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115화
당진우와 백서휘가 만난 건 오룡단이 가문과의 연을 끊을 때 잠깐뿐이었다.
그때는 여러 사람이 동석해 있어 백서휘가 정확히 어떤 사람인지 감을 잡지 못했다.
그러다 이번에 일대일로 만나서 그를 상대하니 감이 오는 게 있었다.
백서휘는 일반적인 잣대로는 재기 힘든 인물이었다.
지금만 해도 그랬다.
백서휘가 천왕침통을 요구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 똑똑하다는 제갈진천도 백서휘가 생떼를 부릴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을 거다.
‘문제는 이 생떼를 무시하기엔 백서휘라는 사람이 너무 강하다는 거지.’
다른 인물이라면 절대 들어줄 수 없다고 거부하겠지만 백서휘에겐 불가능했다.
‘천왕침통을 내주는 수밖에 없겠어.’
당진우는 암기 하나를 바쳐서 더 큰 이득을 볼 수 있다면 남는 장사라고 자기합리화했다.
“……좋습니다. 관주님께 천왕침통을 드리도록 하죠.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이걸 꼭 지켜주셔야 합니다.”
“무슨 조건인데?”
“천왕침통을 얻었다는 사실 자체를 비밀로 해주시길 바랍니다.”
“내가 쓸 물건이 아니라 그건 불가능해. 출처랑 얼마나 귀한 물건인지 정도는 말해야 할 거 아니야.”
“그럼 그분에게만 말씀하시고 다른 이들은 모르게 해주십시오.”
“흠, 그러지.”
“천왕침통에 대한 협의가 끝났으니 이제 저희가 중독자들 치료 시작하면 관주님은 종전 협상을…….”
백서휘가 다른 것들을 더 요구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당진우는 어떻게든 협의를 완료시키려 했다.
“협의 아직 안 끝났어.”
“예?”
“천왕침통을 인도받을 수 있는 날짜를 알려줘야지.”
“그건 최대한 빠르게 받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당진우는 정확히 인도 날짜를 말하지 않고 모호한 말로 넘기려 했다.
“그 말 지키는 게 좋을 거야. 종전 협상을 도와주는 건 그쪽이 내건 모든 조건을 완료한 다음에 할 생각이니까.”
“……알겠습니다.”
“더 이야기할 게 남아있나?”
“중독자들의 치료에 관해서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 그들을 치료하면 됩니까.”
“저 연무장에 세워진 천막이 진료소다. 내일이나 모레쯤부터 저기서 진료하면 돼.”
“그럼 모레부터 치료를 시작할 테니 치료소로 삼은 곳에 중독자들을 보내주십시오.”
“얼마나?”
“하루에 8명에서 10명이 한계입니다.”
“그럼 10명씩 보내도록 하지. 혹시 더 요구할 게 있나? 없으면 여기서 협의를 마치고 싶은데…….”
“없습니다.”
“그럼 이쯤에서 마무리하지.”
백서휘와 당진우는 회의실 밖으로 나왔다.
회의실 밖엔 당기준과 당진우의 심복이 손에 무기를 든 채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당기준 저놈이 이렇게 강했다고?’
풍겨오는 기도로만 판단하면 당기준은 당진우 자신보다 한참 위였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최소 두세 배는 강해진 것 같았다.
‘아무리 무재가 뛰어나다고 해도 그렇지, 무공이 이렇게 빠르게 발전할 수가 있나?’
천하제일인이 옆에 붙어서 가르쳤다고 해도 이 정도로 강해지는 건 말이 안 됐다.
당진우는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계속 생각을 하는데 떠오르는 건 한 가지 말고는 없었다.
‘독령을 제어하는 데 성공한 게 분명해. 그게 아니면 이럴 수가 없어!’
그때 백서휘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당진우의 심복과 당기준에게 물었다.
“굳이 회의실 앞에서 이러는 이유가 뭐야?”
“보고할 일이 있어서 관주님을 찾았는데 저쪽이 먼저 시비를 걸어서 대응한 겁니다.”
“사실인가?”
백서휘가 당진우의 심복 쪽으로 시선을 옮기며 물었다.
“소가주님의 안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안전?”
“당기준은 과거에 소가주님을 습격한 전력이 있습니다. 저는 저놈이 또 그럴까 싶어서 막은 것뿐입니다.”
“내 명령 없이는 당기준이 그럴 일 없으니까 검 거둬.”
당진우의 심복이 당진우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눈빛으로 물었다.
당진우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스릉!
당진우의 심복이 검을 거두자 당기준도 눈치껏 단검을 허벅지에 달린 검집에 꽂아 넣었다.
“나는 이놈이랑 얘기를 좀 할 테니까 너희 둘은 숙소로 가.”
당진우는 심복과 함께 당가에서 온 이들이 묵고 있는 객잔에 들어갔다.
“여기가 우리 숙소인가?”
“네, 중독자를 치료할 때까지 무기한으로 빌릴 예정입니다.”
“내 방은 어딘데?”
“저쪽 별채를 혼자 쓰시면 됩니다.”
“너는 어디서 자려고?”
“저는 다른 이들과 함께 잘 겁니다.”
“그래? 그러면 가는 김에 이번에 투입한 암독단(暗毒團) 중 하나를 별채로 보내봐.”
“암독단은 왜 찾으시는 건지?”
“본가에 전할 소식이 있어서 그래.”
“……알겠습니다.”
당진우는 당가로 전할 서신을 일필휘지로 암호화된 글을 빠르게 적어나갔다.
당기준이 독령을 제어하는 데 성공했고, 종전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려면 천왕침통을 백서휘에게 줘야 한다는 내용이 서신에 담겨 있었다.
“됐군.”
서신을 봉투에 넣고 봉인하는데, 정원 쪽에서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들렸다.
“부르셔서 왔습니다.”
기척을 못 느꼈단 사실에 오한을 느끼며 당진우는 정원으로 나갔다.
무미건조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암독단원으로 평범한 인상에 희미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다.
“네게 내릴 임무가 있어.”
“무엇입니까?”
“아버님께 이 서신을 전달해. 무슨 일이 있어도 전해야 하는 거 잊지 마라.”
당진우는 손에 들고 있던 서신을 암독단원에게 건넸다.
“시키실 일은 이게 전부입니까?”
암독단원이 품속에 서신을 넣으며 물었다.
“그래.”
“지급을 요하는 서신 같으니 지금 바로 사천으로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잠깐! 이걸 받아가라.”
당진우는 돈주머니에서 은원보를 하나 꺼내 암독단원에게 던졌다.
암독단원은 은원보를 챙겨 넣은 후 고개를 꾸벅 숙였다.
“진짜 가보겠습니다.”
“그래.”
당진우는 서신이 빠르게 당가에 도착하길 기도하며 침실로 들어갔다.
* * *
당진우와 해독술사들은 장사에 들어온 후 이틀이 지났을 때부터 본격적으로 빙독에 중독된 이들을 치료했다.
당기준은 그들을 멀찍이서 지켜보며 빠드득 이를 갈았다.
그때 황보정석이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당기준이 심기 불편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지?”
“내 말 못 들었어?”
“무슨 말을 했는데?”
“안 돌아갈 거냐고 물었잖아.”
“좀만 순찰을 더 하고.”
“순찰은 무슨 감시겠지. 쓸데없는 짓 하지 마. 어차피 우리는 가문과의 연을 끊었잖아.”
“제갈선우가 했던 말 기억 안 나? 우리가 영원히 관주님 밑에 있지 않을 거라던?”
“그 말이 맞다고 가정해도 지금은 아니야.”
“……좋아, 돌아가도록 하지.”
당기준와 황보정석은 신법을 펼쳐 학무관으로 뛰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학무관에 도착한 그들은 울상을 짓고 있는 남궁민과 모용진을 보게 됐다.
“무슨 일이야?”
“관주님이 우리 보고 마무리 공사를 하래요.”
“우리가? 왜?”
황보정석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장사에 있는 인부들의 7할 이상이 빙독으로 치료 중이잖아요. 그래서 공사가 지지부진하다고 저희 보고 인부들 대신 집을 지으라고 하셨어요.”
“뭐? 정말이야?”
“그렇다니까요!”
“무인이 공사는 무슨 공사야!”
모용진은 자기가 지른 소리에 놀라 입으로 손을 가져갔다.
“아이고! 시끄러! 모용 동생 때문에 귀청 떨어지겠네!”
휘적휘적 걸어온 제갈선우가 귀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어? 제갈 형! 큰일 났어요!”
남궁민이 제갈선우를 붙잡고 황보정석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해주었다.
“빙독 때문에 난리 났을 때부터 이런 일이 찾아오게 될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
“해결 방법은 생각 안 하셨어요?”
“기가 막힌 걸 생각하긴 했는데, 현실성이 없어서 그냥 폐기했어.”
“현실적이든, 비현실이든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으면 좋으니까 다시 살려내 보세요!”
“아, 현실성이 없다니까. 돈도 꽤 들어가고.”
그때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던 황보정석이 입을 열었다.
“돈이 얼마나 들길래 그러시는 건데요?”
“많이.”
“돈은 제가 마련할 테니까 해결 방법이나 말해보시죠.”
“일꾼을 고용하면 돼.”
제갈선우를 제외한 모두가 황당하단 표정을 지었다.
지금 장사에 있던 칠 할의 인부들이 빙독에 중독되어 치료를 받아야 한다.
남은 삼 할은 몸값도 비싸진 데다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일꾼이 어딨어요?”
제갈선우는 피식 웃으며 황보정석의 뒤쪽을 가리켰다.
“아무것도 없는데요?”
“손가락 끝을 봐봐.”
“설마…….”
제갈선우의 손가락 끝이 향한 곳에는 배를 내놓고 늘어지게 잠을 자는 나겁개가 있었다.
“이건 비현실적이어도 너무 비현실적인데요? 개방의 거지들은 절대 일 안 해요.”
“맞아요. 죽는 것보다 일하는 게 싫어서 비럭질하는 놈들이잖아요.”
황보정석과 남궁민이 불만을 계속해서 토해냈다.
“자자! 진정 좀 해봐. 내가 동생들이 하는 생각을 못 했을 것 같아? 다 방법이 있다니까.”
“어떤 방법인데요?”
“호가호위(狐假虎威).”
다른 이들이 고개를 갸웃거릴 때, 제갈선우는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나겁개가 있는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크흠!”
헛기침 소리에 나겁개가 잠에서 깼다.
눈을 비비며 슬쩍 올려다보니 그가 아는 사람이 서 있었다.
“오룡단의 제갈선우?”
“네, 저 제갈선우 맞습니다.”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는가.”
“일단 호남성 분타로 저희를 좀 안내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웃으며 말하지만 제갈선우의 눈꼬리는 미동도 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무슨 일로 호남성 분타를 찾는 건지 말을 해보게.”
“찾을 만한 일이 있으니까 찾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그 일이 뭐길래 이러는 건지 묻고 있는 것 아닌가. 자네가 안내하라고 하면 나는 군말 없이 안내해야 하나? 내가 자네보다 배분이 위인데?”
배분이란 단어에 강세를 준 걸 보면 나겁개는 지금 선배 대접을 제대로 해주는 걸 바라고 있었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지금은 절대 그를 선배로 대접할 수 없었다.
지금은 기세를 타야 할 시기였다.
선배 대접을 해주면 의기양양할 테고 그러면 제갈선우가 뜻한 바를 이루기 힘들게 된다.
제갈선우는 승리자가 되기 위해 계속 공세를 이어갔다.
“제 뒤에 누가 있는지 아실 만한 분이 이렇게 어깃장을 계속 놓아도 되겠습니까?”
나겁개는 오룡단만큼이나 백서휘를 더 잘 아는 사람이었다.
백서휘의 일을 방해하려면 팔다리가 부러질 각오를 해야만 했다.
“그, 그게……. 아니! 내가 언제 어깃장을 놓았나! 어? 이거 진짜 안 되겠어.”
제갈선우와 대치 중인 걸 본 거지들 몇몇이 나겁개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우리 왕초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리 겁박하는 겁니까?”
“이거 안 되겠네. 제가 보고 한번 해볼까요? 호남성 분타 소속의 거지들이 일을 방해하는 바람에 일을 그르쳤다고?”
거지들은 ‘보고’란 말에 움찔했다.
그들은 제갈선우가 사실상 오룡단의 단장이고 뒤에 누가 있는지를 잘 알았다.
거지들을 하나둘씩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말하고 다른 곳으로 사라졌다.
“분타주님 이름은 맨 위에 올려놓겠습니다.”
“맨 위? 어디에?”
“보고서.”
직접적으로 자기 이야기가 들어갈 수밖에 없겠단 생각에 나겁개는 어느 순간 정신 줄을 놓아버렸다.
“으으으!”
백서휘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일이 지워지지 않고 남아서 나겁개를 괴롭혔다.
꽤 오래전 일인데도 불구하고 그때 다쳤던 부위들이 환상통처럼 아파져 왔다.
그때 제갈선우가 최후통첩을 날렸다.
“어떡하시겠습니까? 안내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그대로 저는 돌아갈까요?”
“아, 안내해주겠네.”
겁을 지레 먹은 나겁개는 오룡단을 취죽교 밑으로 안내했다.
“여기가 호남성 분타라네.”
“호남성 분타 소속으로 장사에서 활동하는 거지들은 몇 명이나 있습니까?”
“그건 왜 묻는 건지 모르겠군.”
“두 번, 세 번 말해야만 제 말을 들어주시네요. 이거 일부러 이러는 거라고 보면 되겠습니까?”
제갈선우의 뒤에서 다른 오룡단원들이 눈에 힘을 주고 나겁개를 노려봤다.
“아, 아니네. 절대 아니야. 내 요즘 귀가 안 좋아서 그러네. 귀지를 파야 하는데 팔 시간이 없었거든.”
“앞으로는 주의 좀 해주시길 바랍니다.”
“아, 알겠네.”
“몇 명인지 모르겠지만 이곳 소속이고 장사에서 활동하는 거지들 모두 이리로 오게 하십시오.”
“왜 그래야 하는지는 이제는 알려줄……. 때가 안 된 것 같군. 지금 말고 일이 어느 정도 진행되고 알려줘도 되네. 하하하!”
나겁개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떡 진 머리를 긁적거렸다.
비듬과 벼룩, 이가 한데 섞여 어깨와 그의 목에 떨어졌다.
비위가 그다지 강하지 않은 모용진은 헛구역질을 연신 했다.
그리하여 나겁개의 호출에 장사에서 활동하는 개방 소속 거지들이 전부 모였다.
“이제는 진짜 알려줄 때가 된 것 같은데…….”
제갈선우는 깔끔히 나겁개를 무시하고 거지들에게 소리쳤다.
“내일 아침 묘초시(卯初時, 오전 5시~6시)가 되기 전에 관주님의 집을 짓는 곳으로 모이십시오. 이건 권유나 청유, 권면이 아닙니다. 반드시 나오십시오. 그날 오지 않는 자에겐 안 좋은 일이 일어날 수 있으니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무슨 사고라도 일어나는 건가? 아니면 혼내려고? 나만 좀 알려주게. 제발 부탁이야.”
나겁개가 알려주지 않으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질 기세로 말했다.
“그건 내일 집결 장소로 오시면 알게 될 겁니다.”
제갈선우는 냉정하게 말한 후 오룡단이 있는 쪽으로 돌아갔다.
“학무관으로 가자.”
제갈선우의 방에 모인 오룡단원은 취죽교에서는 하지 못할 말을 풀어놓았다.
“근데 진짜 이래도 괜찮을까요?”
“남궁 동생은 왜 이렇게 걱정이 많아?”
“들켜서 혼날 수도 있잖아요.”
“관주님 이름을 직접적으로 판 것도 아니고 그냥 어떤 명령이 내려진 척, 뭔가 있는 척한 것뿐이잖아. 그러니 별일 없을 거야.”
“제발 그래야 하는데…….”
남궁민이 간절한 얼굴로 하늘을 보며 기도했다.
황보정석이 의문을 품은 표정으로 물었다.
“근데 돈은 왜 필요하다고 하신 겁니까? 거지들 품삯 주려고요?”
“이 작전이 실패해도 별 타격을 받지 않으려면 많이는 아니더라도 돈을 좀 써야 돼.”
“‘어디에’요?”
“그건 내일 인시(寅時, 새벽 3시∼5시)에 돈을 들고 내 방문 앞에서 기다리면 알게 될 거야.”
제갈선우는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 모두에게 축객령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