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116화.
제갈선우는 콧노래를 조용히 흥얼거리며 방문을 열고 나왔다.
밖엔 황보정석이 무표정한 얼굴로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깜짝이야! 여긴 왜 온…… 아! 어제 내가 한 얘기 때문에 온 거구나.”
“예.”
“황보 동생이 진짜 이 시간에 찾아올 줄은 몰랐어. 어디에 돈을 쓸 건지 진짜 궁금했나 봐?”
“제 돈이 들어가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궁금할 수밖에 없죠.”
“미리 말하자면 황보 동생이 생각한 곳에 돈을 쓰는 게 아닐 수도 있어.”
“생각한 곳과 다르더라도 합당하다면 돈을 아낌없이 쓸 생각입니다.”
“아낌없이? 진짜 큰맘 먹었나 봐?”
“땀 흘려서 번 거라면 아끼겠지만 지금 가지고 있는 돈은 도박장에서 크게 한탕 해서 번 거거든요.”
“도대체 얼마나 벌었길래 크게 한탕 했다고 하는 거야?”
제갈선우가 궁금증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다시는 그 도박장에 가기 힘들 정도로 벌었습니다.”
“이야! 그러면 거기 있던 도박장 관계자며 도박꾼들 돈을 싹 다 털었다는 거잖아?”
“그거 비슷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면 돈 걱정은 안 해도 되겠어.”
“합당한 곳이라면 그렇겠죠.”
“좋아, 날 따라와.”
제갈선우와 황보정석은 전력으로 신법을 펼쳤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향토만두’란 이름을 가진 만두 가게였다.
밖에서 보니 만두 가게의 주인과 종업원은 장사 준비를 한창 하고 있었다.
“아침을 먹으려고 그러는 거면 여기보다는 다른 곳을…….”
“아침 먹으려고 온 거 아니야.”
“그러면 왜?”
“돈 쓰려고 왔지. 품삯은 못 챙겨주더라도 개방도들 밥은 챙겨줘야 하니까.”
황보정석은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런 곳에 올 거라고 예상치 못해서 그렇지 만두를 사는 건 그가 볼 때 합당한 지출이었다.
“얼마면 되겠습니까?”
“얼마인지는 이 집 주인이 알겠지.”
제갈선우는 뚜벅뚜벅 걸어가 문을 두드렸다.
쿵쿵!
떨어뜨릴 머리카락도 없는데 두건을 쓴 만두 가게 주인장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와 밖을 내다봤다.
주인장은 허리에 검을 찬 걸 확인하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무, 무슨 일이십니까?”
“왕만두 300개는 얼마쯤 하나?”
“300개는 은자 1냥입니다.”
“300개 주게.”
제갈선우가 개방도들에게 먹일 만두를 주문했다.
“아니, 300개 말고 600개를 줘.”
잠자코 지켜보던 황보정석이 끼어들었다.
“600개요?”
“왜? 안 되나?”
“무, 문제는 없지만, 왕만두를 그렇게 많이 사서 뭘 하실 건지…….”
“그건 알 거 없고. 보름 동안 하루에 600개씩 만들어서 지정한 곳까지 배달해 줄 수 있겠나?”
“자, 장난을 치시는 거라면…….”
황보정석은 돈주머니에서 은자 30냥을 꺼내 주인장의 손에 쥐여줬다.
십수 년간 장사했지만 주문 한 번에 이만한 돈을 받은 건 처음이었다.
주인장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아직도 장난 같나?”
“아, 아닙니다.”
“200개를 아침, 점심, 저녁으로 나눠서 학무관 근처의 커다란 장원을 짓는 공사장으로 배달 보내면 된다.”
“아, 알겠습니다.”
“돈 먼저 받았다고 대충 만들면…… 알지?”
황보정석이 허리에 찬 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무섭게 말했다.
주인장의 눈빛에 깃들었던 탐욕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 자리에 공포가 들어섰다.
“오, 오늘부터 만들면 되겠습니까?”
“그래.”
만두 가게에서 볼일을 마친 제갈선우와 황보정석은 몸을 돌려 양조장으로 향했다.
“양조장은 왜 가는 겁니까.”
“그날 제일 열심히 일한 사람을 뽑아서 술을 선물하려고.”
“음…….”
“이번엔 내가 낼 테니까 걱정하지 마.”
“술이 더 비쌀 텐데요?”
“끽해야 싸구려 화주로 열다섯 병이야. 그 정도는 내 선에서 감당 가능해.”
“알겠습니다. 술 사는 건 제갈 형에게 맡기도록 하죠.”
두 사람은 양조장에서 술을 사 들고 학무관으로 돌아왔다.
연무장은 새벽 나절부터 치료를 위해 나온 중독자들로 인해 시끄러웠다.
제갈선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기숙사 건물로 돌아왔다.
“황보 동생, 다른 단원들 깨워서 같이 내 방으로 와.”
황보정석은 나머지 세 명을 제갈선우의 방으로 데려갔다.
“다들 편하게 앉아.”
오룡단원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각자 편한 자세로 앉았다.
“왜 오라고 하신 거예요?”
“작업 현장에서 해야 할 일들을 알려주려고 불렀어.”
“그냥 도망가는 걸 막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겨우 그런 이유로 날 부른 거면…….”
당기준이 날카롭게 말했다.
“당가의 소가주 때문에 날카로워진 건 알겠는데 적당히 좀 하지?”
황보정석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아주 진하게 섞여 있었다.
“이러는 게 마음에 안 들면 나랑 한판 붙는 게 어때?”
“설욕전을 원하는 거야?”
“그래, 원한다.”
“좋아, 지금 여기서…….”
“황보 동생! 당 동생! 둘 다 그쯤 해둬. 정 싸우고 싶거든 모든 일이 다 끝난 다음에 싸우던가 해.”
황보정석과 당기준은 서로를 한참 노려보다가 제갈선우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다시 설명한다. 지금 개방도들은 우리 대신에 일해야 한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어. 그래서 자기들이 공사장 인부로 일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엄청 심하게 반발할 거야.”
“그럼 큰일 아니에요?”
“큰일이지. 아마 무공을 써서 저항하는 이들도 꽤 많이 나올걸.”
“우리 어떡해요, 그럼?”
“다 방법이 있지.”
제갈선우가 씨익 웃었다.
“역시 제갈 형!”
“제갈량도 지금의 제갈 형을 보면 놀랐을 거야.”
“하하.”
“칭찬 시간 끝났으니까 방법이 뭔지 빨리 얘기해 주세요.”
“그래, 말해 주마. 내가 생각해낸 방책은…….”
다들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고 제갈선우에게 집중했다.
제갈선우는 피식 웃고는 하려던 말을 계속 이어갔다.
“포위섬멸진(包圍殲滅陣)이다!”
말도 안 되는 방책을 말하자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제갈 형, 뭐 잘못 드셨어요? 겨우 다섯 명으로 어떻게 개방도를 포위해요! 그리고 섬멸?! 진짜 ‘무림공적’이라도 되고 싶은 거예요?”
오룡단 중에서도 제일 상식이 없는 모용진이 제갈선우를 비웃었다.
제갈선우는 욱한 걸 꾹꾹 누르며 원래 의도가 무엇인지 말했다.
“다들 농담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거 아니야?”
“그게 농담이었어요? 저는 당연히 진담인 줄 알고…….”
“다섯 명으로 어떻게 포위섬멸진을 구성하겠어. 끽해야 오행진 쓰는 게 전부겠지. 그래서 그냥 농담한 건데…….”
“다음부터는 그런 농담 아니, 아예 그냥 농담하지 마세요.”
“알았다.”
제갈선우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포위섬멸진 말고 진짜 방책은 뭐예요? 설마 진 안에 호풍환우를 일으키고 사람들을 잡아먹는 기진(奇陣)?”
“기진은 지금 못 만들어. 만드는 데 필요한 물건들이 하나도 준비가 안 되어 있으니까.”
“그럼 그냥 우리의 힘만으로 막아야 하는 거예요?”
남궁민이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 우리 힘으로 최대한 막긴 하는데 필사적으로 막지는 않을 거야.”
“필사적으로 막지 않으면 공사 현장을 빠져나가는 자가 꽤 나올 텐데요?”
“한 사람이 사라졌을 때마다 남은 사람들이 해야 할 일들이 늘어난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강조해 주면 돼.”
“아! 그러면 남아 있는 개방도들의 불만이 커져서 나중에 취죽교로 돌아갔을 때, 도망친 이들의 기강을 알아서 잡겠네요?”
“그렇지.”
“근데 이게 전부는 아니죠?”
“채찍이 있으면 당근도 있어야지. 제일 열심히 일한 사람에게는 술을 주려고.”
“당근과 채찍을 확실하게 차이를 두면 계속 일하는 자가 나오긴 할 것 같아요.”
“그래, 진짜로 거지 근성이 있는 자들은 도망갈 궁리만 하겠지만 대부분은 일을 계속하게 될 거야.”
“그럼 도망간 이들은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이세요?”
“그건 억울한 개방도들이 알아서 데려올 거야.”
“데려오면요?”
“다른 이들보다 힘든 일을 시키거나 도망간 사람이 생겨서 늘어난 일들을 시킬 거야.”
이야기를 다 들은 남궁민이 입술을 비죽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왜? 내 계획이 별로야?”
“아니요. 그게 아니라 지금 우리가 하는 짓은 다 관주님의 이름에 담긴 힘으로 위세를 부리는 거잖아요?”
“그렇지.”
“개방도들한테 들키면 어떻게 해요?”
“명령을 수행하려고 어쩔 수 없이 이런 거니까 관주님이 우릴 보호해주시겠지. 그래도 우리가 관주님 직속 수하들이잖아.”
“혹시 모르니 끝까지 안 걸리길 빌어야겠네요.”
“그래”
“시간이 이제 된 것 같으니까 본격적으로 일을 하러 가보자.”
오룡단은 두둥실 떠오르는 해를 보며 백서휘의 집이 지어지는 곳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관주님이 무섭긴 한가 보다. 다들 일찍부터 나와서 군기가 꽉 잡힌 채로 서 있네.”
“실제로 무서운 분이니까요.”
“내가 앞에 나갈 테니까 다른 사람들은 각 방위에 서 있어.”
“네.”
제갈선우는 앞에 나서서 개방도들이 해야 할 일들을 설명했다.
예상했던 것처럼 개방도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이건 백 관주라도 너무한 거야!”
“우린 거지들이라고! 죽으면 죽었지, 일은 안 해!”
“개방도의 긍지를 너무 우습게 보네.”
그때였다.
한참 멀리서부터 침샘을 자극하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이, 이 군침을 돌게 만드는 냄새의 정체는 뭐지?”
“이거 ‘향토만두’의 만두 냄새인데?”
“향토만두면 그 엄청 맛있다는 그 집 아니야? 그 만두 냄새가 왜 여기에서 나는 거지?”
지금이 설명할 최적기라고 생각한 제갈선우는 목소리에 내공을 담아 외쳤다.
“저건 여러분들이 배를 곯을까 싶어서 준비한 만두입니다. 인당 세 개씩 먹으면 되니 차례대로 줄을…….”
“우리 거라고?”
“와아아아아아!”
“나! 나 먼저 줘!”
개방도들이 눈이 돌아가서 만두가 담긴 수레를 향해 달려갔다.
만두 가게의 주인장과 종업원은 깜짝 놀라 수레를 놓고 도망가려 했다.
지켜보고 있던 다른 단원들이 달려와 개방도들을 막았다.
“다들 줄 서세요!”
“줄 서! 줄 서라고!”
그냥 무질서하게 둬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오룡단 모두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제갈선우가 소리쳤다.
“계속 이렇게 무질서하게 굴면 그분이 여러분들을…….”
“히이이익!”
백서휘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는데도 개방도들은 경기를 일으켰다.
제갈선우는 공포에 떠는 이들이 남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쓸데없는 생각을 지우고 그는 개방도들을 한 줄로 서게 했다.
조금 전에 혼란스러웠던 모습이 거짓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개방도들은 질서정연한 모습을 보였다.
이쯤이면 나눠줘도 되겠다 싶어 개방도들에게 만두를 세 개씩 나눠줬다.
개방도들은 만두를 받자마자 입안으로 쑤셔 넣으려고 했다.
지금과 같은 반응을 기다렸다는 듯 제갈선우가 내공을 담아 외쳤다.
“만두를 한 입이라도 먹으면 앞으로 이곳에 나와 성실하게 일하겠단 맹세를 한 것으로 간주하겠습니다.”
개방도들은 들고 있는 만두를 밑에 내려 놓았다.
“겨우 세 개 주는 거로 우리를 인부로 부리겠단 말이야? 양심이 없어도 너무 없잖아!”
“맞아!”
한 사람이 용기를 내니 다른 사람들도 만두를 내려놓고 오룡단을 성토했다.
“누가 세 개로 끝이라고 했습니까?”
“끝이 아니면 뭔데?”
“끼니마다 만두가 세 개씩 주어집니다. 그것도 보름 동안!”
“그, 그 말은 매일 아홉 개씩 만두를 받을 수 있단 거야?”
“그렇습니다. 기술이 없는 여러분들에게 뭔가를 바란다는 것 자체가 욕심인 걸 알기에 어려운 일도 웬만하면 시키지 않을 겁니다.”
제갈선우는 진실과 거짓을 교묘히 섞어서 말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개방도들의 시선이 다시 만두로 향했다.
그들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만두를 바라봤다.
바로 앞에 있어 코도 가깝다 보니 맛있는 냄새가 계속 콧구멍으로 들어왔다.
개방도들은 침을 꼴딱 삼키며 서로의 눈치를 봤다.
“다들 저놈 말에 넘어갈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니지?”
나겁개가 무서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꼴깍!
누군가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이놈들아! 입문하면서 평생 비럭질하며 살겠다고 맹세했잖아!”
나겁개는 격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때 모용진이 히죽 웃으며 남은 만두가 있는 곳에서 옷으로 부채질을 했다.
만두 냄새가 사방으로 퍼지자 거지들이 시험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보름 동안만이지만 주린 배를 잡지 않아도 돼.”
개방도 중에서도 일결개가 홀린 듯한 얼굴로 만두를 베어 물었다.
이것이 시작이었다.
한 번 누군가가 먹기 시작하니 다른 사람들도 망설이지 않고 만두를 먹었다.
제일 강성이던 나겁개도 만두를 한번 먹고는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개방도들은 은자 세 개도 아니고 만두 세 개에 보름 동안만 신념을 팔아버리기로 마음먹었다.
“남은 스무 개는 우리가 두 개씩 먹기로 하자.”
“내 건 따로 빼지 말고 모용 동생이랑 남궁 동생을 줘.”
“제갈 형?”
“마지막으로 확인해야 할 일이 있어서 홍 목장에게 가봐야 돼.”
“갔다 와서 먹으면 되잖아요?”
“식은 만두를 안 좋아해서…….”
제갈선우가 무언가 사연이 있다는 듯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면 저랑 모용 형이 나눠 먹을게요.”
“그래.”
만두를 다 먹은 개방도들은 한 명씩 줄을 서기 시작했다.
그동안 나머지 네 명의 단원들은 제갈선우가 오길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타난 제갈선우는 홍선 밑에서 일하는 기술자들과 함께였다.
“자, 이제부터 지원을 받겠습니다. 벽돌 운반을 하고 싶다!”
기술자들은 체형과 눈빛을 보고 알아서 개방도들을 골라 갔다.
그 모습을 장사에서 제일 높은 건물에서 백서휘가 지켜봤다.
“시킨 일을 다른 일꾼들도 아니고 거지들에게 하도급을 줄 생각은 어떻게 한 거지? 하여간 재밌는 놈들이야.”
낄낄거리며 웃고 있는데 당진우가 멀찍이서 당기준을 몰래 바라보는 모습이 백서휘의 눈에 들어왔다.
“어? 저놈 도대체 뭐 하는 거지?”
예전에 만났을 때 이상야릇한 미소를 지었던 것부터 맘에 들지 않았다.
“확 잡아다 뭘 하려고 했던 건지 추문을 해? 아니다. 일단 예의주시하다가 뭔가 일을 터뜨리면 그때 추문하는 게 좋겠어.”
오룡단과 당진우를 지켜보던 백서휘는 공사가 재개되는 걸 보자마자 건물에서 내려와 도화루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