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114화
“먹으면 피로랑 통증이 사라지고 힘이 세진 느낌이 들어. 거기다 행복감이 장난 아니게 많이 느껴지는데 시간까지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아서 그걸 먹으면…… 하아~”
깡마른 중독자가 꿈결 속에 있는 듯한 얼굴로 빙독을 설명했다.
약방 주인은 허허 웃으며 그 얘기를 다 들어주었다.
“그런 약이 진짜 있다면 나도 좀 주게.”
“아니, 지금 그 약이 실제로 있으니까 영감한테 만들어달라고 하는 거잖아.”
“그런 약이 진짜 있으면 자네가 요구했을 때 진작 만들어줬겠지. 나도 돈 버는 일이지 않은가.”
“몰래 숨겨놓고 그 약 먹는 거 아냐? 응? 그런 것 같은데?”
중독자가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이리저리 살피더니 약방을 뒤집어엎기 시작했다.
“이, 이보게! 그러면 안 되네!”
“봐봐, 여기 있잖아.”
“그건 자네가 말하는 그 약이 아니야!”
“돈은 여기 있어.”
“그 약은 남자가 먹으면 안 되는 약이네. 어서 이리 주게.”
“안 믿으니까 돈이나 받고 꺼져. 그리고 다음에 올 때 또 이 약을 찾을 거니까 많이 만들어 놔. 알았어?”
중독자는 약을 한 움큼 움켜쥐고 약방을 떠났다.
“도대체 무슨 약이길래 하나같이 찾아와서 이런 짓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약방을 아예 닫든가 해야지.”
멀찍이서 지켜보던 백서휘와 제갈선우가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조금 전에 본 게 그나마 정상에 가깝다는 거지?”
“중독자들은 판단 능력이 흐려지는 데다 어서 약을 찾아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빠져서 패악스러운 짓을 하는 경우가 많답니다.”
“패악스러운 짓?”
“조금 전처럼 행패를 부리다가 약방 주인을 때려죽인 일도 있었고, 약을 가져오라고 인질극을 벌이다가 인질을 죽이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빙독에 중독된 이들은 장사 곳곳에서 보였다.
약을 못 하게 된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들의 패악은 더욱 심각해져만 갔다.
“중독된 놈들을 원래대로 돌릴 방법은 없는 건가?”
“그건 저보다는 당가 출신인 당기준이 더 잘 알 겁니다.”
“음…… 돌아가면 당기준에게 내 방에서 보자고 전해.”
“네.”
방으로 돌아와 쉬고 있는데 문 옆에 달아놓은 자그마한 종이 울렸다.
“누구야?”
“접니다, 당기준. 부르셨다고 해서 왔습니다.”
“들어와.”
당기준이 방 안으로 들어오더니 허리를 꾸벅 숙여 백서휘에게 인사했다.
“앉아.”
“네.”
당기준은 백서휘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묻고 싶은 게 있어서 불렀다.”
“뭐든 편히 물으십시오.”
독령으로 인해 죽을 뻔한 걸 구해 줬기에 당기준은 백서휘에게 높은 충성도를 보였다.
“빙독에 중독된 이들을 어떻게 하면 원래 상태로 되돌릴 수 있지?”
“……저는 사람을 죽이는 법은 배웠으나, 살리는 법을 배우지는 못했습니다.”
“당가에 연락해도 같은 대답이 나올까?”
“완전히 원래대로 되돌리지는 못하더라도 빙독에 찌든 자를 치료하는 기술이 있긴 하니 대가를 지불하면 당가에서 중독자들을 치료해 줄 겁니다.”
“그럼 당가에 도움 요청을 한다? 그래도 되지?”
당기준이 얼굴을 굳힌 채 잠시 침묵했다가 입을 열었다.
“……순도 높은 빙독을 만들 줄 아는 곳은 모두 비슷한 해결법을 가지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나랑 조금이라도 연이 닿는 건 당가밖에 없긴 하잖아.”
“그렇긴 합니다만…….”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지만 당기준이 백서휘를 막을 권리는 없었다.
“그럼 당가에게 의뢰를 할게.”
“예…….”
백서휘는 나겁개를 통해 전서응을 날려 당가에 도움을 요청했다.
* * *
한 달 후.
‘당가(唐家)’라는 글자가 커다랗게 적힌 마차들이 호남성 장사에 들어섰다.
그 마차 중 하나에는 당가의 소가주이자 이번 장사행의 책임자인 당진우가 타고 있었다.
그는 편안히 앉아 줄칼로 초록빛 손톱을 열심히 손질했다.
“이번 의뢰로 우리가 받아야 할 대가가 너무 작은 것 아닙니까?”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겨 있던 당진우의 심복이 툭 던지듯 말했다.
“절대 그렇지 않아. 사도련과의 싸움이 완전히 종전되면서 얻을 유형적, 무형적 가치가 더 크거든.”
“이해가 안 갑니다.”
“본가에서 운영하는 표국을 생각해 봐라. 휴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도련이 어떤 식으로 나올지 몰라 그들 영역으로 갈 때면 다섯 이상의 고수를 운용하고 있어. 그 다섯의 고수를 사도련의 영역에 갈 때 절반만 운용할 수 있으면 어떻게 될 것 같냐?”
“인력에 여유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래, 여유가 생기면 그 잉여 인력들을 다른 표행에 보낼 수 있게 되지. 당장 표국만 해도 이래. 그런데 상단은 어떨 것 같아? 사도련의 영역인 곳에서 우리 영역에 있을 때 더 가치가 있는 물건을 발견했다고 쳐보자. 상행의 책임자는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물건을 사지 못하고 주저하는 경우가 많아. 이제 그런 경우가 사라진다고 생각해 봐라.”
“확실히 이득 되는 일이 많아지긴 하겠군요. 그런데 소가주님이 말한 모든 것들은 그자가 승낙해야 얻을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그렇긴 하지.”
“그리고 그자가 진짜로 사도련주보다 강한지는 아직도 미지수이고요.”
“제갈세가의 분석에 따르면 그자가 더 강하다고 한다. 우리는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지.”
“강하다는 게 종전 협정에 도움이 되긴 합니까?”
“확실하게 도움이 돼. 첩보에는 그자가 사도련주에게 강한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하거든. 무력이 앞서기도 하고 다른…… 아, 이건 말할 수 없겠다.”
당진우는 사도련주의 딸이 백서휘 밑에 있다는 말을 삼켰다.
“저한테도 기밀일 정도면 엄청난 게 그자에게 있긴 한가 보군요.”
“그래.”
“음…….”
당진우의 심복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계속 지었다.
“불만이 아직 남아 있구나.”
“솔직히 말하면 저는 이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무림맹 전원보다는 본가만 직접적인 이득을 얻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네 말이 맞다. 무림맹 차원에서 그자에게 해야 할 제안인 게 맞긴 해. 그런데 네가 모르는 게 있다.”
“제가 뭘 모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쪽에서 우리가 원하는 대로 종전에 도움을 주면 고맙다고 하면서 대가를 받으면 돼. 만약에 이 대가를 주지 않는다? 그러면 그냥 자리에서 일어나거나 네가 말한 대로 가문에 직접적인 이득이 되는 걸 받으면 그만이야.”
“아……!”
“우리는 손해 볼 게 아무것도 없어. 빙독 중독자를 치료하는 기술? 가지고만 있어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기술이야. 그런데 지금 그 기술을 펼침으로써 우리는 큰 이득을 얻게 된다. 그게 중요해.”
“확실히 묵혀두는 것보단 조금이라도 이득을 얻는 쪽이…….”
그때 당진우와 그의 심복이 타고 있는 마차가 멈췄다.
“학무관이란 곳에 도착한 모양이다.”
“아닐 수도 있으니 확인 한번 해보겠습니다. 소가주님은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주십시오.”
“그래.”
당진우의 심복은 마차에서 내려 주위를 이리저리 살피다가 마차 문을 두드렸다.
“도착한 거 맞습니다.”
“그럼 내려야겠구나.”
당진우의 심복이 마차 문을 열자 당진우가 천천히 밖으로 걸어 나왔다.
“안으로 들어가자.”
“네.”
당가의 다른 인물들과 백서휘가 얘기하는 중이었다.
그들 중 하나가 당진우를 발견했다.
“여기 있는 이분이 책임자이십니다.”
“오랜만이군.”
“오랜만에 뵙습니다.”
백서휘는 당진우를 위아래로 훝어봤다.
그는 예전에 당진우가 이상야릇한 시선을 보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번 의뢰 대가에 대한 협의는 언제 할지 알 수 있겠습니까?”
“여독도 안 풀고 협의해도 되나?”
“건강한 무인에게 쌓일 여독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 당장 협의해도 괜찮습니다.”
“그럼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를 바로 해보자고.”
백서휘와 당진우는 학무관 안에 있는 회의실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회의실에 도착한 두 사람은 원형 탁자를 가운데에 두고 의자에 앉았다.
“원한다는 그 대가를 말해 봐.”
백서휘는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으로 당진우를 바라봤다.
당진우는 옷을 입고 있음에도 벌거벗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사도련주 종리혁을 죽여주십시오.”
“농담할 기분 아니니까 제대로 말해.”
그제와 어제 방효성의 도움을 받아 빙독에 중독된 놈들을 가둬놓느라 고생 꽤 한 탓에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아, 죄송합니다. 농담하기에 좋은 때가 아니었군요.”
무림맹 소속의 모두가 원하는 걸 말했지만 단번에 거절당했다.
당진우는 아쉽다고 생각하며 두 번째로 원하는 걸 말했다.
“사도련과 종전 협상을 하는 것에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종전 협상? 그걸 왜 나한테 부탁하는 거지?”
“사도련에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까.”
“별로 그렇지도 않은데?”
“관주님 밑에 사도련주의 딸이 일한다는 걸 다 알고 찾아온 겁니다.”
영원히 모르는 건 아니더라도 좀 더 늦게 알게 될 사실이라 생각했기에 솔직히 좀 놀랐다.
“그래?”
백서휘의 한쪽 입꼬리가 부드럽게 말려 올라갔다.
중원에 사는 절대다수의 양민들이 너무 많이 고통스러워해서 안 그래도 종전 협상을 끌어내려고 하긴 했다.
그런데 이들의 제안을 들어주는 식으로 종전 협상을 끌어내고 싶지는 않았다.
빙독 중독자로 인해 아쉬운 상황이라고 그냥 막 제안을 들어주면 무림맹이며 사천당가가 백서휘 자신을 졸(卒)로 볼 수도 있었다.
‘내가 만만치 않은 놈들이란 걸 보여줘야겠어.’
백서휘는 ‘생떼’ 비슷한 걸 부리기로 마음먹었다.
“뭐, 좋아, 그러면 대가를 협의하는 일은 여기서 끝내도록 하지. 너는 그 자리에서 일어서서 그대로 나가면 돼.”
“예?”
“내가 아쉬운 상황이고 하니 네놈들의 제안을 무조건 받아들이라는 거잖아. 내 밑에 종리혁의 딸이 있다는 이유로.”
“그,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뭔데?”
“제안을 무조건 받아들이라는 게 아닙니다.”
“그럼?”
“관주님께서 사도련주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으니 좀 도와주십사하고 도움을 청하는 겁니다.”
“도움을 청하는 거라고? 음…….”
당진우는 백서휘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저자세로 나왔다.
당가에 부탁을 했는데도 자신이 더 우위에 있는 상황이라니.
자신이 역으로 이놈들을 뜯어먹어도 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고순도의 빙독을 만드는 곳은 다 빙독에 찌든 몸을 어느 정도 치료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했지?’
독점기술이 아닌 만큼 이놈들의 제안이 맘에 들지 않으면 거절해도 상관없었다.
“중독된 놈들 돕는 것 말고 내가 하나 더 받아야겠다.”
“하나 더 받으시겠다니요?”
“중독자들 치료해 주는 거랑 종전 협상의 가치를 비교하면 내가 너무 손해가 막심하잖아? 그래서 하나를 더 받겠다고.”
“예?”
“난 손해 보고 못 살거든.”
“그, 그러면 어떤 걸 더 받으시겠다는 건지?”
“뭐가 좋을까…….”
그때 백서휘의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기관진식만으로는 누나 가족을 보호하는 게 부족해. 무인이 아닌 사람도 다룰 수 있는 암기를 받아야겠어.’
백서휘는 당진우와 슬쩍 눈을 마주쳤다.
당진우는 일이 이렇게 전개될 줄 몰랐기에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천왕침통(天王針筒)이란 게 무인이 아닌 사람도 쓸 수 있다고 들었는데?”
“그건 가문 밖으로 나오면 절대 안 되는 암기입니다.”
“됐고. 천왕침통 내놔.”
“절대 안 되는…….”
“내놔.”
당진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