고 물으셔서 그걸 설명하는 중이었습니다.”
“이야기는 끝났나?”
“기본 개념은 설명이 끝났고, 이곳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설명은 아직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뭐야, 벌써 여기가 어떤 곳인지 파악을 했어?”
“예.”
“설명해 봐.”
“이곳은 다섯 명의 주술사가…….”
“그걸 어떻게 알았어?”
백서휘가 궁금증이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다 설명하면 복잡하니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진법을 이용해서 술법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는지 구조분석해 봤습니다.”
“그게 가능해? 완전히 다른 분야잖아.”
“술법과 진법은 비슷한 점도 많고, 무엇보다 본가에서 제가 취미로 연구했던 주제 중 하나가 진법으로 이공간을 구현하는 거라서 쉽게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렇군.”
“다시 설명으로 넘어가자면 이곳은 다섯 명의 초고위급 주술사가 힘을 합쳐 만들어낸 이공간입니다.”
“초고위급 주술사가 만들었어도 이정도 규모의 이공간을 유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사람들을 인신공양해서 공급할 기운을 만들고 수십 명의 하위급 주술사가 그 기운을 공급하는 통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인신공양?”
“예.”
백서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계속 설명하겠습니다. 이곳은 오행의 이치를 기반으로 이루어진 곳입니다.”
“다섯 명의 주술사가 합쳐서 만들기에 오행만큼 알맞은 게 없긴 하지. 진법도 그렇겠지만 완전한 이해 없이 다른 이치를 섞으면 무너지는 경우가 많으니까.”
“관주님의 말이 맞습니다. 이공간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본인들의 능력을 증폭하기 위해서는 오행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본인들의 능력? 이놈들 그냥 오행을 택한 게 아니라 자신 있는 술법이 오행의 속성과 연관되어 있는 건가?”
“구조분석 해본 바로는 관주님이 추측하신 것처럼 다섯 주술사는 오행의 이치만을 파온 자들 같습니다.”
“음…… 약점이나 쓰는 술법의 특징, 유파 같은 건 모르지?”
“제가 아는 건 조금 전에 말한 정보 정도가 전부입니다.”
백서휘는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생각에 잠겼다.
‘여기서 탈출하려면 좋으나 싫으나 주술사 놈들을 잡아야겠네.’
문제는 출입구와 뿔뿔이 떨어진 사람들의 위치를 모른다는 거였다.
출입구의 위치는 그래도 빨리 찾아낼 자신이 있었지만, 사람을 모으는 건 아니었다.
만약에라도 여기 있는 자들이 천갱 현상으로 인해 한순간에 증발하게 되면 중원은 ‘무주공산’이 될 가능성이 컸다.
무주공산이 되는 미래를 막거나 피하려면 사람을 모아가면서 움직여야 했다.
‘마교나 혈교의 무인은 죽어도 상관없지만…….’
백서휘는 우려하는 점을 먼저 제갈진천에게 말하고 어떤 식으로 움직여야 할지 의견을 구했다.
“……사람들을 전부 모아야 한단 말씀이십니까?”
“마교나 혈교 놈들 빼고.”
“그놈들을 빼도 사파 놈들이 여전히 남습니다.”
“그놈들도 데려가야 돼.”
제갈진천은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가 빠르게 지웠다.
“그렇다면 저희 가문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찾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래야 할 이유가 있나?”
“사람들을 모으는 게 더 빨라질 겁니다.”
“어떻게?”
“무림 곳곳에서 일이 터지는 걸 보고 개발한 비상용 연락 도구가 있습니다. 그걸 이용하면 이공간이든 중원이든 가리지 않고 연락할 수 있을 겁니다.”
“와! 괜찮은 도구네. 한번 연락할 수 있는 사람한테 다 연락해 봐.”
“……소가주이기는 하나, 군사로서 일하는 건 얼마 되지 않은 터라 제게 허락된 권한으로는 두 명이 한계입니다.”
“그 두 명이 누군데?”
“우보와 아버지입니다.”
“음…… 두 사람한테 다 연락해서 보이는 모든 걸 다 말해달라고 해.”
“보이는 모든 걸 말하는 게 어떤 뜻으로 말씀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특징이 될 만한 것들 말이야. 예를 들면 저기 있는 화산이 어느 정도 크기로 보이는지, 바위들이 어떤 식으로 모여 있는지.”
“아! 알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그들이 오면 어쩔 작정이신지…….”
제갈진천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일단은 이곳 주술사를 죽여야겠지.”
“여기가 화산지대인 걸 보면 오행 중 불을 관장하는 주술사가 담당하는 곳일 텐데, 죽이는 게 가능하시겠습니까?”
“장사에서 비슷한 유형의 적을 상대해 본 적이 있어.”
“아! 그 소문으로 났던 그 여자와의 싸움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응.”
“흠, 알겠습니다. 일단 이쪽으로 올 수 있는지 한번 물어보고 안 되면 관주님께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백서휘는 한주희를 살피면서 체력을 회복했다.
제갈진천은 소라껍데기를 오른쪽 귀와 입꼬리 쪽에 가져다 댔다.
“제 말 들리십니까? 아버님? 음…….”
연락이 안 되는 건지 제갈진천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잠깐만 기다리겠습니다.”
일각이 지나고, 이각이 지나도 소라껍데기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백서휘는 포기하고 한주희와 모용중광의 회복을 도왔다.
그때였다.
바닥에 놓아두었던 소라껍데기가 은은한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제갈진천은 조심스럽게 소라껍데기를 귀와 입 쪽으로 가져갔다.
“……아버님, 접니다! 뭐, 뭐라는 겁니까?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아버님이 유명을 달리했다니요!”
백서휘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제갈진천 쪽으로 돌아갔다.
제갈진천의 눈동자는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