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145화
“규칙은 알고 있을 테니 설명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겠어.”
“그 규칙에 관한 일로 사범님께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서열 2위가 운학에게 말을 올렸다.
“어떤 말이 하고 싶은 건데?”
“학무관의 무공만을 써야 한다는 규칙과 독과 암기를 쓰면 안 된다는 규칙을 제외한 모든 규칙을 풀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안 돼. 너무 위험해.”
“위험하면 사범님이 중간에 막아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절대 허락할 수 없는 일이니까 이 이야기는 이쯤 해둬.”
그때 조용히 서 있던 진운이 입을 열었다.
“허락해 주세요.”
“뭐?”
운학이 단호하게 안 된다고 말하려는 순간, 지켜보던 백서휘에게서 전음이 날아왔다.
『허락해. 여차하면 내가 끼어들 테니까.』
운학도 눈치가 있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백서휘를 찾거나 깜짝 놀란 표정은 짓지 않았다.
“……두 사람, 오전에 본 학문 시험 성적이 동률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예.”
“성적이 동률이니 이번 비무에서 누가 이기느냐에 따라 다음 달 반장이 누군지 정해지겠네?”
“예.”
“좋아, 양쪽 모두가 합의한 일이고 반장 자리가 걸린 승부이니, 이번만 특별히 허락하겠어. 다음부터는 절대 이런 일 없을 줄 알아. 알았어?”
“예!”
백서휘가 허락한 이유를 모르는 운학은 두 아이의 대답을 들으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둘 다 제자리로.”
진운이 좌측으로, 서열 2위가 우측으로 걸어갔다.
백서휘는 냉정한 시선으로 두 아이를 비교해 봤다.
‘둘 다 열셋에서 열넷쯤 되는 것 같은데…….’
근골만큼이나 초식의 완성도와 내공이 승부에 큰 영향을 끼치는 나이대였다.
그런 의미에서 두 사람을 보면 서강호의 근골에 비견될 만큼 좋았다.
무가에서 태어나 잘 먹고, 잘 단련한 티가 났다.
‘기술적인 면에서는 좌측에 있는 진운 쪽이 훨씬 좋다.’
진운은 자연스러운 자세로 서열 2위쪽에 목검을 겨누고 있었다.
그에 반해 서열 2위는 불필요한 힘이 곳곳에 들어가 자세가 유연하지 못했다.
‘내공은 2위쪽이 더 많아.’
어릴 때 질 좋은 영약을 먹었거나 벌모세수를 받았을 가능성이 컸다.
‘특이사항이 있다면 진운 쪽이 내가 숨어 있는 걸 알아차렸다는 건데…….’
계속 생각해봤지만 어떻게 알아낸 건지 그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은형잠종술에도 약점이 있는 건가? 음…… 비무가 끝나고 저놈에게 물어보면 되겠지.’
백서휘는 호기심 어린 얼굴로 비무대 위를 바라봤다.
비무대 위에는 두 아이가 서로를 노려보며 운학의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작!”
서열 2위가 보법도 밟지 않고 달려들어 목검을 휘둘렀다.
진운은 고개를 돌리는 것만으로 공격을 피했다.
“그냥 막무가내 공격은 안 당한다, 이거지? 좋아, 한번 해보자고.”
서열 2위는 비무대 위를 빙글빙글 돌다가 갑자기 진운에게 달려들었다.
조금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오행매화보(五行梅花步)를 펼치고 있다는 거였다.
그와 다르게 진운은 목검을 겨눈 자세 그대로 멈춰 서 있었다.
겁을 먹고 얼어 버린 거냐면 그건 또 아닌 것 같았다.
진운의 눈은 날카로웠고 조금의 두려움도 찾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의 거리가 완전히 좁혀졌다.
서열 2위는 매화구변(梅花九變)의 초식을 펼쳤다.
‘어떻게 대응하려나.’
백서휘는 진운이 보여주는 움직임에 주목했다.
진운은 첫 번째 변화는 좌측으로 몸을 젖혀 피했고, 두 번째 변화는 우측으로 몸을 젖혀 피했다.
세 번째와 네 번째 변화는 목검으로 반원을 그려 걷어내듯이 튕겨냈다.
‘이상하군. 진운이란 놈의 실력이 뛰어나긴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닌데…….’
진운은 공격을 보고 피하는 게 아니라 어떤 식으로 나올지 알고 피하는 것처럼 움직였다.
운학 역시 그처럼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는지 고개를 연신 갸웃거렸다.
‘계속 지켜보자.’
진운은 다섯 번째 변화와 여섯 번째를 빠르게 오행매화보를 밟아 피했다.
이어진 일곱 번째와 여덟 번째 변화는 춤을 추는 것처럼 우아하게 회전해 공격을 무위로 돌렸다.
그때 백서휘의 눈에 진운의 안광이 미약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 게 들어왔다.
까드득!
서열 2위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며 어금니를 악물고 아홉 번째 변화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진운은 서열 2위의 손에서 출수되기도 전에 뒤로 한 발짝 먼저 물러나 공격을 피했다.
그다음 앞으로 힘차게 발을 내디디면서 목검을 든 팔을 쭉 내뻗었다.
쐐애애액!
알맞은 시기에 알맞은 위치를 찌르니 단순한 공격임에도 점창파의 후예사일(后羿射日)에 버금갈 만큼 매서운 한 수가 되었다.
서열 2위로서는 조금도 예상치 못했던 공격이었다.
꼼짝없이 당했다고 생각하는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항복할 거지?”
진운이 목검을 서열 2위의 목에 겨눈 채 말했다.
서열 2위는 아무런 통증이 없는 목을 매만지며 눈을 천천히 떴다.
“항복할 거냐고 물었어.”
“……할게.”
진운이 시선을 옮겨 운학 쪽을 바라봤다.
“승자는 진운! 1위와 2위 간의 순위 변동은 없다!”
진운은 목검을 회수해서 다시 허리에 찼다.
서열 2위는 목을 푹 숙이고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비무대를 내려갔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사범님! 고생하셨습니다!”
현무반에 속한 관원들이 한목소리로 외치고는 기숙사로 돌아갔다.
진운 역시 다른 관원들을 따라가려 했다.
『나랑 얘기 좀 하자.』
진운은 어디서 전음이 날아온지 몰라 주변을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쪼그려 앉아 있는 백서휘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내가 보낸 거 맞다. 아! 지금은 다른 관원이 있으니 바로 이리로 오지 말고 일각 이따가 저 건물 뒤편으로 와.』
진운은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는 다른 이들처럼 기숙사 쪽으로 걸어가는 척하다가 다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백서휘는 현무반의 모든 관원이 기숙사로 돌아가자 은형잠종술을 풀었다.
운학이 갑자기 옆에 나타난 그를 보고 놀랐다가 반색했다.
‘그래, 이렇게 놀라야지.’
운학도 자신을 눈치 못 챘는데 그보다 못한 진운이 눈치챘다는 건 확실히 이상했다.
“계속 옆에 있으셨던 겁니까?”
“응.”
“허허.”
“왜 그렇게 웃어?”
“관주님과 저 사이에 차이가 아득하다는 사실을 또 한 번 깨달아서요.”
“노력하면 조금은 따라잡을 수 있긴 할 거야.”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나지를 않네요.”
“시간이 모자라긴 하지만 그래도 아주 손해만 보는 건 아니잖아? 가르치면서 깨닫는 게 있을 텐데?”
“그 깨닫는 걸 소화할 시간이…….”
운학이 이런 처지가 된 것에 모든 책임은 백서휘에게 있었다.
백서휘는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가 운학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 매형이 사범을 더 구하고 있으니까 조금만 더 참아줘.”
“금방 구해지겠죠?”
“……그, 그러겠지.”
운학 정도 되는 고수를 사범으로 구하는 건 사실 힘든 일이었다.
두 사람 다 이 사실을 잘 알았지만, 굳이 입에 올리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아까는 왜 그런 비무를 하게 한 겁니까?”
“너도 알고 있겠지만 내가 바빠서 관원들이 입관하는 걸 신경 못 썼잖아. 그래서 너나 다른 사범이 뽑은 관원들의 수준을 보고 싶었어. 특히, 진운이라 놈.”
“예? 진운이요?”
“그래, 그놈한테 뭔가가 있어.”
“뭔가가 있다는 건…….”
“너도 비무를 보면서 느꼈을 거 아니야. 무언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확실히 이상하긴 했습니다. 어떤 게 이상한 건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요.”
“그놈 상대가 어떻게 공격할지 알고 피하는 것처럼 움직이더군.”
“그게 이상한 겁니까? 저나 관주님만이 아니라 다른 무인들도 공격을 예측해서 피하지 않습니까.”
“예측해서 피한 게 아니라 ‘알고’ 피한 게 이상하다는 거야. 그놈이 마지막에 보여준 움직임을 생각해 봐. 그놈은 아홉 번째 변화를 보여주기도 전에 뒤로 한 발짝 먼저 물러나 공격을 피해 버렸어.”
“어? 확실히 이상하네요. 보고 피하거나 예측하고 피한다면 그런 움직임을 보여줄 수가 없는데…….”
“더 이상한 걸 알려줄까? 너도 내가 옆에 있단 걸 눈치 못 챘는데 그놈은 내가 여기 있단 걸 정확히 알고 있었어.”
“말도 안 됩니다. 진운에게 뭔가 있는 건 맞지만 경지가 그리 낮은데 관주님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건…….”
“여러 번 눈이 마주쳤어. 비무대를 올라갈 때 한 번, 올라간 이후에 한 번, 조금 전에 그놈한테 전음을 보냈을 때 한 번.”
“정말입니까?”
“정말이야.”
운학이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관주님도 열세 살에는 불가능했을 일 아닙니까?”
“그래서 한번 물어보려고. 어떻게 알아차린 거냐고.”
“물어보시고 제가 알아야 할 사실이 있다면 알려주십시오.”
“그러지.”
백서휘는 진운과 약속했던 학무관의 학문 수업이 이루어지는 건물 뒤편으로 이동했다.
그것도 아까처럼 은형잠종술을 펼친 채로.
‘눈치챌까?’
건물 뒤편으로 들어서자마자 진운이 백서휘를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어떻게 알았지?”
“……그냥 보여서요.”
“솔직히 말해 줬으면 좋겠는데.”
“솔직히 말한 건데요.”
“너도 아까 봐서 알겠지만 다른 사람은 내 위치를 아무도 눈치 못 챘어. 사범인 운학마저도 말이야. 그런데도 알아차렸다는 건 동술 같은 걸 배웠다는 소리인데…….”
진운은 고개를 푹 숙이고 조개처럼 입을 앙다물었다.
백서휘의 머리가 빠른 속도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내가 이곳에 들어서자마자 알아차린 걸 보면 필요할 때마다 발동하는 식이 아니라 상시발동형일 거야. 그리고 상시발동하는 형식이면 진기가 항상 그 주위에 머물 테고, 그 진기의 움직임을 본다면 대충 어떤 식으로 펼쳐지는지 알 수 있겠지.’
백서휘는 아난타가 알려준 지식대로 왼쪽 눈만 용인화(龍人化)했다.
감정이 격해질 때 변하는 것과 다르게 그의 왼쪽 눈은 한 번에 홍옥빛으로 변했다.
다량의 진기가 모여 있긴 한데 예상했던 것과 신체 부위가 달랐다.
눈과 그 주위에 진기가 모여 있지 않고 백회혈과 이마 정중앙에 진기가 모여 있었다.
‘이건 동술이라기 보다는 백회혈이 열리고 상단전이 트여서 생기는 신통력에 더 가깝다고 봐야겠는데?’
백서휘는 계속 진운이 가진 진기의 변화를 관찰하면서 입을 열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건지 말해 줄 수 있나?”
계속 묻는데도 진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를 겁박하거나 해코지를 하려는 게 아니야. 내 무공의 약점을 없애기 위해 정보가 필요해서 그런 거야. 너도 무인이니까 알 거 아니야. 약점을 보완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 건지를.”
“정말이에요?”
“그래.”
잠시 망설이던 진운이 곧 입을 열었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그런 게 보였어요.”
“그런 거라면 뭘 말하는 거야?”
“영혼이요.”
“귀신을 본다고?”
“비슷하면서 달라요. 살아 있는 사람의 영혼도 보이거든요.”
“그럼 나를 찾은 것도 그 영혼이 보이기 때문이란 거야?”
“네, 귀신이면 희미해야 하는데, 살아 있는 사람의 혼은 또렷하거든요. 그래서 가장 처음에 관주님을 봤을 때는 귀신이라고 생각했어요.”
“언제 내가 살아 있는 사람이란 걸 알아차린 건데?”
“몇 초 후요. 그다음에 얼굴을 확인하고 관주님이란 걸 알게 됐어요. 그런데 다른 애들이나 운학 사범님의 반응이 없어서…….”
“내가 다른 사람들 몰래 숨어 있단 걸 알게 된 거다?”
“네.”
“그런데 말이야. 비무 때 보여준 움직임을 보면 죽은 사람이나 살아 있는 사람의 혼만 보는 게 아닌 것 같던데…….”
백서휘의 날카로운 질문에 진운은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