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141화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새벽.
백서휘와 백은하는 학무관을 향해 바삐 걸어갔다.
이렇게 일찍 가는 건 행사가 열리기 전에 예행연습을 한번 해보기 위해서였다.
학무관에 도착하니 금태평과 서강호가 낑낑거리며 화환을 입구에 옮기고 있었다.
“그 화환들은 뭐냐?”
“개관 겸 입관을 축하한다고 중원 각지에서 보낸 화환들이라던데요.”
“그래?”
백서휘는 눈을 빠르게 움직이며 화환을 보낸 사람들이 누가 있는지 확인했다.
정파에서는 보타문의 장문인과 한가장의 장주, 사대세가의 가주들, 화산파의 장문인, 개방의 용두방주, 무림맹의 맹주가 화환을 보냈고, 사파에서는 사도련 련주와 하오문의 문주가 화환을 보냈다.
‘이게 전부인가? 아, 저기 또 있구나.’
만복상단이나 금와전장, 흑웅표국 같이 상계(商界)에서 온 것은 또 따로 모아서 전시 중이었다.
‘이걸 보낸 곳에서 다 방문하지는 않을 테고. 소수의 사람이 왔을 건데 누가 내빈으로 오려나.’
남궁민의 말로는 올 사람이 많다고 했지만, 완전히 믿지는 않았다.
그들 나름대로 바빠서 직접 찾아와 축하할 시간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개파대전이라면야 무게감 있는 곳이니 오겠지만 무학관 개관 겸 입관 행사는 내빈으로 오기 힘들겠지.’
백서휘는 기대감 따윈 조금도 품지 않고 백은하와 함께 정하진을 만나러 갔다.
정하진이 하나부터 열까지를 모두 점검하고 있었다.
그는 다른 곳으로 시야를 옮기다가 처남과 아내가 서 있는 걸 발견했다.
“일이 바빠 온지도 모르고 있었네. 언제쯤 온 건가?”
“일각쯤 된 것 같습니다.”
“말했으면 바로 알았을 진데…….”
“너무 바빠 보여서 인사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바쁘긴 하지만 인사할 시간도 없지는 않다네. 다음부터는 왔으면 바로 말하게나.”
“알겠습니다. 그러도록 하죠.”
“이 시간에 찾아온 건 예행연습 때문인 건가?”
“일단은 그렇습니다. 다들 바쁜데 따로 시간 내서 연습을 또 시킨다는 게 미안하지만, 식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아야 제가 실수를 안 할 것 같아서요.”
“그럼 식순이 어떤지부터 설명하고 바로 연습에 들어가면 되겠나?”
“그래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가장 처음엔 식전 행사로 하오문에서 보내준 악사들의 음악이랑 무희들의 춤으로 분위기를 끌어올릴 거네.”
“무희들의 춤이 어울릴 행사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일반적인 연회에서 보는 춤을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과는 좀 많이 다른 춤이라고 말하고 싶네.”
“음……. 그러면 매형을 믿고 무희들의 공연을 보도록 하죠. 다음은 뭡니까?”
정하진은 식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걸리는 게 있습니다.”
“어떤 부분이 걸리는가?”
“싸움이 일어날 것 같아서 그러는데 맹주랑 련주의 축사는 빼면 안 됩니까?”
“……안 그래도 그게 문제긴 했네. 둘의 순서를 어떻게 정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무조건 하겠다고 고집을 부린 거라 내가 마음대로 뺄 수가 없었다네.”
정하진은 진심으로 난감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사람들은 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축사는 다른 사람이 하는 것으로 하죠.”
“누가 하는 게 좋겠나?”
“따로 또 준비된 사람이 없습니까? 없다면 그냥 삭제하는 거로 가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따로 준비된 사람이 없으니 삭제하는 게 낫겠군. 또 걸리는 점은 없는가?”
“다른 건 없습니다.”
“그럼 식순은 축사를 빼고 가는 것으로 정하겠네.”
“예.”
“연습은 지금 바로 들어가겠는가?”
“가능하다면 바로 하면 좋겠습니다. 환영사 말하는 연습은 여러 번 더 하고요.”
“그럼, 사람들 불러 모아서 최종 연습을 하겠네.”
백서휘가 고개를 끄덕이자 정하진이 사람들을 다 모아왔다.
그다음 실제처럼 예행연습을 하고는 미진한 점을 지적했다.
“조금 있으면 시작이네.”
“그러게.”
백서휘와 백은하는 창밖에 해가 떠오르는 걸 잠시간 서서 지켜봤다.
“하늘에서 아버지랑 어머니가 좋아하겠지?”
“좋아할 거야.”
그때 준비가 끝났다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안 떨려?”
“누난 떨려?”
백은하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별일 없을 거야. 분탕질하려던 놈들도 모두 잡아 죽였고 준비도 열심히 했으니까.”
“무슨 일이 터지면…….”
“그럴 일 없을 거니까 괜한 걱정하지 말고 오늘을 즐기자.”
“그래.”
백서휘가 믿음직한 모습을 보여주자 백은하 얼굴의 혈색이 조금 돌아왔다.
드르르륵!
닫아놓았던 학무관의 문이 열리고 내빈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기대하지 않고 봤는데 제법 사람이 많았다.
남궁민의 말이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내비들은 정파와 사파가 나뉘어서 학무관의 강당으로 왔다.
백서휘가 분노하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다들 알고 있기에 그들은 서로에게 관심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오랜만이야. 다들……. 아, 처음 보는 사람들도 있네. 왼쪽에서부터 오른쪽으로 가면서 자기소개 좀 해주겠어?”
백서휘는 말을 하면서 친구인 황석준에게 눈인사를 했다.
황석준도 반가운 얼굴로 말없이 손을 흔들었다.
“나부터 하면 되나?”
늙은 거지가 자기를 가리키며 말하자 백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개방의 용두방주, 청랑신개(靑狼神丐)라고 하오.”
“나는 보타문의 문주직을 맡은 검후 성연하예요.”
.
.
.
“역시 주인공은 마지막이지. 다들 날 잘 알고 있겠지만 굳이 소개하자면 나는 사도련주 종리혁이다. 하하하!”
백서휘는 청랑신개처럼 처음 보는 자들의 이름과 얼굴을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다들 와줘서 고마워.”
백서휘의 반말에 청랑신개가 살짝 불편한 모습을 보였지만 그걸 직접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고맙단 말을 좀 길게 하고 싶은데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어렵겠네. 자기주장이 아주 강하신 우리 맹주님이랑 련주님!”
모용중광과 종리혁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거 느꼈다.
“……그, 그 해야 할 일이라는 게 내가 연관되어 있는 일이오?”
“우리 맹주님과 련주님은 잔말 말고 나를 따라와. 확 진짜!”
두 사람은 자칫 잘못하면 백서휘에게 맞는 모습이 다른 사람에게 공개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알겠소.”
“안 그래도 조용한 곳에서 긴히 이야기할 게 있긴 했다. 하하!”
정파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게 걸리는지 종리혁은 모용중광과 다르게 되지도 않는 허세를 부렸다.
“잔말 말라고 했지?”
백서휘의 눈에서 살기가 피어오르자 모용중광과 종리혁은 입을 다물고 따라갔다.
“어디까지 가려는 건지 알려주면 안 되나?”
“종리혁 지금 경고 누적된 게 두 개째야. 세 개까지 쌓이면 그때는 내가 어떤 짓을 할지 몰라.”
“이, 입 다물고 가겠다.”
회의실에 도착하자 백서휘는 문을 활짝 열었다.
모용중광과 종리혁은 군말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뭐 때문에 온 건지는 다들 알 거야.”
모용중광과 종리혁은 서로 눈을 맞추었다가 다시 백서휘를 봤다.
“뭐야, 모르는 거야? 하! 좋아, 설명한다. 내가 이곳으로 당신들을 데리고 온 건 축사 때문이야.”
“축사가 문제가 될 일인가?”
“둘 다 무조건 축사를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며? 무공도 모르는 사람을 사이에 두고 뭐 하는 짓이야. 어?”
백서휘의 말을 듣고 나서야 두 사람은 왜 이곳까지 오게 된 건지를 알아차렸다.
“오, 오해가 있다. 나는 모용중광 이놈이 축사를 읽을 거라는 사실을 몰랐어.”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거야? 쓰읍! 아무리 봐도 아닌데…….”
“추, 축사를 읽을 다른 사람이 있다고 그래서 내가 대신하면 안 되겠냐고 말한 게 있긴 한데 그건…….”
“그래, 그렇지. 우리 매형이 웬만해선 그럴 사람이 아닌데 되게 난감해하더라고.”
“악의를 가지고 그런 게 아니야. 내 딸의 상사의 매형한테 일부러 그럴 리는 없잖아.”
“그래, 돌아버린 게 아닌 이상 그럴 리 없지. 악의는 없었다는 말 믿어주도록 하겠어.”
“나, 나도 악의 같은 것 없었소. 축하하고 싶다는 마음이 커서 그런 것뿐이오. 관주께서 아량을 베풀어주면 좋겠소.”
가만히 있던 모용중광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는 허겁지겁 말을 꺼냈다.
“후~ 그래, 오늘이 진짜 좋은 날이고, 피를 보고 싶지 않으니까 이번엔 그냥 넘어가는데, 내 가족들 건드리거나 곤란하게 하면 진짜 그때는……. 알지?”
모용중광과 종리혁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다시 있던 곳으로 돌아가자고.”
세 사람은 다시 강당으로 돌아왔다.
“조금 있으면 행사 시작이니까 다들 뒤로 가 있어.”
모용중광과 종리혁은 무대 뒤로 가면서 전음으로 티격태격했다.
『내가 축사를 읽겠다고 한 것을 몰랐다는 게 사실이오?』
『왜? 사실이 아니면 고자질이라도 하게?』
『내가 못 할 것 같소?』
『내가 몰랐던 건 사실이니까 한번 고자질해볼 테면 해봐. 고자야!』
『뭐요? 감히 누굴 보고 고자라고! 당신에게 생사결을 신청하겠소.』
『오늘 같은 날 피를 보면 누가 참 좋아하겠다. 안 그래, 고자야?』
모용중광은 종리혁의 도발에도 검을 뽑지 못하였다.
화경 내에서의 경지 차이도 경지 차이지만 백서휘의 진노를 감당치 못할 것 같은 게 더 컸다.
종리혁이 칼을 뽑게 만들어 백서휘에게 혼나게 만들겠다고 모용중광이 결심한 사이, 백서휘는 정하진에게로 갔다.
“축사 문제 잘 해결했습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관원들과 보호자들의 강당으로 출입할 수 있게 해도 되겠군.”
“네, 그러셔도 됩니다.”
관원들과 보호자들이 속속 들어와 의에 착석했다.
백서휘는 그들의 모습을 눈에 새겨놓고는 무대 뒤편으로 걸어갔다.
“행사 시작까지 반각 전!”
“반각 전입니다!”
정하진이 식순과 해야 할 말이 적혀 있는 종이를 가지고 진행자 자리에 섰다.
그는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고는 확성 장치에 대고 힘차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개관 및 입관식을 시작하기 전 식전 공연을 감상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들 많은 박수와 환호 부탁드립니다.”
정하진의 말대로 일반적인 연회에서 볼 법한 음악과 춤이 아니었다.
보는 내내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좋은 일만 있을 거란 희망과 어떠한 고난도 헤쳐 나갈 수 있는 용기가 마음속에 자리를 잡았다.
“내·외빈이 입장하는 대로 학무관의 개관식 겸 제1회 입관식을 거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모용중광과 종리혁이 동시에 나와 양 끝에 착석했다.
관원들의 보호자로 온 사람들은 그들의 면면을 보고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말도 안 돼. 맹주랑 련주가 한자리에 앉아 있다고? 종전 협상 때도 같이 있지를 않았다고 들었는데?”
“엄청난 곳이라고 소문을 듣긴 했지만 맹주와 련주를 동시에 초대해서 내빈석에 앉힐 줄이야.”
“내 생전에 두 사람이 동석하는 걸 보게 될 줄은…….”
뒤이어 나온 사람들의 면면을 보고는 또 놀랐다.
“만복상단의 대방에 금와전장의 소장주라니…….”
“만복상단이야 학무관과 연관이 있다고 하니 참석하는 거야 이상하지 않지만, 중원에서 제일 큰 전장인 금와전장의 소장주가 이 자리에 오는 건……. 와, 정말 말이 안 나오는군.”
몰래 염탐하러 온 경쟁 학관과 무관의 관주들은 완벽하게 패배했다는 사실을 속으로 인정했다.
“학무관의 관주님이 나와 입관 선언 하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다들 일어나서 박수로 관주님을 환영해 주시길 바랍니다.”
손뼉 치는 소리와 함께 백서휘가 뚜벅뚜벅 걸어 나와 중앙에 있는 연단 앞에 섰다.
“관주님의 입관 선언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청룡반 금태평 외 24명, 백호반 서강호 외 24명, 주작반 방소유 외 24명, 현무반 진운 외 24명의 입학을 허가합니다!”
짝짝짝짝!
내빈들의 수준으로 학무관이 엄청난 곳이란 걸 깨달은 보호자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로 아이들의 입학을 축하했다.
백서휘는 내빈들과 함께 앉아 환영사를 말할 차례가 오길 기다렸다.
“축하하러 찾아주신 내빈 여러분들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가장 좌측에 계신 분은…….”
내빈들은 정하진이 소개하면 자리에서 일어나 신입 관원들과 보호자들에게 포권을 했다.
“이어서 신입 관원들이 선서하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신입생 대표 금태평 관원은 앞으로 나와주십시오!”
대표로 뽑힌 금태평이 무대 위로 뛰어 올라왔다.
정하진은 그에게 선서문을 건네주었다.
“학무관 신입 관원 100명은 이 자리에 있는 사범님과 동기, 가족들 앞에서 중원 최고 교육기관의 관원으로서 명예와 긍지를 가지고 규칙을 준수하며 성실히 학무관의 교육을 이수할 것을 엄숙히 선서합니다! 학무관 신입 관원 일동!”
금태평이 선서를 무사히 마치고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이어서 관주님의 환영사가 있겠습니다.”
백서휘는 연단에 서서 정하진이 준비한 환영사를 읽어나갔다.
“중원 최고의 교육기관인 학무관의 신입 관원 여러분의 입관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앞으로 여러분들에게 꿈과 희망이 넘치고…….”
확실히 배운 사람이 적어준 거라 고사나 평소에 쓰지 않는 단어들이 섞여 있었지만, 백서휘는 실수하지 않고 일을 끝마칠 수 있었다.
“저, 저 사람이 며칠 전에 그 강기를 쓰던 그 사람이라고?”
“이럴 줄 알았으면 둘째에 막내까지 다 관원으로 등록시키는 건데!”
“내년에는 나머지 애들도 무조건 입관시킨다!”
어제 있었던 일을 목격했거나 이야기를 들은 학부모들은 백서휘를 경외심 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사범님들을 소개하는 자리를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관원들과 달리 무림에 식견이 있는 보호자들은 사범들의 수준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말도 안 돼! 매화검수도 섞여 있잖아?”
“절정고수들이 무공을 가르쳐준다고? 애들이 아니라 내가 등록을 했어야 하는데…….”
“나이 제한만 아니면 내가 입관했겠다!”
“무공 사범만 대단한 게 아니야. 다른 사범들 수준도 보라고! 그 남궁유운이 그림과 음악을 가르쳐준다니까!”
백서휘는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정하진이 목소리를 다시 한번 가다듬고는 폐회사를 말했다.
“이상으로 개관 및 제1회 입관 행사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입관을 축하하러 와주신 내빈 여러분들과 학부모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백서휘와 정하진이 앞으로 나와 정중히 인사를 하자 끝없는 박수 세례가 이어졌다.
‘별일 없으면 학무관이 진짜 중원 최고의 교육기관이 되겠어.’
백서휘는 나중에 죽어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났을 때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거리가 늘었다는 사실이 기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