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130화
“독령 건은 당기준도 연관된 문제이니 미리 일러두는 게 좋겠지.”
백서휘는 집무실을 빠져 나와 기숙사로 향했다.
연무장을 가로질러 가는데 당기준이 보였다.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하는 걸 보면 잠광환허술을 수련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얼마나 늘었는지 궁금했던 백서휘는 가던 길을 멈추고 그를 지켜봤다.
‘많이 늘었네.’
악록산에서 수련할 때랑 비교하면 천지 차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당기준은 발전해 있었다.
타고난 재능도 있고 무공과 궁합이 잘 맞아서 빨리는 것도 있겠지만, 실력 상승의 결정적인 요인은 노력일 터였다.
짝짝짝!
백서휘의 손뼉 소리에 당기준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단검을 빼 들었다.
“나야, 나. 진정해.”
“관주님이셨군요.”
당기준은 검집에 다시 단검을 집어넣었다.
“나 말고 여기 올 만한 존재가 누가 있겠어.”
“좀 전에 수련하러 나올 때 당진우를 봤습니다.”
“안 그래도 당진우에 대해서 할 말이 있어. 네가 싫어할 수도 있는 일인데…….”
백서휘는 운을 떼면서 당기준의 표정을 유심히 봤다.
당진우란 이름을 언급했을 때부터 그의 표정은 별로 좋지 않았다.
그러다 싫어할 수도 있다는 말에 뭔가를 예상했는지 완전히 썩은 표정을 지었다.
“……당진우가 당가로 초대한 겁니까? 관주님은 그 제안에 응했고요?”
“너한테 먼저 제안했나 보지?”
“돈, 여자, 무공 얘기를 하면서 초대에 응하기만 한다면 뭐든 주겠다고 했습니다.”
“너한테 먼저 갔다가 나한테 온 거였나 보네.”
“저한테는 종전 협정으로 장사를 떠나기 전에 제안을 했었습니다.”
“뭐 때문에 초대하는지는 알아?”
“그건 모르겠습니다. 뭔가 있긴 한 것 같은데 가르쳐 줄 생각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래?”
“관주님은 그놈이 무슨 이유로 초대하려 했던 건지 알고 계십니까?”
백서휘는 잠시간의 고민 끝에 당진우가 당부했던 말을 상큼하게 씹기로 결심했다.
“당가 측에서 독령을 회수하고 싶어 하더군.”
“독령이라면 그때 관주님께서 제거하지 않았습니까?”
독령에 대해서 당기준에게 확실하게 말한 적 없었다.
그래서 그는 독령이 소멸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 그때 없애 버렸지.”
“그러면 그놈들은 지금 허상을 좇고 있다는 겁니까?”
“그렇지.”
잘 모르는 사람이 봐도 당기준이 기뻐한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진한 미소가 입가에 어렸다.
“초대에 응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당가를 싫어하는 거 아니었나?”
“싫어해서 이러는 겁니다.”
백서휘는 고개를 갸웃했다가 당기준의 이어진 말을 듣고는 무슨 말인지 이해했단 표정을 지었다.
“놈들이 엿 먹는 일을 보는 건 즐거운 일일 테니까요.”
“안 그래도 응했어. 응하지 않으면 너나 나나 오룡단을 귀찮게 할 것 같아서.”
“사천으로는 언제 떠납니까?”
“학무관이랑 관련된 일을 다 처리하는 대로 갈 거니까 떠날 준비 미리 해놓는 게 좋을 거야.”
“다른 단원들도 갑니까?”
“일단은 너랑 나만 가고 나머지는 무공 고하에 따라 사범과 사범 보조 일을 준비하게 될 거야.”
“그럼 오룡단이 사라지는…….”
“아니, 일단 준비하게만 하는 거야. 다른 사범들이 일 있을 때 대신 투입하려고.”
“아…….”
“궁금한 건 더 없지?”
“없습니다.”
“그럼 난 먼저 가본다. 수련 열심히 해.”
“살펴 가십시오.”
수련하는 당기준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 * *
다음 날.
백서휘는 자신이 없을 때 사범들이 뭘 하는지 알기 위해 하오문의 호남성 지부를 찾았다.
그를 보자마자 유소화가 물었다.
“요즘 출타하는 일이 너무 잦으신 거 아니에요?”
“그러게.”
위험을 무릅쓰고 싹 다 정리하면서 이후로는 별일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오히려 이전보다 중원은 더욱 혼란스러워진 것 같았다.
장사로 돌아온 이후에 싸운 적들을 생각하면 이러한 생각이 더더욱 자주 들었다.
‘뭔가 특단의 대책이 필요한 것 같긴 한데 떠오르질 않네.’
백서휘는 생각을 지우고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부터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
“조만간 또 출타하시죠?”
은근슬쩍 자신의 정보를 캐내려는 게 보였지만, 못 말해줄 정보도 아니고, 서로 친분도 있었기에 백서휘는 그냥 사실을 알려주었다.
“한 달에서 한 달 후쯤에 당가에 가기로 했다.”
“사천이면 여기서 꽤 걸리는 곳이잖아요?”
“그럴 만한 일이 생겨서 말이야.”
“어떤 일인데요?”
“여기까지만 알려줄게.”
“아, 네…….”
유소화는 눈치가 확실히 좋은 편이었다.
더 말하고 싶어하지 않은 기색을 보이자 더 묻지 않고 질문을 그만두었다.
“그럼 다른 주제로 넘어갈게요. 오늘은 어떤 일 때문에 찾아오신 거예요?”
“지나가는 말로 사범들이 달라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범들이요? 아, 확실히 그런 정보가 저희에게 있긴 하죠. 귀빈께서 장사에 없으실 때…….”
“끝까지 말해 봐. 돈은 섭섭지 않게 줄게.”
“좋아요.”
“확실한 것만 말해야 돼.”
“호호! 그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자, 이제 말해 봐.”
“가장 먼저 말씀드릴 인물은 남궁유운 공자예요. 몇 개월 전부터 계속 말이 나온 일을…….”
백서휘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유소화에게서 이야기를 들었다.
“……이야기해 드릴 건 이게 전부예요.”
“장우량, 임철우는 이전과 같고 나머지 인물들이 문제란 거지?”
“그 나머지 인물들에서 종리연 아가씨는 빼주세요. 아가씨는 좋게 변한 쪽이니까요.”
“맡은 일을 성실히 하고, 수련도 열심히 노력한다고 했던가?”
“사람들에게도 친절하게 해서 연정을 품은 남자들이 많다는 건 빼먹으셨어요.”
“그래, 아무튼 좋은 쪽으로 변했으니 종리연은 빼고 나머지 세 사람을 재교육해야겠네.”
“그 재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모르겠지만 학무관을 제대로 열기 위해서는 세 사람에게 경고해야 하는 건 맞는 것 같아요.”
“제대로 연다는 건 또 어떻게 알았대?”
“호호호! 요즘 인부들이 학무관에 계속 출입한다고 들었어요. 저희 그늘 아래 있는 술집에서 술도 많이 마시기도 했고요.”
“뭐 숨길 정보라기보단 알려야 하는 정보라 가만히 있는데 웬만하면…… 알지?”
“조심할게요.”
“그래.”
백서휘는 유소화에게 정보료를 지불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고 그가 향한 곳은 바로 지근거리에 있는 도화루였다.
도화루엔 아직 해가 지지도 않았는데 술을 먹으러 온 손님이 있었다.
그 손님은 백서휘도 아주 잘 아는 인물로 ‘남궁유운’이었다.
‘술 좋아하는 건 알았지만 대낮부터 술집을 찾을 줄은 몰랐네.’
아무리 학무관이 차일피일 미뤄졌어도 그렇지 이 시간에 술집을 찾는 건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 문제도 만만치 않다고 하니…….’
백서휘는 뚜벅뚜벅 걸어가 남궁유운의 반대편에 앉았다.
“누구…… 헉! 과, 관주님!”
“오랜만이네.”
“저, 저번에 만났던 거로 기억하는데요. 그 전에는 남궁민 관련해서 보기도 했고.”
“그래 이런저런 일로 오고 가다 보긴 했는데, 이렇게 일대일로 만나는 건 오랜만이잖아.”
“그, 그렇긴 합니다만…….”
“왜 그렇게 말을 더듬거리는지 모르겠네. 잘못한 게 많아서 그런가?”
백서휘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자, 잘못한 게 있다니요. 그냥 오랜만에 뵙게 되니 긴장이 돼서…….”
“개소리하지 말고.”
“예?”
“내가 직접 여기서 일일이 언급해야겠어?”
“무, 무슨 말씀인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눈치 없는 척을 자꾸 하니 그냥 말할게. 너 옛날 버릇 도졌다며? 술에, 여자에. 아주 장난이 아니라고 하던데? 예전에야 눈치 보면서 했다면 얼마 전부터는 아주 대놓고…….”
“죄송합니다!”
상황이 점점 안 좋게 돌아가는 것 같으니, 바로 탁자에 머리를 세게 박으면서 사과하는 걸 보면 남궁유운은 확실히 눈치가 좀 있는 편이었다.
“뭐 때문에 그런 거야?”
“죄송합니다.”
“용서하고 말고는 일단 이야기 듣고 결정할 거니까 뭐 때문에 그런 건지나 말해 봐.”
“한참 남은 계약기간을 생각하니 답도 안 나오는 것 같고, 일이라도 하면 그거에 집중해서 좋을 듯한데 학무관은 열 기미도 안 보이고, 결정적으로…….”
남궁유운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눈동자가 계속 돌아가는 걸 보면 무언가 할 얘기가 있긴 한데 망설이는 것 같았다.
“그럴 만하다 싶은 이유면 정상참작할 여지가 충분히 있으니까 솔직하게 말해.”
“종리연 소저한테 거절을 당해서 그렇습니다. 예전에 눈치 보면서 했던 것도 거절당할 때마다 쌓이는 부끄러움과 분노, 억울함 같은 걸 풀고 자존감을 찾기 위해서 했던 겁니다.”
“최근 잦아진 건 왜 그런 건데?”
“계속 구애하면 관주님께 말한다는 종리연 소저의 말을 듣고 이제는 완전히 가망이 사라졌다고 생각하여 인생을 막살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남녀 간의 사랑이 연관되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에 좀 당황스러웠다.
“짧게 한 줄로 요약하면 종리연에게 까여서 그랬다는 거네?”
“예.”
남궁유운의 표정을 보아하니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백서휘로서는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잠깐만, 이 새끼 순 나쁜 새끼였네.’
뺨은 항주에서 맞아놓고 왜 장강에서 화풀이하고 있단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지금 한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그동안 남궁유운이랑 연애와 그 비슷한 걸 한 여자들 모두는 ‘종리연을 대신할 누군가’에 불과하단 말 아닌가.
‘나는 누군가와 사랑하고 받는다는 걸 꿈도 못 꾸고 있는데……!’
백서휘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분노가 끓어오르는 걸 느꼈다.
“야!”
“네?”
“뒷마당으로 나와.”
백서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도화루 건물 뒤에 있는 공터로 갔다.
남궁유운은 불안 가득한 눈으로 주위를 연신 둘러보며 그를 따라갔다.
“여, 여긴 왜 오자고 하신 건…….”
“몇 대 맞을래?”
“한 대…… 아니, 세 대 맞겠습니다.”
“네가 말해놓고도 양심이 너무 없지 않아?”
“그, 그러면 다섯 대 맞겠…… 여섯 대? 일곱? 열 대 맞겠습니다.”
남궁유운이 백서휘의 눈치를 살살 보며 말했다.
‘그 연애 비슷한 걸 한 여자들이 서른세 명이라고 했으니 서른 대를 때리는 게 맞겠지.’
백서휘는 결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서른 대를 때리겠다.”
“서, 서른 대나요?”
“왜 그런지는 너도 잘 알 거라 믿는다.”
백서휘는 눈을 감고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지금 마음속의 분노만 따지면 백 대를 때려도 부족함이 없지만, 백서휘는 서른 대에서 때리는 걸 멈추기로 했다.
이유라면 있었다.
몇 달 후, 중원 전역에 학무관을 홍보하고 학생들을 모집하게 되면 남궁유운은 강의를 하게 된다.
누가 뭐래도 학무관은 교육기관이기에 그가 할 강의에 지장이 줄 만한 일은 피해야 했다.
‘학무관을 여는 일이 아직 많이 남았다면 장사에 사는 모든 미혼의 남자를 대표해 수백 대를 때려 정의를 바로 세웠을 텐데…… 안타깝구나.’
백서휘는 자세를 잡으라고 손짓했다.
남궁유운은 엎드려뻗쳐를 하고 백서휘의 매질을 기다렸다.
“간다.”
백서휘는 검을 검집째로 휘둘러 남궁유운의 엉덩이를 때렸다.
빡!
“하나!”
남궁유운이 아픔을 참으며 크게 소리쳤다.
빡!
“둘”
빡!
“셋!”
.
.
.
빡!
“서른! 일어나!”
“으으으윽!”
남궁유운이 신음을 흘리며 힘겹게 일어ᄂᆞᆻ다.
“이제 안 그럴 거지?”
“네 그러지 않겠습니다.”
“잘하자.”
“네…….”
백서휘는 남궁유운의 어깨를 두드리고 근처에 있는 도박장으로 향했다.
남궁유운은 눈치를 보다 절뚝이며 그의 뒤를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