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146화
“내 추측이 틀린 건가?”
“……네, 저한테는 살아 있는 사람이랑 귀신을 볼 수 있는 능력 말고는 없어요.”
진운은 뒤늦게 수습하려고 했지만 이미 너무 늦은 후였다.
“아니야. 이거 한번 봐봐. 첫 번째와 두 번째 변화 때는 몸을 젖혀서 피했고, 세 번째와 네 번째 변화 때는 목검을 휘둘러 걷어냈었지?”
백서휘는 진운이 비무 때 보여준 움직임을 정확하게 따라 했다.
진운은 자기와 똑같이 움직이는 그를 보면서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이건 네 경지에서는 펼치기 힘든 움직임이긴 한데 있을 수는 있는 일이니까 넘어갈게.”
백서휘는 진운이 밟았던 오행매화보의 방위를 그대로 밟았다.
“이게 네가 다섯 번째랑 여섯 번째 변화일 때 보여준 움직임인데 진짜 많이 양보해서 여기까지는 서강호나 너 정도의 재능을 가진 놈이면 가능은 해. 문제는 지금부터거든.”
백서휘는 진운보다 더 우아한 움직임으로 한 바퀴 돌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여기부터는 진짜 말이 안 돼. 네 나이대에 이게 되려면 나처럼 하늘이 내린 기재여야만 해.”
“……제가 관주님처럼 하늘이 내린 기재일 수도 있잖아요.”
진운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말이 안 되는 거야. 조금 전에 보여준 움직임은 기재인 것 말고도 다른 전제 조건이 확실하게 갖춰졌을 때 가능한 일이거든.”
“어떤 전제 조건이요?”
“첫째! 본인이 하늘이 내린 기재일 것, 둘째! 본신의 무위도 강하고 무공 교습까지 능한 스승을 만날 것. 셋째! 잠재된 재능이 폭발해서 네 나이대 일류 고수와 절정 고수 사이의 경지에 올라 있을 것. 이 셋 중에 네게 해당되는 조건이 있는지 한번 따져볼까?”
백서휘는 말을 하면서 손가락을 하나하나씩 펴 보이면서 모든 감각을 진운에게 집중시켰다.
“해당되는 건 많이 봐줘서 재능이 있다는 것뿐인데, 어떻게 그런 움직임을 펼칠 수 있었던 거야? 매화구변의 마지막 변화에서 보여준 움직임은 전제 조건이 갖춰진 열세 살의 ‘나’도 불가능한데 말이야.”
진운은 아까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정답으로 향하고 있단 걸 확신한 백서휘는 조금씩 구석으로 그를 몰아갔다.
“음…… 미래를 보는 건가? 아니, 그랬다면 지금 일어나는 일까지 예상했겠지? 그러니, 이건 후보에서 제외. 그럼 어떤 것 때문에 가능했을까? 설마 생각을 읽는 건가?”
흠칫 놀란 진운이 몸을 움찔거렸고 백서휘는 그의 그런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그래, 생각을 읽어내는 거였어. 근데 지금 내가 이 정도로 강하게 호기심을 보일 거란 점을 몰랐던 걸 보면…….”
백서휘는 ‘장이야!’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말을 계속 이어갔다.
“어떻게 움직일지 생각하면 그 생각을 읽어내는 것만 가능한가 보네? 맞아?”
진운은 눈동자를 굴려 좌우를 보더니, 우측으로 빠르게 도망갔다.
‘정답이었군.’
백서휘가 느긋하게 마음을 먹고 설렁설렁 뛰어갔다.
신법을 펼치지 않았는데도 워낙 그의 신체 능력이 대단해 금방 진운을 따라잡았다.
“왜 도망가는 거지?”
“히익!”
진운이 자지러지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구석으로 몰아가지 말았어야 했나?’
아직 열셋밖에 안 되는 아이를 너무 강하게 압박한 것 같아 후회됐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야.’
다시 돌이킬 수는 없으니 지금이라도 잘 타이르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네게 해를 끼칠 생각은 조금도 없으니까 진정 좀 하지 그래.”
친절하게 말한 게 먹혀든 건지, 아니면 도망쳐도 무조건 잡힐 거란 걸 알았는지, 진운은 가만히 멈춰 서서 숨을 골랐다.
“도망은 도대체 왜 간 거야?”
“관주님이 절 해칠 생각이 아예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캐물으시는 게 너무 무서워서 저도 모르게 그만…….”
“그건 사과하도록 하지. 처음 보는 형태의 능력이라 내가 너무 과하게 호기심을 드러냈어.”
말을 하던 백서휘는 진운의 말에서 이상한 점을 찾아냈다.
“잠깐만, 내가 해칠 생각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고? 어떻게? 내 행동만 읽어서는 불가능한 일인 것 같은데, 설마 행동만 읽는 게 아니라 다른 것도 가능한 거야?”
진운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백서휘는 그의 생각이 끝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어떻게 행동하려는지도 읽어낼 수 있고, 상대가 어떤 감정을 가졌는지도 알 수 있어요.”
“감정도 알 수 있다고? 좋아, 한번 맞춰봐. 내가 지금 어떤 감정인지.”
백서휘는 팔짱을 끼고 진운을 내려다봤다.
“놀랐다는 게 가장 커요.”
“그 정도는 나도 말할 수 있겠는데?”
“아주 조금이지만 불안과 공포도 있고요.”
“나는 불안과 공포란 걸 모르는 사람이야.”
“감정이 어떤 것에서 기인한 건지는 저도 알 수 없어요. 하지만 관주님이 저를 두려워해서 그런 게 맞을 거예요.”
“내가 너를 두려워한다고? 말도 안 돼.”
“제 능력을 아는 사람 중에는 다른 사람 앞에서는 멀쩡하다가 저만 보면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이유는 하나같이 똑같았고요.”
“뭐 때문에 그런 건데?”
“……제가 감정만이 아니라, 생각까지 완전히 읽어낼 수 있는 ‘괴물’일까 봐.”
아닌 척했지만 사실 백서휘도 진운이 말한 이유로 두려움과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속내를 가졌단 걸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이인 진운에게 들켰다는 게 부끄럽고 미안했다.
“미안하다.”
“이런 일이 한두 번 있었으면 모르겠는데 많이 있어서 괜찮아요.”
진운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다음 발로 흙바닥을 툭툭 차기 시작했다.
‘어떤 삶을 살았을지 대충 알겠군.’
진운을 위로하고 싶단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
백서휘는 정신을 집중해 두려움과 불안감을 정리했다.
‘의념’을 다루는 경지에 오른 그에게는 그렇게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자, 다시 한번 날 봐봐.”
“어?”
“조금 전이랑 다르게 두려움이랑 불안이 없지?”
진운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어떻게 하신 거예요?”
“널 두려워하지 않고 불안해하지 않게 된 거지.”
“다들 안 그러려고 노력해도 감정이 조금씩 남아 있었는데…….”
“원한다면 네가 평범한 사람은 어떤지 체험할 수 있게 해줄 수 있어.”
“어떻게요? 능력을 봉인해서요?”
“아니, 잘 봐.”
백서휘는 정신계 술법을 막을 때 쓰는 방법을 응용했다.
의념을 발휘해 정신에 벽을 세우기 시작하자 진운의 표정이 급변했다.
“어?!”
“왜?”
“점점 흐릿하게 보이더니 이제는 아예 안 보여요.”
“기분이 어때?”
“……이젠 제가 두렵고 불안해요.”
뎅뎅뎅!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궁금증도 해결됐고 진운도 수업을 받아야 하니 이쯤에서 헤어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업 시작했네, 가봐.”
“네?”
“관원으로서의 의무를 다해야지.”
“진짜 가요?”
“왜? 땡땡이치려고?”
진운은 입술을 달싹거리며 우물쭈물 모습을 보였다.
“할 말이 남았어?”
“아니요. 그게 아니라 한 수…….”
진운은 백서휘가 어떤 감정인지 알기 위해 열심히 봤지만, 정신 방벽을 뚫어내지는 못하였다.
“저는 이만 가볼게요.”
“그래, 잘 가라.”
진운은 한숨을 크게 쉬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 터덜터덜 걸어갔다.
백서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진운이 뭘 원하는지는 그도 대충 알고 있었다.
비밀을 숨김없이 말했으니 그 대가로 자신의 가르침을 받길 원한 것 같았다.
‘어떤 놈인지 더 지켜보고 결정해야지.’
진운이 나쁜 모습을 보여준다면 한 수 가르침을 주고 끝내고, 좋은 모습을 보여준다면 출신성분을 조사해본 후 제자로 삼을 생각이었다.
‘얼마나 멀리서 보이는지 물어보는 걸 깜빡했네. 뭐, 아주 멀리서 지켜보면 그놈도 눈치채진 못하겠지.’
* * *
다음 날.
백서휘는 한참 거리가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진운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했다.
‘저놈 비무했던 그놈 아닌가?’
현무반의 서열 2위가 글씨를 쓰다가 잘 안 풀리는지 마구잡이로 붓을 놀리다 종이를 찢어 버렸다.
“야!”
“나?”
왜소한 아이가 손가락으로 자기를 가리켰다.
“그래, 너. 여기 있는 쓰레기들 좀 버리고 와봐.”
왜소한 아이는 찢어진 종이를 주워다가 쓰레기통으로 가져가려 했다.
“잠깐, 멈춰봐.”
“……왜?”
“그냥 가지 말고 이 잔에 물도 좀 떠 와.”
서열 2위는 귀찮다는 듯한 얼굴로 왜소한 아이에게 잔을 건넸다.
왜소한 아이는 한 손에는 종이를 쥐고, 다른 한 손에는 잔을 들고 쓰레기통 쪽으로 걸어가려 했다.
진운은 왜소한 아이를 보는 서열 2위에게서 ‘경멸’의 감정을 읽어냈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 서열 2위에게서 분노를 느낀 진운은 ‘이곳에서마저 피하고 싶지 않아’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쾅!
책상을 크게 치자 서열 2위만이 아니라 모든 이들의 시선이 진운에게로 꽂혔다.
“다른 애 시키지 말고 네가 해.”
“나보고 하는 말이야?”
“그래.”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서열 2위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네가 만든 쓰레기고, 네가 먹을 물이니까 다른 애들 시키지 말고 네가 하라고.”
“하위 서열인 애들을 시키는 게 부당하다, 이거야?”
“그래.”
“그럼 나 말고 관주님한테 따져. 이 규칙을 만든 건 다른 사람도 아니고 관주님일 테니까. 왜? 무서워서 못 따지겠어? 그럼 너도 이 규칙에 순응해!”
진운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구절을 떠올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말 그러길 원해?”
“그래, 순응해서 너도 하위 서열 애들 시켜.”
“좋아.”
진운은 왜소한 아이가 쥐고 있던 쓰레기와 잔을 뺏어 서열 2위의 책상에 올려놨다.
“뭐 하는 거야?”
“쓰레기 버린 후에 목마르면 물 마시러 가.”
“뭐라고?”
“하위 서열을 시켜도 된다는 규칙에 순응하라고 그랬잖아. 그래서 순응한 것뿐이야.”
쾅!
서열 2위가 책상을 발로 걷어차며 일어났다.
진운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를 노려봤다.
‘일단, 성격 면에서는 합격이야.’
백서휘는 미소 띤 얼굴로 진운과 서열 2위의 대치를 바라봤다.
“왜? 내 명령은 못 듣겠어?”
“나 ‘석 씨’야!”
“그래서?”
“조정에 우리 가문 사람들이 얼마나 출사하였는지 알아?”
“네가 석 씨든 뭐든 상관없어. 쓰레기 버린 후에 물이나 마시러 가.”
“운 좋게 한 번 이겼다고 상전 노릇을 하려고 하네.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운인지 실력인지는 다시 싸워보면 알겠지.”
“그래? 그럼 밖으로 따라 나와.”
서열 2위와 진운이 건물 밖으로 나갔다.
현무반에 속한 아이들이 싸움 구경을 하기 위해 그들을 쫓아갔다.
“내가 이기면 너는 이제부터 최하위 서열이 돼서 다른 애들의 명령을 따라야 돼. 알았어?”
서열 2위가 목검의 끝을 진운에게 겨누며 말했다.
“좋아, 네가 지면 너도 그렇게 해.”
“그러지.”
멀찍이 숨어 있던 백서휘가 가까이 오며 모습을 드러냈다.
“헉!”
“과, 관주님이다!”
진운과 서열 2위가 깜짝 놀란 얼굴로 귀신 보듯 백서휘를 바라봤다.
“하나만 더 추가해도 될까?”
“어, 어떤 걸 추가하시겠다는 건지…….”
서열 2위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떠듬떠듬 말했다.
“승자가 되면 내게 한 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는 권리를 추가하고 싶은데, 안 되나?”
“됩니다! 돼요! 얼마든지 됩니다!”
서열 2위가 반색하며 좋아했다.
백서휘는 진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쪽은 어떻지?”
“잠시만 시간을…….”
진운은 백서휘의 감정을 읽으려고 시도했지만 정신 방벽에 막혀 실패하고 말았다.
“응하지 않을 건가?”
“……응할게요.”
“심판도 내가 봐도 되겠지?”
“네!”
“비무의 규칙은 두 개뿐이다. 학무관에서 배운 무공만 쓸 것, 독과 암기는 사용하지 말 것.”
“그건……!”
백서휘는 깜짝 놀라는 둘을 보며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