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136화
한때 명성교의 사신(四神) 중 현무의 좌였던 현명은 어두컴컴한 방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의 귀로 누군가가 뚜벅뚜벅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일정한 박자로 안정되게 걷는 걸 보면 고수임이 분명했다.
반쯤 은거 상태인 현명을 찾아올 사람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런데 나를 찾았다? 누구지?’
현명이 눈을 뜨고 어둠 속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띠리링!
정체불명의 고수가 방 밖에 있는 종을 울렸다.
“누구냐!”
“나다.”
잊을 수 없는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오자 현명의 눈이 커졌다가 이내 작아졌다.
“욕수, 네가 여긴 웬일이지?”
한때 동료였는데도 현명은 욕수를 반기지 않았다.
밖에 서 있던 욕수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널 찾아왔다.”
“부탁? 혼천회에 들어와달라는 거면 그길로 당장 돌아가. 그곳에 들어갈 생각은 조금도 없으니까.”
“혼천회에 관한 부탁이 아니다.”
“그럼 뭔데?”
“백서휘를 죽이는 일을 도와줬으면 한다.”
“백서휘?”
현명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 밖으로 뛰어나왔다.
갑자기 빛이 강한 곳으로 나오면 눈이 부셔서 얼굴을 찡그릴 만한데도 그는 아무렇지 않아 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이겠다는 거지?”
“그건 여기 담겨 있다.”
욕수는 품에서 밀랍으로 빙인된 봉투를 꺼내 현명에게 건넸다.
“이게 뭐지?”
“작전계획서다.”
“지금 열어봐도 되나?”
“그래.”
현명은 봉투의 봉인을 뜯어내고 바로 서신을 꺼냈다.
서신에는 작전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 어떤 역할을 맡으면 되는지가 적혀 있었다.
“이거 네가 짠 작전이 아닌 것 같은데…….”
“혼천회에서 짠 작전이다.”
“백서휘를 죽이자길래 혼천회에서 완전히 나온 줄 알았는데, 아니었군.”
“그래, 난 아직도 혼천회에 적을 두고 있다.”
“혼천회에서 날 이용하자고 했나 보네.”
욕수는 현명의 시선을 피하며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장내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현명이 무언가 큰 결심을 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좋아, 이용당해 주지.”
“정말이냐?”
욕수가 깜짝 놀란 얼굴로 현명을 바라봤다.
“백서휘를 죽일 수 있다면야 얼마든지 이용당해 줄 수 있어. 대신, 너도 이 작전에 참여해야 한다는 조건이야.”
“……좋다. 참여하지.”
“용건은 이게 끝이지?”
현명은 들고 있는 작전계획서를 흔들어 보였다.
“그래.”
“그럼 가봐.”
“……그러지.”
현명은 짧게 대답하고는 다시 빛이 들어오지 않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욕수는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닫힌 방문을 바라보다 혼천회로 돌아갔다.
“남아 있는 놈들을 모두 불러들여야겠군.”
현명의 눈이 이채를 발했다.
* * *
“드디어…….”
백서휘가 마차 밖을 내다보는데 장사로 들어가는 문이 보였다.
“어라?”
이상하게도 장사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평소보다 많았다.
더 이상한 건 일행마다 아이가 꼭 하나 이상씩 껴있다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 있나?’
있을 만한 일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그러다 학무관의 입관 행사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많이 올 리가 없는데?’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무언가에 대해 들으려면 하오문 혹은 개방에 들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일단은 전장에 들러서 돈을 맡기고 그다음에 하오문이나 개방 중 한 곳에 가봐야겠어.’
백서휘와 당기준은 장사로 들어오자마자 다른 곳에 가지 않고 금와전장으로 갔다.
금와전장의 문을 지키는 무인 중 하나가 백서휘의 얼굴을 보고 안으로 달려갔다.
마차에서 내리니 지점장이 헐레벌떡 밖으로 뛰어와 말했다.
“아이고! 관주님!”
“직접 얼굴 보는 건 오랜만이지?”
“엄청나게 오랜만이죠.”
“오늘은 제법 액수가 커서 직접 왔어.”
“대리인을 보내실 때도 액수가 컸는데 그것보다 더 크다고 하시면…….”
백서휘가 당기준에게 눈짓했다.
당기준이 마차에서 커다란 주머니들을 꺼내 바닥에 놓았다.
『저 주머니 안에 든 것 중에 은자 이하는 없어.』
다른 사람이 들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백서휘는 지점장에게 전음을 날렸다.
“그 말씀은 최소 은원…….”
“내가 따로 지점장에게 전음으로 말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허억! 죄, 죄송합니다. 전장에서 오래 일했지만 이런 적은 난생처음이라…….”
금와전장의 직원들은 지점장이 쩔쩔매는 걸 보고 놀라워했다.
“점장과의 인연을 생각해서 이번 한 번만 봐주는 거야.”
“가, 감사합니다.”
“또 그러면 노인네한테 서신을 보내서 확 잘라 버릴 거야.”
지점장은 ‘서신’이란 말을 듣자마자 무언가 떠올랐단 표정을 지었다.
“아!”
“왜?”
“며칠 전에 대인에게서 서신이 왔는데 받는 이가 관주님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대인이라면 노인네?”
“……예.”
지점장이 백서휘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며 긍정했다.
“그 서신 어디 있어?”
“금고에 잘 보관해뒀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지.”
백서휘는 전장 안으로 들어가다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당기준! 잠깐 얘기 좀 하고 올 테니까 이놈들 좀 감시해 줘.”
“알겠습니다.”
백서휘는 안심했다는 얼굴로 지점장의 뒤를 따라 다시 전장 안으로 들어갔다.
“지점장실 안에서 기다리시면 제가 서신을 가져오겠습니다.”
“그러지.”
편안히 앉아 기다리고 있으니 지점장이 서신을 금고에서 꺼내왔다.
“여깄습니다.”
백서휘는 봉투의 봉인에 찍힌 글자를 확인하니 황일승이 맞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봉인을 뜯어 봉투에 든 서신을 읽기 시작했다.
‘학무관 연 것 축하…… 이건 넘기고, 여기부터가 진짜군. 천하에 있는 돈의 흐름이 이상하게 흘러 조사를 해보니 규모가 말도 안 되게 큰 암중단체가 나왔다고?’
황일승은 더 깊게 조사할지, 이쯤에서 그만둘지를 두고 고민하고 있었다.
천지회의 잔당에게 공격당한 일이 있어서 고뇌하는 것 같았다.
“이 정도만 해줘도 충분하지. 뭐.”
“예?”
“아니, 혼잣말 좀 한 거니까 신경 쓰지 말고 지필묵이나 좀 가져와 봐.”
“예!”
백서휘는 규모가 큰 만큼 위험할 수 있으니 더는 조사하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을 종이에 적은 후 봉투에 넣었다.
“이거 노인네한테 전해 줘. 아! 봉인을 안 했네.”
백서휘는 밀랍으로 봉인한 후 내력을 담은 손톱에 내력을 담아 ‘지킬 수’ 자를 새겨넣었다.
지점장은 신기하다는 얼굴로 백서휘를 쳐다봤다.
“섬세한 작업은 힘들다고 들었는데, 대단하십니다.”
“섬세한 작업이 힘들다는 놈들은 무공 헛배운 놈들이니까 무력 면에서는 신뢰하지 않는 게 좋아.”
봉인이 완전히 굳자 백서휘는 지점장에게 봉투를 건넸다.
“노인네한테 잘 좀 전달해 줘.”
“알겠습니다.”
백서휘는 금와전장을 나와 마차에 올라탔다.
“나는 하오문에 들를 테니 너는 기숙사로 돌아가.”
“알겠습니다.”
마차를 탄 덕에 백서휘는 신법을 쓴 것만큼이나 빠르게 하오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고생했다.”
내리면서 남긴 백서휘의 진심 어린 말에 당기준이 살짝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아닙니다. 별 고생 안 했습니다.”
“그래? 그러면 다음번엔 이것보다 더 부려 먹어도 되겠네?”
“그, 그건…….”
“농담이야. 가봐.”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당기준이 학무관으로 마차를 몰고 갔다.
백서휘는 그가 돌아가는 모습을 좀 지켜보다가 하오문의 밀실로 들어갔다.
“헉! 관주님?”
유소화가 백서휘를 보자마자 깜짝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새삼스럽게 왜 놀라? 내가 살아 있어서 놀랐어?”
“아니, 그거 때문에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럼 뭐 때문에 그런 건데?”
“사람들이 관주님을 안 붙잡았어요?”
“사람들이? 날 붙잡는다고? 왜?”
“무림맹으로 돌아오던 도중에 정체 모를 고수랑 싸운 게 소문이 났거든요.”
“그 소문이 도대체 어디서 났길래 난 하나도 못 들은 거지?”
백서휘가 거짓말하지 말라는 듯한 눈으로 유소화를 바라봤다.
“호북성을 중심으로 났어요.”
“아, 그러면 내가 못 들을 만하지.”
“거기다가 이전에 정체 모를 여고수랑 싸운 이야기까지 합쳐져셔 이 주변은 온통 관주님 얘기에요.”
“그래?”
“그 소문들 덕분에 정파, 사파 가리지 않고 학무관에 지원하는 관원이 많아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그렇게 사람들이 많았구나. 예상보다 많은 사람이 장사로 들어오길래 난 무슨 일이 터진 줄 알았어. 잠깐! 이러면 학무관에 대해 알아보는 사람들이 엄청 많았겠는데?”
유소화가 손뼉을 두 번 치자 부하 두 명이 들어왔다.
그중 하나는 두꺼운 두루마리들을, 다른 하나는 산더미 같은 서류들을 들고 있었다.
“두루마리에는 관주님과 학무관에 관한 정보를 물어본 사람의 이름과 별호가 적혀 있고, 서류들은 그들의 신상명세서가 적혀 있어요.”
“이렇게 많았다고?”
“네.”
백서휘는 침음성을 흘리며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여기서 분류 작업을 좀 해줄 수 있어?”
“어떤 식으로요?”
“혼자 장사로 들어왔거나 일행에 아이가 없는 사람들에 대한 목록만 따로 뽑아줬으면 좋겠는데…….”
“아! 그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해요!”
“그럼 부탁 좀 할게.”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유소화와 그녀의 부하 둘이 밖으로 나갔다.
백서휘는 의자에 몸을 파묻고 금와전장에서 봤던 서신에 대해 생각했다.
‘노인네가 걱정이네.’
큰 덩어리를 가진 암중단체를 무리해서 처치한 게 백서휘 본인이었다.
그런데도 존재한다는 건 자신이 인지하지 못했던 곳이란 소리였다.
‘말도 안 되게 큰데 내가 몰랐다는 건 정보 통제가 잘됐다는 뜻인데…….’
추적이 들어온 걸 알아차리면 그쪽에서 황일승에게 보복을 할 수 있었다.
‘학무관 일이 좀 정리가 되고 나면 북경에 한번 다시 가든가 해야겠어.’
고민을 끝내니 시기적절하게 유소화와 그녀의 부하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여기요.”
백서휘는 유소화에게서 두루마리와 서류들을 받아 읽기 시작했다.
“……낭인들이 왜 이렇게 많지?”
“그게 조금 이상하긴 해요. 그냥 낭인도 아니고 낭왕(浪王)도 저희한테 의뢰해서 관주님에 대한 정보를 가져갔거든요.”
“낭왕?”
“정사지간의 고수로 돈만 주면 뭐든 하는 사람이에요.”
“그건 나도 알고 있어. 내가 묻고 싶은 건 그 ‘뭐든 한다는 것’에 암살이나 납치 같은 것도 포함돼?”
“네.”
“이놈 지금 경지가 어떻게 돼?”
“본인 말로는 소림의 혜공대사나 무당의 청진도장이랑 같은 초절정의 경지라는데, 또 모르죠. 몸값을 높이기 위해 한 말인지…….”
“이놈 어딨어?”
모름지기 전투를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선제공격을 성공적으로 하는 게 제일이었다.
백서휘는 낭왕을 잡아 족쳐서 장사에 온 이유에 대해 알아보기로 마음먹었다.
“가까운 곳에 있어요.”
“어디?”
“도화루에서 지금 술을 마시는 중이에요.”
“술값은 다 계산했나?”
“아직 안 했어요. 근데 그건 왜 물어보시는 거예요?”
“그 친구랑 이야기를 좀 해보려고.”
백서휘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무슨 일을 하려는지 반쯤 눈치챈 유소화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물었다.
“서, 설마 도화루에서 싸움을…….”
“되도록 싸움은 피할 건데, 말이 안 통하면 나로서는 어쩔 수 없어.”
“아, 안 돼요!”
“되도록 싸움은 피하겠다니까.”
“저, 정말이죠?”
“그래, 믿어.”
백서휘는 유소화의 어깨를 두드려주고는 도화루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