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117화
“잠시만 기다리시면 지부장님이 내려올 겁니다.”
하오문도가 친절히 밀실까지 안내해주고는 사라졌다.
백서휘는 의자에 앉은 상태에서 탁자에 발을 올려놓았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면서 화려한 궁장 차림의 여자가 들어왔다.
“오랜만이야.”
“왜 이렇게 늦게 찾으셨어요!”
“왜?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아니요. 그건 아니고……. 잘살고 있던 저를 이곳 지부장으로 삼으셨으면 자주자주 찾아오셨어야죠.”
“난 또 뭐라고.”
백서휘는 어이없단 표정으로 유소화를 바라봤다.
유소화는 붉게 상기된 얼굴을 진정시키기 위해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그러고 있지 말고 정보나 가져와.”
“어떤 정보를 원하시는데요?”
“현시점에서의 무림 정세.”
“그거라면 두루마리들을 가져올 필요 없이 제가 직접 설명해드릴 수 있어요.”
“비용은 같나?”
“오랜만에 찾아주신 기념으로 오늘만 특별히 무림 정세에 대한 정보를 공짜로 알려드릴게요.”
“그러면 나야 좋은데 그쪽 입장에서는 손해 아닌가?”
“자잘하게 푼돈을 받는 것보다는 관주님 같은 거물과 친분을 유지하는 게 더 이득이 되니까요.”
“그러면 이 이상은 말하지 않겠어.”
백서휘는 어서 말해보라고 부드럽게 손짓했다.
“짧고 간단하게 할까요? 길고 상세하게 할까요?”
“짧고 간단한 쪽.”
유소화 고개를 끄덕이고는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중원 무림의 곳곳이 다시 전쟁터로 변하게 될 거예요.”
“그럴 리가?”
백서휘가 내뱉은 한마디에 유소화는 마음의 평정을 잃었다.
“예?”
“설마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거야? 이러면 실망이 좀 많이 큰데?”
“제가 뭘 모르고 있는데요?”
“당가가 나를 찾아온 이유.”
유소화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거라면 알고 있어요.”
“어? 알아?”
“종전 협상 때문에 온 거잖아요.”
“알고 있었으면서 중원 무림이 전쟁터로 변한다는 말을 한 거야?”
“사도련 측에서 전쟁을 원하고 있으니까요.”
“종리혁이 원하는 거야? 아니면 그 밑에 놈들이 원하는 거야?”
“사도련에 소속된 거의 모든 문파가 전쟁을 원하고 있어요. 휴전 협상을 할 때 합의했던 기간이 끝나면 사도련은 바로 무림맹을 공격할 거예요.”
“그래서 종전 협상을 도와달라고 한 건가?”
“종리혁을 막을 수 있는 무인이 무림맹 쪽엔 없으니 관주님의 힘을 빌려 종전하려고 꾀를 쓴 거죠.”
“그렇다면…….”
백서휘의 한쪽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가며 송곳니를 보였다.
“관주님께서 부탁을 들어주는 대가로 어떤 걸 받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받은 것 이상으로 요구해도 그들은 할 말이 없을 거예요.”
백서휘는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뭘 더 요구하면 좋을까. 딱히 요구할 만한 게 안 떠오르네. 아!’
자신이 놓치고 있는 게 있었다.
권력의 무게추가 오대세가에 있을 뿐, 무림맹은 구파일방을 비롯한 정파 대다수가 소속된 단체였다.
그래서 지금 종전하면 오대세가만이 아니라 무림맹에 소속된 모두가 많든, 적든 이득을 보게 된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엉뚱한 놈들이 가져갈 뻔했어.’
유소화가 아니었으면 그냥 지나치고 넘어갔을 확률이 높았다.
백서휘는 그녀에게 살짝 고마움을 느꼈다.
“고맙다. 이 도움 잊지 않겠어.”
“네? 갑자기 그건 무슨 말이에요?”
“모르면 됐고.”
백서휘는 다시 입을 닫고 무림맹 소속 문파에게서 어떤 걸 뜯어낼지 고민했다.
‘웬만하면 돈으로 다 받고, 돈을 내기 힘든 몇몇 문파에게서는 가지고 있는 것 중에 값어치 나가는 것들 받아야겠어.’
백서휘는 돈이고 물건이고 최선을 다해 받아내야겠다고 다짐했다.
“혹시 내가 알아야 할 게 있나?”
“있긴 있는데 아직 정보가 적어서 말씀드리기가 곤란해요.”
“괜찮으니까 말해봐.”
“엄청나게 강한 마두가 출현해서 무림맹 소속 무사단들이 그 마두를 쫓는 중이래요.”
“장사로 오는 중인 건 아니지?”
“그건 모르겠고 마지막으로 모습을 보였던 게 호북성의 적벽(赤壁)이라고 해요.”
“호북성이면 무림맹 바로 앞마당이니 그놈은 금방 잡히겠네. 내가 신경 쓸 필요도 없겠어.”
“저도 그러길 바라고 있어요.”
“그것 말고 더 알아야 할 건 없지?”
“네.”
“그럼 난 이만 가봐야겠다.”
“살펴 가세요!”
백서휘는 하오문의 밀실을 벗어나 공사 현장으로 향했다.
공사 현장에는 오룡단의 감시하에 개방도들이 일하고 있었다.
‘개방도는 또 어떻게 동원한 거지? 나처럼 무력이 압도적으로 강해서 압박을 줘서 그런 것도 아닐 텐데…….’
백서휘는 흥미로운 얼굴로 공사 현장을 바라봤다.
그때 개방도가 백서휘를 먼저 발견했다.
“배, 백서휘다.”
“뭐? 진짜야?”
“저기 봐봐!”
“헉! 시찰 나왔나 봐!”
“꼬투리 잡히면 뭔 짓을 할지 알 수 없으니까 열심히 일하는 척이라도 해.”
제갈선우는 ‘백서휘’란 소리를 듣자마자 입구를 쳐다봤다.
그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빠르게 뛰어가 허리를 꾸벅 숙였다.
“오셨습니까.”
“일 잘하고 있는지 보려고 잠깐 왔는데, 잘 온 것 같네. 아주 신기한 광경을 보게 됐어.”
“신기한 광경이라면…….”
“개방도들 말이야. 나는 내 생전에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거든.”
“아!”
“그나저나 어떻게 한 거야? 저놈들은 내가 말하는 거 아니면 절대 들어먹을 놈들이 아닌데?”
그냥 가볍게 툭 던진 질문인데 제갈선우는 정곡을 찔린 것처럼 굴었다.
그가 자신에게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때였다.
제갈선우가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그간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저희 무력이 모자른 관계로 관주님의 권위를 빌려서 개방도를 동원했습니다. 저희끼리만 일하는 것보다는 많은 사람이 힘을 합쳐 일하는 게 관주님이 사실 집을 더 빨리 지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기발한 생각이네. 이렇게 좋은 쪽으로 호가호위를 하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은데…….”
백서휘가 진심 어린 칭찬을 하자 제갈선우의 얼굴에 깃들어 있던 불안감이 사라졌다.
“원하는 반응을 유도한다는 거나 일꾼이 없으면 일꾼을 만들어 내면 된다는 생각으로 개방도를 동원한 건 진짜 칭찬받을 만해.”
“하하하!”
제갈선우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때 백서휘가 대화의 방향을 확 틀어버렸다.
『그런데 말이야. 호가호위 그거 하면 안 되는 짓인 건 알고 있지?』
선의를 가지고 한 짓이란 걸 알고, 치부가 될 수 있는 일이기에 일부러 제갈선우에게 전음을 날렸다.
눈치 빠른 제갈선우는 그의 의도를 바로 알아차리고 전음으로 대답했다.
『……네.』
『지금은 누군가 죽고 다치거나 큰 손해를 본 게 아니니까 그냥 웃고 넘어갈게. 근데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네 욕심을 위해 내 이름을 팔면 그때는 지금처럼 경고로 끝나지는 않을 거야. 알았어?』
『명심하겠습니다.』
『가봐.』
제갈선우는 터덜터덜 원래 있던 곳으로 걸어갔다.
그때 나겁개가 휘적휘적 걸어오더니 헛기침을 연신 해댔다.
“할 말이라도 있어?”
“……있소.”
“뭔데?”
“거지로서의 신념과 개방의 방규를 저버리고 일을 하는데, 그 보상이 너무 짜서 그렇소.”
“짜다고?”
“솔직히 그쪽도 알고 있잖소. 뙤약볕 밑에서 만두값 이상의 일을 우리가 하고 있다는 걸.”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는 건데?”
“그, 그냥 알아줬으면 좋을 것 같아서 그런 건데, 이렇게 날카롭게 반응하면…….”
“좋아, 알아둘게. 됐지?”
“알았소.”
백서휘는 다른 데로 가라는 의미로 손을 휘휘 내저었다.
원대한 목적을 이루지 못한 나겁개는 금방 시무룩해졌다.
“안 꺼져?”
“가, 가려고 그랬소.”
나겁개가 원래 있던 곳으로 터덜터덜 걸어가다가 슬쩍 뒤를 돌아봤다.
백서휘는 공사 현장을 돌아다니며 일을 돕는 중이었다.
“재수 없는 자식! 사근사근하게 말할 수 있는데 꼭 조금 전처럼 싹퉁바가지없이 말한다니까. 진짜 내가 첫사랑이랑 결혼하는 데 성공했으면 저놈만 한 아들이 있을 텐데…….”
“다 들린다!”
“히이이익!”
나겁개가 헐레벌떡 다른 곳으로 도망갔다.
백서휘는 달려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 *
“또 청성파인가…….”
당가의 가주는 사천성 전역이 그려진 지도를 보며 신음했다.
그때 문밖에서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주님! 소가주님께서 제 부하를 통해 서신을 보내왔습니다.”
“진우가?”
“예!”
“무슨 일로 보낸 거지? 음…….”
당가의 가주는 고개를 갸웃거리 문을 열어젖혔다.
“여깄습니다.”
암독단주가 서신을 당가의 가주에게 내밀었다.
당가의 가주는 그를 보내고 집무실에서 홀로 서신을 읽었다.
그러다 갑자기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밖에 누구 없느냐!”
“있습니다!”
“당장 회의를 소집해라! 무사단장 이상급 인사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모두 모이라고 해!”
잠시 후, 당가의 심처에 나이 지긋한 장로부터 각 무사단의 단장들까지 모두 모였다.
“가주! 무슨 일로 우리를 부른 게요?”
“먼저 회의를 소집한 안건을 말하기 전에 통보부터 한번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건 안건이 아니라 통보입니다.”
“알겠으니 그 통보란 걸 빨리 말씀해보시오.”
“천왕침통을 외부로 반출해야겠습니다.”
“천왕침통의 반출?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요! 가법에 정해져 있지 않소! 8대 암기는 가주라도 절대 반출시킬 수 없다고!”
“수석 장로님, 이미 소가주가 그자에게 주기로 약조를 했다고 합니다.”
“그자?”
“자하무관의 관주 말입니다.”
“절대 안 되오!”
“제가 통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이게 월권이고 가법을 어기는 거란 거 너무 잘 압니다. 그런데도 천왕침통을 반출하는 건 그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그런 겁니다.”
“환심을 사기 위해서라니……. 좋소, 천왕침통을 그자에게 준다고 칩시다. 그자가 사실 약한 존재였으면 어떡할 거요? 하백상의 멱을 딴 것도 다른 사람의 도움과 행운이 겹쳐진 거라면 그때는…….”
“제갈세가의 가주가 목을 걸고 진짜라고 했습니다.”
“눈으로 직접 보지 않는 이상은 못 믿겠소.”
“그럼 제 눈을 믿으십시오. 실제로 그에게서 풍기는 기도는 화경의 벽을 바라보고 있다는 혜공대사나 청수도장보다 뛰어났습니다. 이랬는데도 미덥지 못하시다면 제 가주직을 걸겠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근본도 없는 자에게…….”
“종전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사도련주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그자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는 상황입니다.”
“……그 정도로 정도 무림이 막다른 곳에 몰렸단 거요?”
“예.”
당가의 가주가 씁쓸한 표정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허어!”
“사도련주를 막을 가능성이 그나마 있는 건 소림의 혜공대사와 무당의 청진도장뿐인데 둘 다 문파를 지키기 위해 산에서 내려오지 않을 거라고 합니다.”
“그럼 천왕침통 말고 다른 강한 암기를…….”
“아니요. 그가 원한 천왕침통을 줘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살 수 있습니다.”
“허어,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수석 장로를 비롯한 장내의 모든 사람이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당가의 가주 역시 지금 상황에 대해 애석함을 느꼈다.
‘그래도 아직 희망은 있다.’
독령의 제어법만 알아내면 사도련을 무찌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당가를 ‘천하제일세가(天下第一世家)’로 만들 수 있었다.
‘반드시 얻어내고야 말겠다!’
당가의 가주가 굳건히 결의를 다지며 입을 열었다.
“희소식이 있으니 그렇게 슬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떤 소식이오?”
“한번 맞춰보십시오.”
여러 가지 답이 나왔지만, 정답을 맞힌 이는 없었다.
계속 시간만 흘러가자 견디지 못한 수석 장로가 입을 열었다.
“그냥 정답을 말해주시오.”
“……기준이가 ‘독령의 제어법’을 찾아낸 것 같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모인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저, 정말이오?”
조금도 예상 못 했던 말이 나와서 경악하는 사람.
“가주, 독령을 제어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오. 이제는 그만 포기하시오.”
지금까지 데인 게 너무 많아 불신하는 사람.
“그, 그게 사실이라면 사천제일만이 아니라 천하제일도……!”
장밋빛 미래가 올 거라 믿으며 희망을 품은 사람.
서로 다른 반응을 보였지만 그들에겐 공통점이 있었다.
하나 같이 다 당가의 미래가 지금보다 더 찬란하게 빛나길 바란다는 것이었다.
“독령과 관련된 모든 건 그놈을 내보내면서 끝난 문제 아니었소?”
“끝난 줄 알았는데 끝난 게 아니었더군요.”
당가의 가주는 회의장에 모인 이들에게 서신에 적힌 내용을 설명해주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식으로 움직일지를 결정해서 진우에게 알려야 합니다. 시간이 없어요.”
“침착하시오. 아직 우리에게 시간은 많소.”
“수석 장로님, 이 시간에도 기준이는 독령을 통해 강해지고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소. 이리로 초대해서 차(茶)를 건네면 되니까.”
“아!”
“이해하셨구려.”
“그 차에 꿀을 탈지, 독을 탈지는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다르게 정하면 되겠군요.”
“그렇소.”
당가의 수석 장로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